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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에 해당하는 글들

  1. 2014.10.21  2월 14일 시레토코 - 뒤돌아 볼 수밖에 없는 6
  2. 2014.10.17  2월 14일 시레토코 - 멀었던 두 시간의 결합 2
  3. 2014.10.15  2월 14일 시레토코 - 비경으로 향하는 길 4
  4. 2014.10.13  2월 13일 시레토코 - 호텔 구경과 오로라 판타지 4
  5. 2014.10.08  2월 13일 시레토코 - 분에 넘치는 숙박 14
  6. 2014.10.06  2월 13일 시레토코 - 홋카이도의 겨울 6

 

 

바람이 별로 없는 편이지만 멀리 라우스 산맥 쪽은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눈을 머금어 무거운 구름이 힘겹게 산을 넘어가는 모습이, 사람에게는 더없이 신비로워 보인다.

수십 번 이곳을 찾은 일행들도 좀처럼 자리를 뜨지 않고 동영상과 사진을 남기며 서 있다.

가장 커다란 DSLR을 든 본인이 제일 먼저 가방에 카메라를 집어넣을 정도로.

 

일행분들이 나한테 운이 좋은 사람이라 함께 오게 되어 고맙다고 말을 한다.

하루만에 이 풍경을 보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 일종의 복을 몰고 왔다고 생각해 주는 듯.

당연히 이쪽이야말로 육중한 덩치에 허둥대는 본인을 잘 커버해 주는 것만으로 고마울 따름이지만.

 

 

 

사진 찍으며 이동하려뎐 일행 분이 미끄러져 넘어졌다. 호수 위라서 눈이 비교적 적게 쌓인 평탄한 곳이지만

오히려 그 평탄성 때문에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바닥은 얼음이라 스틱을 지지할 수 없고, 다리로 일어나려 해도 스키가 미끄러질 뿐.

 

본인 역시 오호 첫 탐험 때 신나게 넘어져서 미친듯이 악을 쓴 기억이 아직 생생히 남아있기 때문에 웃을 일은 아니다.

근처에 다가가서 손을 붙잡아 주니 어렵지 않게 일어날 수 있다. 세삼스럽게 협동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는 시간.

내가 넘어졌던 곳은 수풀이 우거진 곳이라 도와주러 올 수 없었긴 했지만.

 

 

반대로 이야기해서 너무나 운이 좋았기에 그 가치가 강렬하게 다가오지 않는 단점 역시 나타나는 듯 하다.

 

시레토코에 있어서만큼은 그렇게 비가 많이 온다는 여름에도 한 번만에 화창한 날씨를 경험했고

정상 보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겨울의 라우스산 모습도 이렇게 온전하게 담아내고 있으니

왠지 언제 찾아와도 이런 모습쯤은 쉽게 볼 수 있는 것 처럼 착각하기 딱 좋은 편이다.

 

하지만 언젠가 흐린 하늘에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는 라우스산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제서야 이 날의 어마어마한 행운을 어째서 좀 더 황홀해하지 않았을까 후회하게 되지도.

 

 

 

풍경에 매료되어 꽤나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가이드분이 시계를 들여다보며 지금 출발해야 해 지기전에 밑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하신다.

 

보통 등산이라면 발목의 부담은 둘째치고 내려갈 때 체력적인 면에서 좀 편하리라는 생각도 할 수 있겠지만

이곳의 하산길은 올라가며 봤듯이 자동차 통행을 위해 다져놓은 길이라 눈도 많이 치워놓은 상태에다 경사도 상당하다.

 

프로 수준의 스키어라면 정말로 스키를 타고 순식간에 내려갈 수도 있겠지만

나같은 사람이 미끄러져 내려가다간 커브에서 델마와 루이스를 흉내낼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천천히 걸어서 내려가야 한다.

 

 

 

겨울이지만 최소한 저 휴게소 사용만 가능하게 해 놨다면 트래킹이 월등히 쉬워졌으리라 생각한다.

하다못해 화장실이라도 쓸 수 있으면 하지만, 주위 상태를 보면 폐쇄하는게 너무나 당연한 처사이긴 하다.

애초에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최대한 통제를 하는 곳인데, 겨울에 따뜻한 난로를 피워 곰이나 여우를 불러들일수는 없으니까.

 

천상의 풍경처럼 새하얀 모습과는 달리 봉긋봉긋한 언덕도 바닥의 형태를 알 수 없어 항상 주의를 기울이며 걸어야 한다.

눈 때문에 별로 높아보이지 않는 조그만 다리도, 위에 쌓인 눈의 두께를 보면 섬뜩해 진다.

저기서 미끌어져 떨어졌다간 구조대를 부르지 않는 한 혼자 올라올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보인다.

스키를 신은 채로 40cm 가까이 푹푹 꺼지는 눈 속인데, 저기서 떨어지면 아마 1m 넘게 눈 속에 파묻힐 테니까.

 

 

 

위험할수록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자연의 매력인지 사람의 오만인지.

 

가이드분이 조심스럽게 바닥을 확인하며 만드는 길 위를 힘겹게 따라가는 상황에서도

주위를 둘러싼 모든 풍경이 마음을 차분하게 흥분시키고 있다. 내가 지금 이런 곳을 걷고 있다는 벅찬 만족감이.

 

사하라 사막 때도 그랬듯이,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인과의 흐름으로 만들어 진 지형 지물 속에서

사람이 혼자 신나고 감동받아 날뛰는 모습은 뭔가 실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지구가 생명체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저 개미같은 것들이 혼자서 꼬물락 거리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이해가 될려나.

하지만 어찌보면 극히 자연스러운 이런 풍경 하나하나에 감동을 받는 사람이기 때문에 지루해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눈길을 걷는 매 시간마다 느끼고 있지만 어쩌면 이렇게도 좋은 타이밍에 시레토코를 찾을 수 있었는지 신기할 뿐이다.

라우스산을 포함한 시레토코의 척추가 되는 산맥 전부가 이렇게 또렷히 보이는 순간을 두 눈으로 감상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까.

 

여름엔 조심한다고 해도 사람 등쌀에 시달리는 곳인데, 그 흔적이 사라지고 여우 발자국만이 남아있는 설원은 좀 더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는 느낌이다.

 

이런 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으면 사하라를 함께 달렸던 사람들이 문득 생각난다.

적당히 힘든 트래킹이라 아무하고나 함께 가자고 권할 수는 없는 곳이지만, 그 사람들이라면 분명 이 곳을 좋아하리라는 확신이 생긴다.

 

 

 

한창 밝은 시간이지만 특히 산 위는 해가 빨리 지기 때문에 결코 이른 시간이 아니다.

잠깐 스키를 벗고 휴식을 취하면서 제설차가 세워놓은 눈벽 너머를 쳐다본다.

원래는 저 평원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가이드분이 설명해 주신다.

 

자연유산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이 곳 아이들이 산 아래 라우스 학교에 통학하기도 했다고.

겨울에는 아무래도 살아갈 방법이 전혀 없어서 대부분 마을 쪽으로 내려와서 지냈다고 한다.

출입이 통제되던 때, 이 곳 사람들은 집을 전혀 허물지 않고 그대로 떠났지만

시레토코의 자연은 손쉽게 그들의 흔적은 지워버리고 여전히 태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겨울에도 저 라우스산을 등반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저기에 필적할만한 난이도를 가진 산이 무엇일까 궁금하다.

바다와 접한 해발 1600m 짜리 산이라 적설량이 워낙 많은데다가, 주위에 활화산이 있는 만큼 정상쪽이 매우 가파른 형태라서

히말라야 등반하려는 팀들이 연습하는데 적합할 정도라고 하니 과연 어떨까 싶다.

 

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주위에 어떤 피난처나 산장도 없어서, 겨울 등정은 당일치기로 할 수 밖에 없다는 점도 굉장한 난점.

그 위용만큼이나 사람을 쉽게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본인이 육체파에다가 등산을 즐기는 활동적인 성격이라면 아마 도전 정신이 불끈불끈 솟아오를 법 한데.

 

 

 

묵묵히 길을 걸어 내려가면서도 다들 몇 번씩이나 뒤를 돌아보며

구름이 걷혀있다면 여지없이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앞으로 다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라우스산의 모습을 담는다.

탁 트인 설원 아래서나, 건장한 침염수 사이에서나 저 산의 정상은 여전히 놓치기 아까운 소중한 풍경이다.

 

쉽게쉽게 돌아갈 줄 알았던 하산길은 이렇듯 화창한 날씨가 오히려 발목을 잡아 사람을 쉽사리 떠나보내지 않는다.

이 곳을 오면서 나도 미러리스로 한 번 가봐야 하나 생각이 들 정도로 DSLR 의 덩치에 힘들었지만

이런 풍경이 눈 앞에 들어오면 일단 '그래도 좋은 카메라라 모자란 실력을 커버해 준다'는 생각에 뿌듯한 기분도 든다.

 

자전거 여행 때도 편의를 위해 컴팩트 카메라를 들고 갔다면, 돌아와서 평생 결과물에 아쉬워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묵묵히 내려가다가 수풀 사이에서 뭔가 이상한 모습이 보여서 일행을 세워 관찰해 본다.

꽤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 인공물이다.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아서 사진을 촬영한 후 고화소를 이용한 확대로 모습을 보여주니 가이드분이 알아차린다.

예전 사람이 살던 때 지어졌던 조그마한 공장의 굴뚝이라고. 가내수공업 정도의 작은 생필품 등을 만는 곳이었는데

저것이 굴뚝 윗부분이라고 하면 지금 보는 광경이 참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집 전체가 전부 눈 속에 파묻혀 있다는 뜻이니.

 

가이드분이 용캐 나무 사이에서 저걸 찾아냈다고 웃는다. 자주 오지 못하는 몸이다 보니 신경을 좀 곤두세워서 주위를 살펴보는가 보다.

 

 

 

가이드분이 웃으면서 말을 꺼낸다. 사실 내가 걷는 스키를 타고 트래킹하는 거 처음엔 좀 걱정 되었다고.

하지만 생각보다는 훨씬 빨리 적응을 해서 스노우 슈즈를 건네주지 않아도 괜찮았다고 하신다.

 

가이드분은 스노우 슈즈가 그렇게까지 편한 건 아니고, 나처럼 무게가 나가는 사람은 어차피 푹푹 가라앉기 때문에 별 효과가 없을거라 하시지만

그것보다도 일단 스노우 슈즈는 일종의 이단처럼 생각을 하시는 듯 하다. 이곳은 걷는 스키로 걸어야 제맛이라는 경험담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본인은 단시 스노우 슈즈도 신어본 적이 없어서 그냥 궁금할 뿐인데, 아무래도 걷는 스키로 이곳을 정복한 것에 만족감을 느끼면 되는 것인가 보다.

일단 처음 신은 것이 걷는 스키다 보니 중간에 힘들어서 갈아신었다고 하면 왠지 시레토코에 패배감을 느끼게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한창 내려가는데 젊은 남녀 커플이 밑에서 올라오고 있다. 가이드분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일단 가볍게 인사만 하고 지나쳤는데, 가이드분은 걱정이 되는지 자꾸 뒤를 쳐다본다.

사실 이곳의 겨울 트래킹은 허가받은 날짜 안에서라면 가이드 없이도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앞서 경험했듯 숙련자가 아니고서는 루트 잡기도 힘들고, 눈 밑의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에 권장하지는 않는다.

 

이 곳 가이드끼리는 모두 안면식이 있기 때문에 가이드가 함께 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방금 올라간 두 사람이 숙련자라고 해도 해가 지기 전까지 2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대체 왜 지금 이시간에 올라가고 있는지 다들 의아한 표정이다.

 

어떤 숙련자라도 해가 지고 나서 오호를 돌아다니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 가이드분은 아무래도 계속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꼼꼼한 성격상 하산 후 오늘 올라간 사람 명단을 조사해 보실 듯 한데, 별 일 없기를 기원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하산 때문에 긴장이 풀린 탓인지 조금씩 누적된 피로가 몸을 무겁게 하고 있지만 그럴수록 천천히 조심해가며 발걸음을 옮긴다. 

 

홋카이도에서 날씨가 휙휙 변하는 건 나름 익숙해졌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시레토코의 대자연 속에서 경험하는 격변은 또 각별하다.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아 뉴스레터(?)의 장면처럼 아름답게 내려앉는 눈꽃이 온 하늘을 뒤덮어 버리는 풍경은 참으로 절경이다.

아마 트래킹 초반부터 이런 눈이 팍팍 내렸다면 기가 팍 꺾였을 수도 있겠지만

푸른 하늘을 마음껏 감상하고 마음의 여유를 가질 만한 즈음에서부터 이렇게 내려주니 오히려 반가운 기분도 든다.

 

든든한 가이드분과 몇 년동안 이곳을 찾아 오는 단골 일행분 덕분에 두려움도 없이 묵묵히 먼 곳을 바라보고만 있다.

다들 비슷한 기분인 듯 대화도 없이 한동안 역동성과 고요함이 묘한 대비를 이루는 시간을 조용히 즐긴다.

 

 

 

해가 워낙 빨리 지기 때문에 이제부터 슬슬 다시 둘러보기 시작해야 한다는 가이드분의 말에 따라 다시 장비를 챙긴다.

물이 좀 부족하긴 하지만 어차피 남은 건 오호 중 가장 크고 휴게소에서 가장 가까운 첫 번째 호수만 돌아보면 되니까.

 

장비를 챙기고 막 떠나려는데 세상을 연기처럼 뒤덮던 그 눈발은 어디가고 순식간에 다시 화창한 하늘이 펼쳐진다.

홋카이도에 도착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경험했던 일이지만 정말 놀라지 않을 틈을 주지 않는다.

 

본인은 그냥 날이 맑아졌다는 정도였지만 가이드분은 조금 전보다 더 흥미진진한 표정이다.

구름이 점점 옅어지는 것을 보니 운이 좋으면 라우스 산봉우리가 보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겨났기 때문.

겨울에는 맑은 날 라우스 산의 꼭대기를 보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데, 이번에 보게 된다면 첫 참가인 나에게는 굉장한 행운이라고 한다.

 

 

 

첫 번째 호수로 향하는 길은 겉보기에도 쉽지 않다. 생각보다 가파른 경사에다가 수풀이 빡빡해서 스키를 게걸음으로 옮길 공간도 부족하다.

가이드분은 정해진 코스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상황에 맞게 루트를 만들어 가기 때문에 한동안 고민을 하신다.

결국 약간 두르더라도 덜 위험한 곳으로 가기로 한다. 우리와 엇갈린 또 한 팀은 걷는 스키가 아니라 스노우 슈즈를 신고 있기 때문에 경사 높은 곳으로 용감하게 전진중.

 

스키라는 게 그냥 슥슥 밀기만 하면 힘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평지에서 스무스한 이동을 위해서는 평소 걷는 것 처럼 발을 지면 위로 띄울 수 없는 점이 오히려 어색하게 작용해서

허벅지 뒤쪽에 굉장한 힘이 가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전신운동이라 해도 될 만큼 체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키를 신지 않고 일반적인 신발로 걸어다니는게 편한가 하면 그건 절대로 아니다.

애초에 스키라는 게 설원을 편리하게 이동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니까.

걷는 스키는 일반적인 스키보다 폭이 넓고 길이가 짧은 편이라 눈 위를 걸어도 몸이 덜 빠지는 장점이 있다.

그냥 신발로 이런 곳을 걸어다니면 기본적으로 무릎 위까지는 푹푹 빠지게 되니, 그것이 얼마나 힘들지는 설명 할 필요가 없을 듯.

문제는 본인 체중이 너무 강렬해서 앞의 두 분이 발목 정도까지 빠지며 스키로 밀고 나간다고 하면

나는 거의 정강이까지 잠겨서 이동하는 느낌이라 상대적으로 체력 소모가 심한 편. 그러니까 자업자득이라는 말이다.

 

 

 

고생 좀 해서 거친 수풀을 빠져나오니 드디어 첫 번째 호수에 도착한다. 한 쪽이 바다와 인접해 있고 휴게소에서 가장 가까우며 크기도 가장 큰 호수.

여름에는 불곰 출몰로 인해 첫 번째 호수만 둘러볼 수 있었기에, 이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과거와의 접점이 느껴지는 듯 하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나무로 된 고가도로 위에서만 걸어다니며 사진을 찍던 본인이, 그 울창하고 신비로운 매력을 내뿜던 호수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높이 3~4미터의 목책로 주변에는 전기 펜스가 설치되어 있어 불곰이 접금하지 못한다. 그 위에서 바라보는 시레토코의 풍경에 완전히 매료되어 다시 이 곳을 찾게 되었다.

 

 

 

여름 목책로 위에서 찍었던 사진. 1년 간의 자전거 여행 중에서도 단연 시선을 빼앗기는 장관 중의 장관이었다.

시레토코에서 가장 높은 라우스 산과, 드레스처럼 구름을 두르고 있는 산맥과 온갖 생명력으로 흘러넘치는 오호의 모습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이란 게 이렇게도 멋진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저절로 들게 만들어 주곤 했다.

 

한 시간에 한두 번밖에 버스가 오지 않는데다가 마지막 입장 시간도 매우 이른 편이라

관광 버스나 렌트카를 이용하지 않으면 느긋하게 즐기기 쉽지 않은 곳이어서 그 짧은 시간이 그토록 아쉬울 수가 없었다.

 

 

 

지금은 당연히 저 목책로 위에도 눈이 쌓여있어서 출입은 금지되어 있다.

여름의 목책로 높이와 현재를 비교해 보면 눈이 어느 정도 쌓여있는지 짐작이 갈 듯.

그 웅장하던 생명력이 모두 눈속에 갖혀버린 채 다시 봄을 기다리는 모습은 신비롭기 그지없다.

 

이 정도 수고를 들이지 않으면 이런 풍경을 감상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또 문명인의 생활이란 것이고.

호수를 가로질러 나 있는 북방여우의 가지런한 발자국을 보니

그 녀석도 얼어붙은 호수를 지나가며 화려했던 여름의 회상에 젖어보기나 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동행 분은 도쿄에서 살고 있다고 하는데, 매년 삿포로까지 7시간 가까이 기차를 타고 홋카이도로 온 다음

바로 삿포로에서 버스를 타고 이곳까지 오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고 한다.

 

이 곳을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라면 매우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나 같은 사람이라면 아마 도쿄에서 이곳으로 이사올 계획을 짜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한국이나 일본이나 아름다운 산과 들은 조금만 찾아보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지만

여름엔 불곰이 거닐고 겨울엔 얼어붙은 호수를 거닐 수 있는, 사람이 살지 않는 바다와 근접한 산맥 끝자락 풍경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겨울엔 그렇게도 보기가 힘들다던 라우스산의 정상이 아주 조금씩이지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아직 주위엔 구름이 많아서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지만 이 정도 모습만이라도 일행들은 열심히 사진 찍기 바쁘다.

한국에 비해 거칠고 가파른 일본의 산은 산맥의 아름다운 곡선보다 강한 힘이 느껴지는 굵은 선이 매력으로 다가온다.

 

눈이 얼마나 많이 쌓였는지 상층부는 수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설산의 위용을 자랑하는데

사실 라우스산은 출입 통제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도 등반이 가능하다. 경험을 쌓은 전문가가 아니면 매우 위험하긴 하지만.

 

 

여름의 그 압도적인 생명력을 모두 평탄한 눈밭으로 덮어버리는 겨울의 모습은

이 곳에 한 번 이상은 와서 원래의 모습을 느껴본 뒤에야 비로소 그 매력이 배가 되는 느낌을 준다.

 

불규칙적인 지형 속에 사냥꾼처럼 곳곳에 숨어 있는 습지와 그 주변을 가득 메운 수풀을 모두 동등하게 만들어 버리는 겨울 시레토코는

거대한 힘으로 밀어버린 듯 깨끗한 설원 속에 가지런한 여우의 흔적만을 남긴 체 느릿한 숨을 내쉬고 있다.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말을 워낙 많이 듣고 자라는 곳에서 살다 보니 그 개념에 대해 꽤나 흐리멍덩해 진 상태였는데

이 모습을 보면 그 사계절이란 게 축복은 축복이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바다와 마주닿는 쪽의 산들은 서서히 깎아지른 듯한 정상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덩달아 일행들의 셔터도 바빠지고 있다.

꼭 가장 높은 산만이 인상적이란 개념은 없고, 맨 끝의 산부터 라우스산까지 형제처럼 보이는 봉우리들이 위용을 뽐내는 모습은

어떤 강력한 인연으로 맺어진 형제자매가 어깨를 맞대고 서 있는 듯한 결합감을 느끼게 한다.

 

카메라를 꺼내고 넣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본인은 이제까지 조금씩 부담감을 안고 있었지만

정상이 드러나 갈수록 쉴새없이 사진을 찍어대는 다른 일행들 덕분에 개운해 진 기분으로 이곳저곳을 마구 찍어댄다.

 

 

 

분명 같은 모양이지만 여름과 겨울의 모습이 주는 느낌은 꽤나 다르다.

여름의 산이 바다에 빨려들어가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면 겨울의 산은 가만히 바다 쪽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

겨울의 산은 단색으로 통일되는 동시에 강한 햇빛에 의해 명암이 강해져 좀 더 우락부락해 보이는데

그럼에도 여름보다 조금 더 차분해 진 듯 하다. 아마 산이 변한 게 아니라 내가 그렇게 보이는 것이겠지만.

 

 

 

구름이 이동할 때마다 일행들의 일사불란하던 움직임은 무질서하게 변해간다.

걸어가면서도 몇 번씩 고개를 돌려 구름이 어디까지 가고 있는가를 확인하기도 하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라우스산의 정상이 보인다 싶으면 카메라를 꺼내들고, 그러면 나머지 일행들도 자연스럽게 멈춰서서 몸을 돌리게 된다.

 

눈 오는 설산의 모습도 물론 좋지만, 이런 하늘에서는 산의 혈관과 근육이 더욱 대비를 드러내기 때문에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이 바빠진다.

 

 

 

목책로 위에서 보던 풍경 속에 들어가 반대로 그 목책로를 풍경삼아 감상하는 경험은 참으로 신선하다.

사실 겨울 홋카이도 여행 계획은 삿포로 눈축제와 Y양을 만나기 위해 시작된 것이라

비행기를 타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시레토코에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여름에 저 목책로 위에서 오호의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저런 데 잘못 들어갔다간 습지에 가라앉아 버리는 거 아닌가 겁을 낼 정도였는데

겨울이라고는 하지만 그 위를 이렇게 걸어다닐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현실감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네이처 가이드분도 매년 도쿄에서 먼 길을 찾아오는 일행 분도 겨울의 시레토코를 잊을 수가 없는 것인가 보다.

 

 

 

현재 걷고 있는 수풀 언저리가 바로 여름 목책로 위에서 감탄하며 바라보던 그 첫 번째 호수의 저 멀리 가장자리라는 사실.

돌아와 사진을 정리하면서도 저 호수 위를 걷고 있었다는 실감을 느끼기 힘든 것도 여전히 납득이 간다.

 

시간이라는 요소 외에 아무것도 첨가되지 않은 동일한 장소에서 느끼는 낯설음은, 여러 곳을 이동하며 즐기는 여행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그래서 갔던 곳을 가고 또 가는 여행이라도 전혀 아쉽거나 지겹지 않은 법이기도 하고.

 

 

 

가이드분은 이미 이곳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시레토코의 모습이 무엇인지도 잘 파악하고 있다.

이제껏 실컷 출입금지 지역을 누비고 다니긴 했지만, 여름의 한계였던 목책로 끝을 넘어가 바다쪽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에서

겨울의 우리들은 저 한계마저 넘어서 직접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새로운 즐거움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사실 목책로가 상당히 높아서 저 위에서도 바다가 보이긴 하지만

그림 한 점처럼 구경만 하던 그 장소에 두 발로 걸어가 볼 수 있다는 체험 하나만으로도 사람은 충분히 흥분할 수 있다.

 

 

 

목책로 위에서도 언덕에 가려 보이지 않는 숨겨진 부분을 볼 수 있는 곳에 도착한다.

먼저 온 팀은 저 밑까지 내려간 듯 흔적이 보이는데, 가이드분 말로는 저기까지 갈 필요는 별로 없을 듯 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내려갔다가 고생 좀 하겠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기도 하고.

 

목책로 위에서 봤을 때는 언덕 뒤가 바로 바다인 줄 알았는데, 옆으로 돌아와 보니 뒤쪽에도 어느 정도 공간이 있다.

저 부분의 여름 모습만큼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지 않는 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진다.

마치 한쪽 면만 보이는 달의 모습을 보는 듯한 기분.

 

 

 

호텔 창문 안에서 바라보던 것과 달리 이런 곳에서 유빙을 보면 정말로 그 거대한 바다 위에 얼음이 떠다니는구나 싶다.

바닷물이 얼은 것이니 유빙도 짠 맛이 날까 궁금했지만 경치 구경하느라 금새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8개월이나 지난 이제서야 다시 생각이 난다.

 

여름에 배를 타고 이 쪽을 통과해 가다보면 가끔 해안가 부근에서 장난치고 있는 불곰들을 볼 수도 있다고 한다.

자전거 여행 때는 당연히 그 비싼 배를 탈 생각을 해 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다음에 일반적인 여행을 위해 찾아올 때는 반드시 멀미약을 챙길 생각을 하고 있다.

사방팔방이 탁 트인 곳이지만 어쩐지 다소곳이 숨겨져 있던 공간을 발견한 듯한 즐거움을 뒤로 하고 스키의 방향을 돌린다.

 

 

 

사진이란 녀석이 가지는 장점은, 특정 시공간에 대한 떨어져가는 기억력을 복구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미 4년이나 지난 추억이라 세세한 지형까지는 생각이 나지 않았었는데

목책로 뒤에 봉긋 솟은 저 언덕 옆을 지나면서 담은 사진과 비교해 보니 비로소 다른 시간대의 두 풍경이 시간을 초월한 하나의 관념으로 정립되는 기분이다.

 

이제 여름과 겨울의 모습을 모두 마음 속에 담을 수 있었으니

여름에 찾아가면 설원이 생각나고, 겨울에 찾아가면 푸르디 푸른 습지가 생각나는 즐거운 선순환만 남게 되었다.

 

 

스키를 신고 있기는 하지만 프로급 선수가 아니고는 어차피 하산할 때도 천천히 걸어서 조심소심 내려가야 하니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지금도 결코 이른 시간은 아니다. 조금이라도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무서운 추위가 엄습하니까.

 

아슬아슬하게 사람 애간장을 태우던 구름이 선심을 썼던 것인지, 돌아가기 시작한 우리들에게 살포시 커튼을 걷듯이 물러나 준다.

겨울 시레토코 여행 첫날이자 마지막 날에 깨끗한 하늘 아래서 라우스산의 정상을 직접 목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다른 두 명도 당연히 즐겁겠지만 본인은 이 모습을 보면서 그 자전거 여행때의 가슴 묵직했던 감동이 재현되는 기분에 마음이 벅차오른다.

 

 

 

길지 않은 사진생활이지만 이제껏 찍은 사진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한 장을 바로 이곳에서 담았다.

시레토코란 이런 곳이구나 하는 생각에 셔터를 누른 후 십여 분간 자리를 뜨지 않고 가만히 시선을 고정시켰던 기억이 난다.

 

안으로 들어가면 어디가 땅이고 어디가 습지인지 알 수 없을 듯한 두려움을 간직한 호수 주변의 경이로운 모습과

바다와 접한 그 다섯 개의 호수를 굽어보는 웅장한 라우스산의 풍경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자연이란 어떤 것인가 각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지금 그 출입 불가능했던 두려움 위를 걸어가는 기분은 언어로 설명하기가 참 난감하다.

 

식사가 너무 맛있어서 거하게 먹었더니 아침이 되도 여전히 속이 든든하다.

하지만 조식을 빠트릴 순 없어 얼굴 씻고 어제의 식당으로 향했는데, 이게 또 토스트와 계란 같은 가벼운 조식이 아니다.

메뉴가 어느 정도 바뀌긴 했지만 따듯한 국수와 우동, 밥과 각종 반찬, 샐러드와 생선, 고기, 생선, 조개류에다가

요구르트에서 푸딩까지 완전한 풀코스 식사를 즐길 수 있는 화려한 조식이 여전히 그 거대한 식당 안에서 펼쳐지고 있다.

 

배가 고프진 않지만 행복에 겨워 열심히 이것저것 주워먹는다. 오늘은 어차피 점심은 거의 건너뛰다시피 하며 강행군을 해야 하는 날이니

많이 먹어둔다고 나쁠 거 없다. 어차피 고난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면 또 훌륭한 저녁 만찬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창문을 열고 바깥 날씨를 확인하려 했는데, 밤 사이 객실 안팎의 기온차로 인해 창틀이 얼어버렸다.

창문이 부서질 정도로 힘을 줘도 꼼짝을 하지 않길래 어쩔 수 없이 포트에 물을 끓여와 조금씩 부어서 녹인 후 창문을 연다.

이번 여행중 반드시 날씨가 좋아야만 하는 유일한 날이라 많이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적당한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비춰보인다.

 

유빙도 밤새 증식을 했는지 보기 좋게 떠 있다.

사실 겨울의 오호는 가이드비 1만엔은 둘째 치더라도 기본적으로 등산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들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드라이 수트를 입고 유빙 위를 걷거나 물 위에 떠보거나 하는 가벼운 이벤트를 즐긴다. 그쪽도 참가비는 1만엔.

 

본인 역시 당연히 해 보고 싶은 일이긴 한데 그건 좀 더 허약해 진 후에 즐겨도 될 것이고

여름의 오호 주변 풍경에 너무나도 압도당한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에 놓칠 수가 없다.

 

9시에 호텔 로비로 나가자 조그마한 승합차가 한 대 서 있다.

오늘의 참가자는 세 명으로, 가이드 한 분과 50대쯤 되어보이는 활기찬 아저씨 한 분, 그리고 체중 100kg 가까이 나가는 본인 한 마리.

차를 타니 길 건너 편의점으로 직행해서 오늘 먹을 점심을 구입하도록 한다. 냄새가 과하지 않고 가볍고 열량많은 녀석을 선택해야 한다.

아침을 워낙 든든하게 먹어서 주먹밥과 초콜릿 정도로 해결해보려 한다. 어쨌든 본인은 카메라 장비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무게를 최대한 줄여야 하니까.

 

 

 

사무실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는다. 뒷굼치 부분이 고정되어 있지 않아 반쯤 걷는 느낌으로 이동할 수 있는 걷는 스키와

스틱 두 개, 카메라와 식량을 넣을 조그마한 백팩, 두툼한 스키복 상하의와 장갑 등을 받아 입는다.

 

본인 덩치에 맞는 옷이 별로 없기도 했거니와, 산 속 추위는 정말 무시할 수 없는 녀석이기 때문에

원래 입고 있는 옷을 벗지 않고 스키복을 위에 겹쳐입는다. 덕분에 몸이 매우 빵빵해져서 조금 거북하긴 하다.

 

예전 자전거로 땀 흘리며 올라가던 해안선 언덕을 훌쩍 통과해 출입금지 표시가 붙은 곳에서 내린다.

원래 여름에는 버스 정류장과 휴게소가 위치한 오호 앞까지 차가 통과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보다 한참 아래에서 걸어 올라갈 수밖에 없다.

각오를 했다고는 하지만 막상 까마득한 눈길이 위로 이어져 있는 모습을 보니 오늘 선택이 정말 잘 한 일인가 걱정도 된다.

 

아예 제설작업을 하지 않았다면 걸어 올라가는게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눈을 고르게 만들어 놓긴 했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으면 평지에서도 움직이기 힘든 걷는 스키를 타고 등산을 하려니 몸 전체에 굉장한 힘이 들어간다.

가이드 분은 전문가라서 확확 올라가고, 함께 투어에 참가한 분은 사실 몇 번이고 겨울 오호를 정복한 베터랑이라

맨 뒤에서 10분도 되지 않아 온 몸에 땀을 뻘뻘 흘리며 둘을 따라가기 바쁘다.

 

가이드분이 무리할 필요 없이 앞사람이 만들어 놓은 스키 라인을 따라가는게 편하다고 조언해 주신다.

두분 다 얼굴이 참 선하고 부담없이 친절한 성격이라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가도 된다고 격려를 해 준다.

괜히 나 때문에 속도가 느려져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지만, 1만엔이나 내고 딴 생각할 것 없이 마음껏 자연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고 웃는다.

 

기가 막히게도 오호로 가는 산길은 걷는 스키로 40~50분 동안 한 번의 끊임도 없이 완만한 오르막이 이어지고

30분 정도의 평탄한 길이 이어지다가 다시 끝까지 오르막이 이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다.

덕분에 평탄면이 나올 때까지는 스키를 신은 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구간이 없다. 그냥 묵묵히 이를 악물로 전진하는 수 밖에.

 

실로 오랜만에 땀을 좀 빼고, 스틱을 잡은 손이 저려오는 만큼 걷는 스키에도 익숙해지자 체력적인 부담은 줄어든다.

40분쯤 오르고 나니 마침내 그냥 서 있을만한 평지가 나와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처음엔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없었지만

이제는 사람이 살지 않는 시레토코의 거대한 풍경이 서서히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가이드분은 NHK 쪽에 동물 발자국이나 이곳 풍경 등을 촬영해서 보내는 일고 하고 계시기 때문에

중간중간 멈춰서서 뭔가를 사진에 담고 있다. 사람이 들어간 적 없는 설원에 가지런한 폭의 발자국이 길게 찍혀 있는데

가이드분은 슬쩍 보기만 해도 어느 동물의 것인지 금새 알아차린다. 매년 이곳에서 가이드를 하지만 올 때마다 신기하지 않은 모습이 없다고.

 

중간에 멀리 길 너머에 가옥의 흔적으로 보이는 나무더미가 있어서 가이드분에게 물어보니

예전 시레토코에 원주민을 비롯한 몇몇 사람이 거주하고 있을 때 살던 집이라고 한다.

겨울에는 어차피 생활이 불가능해서 우토로 등으로 내려와 생활하고, 봄부터 다시 들어와 채집과 수렵 등을 하며 살아갔었다고.

통제구역으로 지정된 후 사람들이 전부 떠나버린 집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자연이 알아서 뒷정리를 해 준다.

 

 

 

카메라를 꺼낸 김에 두 사람 사진도 좀 찍고 하며 휴식을 취한다.

다들 조그마한 컴팩트 카메라를 들고 왔는데 본인만 거대한 DSLR을 들고 와서

가뜩이나 느린 발걸음 때문에 미안한 터라 좀처럼 카메라를 꺼낼 타이밍을 잡기 힘들다.

 

딱히 말을 하지 않았지만 금새 그런 분위기를 읽은 것인지, 두분 다 전혀 신경쓸것 없이 필요할 때마다 사진 마구 찍으라고 하신다.

아무도 방해라고 생각하는 사람 없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하긴 내 입장에서도 두 분이 사진 찍을 때 기다리는 게 지겨운 적은 없었으니까.

 

각자의 백팩에는 이름표와 연락처가 든 카드가 걸려 있다.

아직까지는 그래도 순찰용 자동차가 아주 가끔 왔다갔다 하는 곳이라서 별다른 문제는 없지만

오호에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그야말로 사람의 힘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챙겨야 한다. 다행히도 곰은 동면중이기 때문에 오히려 여름보다 더 안전하다는 말도 있지만.

 

 

 

어느 정도 평지를 걷고 나자 가이드분이 '자, 이제부터가 조금 난관입니다' 라고 격려인 듯한 말을 꺼낸다.

경사가 좀 전보다 더 가파른 오르막길이 주욱 펼쳐진 채로 일행을 맞이한다.

기본적인 제설 작업이라도 완료해 놓았으니 이렇게나마 이동이 가능하지, 1m 가까이 쌓인 눈을 그대로 놔 뒀다면

사람의 힘으로 오호 부근까지 올라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겨울 중 입산이 허가되는 약 20일간을 위해 그래도 지역에서 힘을 많이 써 준 느낌.

 

걷는 스키나 허약한 지구력이나 기본적으로 적응의 문제기 때문에 가파른 경사에도 불구하고 첫 등반 때보다는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경치를 구경할 만한 여유는 없이, 묵묵히 비니 사이로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을 쳐다보며 한 걸음씩 몸을 움직일 뿐.

눈으로 덮힌 산을 걷는 스키로 올라가는 일은 쌀가마니를 짊어지고 미끄러운 진흙 오르막을 올라가는 기분이 든다.

 

스틱에 힘을 주지 않으면 스르륵 뒤로 내려가 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해서, 마침 동계올림픽이 개최되고 있을 그 당시엔

크로스 컨트리 선수들이 얼마나 힘들지 가소롭게나마 이해가 가기도 했다.

 

 

 

약 2시간에 가까운 등산을 마치고 드디어 원래 오호 관광이 시작되는 휴게소 앞에 도착을 했는데

눈 앞에 나타난 모습은 살짝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여기서부터는 제설작업이고 뭐고 전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마치 지표면과 휴게소 지붕이 이어져 있는 듯한 풍경을 연출한다.

당연히 휴게소는 사람이 없고 출입도 금지되어 있으며 화장실도 이용할 수 없다.

500ml 물 한 병만 들고 온 나로서는 벌써부터 타는 듯한 갈증때문에 반 이상 병을 비워버린 상태라

이제부터는 여기가 사하라 사막이구나 하는 최면을 걸어서 물을 아끼는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다행히도 여기서부터는 다섯 개의 호수가 위치하고 있는 탓에 고저차가 심한 곳은 없지만

문제는 기본적으로 무릎까지는 푹푹 빠지는 눈길로 이 다섯 개의 호수를 전부 돌아봐야 한다는 것.

호수가 전부 얼어있기 때문에 그 위는 완전한 평지임에도, 그 호수로 내려가거나 올라가거나 하는

30~40cm 정도의 별 것 아닌 단차마저도 겨울에는 어마어마한 장애물로 변신한다는 점이다.

 

눈 속 지면의 상태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가이드분이 앞장서서 가장 통과하기 편할 만한 지점을 고르기로 한다.

산을 올라왔으니 이젠 오호를 즐겁게 산책하면 되리라 생각했던 본인의 안일한 상상은 무참히 찢겨나가고

여름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금단의 비경에 첫 발을 딛는 순간부터 어마어마한 눈과 갑자지 쑥 꺼지는 구멍에 털썩 쓰러지고 만다.

 

호수로 내려가는 길에 한번 넘어지면 일어나기가 매우 힘든데, 스키를 탄 상태에서는 미끄러워서 그냥 몸을 일으킬 수가 없고

스틱을 이용하려 해도 도무지 어디가 땅끝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푹푹 꺼져버리기 때문이다.

왠지 늪 속에서 허우적대는 기분으로 약 3분간 일어나려고 열심히 애를 쓰지만 손을 짚을 곳이 없는 눈속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원래 길이 아니고 숲 속을 헤쳐나가는 도중이라 일행들이 스키 방향을 돌려서 이쪽으로 오기도 어렵다.

사하라 사막 마라톤 때는 미리 준비라도 하고 가서 망정이지만, 편안하게 관광 기분으로 와서 이렇게 추태를 부리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니

왠지 부끄러움과 오기가 동시에 폭발해 순수하게 허벅지 힘만으로 100kg 의 거구를 확 들어올려서 간신히 탈출한다.

 

 

 

여름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다섯 번째 호수 위에 서 있다.

밑에는 얼음이라 스틱을 단단하게 찍을 수 있어 편하다.

겨울이긴 하지만 호수 위라서 좀 걱정도 들었지만, 시레토코의 겨울은 이런 호수쯤은 자동차가 달려도 깨어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얼어 있다.

 

가이드분과 함께 여우가 지나간 흔적을 신기해하며 찍는다. 불곰이 잠을 자는 겨울은 추위에 강한 북방여우가 활개를 치는 계절.

북방여우는 홋카이도 전역에서 서식하는데, 도심 근처의 여우들은 사람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아서 꽤나 가까운 거리에서도 촬영이 가능하지만

이곳은 사람과 접할 일이 별로 없어서 경계심이 강하다. 실제로 볼 수 있다면 대단한 행운이겠지만 지금은 발자국만 봐도 즐겁다.

 

자전거 여행 때는 초속 9m 짜리 순풍을 맞고 워프하듯 신나게 달리고 있을 때

갑자기 길 옆으로 뛰어나온 북방여우를 보고 깜짝 놀라 녀석의 코앞에서 브레이크를 밟은 적이 있었는데

둘 다 얼마나 놀랐는지 10초 가까이 서로의 눈만 멀뚱멀뚱 쳐다보면서 피할 생각도 않았던 추억이 있다.

 

 

 

겨울은 겨울대로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 이곳이 정말 호수 위라는 감각이 살아나질 않는다.

거기다 여름에는 멀리서 수풀에 가려 간신히 보일락 말락 하는 호수를 담는 것 외에는 접근할 수가 없고

불곰 목격 정보가 들어오면 휴게소에서 가장 가까운 첫 번째 호수를 제외하면 모든 트래킹이 금지되기 때문에

호수 위에서 사진을 담은 이런 체험은 오직 겨울에만 할 수 있는 보물과도 같다.

 

특히나 이 곳을 여러 번 와 본 두 사람이 나한테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는 것이

첫 번째 여행, 그것도 단 하루밖에 없는 시간에 이렇게 날씨가 좋은 건 로또에 가까운 경험이라며 좋아하신다.

 

어딜 봐도 일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언덕 너머 오호츠크해가 넘실대는 비경 속에서의 시간은

일절의 다른 유희가 필요없는 순수한 자연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경험이다.

 

 

 

한 번 넘어지고 나니 그래도 요령이 생겨서 조심스럽게 이동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여전히 호수에 들어갈 때나 나올 때의 조그마한 높이가 여간 힘든 게 아니지만

여름엔 몇 걸음만에 후닥 넘어갈 수 있는 그 곳을 결코 들어갈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고생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세 번째 호수에 도착하니 다른 팀이 먼저 와 있다. 네이처 가이드는 몇 군데가 있긴 한데 다들 친한 친구나 마찬가지라 반갑게 인사.

가이드의 지도를 받고 있는 아저씨는 걷는 스키 대신에 테니스 라켓처럼 생긴 장구를 신고 있는데, 확실히 저런 건 눈에 덜 빠지고 편리한 느낌이 든다.

본인은 처음부터 저걸 신청하지 않았으니까 걷는 스키를 타는 건지 모르겠지만, 저게 있었다면 조금 쉬웠을지도.

 

 

 

구름에 가린 산은 이런 호사스러운 날씨 속에서도 아쉬움이 들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여러 개의 봉우리 중 이곳 시레토코에서 가장 높은 라우스산이 있다고 한다.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는 녀석이긴 해도, 오늘 같은 날씨라면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가이드분이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정적 속의 호수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동물들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를 남긴다.

북방늑대보다 사슴이 더 많은데, 정작 그 사슴은 이미 홋카이도에서 유해 동물로 지정되어 겨울마다 사냥을 당하는 신세다.

늑대가 전멸하고 불곰의 서식지가 줄어든 이후 이 녀석들의 번식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줄어들어서

지금은 그냥 놔두다간 농작물이나 초원이나 삼림이나 아예 박살이 나 버린다고.

 

매년 겨울 사냥 가능한 개체수를 발표하면 허가증을 가진 사람들이 그 정도의 사슴을 사냥해 간다고 한다.

사슴고기는 꽤나 맛있기 때문에 음식점에서 사냥해가는 경우도 많다.

 

시레토코가 자연의 힘 가득한 곳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의 조절 없이 자체 정화가 가능한 수준은 아니다.

그 정도의 천연 자연은 사실상 지구상에서 사라졌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지만. 얠로우스톤에서부터 아프리카 사바나까지 사람의 손 없이는 유지되기 힘들다.

 

 

 

네 번째 호수에 도착하니 수풀 중앙에 고요한 호수 위의 풍경이 마치 대회가 끝난 콜로세움 안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을 만들어 준다.

라우스산이 보이지 않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기념으로 사진 찍으라고 바람을 넣는다.

자기 사진은 거의 찍지 않는 편이지만 워낙 의미가 깊은 곳이다 보니 이것도 추억이다 싶어서 카메라를 건네 드린다.

물론 그냥 평범하게 앞면 나오는 건 재미가 없어서 호수를 바라보는 뒷모습을 남겨달라고 했지만.

 

다들 카메라는 잘 다루는 편이라 별 설명없이도 잘 찍어주셔서 매우 만족스럽다.

 

 

 

베터랑 참가자 분은 호수 안쪽가지 이동해서 기념사진 많이 찍으신다. 몇 번째 호수인가를 알기 위해 손가락으로 숫자를 만드는 것도 잊지 않는다.

 

요즘 셀카가 그렇게 유행이라던데, 본인 역시 자기 얼굴 찍는 거 좋아했다면 여기는 그냥 별천지다.

속된 말로 좀처럼 들어가기 쉬운 곳도 아니라 자랑하기도 좋으니까. 본인은 애초에 사람을 찍는 것 자체를 싫어해서 예외이긴 하다.

 

 

 

다섯 개의 호수 중 유일하게 중간에 섬이 만들어져 있는 두 번째 호수의 모습.

사실 오호의 호수들은 각각의 큰 단일 호수가 아니라 주변에 습지와 늪지 등등 다양한 모습을 갖춘 불연속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굉장히 입체적이고 놀랍도록 아름다운 무가공의 혼합체인데, 그것을 눈이란 녀석이 이렇게도 단순하게 밀어버린다.

 

아마 여름과 겨울에 한 번씩 가 봐도 여기가 정말 거기인가 구분하기가 쉽지 않을 사람이 대부분일 터.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여러 번 가도 아쉽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사박사박한 동물들의 발자국과는 달리 걷는 스키와 스틱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흔적은 꽤나 우악스럽다.

멀리 보이는 저 정도의 사소한 단차마저도 이런 환경에서는 거대한 장애물로 느껴진다.

익숙해 졌다고는 하나 호수와 호수 사이를 넘나들 때는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언덕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가벼운 비포장 산책로가 겨울엔 범접하기 힘든 험한 길로 변모하는 이 모습은

사람이 역사를 통해 편의성이란 것을 얼마나 철저하고 집요하게 추구해 왔는가를 세삼 느끼게 해 준다.

 

 

 

호수 위는 눈도 적게 쌓이고 바닥이 얼음이라 스틱을 힘껏 지지할 수 있어서 참 편하다.

 

일단 호수에 도착해 사진 촬영과 구경을 하기 시작하면 걷는 스키도 걸리적 거리기 때문에

스키를 탈착하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거나 하는데, 본인은 통풍의 흔적 때문에 왼쪽 엄지발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스키를 한 번 벗었다가 다시 신으려니 발끝에 힘을 줘서 밀어넣어야 하는데, 왼발 끝은 아무리 힘을 준다고 생각해도 실제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통풍의 무시무시한 격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완치 후에도 그렇다는 사실을 체감하기 힘들겠지만

상처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도 발가락 끝은 여전히 그 두려움을 기억하고 있는 듯 일정 이상의 힘을 주지 않도록 퇴화해 버린 기분이다.

 

한동안 씨름을 하다가 머리를 짜 내서, 신발을 벗어서 손으로 스키와 체결한 후 다시 신는 방법으로 해결하긴 했다.

 

 

 

호수 위의 섬 앞으로 가서 기념사진을 찍는 일행분. 나도 찍어주겠다고 했지만 원체 본인 사진을 찍는걸 싫어해서.

기념이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 사진이라도 충분하다.

사진에서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피사체가 주인공이고,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이 그 역할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거기에 누가 들어가던 그것은 나의 추억이니까.

 

여름에는 호수에 접근은 커녕 이렇게 수풀의 방해 없는 장소에서 사진을 촬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침엽수가 많은 곳이긴 해도 폭발적인 생명력을 자랑하는 이곳의 여름은 수풀의 밀도가 어마어마해지기 때문.

 

 

 

경황이 없어서 이제껏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가이드분의 베낭 뒤에는 걷는 스키가 아닌, 다른 팀의 아저씨가 신고 있었던 스노우 슈즈가 걸려 있다.

비상시를 대비해 가지고 온 것일까. 자빠지고 미끄러지며 고생하는 나한테 저걸 신겨줬으면 좀 나았을 텐데.

 

하지만 가이드분이 하는 일이니 다 의미를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하며 그냥 걷는 스키로 계속 이동한다.

일단 나름 익숙해지기도 했으니, 이중으로 입은 두터운 방한복에 몸 안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렸지만 더 이상 무서울 건 없다.

단지 눈 앞에 보이는 저 아담한 언덕도 겉보기와 달리 밑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 수가 없고, 걷는 스키로는 게다리걸음으로 간신히 올라갈 수준이라

호수에서 황홀한 시간을 보내고 나면 꼭 저기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항상 각오를 다지게 만들기는 하지만.

 

실제로 저런 부드러운 곡선을 자랑하는 언덕배기는 개울처럼 푹 파여 있거나 나무뿌리, 바위 등으로 들쑥날쑥한 곳이 많아서

자칫 스틱에 의지해서 이동하다가 균형을 잃고 고꾸라질 위험이 있다. 그렇기에 노련한 네이처 가이드가 앞에서 지형 상태를 확인해가며 일행은 인도하는 것.

 

 

 

갑자기 가이드분이 가방과 스키를 벗더니 조그마한 삽을 들고 눈을 마구 파헤치기 시작한다.

어리둥절하며 멀뚱멀뚱 서 있었는데, 한동안 열심히 삽질을 해서 구덩이를 만들어 놓은 가이드분이 '여기 앉아서 점심 드세요' 라고 하신다.

눈 때문에 양반다리 말고는 할 수가 없는 일행들을 위해 의자처럼 걸터앉을 수 있도록 구덩이를 만들어 주신 것.

그런 줄 알았으면 도와드리는 시늉이라도 냈을 텐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으니 굉장히 미안한 기분이다. 사실 삽이 없으니 할 수 있는 일도 없었지만.

 

이곳에 도착해서 산을 오르고 호수를 거니는 3시간 동안 한 번도 앉아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편안한 자세로 눈더미에 앉아 점심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야간행군 후 먹는 컵라면에 뿌려지는 마법의 조미료같은 매력을 가지고 있다. 애초에 눈을 파서 의자를 만든다는 방법 자체가 이런 곳에서만 가능한 일이니까 말이다.

 

 

 

조식을 든든하게 먹긴 했어도 지금 본인의 몸 상태에 비하면 꽤나 강행군이었기 때문에 은근히 배가 고프다.

한국 편의점보다는 훨씬 레벨이 높지만, 그래도 125엔짜리 연어 초밥 하나에 그렇게까지 감탄할 일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출입이 금지된 대자연의 설원을 반찬으로 먹는 점심은 극상의 만찬이나 다름없다. 이 순간 이 곳에 있다는 것 자체가 여행의 행복.

 

날씨가 순식간에 흐려지고 조금씩 눈이 날리기 시작하는데, 편안한 자세로 앉아 주먹밥을 씹고 있으니 그것 역시 멋들어진 영화 한 편이나 마찬가지 느낌이다.

보통은 라우스산이 가려져서 아쉽다거나, 돌아갈 때 힘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리라 생각하지만

행군 끝의 휴식과 식사, 그리고 앞에 펼쳐진 고요한 호수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묘할만큼 부정적인 생각이 싹 사라져 버린다.

 

 

 

가이드분은 서 있는게 편하다며 앉으려 하시질 않는다.

시레토코 네이처 가이드들은 모두 이곳이 좋아서 자진해 활동하는 봉사단체나 마찬가지다.

가이드비가 비싸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대여해주는 장비와 이동 경로, 일행들 뒷바라지를 하루종일 맡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이곳을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이 아닌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 역시 일본에서 오래 살아왔다면 아마도 어느 날 여행중에 이곳을 알게 되고, 몇년동안 여기를 그리다가 결국 비슷한 행적을 걷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바람이 별로 없어 적막 속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기만 해도 세상에 더 부러울 것이 뭐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하라 사막 마라톤의 야간 레이스 때 그 광활한 평야 한가운데 서 있으면 모래 흘러가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함과 비슷한 느낌.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였는데, 이곳의 아름다움도 일단 리스트에 올라갈 정도의 위력은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

 

 

 

이곳의 눈은 한국에서 봤던 싸라기같은 눈과는 확연히 다르다. 기온 차이 때문인지 옆에 바다가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맨눈으로도 육각형의 눈결정이 그대로 보일 정도의 크기를 자랑하는데, 평생 이런 눈은 본 적이 없다.

 

아무래도 사진으로는 설명이 어려울 것 같아 크기 비교를 위해 초콜릿 박스 옆에 떨어진 눈을 담아본다.

이런 눈이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 진 설원은 딱딱하게 뭉치지 않고 설탕을 깔아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기온 탓에 잘 녹지도 않아서 오랫동안 결정 모양을 유지하는 모습을 가만히 관찰하는 것도 신기한 즐거움.

 

 

 

식사중에 괜히 내가 따라와서 발목을 잡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 했더니 둘 다 당치도 않는 소리라고 손을 흔든다.

 

단순히 위로해 주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가이드분은 시계를 꺼내서 보여주며 지금까지 예정했던 스케쥴과 전혀 차이가 없이 적당한 페이스로 트래킹이 진행중이라고 한다.

오히려 처음에 과연 따라올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이렇게까지 맞춰줄 줄은 몰랐다고 하시니 그나마 위안이 조금 된다.

 

거의 기어서 가다시피 했지만 젊을때는 사하라 사막 마라톤도 하고, 일본 전국 자전거 일주도 했다고 말씀드리니 두 분 모두 웃으면서 납득하는 분위기.

백여 미터 옆에 바다가 위치해서 그런지 하늘을 뒤덮은 눈 속에서도 추위는 느껴지지 않고 앉아있는 지금이 포근하게 느껴진다.

가끔 가만히 서서 먼 곳을 바라보는 가이드분의 뒷모습을 보면, 이 사람은 이 풍경을 보기 위해 여기에 오르는구나 하는 생각이 읽혀지는 듯 하다.

 

카메라를 가져가지 않은 것이 참 후회될 정도로 이곳 호텔의 석식 뷔페는 굉장한 수준이다.

국내 5만원 이상급의 뷔페식당의 메뉴급인데, 신선도나 요리 수준은 이쪽이 더 낫게 느껴진다.

해산물이야 당연하겠지만 스테이크나 디저트류도 맛이 굉장해서 놀라고 또 놀라며 오랜만의 만찬을 음미하느라 바쁘다.

조식은 아직 먹어보지 않았지만, 이런 석식을 포함해서 10만원 초반대의 숙박료라면 비싼 게 아니라 싸다고 해도 될 정도.

 

카메라를 가지고 다시 돌아올까 싶기도 했지만 어차피 내일도 머물 예정이니 사진은 그때 찍으면 된다고 생각.

 

호텔들은 지역 관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니 시레토코에서 실시중인 이벤트에 대한 정보는 로비에서 전부 얻을 수 있다.

분에 넘치는 식사를 만끽한 후 레이저 쇼의 관람권 역시 로비에서 구입한다. 시간은 조금 남아있어서 호텔 1층이라도 슬쩍 불러보며 사진을 찍는다.

 

오래된 호텔이라 디자인적으로는 어색한 부분이 있지만 낡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다.

한창 호황기 때 만들어 진 부스인지, 가벼운 오락실도 들어서 있다. 심지어 작은 간이 노래방 시설까지 만들어져 있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듯.

 

 

 

어마어마한 석식에 놀랐음에도 불구하고 술과 함께 가벼운 식사를 즐길 수 있는 스낵바 역시 운영중이다.

호텔비에 포함된 식사 레벨이 그렇게 높은데 여기서 라멘과 맥주를 즐기는 사람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궁금할 정도.

 

지리적 특성상 지나가다가 그냥 들르는 숙박이 불가능한 시레토코의 호텔들은

거의 모든 관광용 수요에 대해 대응할 수 있는 전천후 공간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로비쪽 역시 가벼운 주스와 녹차 등을 무제한으로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넓직하게 마련되어 있다. 식사 후 목이 좀 말라서 석류주스를 두 잔 정도 비웠다.

겨울은 비수기라 영업을 하지 않는 듯 하지만 원래는 주문을 받는 차도 있는 듯 하다. 무료 음료수가 빵빵해서 딱히 돈을 주고 사 마실 필요가 없긴 한데.

 

 

일본의 호텔은 어쨌든 공간 활용을 위해 조그마한 느낌이 들지 않을수가 없는데

이곳은 일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넓다.

 

일본식 정원을 본따 만든 듯한, 실내를 흐르는 인공 개울과 다리까지 만들어 놓은 모습을 보면 호텔인지 백화점인지 헷갈리기까지 한다.

당연히 옆에는 그냥 길이 나 있지만 일부러라도 이 쪽을 지나가고픈 재미가 느껴지는 곳.

굉장한 공간 낭비로 보일수도 있는데, 그 만큼 이제껏 애용하던 비즈니스 호텔과는 방향점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지금의 본인처럼 이런 배려에 기분이 흡족해 질 수 있는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관광 호텔이니까.

 

 

 

1층을 살짝 걸어다녔을 뿐인데도 모든 시설들이 큼직큼직한 모습이 참 인상적이다.

바닥에 카펫을 깔아놔서 많은 사람들이 움직여도 꽤나 조용하다.

 

특산품점도 한 곳이 아니라 특색별로 여러가지 가게가 들어서 있다. 일반적인 잡화점부터 시작해서 사슴 뿔로 만든 조각품들을 파는 가게까지.

위층에도 대연회장, 키즈 코너, 애완동물 보호 공간인 펫 라운지까지 있어서 굉장한 대응성을 자랑한다.

 

호텔이 이 정도까지 가면 오히려 실외의 가게들에 갈 필요가 느껴지지 않아서 조금 무서운 느낌마저 든다.

원래 고급 호텔이란 건 이런 것인가 싶기도 하지만, 조식, 석식 모두 합해서 11만원 정도의 숙박료가 드는 호텔치고는 너무 훌륭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컨텐츠가 많은데, 미니 수족관 속에 유빙을 떠와서 전시까지 하고 있다.

아마도 여름 손님들을 위한 볼거리가 아닌가 싶다. 지금은 여기서 볼 필요 없이 바로 앞바다에 유빙이 떠다니고 있으니까.

위도가 낮은 지역 사람들에게는 나름 신기하게 느껴진다. 바다가 얼어붙는다는 생각은 극지방에서나 생각할만한 이미지라서.

 

실제로 홋카이도 북쪽 바다는 유빙한계선에 걸쳐 있어, 한국과 일본에서 유빙을 직접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그냥 한바퀴 돌아보려 했을 뿐인데 뭔가 관광을 제대로 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조그마한 전시실에 노구치 준이치라는 작가의 시레토코 동물사진전이 개최되고 있다. 물론 무료.

 

야생동물 사진은 끈기와 노력이 어떤 장르보다 중요한데, 참 신기하게도 상당수의 동물들이 사진가에게 시선을 맞추고 있다.

상당한 망원으로 찍은 사진인데 어떻게 이렇게 담을 수 있는지.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결과물에서 물씬 풍긴다.

 

 

 

밤이 늦어서 아무도 없었는데, 덕분에 조용하게 감상이 가능하다.

사진 수는 그리 많지 않지만 결과물 수준이 상당해서 눈이 즐겁다.

애초에 호텔에서는 기대도 하지 않았던 볼거리가 계속해서 생겨나기 때문에 기분이 상당히 좋은 편이기도 했고.

 

 

 

동물은 원래 귀엽지만, 녀석들을 사진으로 담을 때 그 매력을 십분 살린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시레토코는 여름이든 겨울이든 자동차가 가지 못하는 곳이 대부분이라

카메라 장비를 갖고 해발 1000m 가량의 산에 올라 몇나절이고 진득히 관찰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

 

구도 배경 배치도 매우 능숙하고, 동물들의 시선이 향하는 찰나의 순간을 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끈기가 필요했을지 상상이 간다.

 

 

 

사진은 결과물로 말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물론 자연을 훼손하는 등의 짓거리를 하는 건 전혀 별개의 이야기지만.

 

단순히 유람선을 타고 관광하거나, 하루 이틀 정도 산에 오르는 정도로는 결코 담을 수 없는

시레토코의 넘치는 생명력의 매력이 사진가의 능력과 결합되어 따뜻한 시선으로 탄생하고 있다.

여러 가지로 배울만한 점이 많은 작품이라 자칫 레이저 쇼 시간에 맞추지 못할 법한 순간까지 시간을 보내다가 서둘러 밖으로 나온다.

 

 

 

본관, 신관, 별관은 각 구역간 이동거리가 꽤나 길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도 전부 따로 위치해 있다.

체크인 할 때 로비에서 지도까지 줘 가며 자세하게 설명한 이유가 있었다.

 

본인이 묵었던 곳은 가장 저렴한 방임에도 분에 넘칠 정도였는데

홈페이지 가 보니 바다와 마주하고 베란다에 개인 노천온천까지 완비된 최고급 객실이 2인 26만원 정도이다.

객실의 수준과 조, 석식 포함을 생각하면 이것조차도 그렇게까지 비싼 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 최북단의 오지에서 60년간 경영해 온 호텔의 저력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속물적인 생각으로 역시 돈이 참 좋긴 좋구나 싶기도 하고.

 

아직은 젊은 편이니 조금 더 노력해서 자금을 널널하게 만들어 오면 최고급 객실에서 지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시레토코는 나처럼 도심 여행보다 자연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느긋하게 시간을 들여도 전혀 아쉽지 않은 곳이니.

 

 

 

밖으로 나오니 다른 호텔에서 온 듯한 일행들도 많이들 걸어오고 있다. 언덕 위에 위치한 호텔에서는 관광버스가 직접 실어나르는 중.

일단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시레토코에 숙박한 이상 이건 한 번씩 보고 가기 때문에 지역 경제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사실 그래봤자 겨울에는 관광객이 많은 편이 아니고, 1인당 500엔씩 받아봤자 레이저 쇼는 꽤나 비용이 많이 드는 이벤트라서 어떨런지.

 

길을 못찾으면 어쩌나 싶었지만 다행히도 본인이 투숙중인 호텔의 바로 뒷편인데다가 주민들이 길안내를 해 주고 있어서 무리없이 찾을 수 있었다.

색색의 조명으로 밝혀진 터널에 이르자 레이저 쇼에 가까워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름 오로라를 재현하기 위한 레이저 쇼라서 아이디어를 쓴 장식도 만들어 놓고 했는데

초연 당시엔 상당히 첨단 공연이던 레이저 쇼도 지금 와서는 그냥 그럭저럭 구경할 만한 느낌밖에 들지 않는 것이 현실.

 

분수 등을 보드로 이용하는 레이저 쇼를 처음 본 것은 국민학교 6학년 때, LA의 디즈니랜드였는데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벤트라 굉장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할까.

지금은 닳고 닳은 감성이라 과연 이걸 재미있게 볼 수 있을까 싶은 걱정도 든다.

사실 뭔가를 기대하고 간다기 보다는 오늘 하루종일 차 타고 이동하는 것 말고는 해 본게 없기도 하고

비수기에 관광객들에게 만족을 주고 싶다는 지역 주민들의 열정에 응답하는 기분도 있었고.

 

 

 

원래 단차가 있는 건지 그냥 눈으로 만들어 놓은건지 알 수 없지만 뒤에서도 쉽게 볼 수 있도록 계단 형식으로 만들어 져 있다.

안내하는 분이 확성기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안쪽 뒤쪽이 더 잘보이니 좀 더 들어가 달라고.

 

별 생각없이 깊숙한 뒤쪽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조금 의심스럽다.

그냥 원활한 자리 배치를 위해 그렇게 꼬드긴 것이 아닌가 싶은데. 아무래도 중앙 앞쪽이 좀 더 잘 보일 듯 하니 말이다.

사진 몇 장 찍어내는 데 불편함만 없다면 위치는 어디든 상관 없다.

 

단지 주위에는 불빛이란 게 거의 없는 칠흙같은 밤이라 왠만한 카메라로도 좀 버거울 듯한 예감이 든다.

 

 

 

걸어오는 사람 수는 그냥저냥이라서 널널하겠네 싶었는데

아마도 언덕 위의 호텔에서 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로 추정되는 인파가 몰아닥치자 회장은 순식간에 만원이 된다.

일찍 온 장점을 활용해서 가장 좋은 자리를 잡을 수도 있었지만 안내원의 속삭임에 응하는 바람에 엉성한 선정이 되어버렸다.

 

모자와 장갑을 끼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시레토코의 밤은 강렬하다. 본인은 카메라 원활히 다루기 위해

손가락 쪽은 덮히지 않은 손목 방한대만 걸치고 있어서 조금 더 춥지만, 원래 추위에 강해서 별다른 부담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도 현재 시레토코에 머물고 있는 관광객의 80%는 다 나와있다는 느낌. 절반쯤은 중국인 관광객이지만 그래도 꽤나 왔다는 느낌이다.

 

 

 

그냥 평범한 공터라서 장막 역할을 할 분수 같은 장치가 전혀 없는데 어떻게 할 것인지 궁금했는데

사람은 머리를 쓰는 동물이라서, 뒤편에서 살짝 매큼한 냄새가 난다 싶더니만 열심히 뭔가를 태워서 연기를 내고 있었다.

분수처럼 장막을 만들어 줄 정도는 아니지만 마침내 시작한 오로라 레이저 쇼를 보니 이런 연기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볼 수 있는 연출이다.

 

워낙 어두워서 거리감을 느낄 수도 없지만, 어디선가 발사되는 다양한 레이저의 물결이 피워놓은 연기에 산란되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주변 불빛이 거의 없는 천혜의 환경 덕에 하늘 전체를 뒤덮는 레이저의 모습은 예상보다는 상당히 인상적이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오로라하고는 전혀 다른 느낌이지만.

 

 

 

실제로 중간중간 흐르는 나레이션도 오로라에 대한 설명이 반이고 나머지는 일본 신화와 시레토코에 관련된 연극같은 느낌의 내용.

바다쪽은 그야말로 암흑의 중심이라 중앙의 레이저 포인터 위치를 감잡을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신비스러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마치 바다 건너 언덕쪽에서 비추고 있는 듯 하지만, 실제 거리가 5km 가까이 되기 때문에 저곳에서 레이저를 쏘기는 어렵다.

 

아마도 바다 중간 어디쯤에 장치를 설치해 놓은 듯 한데 완전한 암흑 속에서는 흡사 하늘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25년쯤 전에 이 쇼를 봤다면 평생 잊지 못할 굉장한 추억이 되었을 법 하다. 지금 봐도 촌스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는 아닌 수준이니까.

 

 

 

끊임없이 움직이는 레이저를 디지털 카메라로 포착하기가 쉽지는 않다.

감도를 무리하게 올리고도 촛점 잡는게 쉽지는 않은데, 이럴 때는 휴대폰처럼 심도와 셔터스피드 생각 할 필요가 없는 작은 녀석들이 더 유용할지도.

 

바람이 많이 불거나 하면 애써 피워놓은 연기가 다 날아가는 불상사가 벌어질수도 있지만 다행히도 기온만 낮았지 바람은 별로 없는 편이다.

주변이 워낙 어두워서 레이저가 통과하지 않는 부분은 연기를 전혀 볼 수 없었던 탓에 집중감이 강해진다.

외계인이라던가, 달세계에서 내려오는 신성한 빛과 같은 느낌을 수는 데는 이런 연기와의 콜라보가 큰 효과를 주는 듯.

 

 

 

대자연의 웅장함 말고는 그다지 내세울 게 없는 일본 최고의 오지에서 첨단 레이저 쇼를 즐기는 기분도 나름 각별하다.

 

기획한 사람들의 노력이 느껴지는 부분도 많다.

부족한 자원을 아이디어로 커버한다던가, 바다 쪽 공간을 충분히 활용한다던가.

크기만 보자면 어떤 대형 극장보다도 박력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멋진 시간이 될 듯 하다.

 

잠깐동안이긴 하지만 추위를 잊고 집중할 수 있다는 것도 좋고.

 

 

 

레이저가 표현할 수 있는 움직임과 색상에는 한계가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넓게 퍼져가는 연기 덕분에 훌륭한 연출이 가능하다.

 

하늘의 문이 열리는 듯한 연출에서는 레이저가 가만히 있어도 연기가 움직이는 벽을 만들어 내고 있어 장엄한 느낌을 준다.

일본쪽의 성격이 그렇겠지만 기본적으로 장엄하고 웅장한 느낌을 주려고 노력한 흔적이 많이 보인다.

미국에서는 장소가 장소이기도 했고, 가볍고 즐거운 음악과 노래가 주를 이뤘는데.

 

디즈니랜드의 그것과 비교해서 연출적으로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형적 장점을 최대한 이용한 넓은 공간감은 아무래도 여기를 따라올 만한 장소가 없을 듯 하다.

 

 

 

30분 남짓한 공연이 끝나고 진행자가 감사 인사를 한다.

관람료를 생각하면 이 정도로 괜찮을까 싶기도 하지만 시레토코에서 이런 걸 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준수한 편이다.

500엔 아낀다고 이걸 보지 않고 지나가는 관광객이 과연 있을까 싶기도 하고.

 

물론 너무 마음에 들어서 매번 갈 때마다 이걸 볼 생각까지 드는 것은 아니라, 다음에 찾아갈 때도 이걸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좀 고민을 해 봐야겠지만.

 

공연 후 돌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서비스 차원에서 하트모양의 레이저를 쏴 주는데

오히려 이것 때문에 커플사진 찍는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연인과 함께 온다면 꽤나 로맨틱한 분위기가 될 듯 하다.

 

 

 

워낙 어두워서 지금 돌아가는 길이 왔던 길과 같은 것인가조차 헷갈리는데

갈 때는 보이지 않았던 거대한 바위에 조명이 들어와 있다. 조명이 없으면 바로 옆에 있어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특촬물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척 보자마자 금방 웃음이 나올 만한 바위.

이름 역시 당연하게도 '고지라 바위'다. 일부러 깎아낸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놀랄만큼 닮아 있다.

 

 

 

가까이 가서 봐도 참 묘하게도 닮아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자연의 조각력이란 꽤나 섬세해서, 이곳 시레토코 곳곳에는 재미있는 모양을 한 바위가 많다.

마을 어귀에 위치한 거대한 바위는 정말 너무나도 거북이 모습과 똑같아서, 인위적으로 깎아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정도.

 

이 고지라 바위도 밤에 보니 명암차에 의해 더욱 위엄있게 보인다. 레이저 쇼에서 이득을 하나 더 얻어가는 느낌.

 

 

 

길을 걸어가는데 주민들이 '괜찮으시면 들렀다 가세요' 라고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

이 시간엔 당연히 문 여는 가게가 없지만, 오로라 쇼가 끝나고 나서 조금이나마 매상을 오려보고자 기획한 임시 시장인 듯.

역시 일본인들의 장사 수완은 참 꼼꼼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해산물 중심인 시레토코의 특산품이라 본인이 구입할 거리는 별로 없지만 이런 구경을 놓칠 이유는 없었기에 들어가 본다.

건물 중앙에는 숯불이 놓여있어 손님들을 따듯하게 맞아주고, 천정에서는 시레토코 오로라 판타지 공식 노래가 울려퍼지고 있다.

크게 유명한 가수인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들을 만 한 일반적인 가요 레벨이라, 레이저 쇼를 재미있게 즐긴 사람이라면 기념으로 구입해가도 될 정도.

 

물건을 사지 않아도 한 쪽에서는 이 곳을 찾아준 사람들에게 따듯한 감주를 한 잔씩 나눠주고 있다.

한국의 달달한 감주와는 살짝 다르게, 달콤하면서도 살짝 톡 쏘는 씁쓸함이 느껴지는 일본의 감주는

추운 겨울날 따뜻하게 해서 마시면 그 만족감이 굉장하다. 실제로 연말 연시 신사나 절에서 많이 나눠주기도 한다.

 

 

 

감주만 받아먹어서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본인이 구입할 만한 것이 없다.

물론 진공 포장 잘 된 해산물들이지만, 내가 바로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몰라도 앞으로 6일간 여행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에.

 

도시 특산품에 비하면 조금 투박한 포장과 내용물이지만 신선도로 치면 여기보다 더 나은 곳을 찾기 어려울테니

나이든 사람들은 꽤나 이것저것 구입해 가는 편이다.

 

시레토코에는 애정이 각별해서, 뭔가를 구입하러 온다기 보다는 이 곳의 분위기에 취해 한두 개쯤은 사 주고 싶어지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외지 중 외지인 이곳에서 한국까지 버틸 수 있는 먹거리를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 항상 아쉽기도 하다.

 

 

 

겨울이라고 손 놓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마을 사람들의 열의를 충분히 느끼며 다시 호텔로 돌아온다.

 

멋들어진 볼거리와 편의성으로 무장한 관광 도시와 달리

이런 곳은 크게 즐길 거리가 없어도 지역민들의 노력하는 모습을 느낄 수 있다는 점만으로 관광 온 보람이 충분하다.

오로라 레이저 쇼를 보러 가서, 레이저의 화려함보다는 그것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정성에 훈훈함을 느끼는 것이 그리 이상하지는 않는 곳.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레이저 쇼 회장에서 상당히 가까운 호텔이라 돌아오는 길도 가볍다.

하지만 워낙 어두워서 이런 짧은 거리에서도 길을 잃는 바람에 버스 주차장으로 가 버리는 사고가 벌어지기도 했다.

다행히도 머뭇거리고 있으니 안내원이 다가와서 어느 호텔이냐고 물어본 후 바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 줬다.

 

삿포로, 오타루, 아사히카와 등의 이름난 도시와 비교하면 별 것 없는 조그만 마을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곳에 와서는 매 순간순간이 그저 훈훈하고 즐거울 뿐이다.

 

 

딱 호텔 찾아 가려는데 미치노에키 바로 옆에 시레토코 자연관이 위치해 있어서 또 들어가 본다.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딴 길로 새는 것이 인간의 습성인지, 그냥 나만 삐뚤어진건지 모르겠지만.

 

자연관 안에는 입구 앞에 조용히 앉아 있는 안내원 한 명 빼고는 아무도 없다.

배경음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매우 조용해서 약간 긴장될 정도. 사진 찍어도 되냐고 물어보니 무리없이 승락해 준다.

 

실제로 가서 보는게 단연 뛰어나겠지만 겨울에는 통제되는 곳이 워낙 많고

여름이라 하더라도 이 정도 퀄리티의 작품을 눈으로 보는 것은 상당한 운과 노력이 병행되지 않으면 힘들다.

 

 

 

시레토코는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사람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고

그 덕택에 사람과 접촉하길 꺼려하는 불곰 등이 자연스럽게 시레토코 곶 주변에서 서식하고 있다.

여름에는 배를 타고 곶 주변을 돌며 불곰을 관찰하는 프로그램도 성행중이지만 겨울엔 유빙때문에 배가 움직이지 못하고

어차피 불곰들이 겨울잠을 자러 들어가 버리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 상품은 전부 휴무가 되어버린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자연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라, 이곳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사시사철 한 번씩은 찾아오는게 일과라고.

 

 

 

무료 입장이다 보니 많은 걸 바라지는 못하지만 충분히 멋진 사진들과 바닥에 깔린 불곰과 여우의 발자국 등이 재미있게 꾸며져 있다.

지붕 위쪽에 흰꼬리수리 사진을 배치하는 등 입체적인 전시를 위해 노력한 흔적도 좋다.

 

버드 워칭 등을 즐기는 사람들에겐 끈기와 횟수가 중요해서, 나처럼 겨우겨우 몇 년만에 찾아오는 사람으로서는 접하기 힘든 체험도 많이 할 듯.

 

 

 

특수한 목적 이외에는 들어갈 수가 없는 시레토코 반도 선단부.

좌측 지도의 푸른 해안선이 시작되는 곳이 현재 본인이 서 있는 우토로 마을이다.

 

현재 동아시아에서 불곰의 서식 밀집도가 가장 높은 곳이기도 한데, 워낙 자연 친화적인 주민들이기도 하고

관광객들에게 불곰에 대한 대처법을 철저하게 숙지시키기도 해서 아직까지 인명 피해가 난 적은 없다.

농작물 피해는 빈번히 일어난다고 하지만 적절한 보상도 주어지고, 주민들이 애초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여름엔 며칠만 머물러도 불곰 보기가 어렵지 않다고 한다. 예전에는 딱 하루 숙박했을 뿐이고

그 날 불곰 출현이 목격되었기 때문에 오호 중 첫 번째 호수를 제외하고는 전부 출입금지가 되어버려 볼 수가 없었다.

물론 운이 좋으면 첫 번째 호수를 거니는 불곰도 볼 수 있었겠지만.

 

출입금지지역이 아닌 라우스산을 비롯한 몇몇 봉우리들은 여전히 불곰과 조우할 가능성이 크기도 하고

사람 손을 타지 않은 굉장히 험한 산이기 때문에 전문 가이드 없이 그냥 설렁설렁 올라가는 것은 위험한 편에 속한다.

라우스산은 겨울에도 등반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해안선에서 바로 시작하는 1600m 짜리 설산 등반은 나에게는 무리.

 

 

 

비싸고 화려한 전시보다는 속이 알찬 느낌이 드는 곳이다.

겨울엔 유빙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해상보안청의 유빙정보나 직접 찍은 유빙 사진들을 정보로 전시하고 있다.

매년 유빙이 처음 보이기 시작하는 날도 기록해 놓는 등, 여러가지로 꼼곰한 정보를 보여준다.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시레토코에서 1주일 정도 머무르며 곳곳의 비경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솔솔하겠지만

나처럼 짧은 시간안에 홋카이도를 최대한 돌아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아쉽지만 맛보기로 훑어볼 수밖에 없다.

 

 

 

시레토코는 '이런 멋진 곳이니까 많이들 오세요'라는 관광지의 마음가짐보다는

'이런 멋진 곳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라는 느낌을 주는 곳이다.

실제로 마을 사람들은 관광지 수입과 동시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와서 자연이 훼손되는 것을 걱정하기도 하는 머리아픈 고민을 하고 있다.

 

오호 주변 트래킹도 팀당 인원을 제한하고, 반도 선단부를 둘러보는 유람선도 크기와 출항 횟수를 제한하는 등

돈만을 생각한다면 필요없을 노력을 많이 기울인다.

 

관광이라는 것이 소모적인 발상으로는 유지될 수 없다는 기본 상식임에도, 그걸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으니까.

 

시레토코 양 쪽 해안선에 자리잡은 두 개의 마을, 우토로와 라우스 각 지역에서 관찰되는 독수리의 숫자를 매주 기록해 나가는 챠트도 전시되어 있다.

흰꼬리수리와 참수리로 종류를 나눠서 기록하는 꼼꼼함도 보인다. 안일한 관광지라면 얻을 수 없는 정보.

 

 

 

누군가가 그려놓은 흰꼬리수리의 그림은 겨울 철새의 고독감과 강인함을 미려하게 표현해 놓았다.

자연은 딱히 치장하지 않아도 너무나 아름답다는 진리를 몸으로 체감하는 지역의 사람들이라

맛있는 먹거리와 편리한 기반시설로 무장한 도시 관광지와는 다른 매력을 사방에서 체감할 수 있다.

 

이 그림을 삿포로의 어느 미술관에서 보게 되었다면,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을 그대로 느끼기는 힘들었을 듯.

 

 

 

숙박지도 잡지 않은채로 짐을 짊어지고 너무 시간을 많이 보낸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

늦기 전에 호텔로 들어가 내일 트래킹 예약도 해야 하지만, 왠지 들어가서 짐 풀고 나면 다시 나올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을까.

 

삿포로와는 달리 눈 치우는데도 한계가 있는 곳이라 중간중간 얼어있는 땅이 많다. 걸을 때 한층 조심해야 한다.

 

 

 

자전거 여행 때 묵었던 호텔은 당연하게도 자전거로 가기 가장 편한 길가에 위치해 있다.

시레토코의 고급 호텔은 상당수가 경치가 좋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는데다가 경사가 무시무시해서

관광용 버스를 타고 올라가지 않는다면 꽤나 힘든 언덕이었으니, 자전거로 잘 엄두도 내지 않았다.

 

반가운 기분으로 호텔로 들어가는데, 전혀 예상밖으로 빈 방이 하나도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여름에도 예약 없이 바로 들어갈 수가 있었는데 비수기인 겨울에 만실이 되어버렸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중국인 관광객이 많이 온다는 말을 미안한 표정으로 건네는 프론트 직원의 말에 다시 한번 세상 참 빨리 변한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일본의 관광지에서는 예약 없이 숙소를 찾으로 오는 사람이 별로 없긴 하지만, 이 일본 최북단의 조그마한 마을에까지 사람이 들어차는 것은 놀라울 따름이다.

이제껏 버스에 내려서 밖을 돌아다니는 관광객은 한 명도 없었는데, 다들 관광버스를 타고 먼저 와 있던 것일까.

 

투숙을 하지 못한다는 점 자체는 별 것 아니지만, 예전의 추억을 되살려 보려 했던 시도가 무산되어서 아쉬움이 크다.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는데 문 밖에 동사한 새 한마리가 쓰러져 있다. 타이밍도 좋게 이 녀석을 보니 더욱 서글퍼지는 기분.

 

옆의 정원에 녀석을 옮겨주고 일어나니 살짝 걱정도 된다.

혹시 시레토코의 모든 호텔이 전부 만실이라면 나는 오늘 여기서 얼어죽는 것일까. 물론 그럴 가능성은 한없이 낮지만.

 

하는 수 없이 터벅터벅 걸어서 다른 호텔을 찾아본다.

언덕 위의 호텔은 어쨌든 올라가기 귀찮으니 최후의 수단이고, 해안가에 인접한 거대한 호텔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와서 걱정하며 들어가 본다.

자전거 여행당시 묵었던 호텔의 세 배는 되는 육중한 덩치의 호텔인데, 로비에 사람들이 가득해서 걱정부터 먼저 든다.

조심스럽게 혼자 묵을 방이 있냐고 물어보니 잠깐 조사를 해 보더니 괜찮다고 한다. 안도의 한숨.

 

가격은 10만원 정도로 본인 입장에서는 싼 편이 아니지만, 비지니스 호텔이 아니라 굉장한 관광호텔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납득이 간다.

계산을 마치고 키를 받을 때 프론트 직원이 오늘 저녁 오로라 레이저 쇼가 열린다며 팜플렛을 한 장 건네준다. 일단 내용은 들어가서 보기로 한다.

 

 

 

여러 번 증축을 거듭했는지 호텔은 본관, 신관, 별관으로 나눠져 있고 각각의 구역으로 들어가는 엘리베이터도 따로 배치되어 있다.

가장 저렴한 별관 방으로 들어갔는데도 문을 열고 들어간 첫 인상은 내게 너무도 과분한 느낌이라는 감탄 뿐이다.

 

화장실과 샤워실은 현관 앞 이중문 사이에 위치해 있고, 자동 조절되는 매립식 난방기 덕분에 방 안은 이미 따뜻한 상태.

비지니스 호텔과 비교하면 안에서 자전거 타고 될 정도로 넓직넓직한 크기에, 고풍스러운 디자인까지 본인을 압도한다.

 

여기에 조식, 석식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는 가격이니 이 정도면 오히려 저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당연하겠지만 관광호텔이나 싱글은 없으니 트윈을 마련해 준 듯 하다. 공간을 생각하면 더블룸을 주는 게 더 나았을 법 하지만.

밖이 워낙 추워서 그닥 활용도는 없지만 베란다 비슷한 공간에서 느긋하게 앉을 수도 있으니 세삼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여름에 왔다면 여기 앉아서 느긋하게 창가를 바라보는 재미도 음미할 수 있었겠지만, 그러고보니 바깥 풍경도 매우 훌륭하다.

 

 

 

TV가 놓인 책상 쪽에도 투숙객을 흡족하게 하는 것들이 비치되어 있다.

시레토코풍 시간이라는 이름의 과자와 함께 특허상품이라는 고급 효자손까지 놓여있어서, 노년층 관광객들의 편의를 봐 준다.

 

일본은 노년층의 관광 수요가 매우 높은데다가 기본적으로 자금 여유도 넉넉한 편이라 그 계층을 잡기 위한 지역의 노력이 대단하다.

맛있는 식사와 훌륭한 편의시설, 뜨끈한 온천 등이 고급 숙박지의 기본 소양.

 

나 같은 사람이 혼자 이런 곳에 투숙한다는 게 왠지 굉장한 낭비인 것 처럼 느껴지는 건 무리가 아닐 듯 하다.

 

 

 

공간이 널널해서인지 비지니스호텔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용적률을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가루차도 녹차 호지차 커피 등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다.

 

원래 2인용 객실이라 그런지 모든 용품들이 두 개씩 진열되어 있는데, 적정한 금액을 지불했으니 마음껏 써도 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왠지 혼자 오게되면 이것들 중 하나씩은 소중하게 남겨놓아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들 때가 있다.

 

 

 

오래된 호텔이라 전자식 키카드 같은 건 없다. 나무를 깎아 만든 썩 괜찮은 모양의 열쇠고리가 인상적.

키카드는 소지가 간편하지만 그 대신 잠깐잠깐 밖으로 나갈 때 객실의 모든 전원이 전부 꺼져버리기 때문에 난감할 때도 있다.

이런 옛날식은 전원을 켠 채로 나갈 수 있어서, 휴대폰을 충전하거나 할 때 유용하기도 하다.

 

본인 입장에서는 이런 고급 호텔에 묵었다는 자체가 매우 신기한 경험이라 방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사진 찍기 바쁘다.

한동안 감동에 젖어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네이처 가이드 투어 쪽으로 전화를 건다.

급작스러운 예약 요청에 잠깐 알아보고 다시 전화를 주겠다는 대답이 돌아와 살짝 긴장한 상태로 대기중인데

3분쯤 지나니 전화가 와서 투어가 가능하다는 희소식을 알려 준다. 가이드비는 1만엔. 하루종일 가이드 역할을 해 주니 비싼 편은 아니다.

 

오호는 현재 폐쇄상태기 때문에 식사도 물도 전기도 화장실도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미리 주지해 준다.

점심거리는 편의점에서 준비해 가기로 하고 방한복이나 베낭 등은 모두 가이드 쪽에서 제공해 준다고.

현재 옷 상태로도 추위를 느낄 정도는 아니지만, 오호 쪽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환경이니 방한복을 입을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무사히 예약을 마치고 한 숨 돌린 후, 호텔 로비에서 받은 오로라 판타지 팜플렛을 살펴보기로 한다.

아무래도 믿기가 어렵지만 1958년 시레토코에는 오로라가 출현한 적이 있다고. 그것을 재현하기 위해 시작한 레이저 쇼가 지금에 이르고 있다.

위도를 생각해 봤을 때 시레토코에서 오로라가 보인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어렵지만, 극히 낮은 빈도로 위도 60도 이하의 지역에서 나타나기도 한다니 믿을 수 밖에.

 

겨울이라 관광 수입이 확연히 줄어드는 계절에 어떻게든 자구책을 생각해 보려는 마을 사람들의 열의가 느껴져서

레이저 쇼 자체에는 그다지 기대감을 갖지 않았음에도 관람료 500엔 정도는 흔쾌히 지불해도 괜찮으리라 생각하고 프론트에 내려가서 티켓을 구입한다.

시작은 8시 부터라서 그 전에 석식을 먹으면 될 듯 하다. 옥상에는 훌륭한 온천도 있다고 하니 레이저 쇼 끝나고 몸을 녹이면 딱 좋을 것 같다.

 

 

 

사실 이 호텔 안에서는 꽤나 저렴한 방이라 그런지 창밖 풍경이 바다가 확 트여 보이는 방향은 아니다.

하지만 나로서는 훨씬 정감이 가는 모습인데, 저 멀리 보이는 오르막길이 자전거로 오르며 개고생했던 그 길이라서.

 

저기를 넘어갈 때만 해도 꽤나 가파르구나 싶었지만, 그 후에 이어지는 시레토코 고개는 중간에 비도 쏟아지고 해서 참 막막했던 기억이 난다.

저 위에서 이쪽을 바라보면 우토로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아마 내일 즐길 오호 투어도 저 곳을 통과해 갈 것이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그 경치를 감상할 수 있으리라 예상해 본다.

 

바다가 얼어있는 모습은 생전 처음 보지만 지금은 해가 많이 저물고 있어서 크게 감흥이 오지 않는다.

가난한 본인에게는 너무 사치스러운 호텔의 모습에 놀라고 해서 기분이 많이 들떠있다. 내일부터는 조금 더 진정하고 경치를 감상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지니스 호텔에서는 석식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대충 편의점에서 때우거나 했는데

이곳의 석식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 하며 6시쯤 식당으로 향한다. 식당은 본관과 신관쪽에 위치해 있어서 이쪽에서 가려면 꽤나 많이 걸어야 한다.

 

슈퍼 호텔의 조식은 저렴한 비지니스 호텔 중에서는 단연 훌륭하다.

토요코인의 별 것 아닌 주먹밥 정도라면 수면욕을 충족시키는게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지만

이곳에서 조식을 먹지 않는다면 한나절 정도는 아쉬워 할 것이 틀림없다.

 

이곳의 커튼은 딱딱한 플라스틱이라 일반적인 커튼과 달리 아침이 오는 모습을 판단할 수 없다.

알람을 끄며 커튼을 걷어올리니 세상은 이미 새햐얗게 빛나고 있다.

광도높은 햇살이 아니라 소리없이 쏟아져 내리는 눈줄기로.

 

삿포로에서 아사히카와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기 때문에 동물원에라도 다녀 올 시간이 있었지만

아사히카와에서 시레토코까지는 열차 한번 버스 한번 갈아타며 6시간이 넘는 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딱히 할 일이 없다.

 

장거리 이동이 많은 이번 여행의 특성상 평소 별로 사용하지 않는 스마트폰에 애니메이션도 몇개 넣어올 정도로 준비는 철저하다.

원체 멀미가 심한 편이라 열차에서라도 장시간 시청은 불가능하지만, 하루종일 음악만 듣는 것도 좀 지겨울테니까.

 

 

 

쏟아지는 눈도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별다른 감흥 없이 역으로 향한다.

시레토코는 눈이 많이 오면 이동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부디 내일부터는 날씨가 맑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아사히카와에서 아바시리(網走)까지 기차를 탄 다음 조그마한 원맨열차로 갈아탄 후 다시 한시간쯤 달리고

철도가 부설되어 있는 마지막 마을인 시레토코 샤리에 도착해 다시 우토로(ウトロ)까지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자전거 여행 당시엔 한여름이었기 때문에 기차 시간표 따위 신경쓰지 않고 그저 곰이나 사슴이나 두려워하며 대자연에 휘감긴 시골도로를 달릴 뿐이었는데

겨울의 홋카이도는 그런 짓 하기에 본인의 생존 능력이 심히 떨어지니 얌전히 일반적인 여행을 즐겨야 한다.

 

한번 타면 꽤나 오래 달리는 것이 홋카이도 철도다 보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도시락을 미리 싸들고 승차했다.

조식을 든든하게 먹고 왔기 때문에 딱히 더 이상 먹을것에 신경 쓸 필요는 없었지만, 대설원의 풍경을 바라보며 먹는 도시락도 나름 분위기 있어 보인다.

이런 곳에 열차가 달린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가득 쌓인 눈더미 속을 질주하는 모습은 한국에서 경험하기 힘들기 때문에 더욱 각별한다.

 

 

 

일단 손에 카메라를 쥐고 전원을 켠 상태로 바깥 풍경을 감상한다.

진짜 괜찮은데 싶은 풍경이 단 몇 초만에 시야에서 사라지는 경험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 걸까.

사진 촬영에는 과감함과 결단력이 필요하다는 말이 이런 상황에서는 절실히 동감된다.

 

아직까지는 사람 사는 마을이 많이 보이긴 하는데, 대체 겨울엔 뭐 하고 사는지 궁금할 정도로 온통 눈에 파묻힌 모습들.

사실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은 홋카이도에서는 겨울이 추수철 만큼이나 바쁜 계절이라고 한다.

겨울에 무슨 농사냐 싶겠지만, 일본 최대의 낙농지역인 이곳은 겨울에 강한 젖소종들이 바쁘게 젖 짜고 새끼 치느라 정신이 없다.

감자 등의 작물은 겨울에 눈 속에 파묻어 두어 천연 저장고 역할을 하기도 하고, 거대한 농경지는 지금부터 트랙터로 손질해 줘야 봄부터 씨를 뿌릴 수 있다.

 

 

 

창문이라는 필터를 통해 들어오는 빛임에도 불구하고 고속으로 이동하는 와중이라 그런지

때마침 맑아진 하늘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눈밭이 굉장히 자극적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다이아몬드를 좋아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방에서 반짝이는 모습이 아름답긴 하지만

눈에는 심히 과한 자극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뷰파인더를 들여다보지 않는 동안에는 실눈을 뜨고 쳐다봐야 할 정도.

두시간 정도 바라보고 있어도 지겹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이러다가 눈에 무리가 갈 것 같아서

중간중간 음악도 듣고 애니메이션도 보고 하면서 느긋한 시간을 즐긴다.

 

자전거 여행 당시엔 시간적인 제한이 없었지만 체력적인 문제와 함께, 해질 무렵에 최소한 마을 모습이라도 보이지 않으면

어디서 곰이 튀어나오는거 아닌가 심히 걱정이 되어서 생각만큼 여유롭게 달리지 못했었다.

 

따뜻한 열차 안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므라즈과 함께 하는 여행도 나름 나쁘진 않다는 생각을 참 오랜만에 해 본다.

 

 

 

 

 

아바시리에 도착해 밖으로 나온니 기차 안 여행이란 게 어느 정도 현실감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세삼 깨닫는다.

하늘은 여지없이 맑지만 대낮에 영하 5도 밑으로 내려가는 차가운 공기는, 창 밖의 풍경이 온도를 가지지 않은 그림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시레토코에 들어가기 전 철도가 부설되어 있는 마지막 마을인 만큼 적당히 사람 사는 느낌이 드는 곳.

4년 전 자전거 여행때와 똑같이 '열차와 호텔을 세트'로 판매하는 광고가 그대로 붙어 있다.

워낙 이동과 숙박이 힘든 곳이니 내국인이라면 저런 걸 이용해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만

예전엔 어차피 자전거 여행이라서 필요가 없었고, 이번엔 외국인 전용 할인카드인 JR 패스가 있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곳은 규모면에선 작은 마을이긴 해도 나름 관광지로서의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다.

뛰어난 사냥꾼이었던 홋카이도의 원주민 아이누족의 동상이 역 앞의 마스코트 역할을 한다.

이 앞에서 기념사진찍는 중국인 관광객이 매우 많다.

 

아바시리는 100년전의 감옥이라던가, 겨울에 쇄빙선이라던가 하는 볼거리가 있긴 하지만

2010년 자전거 여행 때는 중국인 관광객을 본 적이 거의 없었던 지역이라 생소하긴 하다. 시대가 변하긴 했나 보다.

 

 

 

바로 북쪽 바다가 오호츠크해다 보니 겨울엔 유빙이 생성되어 쇄빙선 관광도 꽤나 유명하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유빙 구경은 거의 할 수 없다 보니 이런 곳에 오는 것도 이해는 된다.

자전거 여행 당시엔 당연히 유빙이란 건 생각도 하지 않았고, 나름 유명한 아바시리 감옥도 입장료가 아까워 들어가지 않았다.

 

지금은 자금적인 여유가 있어도 시간적으로 여기서 하루 더 보내기가 쉽지 않아서 또다시 패스.

홋카이도는 마음먹고 구석구석 돌아도려면 적당히 잡아도 한 달은 필요하니, 모든 것 하나하나에 아쉬워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다음에 다시 한 번 더 찾아올 구실이 생겼다고 생각하면 가뿐한 기분이기도 하니까.

 

 

 

역 앞에는 아바시리 감옥을 본따 만든 붉은 벽돌모양 패널이 설치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해맑은 미소와 함께 쇠창살 안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참 초현실적인 풍경이다.

 

실제로 아바시리 감옥은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고 사회가 극도로 불안하던 100여년 전

땅끝 지옥이라 불리는 일본 최북단의 감옥으로서 그 악명을 떨쳤다.

수감된 죄수의 30% 이상이 무기징역형이었을 정도로 중범죄자 중심의 수용소이기도 했고

겨울 기온이 영하 20도 이하로 내려가는 이 곳의 환경상 죄수도 직원도 많은 스트레스로 인해 상해사고도 잦았다고.

 

당시의 혼란했던 일본의 사회상을 생각해 본다면, 이 곳에 수용된 사람들이 단순한 범죄자만은 아니었으리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방금 전 그림같은 겨울 풍경을 뒤로 하고 달려온 아사히카와에서 이곳 아바시리까지 230km의 도로를 닦는데 이 감옥의 죄수들이 동원되었다.

사망자만 200명이 넘고, 몸이 결박당한채로 공사판 인근에 버려진 시체도 자주 발견되는 등, 이 감옥의 악명은 대단했다.

 

일본의 전설적인 탈주범인 '5치 못의 토라키치'(五寸釘 寅吉)가 마지막으로 수감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발바닥에 5치, 약 15cm 가량의 못이 박힌 채로 12km 나 달려 도망쳤다는 전설적인 일화로 인해 그렇게 별명이 붙은 토라키치는

훔친 재물을 가난한 개척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홋카이도 감옥에서 탈주해 오사카에서 다시 잡히기도 하는 등

6번이 넘는 탈옥 경력을 가진 소설같은 삶을 산 인물. 이곳 아바시리 감옥으로 이송되었을 당시엔 나이도 많이 들고 해서 더 이상의 탈옥은 없이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다.

 

 

 

편의점에 들어가 따끈따끈한 호빵을 하나 사들고 씹어먹으며 여름 아바시리의 풍경을 되살려본다.

겨울과 여름이 완전히 다른 세계로 변하는 홋카이도라, 이 길을 달렸던 당시의 추억이 지금의 풍경과 매치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부터는 그럴듯한 열차가 아니라 승무원이 한 명밖에 없는 원맨 열차로 갈아타고 샤리 마을까지 이동.

장거리 이동이 많은 홋카이도 철도는 나름대로 본인 같은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있어서

열차 시간에 늦는다거나 하는 일 없이 대도시에서 출발한 열차의 도착시간과 10~15분 정도의 여유를 가지고 바로바로 연결되도록 해 놓았다.

 

물론 홋카이도의 겨울이란 게 그렇게 예정대로 흘러가는 상냥한 녀석이 아니다보니 별의 별 연착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본인은 홋카이도에서 사슴이 달리던 열차에 뛰어들어와 박히는 바람에 그거 처리하느라 1시간동안 기차 안에서 머물렀던 경험도 있다.

 

 

 

어디서나 자연의 풍취를 느끼기 쉬운 홋카이도지만, 시레토코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마냥 달렸던 자전거 여행 당시엔

압도적이라 할 만한 야생적 강인함에 적지 않게 놀랐던 기억이 난다.

 

사람의 출입이 차단된 시레토코 자연공원은 한국인으로서 접하기 어려운 자연림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매력적인 곳.

지금 한국에서 보는 99%의 산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조경 계획을 세운 것이라 자연림과는 확연하게 모습이 다르다.

가공되지 않은 자연의 모습은 훨씬 더 생명력이 넘치는 거칠고 무섭고 아름다운 느낌이 든다.

 

물론 그 때의 추억에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는 지금이지만, 앞서 언급했듯 홋카이도의 겨울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서.

 

중간에 삿포로에서 함께 여행했던 Y양이 서식하고 있는 키타미라는 마을에도 정차를 했는데

만나러 가고 싶은 마음은 적지 않았지만, 얼굴 보게 되면 어차피 키타미에서 하루 머물 수밖에 없는 시간대에다가

일 때문에 바쁜 분을 헐렁헐렁 찾아가는 것도 좀 미안한 느낌이라 그냥 통과하기로 한다.

 

 

홋카이도 북동부의 마지막 철도 역인 시레토코 샤리 역에 도착한다. 이제 여기서부터 자연공원이 있는 우토로까지는 버스로 이동해야 한다.

여기서도 한 규모 하는 중국인 관광객 일행들과, 노년층이 사박사박 모인 일본쪽 관광 단체들이 우르르 몰려가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는 관광 버스에 갈아타고 먼저 출발하는 모습이 연출된다.

 

본인은 점점 무거워지는 베낭과 사이드백을 짊어진 채로 감회에 젖어 예전의 그 모습을 떠올리며 연신 셔터만 눌러댄다.

아침의 그 폭설은 아직도 아사히카와 쪽에서 어른거리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의 날씨는 그냥 고개만 들면 자동적으로 입가에 미소가 돋아날 정도로 청명하고 순수하기 그지없다.

 

시레토코쪽 마지막 역이다 보니 깔끔하게 마무리 된 직사각형 모습이 매우 단아한 느낌이다.

날씨가 워낙 추운 곳이다 보니 내부에 편안하게 앉아 TV와 각종 지역자료를 살펴볼 수 있는 휴게실도 완비되어 있지만

본인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보게 된 그리운 시레토코의 정경이 아른거려서 주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주위를 서성이고 있다.

 

상호 연계가 미끄럽게 잘 이루어지는 철도와 달리 이곳의 우토로행 버스는 JR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40분 정도 기다려야 하지만

이런 화창한 날씨 아래서, 그것도 일본에서 자연환경이 가장 좋기로 유명한 시레토코 부근에서라면 결코 지루한 시간이 아니다.

 

 

 

자전거 여행때는 그냥 역 쪽으로 내려와 건물 사진과 함께 이 녀석만 담았던 기억이 난다.

불곰과 함께 시레토코를 상징하는 흰꼬리수리의 모습. 멸종위기 1급 동물로 일본에서는 시레토코에서만 가끔 관찰할 수 있는 희귀종이다.

한국에서는 드문 겨울철새로 러시아에서 강원도로 이동해 오기도 한다. 생긴 것과는 달리 꽤나 세심하고 여린 성격이라고.

 

 

 

아늑했던 하룻밤을 책임졌던 루트인 호텔의 모습도 여전하다.

몬베츠(紋別)라는 곳에서 출발한 후 삼일 꼬박 비를 맞아가며 노숙했던 탓에 심신이 매우 지쳐있었던 때

시골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깔끔한 루트인이 떡 하고 나타나서 그 유혹을 이기기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관광이라고 해도 대부분 우토로 쪽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시설은 깔끔하고 사람은 그리 많지 않고 직원들도 친절하고 가격마저 다른 곳에 비해 저렴해서

코인 세탁기에 빨래 넣으러 가는 것조차 귀찮아 질 정도로 푹신한 침대가 천국처럼 몸을 감싸던 감각을 떠올린다.

 

사실 그 당시만 해도 시레토코에 대한 정보 따위는 거의 알지 못한채로 그냥 달리고 있었던 터라

여기서 신나게 쉬었으니 이제 또 시레토코를 확 통과해서 한동안 달려봐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도착한 시레토코의 풍경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대단한 것이라서 눈물을 머금고 또 하루 숙박했던 기억이 난다.

국립공원화 되어 있는 우토로 주변엔 텐트도 마음대로 치기가 어려웠으니.

 

거긴 또 고급 관광호텔 아니면 젊은 사람들 중심의 게스트 하우스로 레벨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곳인데다가

어찌된 일인지 게스트 하우스가 전부 문을 닫아서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관광호텔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내 표정이 심히 안스러웠는지 지배인으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혼자 왔으니 좀 싸게 해 줄게요' 하면서 숙박비를 3만원 정도 깎아줬다.

 

기본적으로 트윈 침대에 본가 큰방보다 더 큰 실내 베란다까지 구비된 진짜 관광호텔이라 살떨려서 잠도 못잘 것 같았던 추억도 있다.

 

시레토코가 그런 곳인 줄 알았다면 당연히 이곳 샤리에서는 머물지 않았을텐데. 여기서 우토로까지는 자전거로 가도 3~4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다.

하지만 이제와서는 그것도 좋은 추억이라고 씁쓸하게 웃을 수 있으니 어쨌든 후회할 일은 아니다. 여행이라는 건 후회하기가 더 힘들다.

 

 

 

키카드로 작동하는 호텔이었는데 체크아웃 당시 키는 기념으로 가지고 가도 된다고 말해줘서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새끼 바다표범이 프린트된 귀여운 흰색 키카드였는데, 그 때의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이번에도 거기서 묵을 예정이다.

 

놀랍게도 이곳 근처 역시 공항이 있다. 버스가 공항에서 출발해 이곳을 경유한다고 한다.

날씨가 기가 막히게 좋아서 아직까지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뿌듯해하며 고고히 앉아있는 흰꼬리수리의 모습을 이리저리 담아본다.

 

 

 

방향상 시레코토에 위치한 가장 높은 산인 라우스산은 아니지만 구름에 가린 모습이 살짝 불안감을 조성하기도 한다.

 

여름에는 전기 펜스로 둘러싸인 고가 다리을 걸어다니며 곰 서식지인 오호(五湖) 주변을 산책할 수 있지만

겨울에는 시레토코 고개를 포함해 대부분의 자연공원이 출입금지가 되기 때문에 적적함을 느낄 수 있다.

 

본인은 그 오호의 풍경을 잊지 못해서, 자격을 가진 가이드와 함께 하는 겨울 오호 투어를 신청할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지만

내가 아는 그 오호가 맞다면 어지간히 체력에 자신있는 사람이 아닌 한 겨울에 들어가는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걷는 스키를 타고 산을 올라가야 하는데다가, 오호 주변 역시 기본적으로 눈이 50~60cm 는 쌓여있기 때문에

겨울 중에도 한달 정도만 허가를 얻어 입산할 수 있는 겨울 시레토코의 특별 코스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날씨가 좋으면 돌연 취소되는 일도 비일비재해서, 내일 하루밖에 기회가 없는 나로서는 날씨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삿포로에서 이곳까지 직통버스가 있지만 10일간의 여행을 전부 그 두군데서 보낼수는 없으니 의미가 없다.

시레토코가 메인이긴 해도 다른 곳 역시 둘러볼 거리가 수북히 쌓인 곳이 홋카이도니까.

 

한동안 기다리자 버스가 슬금슬금 다가와서 버스에 탄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서 좌석의 절반 정도가 차 버린다.

겨울 시레토코라고 해도 역시 올 사람은 다 오는구나 하는 생각.

 

 

 

약 40분간 천천히 눈길을 달려 그 그립던 우토로에 도착한다. 버스에서 내리니 한동안 발걸음을 잊고 주위를 멍하니 둘러보며 서 있는다.

아직까지도 자전거 일본여행 중 가장 인상깊었던 곳을 물어보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 시레토코.

4년 즈음만에 다시 찾아온, 하지만 그 때와는 전혀 다른 고요한 풍경에 기차 여행으로 살짝 느슨해졌던 여행세포가 다시 끓어오르는 느낌이다.

 

 

 

안내소를 겸하는 미치노에키 우토로 시리에토크의 모습 역시 반갑기 그지없다.

온통 녹색 삼림과 푸른 바다로 뒤덮였던 여름과 달리, 생명력이라는 흔적은 온데간데 없이 모든것이 눈으로 쌓인 지금의 모습은

사계절이 뚜렷한 편인 한국사람이 봐도 그 갭을 실감하기가 쉽지 않다.

 

 

 

굳이 들어갈 필요는 없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가 본다. 관광으로 먹고 사는 곳이다 보니 어디서든 특산품을 팔고 있다.

일본에서는 유명 소설가가 검은 칼날의 끝이라 묘사하기도 한 시레토코는 아이누어로 '대지의 끝' 이라는 이미.

 

당연히 워낙 험한 자연환경 덕에 개발의 필요성도 없어서 방치되다시피 한 곳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목과 오염으로 지역이 더럽혀지자 이곳 마을 사람들은 자치단체를 형성해

이 지역을 보존하기로 마음먹었고, 그 결과 2005년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의 칭호를 획득하는데 이른다.

 

주민들이 이제껏 낸 기부금만 약 50억원에 달할 정도로 이곳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가서 보면 저절로 납득이 간다.

 

관광안내소에서 내일 신청할 오호 가이드 투어에 대해서 물어보니 원래는 1주일 전에 신청해야 한다는 무서운 답변이 날아온다.

하지만 신청자에 여유가 있으면 바로 전화해봐도 될 거라며 팜플렛을 한 장 준다. 자기네들이 전화해 줄 정도의 섬세함은 없는 듯.

 

 

 

해가 빨리 지니 이제는 예전 신세를 졌던 그 호텔로 향해야 한다.

예약 없이 온 것이 좀 걸리긴 하지만 겨울 시레토코에 그렇게 관광객이 많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서 크게 걱정은 되지 않는다.

성수기라는 여름에도 그냥 들어가서 방을 구했으니 지금이야 문제가 있겠냐는, 일본인 관광객이라면 하기 어려운 발상을 해 버린다.

 

오늘은 더 이상 할 일이 없으니 조금씩 저무는 태양이나 기념으로 한 장 담아주고 반갑기만 한 시레토코의 풍경을 한 걸음씩 음미하며 호텔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