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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에 해당하는 글들

  1. 2012.03.25  후쿠오카 여행 - 다자이후 텐만구의 매화 13
  2. 2012.03.24  후쿠오카 여행 - 다자이후 텐만구로 향하는 길 6
  3. 2012.03.23  후쿠오카 여행 - 다자이후의 늦은 봄 8
  4. 2012.03.22  후쿠오카 여행 - 프롤로그 19

원숭이 묘기를 감상한 후 천천히 텐만구 본전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들어가기 전에도 매화나무는 여기저기서 보이니 서두를 것 없다.
이 때쯤 되니 정신이 더욱 몽롱해 지는데,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왜 찍었는가 가물가물한 사진들도 가끔 보이더라.


본전으로 통하는 입구가 이 정도로 화려한 텐만구는 별로 없다.
텐만구 주위를 살짝 감싸는 나즈막한 산의 푸른색과 매화의 흰색, 무거운 붉은색의 입구의 조화는 실로 아름답다.
여기에 푸르른 하늘만 더해졌으면 좀 더 넓은 사진을 담았을 테지만... 우중충한 회색 하늘은 살짝 빼버리는게 나은 느낌.


매화나무 아래에 앉아 있어서 그런가, 조금 전의 황소보다는 좀 더 여유가 느껴지는 듯 하다.
뒤에는 봉납된 일본 전통주들이 배경이 되어주고 있다.
보통 신사들은 저 봉납주들을 좌르륵 배치함으로써 '나 이런 신사야'라는 듯한 위엄을 자랑하는데
이곳 텐만구는 어쩐 일인지 그다지 시선을 끌지 않는 곳에 소복히 배치해 놓은 점이 특이하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신성하고 위압적인 느낌보다는 운치있고 친근한 느낌이라서 그럴까.
아마 이곳을 대표하는 매화의 이미지가 무의식적으로 암약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 본다.


만개하진 않았어도 매화는 매화. 꽃은 언제 어디에서나 아름다울 뿐이다.
곤충으로 치면 탈피, 인간으로 치면 출산이나 마찬가지인, 응축한 생명력을 목숨걸고 일시에 폭발시키는 행위인데
어떤 종이든 그것은 역시 숭고하고 아름다운 듯.


본전 쪽으로는 좀처럼 발길이 가지 않는다. 주위에 담고싶은 풍경들이 자꾸자꾸 나타나서.
바다 건너서 관광지까지 왔으니 뭔가 본전을 찾아야지 하는 생각이 저절로 사라지고
그냥 발걸음과 시선이 이끄는 대로 터벅터벅 걸어다니며 풍경을 즐기게 만들어주는 곳이다.


텐만구 바로 옆 골목길에는 조그마한 노점상들이 타코야키나 옥수수구이 등을 팔고 있다.
가끔 아이스크림이나 타코야기 들고다니며 먹는 젊은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다자이후 텐만구 안에는 쓰레기가 단 한조각도 없었다.
입구 바깥에서 담배피던 개념없는 한국인 관광객 무리를 제외하면.
이게 그렇게 어려울 일일까 항상 궁금하긴 했다. 나도 태어나서 한 번도 공원내에서 쓰레기 버린적이 없는데.

이런데서 쓰레기 한번 버려주지 않으면 금연이나 금주중인 사람처럼 초조하고 안절부절한 걸까?


160종이 넘는 매화라고 하니 정말 신기한 녀석들이 간간히 보인다.
매실 따먹으려고 매년 봄에 전지하던 매실밭 녀석들도 가만 놔두면 이렇게 되는 건가?
풍류를 즐기려면 전지를 포기하고 1년 정도는 이렇게 매화가 만발하도록 놔두는 것도 괜찮긴 하겠는데.
물론 그 다음해 전지에서 지옥을 맛보게 될테니 그냥 우리 밭의 매실나무는 매실만 튼실하게 자라나주길 바랄 수 밖에.


조그마한 연못엔 거북이가 부족한 일광욕중이다. 바닥의 상태를 보니 올라와서 한참 지난 듯 하다.
상당히 멀리 있던 녀석인데, 사진으로 확인해보니 뒷다리를 집어넣고 한껏 느긋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주변에 드문드문 떨어진 매화잎사귀를 보니 이녀석도 풍류를 즐기는 듯한 느낌이 든다.


꽃을 볼때면 아무 생각도 말도 불필요한 것으로 느껴진다.
그냥 보고 즐기면 그걸로 행복하다.


매화는 아직 봄을 알리기엔 조금 이른 듯 하지만
대지와 가까운 곳에서는 분명히 봄이 느껴진다.
다들 매화의 아름다움에 시선을 뺏기고 있지만 이 녀석들은 묵묵히 제 할일을 하는 중.


본가 매실밭에서 꽃잎이 몽글몽글할때 새순들을 전지해 버린 기억이 있어서
이게 매화인지 벚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활짝 피려고 준비중인 녀석들이 반갑다.
매화는 눈이 호강하고, 매실은 배를 채워주니 어느 쪽으로든 좋은 녀석들이다.


한참동안 꽃구경하며 돌아다녔더니 아직 본전쪽으로는 이동하지도 못한 상태.
잠 하루 안자고, 배멀미에 시달리고 나면 체력이 이렇게 떨어진다는 것을 실감중이다.
저녁엔 친구한테 부탁받은 것들을 둘러보러 번화가인 텐진(天神)으로 가 봐야 하기 때문에
꽃구경도 좋지만 이제 슬슬 진도를 나가볼까 한다.


오랜 방황끝에 본전쪽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좀 번들번들해 보이던 입구와는 달리 본전쪽은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중후한 느낌이 든다.
오른쪽의 매화나무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사후 하룻밤만에 쿄토에서 이곳까지 날아왔다는 그 매화나무.
그래서 이름도 토비우메(飛梅)라고 한다. 거 참 빠르기도 하지.


토비우메보다는 이 녀석이 주변 환경과 참 잘어울려서 한 컷 담아봤다.
본전의 왼쪽에 분홍 매화, 오른쪽에 흰 매화라. 참 운치있는 광경이다.


본전 안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이것.
점점 커가는 매화나무를 위해 울타리 부분을 뚫어낸 마음가짐이 훌륭하다.
소소한 배려지만, 그 덕분에 하나의 조각상과 같은 조화로움이 눈길을 끌게 한다.
다자이후 텐만구의 깊은 역사와 훌륭한 경관은 이런 세심함이 있었기에 더욱 빛이 나는게 아닐까.


일본 신사에 들어가서 이 에마(絵馬)를 카메라에 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원래는 진짜 말을 봉납했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겐 꿈도 꾸지 못할 헌물이었고 신사 측에서도 말의 관리에 힘들어했기 때문에
나무나 종이에 말을 그려서 대신 봉납하던 관습이 지금의 에마 시스템을 만들게 되었다. 신사의 주요 관광 수입원중 하나.

신사에 들르면 여기서 재미있는 소원이 적힌 에마를 찾아보는게 빼먹을 수 없는 즐거움인데
텐만구의 총본산인 이곳은 그야말로 거의 대부분의 소원이 성적에 관련된 것들이라서 별로 재미가 없다.
한글로 써진 에마도 상당수 있었는데, 그런 것들은 높은 확률로 커플의 염장질이 낳은 산물일 가능성이 있다.


신에게 비는 소원이란 개인적이어서는 안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브루스 올마이티를 보시길.

조금 진부하긴 하지만 이 정도 내용이라면 이곳의 신도 납득하지 않을까 싶다.
'이 에마를 본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를' 이라는 내용이다.
이 녀석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조금은 행복해 진 듯한 느낌이 들었으니 소원은 이루어 졌겠지.


글씨를 보니 어린아이가 적은 에마인 듯 한데...
아마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씨도 대체 이 녀석이 뭘 빌었을지 궁금해 했을 듯.
뭘 어쩌라고?


본전 주변은 조형적으로도 그렇지만 색상의 조화가 훌륭하다.
일본에서 가장 신성하다는 이세 신궁을 비롯해 상당수의 신사들 중
이렇게 알록달록한 신사는 손에 꼽을 정도니까.

영험한 색으로 여겨지는 붉은 색의 건물과, 그 주위를 매꾸는 푸른 숲이 일본 신사의 기본 배치인데
수많은 매화꽃이 더해지니 좀 더 친근해지는 느낌이다. 일본의 신사는 이 정도로 어깨의 힘을 빼는게 좋다.


만족스럽게 구경후 왔던 길을 되돌아 텐만구를 빠져나가는 중.
같은 길이지만 방향에 따라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전혀 달라진다.
이건 신사뿐만 아니라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진리라는 것을 자전거 여행중 깨달았다.
도쿄와 나고야를 왕복하던 도중, 급하니까 이건 돌아올 때 찍어야지 하고 지나갔던 것들은
돌아오면서 보니 그 때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달라서 '이 곳이 정말 그때 그 곳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으니까.

센다이 주변의 인심좋은 모텔 아주머니가 인생의 교훈으로 삼던 '一期一会'라는 말과 일맥상통 할 듯.


가던길에 담았던 중요문화재 지하사의 모습도 한번 더 담아본다.
보수야 수도 없이 거쳤겠지만 600년 전의 목조 건축물이 이 정도 수준으로 보호되고 있다는 것은 감탄할 만 하다.

건축 당시에는 이 앞에 불단과 금으로 만든 제구들을 놓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지구상의 금속 중 가장 안정화된, 자연적으로는 결코 부식되지 않는 불멸의 상징인 황금은
아마도 인간의 욕심때문에 역사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아무런 가치도 없고 쉽게 상하는 나무재질의 사당만은 600년동안 살아남아 전해지고 있다. 역사공부는 이렇게 하는 게 아닐까.


이끼와 풀로 덮힌 나무의 모습은 언제 봐도 마음에 든다.
일부러 찾아다니진 않았지만, 한국에서는 그다지 본 기억이 없는 모습.
나쁘게 보면 나무에게 기생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살짝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리얼한 버전이라고 볼 수도 있어서 좋다.


이 정도 되면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 미술 작품이 되는구나.
나이테는 나무를 잘라내야 확인할 수 있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 저절로 나이가 연상되는 듯 하다.

시각은 5시 쯤이라 여유가 있는 편인데, 체력적인 여유가 많이 부족해서 슬금슬금 텐만구를 빠져나온다.
사실 다자이후에 온 이유가 이곳 텐만구 이외에도 하나 더 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널널한 것도 아니다.
친구에게 부탁받은 물건은 오늘 중으로 구입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서
일단 가게 위치와 판매 여부 확인차라도 7시 반 정도까지는 텐진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곳에서 텐진까지는 30분 조금 더 걸리기 때문에, 살짝 조급만 마음과 파들어가는 안구를 진정시키며 텐만구를 나선다.

텐만구로 향하는 길엔 어디나 그렇듯 기념품점과 특산품점이 늘어서 있다.
이런 거리를 걸을 때면 항상 인사동 거리가 머리속에 떠오른다.
시각적인 면에서 인사동과 이런 거리를 비교하는 것은 각각의 필터를 따로 사용해야 한다고 예전부터 생각해왔다.

텐만구(天満宮)는 학문의 신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를 모시는 신사를 일컫는 총칭이다.
미치자네는 헤이안 시대의 실존하는 유명한 학자였으며 관직에서 좌천된 후 사망했는데, 그 후 황족들의 돌연사가 이어지자
원인으로 지목된 그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신으로 추대하였다고 한다. 신으로 추대받는 사람치고는 좀 째째한 그릇인가.

예나 지금이나 학문의 성취는 출세의 길로 들어서는 1관문이었으니, 이 사람을 모시는 텐만구가 번성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 중에서도 이 다자이후 텐만구는 일본 텐만구의 총본산이기 때문에 그 이름이 가지는 의미는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원래 텐만구는 다른 유명 신사에 비해 규모면에서는 그리 크지 않지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텐만구인 호후 텐만구(防府天満宮)와 함께 가장 아름답고 규모가 큰 텐만구로 유명하다.

이런 텐만구 앞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란 어떤 것일까.
집단성이 강해서 문제 일으키면 마을에서 살아가기 힘들었던 일본인들의 의식과 결부되어
다자이후 텐만구의 얼굴 역할을 맡은 자신들에 대한 자부심과, 그 명성을 더럽혀서는 안된다는 강박 관념이
지금의 정갈하고 수준높은 상가 거리를 만들었다고 개인적으로 추론해 본다.

이걸 단순히 '전통적'이라는 너무나 포괄적인 범주에 함께 놓고 생각해서 인사동 거리와 비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
물론 개인적으로 인사동 거리는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긴 하지만, 그 문제점을 지적할 때 이쪽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애초에 인사동 거리에는 다자이후처럼 집단 최면에 가까운 신비성과 경건함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3.1운동 시발점으로 알려져 있긴 하지만, 지금의 인사동은 어두운 60년대를 힘겹게 보내던 사람들의 추억이 여기저기 모인 자연집합체와 같은 느낌.
각종 약재상, 허름한 잡동사니 가게들, 통금후 갈곳 없는 시민들의 배를 채워주던 막걸리 가게가 그 시발점인 것이다.
시작부터가 경건함을 무기로 한 텐만구 앞의 상점 거리와는 전혀 다른 거리였으니,
훨씬 난잡하고 국적불명의 싸구려 짝퉁들이 판치며, 아무렇게나 비집고 들어오는 자동차들로 혼잡한 인사동의 거리는
원래부터가 그런 시장바닥의 구수함을 느끼며 성장해온 곳이기 때문에 그 점이 오히려 매력으로 다가온다.

문제는 이 거리가 외국인 관광명소로 어찌어찌 알려지다 보니, 괜히 마음에도 없던 전통의 향기를 온 몸에 뿌리려 한다는 점이지.
인사동 거리는 애초에 조선시대 이전의 향기가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걸 이제와서 있어보이는 찻집과 미술관 등으로 치장하려 하니
근본 깊숙히 내제되어 있는 무질서의 매력과 충돌하는 바람에 이도저도 아닌 난잡한 거리로 전락해버리고 있는 느낌이다.

신토와 같은 종교도 없었으며, 처절한 근대사의 흔적을 여전히 지우지 못하는 한국에서 이런 식의 상점 거리는 존재하기 힘들다.
인사동같은 경우엔 차라리 도쿄 우에노의 아메요코 시장같은 분위기를 지향하는 편이 본래의 취지에 걸맞는고 생각한다.
아메요코 시장이 텐만구의 상점 거리보다 레벨이 낮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이곳 다자이후 텐만구는 6000그루의 매화나무가 유명하다.
신화에서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숨을 거둘 때 쿄토에서 날아와 하룻밤 사이에 꽃을 피웠다고 한다.
물론 벚꽃도 많이 있어서 2월 말에서 3월 초엔 매화, 3월 중하순에는 벚꽃의 향연을 즐길 수 있다.
원래는 지금쯤 만개했을 벚꽃을 노리고 이곳에 왔지만,
이상기온으로 인해 매화는 대충 저물어가고 벚꽃은 아직 피지 않은 묘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녹색과 분홍, 흰색의 하모니를 즐길 수 있었으니 이걸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로 한다.


하지만 정말로 운이 없다고 해야 할까. 악연이라고 해야 할까.
아침에 코비호에서 담배피던 망할 아저씨 일당들이 여기도 찾아왔다.
흡연가능구역이 아닌 곳에서 자기들끼리 담배 피워대며 사투리로 뭐라뭐라 지껄이고 있다.
하필이면 여기서 또 만나게 되다니... 제때가 아닌 벚꽃보다 이 인간들 얼굴때문에 기분이 팍 내려앉는다.
나는 부디 나이 처먹어도 저런 짓은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그 인간들이 담배피던 곳을 한장 담아본다.


꽃을 보는건 좋아하지만 매화와 벚꽃은 역시 구별이 잘 안된다.
구별을 위해 사람이 붙였을 뿐인 명칭이니, 어렸을때부터 이름엔 신경을 안 썼다.
그냥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맡으며 즐기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


텐만구 정문 앞에는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거대한 나무가 서 있다.
신사 앞에 이런 녀석이 서 있으면 그 효과가 톡톡하겠지만, 오래된 녀석이라 그런지 받침대와 보강재로 버티고 있는 모습은 좀 애처롭다.
전체적은 모습은 아직 건장한듯 한데, 가지의 무게가 너무 나가는 바람에 받침대가 없이는 아마 사람 손이 닿을 정도로 내려올 것이다.


잘 죽지 않는 녀석이니 적절하게 보살펴만 주면 텐만구가 없어질 때까지 살아있을 거라 본다.
전체적으로 위로 쑥쑥 뻗는 나무들이 많은 일본은, 그것도 나름대로 기개가 있어 보여 좋은 구경거리가 되는데
그리 굵고 곧지 않아도 부드럽게 휘어 있는 한국의 소나무도 평생 질리지 않을 만큼 매력적이라고 생각.
일본에 와서는 일본 나무를 즐기고, 한국에선 한국 나무를 즐기면 되는 것이겠지.


한국, 중국의 단체 관람객도 상당히 많이 보인다.
후쿠오카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만날 확률은 만나지 않을 확률보다 월등히 높으니 별로 신기한 일도 아니다.
학문의 신을 모시는 곳이지만 날짜 탓인지 관광객의 대다수는 꽤나 나이가 드신 사람들이다.
지금 일본은 졸업시즌이라서, 딱히 이곳에서 소원을 빌 시기는 아니니까.


텐만구라면 꼭 놓여져 있는 황소상. 이 녀석을 만지면 나쁜 기운이 사라지고 소원이 성취된다고 해서 항상 맨들맨들하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사망 후, 그의 시신을 싣고 가던 황소가 이 자리에서 결코 움직이려 하지 않아서
이곳에다가 신사를 짓게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황소의 기원은 바로 그것.

내가 학문의 신이라면, 여기서 황소를 만지며 시험 붙게 해달라고 졸라대는 중생들이 꽤나 답답해 보일텐데.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지만, 학생들이 하고 있는건 학문이 아니기 때문에.


텐만구 정문을 들어서면 연못을 가로지르는 세 개의 다리가 나타난다.
세 개의 다리는 과거, 현재, 미래를 나타내며, 신사에 들어갈 때 현세와의 경계점 역할을 한다.
사실 여느 텐만구에는 이런 연못과 다리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곳의 독특함을 더해준다.
그런 설정놀음은 둘째치고, 나무 표면에 가득이 솟아난 풀이 참 인상적.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의 신사 주변 나무들은 대체로 저렇게 풀을 옷처럼 입고 있다.


일본의 전통 공원이나 정원처럼 굉장히 인위적인 냄새를 풍기진 않지만
이 곳의 연못도 잘 둘러보면 미적 배치에 신경을 쓴 모습이 보인다.
광각 단렌즈, 표준 단렌즈, 망원 줌렌즈를 가지고 온 여행이라서
눈에 들어오는 대로 사진을 담으려니 정신없이 렌즈를 바꿔 끼워야 하는 어수룩한 풍경이 연출된다.

똑딱이로 시원시원 잘 찍는 다른 관광객들에겐 사진 좀 찍을 줄 아는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 정도 되는 초짜가 그런 식으로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그저 부끄러운 일.
똑딱이도 써봤는데 그냥 만족을 못해서 덩치 큰 카메라를 쓸 뿐이고, 능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단순한 자기만족.


아무래도 자연물로는 보이지 않는 배 모양의 돌.
900년대 세워진 신사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현존 건물은 1919년에 개축된 후 조금씩 증축하고 있다.
저 바위는 언제쯤 이곳에 놓인 것일지 궁금했지만, 거기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다리를 건너며 본전으로 향하는 도중 만날 수 있는 조그마한 사당이 있다.
지하사(志賀社)라는 이름의 이 사당은 해상안전을 책임지는 바다의 신을 모시는 곳.
다자이후 텐만구 안에서 가장 오래된, 1458년 지어진 사당이며 이는 큐슈 전체에서도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이 조그마한 사당의 처마는, 세월의 흐름만이 나타낼 수 있는 부드러운 색과 함께 단정한 배열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사실 화려한 본전의 양식보다 이런 쪽을 훨씬 좋아해서, 일단 사진은 뒤로 하고 한참 감상만 한 후 돌아갈 때 다시 찍어보기로 한다.
한국에서 제일 좋아하는 목조 건축물이 부석사니까, 대강 취향은 밝혀졌으려나.


마음 심자를 닮았다 해서 '心字池'라는 이름이 붙은 이 연못은 주변 경관이 훌륭하다.
엄숙하고 정갈한 정원의 연못보다는 좀 더 자유롭고 자연적인 배치가 괜한 긴장을 하지 않게 만들어 준다.
매화 철은 놓쳤지만 그래도 조금씩 남아있는 분홍의 흔적이 여전히 맛깔스러움을 더해주고 있다.


물론 완전히 만개한 건 아니지만 이런 풍경도 충분히 보기 좋지.
이곳의 매화나무는 100종류가 넘어서 피는 시기가 제각각이라고 한다. 한순간에 미어터지는 벚꽃구경보다는 여유가 있다고 할까.
다자이후 텐만구는 내가 가 본 다른 텐만구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다. 부담없이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공원 같은 느낌?
이번엔 휴장중이었지만 이곳에는 큐슈 박물관과 함께 산책로를 겸비한 공원 부지도 있어서, 굳이 신성함을 찾을 필요가 없다.
텐만구의 총본산이라는 역사가 서려 있으면서도 목에 힘을 주지 않은 느낌이 마음에 든다.


마지막 다리를 건너자 넓은 광장과 함께 본전 앞을 장식하는 토리이가 보인다.

일단 본전 안에 들어가기 전에 광장이나 한바퀴 둘러볼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려본다.
본전 앞은 돈 던지고 소원 비는 사람들이 많아서 약간 흥미가 떨어지기도 하고.


일본의 정취를 느끼기 쉬워서 신사나 성, 정원 등을 자주 찾곤 하는데
막상 거기서 제일 즐겁게 보고 즐기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주변의 나무 경관이다.
가끔씩 너무 웅장하게 폼 잡고 있는 본전이 오버스럽긴 하지만
신사나 정원 등의 차분한 분위기에는 잘 정비된 주변 자연 환경과의 조화가 큰 공헌을 하고 있다.
건물만으로는 그닥 매력이 없다. 이런 관광지에서 숨은 주역은 이 녀석들이라고 생각.


광장을 둘러보다가 사람들이 모여있길래 가 봤더니 이런 공연중이다.
만담가처럼 구수하고 어눌한 말투로 원숭이에게 재주를 부리게 하는 할아버지.
'매일매일이 지옥입니다'라는 붉은색 셔츠와 함께 펼치는 애교스러운 공연이라. 뭔가 초현실적인 분위기다.


원숭이를 이용한 공연은 대강 분위기가 비슷하다.
처음에 몇번 말 안듣고 딴청피우는 듯 하다가 한방 터트려주는 그런 식.
일본의 만담에는 보케와 츳코미라고 하는 바보짓과 태클거는 방식의 개그가 있는데
굳이 사람끼리가 아니라도 충분히 만담이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뭐, 놀라울 것 하나 없는 굉장히 수수한 묘기 한두가지 보여주는 공연이었는데
망원렌즈로 신나게 담고 있으니 끝까지 성의껏 봐 줘야 한다는 의무감 비슷한 게 생긴다.


원숭이가 저런 곳에 올라가는 걸 보고 우와~ 해야 하나?
열 살쯤 되는 어린 시절이었다면 이것도 충분히 재미있고 진심으로 박수를 칠 수 있었을지도.
얼마나 오래 공연을 해 왔을지, 키타노 타케시만큼이나 갈라진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되려 서글픈 기분이 든다.


마지막 묘기로 장대타기를 그저 흉내만 슬쩍 내 보는 원숭이.
사실 이렇게 관람하면서 내 머릿속에 생각나는 건 딱 두가지였다.
사진빨 좀 잘 받으려나 하는 것과, 이 콤비는 대체 언제부터, 무엇때문에 이런 공연을 해 오고 있는 것일까 하는 것.

무심한 얼굴로 명령받은 행동을 척척 해내는 원숭이와 나이든 할아버지의 만담.
일본의 만담이란 대게 화자가 자신을 능청스럽고 바보같이 묘사함으로써 웃음을 주는 방식이다.
'매일매일이 지옥입니다'라는 티셔츠를 입고 바보 행새를 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나로서는 어디서 즐거움을 느껴야 할지 난감함이 느껴진다.



동물을 이용한 묘기라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조금씩 마음이 무거워 지는 것일수도.
어쩌면 저 원숭이는 할아버지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녀석일 수도 있다. 오랜시간 함께 해왔다면 정은 붙었겠지.
이 두 콤비가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공연을 계속하길 바라며 발걸음을 옮긴다.

여행 전날엔 잠을 잘 못자는, 어찌보면 당연한 징크스가 있는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잠을 자지 못했다. 제대로 못 잔게 아니라 아예 한숨도 못 잤다.
이제껏 여행 한 횟수로 치면 이런 들뜬 어린이같은 반응이 좀 없어질 때도 됐는데, 쉽지 않다.

티켓은 7시에 받으러 오라고 하는데, 조식 시작시간이 7시라서 공짜밥도 못먹고 나섰다.
다행히도 짧은 거리지만 호텔에서 터미널까지 태워주는 차가 있어 조금은 득 본 기분.

티켓 받고 돼지코 구입하고 멀미약 한개 먹고 하니 금새 출발시간이 다가온다.
자동차나 기차도 역방향으로 앉으면 멀미를 심하게 하는 타입이라서
이번에 타게되는 쾌속선 코비호도 상당히 걱정이다. 난생 처음 멀미약이란 것도 먹어본다.
출발 전 마지막으로 부산의 모습 한번 담아주고 심사대를 통과.


쾌속선 코비는 제트엔진을 장착하고 시속 80km의 속도로 선채를 바다 위로 떠서 달리는 녀석.
바다 위를 떠다닌다고는 해도 파도가 심하면 어차피 울렁거리기는 마찬가지다.
2층의 객실 의자에선 매쾌한 땀냄새가 나서 출발도 하지 않았는데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멀미약 효과가 1시간은 지나야 발휘되는데, 출발 30분전에 먹는 바람에 초반이 걱정이다.

혹시나 했던 염려가 현실이 되어, 오늘 파도가 상당히 높다.
최대한 멀리 보고 있으면 그나마 좀 낫지만, 철야한 탓에 조금이라도 눈을 감으면 그야말로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느낌.
TV에서는 아나킨 스카이워커가 방방 뛰어대는 '점퍼'를 상영중이었지만, 영화보다 내 머릿속이 더 리얼하게 점프중이었다.
거기다 최악의 상황까지 벌어지고 말았는데, 2층 맨 뒷편에서 구수한 사투리로 아주 소리를 지르며 떠들어대던
왠 아저씨 무리중 한 명이 화장실에 들어가서 담배를 피고 만 것이다.

코비는 속도가 워낙 빨라서 운항중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선체도 일반 여객선에 비해 작은편이고, 운항중 자리를 뜨는 것을 권장하지 않기 때문에 흡연실도 없다.
그런데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워대니 금새 선내는 담배냄새로 가득해 졌고, 승무원들은 당황해서 온 선박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결국 화장실에서 담배 핀 색히를 잡았는데, 피우지 않았다고 멍하게 대답하는게 내 좌석에서도 들려온다.
저딴 쓰레기는 그냥 바다에 던져버렸으면 좋을것을...

그 후에도 그 덜되먹은 무리들은 우렁찬 코비의 엔진소리도 무시할 만큼 떠들어대서
피곤과 멀미로 고생하던 내 불쾌지수를 극한까지 올려놓는다. 정말 사라져야 할 족속들이다.


다행이랄까, 3시간의 승선중 후반 1시간 반 정도는 약기운이 듣기 시작했는지 금새 잠에 빠져들었다.
그래도 멍한 기운은 마찬가지인데, 짧은 여정이니 만큼 쉬고 있을 시간이 없는 하루하루라 앞으로가 걱정이다.
다들 멀쩡히 내리는걸 봐서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 정도에 멀미하진 않는 듯. 난 땀으로 흥건하게 젖었다.

아쉽게도 후쿠오카의 날씨는 구름이 잔뜩 끼어 그다지 좋지 않다.
어제 부산의 날씨도 저녁부터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입국심사장의 직원이 조금 묘한 질문을 했다.
보통 카드에 작성된 것들만 확인되면 아무 말없이 통과시켜주는데
항구 입국은 그런것인지, 그 직원이 특이한 성격인지, 내 외모가 조금 부담스러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숙박지는 어디인가, 여행 목적인가 일 목적인가, 2박 3일동안 어디어디 갈 예정인가 하는 것까지 물어본다.
그렇게 일본을 왔다갔다 하면서도 이런 질문공세를 받아본 적은 난생 처음이라 신기했다.
10개월째 깎지 않은 머리와 다크 서클로 떡칠된 괴인이 조금 수상하게 보인 걸까.
다자이후와 유후인 갈 예정인데 날씨도 그렇고, 교통편 시간이 너무 걸려서 제대로 즐길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난 위험한 사람 아닙니다'라는 느낌을 가득 담아 친근하게 이야기 하니 그제서야 직원이 웃으면서 일본어 잘하시네요라고 해 준다.
워킹 홀리데이까지 했다고 확인시켜주니 잘 놀다 가라고 인사까지 해 주며 통과. 사람은 역시 웃고 봐야 한다.

일단 하카타역 옆의 토요코인에 가서 짐부터 맡기기로 하고 100엔 버스를 탄다.
한국인 관광객수가 일본에서 가장 많은 지역이라서, 후쿠오카 주변엔 왠만한 표지판에 한국어가 적혀 있다.
후쿠오카 시내 주요 관광지만을 빙글빙글 도는 100엔 버스라는 녀석도 있어서
상당히 비싼 일반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하지 않고서도 시내 구경은 충분히 즐길 수 있게 되어있다.

토요코인에 도착하니 또 한번 트러블에 휘말렸다.
싱싱한 초짜로 보이는 직원이, 내가 사용하려는 무료 숙박권에 이상한 딴지를 걸고 나선 것.
원래 토요코인은 요일이나 기념일, 휴일, 관광시즌별로 가격이 조금씩 바뀌는데
무료 숙박권은 평일 기본 요금만큼만 깎아주고, 나머지 차액은 지불해야 한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예전에 무료 숙박권을 써 본적이 있는 나로서는 황당하기 그지 없는 소리.
어떤 곳에서 어떤 가격이든 무료 숙박권은 싱글 1실을 하루 무료로 사용하게 해 준다.
내가 그럴 리 없다면서 확인 부탁한다고 하니, 난감해하는 직원 옆으로 다른 직원이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손님 말이 맞다고 말해준다.
죄송하다면서 거듭거듭 사과를 받긴 했지만 이런 요금관련 실수는 호텔로서는 이미지에 치명적인 편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할 텐데.

일본의 전국체인 비지니스 호텔 중에서 수퍼호텔과 더불어 가장 저렴한 측에 속하는 토요코인은
그나마 수퍼호텔보다는 조금 나은 숙박환경과 전국 어디든 쉽게 찾을 수 있는 점포로 인해 나름 인기가 있는 곳인데
저렴함은 어쩔 수 없는지 가끔 이렇게 나보다 더 숙박규정을 모르는 직원들이 있기도 하다.

비지니스 호텔중 돈 좀 더주고 편안히 즐기려면 역시 루트 인 호텔이 좋다.
내부 시설도 훨씬 고급스럽고, 무료 조식의 질이 왠만한 중급호텔 이상이라서 추천.

이러저러한 후에 짐을 맡기고 카메라 가방만 짊어진 후 하카타 역으로 출발. 사실 걸어서 3분거리다.
하카타 역과 버스터미널이 바로 붙어있기 때문에 모든 후쿠오카 여행은 이곳에서 시작한다.
일단 버스터미널로 가서 내일 출발할 유후인행 왕복 버스티켓을 끊는다.
유후인행 버스는 완전 예약, 지정 좌석제이니 까먹기 전에 미리미리 예약 해놓는게 좋다.
외국 관광객인데도 이름과 전화번호까지 꼼꼼하게 물어 적는다. 로밍폰도 관계 없다는 말까지 덧붙이며.

이번 후쿠오카 관광 중 가장 비싼 5천엔짜리 왕복 티켓을 끊고 나니 일단 할일은 다 한것 같아서 안도가 된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먹었기 때문에 터미널 안에서 바로 보이는 맥도날드에 무작정 들어가 신제품인듯한 녀석을 주문.
매년 일본 맥도날드에서 기간한정으로 소개되는 아메리카 시리즈의 최신작 비버리힐즈 버거.
여행중 텍사스, 하와이안, 뉴욕, 캘리포니아 등등... 나름대로 이유는 붙여서 만든 버거시리즈를 맛봤는데
아직도 이 시리즈를 계속하고 있는게 좀 신기하긴 했다.

패티, 계란, 치즈의 조합은 평소 좋아하던 달맞이버거와 비슷하지만, 아보카도 소스의 깔끔하고 달콤한 맛을 첨가한 녀석.
짠 맛의 패티와 달콤한 아보카도 소스의 조합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한국 맥도날드보다는 훨씬 낫고.
맛과는 별개로, 이 사람들의 아메리카 햄버거에 대한 정의가 대체 뭔지 먹을때마다 궁금해지긴 한다.



다자이후(太宰府)로 가는 방법은 조금 귀찮다.
한국 관광객이라면 3일간 버스 무제한인 산Q패스나 철도 프리패스를 많이들 사용하는데
다자이후는 양쪽 모두 사용하기 곤란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철도 프리패스는, 다자이후까지 가는 철도가 프리패스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철이라서 의미없고
산Q패스로는 다자이후까지 가는 버스가 없어서, 중간에 내려서 좀 걸은 뒤 마을버스를 100엔 내고 또 타야 한다.

이번 여행중 내가 계획한 코스를 비교해 보니 산Q패스 구입해봤자 잘해야 본전치기 수준이라
그냥 개별적으로 요금 내기로 하고 마음편하게 전철을 탔다. 하지만 이 전철도 중간에 갈아타야 한다.
이곳 후츠카이치(二日市) 역에서 내린 후 다자이후가 종점인 전철을 타면 된다.
왠만해서 철도를 타면 자리에 앉거나 졸지 않는 성격인데, 멀미의 영향도 있고 해서 체력이 거의 바닥이라
자리에 앉자마자 기절하듯이 잠에 빠져든 탓에 자칫하면 후츠카이치를 지나칠 뻔 했다.

큐슈의 쿄토라는 별명이 붙은 다자이후는, 그 명성에 비해 주변 주택가가 꽤나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곳 후츠카이치 역도 대부분 교복 입은 학생들이 서 있을 뿐, 여행객의 모습은 그닥 보이지 않는다.
지금 일본은 한창 졸업 시즌이라서 여기저기 학생들이 많이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완전히 외진 곳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일본은 아직 무인역이 많다) 이런 적당히 낡아보이는 역을 보면 마음이 편안하다.
여기저기 낡은 모습이 보여도 그게 더렵다는 의미로 연결되지 않는 점이 예전부터 마음에 들었기 때문.
약간 강박적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쓰레기나 껌딱지 등의 흔적이 보이질 않는다.
화려한 타일과 사이버틱한 공간을 연출하는 새로운 역도 시커먼 껌딱지가 붙어있으면 보기 흉하다.
낡은 것과 더러운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걸 이런 역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자이후까지 와서도 날씨가 그닥 좋아질 기미가 없어서 참으로 안타까웠다.
자주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라서. 어떻게 보면 단순한 사진 욕심일 뿐이고, 감상에 큰 지장은 없으니.
후츠카이치 역까지 한산했던 모습은 다자이후 역에 내리자마자 꽤나 시끌벅적하게 변한다.
일본은 지금 4일 연휴기간에 졸업식까지 겹쳐서, 날씨가 좋지 않아도 여행 인구는 꽤 붐비는 편이다.


원래같았으면 그런 이유로 훨씬 더 붐벼야 정상이지만
지금이 딱 만개할 시기인 벚꽃이 올해는 겨울의 추운 날씨로 인해 1주일 정도 늦게 핀다고 하니
봄의 여행에 벚꽃이 없으면 라면먹고 밥 안말아 먹은 듯한 느낌을 받는 일본인들에게는 큰 손실일 듯.

사실 다자이후의 벚꽃은 유명해서, 사방팔방 만개한 모습을 볼 수 없다는게 무척 아쉬웠지만
내가 기후를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가는... 게 아니라 즐길 수 밖에.


조그마한 토리이 사이로 가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몽롱한 정신을 가다듬고 이제부터 진짜 여행 시작한다는 느낌을 가져본다.

부산에 가 본게 대체 몇년만인지 기억이 안 난다.
십여년 전 부모님 결혼기념일 기념으로 예전 신혼여행 코스를 돌아보는 이벤트가 있었는데
그때 살짝 지나친 적은 있지만 차에서 내린 건 국밥 한그릇 먹을 때 뿐이었으니 그건 횟수에 넣기 힘들고.
기억에 남아있는 부산은 약 20여년 전 해운대와 그 앞의 붉은 색 호텔 뿐이다.

뭘 타고 갔는지도 기억에 없고, 단지 호텔에서 해운대로 걸어나가는 동안 노점상에서 사먹었던
밑에 구멍뚫린 다슬기같은 녀석이 그나마 지금까지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이번에 본 부산역의 전경은 나름 신선하다. 별다른 특징이 있는 모습은 아니지만 겉모습만큼이나 내부도 넓직한게 듬직한 느낌.
그런데 부산역을 나오자마자 왠 짝퉁 일본인처럼 생긴 녀석이 가이드북에 '도와주세요'라고 적힌 한국어를 가리키며 돈달라고 조른다.
그냥 경찰서에 갖다 쳐넣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여행 전엔 마음을 평온하게 먹어야지.
일본어로 '돈은 없지만 열심해 해보쇼'라고 웃으며 한마디 던져줬다.


항구도시는 대체 활기차고 시원시원한 느낌과 더불어
신,구의 융합이 조화롭다기 보다는 조금 어지럽게 뒤섞인 혼란스러움이 느껴지는 곳이라고 개인적인 정의를 내리는데
부산의 경우엔 번쩍번쩍한 부산역과 산정상을 향해 돌진하는 듯한 마을, 적당히 예전 풍취를 느끼게 하는 재래시장 등에서
그런 정의에 부합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특히 요즘들어 무섭게 발전중이라고 하니.

좀 덥긴 해도 이 정도 날씨만 유지해 주면 이번 여행은 참 행복할 것 같다.
숙박자 대부분이 일본사람이라는 토요코 인에 들어가 보니 정말 일본쪽과 신기할 정도로 똑같은 구조다.
한국 대다수의 호텔, 모텔에 비해 턱없이 조그마한 객실이지만 오랜만에 들어와보니 나름 정겹다.

자전거 여행, 특히 대지진 당시 근 2주일 가까이 토요코인 야마구치점에 처박혀서 여행을 접을까 계속할까를 고민했던 추억이 있다.
그 외에도 야마구치점의 서비스 정신이 좋은건지, 원래 제공되는 조식외에 석식으로 무제한 카레가 제공되던 점도 틀어박힌 원인.

주 서식지인 서울과 대구에서는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산자락 마을이 여기저기 보이는 모습이 인상깊다.
아마 피난시절에 생긴 달동네가 이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지만, 이것도 부산의 지형적 특성인지 그런 곳이 참 많이 보인다.
그러고보니 나에게 있어서 부산이란 도시는 외국의 이름모를 도시와 다를바가 없는 듯.
KTX 타고 50분이면 가는 옆동네를 20년간 가 본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짧은 시간동안 어디를 둘러볼까 고민하다가 현 부산의 발전상을 느낄 수 있다는 센텀시티쪽을 선택했다.
성격대로라면 자갈치 시장같은 곳이 더 어울릴 것 같지만
20년간 미지의 영역이었던 부산의 최신 모습을 한번쯤 봐 두는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그리고 센텀시티는 광안리와 가까우니 그 놀랍다는 야경도 구경할 수 있어서 효율적이라는 판단도 한 몫 했다.


머나먼 센텀시티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몸으로 느낀 부산의 모습은
도시의 캐치프라이즈 '다이내믹 부산'이 딱 어울리는 느낌이다. 한 번도 각 도시의 캐치프라이즈에 동의한 적이 없었는데.
아, 주 서식지인 '컬러풀 대구' 캐치프라이즈도 어떤 의미로서 참 어울린다고 생각은 했다.
실컷 두드려 맞고 알록달록해진 괴팍한 노장 복서의 얼굴을 떠올렸으니까.

세계 최대의 백화점이라는 센텀시티 신세계 백화점은
뭔가 있어보이는 수식어와는 정 반대의 느낌을 받았다고 할까.
그 크고 거대한 건물 안은, 다른 수많은 백화점과 하등 다를 바 없이
우동과 짜장면이나 파는 그저 그런 푸드코트 안에서도 앉을 자리가 없어 바둥대는 사람들로 꽉꽉 채워진 곳이었다.

세계 최대라고 해 봤자 결국 개미같은 사람들에게 손쉽게 점령당해 버리는 놀이터.
덩치가 커지면 그만큼 사람들이 그 공간을 더 차지할 뿐. 다른 백화점들과 차별화 된 것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오히려 센텀 시티에서 더 볼만한 광경은
이런 초거대 백화점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늘을 뚫으며 위엄을 과시하는 고층 주상복합 건물들이었다.
이런 녀석들이 포진해 있으면, 센텀시티의 두 백화점은 단지 동네 슈퍼로밖에 보이지 않겠지.
과연 이것이 현재진행형 부산의 모습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현재진행형 부산이란 녀석은
여기저기서 껍데기만 뒤집어 쓴 서울의 냄새가 흠씬 풍기는 어색함으로 무장하고 있다.
사진을 찍으면서 '내가 지금 삼성역이나 강남역 주변을 찍고 있는건가'하는 생각이 끊이질 않으니.
부산의 최고급 아파트들 소유주가 어디 사람들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고.

신호등에 멈춰 선 젊은 커플이 이 추운 바람 속에서 팔짱을 꽉 끼고 즐거운 잡담중이다.
재미있게도 여자 쪽이 '돈 X니 많이 벌어서 여~ 살게 해주께' 라고 구수한 사투리로 말하고 있다.
한국처럼 좁고 밀집된 곳에서 그나마 지역색이라는 걸 유지해 주는 것이 사투리인 듯.

센텀시티를 슬쩍 구경후 아무데나 들어가서 소고기 국밥 한그릇 먹고, 옆의 까페에 들어가 커피 한잔.
바람이 너무 강하고 구름도 가득해서 광안리의 야경이 조금 걱정되긴 한다.
삼각대도 없고 노이즈도 형편없는 카메라를 쓰다 보니 멋들어지게 담는 건 애초에 포기하긴 했지만.
약간은 기대했었던 센텀 시티는 사실 부산의 모습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20여년간 외국이나 다름없었던 부산의 압축된 시간을 일거에 폭발시켜줄 임펙트를
광안리에서 기대하고 있다. 일단 한국 어느 지역에도 광안리같은 풍경은 없다고 하니까.


역에서 내렸을 때는 한적한 골목길이 이어졌지만
바다쪽으로 가면 갈수록 조금씩 사람들이 늘어나는 느낌이 들더니
이곳으로 나오자 일순 세상이 바뀌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골목을 빠져나오자 그곳은 광안리였다'

끝없이 늘어선 건물들의 압도적인 광채에, 소문의 광안대교조차 초라하게 느껴진다.
마치 바다가 도시에 삼켜진 듯한 모양새에, 그 바다를 최후까지 가둬버리는 광안대교라는 창살까지.



광안대교보다 찬란한 거리의 불빛이 더욱 눈길을 끈다.
그 대단하다는 홍콩의 야경도 이런 느낌일까.
모래사장에 나와 걸었던 처음 40분간 바다보다 길거리쪽에 훨씬 더 시선을 많이 두게 된다.
의심할 여지 없이 세계적인 절경이라 함에 부족함이 없다.

광안리는 파도마저 형형색색이구나.


한국에서 가장 긴 현수교인 광안대교.
부모님 말씀으로는, 20년 전의 광안리는 내가 자주 가던 포항의 조그마하고 한적한 해수욕장과 전혀 다를게 없는 곳이었단다.
광안대교와 함께 폭발적으로 상가와 주택가가 만들어져서 지금은 사람의 흔적이 자연의 흔적을 덮어버릴 정도의 별천지가 되었다.

분명 비수기일 지금도 사람들이 꽤나 붐빈다.
상가들은 밝기 경쟁이라도 하듯 화려한 불빛으로 시선을 빼앗는다.


인공물이라는 녀석은 조금만 선을 잘못 타면 흉물이 되어 버리곤 하는데
바다 위에 떡하니 서서 가끔 분수나 뿌려대는 저 녀석이 바로 그렇게 느껴진다.
빛의 향연으로 가득찬 이곳 광안리에서 저 이질적이고 초라한 녀석은 대체 뭔가.

이미 전통적인 유래나 역사가 담긴 무언가를 기대하기엔 너무 발전한 곳이라서
이 몽환적인 야경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텐데, 저 녀석만큼은 영 꼴불견이다.


저 멀리 보이는 아파트들은 왠만한 서울 부촌보다 더 가격이 높다고 하더라.
특히 광안대교가 잘 보이는 아파트는 다른 것보다 몇억원씩 더 비싸다고.
저기 살며 365일 끊이지 않는 인공 조명에 반짝이는 바다를 보는 것이 수억원의 값어치를 하는 것일까?

부산의 힘이랄까.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전진할 의지가 느껴지는 광안리는
여지껏 한국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압도적인 야경을 자랑한다. 처음엔 가슴이 쿵 하더군.
두 시간 반동안 거닐며 바다와 네온 불빛을 번갈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딱 하나 마음에 남는 것이라면
이곳은 마틴과 루디가 보고 싶었던 바다는 아닐 것이라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