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부족한 상황에서 정해진 시간에 딱 맞춰 일어나는 건 일종의 고문이다.

많이 피곤했는지 8시 알람소리에 눈을 떠도 일어나는 건 몸이 아니라 짜증 뿐.

 

신체적으로 본다면 그냥 아침까지 푹 자버리는게 최선의 선택이지만 여행중엔 희생해야 할 쾌락도 있다.

찌부둥한 몸을 이끌고 주섬주섬 옷과 장비를 챙겨서 이미 깜깜해 진 삿포로 시내로 나온다.

눈이 많이 내리면 추위는 상대적으로 덜하다고 하지만 역시 밤이 되면 꽤나 쌀쌀하다.

기온은 영하 6도 정도를 가리키고 있어서 못 견딜 정도는 아니지만, 카메라를 꺼내놓은 상태에서 움직이니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을수가 없다.

 

슬금슬금 걸어서 오오도리 공원에 도착하니 낮에 얼핏 보였던 흰 전시품들이 형형색색으로 빛나고 있다. 역시 밤에 와보길 잘했다.

오오도리를 가로지르는 도로에는 신호등이 작동하고 있지만 축제 기간이다 보니 나이 지긋한 요원들이 수신호로 관광객들의 안전을 지키고 있다.

 

 

 

낮부터 희끄무레하긴 했지만 밤이 되니 본격적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물론 눈축제 기간에 눈이 온다는 건 싫어할 만한 일이 아니니 기분은 좋다.

 

조심해야 할 건 카메라 렌즈에 눈이 너무 많이 묻지 않게 해야 한다는 점 정도.

눈이라면 정말 펑펑 퍼붓지 않는 한 물이 카메라 안으로 들어갈 일은 없지만

렌즈 앞쪽에 많이 묻어버리면 결과물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에 후드를 항상 정방향으로 끼워놓는다.

위로 올려다보는 장면을 찍을 때는 살짝 들어서 찍고 바로 내리는 조심성을 보인다. 렌즈 닦는거 정말 고역이라서.

 

낮에는 아마 여러 먹거리들과 이벤트로 인해 시끌벅적하겠지만 점등시간이 거의 끝나가는 밤은 의외로 조용한 편이다.

 

 

 

눈축제에는 눈으로 만든 조형물과 얼음으로 만든 조형물이 혼재해 있는데

단순한 미적 조형물이 아니라 대부분 어떤 의미를 가지고 세워져 있다.

 

일본에서는 인기있는 작품인 시마 시리즈의 작가 히로가네 켄시가 그린 비영리단체가 전시한 작품.

초반엔 그럭저럭 볼만 했지만 지금은 그저 직장인 판타지에다가 극우 자위기계로 전락해 버린 작품이라

저 사람 그림을 봐도 하트모양의 얼음덩어리처럼 차가운 기분밖에 들지 않는다.

 

 

 

전세계에서 관광객들이 몰리는 세계 3대 눈축제 중 하나라서 더더욱 일본 문화를 나타내는 조각상이 많은 듯 하다.

이 정도 크기로 통짜 얼음을 조각하기엔 무리가 많아서인지

이곳에 전시된 얼음 조각상들은 전부 일정 크기의 블록을 쌓고 깎아서 만들어져 있다. 내부에 블록 조립의 흔적이 보인다.

 

 

 

얼음 조각상은 눈보다 무거워서 괜찮을까 싶었는데, 상당히 거대한 건축물도 몇 점 보인다.

만드는데 고생 좀 했겠구나 싶지만 인상에 깊히 남을만한 예술미까지는 느껴지지 않는다.

 

 

 

단순히 보기만 하는 관광은 흥미가 빨리 식어버리기 때문에, 사실 눈축제에 크게 기대하고 온 것은 없다.

낮에는 다양한 이벤트가 많이 열리니 체험하는 재미도 있겠지만 밤엔 그냥 라이트에 반사되는 조각상들의 자태를 감상하는 것 말고는.

 

얼음이 깨끗하고 순수한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하트모양이 왠지 크나큰 상처를 받은 듯한 느낌으로 빛나고 있어서

눈 내리는 도시의 밤 속에서 보고 있으니 뭔가 의도와는 다른 불안감이 느껴지는 듯 하다.

 

 

 

맥주는 더울 때 마셔야 좋다고 하던가. 본인은 술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기분내키는 대로 마시느라 잘 모른다.

눈축제 기간이라고 눈이 내리지 않는 것은 아니니, 수많은 진행요원들이 부지런히 눈을 치우고 개최장을 정비하는 모습이 쉽게 상상된다.

 

도시의 눈이란 건 그냥 방치해 뒀다간 여러가지로 흉물스러워지는 법인데

이곳 축제장 주변은 관광객들이 일상적으로 걸어다니기에 거의 문제가 없는 수준으로 정비되어 있다.

1주일간 참 고생하는구나 싶다. 눈이 쌓인 양은 2월 8일 서울의 수 배에서 수십 배는 되지만 걸어다니기는 이쪽이 훨씬 편하다.

 

 

 

관광객이 워낙 많이 오는 축제다 보니 흡연구역의 철저한 격리도 중요한 요소일 듯 하다.

내부는 따로 부스가 설치되어 있지만, 축제와 분위기를 맞추려고 일부러 얼음벽까지 만들어 놓은 꼼꼼함이 만족스럽다.

시간이 늦어서 흡연부스는 문을 닫았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앞에서 담배 피는 사람들은 별로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밤엔 특별히 이벤트 같은거 없나 싶었는데, 사람이 직접 진행하지 않아도 되는 이벤트라면 열리고 있었다.

경마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에게는 특히나 목장으로 유명한 곳이 홋카이도인데

서로우브래드의 고향 홋카이도라는 주제로, 음영이 조각되어 있는 거대한 눈벽에다가 영상을 쏘아서 다양한 장면을 연출중이다.

 

기술적으로는 딱히 놀라울 구석이 없는 전시지만 관광객 배려라고 할까, 서비스 정신은 그럭저럭 높게 쳐줄 만하다.

 

 

 

당시는 소치 동계올림픽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이라 이번 눈축제에서는 스키점프대도 설치되어 있다.

분명 이곳 오오도리 공원은 완전히 평평한 곳이었는데, 산등성이 대신 철제 구조물을 세우고 거기다가 눈을 퍼부어서

그럭듯하게 점프대를 만들어 놓았다. 언제 이벤트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오늘은 더 이상 점프가 없는 듯 하다.

 

 

 

동계 종목에 대해서는 아는게 없지만, 두 곳의 점프대의 모양이 다르다.

자세히 보니 눈의 상태도 전혀 다르게 설정되어 있는데, 점프의 종류에 따라 지면의 상태도 바뀌는 것인가 싶다.

 

오늘은 기회가 없지만 어차피 내일이나 모레 즈음 한번쯤은 볼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가볍게 자리를 뜬다.

첫날부터 잔뜩 기대감에 부풀어 있으면 의외로 실망하기 쉽다는 과거의 전례를 생각해

그냥 슬쩍슬쩍 구경이나 하고 추위에 몸을 적응하는 편에서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머리속이 텅 빈것처럼 멍할 뿐이다.

 

 

 

긴장 풀고 돌아보는 와중에도 메인 조각상에 포함되리라 예상되는 거대한 얼음 조형물은 친숙한 느낌이다.

큰 임팩트는 없었지만 대만에 다녀와 봤기 때문에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던 고궁박물관과 101 타워의 모습이 얼음으로 재현되어 있다.

 

 

 

대단한 덩치의 얼음 구조물이 형형색색으로 은은히 빛나고 있는 모습은 꽤나 볼 만하다.

얼음 구조물 위에 타이밍 좋게도 눈이 내려서 훨씬 멋들어진 지붕이 만들어 진 것도 좋은 감상 포인트.

 

이 정도 덩치를 얼음으로 만들어서 무너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일지 궁금하다.

만약 쓰러졌다가는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안정성에 대해서는 여러가지로 신경을 썼을 텐데.

 

 

 

조금 전 서로우브래드 때와 비슷한 원리로 이번엔 아우디 부스가 나타났다.

자동차 1:1 크기의 구조물이라 크기는 좀 전 것에 비해 훨씬 작아서, 바로 눈 앞에서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건 벽면에 붙였다기 보다는 그냥 자동차 한 대를 조각해 놓은 셈이나 마찬가지.

 

밋밋하던 흰색 자동차가 레이저 쇼의 시작과 함께 훌륭한 질감을 가지기 시작한다.

도시의 밤길을 달리는 듯한 연출도 이어지고, 아이들과 함께 보면 먼 훗날 고객층이 0.1% 정도는 늘어날 듯한 느낌.

 

 

 

이번 눈축제에서 가장 큰 조형물 중 하나인 소치올림픽 기념 조각상.

여기는 특별히 색깔을 강조하는 조명이 설치되지 않았는데, 대신 꽤나 밝게 빛을 비추고 있어서 감상하긴 좋다.

 

어쨌든 일본의 눈축제라 그런지 이 조각상에 나와 있는 선수들은 전부 일본쪽에서 유명한 사람들인 듯.

 

 

 

 

실상 소치올림픽이 끝나고 나서 이야기지만, 관심이 매우 제한적이었던 한국과 달리 일본은 여러 종목에서 기대감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본도 기대만큼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종목에서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출전한 사람이 많아서

한국보다는 좀 더 즐기는 축제라는 인식이 들기 쉬운 대회였다. 스포츠에 관심이 없으니 저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옷을 봐서는 아마도 아사마 마오 선수같은데, 가장 크고 박력있게 지어진 조각상과는 달리

김연아에게 밀리기도 했거니와 개똥같은 러시아의 조작질 때문에 스포츠 정신의 몰락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피규어 대회였기 때문에

지금 보면 여러가지로 많은 생각이 드는 조각상이다.

 

반대로 마오 위에서 점프하고 있는 선수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는데

일본 스키점프 종목의 레전드인 카사이 노리아키(葛西 紀明) 선수를 형상화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 당시는 아직 점프 대회 전이라, 훗날에서야 멋진 이야기가 만들어 졌지만

올해 41세의 백전노장인 카사이 선수는 이번이 자신의 올림픽 마지막 출장이었는데

쟁쟁한 유럽의 강호들을 누르고 은메달을 획득, 역대 최연장 메달리스트로 훌륭한 종지부를 찍었다.

 

마오의 캐릭터성 때문에 유독 부각이 되지만, 일본의 동계스포츠 수요는 상당히 큰 편이라 숨겨진 멋진 선수들이 많다.

 

 

 

오오도리 공원은 50% 정도밖에 보지 않았지만, 슬슬 라이트를 끈다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어서 이 정도로 하고 돌아갈까 싶었는데

왠걸 스스키노 거리에서 열리고 있는 눈축제는 10시 넘어서까지도 계속된다는 방송이 나오는 바람에 조금 더 걸어보기로 한다.

 

몸은 무겁고 카메라는 조심스럽고 날씨는 매섭지만 일단 스스키노쪽의 밤풍경도 보기는 봐야 할 것 같으니 어쩔 수 없다.

거리가 만만치 않아서 돌아올 때 꽤나 피곤하겠지만, 여행에서 피곤함이란 뿌뜻한 성취감과도 직결되는 것이니 뭐.

 

오오도리 공원을 벗어나도 삿포로의 밤은 여전히 싱싱하다.

전통 문화라는게 존재할 수가 없는 홋카이도이기 때문에 서양식 펍이 매우 활성화 된 곳이기도 하다.

옆구리에 같이 온 사람이 있었다면 이런 곳에 들어가 분위기를 즐기며 술 한잔 했겠지만.

 

 

 

도로의 높이가 눈 때문에 10cm 정도 올라와 있는 풍경 자체가 나에게는 매우 신선하게 다가온다.

한국도 철원 정도쯤 되면 이 정도 눈이 우습게 보이겠지만, 인구 200만의 도시에서 이렇게 눈이 쌓이는 모습은 꽤나 이질적이다.

 

평범한 거리 모습도 나에게는 셔터를 누를 가치가 충분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 모습은 왠지 눈 보고 발광하는 개와 비슷하지 않았을려나.

 

 

 

일본 현지인들에게도 오키나와와 더불어 항상 최고의 관광지로 꼽히는 홋카이도는

삿포로의 무한한 향략을 즐기면서도 동시에 아득하고 고풍스러운 주위의 도시, 조금만 더 나가면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와 야생림의 향연 등등

여러가지를 동시에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다는 이점이 가득한 섬이다.

 

도시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곳 삿포로의 일본답지 않은 시원시원한 도로와 정방형의 시내 구조,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환락성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가 없을 듯 하다.

 

 

 

개척정신과 독립성이 강한 이주민들의 특성상 대형 브랜드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는 소규모 공예에 강점을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일본 최고의 예술 타투이스트들이 밀집해 있기도 하고, 본토에까지 명성을 떨치는 라멘 가게라던가

심지어 아이폰 케이스까지 해외구매 신청이 쇄도할 정도로 유명한 젊은 창작집단 등등. 둘러보면 재미있는 곳이다.

 

묵묵히 사진 찍으며 걸으니 어느세 스스키노 대로변으로 도착한다. 삿포로 최대의 번화가인 이곳은 도로가 정말 시원시원하다.

 

 

 

삿포로 올 때마다 사진은 담지만 한 번도 타 본적은 없는 관람차의 밤모습을 연례행사처럼 찍어본다.

밤에 타 보면 스스키노 거리의 화려한 불빛을 멋지게 담아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삿포로는 항상 혼자 오다 보니, 어쩐지 그냥 타기에는 흥미가 식어버리는 악순환이 펼쳐지고 있다.

 

다음엔 혼자라도 타서 야경을 한번 담아볼까 싶다.

 

 

 

그러고보니 스스키노 거리 중앙에는 노면전차도 달리고 있다.

꽤나 옛날 맛이 살아있는 전차라서 사진 찍기엔 참 좋은데, 문제는 본인 루트상 저 전차를 탈 일이 전혀 없다는 것.

 

 

 

스스키노 거리의 눈축제 코스는 오오도리 공원에 비해 상당히 아담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오오도리 공원은 어마어마하게 크고 길쭉한 야외 정원이 마련되어 있지만

조형물이 전시된 이곳 스스키노 거리는 평소에 그냥 유흥가 골목거리나 마찬가지라서 그럴 수 밖에 없다.

 

어쨌든 오오도리 공원의 조형물들과 겹치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 즐기는데는 문제 없을 듯 하다.

오오도리 공원이 끝물이라 그런지 관광객이 훨씬 많아서 편안하게 사진 담기에는 에로사항이 꽃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