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했던 사하라의 밤이 밝아왔다.
원래 이틀간 72km를 달려야 하는 Long Day가 57km로 줄어버린 덕에 대부분의 선수들에게는 하루 휴식시간이 생겼다.
나같은 최하위 그룹이 중간에 쉬지 않고 15시간 정도 걸려서 도착했으니
체력적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은 선수들 대부분이 어제 밤에 들어왔을 터.

즐겁게 끝마친 레이스와는 별개로 내 몸은 거의 만신창이의 극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니
오늘은 내일 있을 최대의 난코스 42.195km 코스를 무사히 넘기기 위해 의료진의 치료와 함께 충분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의료 텐트 안에는 이미 그동안의 레이스로 부상을 입은 선수들이 줄지어 서 있다.
하루 종일 휴식시간이라 꿀맛같은 기쁨이 느껴지는 것이 당연함에도, 몸이 망가져 있다 보니 그닥 흥이 나지 않았다.
의료 텐트에서 우리를 치료하시는 거룩한 의사, 간호사분들은 대부분 자원봉사자로, 거의 무일푼으로 일해주신다.


뒤꿈치의 물집. 오돌도돌하게 예쁘게도 피었다.
발이 너무 부어서 슬리퍼가 들어가지도 않는다.


새끼발가락. 발톱은 이미 너덜너덜하다. 물집이 수십번 잡혔다 터졌다를 반복하는 바람에.
이렇게 햇살 아래서 상처들을 직접 보고 나니 세삼 놀랍기도 했다. 나도 참 독한 놈이구나 싶어서.


물론 물집이란 건 이곳에서 말할 거리도 안되는 일상적인 것들이다.
서양 선수들 치료할때는 이렇게 물집 부분을 넓게 확 잘라버리는 방식으로 치료하길래 깜짝 놀랐다.
한국처럼 구멍을 내서 진물을 빼는 식으로 치료하는 방식과는 확연히 달랐다. 굉장히 쓰라릴 것 같은데 얘네들은 이렇게 하더라.

나는 의사 앞에서 '구멍 뚫지 말고 살살해 주세요'라고 최대한 불쌍한 표정 지어가며 몸짓발짓 지었는데, 알아들었는지 간단히 치료후 잘 감아줬다.


치료를 마친 환자를 배웅하러 나와 준 홍양.
5일째 사막 한가운데서 지내고 나니 드디어 상거지꼴이 제대로 잡혀간다.


사하라 사막에서 나의 정신적 지주 홍양은 절뚝거리는 나를 텐트에 눕혀놓고 밥해먹기 위해 땔감을 구해와 줬다.
다쳤다고는 하지만 다들 힘들기는 마찬가지인 사막 레이스에서 나만 가만 누워 밥짓는걸 기다리려니 미안해 죽을 지경이다.
심지어 홍양은 탈락까지 당하고도 일부러 선수들과 함께 생활해 주고 있는데, 사실은 내가 위로해 줘야 하는데 말이다.


대회 첫 날엔 불도 제대로 못 피우던 선수들이지만 이젠 요령이 생겼다.
저렇게 구덩이를 판 다음에 불을 지펴야 바람에 꺼지거나 날아가지 않더라.
비싼 버너와 코펠따위 필요없이 싸구려 주전자 하나면 뭐든 만들 수 있다.
행자가 저 주전자를 버리고 왔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아까웠던 기억이 난다. 가지고 왔으면 평생의 기념물이 되었을텐데...


이제 가지고 왔던 음식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예상보다 음식 섭취량이 훨씬 많았기 때문에 건조 알파미도 간당간당, 파워젤은 모자라서 알맨님거 강탈해서 먹고 한다.
그러다 보니 점점 니것 내것 개념이 없어져가는 식사시간. 이게 한국사람의 정 아니겠나.


아무튼 미리 가지고 온 컵라면 내용물과 정체불명의 스프란 스프는 다 섞어서 만든 꿀꿀이죽같은 라면도
세상에서 먹은 어떤 라면보다 달콤하고 짭짤한 환희를 느끼게 해 준다.
그리고 대회 5일동안 저 부피 큰 컵라면 내용물 들고 뛴 한국팀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고.
한국인은 고추장과 라면만 있으면 세상 어디서든 먹고살수 있는 인종인가보다.


이미 한국팀이 되어버린거나 마찬가지인 피터 무라카미가 자기 식량을 내놓는데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1주일동안 먹을 식량이란게 유아용 분유같은 저런 멀건 파우더와 물에 타서먹는 가루 음료수가 전부였던 것.
사하라 사막 레이스를 어떻게 본 건지 저걸 퍼먹으면서 240km를 완주하려고 했단 말인가?
피터가 그 전부터 여러번 체력의 한계를 느껴 힘들어 하던 이유를 알았다.

그래서 한국팀이 피터 밥까지 함께 만들어 먹기로 하고, 저 가증스러운 가루는 전부 처분해버리기로 했다.
한국인의 이런 공동체 의식에 익숙하지 않은 피터는 대회 내내 미안해하고 고마워했다. 이럴 때는 정이란 녀석이 참 좋다.


음? ㅡㅡ;
이 가루 맛있긴 하다. 달콤한게 간식거리로는 좋은데...


뭔 환각제라도 들었나.
퍼 먹는 알맨님과 행자분의 얼굴이 심상치 않다. 멋진 사진 남길 수 있게 해준 정체불명의 가루에게 건배.


대회 전날 하루동안 장비 검사하며 텐트에서 지낼 때는 회복되지 않는 체력과 사막의 열기 때문에 짜증이 극에 달했는데
5일만에 산전수전 다 겪은 베터랑이 되어버린 우리는 이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도 유유자적하며 이 귀중한 휴식시간을 즐기기 바쁘다.

4일동안 각자가 겪은 일들을 말하며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하고 그저 드러누워서 대회 시작 후 처음으로 사하라를 즐길 수 있는 여유를 만끽한다.
여러 외국 선수들이 텐트를 돌며 인사하러 오기도 하고, 이곳에선 참가자 모두가 낯선 이방인이자 동료이기 때문에 금새 친해진다.


홍양이 내 발을 굉장히 신기해해서 기념으로 한 장.
군대도 못가는 평편족이란 이런 것이다.
그런데 사하라사막엔 잘도 오는구만.

어쨌든 이런 기형적인 발 때문에 하기 싫은 군대는 쏙 빼먹고 하고싶은 사하라 레이스 할 수 있어서 참 기뻤다.
군대 대신 근무했던 회사에서 2년간 모은 돈으로 사하라 레이스 참가비를 마련했으니까. 경사로세.


돌이켜보면 즐거웠던 시간.

모래바람이 짜증나서 버프를 끝까지 뒤집어 썼더니 홍양이 박장대소를 한다.
나는 자기 모습을 못 봤으니 그런갑다 싶었는데, 대회 끝난 후 사진을 보니 대충 웃을만 하다고 이해가 되는구만.


제대로 먹지도 못한 준비부족 피터는 편안하게 잘도 잔다.
이 녀석 한국팀이 밥 나눠주지 않았으면 절대로 완주 못했을거다. 본인도 인정하는 사실.
그래서 더욱 친해진 것이겠지.

훗날 한국에 놀러 왔을때도 재밌게 놀았다.


밖이 소란스럽길래 나가보니 사하라 사막 마라톤의 영웅 '아한살' 선수가 서 있었다.
매년 열리는 사막 레이스에 거의 매번 1,2등을 번갈아 차지하는 '아한살' 형제는 이미 모로코 전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국가의 영웅.

일단 사하라 레이스도 상금이 걸린 대회라 이 사람들의 수입이나 스폰서는 상당한 편이다.
역시 모로코 출신이란 사실이 커다란 장점으로 작용한 건지, 일반 마라톤 대회에서의 성적은 그리 좋지 않은 편.


그저 신기하기만 한 등번호 1번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기지 않으면 어쩌겠나.
거물중에 거물이라 좀 긴장했는데 사실 만나고 보니 아주 친절하고 사교성 좋은 멋진 사람이었다.
함께 춤도 추고 사진도 찍고 스스럼없이 놀다가 헤어졌다.

사실 이곳에서는 국적이나 성별같은거 정말 의미없더라.
보는 사람들끼리 누구나 웃으면서 인사하고, 같은 길을 헤쳐왔다는 동질감이 시간을 압축시켜 오랜 친구처럼 친근하게 만들어주니까.


사하라를 전세낸 건 아니기 때문에 쓰레기 배출은 철저하다.
텐트 앞에 보이는 검은 비닐안에 철저하게 넣어서 버려야 한다.
레이스 마지막 날에 흥분한 나머지 달리다가 마시는 패트병 따위를 버리는 선수들도 있다고 하는데
걸리면 엄격한 패널티를 주기도 하고, 이만한 돈 들여서 여기까지 온 사람이라면 최소한의 상식은 갖고 있길 바랄 뿐이다.


동양인들끼리라서 친근감을 느꼈는지 예전부터 몇번 마주쳤던 네팔 선수들이 놀러왔다.
영국 국적으로 대회에 참가한 그들은 문신에서도 얼핏 볼 수 있듯이 영국군 특수부대 소속.

독특한 모양의 단검 쿠쿠리를 사용하는 용맹한 전사로 유명한 네팔의 구르카족으로만 이루어진 특수부대.
밀리터리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다들 알고 있을 이 세계 최강의 전사들을 앞에서 보게 되니 신기할 따름이다.

자기네들도 힘들다고 말은 하지만 몸의 만듦새나, 뛰는 모습을 보면 솔직히 그들에게 이런 대회는 그냥 몸풀기용 관광대용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 영국 국적을 빌린 몸으로밖에 참가할 수 없는 그들의 사정을 들으니 역시 약소 동양인들끼리 느낄 수 있는 애절함이 배어나왔다.


그동안 나는 편안히 엎드려서 홍양의 시원한 지압맛사지를 받는 중.
홍양에게는 아무리 감사를 해도 모자란게, 이렇게 중간중간 물심성의껏 도와주는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본인이 달리지 못하더라도 팀 중에서 가장 밝은 웃음으로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실질적인 정신적 지주나 마찬가지.

지금도 그 감사의 표현을 만족스럽게 하지 못해서 안타깝다. 날잡아서 홍양 집에 쳐들어가 맛있는거 실컷 먹여줄 계획을 하고 있는 중.


선수들에게 지급된 신비의 영약 코카~ 콜라!
콜라 좋아하는 선수들에게 대회 5일째 제공되는 이 콜라는 그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은 것.

그런데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별로 땡기는 물건이 아니었다.
콜라를 좋아하지 않는다는게 오히려 좀 아쉽게까지 느껴졌던 사하라에서의 한 때.
나침반님은 이놈을 모래속에 묻어놨다가 다음 날 새벽에 꺼내마시면 시원하게 즐길 수 있다고 하신다. 역시 경험자.


내가 최대한 체력 회복하려고 자고 자고 또 뒹굴며 자는 동안
마음껏 휴식을 즐긴 사람들은 텐트 뒤쪽의 모래언덕에서 장난치며 놀았다.
사막의 모래는 한국에서는 경험하기도 힘들 정도로 아주 곱고 미세해서 신발 속에 들어가도 어느 순간 스스륵 다 빠져나가 버릴 정도.
거기다 적당히 따뜻하지, 몸에 묻지도 않지, 뒹굴며 놀기엔 그만인 녀석.


행자분은 아주 신이 났다.
저 다리통 색깔을 보면 알겠지만, 저렇게 탄 살갗은 1년이 넘어도 제 색깔을 못찾더라.
선크림 없이 태웠으면 돌판에 구워진 듯한 고통에 움직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선크림 무지하게 바르니까 저렇게 곱게 타기만 하고 아프진 않았다.

나는 긴팔 러닝복에 머리 끝까지 버프를 뒤집어써서 얼굴은 멀쩡했다.
그냥 고글만 썼다간 눈 주변만 새하얗게 변한 몰골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 한국서도 1년내내 고글만 끼고 다녀야 했겠지.



내일은 대회의 최대 난코스 42.195km.
제한시간 안에 들어와야 하고, 5일동안의 강행군으로 인해 엉망이 된 몸을 추스려야 한다.

하지만 오늘 휴식을 취하면서 확신할 수 있었던 것.
이제 결코 탈락은 없다.

Long Day의 밤을 보내면서 드디어 조그만 결의같은 것이 내 마음속에 생겨났다.
사하라의 밤 속을 달린 내가 겨우 42km 정도로 탈락할 리 없다고.
더구나 내일만 넘기면 마지막 하루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깝게스리 탈락따위 할까보냐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