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사하라 레이스의 백미 'Long Day'의 첫 날이 밝았다.
Long Day란 이틀간 야영지 없이 72km 를 달리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말하면 제한시간이 넉넉한 편이기 때문에 어찌보면 편할 수도 있지만
나같은 저질 체력의 소유자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찔해 지는 날이기도 하다.

밤엔 달리고 싶으면 달리던가 준비된 간이 펜트에서 휴식을 취한 후 달리던가 마음대로다.
어느 정도 체력이 남은 선수들은 대부분 밤늦게까지 달려서 하룻만에 야영지에 도착한 후, 긴 휴식을 취하는게 정석.

다음 날이 실질적으로는 가장 어려운 42.195km 구간이기 때문에 Long Day 마지막날에 체력을 회복하는 시간을 벌어야 한다.


오늘은 스텝들로서도 거의 잠 한숨 자지 못하고 선수들 상태를 일일이 따라다니며 체크해야 하는 날이라
긴장감이 감돌지 않을 리가 없다.

밤중엔 특히 위험하기 때문에 모든 차량과 서치라이트, 그리고 방향안내용 레이저 빔까지 쏴 대면서 선수의 안전을 책임진다.


3일간의 레이스를 마치고 일어나는 기분은
입대 하루 전에 쫑파티로 진탕 퍼마시고 눈을 떠 지끈거리는 머리를 들고 입영열차에 오르는 기분이랄까.
만신창이가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몸이 지저분하다거나, 머리를 못감았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3일동안 섭씨 50도가 넘는 하늘 아래서 10kg이 넘는 짐을 지고 101km를 달려온 사람의 심정이 어떻겠나.
알맨님의 얼굴이 그 모든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마디 사진이다.


아침에 아시아 에이전트 제임스 장씨에게 재차 물어봤지만 코스 거리가 단축되는 일은 없다고 못을 박으신다.
21년간 단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다고.

그 말의 무게가 내 고개를 숙이게 만들 정도로 무겁다.
오늘 정말로 나는 사하라에서 비참한 탈락의 맛을 봐야 하는 건가.


원래 275 정도의 신발을 신지만, 레이스중엔 발이 붓는다고 해서 일부러 285짜리를 신고 왔는데
이젠 발이 신발에 잘 들어가지도 않는다.
양쪽 새끼발까락은 스치기만 해도 면도칼로 베인 것 같은 짜릿함이 전해온다. 물집이 너무 많이 잡혔다 터져서 이젠 따로 진물을 뺄 필요도 없다.
그냥 알아서 양말을 적셔주기 때문에 별다른 응급 처치 방법도 없다. 뒷굼치에는 이슬같은 물집이 수십 개씩 동글동글 맺혀있다.

인생 포기한 심정으로 누워있으니 그래도 슈가님과 알맨님은 좋다고 사진 찍는다.
나도 좀 긍정적으로 살아야 할까?


버프 속의 얼굴은 잔뜩 찡그려 있는데
멤버들이 알아서들 재밌는 장면을 연출해 준다.
어찌보면 등산용 스틱이 전사한 용사들 앞에 장렬히 꽂혀 있는 위령비 같은 느낌이네.

출발 시간이 11시로 지연되어서 계속 저렇게 누워있었다.


3일간 탈락자가 100명을 넘었다.
이 3일동안만 역대 모든 레이스 중 가장 많은 탈락자 수를 기록한 것이다.

지옥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출발선 앞에 서니 대회 위원장인 패트릭 바우어가 지프 위에서 뭔가 말한다.
참가자들이 술렁거린다.

탈락자가 너무 많고, 날씨가 더워서 선수들의 건강에 위험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오늘과 내일 72km 구간을 57km로 줄인다는 것이다.

15km가 줄었다.
나는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꽤나 망설였던걸로 기억한다.

이제 정말 빼도박도 못하기 때문에.
거리까지 줄여줬는데 주저앉아서 탈락당할 수는 없기 때문에.
나침반님은 오히려 거리가 줄어서 아쉽다고 하신다. 충분히 완주할 체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같은 저질체력 민간인을 위해 본인의 아쉬움은 흔쾌히 접기로 하셔서 내가 덜 미안하다?


제임스 장씨가 멋적어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다시 몸을 추스린다.
사하라에서 단 하루밖에 없는 야간 레이스다. 이제 내게 남은 건 즐기는 마음 뿐이다.


애초에 사하라 레이스란게 마음 단단히 먹고 나가는 경기긴 하지만
특히 오늘의 Long Day는 여러가지 의미로 선수들을 초심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간식 섭취, 페이스 조절, 남은 물의 적절한 분배 등 모든 것이 조심스럽다.

3일간의 레이스에서 느꼈던 신선함, 짜증, 괴로움 등이 오히려 마음 속에선 사그라들고
시험지를 앞에 둔 수험생처럼 신중하게 시간과 거리계산을 하며 체력을 아낀다.

조금 더 진지해지는 것이다.


대충 10km 간격으로 CP가 있다는게 몸에 각인되어 있을 시기가 되었다.
예전처럼 그놈의 10km라는게 언제 내 앞에 나타나는지 전전긍긍하며 발걸음을 옮기던 초보에서 탈피한 느낌.
이젠 대충 남은 물의 양과 걸어온 시간만 계산해도 대충 어디쯤에서 CP가 나타날 것인지 예상이 가능하다.

물론 이런 여유로움도 12시가 넘어가면서부터는 그다지 큰 위로가 되지 못한다.
숨을 곳 없는 태양빛과 미친듯이 다리를 괴롭히는 복사열이 몸을 가마솥에 넣고 쪄 버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중간중간 예고없이 찾아오는 매서운 모래폭풍.
오늘은 어제처럼 무시무시한 산이 버티고 있진 않지만 반대로 낮은 모래언덕이 수십 km에 걸쳐 분포해 있다.
몇 미터 되지 않는 작은 모래언덕이지만 워낙 입자가 고와서 밟을때 마다 발목 깊숙히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한다.
그런 언덕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문득 숙였던 고개를 들어 앞을 내다보면 어디가 언덕의 끝인지 모르겠다.
앞에 보이는 언덕을 넘으면 예전처럼 삭막한 자갈밭이겠지 싶지만 그 위로 올라가 보면 또 펼쳐진건 모래언덕.
보이지 않는 모래언덕의 끝을 기대하며 일단 눈 앞의 언덕이라고 넘기 위해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다 보면 계속 앞으로 나아가겠지.


스텝들이나 사진사들도 이런 환경이 달갑지 않은 건 매한가지다. 지프는 모래에 묻혀버리지. DSLR에선 모래가 덜그럭거리지.
심각한 사고가 날 수 있는 Long Day이기 때문에 모든 스텝들이 끊임없이 코스를 순찰하며 선수들의 상태를 확인한다.
그야말로 천 명에 가까운 인원들이 한마음이 되어 사막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삽질을 예술로 승화시키고 있다. ㅡㅡ;


울트라맨이 되어버린 나침반님은 그래도 우리 중에선 제일 사하라를 즐기며 달리지 않았을까 싶다.
나도 다시 가게되면 좀 더 즐길 자신이 있거든.
일행중 유일하게 2년 연속으로 참가하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나도 이제는 충분히 이해한다.


CP에서 신발 벗는건 이제 그만하고 싶다.
벗을때나 신을때나 너무 아파서 오히려 체력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모든 선수들의 체력은 한계에 달했고, 한번 주저앉아서 일어나지 못하는 선수도 많다.

하지만 오늘은 하위 선수들이 재미있는 구경을 했는데
Long Day의 특성상 선수들의 실력차에 따라 거리가 너무 벌어지기 때문에 특별히 하위 선수들을 먼저 출발시키고 선두권 선수들은 3시간 늦게 출발시킨 것.
그래서 한창 빌빌거리며 걷다 보면 눈 깜짝하는  속도로 무시무시하게 앞으로 달려가는 상위권 선수들의 모습을 순간적으로 구경할 수 있다.


오후 4시가 넘어서 본격적으로 Long Day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할 때쯤이면 기온도 적당히 내려간다.
물론 적당히란 말은 사하라 사막에서 적당하단 이야기.

유난히 모래언덕이 많은 오늘 코스는 체력적으로는 힘들지만 오히려 다리엔 부담이 덜 가서 좋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날카로운 자갈이 많은 단단한 평지는 발바닥에 큰 부담을 주기 때문에 고통스러운데
모래언덕은 비록 발걸음이 힘들긴 하지만 발바닥과 무릎에 부담을 주지 않아서 오랜 시간 걸을 수 있다.

일본인 연예인 아이나씨와 내가 걷는 속도가 비슷한지 계속 앞뒤로 지나쳐가는데, 이젠 무덤덤하다. 말도 안건다.
5시쯤 되니 몸의 영양소가 완전히 고갈됐는지 걸으면서도 잠이 오고 눈이 스르르 감긴다. ㅡㅡ;
머리는 멀쩡해서 앞으로 걸어가고 싶은데 뭔가 세상만사가 귀찮아 지며 다리에 힘이 풀리는 희한한 느낌.
스스로도 몸의 놀라운 반응에 신기해 하면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파워 젤을 입에 짜 넣는다.
5분만 있으면 웃기게도 정신이 번쩍 든다.

그 짓을 1시간 간격으로 반복하며 모래언덕을 오르고 내린다.


깊은 한숨이 저절로 내쉬어지던 곳이다. 드디어 3시간이 넘는 오르락 내리락 모래언덕이 끝을 보인다.
이런 사진조각 따위로 느낄 수는 없지만, 사하라 사막은 정말 한 순간 한 순간이 볼거리로 가득하다.
아득한 시간이 압축되어 건조보관 되어있는 사막이라는 자연은 인간의 희노애락으로 설명하기 힘든 어색한 감동을 주곤 한다.


모래언덕을 빠져나오자 갈라진 땅이 나온다.
주위에 가끔 삼엽충의 화석이 보이기도 하는 이 곳은 원래 수억년 전에 바다였던 곳.
바다에서 강과 울창한 숲으로 뒤덮힌 낙원으로, 그리고 또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죽음의 땅으로 변해온 이곳의 역사에
내가 흔적을 남기고 있다고 생각하니 뭔가 경외감 비슷한게 들기도 한다. 삼엽충과 나는 친구먹은건가?


드디어 이제껏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야간 레이스의 시작이 다가온다.
해가 슬슬 지기 시작할 때 도착한 CP에서는 형광봉을 나눠준다. 똑 부러트리면 빛이 나는 가요프로그램의 단골 아이템.
이걸 베낭에 끼우고 달려야 한다. 앞뒤 사람에게 길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또 조난당했을시 찾기 쉽도록.
그 외에도 비상용 구명 폭죽도 하나 가지고 있다. 길을 잃어버렸을 때 터트리면 사방팔방에서 저글링 개떼밀려들듯이 스텝들이 찾아줄것이다.

물론 이건 돈이 좀 나가는 물건이라 이걸 반환하지 않으면 완주 기념품을 주지 않는단다. 길을 잘 찾아가서 이놈을 살려가야지.
사막에서는 해가 지는 순간 기온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사막을 달리는 경험은 신선하다.
3일 전까지 사막에 와 본적도 없는 인간이 이젠 많이 컸구나.


어지간히 좋은 카메라와 삼각대 장비를 갖추지 않는 한 선수가 야간 레이스 사진을 찍는것은 불가능하다.
인위적인 불빛이 단 한조각도 없는 망망대지에서 해가 지는 순간은
20년동안 세계의 호러영화란 호러영화는 다 보고 다녔던 나로서도 등골이 오싹한 순간이다.
한낮의 매서운 햇빛에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던 눈이 어둠을 만나자 장님으로 돌변한다.
머리의 간이 헤드렌턴을 켜봤지만 1m 앞의 길바닥조차 게슴츠레하게 보일 정도의 도움밖에 되지 않는다.

주위에 선수나 스텝이나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바람소리만 들리는 광야의 한 복판에서 장님이 서 있다고 생각해보라.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내 앞의 세상은 똑같은 모습이다. 그건 정말 공포였다.


플래시를 터트려도 보이는 건 간신히 이 정도 거리다.
그리고 도무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야광봉 하나 끼워놓은 표지'가 코스 안내의 전부다.
원래대로라면 지도와 나침반을 이용해서 길을 찾아야 한다지만, 지도가 제대로 보일리나 있나?

내가 길을 몰라서 망설이고 있자 뒤에서 따라오던 선수도 '어디로 가야 하냐'고 나한테 묻는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깎아지른 듯한 날카로운 모래언덕 아래를 가리키며 '이쪽'이라고 말했다.
사하라 레이스 특성상 급격한 방향 변화가 없다는 가정하에 그렇게 가리킨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외국 선수가 망설이자 나는 그냥 낭떠러지에서 구르듯 엉덩이를 거의 언덕에 붙인 채로 서벅서벅 걸어 내려갔다.
모래는 발목을 넘어 무릎 가까이까지 밀려오지만 덕분에 절벽같은 언덕을 내려갈 때도 다리에 부담이 가진 않았다.
언덕을 내려갔으니 다시 올라가야겠지. 거의 맹목적으로 언덕을 올라가 보니 마침내 저 멀리 평지에 사람들의 흔적이 보인다.


공포스럽던 어둠에 눈이 익고, 달이 뜨자 세상이 밝아진다.
그땐 몰랐지만 Long Day 밤은 일부러 보름달 즈음에 날짜를 잡는단다.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면 벌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완전한 고요의 세상이 다가온다.

수평선의 대지에서 소리 한 점 없는 순간을 경험해 본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무채색의 대지에서 명암만으로 이루어진 달빛에 비치는 세계를 본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하늘을 가득 덮은 별과 고고한 보름달에 비치는 밤의 사막은 인간이 왜 자연을 경외시하게 되었는가를 실감하게 해 준다.

자꾸 걷다가 서다가를 반복한다. 지쳐서가 아니고 걸음을 떼는것이 아까워서.
벅차는 행복감에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다. 그저 거칠게 행복하다.
걷다가 노래도 불러본다. 저절로 흥이 날 정도로 과도하게 행복하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자연의 미술품을 이 밤, 이 곳에서 나 혼자 독점하고 있다는 뿌듯함은
거기 가 보지 않으면 어떤 글이나 사진으로도 느낄 수 없는 최고의 보물.


달이 뜨고나서는 무서움도 사라졌지만 스텝들은 안전을 위해 오만 짓을 다 저지르고 있다.
강력한 레이저를 쏴서 방향을 가르쳐 준다. 상당히 멀리까지 뻗기 때문에 수 km 밖에서도 저걸 보고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자정이 넘자 코스 옆으로 차량들이 정기적으로 왔다갔다 한다. 스텝들이나 선수들이나 낮보다 더 흥분한 것 같다.


마지막 CP 근처에서 피터를 만났다. 야영지까지 7km 쯤 남았는데 함께 가기로 했다.
마지막 CP에서 의료진들에게 내 발가락과 뒷굼치를 보여줬는데, 한동안 바라보다가 '여기선 응급치료만 해 줄테니 내일 야영지 의료센터에 가'라고 말해준다.

피터와 터벅터벅 걸으며 세상사 이야기를 한다. 이녀석 나보다 많이 젊더군. 22살이던가 23살이던가.
이번 마라톤이 끝나면 그대로 모로코를 여행 할거란다. 그를 위해 스와힐리어도 배워놨다고 한다.
조금 수줍음을 타긴 하지만 자기가 정한 인생에는 거리낌없이 나가는 피터 녀석 굉장히 존경스럽다.

확실히 나는 야행성인지 뭉툭해진 느낌의 다리도 아랑곳없이
사하라 레이스 시작 후 처음으로 즐거운 기분이 되어 거침없이 걸어 Long Day를 끝마쳤다.


야영지 앞에선 마지막 한 선수가 들어올 때까지 스텝들이 자리를 뜨지 않는다.
그와 함께 이름도 모르는 선수들을 위해 골인점 앞에서 묵묵히 응원을 위해 기다리는 선수들도 있다.
차분하지만 화려한 성취감으로 가득 찬 멋진 밤이다.

물론 다른 한국팀은 옛저녁에 들어와서 잘 주무시고 있다.
결국 난 Long Day도 통과해 버렸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