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에 달한 더위를 뒤로 하고 청사 안으로 들어오니 천국이 따로 없다.

원전사고 전의 끝도없이 틀어대던 에어콘과는 전혀 다르지만, 밖에 워낙 덥다보니 이 정도만 해도 시원하다.

시간은 충분히 남았고 해서, 배는 고프지 않지만 마지막으로 뭐라도 뱃속에 집어넣고 가 보려 한다.

 

자리가 널널하면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 하는것도 괜찮겠지만 이곳은 그리 넓은 가게가 없다.

지방의 민자공항이다보니 역시 한도없이 크게 확장하는 데는 무리가 있는 듯.

 

공항 내부 가게들은 아무리 봐도 한국과 차이가 커 보이는 것이

팔고 있는 물건들의 종류가 기본적으로 좀 다른 듯한 느낌이 든다.

인천공항의 수많은 가게들은 대부분 면세의 이익을 즐기기 위한, 다시 말하면 자신이 사고 싶은 물건을 파는 느낌인 반면

이런 공항의 가게는 남한테 선물하면 딱 좋을 만한, 그다지 비싸지 않으면서 맛있어 보이는 과자 세트같은게 많다.

 

 

 

긴 줄이 서 있길래 뭔가 싶어 가 봤는데, 원래는 광장이었을 중앙 홀에서 뭔가 행사중이다.

어린이 놀이터 같은 구조물과 아이들이 그린 그림 같은것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줄을 선 진짜 이유는 저 앞에서 열리고 있는 컵라면 시식회 때문이다.

 

닛신의 고급 컵라면 제품군인 라오(ラ王)를 시식하도록 하고 있는데

내 입맛엔 컵누들(カップヌードル)이 더 맛있지만, 일본에서는 단연 최고의 컵라면으로 인기가 높은 녀석이다.

라오 라멘은 1990년대 출시된 후 나름 인기가 있다가 점차 하향세로 접어들면서

잠시동안 제품 단종을 한 후, 디자인과 내용물을 완전히 일신해서 2010년 다시 출시했는데

당시 일본에 있던 본인은 굉장히 저돌적인 광고로 승부하는 녀석이 참 인상깊었다.

 

처음엔 광고 보고 과연 라멘의 왕이라는 칭호를 마음대로 써도 되는가 싶었는데

돼지 사골로 국물을 낸 돈코츠 라멘의 경우, 합성식품이 아닌 진짜로 말린 돼지고기 챠슈와 건조 숙주나물 등

컵라면으로서는 최고의 격식을 차린 호화스러운 내용물을 보고 나름 납득은 했다.

 

가격도 한국돈으로 3600원 정도로, 일본 컵라면 시장에서 가장 비싼 축에 들어가지만

인스턴트 라멘의 한계에 달하는 갖가지 제조법을 배합한 녀석이라 다들 어느 정도는 납득 하는듯.

하지만 역시 개인적으로는 컵누들이 가장 맛있게 느껴진다.

 

이 더운날 저거 시식 한번 해 보려고 줄 서고 싶지는 않아서 패스.

하지만 아이들 놀이터와 함께 전시해 놓고, 간이 식탁에서 아이들과 함께 라멘 먹도록 한 발상은 꽤나 훌륭하다.

공항 라운지에서 이런 이벤트가 펼쳐지는 것도 상당히 인상깊다. 공항은 아이들에겐 별로 재미없는 곳일텐데, 발상이 좋다.

 

 

 

한국도 이제 인천공항이라는 걸출한 녀석이 생기는 덕에 감흥이 조금 덜하지만

센트레아는 확실히 넓지 않은 공간을 잘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깔끔함으로는 오히려 새로 개장한 하네다 공항보다도 더 느낌이 좋은데

출국장과 입국장을 층별로 분류하지 않고 완전히 독립된 공간으로 띄워놓음으로서

출국장의 즐길거리에 집중할 수 있는 느낌이 든다. 입국장은 뭐, 거기서 즐길 사람 별로 없을테니 패스하고.

 

 

 

일본의 상당수 공항은 에도시대 일본의 상가 거리를 재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좁에 만들어 진 골목길이 주를 이룬다. 한국에서 보기엔 뭔 구멍가게 골목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게 저 사람들의 전통이고, 국제적 허브인 공항에서까지 그것을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분명 좋은 것이다.

 

인천공항에서 제일 아쉬운 점이기도 한데, 군데군데 한국의 문화를 알리려는 센터나 전통 공예점 등이 입점해 있지만

공항의 분위기 자체만큼은 넓직한 서양식 인테리어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외국 관광객이라면 사람들 행렬에 좀 귀찮아지긴 해도 이런 좁은 골목길 분위기에서 이국적인 감성을 느낄 것이다.

 

 

 

에도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는 워낙 일본의 정체성이 흔들리던 시대라 그런지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통 목조건물과 콘크티르 양옥 모양의 가게가 마주한 느낌이 재미있다.

실제로 격변하는 메이지 시대엔 저런 골목이 흔하게 보이기도 했다.

 

일본 사람들은 그 당시에도 나름 자신들의 스피릿(?)은 보존했다고 생각하는 듯 하지만.

실제로 서양 주택과 혼혈의 산물인 흰색 가옥들은 풍요로웠던 메이지 시대의 상징과도 같은 이미지.

 

다들 일정 레벨 이상은 맛이 있어 보여서 어디 들어갈까 꽤나 한참동안 고민한다.

결론은 줄 서 있지 않은 곳에 들어가기로. 역시 줄서서 기다려 밥 먹는건 본인 취향이 아니다.

 

 

 

센트레아는 보기보다 큰 공항이 아니라서, 사실 상점가가 그리 큰 편도 아니다.

하지만 동선을 잘 활용해서 구역마다 느낌을 전혀 다르게 표현해 놓은 점에 있어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시끌벅적한 시장길에서부터 새하얀 근대 서양식 건물 거리, 그리고 이렇게 저녁무렵의 술집 골목길 같은 느낌을 살리는 곳 까지.

 

이미지와 디자인의 힘을 교과서적인 방법으로 잘 살린 상점가라는 느낌이다.

공항에서 이런 다양성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출국 전 마지막 한 방울의 외화까지 쪽쪽 빨아먹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간편히 한끼 때우기엔 역시 라멘이 가장 취향에 맞지만, 왠지 이번엔 변화를 좀 주고 싶었다.

라멘을 제외하고 적당히 만족감 느끼게 다양한 녀석을 맛보고 싶어서, 뭔가 굉장한 바리에이션 식품 샘플이 놓여있는 가게로 들어간다.

전망대 쪽에 위치해서 바깥구경 하며 밥 먹기 좋은 '카멜리아'라는 가게. 간이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전망대 쪽은 사람이 꽉 찼고, 나처럼 혼자 먹는 사람에게는 그런 자리 좀처럼 내 주지 않는 듯 하다.

아무래도 이 가게는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이점이 장사에 꽤나 영향을 미치는 듯 하다. 즉 터가 좋다.

 

메뉴 중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천하재패 삼매경(天下取り三昧) 이라는 종합선물세트.

1620엔이나 하는 고가 식사다. 일본에서 단품 식사를 이만한 가격에 먹어본 적은 없다.

하지만 마지막 아쉬움을 달래주기 위해서는 이 정도 먹어줘야 할 것 같아 큰맘먹고 시켜 본다.

막상 나온걸 보니 나 정도 되는 사람에게는 많이 배부를 것 같지도 않은 일반적인 양으로 보인다.

 

반찬 개념이 없는 일본이라, 한국사람 입장에서 보면 그냥 다양한 요리 조금씩 먹어볼 수 있는 간이 뷔페라고 할까.

 

 

 

만듦새가 김밥천국같은 수준이었다면 분노했겠지만, 가격대가 생각보다 높을 뿐 음식은 꽤 잘 만들어 나온다.

나고야의 대표 먹거리였지만 아직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키시멘도 여기서 접해볼 수 있었다.

우동과는 달리 넓적한 면이 특징이 키시멘은 한국의 칼국수면을 좀 더 확대한 듯한 느낌을 준다.

넘기는 맛과 씹는 맛 두 가지를 잡기 위해 만들어졌다느 설이 있는데, 그냥 나고야 지역의 향토요리로 우동과 크게 다른점은 없다.

 

그 외에 은은한 녹차를 뿌려 먹는 장어덮밥이나 숙주나물과 돼지고기를 얹은 덮밥, 새우와 돈까스 등등

다양한 종류를 맛보기 위해서는 충분히 괜찮은 선택이다. 각각의 양은 매우 적어도 다 먹고 나면 나름 든든한 느낌은 든다.

라멘 대신에 선택한 녀석 치고는 가격이 2배에 가까워서 약간 아쉬웠지만

먹고 불만이 생길 정도는 아니라 좋은 경험 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먹으라면 아마 먹지 않겠지만.

 

 

 

출국수속을 마치고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여전히 입이 허전해서 스타벅스에서 녹차 뭐시기를 주문한다.

바로 앞에서 주문한 세 남자 일행은 한국 여행객들이었는데, 주문은 어떻게 손짓발짓으로 넘어갔지만

스타벅스 직원이 주문하신 음료 나왔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그걸 알아듣질 못해서 그냥 앉아서 수다떨고 있었다.

 

내가 도와줘야겠다고 일어서려는 순간, 일본인 할아버지가 젊은이들에게 손짓으로 음료 나왔다고 알려주신다.

세 명은 고맙다고 인사하고, 스타벅스 직원한테도 실실 웃으면서 농담 따먹기 비슷하게 잔돈가지고 장난을 친다.

저렇게 아무 곳에서나 스스럼없이 가벼운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것도 나에게는 굉장한 능력으로 보인다.

난 밖에서는 뭘 해도 얼굴이 딱딱해져서 그런 농담 주고받기는 어려운데.

 

아무튼 가벼운 소동은 금새 진정되고, 난 시원하고 고소한 녹차 셰이크로 여유를 즐기기 시작한다.

중간에 그 세 명이 나한테 와서 영어로 '의자 좀 가져가도 될까요?' 라고 물어보길래 고개 끄덕여 줬다.

영어로 물어봤으니 나를 한국인으로 보지는 않는다는 이야기고, 그럼 굳이 한국어로 대답해 줄 필요도 없으니까.

 

 

 

그러고보니 공항을 떠나기 직전에야 기억이 났는데, 지금 이곳에서 뭔가 내가 흥미가 동할 만한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도착 당시 그 포스터를 보면서 '돌아갈 때 시간나면 한번 봐야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탑승시간 지연으로 인해 충분히 시간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스카이 덱과 상점가, 식당 등을 둘러본다고 까맣게 잊어버린 것.

 

원래 예정에 없던 녀석을 얼핏 기억에 놓은 것이니, 역시 그런 건 메모라도 해 놓지 않는 이상 쉽게 잊혀지는 법이다.

여행에 그 정도 아쉬움은 있어도 추억으로 남길 수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어느 곳이든 굉장히 깔끔해 보였던 센트레아 공항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한 장 담고 여권과 티켓을 꺼내든다.

비행기 창문 밖의 하늘 풍경도 여행 시작시 카메라에 담아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집에 돌아갈 때 까지 셔터를 누르는 일은 없다.

 

그렇게도 많이 가 봤지만, 한 번도 마음에 와 닿는 적이 없었던 나고야가 이번엔 조금 더 친숙해 진 느낌이다.

다른 여러 지역과 인연의 도움도 있었지만 어쨌든. 나한테 찍혔던 인상이 사라져서 나고야도 더 행복해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