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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2.15  2월 17일 삿포로 - 삿포로 비어가든 9
  2. 2014.12.11  2월 17일 홋카이도 - Skyfall 6
  3. 2014.12.09  2월 16일 오비히로 - 반에이 경마 2편 6
  4. 2014.12.04  2월 16일 오비히로 - 반에이 경마 1편 2
  5. 2014.12.02  2월 16일 오비히로 - 토카치무라 2
  6. 2014.11.26  2월 16일 오비히로 - 개척과 말의 역사 6

 

 

비어가든에 도착하니 하늘이 맑다. 깔끔할 때 비어가든 모습이나 담아주기 위해 셔터를 누른다.

먹으러 오는 곳이기도 하지만 건물 자체가 가치를 지닌 붉은 벽돌집이라 구경하기에도 좋다.

생애 첫 비어가든은 자전거로 도쿄에서 이곳까지 달려오기도 했고 싱싱한 20대였기 때문에 미친듯이 고기와 맥주를 흡입했던 기억이 난다.

 

바지 고간쪽이 자전거와의 마찰 때문에 구멍이 나 버려서 난감했지만 누가 쳐다나 볼까 싶어 그냥 입고 다녔는데

문제는 행색이 워낙 노숙자같아서,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서 있던 한국인 부부에게 '한국서 오셨나봐요' 하고 말을 거니

몰래카메라라도 걸린 듯 꺅 하면서 기겁을 하던 모습에 살짝 충격을 받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물론 그쪽은 금새 친근하게 대답해 줬지만.

 

 

 

비어가든 주변엔 거대 쇼핑몰도 있어서 구경하기 좋지만

여행자들의 경우엔 시내에도 구경할만한 쇼핑몰이 많아서 굳이 이곳까지 둘러볼 필요가 없다는 게 아쉬운 점.

시간을 느긋하게 잡아서, 3~4시쯤 이곳에 와 쇼핑몰을 구경한 뒤 비어가든으로 들어가도 나쁘지 않지만

비어가든에서 배를 채우려면 쇼핑몰 안쪽의 먹거리가 전부 무의미해 지기 때문에 약간 김이 빠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 부근은 관광객이 비어가든 외에 별로 즐길거리가 없는 거주지 구역이지만

삿포로 역과 버스 연계가 매우 충실한 편이라 거대 쇼핑몰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가 봐도 될 듯.

한국 물가가 얼마나 미쳐 돌아가는지를 확실히 체감해 볼 수도 있다.

 

 

 

붉은 벽돌집은 겨울의 눈과 굉장히 잘 어울리지만 사실 이곳은 여름이 좀 더 낫다.

더울때 먹는 맥주가 각별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비어가든이라는 이름답게 공원처럼 주위 조경이 아름다워서.

 

여름 삿포로는 눈축제가 열리는 중앙공원 전부를 비어가든으로 만들어 온갖 맥주를 야외 잔디에서 즐길 수 있다.

여름에 맥주, 겨울에 눈축제라는 두 가지 큰 이벤트만으로도 이 곳의 활기는 일년 내내 사그라들줄 모른다.

대구에서 치맥축재라며 사람들 줄 세워놓고 그깟 치킨조각 조금과 김빠진 맥주 한 잔 돌리는 모습을 보니

축제의 의도와 방향성이 얼마나 그 축제를 아름답게 혹은 추하게 만들 수 있는가를 세삼 느낄 수 있었다.

 

원래 저 양조주 근처에 블루 포피라는 희귀종을 키우고 있어서 여름즈음엔 귀한 구경을 할 수 있다.

 

 

 

자전거 여행때 찍은 블루 포피 사진. 학명은 메코놉시스라는 희귀 양귀비로, 원래 부탄 고지대에서 발견된 야생종이다.

고산지대 양귀비중에서도 특히 귀하다는 푸른색 양귀비이고

일본이나 한국 여름기후에서는 생존하기 어려운 녀석이지만 노력끝에 이곳에서 번식에 성공했다고 한다.

 

물론 삿포로의 여름은 예전에 비해 월등히 더워지고 있어서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미지수.

정확한 정보는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식물로 알고 있어서, 이쪽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홋카이도 관광겸 이곳으로 오면 좋을 듯.

 

 

 

사진 몇장 찍고 있는데 다시 눈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잠시도 방심할 틈이 없다.

물론 건물 내부는 고기굽는 열기로 후끈후끈할 테니 크게 문제는 되지 않지만.

 

건물 풍경과 함께 산책을 즐긴다던가, 삿포로 맥주 역사에 관심이 있다던가 하지 않는 이상 사실 이곳의 가격대 성능비는 그다지 좋지 않다.

1인당 3000엔 정도의 요금을 내면 양고기 징기스칸과 맥주가 무제한으로 나오지만

삿포로 시내에서 그 정도의 금액이라면 무제한이 아니더라도 배 터질만큼 징기스칸을 즐길 수 있으며

양고기 품질도 이곳보다 훨씬 좋은 맛집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기 때문에. 맥주야 삿포로 어디든 레벨이 높은 편이고.

 

하지만 관광객으로서 이 곳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건 삿포로에 한 가지 아쉬움을 남기는 행위이기도 하고

거대한 양조 기계를 볼 수 있는 2층 뻥 뚫린 벽돌집의 디자인을 즐기며 뛰어난 서비스를 맛볼 수 있는 이곳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

 

맛 뿐만 아니라 여행 기분을 즐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역시 이 곳을 추천할 수밖에 없다.

 

 

 

눈축제가 끝났다고 해서 눈이 그치지는 않기 때문에 여전히 이곳의 겨울은 현재진행형이다.

매일 이렇게 쏟아붓는 눈 청소하고 길 만드는 것도 여간 힘들지 않을텐데.

 

삿포로 시민들에게는 정신적 상징이나 마찬가지 건물인데다, 이 정도 넓은 공간에서 회식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별로 없기 때문에

식당 안은 항상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시끄럽기 그지없다. 일본은 일반 음식점은 조용하지만 술집은 묘하게 시끄러운데

이곳은 일본답지 않은 호탕함을 즐길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런 곳에 몇 번이고 혼자서 고기 구우러 오는 본인도 어지간이 제정신은 아니지만.

다행히도 이곳만큼은 혼자 와도 그다지 눈치 볼 일이 없다. 거의 모든 음식점을 혼자 즐기는데 매우 익숙한 본인이라도

고기집만큼은 어지간해서 혼자 찾지 않는데, 여기는 그런 눈치 볼 필요가 없어서 즐겁게 즐길 수 있다.

사실 혼자 가서 보통 일본인 가족 2~3인 정도가 먹는 양을 먹어치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곳은 수용인원이 많기도 하고, 제대로 요리를 즐기기 위한 사람들을 위한 레스토랑도 있어서

원하는 건물과 음식 내용에 따라 티켓을 구매해야 한다. 매표소 사람들은 영어도 곧잘 알아들으니 문제는 없다.

본인처럼 몇 번이고 이곳을 찾은 사람이라면 이제 슬슬 다른 건물에서 식사를 즐겨도 될 법하지만

그래도 항상 징기스칸 무제한이 반기는 가장 앞쪽 벽돌집을 찾게 된다. 왠지 이제는 하나의 정해진 코스처럼 느끼고 있으니.

 

낮에 이곳을 찾으면 맥주 박물관도 견학해 볼 수 있다. 삿포로 맥주의 역사와 맥주 제조공정 등을 구경해 볼 수 있어서 나름 재미있다.

한 잔에 100엔짜리 삿포로 클래식 생맥주를 견학 후 조그마한 바에서 시음해 볼 수 있는데

그 맛은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본인에게도 꽤나 충격을 줄 정도로 깔끔하다. 이래서 국산 맥주가 욕을 먹는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눈이 심상치 않을 정도로 많이 쏟아지고 있어서 지채하지 않고 들어가기로 한다.

본인만의 징크스라도 해도 되겠지만, 이곳에 올 때는 버스를 타도 돌아갈 때는 항상 걸어서 숙소까지 가는 일이 일상화 되어 있다.

배가 터질 정도로 먹어댔으니 가볍게 밤거리를 산책하며 삿포로의 야경을 구경하고 걸어가면 적당히 속도 진정이 되기 때문에.

 

거리상으로는 느긋하게 걸어도 30분 걸리지 않아 삿포로 역에 도착할 정도니 무리가 없지만

만약 식사 후에도 이 정도로 눈이 내리고 있다면 조금 고심해 봐야 할 듯 하다.

 

 

 

식당 안은 여전히 왁자지껄하다. 맥주와 고기를 즐기며 소리를 지르면 소화도 잘 될것 같다.

기름이 많이 튀기기 때문에 옷가지와 가방 등을 넣을 수 있는 비닐백을 좌석마다 준비중이다.

 

징기스칸은 양고기를 야채와 함께 구워먹는 홋카이도의 소울 푸드인데, 정작 양고기가 부족해서 현 삿포로 시내 징기스칸의 99%는 호주산 or 유럽산 양고기다.

일본산 양고기는 매우 고가로 특급 요리점에서나 구경할 수 있다고. 맛은 호주산이라 해도 괜찮으니까 별 문제 없지만 뭔가 아이러니한 상황이긴 하다.

 

고기는 로스구이용과 생고기가 준비되는데, 직원들이 상시 테이블을 둘러보다가 고기가 떨어졌다 싶으면 알아서 추가 주문여부를 물어본다.

홋카이도의 지형을 그대로 본뜬 불판은 올 때마다 인상적. 불판 중앙에 떡하니 놓인 별모양이 이들의 프라이드를 대변해 주는 듯 하다.

먼저 지방을 불판 여기저기에 골고루 발라 윤기를 내는 일부터 시작한다. 양고기가 지방이 좀 있는 편이라도 쉽게 들러붙기 때문에 꼼꼼히 바르는 편이 좋다.

 

 

 

식당 한켠에는 맥주 제조에 쓰이는 거대 양조기가 구릿빛 광채와 함께 전시중이다.

이렇게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고기 레벨이 약간 떨어지더라도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많다.

아니 관광객이라기 보다는 주말 나들이나 회사 회식등으로 이곳을 찾는 현지인들이 더 많다.

본인 역시 삿포로에 살고 있다면 한 달에 한 번은 꼭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아무래도 혼자 이곳을 찾는 일이 흔하지는 않다 보니 약간 차질이 생긴다.

원래 징기스칸은 바닥에 야채를 가득 깔고나서 그 위에 고기를 얹어 익히는 것이 정석.

고기의 육즙이 밑의 야채에 스며들고, 고기가 타서 들러붙지 않기 때문에 깔끔하게 먹을 수 있다.

 

하지만 혼자 온 본인으로서는 한꺼번에 고기를 많이 구워먹을 수가 없기 때문에 야채 위를 고기로 덮을수가 없다.

야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꼼꼼하게 고기를 덮어야 제대로 된 방법이라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덮으면 혼자서 처리가 힘들다.

 

그래서 그냥 첫 번째 접시는 대강대강 주위에 야채르 놓고 생고기를 중앙에 얹는다. 이렇게 하면 그나마 육즙이 옆으로 내려가니 흉내는 낼 수 있다.

 

 

 

맥주는 가볍게 한 잔 마신다. 술을 많이 마시지 않으니 애주가들처럼 마구 퍼마실수는 없지만

이곳에 오면 기본적으로 500cc 두 잔은 마실 정도로 마음의 각오를 하고 있다. 신선한 삿포로 생맥주는 그만한 가치가 있기도 하고.

 

찍고나면 바로 테이블 밑 의자로 숨겨버리며 카메라에 기름이 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생각보다 기름이 많이 튀기기 때문에 방심했다간 렌즈 앞이 기름범벅이 될지도 모른다.

 

 

 

육즙을 머금은 숙주나물과 양배추는 고기에 뒤지지 않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

최소한 두 명이었다면 업무 분담이 가능해서 좀 더 편안한 흡입이 가능하지만

고기를 혼자 구우면 사진 찍고 고기 굽고 맥주 마시고 타기 전에 접시에 담아 먹는 모든 행위를 혼자 진행해야 한다.

 

홀로 여행의 장점이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이런 점에서만큼은 아쉬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애초에 고기 굽기를 혼자 하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기도 하지만. 삿포로에서 이곳을 찾지 않기는 또 아쉽고 해서 조금 난감하다.

 

양고기 특유의 냄새를 많이 잡았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소나 돼지고기와는 그 향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처음 먹었을 때 거부감이 심하다면 다시 찾지는 않을 터이지만, 본인은 고기라면 어지간하면 다 환영이라 폭풍 흡입중이다.

 

 

 

두 번째 잔은 흑맥주로 부탁한다. 이곳은 일반 생맥주와 흑맥주, 그 둘을 섞은 갈색 맥주를 무제한 마실 수 있는데

본인은 종류별로 마셔보기엔 술이 약한 편이라 그냥 두 잔 정도로 만족해야 할 듯하다.

 

한국에서 흑맥주 처음 마셨을 때는 영 쓰기만 하고 매력을 느끼지 못했지만

술을 목숨처럼 좋아하는 친구가 구인네스를 한 캔 가지고 왔을 때 흑맥주의 매력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고

이곳 비어가든에서 마셨던 흑맥주에서 비로소 흑맥주만의 무게감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2008년 처음으로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자전거 여행으로 녹초가 된 직후였고

밥이라 해 봤자 하루 12시간 40여일간 달리면서 편의점 주먹밥 정도밖에 먹은 게 없었으니

거의 눈이 뒤집힌 채로 고기와 야채를 7접시 정도 먹었던 기억이 있지만

 

지금은 편안한 기차여행이고 점심때 뜨끈한 수프 카레까지 먹었으니 헝그리 정신이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네 접시 정도 먹으니 배가 한계임을 분명히 하는 신호를 내보낸다. 역시 먹는것도 젊을 때 많이 들어가는 것인지.

 

로스를 좀 많이 주문해서 원래 정석대로의 모습을 구현해보려 한다.

원래는 좀 더 수북히 쌓아서 야채가 보이기는 커녕 공기 빠져나갈 구석도 없게 만드는 것인데

아무래도 그랬다가는 타기전에 먹느라 너무 허둥댈 위험이 있어서 이 정도로 타협을 보기로 한다.

 

 

 

맥주 세 잔까지는 아무래도 무리라 마지막 입가심을 위해 무알콜 진저 에일을 부탁한다.

진저 에일이 아동용 음료수는 아닐텐데 비어가든의 마스코트인 삿짱의 얼굴이 예쁘장하게 찍힌 컵에 담겨온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음료수지만 일본서는 탄산음료 중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달달하긴 하지만 생강의 상쾌한 씁쓸함이 조금 남아있어서 무작정 달기만 한 콜라 등을 싫어하는 본인 마음에 드는 녀석.

 

야채까지 합하면 총 5접시를 맥주 1000cc, 음료수 500cc 와 함께 혼자서 먹고 마시니 배가 거의 폭발직전이다.

아주 많이 오버하는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그냥 용인해 주긴 하지만, 일단 시간제한도 2시간이기 때문에 아슬아슬하다.

일행이 한 사람만 더 있었다면 2시간을 다 채우지 못할 정도로 느긋하게 즐겨도 충분하겠지만

혼자 고기 굽고 맥주 마시고 사진 찍고 하다보면 2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정신없다.

 

삿포로 사람들은 일본에서 고기 잘 먹기로라면 오키나와와 쌍벽을 이루는 매니아들이라

이곳의 징기스칸은 그야말로 식사가 아니라 전쟁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도쿄같은 얌전한 본토사람이 이쪽 토박이들과 고기 먹으러 갔다가 제대로 입에 넣지도 못하고 패배하는 경우도 많은 듯.

그런 전투적인 흡입을 본인 혼자서 하고 있으니 왠지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지막 접시째는 진짜 이러다가 토하는거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절박하다.

뭐든 과하면 좋은게 아닌데, 이곳 비어가든에서는 왠지 배 터질만큼 채워넣지 않으면 굉장히 아쉬워진다.

이건 전후 시대 사람들이 먹었던 꿀꿀이죽의 맛을 잊지 못하고 풍족해 진 후에도 부대찌개를 찾는 그런 심정일려나.

 

생애 첫 징기스칸을 골골 골아가던 자전거 여행 중에 즐기다 보니 이곳에서는 미친듯이 먹어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뇌리에 박혀있는 듯.

 

어쨌든 더 이상 먹었다간 정말 못볼 꼴을 보이게 될 것 같아서 남은 것들 대강 입에 쑤셔넣고 남아있는 진저 에일을 윤활유삼아 위 속에 밀어넣는다.

숙소에 도착하면 폭풍 배설이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지만 이 정도면 삿포로의 마지막 밤에 어울리는 진수성찬이었다고 자찬해 본다.

 

 

 

한겨울의 폭설 속에서도 열기를 잃지 않는 비어가든 내부를 기념으로 남기고 자리를 정리한다.

이제와서는 맛을 즐긴다기보다는 삿포로를 찾을 때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반사적인 일상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온 몸에 진득하게 베어버린 징기스칸의 미묘한 냄새는 사진을 정리할 때마다 입맛을 돌게 만든다.

 

맥주와 징기스칸이면 삿포로의 하룻밤은 언제든 즐겁게 보낼 수 있다.

 

조식을 든든히 챙겨먹고 삿포로행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걸어간다.

삿포로까지는 4시간 정도 걸리지만 갈아타지 않아도 되니 걱정할 일은 없다.

 

단지 눈이 그쳤다고는 하지만 어제보다 훨씬 매서운 바람이 강렬하게 몰아치고 있어서, 홋카이도 여행 중 처음으로 뼛속까지 추위를 느낄 수 있다

하늘의 눈이 아니라 땅에서 일어나는 눈은 훨씬 매서운 법.

산더미처럼 쌓인 눈이 칼바람 때문에 온 사방으로 흩뿌려지고 있어서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는 것 처럼 느껴진다.

 

 

 

한번 땅으로 내려왔다 다시 흐트러지는 눈은 어찌나 매서운지.

기온은 영하 10도 정도지만 바람 탓에 체감온도가 영하 20도를 넘나들고 있다.

포근하게 보였던 눈이 칼바람에 굳어버린 것인지 지금 피부를 때리는 눈송이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매섭다.

 

 

 

레일 너머가 신기루처럼 흐려지는 풍경은 조금 뒤에 이쪽으로 몰아칠 눈보라를 더욱 두렵게 만든다.

이게 극지방에서 강화된다면 소위 말하는 블리자드가 되리라 생각.

 

도저히 이래서는 못버티겠다 싶어 역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안내방송이 나온다.

다른 지역의 폭설 때문에 기차가 25분 정도 연착된다고 한다. 이번 여행에서 첫 연착.

평소라면 그냥 기다리면 되지만 개방된 공간에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는 상황이라 조금 귀찮아 진다.

 

역사 안으로 들어갔더니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 올라오는 앞에서 오밀조밀 모여있다. 다들 밖에서 기다릴 수가 없으니까.

밀도가 너무 높아서 그냥 1층으로 내려가 개찰구를 나와버린다.

어차피 홋카이도 레일 패스는 따로 티켓을 기계에 집어넣거나 하지 않고 역무원에게 제시만 하면 되기 때문에 몇 번이고 들락날락할 수 있으니까.

 

역내 매점에서 따뜻한 옥수수 스프 한 캔을 사들고 손을 녹이며 주변을 서성인다.

25분이란 시간이 참 애매해서 다른 곳을 돌아볼 여유도 없고, 그렇다고 가만히 서 있으니 꽤나 지겹다.

 

역에서는 거의 2~3분에 한 번씩 연착 소식을 방송하고 있다. 전광판에도 당연히 연착 정보를 표시해 놓았다.

10분쯤 뒤에 도착하는 열차는 내가 예약한 차가 아니라 그 전 시간에 도착하는 열차이기 때문에

자칫하다가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4시간을 서서 가야 할 수도 있으니 이런 점은 주의를 요한다.

워낙 쉴세없이 연착 소식을 방송중이라 어지간하면 헷갈리지 않을거라 생각하지만 외국인이라면 좀 난감한 상황일지도.

 

다행히도 25분 뒤에 온 열차는 따뜻해서 기다린 보람은 있었다. 미리 예약해 놓은 터라 창가 자리에 앉아 경치를 감상한다.

 

 

 

지루해지기 쉬운 기차 여행이지만 홋카이도만큼은 그럴 틈이 없다.

원채 조용한 객실 안이지만 참다 참다 결국 카메라를 꺼내든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쉬운 장면이 수도 없이 펼쳐진다.

 

조심해서 셔터를 누르고 이제 괜찮겠지 싶으면 금새 더욱 황홀한 광경이 눈앞을 지나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아예 긴장을 하고 있지 않으면 이런 이동중 사진은 항상 보던 것보다 조금 아쉬운 장면만을 간신히 담을 수 있다.

그렇다고 4시간 넘게 계속 창밖을 뚫어져라 주시할 수도 없고 해서 그냥 마음을 비우고 중간중간 무덤덤하게 셔터를 누르기로 한다.

 

 

 

홋카이도의 날씨는 수직적이기도 한 동시에 수평적이기도 하다.

한 곳에 머무를 때도 쨍한 하늘에서 폭설로 휙휙 바뀌기도 하고

기차로 빠르게 이동중일 때 역시 푸르던 하늘 아래를 넘어가면 갑자기 시야를 막아버리는 눈보라가 떡하니 나타나기도 한다.

 

울창했던 푸른 생명력들의 역동성이 전부 바람과 눈으로 스며들어 간 건지, 살아있는 건 나무와 풀숲이 아니라 하늘이라는 생각이 든다.

눈보라 속을 부담없이 찍을 수 있게 해 주는 열차의 든든함이 고맙기도 하지만 역시 속도가 속도이다 보니 감도를 좀 높여야 한다.

아예 감도를 낮추고 자연스러운 패닝샷 기분을 내는 것도 괜찮지만 창가에 보이는 풍경이 눈에 들어올 때의 감정을 좀 더 고스란히 담고 싶다는 기분.

 

 

 

대도시는 그렇다 치고 중간중간 위치하는 작은 마을은 어떻게 겨울을 넘기는지 궁금하다.

홋카이도 자동차들은 기본적으로 출고시부터 스노우 타이어를 포함하고 있다고 하고

얼음보다는 눈이 많은 곳이라 생각했던 것보다 잘만 달린다. 본인처럼 눈이 적은 지방에서 살아온 사람은 조마조마한 기분.

 

여름의 초목이 지겨워 질 때쯤이면 이렇게 세상을 뒤덮어버리는 눈밭이 만들어지기를 반복하니 역시 기후변화가 다양한 지역은 심심하지 않아서 좋다.

 

 

 

푸르던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진행 방향의 심상치 않은 하늘 쪽은 열차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기다리고 있다.

지면의 모양이나 색깔마저도 단조롭게 변해버리는 겨울이지만 하늘만큼은 변화무쌍해서 부족한 역동성을 채워준다.

 

눈을 잠깐 감고 졸다가 깨어나 보면 대체 여기가 무슨 세상인지 모를 정도로 변해버리는 점이 매우 인상적.

눈길 자동차 운전에 어느 정도 숙련이 된다면 그냥 드라이브만 해도 인상적인 장면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을 듯 하다.

 

 

 

여기서부터는 그저 창밖을 바라보다 무의식적으로 셔터를 누르기만을 반복하던 무아지경의 시간이라

글로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던 음악과 함께 하니 예술 전시회를 감상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순간들이 필름처럼 지나가고 난 뒤 갑자기 평온해 보이는 거대한 설원과 그 위를 거니는 젖소들이 나타난다.

땅이 넓으니 목장도 여유가 느껴지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방목장인지 모르겠다.

 

여름에 이런 곳을 지나갈 때는 확실히 울타리가 보였지만 지금은 거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다.

울타리 너머에서 자전거 세워놓고 사진을 찍고 있으면 소들이 호기심 초롱초롱한 눈으로 앞까지 다가오기도 했다.

 

거친 눈보라를 뚫고 나자 온화한 풍경이 펼쳐지는 순간은 마치 소설 '설국'의 첫 장면을 연상케 한다.

정말로 도착시간도 얼마 남지 않아서, 여행의 끝을 조용히 축하해 주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오랜만에 삿포로로 돌아오니 여전히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분주한 도시 풍경은 이제껏 즐겼던 차분함과 거리가 있지만 조금씩 현실 세계로 돌아오고 있다는 반가움도 없지 않다.

 

삿포로를 떠나기 전 마지막 밤을 뜨겁게 달궜던 눈축제장의 스키 점프대는 빠르게도 해체 수순을 밟고 있다.

축제란 건 준비하는 기간이나 열리는 도중이나 열기가 넘치지만 이렇게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숙연해지는 강도도 그만큼 크다.

부자가 아니라 매년 겨울 이곳을 찾아오는 사치를 누릴수는 없으니 이제 내려놓을 감정은 내려놓고 돌아가라는 느낌이 든다.

 

 

 

숙소에 짐을 맡겨놓고 삿포로에서 해야 할 몇 안남은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저녁에 맥주 공원에서 징기스칸을 즐기는 것은 제외하고라도 겨울 삿포로의 별미인 수프 카레를 먹지 않고 떠나기는 아쉽다.

 

오비히로뿐 아니라 오늘은 홋카이도 전역의 날씨가 그리 좋지 않았는지 쓰러진 자전거가 한층 더 무섭게 느껴진다.

대체 쓰러진 자전거가 저만큼 파묻힐 정도라면 눈이 얼마나 왔다는 것인지. 마치 물 속에 잠긴 듯한 그 모습은 여전히 이곳의 기후에 대해 감탄하게 만든다.

 

 

 

축제가 성대하게 열린 만큼 해체 작업도 보통 일이 아니다. 아마 준비 기간과 마무리 기간을 합치면 축제 기간의 몇 배는 되지 않을까.

원래 축제란 그런 것이지만 이런 아련한 모습 또한 다음 축제를 위한 안식의 시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삿포로는 여전히 흐렸다가 맑았다가 눈이 쏟아지는 정신없는 날씨를 자랑하고 있다.

내일 귀국이니 이제는 억눌러 놓았던 구매 욕구를 풀어재끼는 일만 남았다.

서점을 돌아보며 읽을 만한 책을 10만원 어치 정도 쓸어담는다. 가능하면 한국에 발매될 일이 적을 듯해 보이는 책을 중점적으로 공략한다.

 

나름 긴 여행이다 보니 자금을 좀 넉넉하게 가지고 왔는데, 그렇다고 해서 남은 자금을 전부 써버리기엔 아까워서 꼼꼼하게 검토를 하며 구매한다.

이 정도면 내일 공항에서 선물 몇 개 사들고 가도 2만엔 이상 남아있을 테니, 다음 여행의 자금 보충으로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듯 하다.

 

 

 

오비히로에 맞먹는 추위를 뚫고 이리저리 해맨 끝에 건물 지하 구석에 아담하게 숨어있는 수프 카레점을 찾아낸다.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가게에다 카운터 석에 앉아도 부담없어 보이는 친근한 아가씨가 맞이해 줘서 긴장이 풀린다.

 

수프 카레는 홋카이도에서 탄생한 변종으로, 워낙 추운 홋카이도의 겨울을 좀 더 후끈하게 즐기기 위해 고안된 카레.

점성이 없는 찌개같은 카레로 처음 볼 때는 위화감이 들 수도 있지만 짜릿한 카레의 자극은 더욱 강렬해서 매력적인 녀석이다.

한국 사람에게는 오히려 찌개 먹는 느낌으로 밥과 함께 먹으면 매우 훌륭한 궁합을 자랑한다.

얼어버린 콧속에 확 퍼지는 뜨끈뜨끈한 카레 수프의 얼큰함은 묘하게 한국 정서와 어울린다. 겨울의 홋카이도라면 꼭 먹어볼 만한 녀석.

 

지역 별미라 가격이 좀 세긴 해도 불만없이 즐길만한 음식이다. 맛은 기본적으로 보장이 되니 부담도 없고.

식사와 쇼핑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생각보다 졸리고 피곤하다. 어제까지의 강행군도 그렇고 장시간 기차 여행도 쉴 틈이 없었으니까.

90분 정도 쉴 시간이 있는데 침대에 엎드려 TV를 보니 슬금슬금 고개가 밑으로 내려간다.

날씨가 춥다 보니 들어왔다 나가는게 한층 번거롭지만 홋카이도의 마지막 밤에 징기스칸을 먹지 않는다는 건 뒷맛이 개운치 않다.

 

해가 지고 한층 추워진 공기를 마시며 눈덮힌 길을 조심조심 걸어 삿포로 역으로 향한다.

역에서 맥주공원까지 저렴하게 왕복중인 버스가 있어서 찾아가기도 편하다.

오비히로만큼이나 눈이 쏟아지고 있어서 여행 막바지의 아쉬움과 애상이 배가 되는 느낌이지만 고기와 맥주로 즐거운 마무리를 하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싶다.

 

 

겨울 홋카이도 간다고 평소 쓰지 않던 비니까지 착용해 추위를 막으려 해 봤지만

역시 천성적으로 추위 안타는 체질인 본인으로서도 영하 15도의 폭설 속에 30분 넘게 가만히 서 있으면 몸이 떨린다.

셔터 누르는 손가락은 거의 감각이 없고 두 팔도 지지대 역할을 하기에 힘들어지고 있어서 이번 경기만 찍고 경마장 건물 내부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사진 찍기를 세 경기, 카메라 없이 그냥 눈으로 감상을 한 경기 봤기 때문에 이 정도면 체험 충분하지 않았다 싶다.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닌데 경기 시작될 때쯤이면 밖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물갈이 되고 있다.

추위에 오래 버티기는 힘드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왠지 순번을 정해서 우르르 몰려나오고 들어가는 모습이 연상되어 재미있다.

 

 

 

강렬한 힘으로 열기를 뿜어내는 난로 앞에서 몸을 녹이고 카메라 장비들을 대충 닦는다.

마권 기입할 수 있는 장소도 넓고 사람도 없어서 느긋하게 장비 올려두고 휴식을 취한다.

이제 슬슬 돌아가 볼까 싶었는데, 다시 시작된 경마와 함께 사람들 고함소리가 들려오니 다시 한번 아쉬움이 생긴다.

 

실패한 사진이 워낙 많아서 막상 여행 끝나고 아쉬워 질 수도 있기 때문에 조금 더 안전선을 확보하는게 나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 마음은 역시 배부르면 떡도 먹고 싶어진다는게 맞나 보다. 몸이 풀리자 저기 바깥 풍경도 다시 버텨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아이패드로 보이는 태블릿에는 반에이 마이스터 퀴즈라는 자채 개발 앱이 실행중이다.

대강 찍어봤더니 일단 7개 정도는 맞아들어간다. 거의가 그림으로 설명되어 있어서 아이들에게도 재미있을만한 디자인.

일반적인 경마장이라면 역시 도박쪽에 아이들의 흥미를 끌어들인다는 것이 마음에 걸릴듯 하지만

이곳은 경마 자체보다 마을의 명물이라는 느낌이 강해서 큰 문제는 없을 듯 하다. 실제로 경마중독자 비율이 가장 낮은 곳이라고 하기도 하고.

 

 

 

몸을 녹이고 나서 다시 장비를 챙겨들고 기합을 넣은 후 밖으로 나간다.

홋카이도 날씨가 변화무쌍하다 보니 보통 하루에 서너 번은 맑았다 눈오다 하는 게 보통인데

오늘은 정말 새벽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그치지 않고 끝없이 쏟아진다. 나를 위한 축복인가 싶을 정도로.

 

폭설에 사진 찍기는 힘겹지만 눈보라를 헤치며 질주하는 전차군단의 박력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더 바랄게 없다.

욕심을 내서 멋들어진 사진을 찍고 싶기는 하지만 역시 여행의 주가 사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지론이라서.

 

 

 

언덕 뒤쪽에서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이 경기도 나름 동물학대 논란이 생기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경기당 가해지는 피로도가 너무 과하다는 말이 꾸준히 나오고 있어서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참 직면하기 힘든 장면이 많으니까.

200m 정도의 거리를 달리는데 말이 피곤해서 더 걸어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서서 헐떡인다는 사실은 충격이긴 하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어마어마한 덩치를 유지하기 위해 귀족같은 생활을 즐기는 반에이 경주마들과 달리

수십 대에 걸친 유전적 교합으로 인해 사람의 아킬레스건보다 더 섬세한 근육섬유를 가진 일반 서로우브레드 종은

자칫 한 번의 상처가 평생 경기를 뛸 수 없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고

주요 대회 우승 실적등이 없는 평범한 경주마의 경우 더 이상 출전비와 상금을 벌어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식용으로 팔려가는 일 밖에 남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로든 현대 사회에서 사람과 동물이 뒤섞이게 되면 기본적으로 학대의 소지가 항상 남아있으니

결코 해결하긴 힘든 관점의 차이겠지만,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말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최대한 정성을 다해주는 것 밖에 없을 듯 하다.

 

 

 

2층 지붕에 달려있는 컨테이너같은 방은 원래 VIP 룸이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인기가 시들해진 요즘엔 별로 사용하지 않는 듯.

이렇게 바깥으로 나와서 볼 수 있기 때문에 굳이 VIP 룸에 들어갈 필요도 없다.

 

생애 첫 경마 관전이 여러모로 특징 넘치는 변수들과 조합된 덕에 그 임팩트는 굉장하다.

홋카이도에서 눈을 가장 많이 맞은 곳이 시레토코도 아니고 이곳 오비히로의 경마장이라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다.

 

 

 

경기가 끝나면 추위로 피로해진 몸을 뒤척이며 이제 슬슬 돌아가 볼까 싶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또 패독에 말들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며, 기왕 온 김에 한 경기만 더 보고 가자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반복하고 반복하다 보니 거진 8경기째 계속 경주를 구경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매 경기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경주의 카타르시스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 우직한 경기지만

패션쇼를 보는 기분이라고 할까, 근육마초 경주마들이 돌진하는 모습은 표현하기 어려운 매력이 있다.

아무래도 마권을 사지 않아서인지 승패에 전혀 관심이 없는 점에서 경주로서의 흥미를 끌기 힘든 듯.

 

그림을 평가할 때는 구매자의 마음으로 감상하라는 말이 있는 만큼

이런 경마에서는 마권 좀 사놓고 감상하는게 더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다.

원래 경마에 관심이 있었다면 모르지만, 어미애비 가계도도 모르는 말들을 보고 마권을 당최 살 수가 없으니 어쩔 수는 없다.

 

 

 

밭을 일구던 농경마들을 위한 경마다 보니 바닥은 일반 트랙보다 좀 더 더트가 깊게 쌓여 있다.

 

경주마들은 혈통에 따라 유전적 특성이 매우 균일할 정도로 교배를 거듭해 왔기 때문에 트랙이 잔디밭이냐 모래밭이냐에 따라서도 큰 차이를 보이곤 한다.

반에이 경주마는 농경마에서부터 군마까지 혈통이 섞여있는 덩치들이고, 끄는 썰매도 1톤급이니 모래가 훨씬 깊을 수밖에 없다.

경주마들의 발목 보호 목적도 있지만 썰매가 우악스럽게 끌리는 모습을 보니 정말로 밭 가는 느낌마저 든다.

 

 

 

언덕을 넘어가는 순간은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 절로 측은지심이 피어나는 기분이다.

정상 부근에서는 거의 악을 쓰며 끈다는 느낌으로, 두 개의 언덕 중 한 곳에서는 반드시 멈춰서서 숨을 고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말이 있다면 그걸로 경기를 할 필요가 없어질 듯.

 

그 와중에 풍성한 머리결에 귀여운 장신구를 달아놓은 말이 눈에 들어온다.

말은 암수의 체격 차이가 큰 편이라 참가마의 대부분은 수컷일 텐데 이런 센스를 발휘해 놓았다.

하긴 뭐 최홍만도 일본 버라이어티 쇼에 나오면 전부 귀엽다고 소리를 치니까.

 

 

기수들 못지 않게 경주마들도 승부에 집착한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

썰매 끝부분이 결승점을 통과해야 승부가 갈리기 때문에, 막상 자기 몸만 라인을 통과한 후 퍼져버리는 말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기수는 물론이고 마권을 손에 쥔 사람들의 수명도 쭉쭉 깎여나갈 듯 하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존재해 왔던 경마라는 오락은, 아날로그 시절의 박진감을 간직한 몇 안되는 유흥이 아닐까 싶다.

건전하게만 이루어진다면 훌륭한 시장경제 창출원으로 손색이 없지만 사람의 감정이란 그렇게 쉽게 조절이 되는 것이 아니니.

 

그나마 마권은 배당률도 낮고 대박 터트려봐야 몇십만원 수준이라 자연히 주최측의 수익이 큰 편이다.

이것 역시 제대로만 돌아가면 지역경제 활성화에 적지 않은 보탬이 된다.

특히 이런 것 외에는 설 자리가 없는 반에이 경주마들의 혈통을 이어가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고.

 

 

 

땀을 비오듯 흐리는 경주마들과 달리 바깥에서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구경하려는 나 같은 관중들은

폭설 아래 가만히 서서 서서히 얼어붙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번만 보고 들어가야지 하는 생각이 자꾸만 뒤로 밀려난다.

특히나 외국에서 날아와 단 하루밖에 볼 기회가 없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돌아가려는 발걸음이 무거워 질 수밖에 없다.

 

언덕 너머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육중한 경주마들의 모습은 몇 번을 봐도 인상적이다.

반에이 경주마는 그 수가 적어서 일반 경마처럼 성적이 낮으면 고기로 팔려가거나 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지만

성적이 좋을수록 대접도 좋을 수밖에 없는데 이쪽 바닥이니, 그야말로 인생의 무게를 끌고 장애물을 넘어서는 박력이 흠씬 묻어난다.

 

 

 

더 서있다가는 감기라도 걸릴 것 같아서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경마장을 나선다.

경마장 내부엔 재미있는 기념품도 상당히 많다. 반에이 경주마들의 일상을 만화로 그려낸 커다란 타올이 구미를 당겼지만

지독히도 기념품 사는 걸 꺼리는 성격이라 그냥 구경만 하다가 나와버렸다.

 

어차피 여행의 기념품이란 건 대부분 이렇게 찍어온 사진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지역 한정 먹거리 외에는 거의 구매를 하지 않는다.

경마를 남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기념품을 사 간다는 게 뭔가 어색한 느낌도 들고.

기념품보다는 그냥 가서 봐야지만 재미를 느끼는 곳이다 보니 선물용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하지만 그 만화 타올은 상당히 관심이 가는 물건이라 다음에 올 때면 하나 사 갈까 싶은 생각이 든다.

홋카이도는 저렴한 가격으로 갈 수 있는 곳 중 가장 매력적인 장소라 이번이 마지막일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으니까.

 

돌아가는 버스는 10분만 기다리면 되는데, 정류장에 도착하니 난감한 상황이 펼쳐져 있다.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도로가로 나가려면 저 허리까지 올리오는 눈더미를 헤치고 나아가야 한다.

별 일도 다 겪는다는 느낌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홋카이도라는 지역색을 더욱 음미할 수 있는 법.

 

 

 

버스가 시속 20km 정도로 10분만 달리면 숙소에 도착하기 때문에 이런 날씨만 아니었다면 그냥 걸어서 왕복했을 텐데.

새하얀 울타리도 멀리서 보면 반에이 경마 장면이 보이도록 채색을 해 놓았다. 아무튼 이런 꼼꼼함이 관광객에게는 좋은 인상을 남긴다.

 

평소에 관심도 없던 경마를 보러 여행 중 이틀을 소비한다는 게 처음엔 조금 불안불안 했지만

버스 정류장에 서서 찍은 사진들을 되돌려보며 조금 전의 광경을 곱씹어 보니 역시 후회없는 선택이었다고 확신한다.

다른 계절 다른 지역에서 열리는 반에이 경마에까지 가 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아도

겨울의 반에이 경마는 역시 한 번쯤 추천해 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동물을 싫어하지만 않는다면.

 

 

 

눈 속에 서 있어서인지 체력이 상당히 고갈되어 호텔 들어가기 전에 토카치 명물 돼지고기 덮밥집을 방문한다.

 

오비히로 하면 돼지고기 덮밥, 다양한 과자, 지역민 한정으로 인디언 카레 정도가 유명한 먹거리인데

과자의 경우엔 한국에 선물로 사들고 가는 것을 제외하면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패스하기로 한다.

여행 중 선물 꾸러미 들고 다니며 이동하는 것은 엄청 번거롭기도 하고

신 치토세 공항은 그야말로 홋카이도의 모든 선물집들이 포진해 있어서 거기서 못 살 물건은 없으니 굳이 오늘 구입할 필요가 없다.

 

아무 생각없이 들어간 가게였는데 막상 자리에 앉아서 메뉴판을 보니 어제 먹었던 인디언 카레와 같은 경영사의 체인점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보통 일본에서 제대로 된 요리 먹으려면 체인점보다 수십 수백년을 장사한 지역의 이름있고 단촐한 가게 가는게 정석이지만

이 돼지고기 덮밥은 기본적으로 고기만 신선하면 잔기술이 크게 필요없는 간단한 음식이라 너무 고민할 필요 없다.

 

고기 먹은 역사가 수백년은 더 빠른 한국인으로서 일본의 돼지고기 덮밥에 만족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있는 재료 맛있게 만들기로 유명한 일본이니 기대를 걸어보고 한 그릇 시켜 본다.

 

외관으로는 한국에서야 이걸 식사라고 내 놓나 싶을 정도로 단촐하지만 역시 지역 명물이라 불릴 만한 퀄리티가 숨어 있다.

지방이 그리 많지 않으면서도 육질이 매우 부드러워 이빨로 끊는다는 개념이 필요없이 그냥 한 입 씹으면 그대로 싹 잘리는 느낌이다.

숯불에 구워낸 향미와 함께 굵은 후추의 알싸함이 맛을 업그레이드 시켜 준다. 구운 양념 돼지고기 중에서는 단연 상급 레벨.

쌀은 일본쪽이 훨씬 맛있기 때문에 따뜻한 쌀밥 위에 올려놓고 함께 씹는 맛은 겉보기와 달리 훌륭한 식사가 된다.

 

반찬이 좀 있어야 식사 느낌이 나는 한국인 입장에서는 싸지 않은 가격에 실망할 가능성도 없잖아 있다.

토카치산 식재료만 사용하기 때문에 신선도에서는 탑을 달리지만 역시 이거 한그릇에 9천원 가까이 한다는 것은 살짝 부담이 된다.

요시노야의 규동이 4500원 정도 하긴 하는데, 아무래도 재료의 차원이 다르다 보니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추위에 떨며 숙소로 돌아와 욕탕에 물 한가득 받아놓고 몸을 맡긴다.

추운 날 욕탕에 들어가면 항상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목욕씬이 생각이 난다. 이건 조건반사처럼 고정되어 버렸다.

 

싸늘하던 객실 안도 목욕 전 틀어놓은 히터 덕분에 그럭저럭 따뜻해 졌고, 시간은 5시 정도로 이른 편이지만

이제 실질적인 여행은 끝났구나 하는 기분좋은 씁쓸함이 감정을 지배하고 있어서 더 이상 나가 돌아다닐 마음이 들지 않는다.

내일 삿포로로 돌아가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모레 일찍 비행기에 몸을 실으면 나름 살짝 길었던 여행도 끝이 난다.

 

삿포로 마지막날은 반드시 맥주공원에서 무한 징기스칸을 먹는다는 철칙이 있으니 아직 여행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지만.

혼자 가서 먹는 무한 징기스칸은 나름 스릴이 있어서 끝까지 방심할 수 없다. 오늘은 그래서 평소보다는 배를 좀 비워놓은 편이다.

토카치무라에서 사 온 간식거리는 막상 오비히로의 풍요로운 대자연과는 전혀 상관없는 오징어다리와 젤리빈.

신선한 먹거리는 대부분 요리가 필요한 것들이고, 안 그런 완성품들은 선물용으로나 적합한 고가 포장 제품들이라서.

 

젤리빈은 그 묘한 생김새 때문에 구입해 봤지만 역시 단 것을 별로 안 좋아하는 나에게는 그닥 당이기 않는 맛이다.

결국 저 젤리빈은 귀국 후 한 달 가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가 하루에 한두 알씩 먹은 끝에 전부 소비하기는 했다.

TV를 보며 홋카이도 레일 패스의 마지막 한 장 남은 티켓을 점검한다.

절대 가격으로 본다면 결코 싸지 않은 레일패스지만 이걸 전부 일반 요금으로 구입한 것과 비교해 8만원 정도 저렴하기도 하고

기간 내 예약 변경이 몇 번이고 가능해서 일정 조절하기도 편리하다. 이번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

 

 

 

호텔에 들어오면 책상에 오비히로 지도와 정보가 담겨있는 종이가 놓여있는데

맛집과 유명 과자점 등의 위치 찾기엔 참 좋지만 어째서인지 싱그러운(?) 스테프들이 기다리고 있는 바 선전이 당당하게 적혀있다.

이곳이 비지니스 호텔이라, 업무상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렇게 당당하게 광고하는 걸로 봐서 퇴폐 영업이라던가 그런 건 아니라 본다. 일단 우량 가게라고 떡하니 적혀있고.

 

이런 곳은 가 본적이 없어서 적혀있는 내용이 참 신기하다.

그냥 가서 술 마시면 되는거 아닌가 싶은데, 술을 마시면 사진의 누님들이 따라온다는 건가?

어떻게 본다면 오비히로가 비지니스상 별로 놀 곳이 없는 건전한(?) 곳이라

이런 전단지가 돌아다니는 것 아닌가 하는 긍정적인 생각도 할 수 있을 듯 하다.

 

저런 전단지와는 별개로  맥주가 한 잔 당기는 밤이지만

내일 벌어질 광란의 파티를 위해 최대한 절제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경기 시작 직전까지도 흙을 고르고 눈을 치우느라 정신이 없다.

오기 어려운 길을 온 김에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멋진 사진을 담고 싶은 본인 욕심은 충분히 이뤄졌지만

이런 곳에서 달리는 말과 기수들은 상당히 괴로울 듯 하다. 속도가 빠르진 않아도 눈 때문에 시야가 상당히 제한될 듯.

 

 

 

그 와중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까마귀들이 트랙 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다.

지능도 높고 호기심도 많은 녀석들인데 이런 폭설중에도 어디 박혀있지 않고 돌아다니는 것 보면 참 건강하다 싶다.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었지만 뒤끝도 대단한 편이라, 자전거 여행 도중 뭐가 그렇게 불만이었는지 10여분간 내 머리위로 소리를 지르며 활강을 하는 바람에

다람쥐등이 맹금류한테 낚아채여갈 때의 섬찟함을 대리체험할 수 있었던 기억이 난다. 까마귀는 덩치도 상당히 큰 편이라 소리만 들어도 무섭다.

한번만 더 뒷통수로 돌진하면 죽여버린다고 고강도 레이저를 꺼내서 몇번 깜빡여 주니 그 다음부터는 오지 않았다.

 

 

 

경기 시작까지 눈이 전혀 그치지 않은 지금 상황이 고맙기 그지없다.

어찌 이렇게 본인이 바라는 대로 날씨가 딱딱 맞아주는지 신기하기까지 하다.

추워보이는 복장의 관객들도 신이 나서 자리를 잡고 카메라를 꺼낸다.

 

프레스 기자로 보이는 젊은 사람은 카메라를 두 개 정도 어깨에 매고 대기중이다.

하나는 표준 줌렌즈, 하나는 내 팔뚝만한 망원 렌즈. 스포츠 사진을 찍을 때는 렌즈 갈아끼울 시간이 없으니 그런 준비는 당연하다.

 

취미로 사진을 즐기는 듯한 할아버지도 든든한 백통 망원을 들고 서성이고 있다.

이런 곳에 오면 본인이 들고 다니는 거대 DSLR 과 렌즈가 그리 주목을 끌지 않기 때문에 안도감이 든다.

 

 

 

생애 첫 경마이자 오직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반에이 경마 첫 레이스가 시작된다.

두 개의 언덕 중 결승점 앞의 두 번째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초반 언덕을 넘어가는 순간은 잘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의 촛점에 방해를 받을 만큼 눈이 많이 내리고 있어서 10 장 찍어 1장 건지면 성공한 편이다.

 

매우 조용한 상태였는데 말들이 달려나가기 시작하자 기수의 고함소리와 몇몇 아저씨들의 함성소리가 조금씩 분위기를 띄운다.

눈 속을 달리는 강인한 말들의 모습. 이걸 보기 위해 일부러 일정에 넣어가며 이곳까지 왔는데 결과는 대성공이다.

 

 

 

반에이 경마는 농경마들의 힘을 겨루는 방식이라 일반 경마와는 전혀 양상이 다르다.

기수가 말 위에 타지 않고 뒤의 썰매에 타 있는데, 썰매 무게가 600~1000kg에 육박한다.

경주마들의 무게도 1톤에 가까워 거의 소떼들의 돌진을 방불케 하는데, 그러다보니 속도는 그냥 사람이 달리는 것보다 느리다.

 

하지만 총합 2톤에 가까운 거대한 덩치들이 언덕을 올라가는 모습은 힘이라는 단어를 직설적으로 표현하는데 더 할 나위 없이 어울린다.

기수들간의 심리전도 매우 치열한데, 언덕 밑에서 멈춰서 숨을 고르는 장면은 오직 이 경마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힘이 부족해 언덕을 오르지 못하면 그 무거운 썰매를 진 채로 경사로에서 숨을 고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언덕을 오르는 말이 우승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일반 경마에서도 상대마를 견제하는 기술은 보통이 아니지만

속도보다 힘이 중시되는 이 경기에서는 언덕이라는 장애물 앞에서의 심리전이 무서울 정도로 집요하다.

 

 

 

눈을 헤치며 언덕을 오르는 말들의 모습은 현대에서 보기 어려운 군마들의 질주를 방불케 하는 장관.

바로 이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시레토코에서 이곳까지 먼 길을 둘러왔다.

부족한 것은 이런 사진의 경험이 적은 본인의 실력 뿐이지만, 어쨌든 연신 셔터를 눌러대며 눈 앞에서 펼쳐지는 힘의 향연을 감상한다.

 

저런 거대한 말이라도 1톤에 육박하는 썰매를 끌며 언덕을 오르는 것은 힘에 부치는지 입가에서 뜨거운 김이 거칠게 뿜어져 나온다.

사람 걸음걸이보다 느린 속도로 언덕을 올라가는 모습에, 몇몇 반대론자들이 동물 학대라고 비판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언덕을 넘어왔다고 시원하게 질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두 개의 언덕을 넘으면 남은 거리는 30m 남짓하지만 이미 체력이 한계에 달한 말들은 기수의 고함소리에도 네 다리를 땅에 고정시키고 거친 숨을 내쉰다.

엄살을 핀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극도의 피로가 뷰파인더 너머에서도 느껴진다. 거의 악을 쓰며 썰매를 끄는 느낌.

 

원래 농경마들의 경주다 보니 반에이 경마는 말 뿐만 아니라 썰매 끝부분이 전부 결승점을 통과해야 완주로 인정이 된다.

몇 미터 남겨놓지 않고 힘이 다해 멈춰선 자기 말 옆으로 다른 말이 천천히 지나가는 모습을 보는 기수의 심정은 어떨까.

 

길게는 2km 까지도 달리는 일반적인 경마와는 달리 한 순간에 모든 힘을 쏟아붓는 반에이 경마는 시작과 끝이 언제였는지도 어렴풋할 정도로 짧은 시간에 승부가 난다.

 

 

 

얼떨떨한 상태로 첫 번째 경마가 끝나니 내가 뭘 본건지 어리둥절하다.

한 번으로는 너무나 아쉬운 경기고, 실제로 사진을 재생해보니 태반이 엉망이라 거의 다 삭제버튼을 누른다.

다행히도 경마는 15분 단위로 몇 시간이고 이어지니 서두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오늘은 이것 외에 예정도 없고.

 

이런 폭설 속에서도 그나마 촛점을 잡아주는 카메라 덕분에 한두 장이라도 건질 수 있었다.

빠른 경주가 아니라고 해도 폭설 탓에 동체추적이 상당히 힘든 편이라 그냥 싱글샷으로 찍어대는게 더 성공률이 높은 듯 하다.

 

순위 발표 후 두 번째 주자들이 패독에 들어선다. 이번에는 가까이서 구경해 보기로 했다.

거대한 말의 위용은 정말 늠름하기 그지없지만 폰카와는 달리 거대 DSLR로 자기를 쳐다보는 사람이 신경쓰이는지 자꾸 힐끗힐끗 쳐다본다.

경기를 앞둔 말은 굉장히 예민하기 때문에 너무 셔터를 눌러대면 그것도 부담이 될까 조심스럽다. 플래쉬는 당연히 금지고.

 

실제로 기수가 안장 위에 앉는 건 경기가 아니라 이런 패딩 시간 뿐이란 것도 재미있는 요소.

 

 

 

이런 걸 신기해 할 시기는 지난 사람들은 따뜻한 실내에서 관람중이라 밖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덕분에 이곳저곳 옮겨다니며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 나로서야 눈이 고마울 따름이지만.

 

흥분감때문에 느끼지 못해도 사실 체감온도는 영하 15도로 내려가고 있어서 상당히 춥다.

두세 경기 정도를 관람한 후엔 안으로 들어가서 휴식을 취해야 그나마 동상에 걸리지 않을 듯 하다.

 

경마장이란 이런 것이구나 신기해하며 이곳저곳 기록을 남긴다.

한국에서는 경마장 갈 생각도 없고, 겨울의 반에이 경마로 첫 타석을 끊은 터라 과연 다른 경마를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눈더미 속에 서서히 파묻혀 가는 마권이 더할 나위 없는 애상감을 불러일으킨다.

예상이 적중했다면 이렇게 눈 속에 버려져 있지는 않았을 터.

경마장에서 버려진 마권에 감정이입을 하다니 이것도 눈의 매력 탓인지.

 

 

 

두 번째 레이스에서는 언덕 앞에 자리를 잡고 구도를 잡아보기로 한다.

언덕을 올라가는 힘겨운 뒷모습도 굉장히 인상적이지만, 언덕 너머에서 서서히 솟아오르는 말의 모습도 장관이다.

정상에 서서 숨을 고르며 후위 말들이 올라오는 것을 기다리는 모습도 보인다. 일반 경주마였다면 발목이 부러질지도 모르는 무게니까.

 

그야말로 악을 쓰며 올라오는 말의 모습에 경외심마저 느껴진다.

말은 달리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는 동물이고, 반에이 경주마들은 보디빌더와 같은 근육덩어리라 힘을 쓸 데가 필요하긴 한데

그들에게도 이 200m의 경주는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 통과할 수 있는 큰 도전인 듯 하다.

 

사실 말들이 바보는 아니라 경주에 나오는 녀석들은 자신이 우승했다는 사실을 매우 명확히 자각한다고.

섬세한 말의 경우엔 우승하지 못한 날 밥을 먹지 않고 우울해 하기도 한다.

 

 

 

전차처럼 줄줄이 언덕을 넘어오는 모습은 아이맥스 영화를 뷰파인더 안에서 감상하는 듯한 박력이다.

마지막 언덕을 넘고 나서 느끼는 그 환희가 경주마들을 결승점까지 달리게 만드는 원동력이라 느껴진다.

 

비로소 내리막길에서 속도를 내는 모습은 클라이막스를 넘긴 후의 알싸한 안도감과 닮지 않았을까.

 

 

 

온 몸의 근육이 폭발할 듯한 거구들이 마지막 힘을 다해 결승점으로 달린다.

이미 채력은 거의 고갈되어 달린다기보다는 걷는 수준이지만 이 지점부터가 진짜 승부가 갈린다.

막상 두 개의 언덕을 넘어왔음에도 이곳에서 퍼질러지는 말이 상당히 많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긴장 풀리면 그걸로 끝이다.

 

소 대신 농사에 쓰이던 말의 위용이란 게 어떤 것인지 눈 앞에서 체험하고 있으니 세삼 현실은 어떤 극적 장치보다도 다이나믹하다는 것을 느낀다.

 

 

 

경마의 덧없음이란 이런 것일까.

 

2분만에 마권을 산 사람들의 희비가 갈리는 동시에 내가 뭘 봤었나 싶은 생각이 머릿속을 멤돈다.

뭔가 부족한 듯 해서 눈속에 서서 한번 더 경기가 열리길 기다린다.

 

한두 번 보면 만족할런가 싶었는데 놓친 부분이 너무 많게 느껴진다. 동물을 찍는 건 더더욱 시간가는 줄 모르는 데다가.

손가락에 점점 감각이 없어져 가고 있지만 한 번만 더 보고 건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하다.

아마 잠깐 몸을 녹이고 다시 나오게 되겠지만 사진이라는 방면에서도 한참 만족하지 못했고 카메라 없이 맨눈으로 즐기는 경마도 놓쳐서는 안 된다.

 

경기 시작되기 전에 패독으로 가서 말을 감상하고, 말들이 출발점으로 향하면 다시 트랙으로 이동하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적으로 수행한다.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말이란 동물이 참 잘생기긴 잘생겼다. 흩날리는 갈기와 우람한 가슴, 우수에 찬 눈빛 등이 귀족적인 이미지를 풍긴다.

실제로는 장난도 잘 치고 섬세한 성격이지만 그런 자신의 내면을 거대한 근육으로 숨기고 돌진하는 모습이 매력적이다.

 

 

경마장 입구가 열리지 않았으니 시간을 보내기 위해 옆의 산지직송 마켓을 둘러보러 들어간다.

사람이 많지 않아서 다행. 사진 찍어도 되냐고 하니까 가볍게 승락해 준다.

 

농산물 신선하기로 유명한 홋카이도에서도 가장 품질좋기로 유명한 토카치 평야 지역이고

식량 자급자족률이 500%를 넘는 곳이니 이곳에서 타 지역 농산물을 먹는다는게 오히려 신기할 정도.

 

 

 

사고 싶게 만들어지는 포장 기술만큼은 백 년이 지나도 한국이 따라잡기 힘들 듯.

좋게 말하면 합리적이라고 할까, 한국은 포장지에 들어가는 돈이 있으면 그걸로 양이 더 많은 걸 사먹는다는 관념이 강하니까.

 

하지만 나같은 여행자들에게는 이런 디자인을 한 과자가 눈에 훨씬 잘 들어오는것도 사실이다.

선물을 사 갈만한 환경이 안되는 본인을 제외하고, 평범하게 타 지역에서 관광 온 사람들이라면

왠지 못해도 한두 개 씩은 구입해 가지 않을까 싶은 물건들이 빼곡하게 쌓여있다.

 

 

 

한랭지에서 더욱 부드럽고 고소한 감자다 보니 홋카이도 하면 떠오르는게 이 녀석이다.

품종이 좋아서가 아니라 이 지역의 기후가 감자를 맛있게 만드는 원동력이라

홋카이도산 감자를 사용했다고 해도 실제 이 지역 출하품이 아닌 이상 이 맛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

 

얼핏 봐서는 과연 이런 것까지 사 갈까 싶은 상품들까지 많이 진열되어 있는데

만들지 않아서 못 사는 것 보다는 수요를 만들어내는 도전정신과 그것을 소화해 낼 수 있는 시장 규모가 부러울 따름이다.

 

 

 

오비히로에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온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한국어로도 광고를 하고 있다.

글자를 보니 일단 한국어를 잘 하는 사람이 쓴 글귀는 아닌 듯 하지만, 이런 지역에서 한국어를 보게 되면 왠지 배려심에 마음이 따듯해진다.

 

지난 번 포스팅에서 언급했던 만화 '은수저'에서 등장하는 장면을 이용한 광고인데

그 옆에 판매중인 '오야코동과 TKG에 어울리는 간장'이 심히 구매욕구를 자극한다.

 

오야코동은 반숙 계란에 닭고기를 더해 밥 위에 올린 덥밥을 의미한다. 의미는 말 그대로 부모와 자식 덮밥.

일본에 있을 때 최고의 아침식사로 손꼽는 것이 TKG 였는데, 타마고(계란)카게(덮)고항(밥)의 약자로 많이 사용된다.

싱싱한 날계란을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흰 쌀밥 위에 얹고 간장을 뿌려 비벼먹으면 그 고소함과 짭짤함은 보물과도 같다.

일본에서는 그 TKG에 알맞게 짠 맛을 줄이고 단 맛을 첨가한 전용 간장도 대인기.

 

문제는 저 간장을 사들고 가도 한국에서 생으로 먹을만한 계란 찾기가 어렵다는 것. 저 상품을 볼 때마다 매번 아쉬운 마음 뿐이다.

특히 이곳 홋카이도에서는 그날 아침 낳은 싱싱하기 그지없는 날게란을 먹을 수 있으니, 상상하면 입에 저절로 침이 고인다.

 

 

 

최고의 신선도를 자랑하는 산지 직송 야채들이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진열된 것을 보니

아침에 이곳에 들러 경마 몇 판 땡기고 야채 몇 종류를 사들고 돌아가는 중년 가장의 모습이 어렴풋이 연상된다.

외국 관광객인 나로서는 구입할 가치가 없지만, 돈을 줘도 먹거리에 대한 불신을 지우기 어려운 한국 사정을 생각하면 부러움을 지울 수 없다.

 

경마장 한 켠에 마련된 조그마한 시장에서도 못 구하는 것이 없는 풍족함은 세상에서 가장 디지털화 된 한국과는 다른 만족감을 준다.

나이 탓인지 모르겠는데, 자기가 먹을 것을 실제 손으로 만져보지도 않고 웹에서 구매해 배달시킨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알이 꽉 찬 시샤모가 뜯기 아쉬울 정도로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다.

시샤모는 열빙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민물고기인 빙어와는 다른 청어과의 바다물고기라서 헷갈릴 때가 많다.

 

알이 꽉 찬 암컷이 인기가 있지만 가격을 낮추는 것인지 수컷 시샤모도 구분해서 판매중이다.

이걸 숯불 같은데 올려놓고 구워서 아작아작 씹어먹으면 술안주로 예술인데 이곳에서는 아쉽게도 그림의 떡.

 

 

 

산지 직산이라고는 하지만 주방이 없는 조그만 비지니스 호텔에 틀어박힌 여행자로서는 구매할 필요가 없는게 대부분이라

예전부터 신기하게 생각했던 젤리빈 과자나 한 봉지 사들고 밖으로 나온다.

어릴적부터 그 귀여운 모양과 영롱한 색깔이 신기했지만 엄니가 불량식품이라며 먹지 못하게 했고

그 이후로 관심 자체가 시들해져서 아직까지 평생을 손꼽아 한두 번밖에 먹은 기억이 없는 녀석이라 눈에 들어온 김에 사 본다.

 

아직도 경마장을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아서 시간 남을 때 미리 배를 채울 생각으로 건너편 푸드코드에 들어간다.

조금 위화감이 들긴 해도 이곳 한정상품이라는 토카치 우유라멘을 먹어보지 않고는 그 호기심을 잠재울 수 없으니까.

 

 

 

자리가 10개도 되지 않는 조그만 라멘가게에 들어가니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이해 준다.

우유라멘 하나를 주문하고 나서 버스 티켓을 구입할 때 받았던 200엔 할인권을 건네며 사용할 수 있는지 물어보자 가능하다고 하신다.

 

한정상품이라는 미명 하에서는 뭐든 비싸지기 때문에 할인권이 꽤나 도움이 된다.

전분에서부터 야채 차슈, 우유까지 100% 토카치 산이라고 자랑하고 있으니 가격만큼의 만족감은 있지만.

 

영하 8도 정도의 바깥에서 돌아다니다 들어와 먹는 라멘은 그야말로 천국이다.

살짝 긴장하면서 한 모금 떠넘긴 우유 국물은 거부감이 전혀 없는 부드러운 곰탕 맛이라 오히려 너무 무난한 편.

하긴 벌칙게임에서 먹는 것도 아니고 맛없는 라멘을 일부러 만들었을리는 없으니 내 기대가 너무 과했던 것도 사실이다.

 

한국 사람들이 일본 라멘에서 가장 부담스러워 하는 과도한 짠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담백한 맛이다.

강렬한 자극보다는 곰탕에 부드러움을 한껏 첨가한 듯한 맛이 부담없이 느껴진다. 특히 이런 겨울날에는 날씨가 곧 반찬이니까.

 

차슈가 매우 빈약했던 게 가격대비 아쉬웠지만 어쨌든 국물에 특징을 둬서 광고하는 녀석이니 체험할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라멘 명인이 만든 메뉴는 아니라 눈이 동그레 질 맛을 느끼진 못했지만 이곳에서 한 번쯤 먹어볼 녀석으로는 안성마춤.

 

 

 

먹거리는 라멘 외에도 많고, 경마장 안에도 충분하지만 일단 몸이 따뜻해 졌으니 대만족.

밖으로 나오려는데 아주머니가 경마장 할인권 필요없냐고 물어보신다.

토카치무라에서 뭐든 구입을 하면 경마장 할인권을 받을 수 있다고.

 

버스 티켓을 끊으며 이득봤다고 의기양양하던 기분이 조금 사그라드는 정보였지만 어쨌든 이러나 저러나 손해본 것은 없다.

마침내 문을 연 경마장 입구를 통과했지만 바로 건물 내로 들어가기전에 주위 풍경을 다시 한번 담아본다.

겨울이라 앙상한 나무도 이 정도 눈이 내리면 여름만큼이나 풍부하게 잎사귀를 늘어트린 모습이 되어 그것 또한 일품이다.

 

 

 

무용지물이 된 벤치도 쌓일 부분만 쌓인 눈더미가 풍미를 더해줘 셔터를 누르게 할 정도의 쓸모는 있다.

기껏 반에이 경마 보러 왔는데 눈이 부족해서 땅바닥이 어스름하게 비쳐 보인다던가 했다면 매우 아쉬웠을텐데

이렇게 봉긋봉긋 솟아있는 벤치를 보니 참 여행운이 좋은 편이구나 싶어서 미소가 떠오른다.

 

벤치 찍으며 실실 웃고있는 사람을 옆에서 보면 어떤 모습일려나.

 

 

 

경마장 반대편 광장은 원래 아이들의 놀이공원이었던 듯.

예전에 말이 끌던 마차 등이 전시되어 있다. 여름이라면 경마에 관심없는 아이들이 한껏 뛰어놀기에 충분한 공간이다.

 

마차쪽으로 걸어간 것임에 틀림없어 보이는 흔적이 눈 위에 새겨져 있는 것으로 봐서

몇몇 아이들이 저곳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음에 틀림이 없지만, 역시 날씨가 날씨다 보니 오래 버티진 못했나 보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와 보는 경마장인데, 첫 인상은 이게 경마장인가 의아한 기분이다.

경마 관련 상품들을 판매한다는 것 외에는 그닥 특징적일 게 없는 아케이드 같은 분위기.

막상 들어와보니 조금 긴장되기도 하는게, 경마를 어디서 어떻게 관람해야 하는지조차 아는 게 없다.

 

마권을 살 생각은 애초에 없었지만 주변을 둘러봐도 어디에서 말이 보이는지 모르겠다.

오래된 상식 상 심각한 표정으로 마권뭉치를 노려보며 줄담배를 피워대는 도박 중독자들이 보이지 않을까도 싶었지만

그냥 놀러온 듯한 가벼운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들밖에 보이지 않아서 약간은 맥이 풀린 기분이기도 하다.

 

 

 

나같은 초심자를 위한 서비스정신은 철저해서 기분은 좋다.

서로우브래드 같은 일반 경주마들의 편자와 반에이 경주마들의 편자를 비교해 놓은 코너가 인상적.

편자 크기만 봐도 반에이 경주마들의 덩치를 짐작할 수 있다. 겨울용 편자의 스파이크에 가까운 위압감이 특히 눈길을 끈다.

 

정말 한국 사람들도 많이 오는건지 한국어 안내서도 있고, 터치 모니터에는 반에이 경마에 대한 전반적 상식과

표를 구입하고 당첨금 수령하는 방법까지 세심한 설명이 초심자들을 반겨주고 있다.

 

어려움을 느끼지 않게 선 굵은 애니메이션을 사용해 경마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주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데

자칫하면 인생 포기할지도 모르는 것이 도박이란 품종이라 뭔가 순순한 호의로밖에 받아들이기엔 조금 거북하다.

뭐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그냥 재미삼아 즐기는 수준으로 유지할 정신을 갖고 있을테니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니 비로소 경마장처럼 보이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반에이 경마는 트랙 길이가 200m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중계용 TV는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로또처럼 된 OMR 카드에 자신이 정한 말을 찍은 후 이곳에 넣으면 자동으로 배팅이 되는 시스템인 듯.

창구 너머에도 공간이 넓은데 저 안에서는 사람들이 바쁘게 뭔가를 계산하고 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경마는 단순히 현재 어떤 말의 상태가 좋은가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몇 대까지 경주마의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 말의 습성과 특징을 파악하고 있어야만 승률을 올릴 수 있는 머릿싸움.

트랙이 잔디인가 진흙인가, 맑은 날씨인가 비가 오는가에 따라 선천적으로 잘 달리는 말이 있기도 한데다가

기수 성격과 경주마의 상성관계 등 고려할 점이 너무 많아서 거의 학문적인 수준에 다다라 있다. 그런 고로 배당율도 로또 등의 고이윤 도박에 비해 형편없는 수준.

 

반에이 경마는 다른 경마와 달리 혈통이 단순화 되어 있어서 조금 쉬울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재미로 즐기는 것 이상의 운을 바래서는 안 된다.

 

 

 

날씨가 워낙 춥다보니 사방에서 거대한 소음을 내며 난로가 가동중이다. 바로 앞에서는 얼굴이 후끈거릴 정도로 강렬한 열풍을 내뿜고 있다.

이글거리는 난로 앞에 잠시 서 있으면 몸이 따뜻해 지지만 아무래도 경마 자체보다 경주마가 달리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은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혹한 속에서 감상해야 하니 부담감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아예 밖으로 나갈 생각도 않는 사람들도 꽤 있다.

 

 

 

2층으로 올라가 보니 이 쪽은 텅 비었다. 사람이 바글바글하지 않은 것은 좋은데 너무 황량하다.

이런 폭설 속에서는 굳이 잘 안보이는 2층에서 경기를 감상할 일이 없으니 당연한 상황이겠지만, 그래도 난로는 군데군데 켜 놓았다.

 

일단 생전 처음 와 보는 경마장이니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연신 셔터를 누른다.

낡은 시설이지만 청소 정리는 매우 깨끗해게 해 놓아서 보기가 좋다. 하지만 2층 바깥으로 나가는 출입구 중 몇 곳은 사용금지 표지판이 서 있다.

아무래도 눈을 다 치우긴 어려우니 덜 미끄러운 출입구만 개방해 놓은 듯 하다.

 

 

 

밖으로 나오니 이제 좀 경마장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눈이 오는 지금은 이곳 2층 바깥쪽 관객석이 가장 위험한 곳으로, 지붕이 눈을 전부 커버해 주지 못하기 때문.

매끈한 콘크리트 바닥에 가득 쌓이지 않은 적당한 눈더미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미끄럽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촬영은 무리일 듯.

 

다른 곳에 비하면 작은 규모지만, 일단 이 정도 경마장이라도 본인 눈에는 꽤나 거대해 보인다.

성수기때는 여기에 사람들이 가득 앉아서 말들이 말리는 모습을 보며 소리를 지르거나 하는 걸까.

 

 

 

경마장에 비해 트랙이 작은 경마장이란 참 묘하게 느껴진다.

경마장과 트랙 사이에 상당한 공간이 비어있는데 원래 뭘 하는 곳일까 궁금하다.

혹시 저 안쪽까지 걸어가 사진을 찍어도 된다면 참 역동적인 모습을 담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까지는 아무도 저곳으로 나가는 사람이 없어서 확인이 어렵다.

나중에 안내소에 한번 물어볼까 싶기도 한데 그런 거 물어보면 생초보인걸 자랑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경기가 시작되려는지 트랙 옆의 조그마한 패독에 말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가슴 속에서도 시동이 걸리는 듯 조금씩 두근거리지만 서두를 것은 없다.

눈 속에서 렌즈를 바꿔 끼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니 일단 2층 멀리서 몸을 푸는 말들의 모습을 담아본다.

 

원래 패독에서 말을 보여주는 시간은 경마에서 말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이지만

이곳에서는 어쩐지 그닥 관심 가지는 사람이 없다. 마권을 살 사람이면 대강 알고 있는 것일까.

 

 

 

조금 시간이 지나니 사람들이 패독 앞으로 몰려나온다. 저기까지는 들어가도 되는가 보다.

지붕 아래서 망원렌즈로 바꾸고 위엄넘치는 말의 모습을 좀 더 자세하게 담아본다.

과연 듣던대로 육중한 덩치를 자랑하는 말들. 기수의 허리와 지면과의 높이를 생각하니 역시 상당히 무서울거라는 생각이 든다.

 

경주마들은 기본적으로 성격이 워낙 예민해 조그만 반응에도 기수를 떨어트리는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야 한다.

고대 장군들이 보병들 옆에서 말 위에 앉아있으면 그 높이차로 인해 위압감이 절로 생겨났음에 틀림없다.

 

 

 

긴장한 말들도 많은지 몇몇 기수들은 아예 내려서 말을 끌고 걷기도 한다.

정해진 코스를 돌지도 않고 가끔 가기 싫어하며 멈춰서는 말들도 있는 걸 보면 보는 사람도 불안해진다.

 

일반 경마에서는 워낙 유전적 교배가 잦고 훈련이 충분해서 그 수가 적은 편이지만

반에이 경주마는 일단 주체못할 정도로 힘이 넘치는 녀석들이라 사고 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기본적으로 파워게임이라 성격 더럽다고 해서 배팅율이 낮아질 필요가 없기도 하고.

 

 

 

또박또박 걷지 않고 가끔 훌쩍훌쩍 앞다리를 들며 이상한 걸음을 하는 녀석도 있다.

거칠고 우락부락하게 보여도 결국 농경용으로 사람 말을 잘 듣는 말이라 기본적으로 겁쟁이임엔 틀림없다.

눈이 와서 흥분한 것인지, 관객들이 가까이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어서인지 전통적인 패독에 비하면 좀 난장판 느낌이다.

 

방한장비가 그리 만족스럽지 않은 현재의 본인 수준으로 얼마동안이나 저 밖에서 견딜 수 있을지 모르지만

좀처럼 보기 힘든 최적의 조건에서 경마를 즐길 수 있는 기회가 각오를 단단히 하고 1층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1층 경마장쪽 출입구로 다가가니 안내원들이 '눈더미 떨어질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라고 연신 외치고 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주먹만한 눈더미가 지붕에서 툭툭 떨어져 내린다. 맞으면 심히 기분이 좋지 않을테니 주의해야 한다.

위험하다 싶으면 안내원들이 손을 들어 나가려는 사람을 제지하며 눈이 떨어진 후 드나들도록 하고 있다.

 

지붕 밖으로 나오니 도심에서 보기 힘든 탁 트인 광경에 끝없이 내리는 눈이 예술 작품을 연상케 한다.

첫 번째 레이스를 시작하기 위해 말들이 패독에서 출발점으로 이동중이다. 200m 정도의 트랙이지만 가까이서 한 눈에 보기엔 역시 먼 거리다.

어디쯤 자리를 잡으면 괜찮은 모습이 나올까 고민한다. 이 경주의 클라이막스는 당연히 두 개의 언덕 부근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몰려오긴 하지만 역시 경마보다 볼거리에 관심이 더 많은 사람들 뿐이라 그리 많지는 않다.

기본적으로 지금 상황이 쉽사리 밖으로 나올 만한 분위기가 아니긴 하다. 체감온도가 영하 15도를 넘나드는 폭설 속이니까.

생애 첫 경마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흥분감에 추위도 잊고 카메라를 든 손에 힘을 주며 언덕 장애물 비스듬한 곳에 자리를 잡고 선다.

 

 

자료관으로 들어가자 안내원보다도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한 장의 셔츠.

NHK 북해도 지부에서 2012년 제작한 '대지의 팡파레' 라는 드라마의 기념 셔츠다.

프린트된 그림에서도 알 수 있듯 이곳 오비히로의 반에이 경마를 소재로 한 드라마인 듯.

 

장기 연재 드라마가 아니라 2편짜리 스페셜 편성이라 질질 늘어지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애초에 드라마란 걸 안 본지가 꽤나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그다지 관심은 없다.

마지막으로 본 드라마가 대발이 나오는 내용이었는데.

 

 

 

사진 찍어도 되느냐 물어보니 괜찮다고 하신다. 입장도 무료라서 가벼운 마음으로 둘러본다.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데, 경마장이나 카지노 같은 도박 관련 업종들은 주위 시설이 훌륭하고 가격도 저렴하다고 한다.

주 소득원이 도박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잡아끌기 위해서 다른 서비스 수준이 뛰어나다고.

 

물론 이곳은 도박에 빠지는 경마장이라기보다 세계에서 이곳밖에 없는 문화시설로 이름이 높긴 하지만

이런 자료관의 유지 운영에 경마장에서 얻은 수익이 들어가지 않을 리는 없을 듯 하다.

 

'애마와의 이별' 이라는 슬픈 제목의 사진은, 공교롭게도 사진의 애상적인 분위기보다 '반에이 말이 정말로 크긴 크구나' 라는 감상이 먼저 떠오를 수 밖에 없다.

 

 

 

본격적인 관람 시작전에 위치한 정보검색용 PC 데스크 옆에는 전 포스팅에서 소개한 만화인 은수저 Silver Spoon이 서 있다.

가져가지 마라고 책 위에 '토카치무라' 라고 적어놓은 부분이 나름 매력포인트.

 

홋카이도 토박이들은 사실상 일본 최후의 개척민들이라 정착 초기에 고생을 어마어마하게 겪었는데

초기 개척민에서 3대째 자손이 되는 작가 아라카와 씨 역시 여성이지만 가업을 돕다보니 대형 트랙터 면허에 공수도 유단자이다 보니

여성만화가가 가질 법한 센시티브한 감정 묘사보다 근육 불끈불끈하는 모험활극쪽에 특화된 느낌을 보여준다.

 

이 은수저라는 만화는 홋카이도 농어촌 학생들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물이지만 도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전개가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섬세한 감정묘사가 그렇게까지 뛰어나지는 않은 느낌. 작가의 취향이니 비판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 자료관은 경마에 대한 정보보다는 토카치 지역에서 말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는가를 세세하게 보여준다.

일본 최대의 평야인 이곳 토카치 지역도 첫 개척시에는 홋카이도의 거친 자연환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기에

어마어마하게 자라나는 나무와 잡초를 끝없이 베어내는 것에서부터, 덩치가 말보다 더 큰 불곰의 습격에 사냥꾼도 잡아먹히고

메뚜기떼가 몇 년동안이고 지역을 습격해서 입고있는 옷까지 갉아먹는 눈물겨운 고생 끝에 지금에 이르게 된다.

 

우유를 생산하는 홀슈타인종은 추위에 강하지만 밭을 갈때 쓰는 품종은 겨울을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에

추위에 강한 말을 소 대신으로 사용하다보니 점차 골격이 커지고 근육이 붙어 거대한 덩치가 되어 갔다고.

 

 

 

현재 사육되는 말의 대부분은 경마나 승마용이라 몸매가 좋고 스피드와 기교에 중점을 둔 스타일로 진화중인데

이쪽 반에이 경마에 참가하는 말들은 고대 로마시대 사람들을 깔아뭉개며 돌진하던 군마와 같이 육중한 몸매를 자랑한다.

 

키우기를 그렇게 키워서 그런지는 몰라도 양가집 규수같은 섬세한 마음씨를 자랑하는 서로우브레드 종에 비해

이쪽 녀석들은 의외로 한 성질 하는 편. 승부욕도 강하고 체력이 넘쳐 일종의 흥분상태다 보니 열심히 체력소모를 시켜줘야만 얌전해진다.

 

보통은 사육사와 사이가 좋은 경주마들이 장난삼에 사람의 어깨를 무는 등의 애교를 부리지만

반에이 경주마들이 사람 어깨를 장난삼아 물었다가는 멍 정도가 아니라 피부가 찢길지도 모르겠다.

 

 

 

반에이 경마는 어디까지나 농번기에 접어든 농장주들이 누가누가 썰매를 잘 끄나 경쟁하면서 시작된 경주라서

이쪽 말들은 속도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짐을 끄는 힘과 지구력이다.

 

당시 농업에 사용하던 각종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러지 않아도 빡빡하던 개척시대에 저런 도구들로 땅을 일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사람의 욕심에 고생하는 동물들은 아무리 연민을 가져도 모자라지 않다고 세삼 생각해보게 된다.

한국이나 일본같은 오래된 농경국가에서 1900년대 초반에 본격적인 개척이 이루어졌다는 건 나름 특이한 역사인데

일본쪽에서야 당연히 자랑할만한 일이겠지만, 이게 사실 아메리카 원주민과 미국인들간에 이루어진 역사와 다를바가 별로 없는 것이라

밖에서 보기에 씁쓸한 인종 탄압의 역사도 이루 말할 수가 없어서 조금 미묘한 기분이다.

 

개간 없이 인류의 역사가 존재할 수 없기에 단순하게 자연 파괴라는 시점에서 접근하기는 난점이 많아도

홋카이도의 원주민인 아이누족이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과 다를 바 없는 길을 걸었다는 것만으로도

역사 인식에 대한 주체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자료관 중간중간에는 지역 상식 퀴즈가 놓여있어서 아이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다.

어째서 말의 이름은 '~호' 였을까 라는 퀴즈고, 정답은 별관에 있다고 한다.

 

기억력이 감퇴하는 어른이라 질문을 잊어버릴까봐 사진까지 찍어 놨는데 사실 정답이 적힌 곳에는 질문도 다 적혀 있다.

재미있는 질문이 많았지만 그건 직접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재미로 남겨두기로 한다.

 

 

 

한국 사람에게 소가 재산 1호였듯, 오비히로에서는 말이 목숨만큼 중요한 가축이었다.

토카치 평야는 당시 홋카이도 인구를 고려할 때 사람이 개간할 수 있는 수준의 크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소와 말이 없으면 그냥 거지라고 해도 될 만한 상황이었으니까.

 

물론 개인 재산이라는 측면을 제외하고, 초기 개척민들은 거의 예외없이 공동체 생활을 하며 살아남기에 바쁜 상황이긴 했다.

집에 불이 나면 가장 먼저 가지고 튀어나오는 것이 소유한 말의 명부라는 말도 있을 정도였고.

 

 

 

롯시 2호 라는 이름을 가진 말의 오래된 사진.

본인 역시 경마장에 가 본적이 한 번도 없어서 일반 경주마와 직접 비교를 하진 못했지만 사진으로만 봐도 범상치 않은 덩치가 인상적이다.

 

특히 서로우브래드의 발목은 속도를 내기 위해 사람 발목 정도의 굵기에 매우 섬세한 근육섬유들이 밀집되어 있지만

이 녀석은 말의 가장 약한 부분이라는 발목 두께가 거진 사람 허벅지와 맞먹는 굵기를 자랑한다.

 

초식동물인 말은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속도를 살리는 몸 구조로 진화했는데

예전 군마를 포함해 이런 농경마들은 과연 같은 종인가 싶을 정도로 육중한 덩치를 자랑한다.

물론 얘네들도 말은 말이니까 달리는 걸 싫어하지는 않는다. 달리게 해 주지 않으면 스트레스로 죽어버리는 동물이니까.

 

 

 

예전에는 수의사가 직업으로 인식되지도 못했지만, 농민들에게 있어 소와 말은 자식보다 소중한 자원이었으니

홋카이도에는 서양의 자료들을 이용해 열심히 공부하는 수의사들이 나름 많은 편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 문물을 극도로 찬양하는 흐름이 만들어 지고, 금기로 여겨졌던 해부학과 내과 관련 서적들이 밀려와서

자연스레 이곳에서는 말에 대한 전문적인 치료 관리에 그 지식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의사든 수의사든 일단 기본은 저 수많은 부위들 명칭을 달달 외는 것. 이걸 모르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가 없으니.

 

 

 

말은 특히 수컷이 호르몬 분비가 격렬한 편이라 발정기에 골치를 썩이곤 한다.

현재 경마에 사용되는 경주마는 기본적으로 거세를 하지 않는데, 한창 젊은 수컷들은 경주 도중에 암컷 꽁무니만 따라다니는 광경을 연출하기도 한다.

 

성격에 문제가 있어서 조절이 힘든 수컷은 할 수 없이 거세를 하기도 하는데, 이러면 성격도 차분해지고 경주 성적도 좋아지지만

일종의 도핑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상위권 대회에는 출장이 금지되어 있다.

 

반에이 말들도 예외가 아니고, 오히려 그 거대한 덩치로 성질 부리면 상당히 위험하기 때문에 거세도 많이 이루어지는 편.

1900년대 초반에 일본에서도 거세법이 지정되어 사진에 보이는 무시무시한 기구들로 자손 번식의 꿈이 좌절된 말들이 많다.

동물의 감정을 무시한 비인도적인 처사가 아니냐 싶지만 사실 말과 소는 수천년 전부터 철저히 사람의 소유 재물로서 취급받았기 때문에

지금와서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처지이긴 하다. 애초에 말이란 동물은 예나 지금이나 너무나 비싸서 재산 개념이 아니고서는 사육 자체가 힘들고.

 

경마와 승마 용도가 거의 대부분인 현대 사회의 말 역시 수많은 인위적 교배에 따라 재산 가치가 변할 수밖에 없어서

거시기를 달고 있다고 해서 마음에 드는 암컷과 짝을 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현 경주마인 서로우브래드 종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경주마들의 유전자 지도를 거슬러 올라가면 단지 2~3마리의 말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정도.

 

 

 

놓여있는 자료 사이에 구매욕을 자극하는 말 조각상이 버티고 있어서 한참을 쳐다본다.

오래된 자료로서 이곳에 놓여있는건지 그냥 장식으로 놔 둔건지 모르겠지만 꽤나 마음에 든다.

 

기념품점에서 발견한다면 한 개쯤 구입해 가도 나쁘지 않으리라 보는데

이번 여행은 개인적인 기념품은 구입하지 않기로 계획했기 때문에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할 듯.

나름 기간이 긴 여행이라 지갑이 텅텅 비는 불상사를 막으려 한 것도 있고

돌아가기전에 나침반님한테 홋카이도의 미식을 조금이나마 소개시켜 드리려고 준비중이기도 했기 때문에.

 

 

 

중간중간에 아이들과 함께 찾아오는 젊은 부모들도 많이 들어온다.

경마에 관심을 가지라는게 아니고 이 지역의 문화로서 뗄 수 없는 것이다 보니 나름 인기있는 지역.

나처럼 경마에 돈 쓸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는 사람도 와서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니까.

 

반에이 경마는 일단 토카치 지방에서 시작하긴 했지만 지금은 홋카이도의 명물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계절별로 홋카이도 내의 경마장을 순회하며 실시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반에이 경마 하면 역시 눈길을 헤치며 돌진하는 겨울이 가장 인상적이기도 하고

겨울엔 본고장인 이곳 오비히로에서 금, 토, 일요일 경기가 열리기 때문에 이번이 절호의 기회였다.

 

여름 자전거 여행때는 이 경마를 굳이 다른 곳에서 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그냥 패스했지만

이렇게 겨울에 기회가 생겼으니 이 경기를 보지 않고 지나간다는 건 너무나 아쉬웠기에.

 

 

 

겨울에 말들이 끌었던 눈썰매가 전시되어 있다. 눈 덕분에 조금 편하게 끌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만큼 말이 쑥쑥 빠지기 때문에 여름에 비해 편했으리라고 판단하기는 힘들다.

 

물론 소중한 재산인 동시에 가족과 다름없는 말이었던 만큼 이곳 사람들의 말에 대한 애정은 각별한 것이니

그 덩치를 유지할 만큼 충분한 먹이와 휴식을 제공해 줬음에는 틀림없다.

 

반에이 경마는 채 200m 도 되지 않는 서킷 길이에 비해 너무나 가혹한 경기 방식으로 인해

일각에서는 지금도 동물 학대라고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는 사람들이 많다.

경주마들은 계절별 첨단 트레이닝으로 몸을 단련하고 더없이 편안한 잠자리와 최상급의 식사를 제공받지만

어찌됐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사육되고 있는 것이니 학대라고 불러도 근본적으로 반박할 만한 여지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인류 역사가 이러한 동물들의 힘 없이는 발전할 수 없었으니 동물 입장에서 본다면 사람의 죄는 역사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서 지워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듯.

 

 

 

자료관 구경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지만 여전히 눈은 끊임없이 내리고 있다.

반에이 경마는 겨울이 진국이고, 겨울이라면 눈이 펄펄 내리는 곳에서의 강렬한 경주가 최고.

이번 여행은 원하는 장소에 원하던 날씨가 거의 완벽하게 들어맞고 있어서 그저 행복할 따름이다.

시레토코에서 단 하루만에 맑은 날씨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는데

이렇게 반에이 경마마저도 폭설이 맞이해 주니, 운이 참 좋았다는 기분밖에 들지 않는다.

 

오비히로의 겨울은 매섭기 그지없지만 추위마저도 나를 축복해 주는 것 같아서 뿌듯하다.

 

 

 

광장에 전시되어 있는 화덕은 아는 사람만 알 수 있는 조금 매니악한 볼거리.

조금 전 언급했던 만화 은수저에 등장하는 화덕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농고에 다니는 주인공이 학교 안에서 만든 재료들만으로 이 화덕을 이용해 피자를 만들어 먹는 에피소드가 있다.

당연히 신선도로는 최상급인데다 이런 화덕에서 구워내 바로 먹는 피자니 그 맛은 만화를 읽으면서도 저절로 느껴질 정도.

 

실제로 피자를 구워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오늘은 그런 이벤트가 벌어지기엔 눈이 너무 많이 오는 듯 하다.

 

 

 

경마장은 아직 개장 전이지만 토카치무라 구석을 살짝 빠져나가보면 경마장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

아이들에 대한 배려로 한 켠에 마련해 놓은 놀이터는 마치 늪처럼 늘어가기 무려울 정도로 눈이 쌓여있다.

삿포로에서부터 눈 내리는 모습은 많이 봤지만 이렇게까지 쏟아붓는 눈은 처음이라 점점 흥분감이 고조된다.

 

 

 

경마장에 들어가지 않아도 이곳에서 대충 경주를 감상할 수는 있지만

입장료도 주된 수익원이고, 가능한 한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모습을 잘 담아내기 위해서는 장소 선정이 중요하니

이제와서 몇 천원 밖에 안되는 돈을 아낄 필요는 없을 듯 하다. 그것과 별개로 저 의자에 앉을 용기조차 나지 않는것도 사실.

 

 

 

반에이 경마가 겨울의 이벤트라고 해도 역시 쌓이는 눈을 아무렇게나 방치해서는 레이스가 불가능하니

직원들이 무전기까지 써 가며 이곳저곳 눈을 퍼내고 트랙을 점검중이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망원으로 찍고 보니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어서 긴장이 풀리는 느낌.

군대에서라면 절대 저렇게 웃으면서 제설작업을 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한국 남자들은 일단 눈 하면 군대가 연상되는 것도 병이라면 병.

 

반에이 경마의 하이라이트 부분인 경사로가 눈에 들어오는데, 처음엔 생각보다 가파르지 않다는 인상이다.

저런 경사로가 두 개 포함되어 길이가 200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짧은 직선이지만, 경주마들의 고통은 상상 이상이라 한다.

대강 내용은 알고 있지만 역시 직접 경주를 보지 않으면 그 박력을 느끼기 힘들 듯.

 

 

 

경마장 안도 각종 먹을거리와 기념품점 등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한 시설이 잘 되어 있다고 하는데

아직 문을 열지 않았으니 이곳 토카치무라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내며 배도 좀 채우고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아직 배가 고플 시간은 아니지만 방금 전 봤던 이곳 한정 우유 라멘이 궁금하기도 하고.

우유가 들어간 라멘이라면 얼핏 떠올리기에 느끼할지도 모르지만, 애초에 자랑하는 한정 상품으로 내 놓은 녀석이니 기본적인 맛은 보장하리라 생각한다.

버스표를 구입하면서 받은 200엔 할인권도 있으니 먹지 않을 이유도 없다. 잠시 후에 들어갈 경마장 앞의 거대한 포스터를 한 번 바라보고 다시 방향을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