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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자'에 해당하는 글들

  1. 2014.11.21  2월 16일 오비히로 - 대폭설 6
  2. 2014.11.11  2월 15일 오비히로 - 쌀쌀한 도시 10
  3. 2014.11.05  2월 15일 오비히로 - 한 잔 한 개피 그리고 증기 6
  4. 2014.10.23  2월 14일 시레토코 - 만찬 10
  5. 2014.10.21  2월 14일 시레토코 - 뒤돌아 볼 수밖에 없는 6
  6. 2014.10.17  2월 14일 시레토코 - 멀었던 두 시간의 결합 2

 

 

보통 알람을 설정해 놓고 자긴 하는데, 소리를 듣고 눈을 떠도 자기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고요함과 새벽녘이 다가오기 전의 어슴프레함 때문에

혹시 시간을 잘못 설정해 놓고 잔 건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이상하다 싶어 커튼을 걷어보니 그제서야 이해가 된다.

 

아침해는 밝았지만 무식하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같은 눈발에 모든 것이 정지되어 버렸다.

자동차들이 움직이지 않으니 밖은 더욱 조용하다. 도심지에 위치한 비지니스 호텔에서 아침이 이렇게 조용한 것도 참 신선한 경험이다.

 

조식 먹으러 가기도 전에 카메라부터 주섬주섬 꺼내들어 촛점이 맞지 않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셔터를 누른다.

이번 여행은 적어도 날씨라는 면에 있어서는 완전히 로또를 맞은 것이나 다름 없다. 아침이라 환호할 정도로 정신이 또렷하지 않지만 입가엔 미소가 흐른다.

 

 

 

오늘의 목적지는 눈이 많이 내리면 내릴수록 좋기 때문에, 더 할 나위 없는 최상의 조건이다.

삿포로에서도, 아사히카와에서도, 시레토코에서도 눈은 많이 내렸지만 오늘 내리는 눈은 비교를 불허한다.

일반적인 관광이었다면 오늘 과연 이동할 수 있을까 하고 가슴이 철렁했을 법도 하다.

 

눈이 이만큼 많이 온다면 오히려 얼어붙지 않기 때문에 자동차들은 별 무리없이 운전이 가능하다.

문제는 바퀴를 덮을 정도로 눈이 쌓이게 되면 역시 사고 위험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단체 여행객으로서는 치명적일지도.

 

 

 

이곳 토카치 지역은 원래 눈 많이 오고 춥기로 유명한 곳이라 사람들은 별 신경 안쓰고 돌아다닌다.

이쪽에서는 눈 때문에 학교나 회사가 쉬는 경우도 있을까 궁금하다.

원 서식지인 대구에서 이만큼 눈이 왔다고 하면 도시 전체가 눈 속에서 잠자고 있을 것이 틀림없는데.

 

 

 

평소 자신보다 위에 서 있는 것들을 더 높은 곳에서 망원으로 당겨 보는것은 묘한 신선함이 있다.

이게 부적절한 호기심과 욕망으로 연결되면 범죄가 되겠지만, 어쨌든 평소와는 다른 시야를 즐긴다는 것은 매력적이다.

 

눈은 많이 와도 바람은 심하지 않은 듯, 가로등 위에 덮인 눈은 아슬아슬할 정도로 높게 쌓여 있다.

경사면에서 녹아내린 물이 다시 얼어버려서 고드름을 만들어 낸 모습이, 토카치 지역의 살아있는 기후 소개를 담당하는 듯 하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싶더니 제설차 두 대가 열심히 눈을 한쪽으로 치워내고 있다.

이 정도로 눈이 내리고 있는 상황이라 제설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더 쌓이다가는 자동차가 전진을 못할 수도 있으니 어쩔 수 없을 듯.

 

치워내는 눈의 양은 상당하지만 온 사방이 눈으로 뒤덮힌 상황에서 고군분투하는 제설차는 한없이 작고 연약해 보인다.

처음엔 바램이 이루어졌다고 기뻐했지만 심상치 않게 눈이 내리니 오늘 목적지가 영업을 하는지 오히려 걱정까지 되기 시작한다.

 

목적지는 다름아닌 경마장인데, 원래 겨울 스포츠이긴 해도 눈이 이렇게 오면 과연 괜찮을까 싶다.

 

 

 

고민해봤자 해결되는 건 없으니 조식을 먹은 후 역으로 출발한다.

 

걸어서 10분 거리지만 이동이 힘들어 시레토코에 다시 돌아온 듯한 기분도 든다. 주위 풍경은 전혀 다르지만.

가끔 바람이 불기만 해도 건물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마법같은 풍경이 연출된다.

카메라를 꺼내기는 좀 불안한 상황이지만 이런 풍경을 그냥 지나치기도 힘들어 조심조심 셔터를 누른다.

방진방적 정도는 지원하기 때문에 물이 스며들 걱정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지만 렌즈 앞에 물기가 묻으면 닦아내기 귀찮아서.

 

 

 

도시 기능이 거의 마비되는게 아닐까 싶은 폭설인데, 도로에는 버스나 택시 등이 간간히 보이지만 승용차는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다.

여름 홋카이도는 그것대로 워낙 매력적이라서 지난 자전거 여행 도중 겨울의 풍경이 궁금한 적은 없었지만

이번에 와 보니 역시 이곳의 겨울은 여름 못지않은 자연의 힘을 유감없이 느끼게 해 준다.

 

생물이 살 것 같지 않은 이런 혹독한 겨울을 넘기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 강렬히 충만된 여름의 생명력이 빛을 발하는 것일 듯.

 

 

 

일단 카메라를 들고 나니 이곳저곳 시야가 넓어진다. 습관 탓인가.

일찍 나섰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남아있어서 여유롭게 주위를 둘러본다.

출근길 시민들에겐 참 괴롭겠지만 쌓인 눈이 만들어내는 유려한 곡선과 순백색 배경이 만들어내는 대비가 도시를 치장한다.

 

대도시였다면 아무리 눈이 많이 쌓여도 먹고살기 위한 인간의 대규모 이동에 대한 열망을 막을 수 없어서

도로와 도보는 온통 흙탕물로 얼룩질 수밖에 없겠지만, 이곳은 겉으로 보이는 도시 규모에 비해 한적한 편이다.

자전거 방치 금지구역 팻말이 평소보다 따뜻해 보이는 것도 그런 기분 탓일까.

 

 

 

한국에서도 번안되어 인기를 끌었던 '눈의 꽃'이라는 노래가 어울리는 풍경.

이런 조경수들은 꽃의 아름다움보다는 풍성한 잎들을 노리고 조성된 경우가 많은데

겨울에만 피는 이런 꽃은 확실히 무채색의 풍경 속에서 과하지 않은 소박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 있다.

 

 

 

버스 정류장에 가서 오늘 비가 이만큼 오는데 경마장이 열렸으려나 물어본다.

가볍게 물어본 것 뿐인데 아가씨는 직접 경마장에 전화까지 해서 개장 여부를 알아본 후 문제없다는 답변을 건네준다.

 

더불어 정보 부족인 나에게 여기서 경마장까지 가는 왕복 버스티켓과 경마장 입장료를 한꺼번에 사면 경마장 입장료 할인과 함께

당일 사용이 가능한 토카치무라 200엔 할인권까지 끼워준다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토카치무라는 경마장 앞에 있는 조그만 문화센터 같은 곳.

따로따로 구매하는 경우에 비해 500엔 정도 할인이 되기 때문에 왕복 버스표가 필요하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더없는 이득이다.

더더구나 나 같은 손님들을 위해 귀여운 말 캐리커처까지 프린트 된 왕복 버스 시간표까지 챙겨줘서, 출발 전에 만족감을 듬뿍 선사해 준다.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버스 시간표마저도 여행 후의 추억으로 보관할 가치가 충분하도록 만드는 소소한 배려가 여행 산업의 진짜 핵심이 아닐까.

 

 

 

10분만 기다리면 버스가 오기 때문에 굳이 안내소 안에서 웅크리고 있을 필요를 못느끼고 눈발을 감상하러 밖으로 나간다.

 

맞은편 벤치의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라 카메라에 담아 본다.

이미 벤치로서의 기능은 상실한지 오래지만 이미 그 자체로 예술 작품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가치가 충분하다.

대구에 살면서 평생 보아온 눈보다 더 많은 눈을 홋카이도에서의 10일동안 본 탓에, 이국의 정취를 찾아다니는 여행으로서는 더할 나위가 없다.

 

 

 

사실 역에서 경마장까지는 날만 좋다면 30분 정도만 걸어도 도착할 수 있는 거리.

평균 시속 20km 정도로 마실 나가듯이 천천히 도로를 거니는 버스 안에서 보는 풍경도 각별하다.

눈 때문에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이 힘들어 정류소 이름을 외치는 안내기의 목소리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경마장 정류소쪽에 내리긴 했는데 주위를 둘러봐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파악하기가 힘들다.

시레토코처럼 천혜의 자연속이라면 오히려 주변 풍경만으로 위치를 특정할 수 있지만

모든 곳이 비슷비슷한 도시 속에서는 폭설이 그나마 남아있던 분석 가능한 지형들을 전부 가려버리기 때문에 놀라울 정도의 혼란을 야기한다.

 

하는 수 없이 같이 내린 노인 일행에게 경마장이 어디인지 물어봤는데 어이없게도 도로 바로 건너편에 경마장 입구를 가리킨다.

처음 방문하는 곳이니 이런 실수는 애교로 넘어갈 수 있겠지만

고개를 돌려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의 눈이 일으킨 방해공작이라 변명해도 큰 무리는 없으리라 본다.

 

 

 

경마장 들어가기 전에도 놀라운 풍경은 여기저기서 나를 반기고 있어서

아직 본론은 시작도 하지 않았음에도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게 해 주고 있다.

 

상록수인 소나무마저도 끝없이 내리는 눈 속에 파묻혀 색을 거의 잃어버리고 있는 모습은 처절하기보다는 아름답다.

 

 

 

오비히로는 도시 전체가 평야이긴 하지만

혹여 저 눈안개 앞에 라우스산이 버티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이곳에서 보는 풍경은 평야와 다를 바 없을 듯 하다.

 

이쪽 사람들에겐 매년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이겠지만 나에게는 이 모습만으로도 오비히로까지 온 보람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좋아하는 풍경에 너무 몰입해서 경마장의 재미가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불안함마저 느끼며 무릎까지 푹푹 꺼지는 눈 속을 걷기 시작한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려 해도 강압적이라 해도 될 만큼 주위의 풍경이 자신을 담아달라는 듯 미려함을 뽐내는 탓에

몇 번이고 발걸음을 멈춰 셔터에 손을 가져갈 수밖에 없다.

 

원래부터 이런 모습이었음에 틀림없으리라 느껴질 만큼 자연스럽게 형성된 흑과 백의 차분한 대비는

그림같은 풍경을 찾아 몇 시간이고 이동하고 몇 시간이고 한 자리에 버티고 있는 사진가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듯 하다.

물론 본인이 그런 사진가들하고 비교할 만큼 건방진 편은 아니고.

 

 

콘크리트 도심 속에서도 자연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은 빛이 바래지 않지만

경마장 관계자와 마을 사람들이 손님을 맞이하는 열성적인 태도 역시 그에 밀리지 않을 만큼 볼만한 것이다.

 

자전거 보관소의 지지대가 눈썹까지 예쁘장하게 그려놓은 말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보고

한탕 벌기 위해 안절부절하는 아저씨들의 집합소라는 선입견을 가질 가능성이 높은 경마장에 대한 이미지가 한층 부드러워진다.

물론 경마도 도박의 일종이라 마음이 흐려진 사람들이 없잖아 있겠지만

이곳 오비히로의 경마장은 사실상 주민들이 자랑하는 문화 공간으로 형성된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손님을 맞이하는 마음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생각해도 될 듯 하다.

 

 

 

경마장 앞에 세워진 동상은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혼신의 레이스 후 몸에서 쏟아지는 땀처럼 보여서 굉장히 인상적이다.

 

금방이라도 저 말의 콧가에서 거칠고 뜨거운 증기가 뿜어져 나올 듯한 느낌.

경마에 빠삭한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자세히 보면 이 말의 동상이 조금 특이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

경마용 말은 덩치만 큰 유리 세공품이라고 해도 될 만큼 모든 부위가 속도만을 내기 위해 매우 세심하고 가냘픈 편인데

이 녀석은 사람 허벅지만큼 굵고 튼튼한 하체를 가지고 있어서 경마용 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 이곳 경마장을 찾을 이유이기도 한데, 오비히로의 경마는 반에이(ばんえい)경마라는 세계에서 유일한 시스템으로 유명하다.

눈이 많고 험난한 지형상 소를 경작지 개척에 이용하기 힘들었던 이곳은 소 대신 말을 이용해 돌을 부수고 땅을 골라 논밭을 만들어 왔다.

그러기에 이 곳의 말은 속도를 중시하는 말과는 달리 수백 kg에 달하는 짐을 끌 수 있는 육중한 덩치가 필요했던 것.

반에이 경마는 그 농경마들의 힘자랑을 위해 만들어 진 독특한 이력때문에 일반적인 경마와 시스템이 완전히 다르다.

 

 

 

경마 시작까지는 2시간 정도 남았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다.

이곳은 경마장 외에도 산지 직송의 신선한 농산물을 파는 슈퍼와 각종 기념품을 파는 가게도 있고

오비히로와 반에이 농경마들의 역사를 전시한 박물관 등 즐길거리가 충분하기 때문에 일찍 와도 부담이 없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은 바닥이 깔끔하게 보일 정도로 눈을 치워낸 모습인데, 옆에서는 직원들이 열심히 눈을 퍼담고 있다.

옷을 두툼하게 입긴 했지만 가녀린 여직원이 거대한 제설장비를 들고 눈을 이리저리 치워내는 모습이 인상적.

 

 

 

푸드코트쪽에 오비히로 경마장 한정이라고 선전하는 우유 라멘이 매우 신경쓰였지만

아직 조식의 여력이 남아있기 때문에 저 쪽은 경마 시작전 마지막으로 들르기로 결심한다.

땀을 흘리던 동상과는 달리 토카치무라 앞에 전시된 붉은 말조각은 인고의 세월을 견뎌 낸 농경마들의 역사를 간직한 듯한 느낌을 준다.

 

노리고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토카치무라는 건물이 전부 붉은색으로 되어 있어 이렇게 눈내리는 날에는 굉장한 임팩트를 느낄 수 있다.

 

 

 

자료관 쪽에는 커다란 애니메이션 광고판이 놓여 있는데 이곳 출신 만화가인 아라카와 히로무의 작품인 '은수저 Sliver Spoon'이다.

 

강철의 연금술사라는 만화로 큰 인기를 모은 작가로

재미삼아 시작했던 고향 오비히로의 농촌 이야기가 워낙 도시 독자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는 바람에 그걸 토대로 장기 연재를 시작한 특이한 작품이다.

 

미국같은 농업 대국에서야 그게 별건가 싶겠지만 한국이나 일본처럼 고도화 된 국가 사람들에게

홋카이도의 농업 형태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처럼 신기한 것들 뿐이기 때문에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

 

그 작품 속에서 지나가는 이야기로 이 반에이 경마가 소개되었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로서는 그 기회를 놓칠 리 없다.

고향 출신 만화가가 국민적인 인기를 끌고 있으니 본인들도 굉장히 뿌듯할 듯.

본인은 이 작품이 연재되기 전에 이곳을 다녀왔기 때문에 크게 연관성은 없지만

이 작품으로 인해 홋카이도의 생태에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이라도, 이곳 홋카이도는 그 기대감을 결코 배신하지 않을 만큼 신기한 곳이 되리라 확신한다.

 

 

사카이 씨가 휴대폰으로 지도를 이리저리 검색하며 여러 지역들에 대해 설명해 준다.

기계가 삼성 갤럭시라서 일부러 보여주면서 웃는다.

삼성이야 일본에서도 유명하지만 실제로 일본 스마트폰의 절대 다수는 아이폰이라 오히려 이쪽에서는 레어한 쪽에 속한다.

매년 도쿄에서 이곳까지 놀러오는 사람이니만큼 개성이라고 할까, 매니아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라 왠지 납득이 간다.

이쪽에서는 갤럭시 쓰는 사람이 매니악한 편이니 한국과 비교하면 참 재미있는 차이점이기도 하다.

 

쿠시로 습지에 다다르자 사카이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열차 뒤쪽의 빈 공간으로 이동한다.

쿠시로라는 도시가 홋카이도에서 그나마 유명한 편에 속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이 쿠시로 습지 때문.

일본에 남아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큰 자연습지로, 겨울은 황량하기 그지없지만 여름엔 압도적인 모습을 자랑한다.

 

 

 

자전거 여행 때는 이동 수단이 그러다보니 습지 내부까지 깊숙하게 들어가지는 못하고 주변만 슬쩍 돌았는데

당시 도로 왼편에서 고양이를 사냥해 입에 물고 있던 북방여우와 마주친 기억이 가장 생생하다.

자전거를 멈춰줬지만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나를 노려보고 있어 조금 의아했는데

혹시나 싶어 도로 건너편을 살펴보니 새끼 여우 몇마리가 어미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전거를 뒤로 슬금슬금 빼 주니 잔뜩 경계하며 도로를 건너가 새끼들과 함께 풀숲 속으로 사라졌다.

고양이를 참 좋아하는 본인이지만 자연 속의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내가 어느 한 쪽의 편을 들 수는 없었던 기억.

 

여름과는 너무나도 다른 황량한 모습에 약간 실망도 했지만 쿠시로 습지는 이렇게 잠깐 지나가는 걸로는 도무지 감상할 수 없는 곳이다.

이미 1980년에 람사르 조약에 등록되었으며, 한국 최대의 습지라는 우포늪의 50배가 넘는 크기를 가진 녀석이라서.

우포늪이 1억 4천만년전에 생성된 것에 비해 쿠시로 습지는 고작 2천만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30년 전부터 사라져가는 습지 보호운동을 시작한 터라, 4대강 등의 무자비한 파헤치기로 거의 고사 상태에 이르른 우포늪에 비해

오히려 1980년 조약 당시보다 30% 정도 습지의 크기가 늘어난 상황이다. 여러가지로 씁쓸한 비교가 될 수밖에 없다.

 

전망대에 올라가 바라보는 쿠시로 습지는 여름 홋카이도 여행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절경 중의 절경이라

열차 속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이 아쉬운 모습을 여름 여행의 영양분으로 삼으며 참기로 한다.

 

 

 

사카이 씨는 쿠시로 역에서 열차를 갈아타는데 지정좌석이 아니라 빠른 사람이 앉아갈 수 있는 터라 열차가 정차하자마자 마구 달린다.

바쁜 작별인사였고 딱히 연락처도 받아놓은 게 없지만, 시레토코에 찾아가다 보면 자연스레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본인 역시 쿠시로에서 갈아타긴 해도 어차피 JR 레일패스를 이용해 모든 좌석을 예약해 놨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는 없다.

홋카이도의 레일패스는 외국인 관광객만 구입할 수 있어서 이런 사치를 부리는 것도 나름 뿌듯한 일이다.

홋카이도에서 가장 외진 곳을 지나왔기 때문인지, 이제 번듯한 열차를 타고 양복을 입은 비지니스맨들 사이에 앉아서 현대 문명의 향취를 느낀다.

 

사카이 씨가 떠나고 나서는 별로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묵묵히 음악이나 들으며 1시간 정도를 달려 오비히로에 도착한다.

쿠시로나 오비히로나 자전거 여행때 지나갔던 곳이라 여전히 주위 풍경은 낯설지 않다.

홋카이도 동부에서 가장 큰 도시라서 아침까지 머물렀던 시레토코의 대자연의 풍광은 금새 사라진다.

 

 

 

토요코인에 투숙하자 룸 키와 함께 신문을 한 부 건네받았다. 당연히 일본 신문.

여권까지 복사해 갔기 때문에 외국인 관광객이라는 사실은 확실히 알고 있었을 텐데 무슨 생각으로 신문을 건네 준 것인지.

 

날씨가 급격히 나빠지고 있긴 해도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라 이대로 호텔에 틀어박히는 건 재미가 없다.

홋카이도의 면적을 생각하면 결코 길지 않은 10일여간의 여행 중에 굳이 이런 도시에 멈춰선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이지만

도착 당일인 오늘은 어차피 멀리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근육통으로 고생하는 몸이 좀처럼 침대 위를 떠나지 못한다.

조금 전 지나왔던 쿠시로 근처의 평원에서는 무려 이글루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특별 체험도 할 수 있었지만

숙박비가 여간 비싼 게 아닌데다 그런 고생은 자전거 여행 때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즐겼기 때문에 딱히 아쉽진 않다.

 

이곳은 원래 아이누어로 토카치(十勝) 지역으로 불리는 홋카이도 최대의 평야 지대라 낙농업의 성지이기도 하고 그 덕에 오비히로 시는 상공업도 상당히 발달한 편이다.

미식가들에게도 나름 유명한 곳인데,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인해 각종 유제품들의 품질이 매우 신선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우유를 사용하는 고급 과자류가 인기를 끈다.

 

홋카이도에서 가장 유명한 제과점인 롯카테(六花亭) 본점이 이곳에서 시작하기도 했고, 그 외에도 굉장한 레벨의 과자, 케이크점이 포진하고 있다.

과자 마을이라는 별명이 어색하지 않은 곳이다. 예전 포스팅의 오타루 여행쪽에 보이는 과자점의 상당수가 이곳 오비히로에 본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원래부터 달달한 과자나 케이크류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편이기도 하고

지금은 과자보다 더 필요한 게 짭짤한 식사라서 그렇게 당기지 않는다. 아침식사 이후로 맥주 한 잔 외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낙농업과 함께 양돈업도 크게 발달한 토카치 지역에서는 이곳의 지역 음식이라 할 만한 돼지고기 덮밥 부타동(豚丼)도 유명하다.

원래 일본의 대표음식중 하나인 덮밥은 소고기를 얹은 규동, 장어를 얹은 우나동 정도가 일반적인데

이곳 토카치 지방에서는 소중한 노동력과 유제품 생산원인 소를 마구 잡아먹기 힘들었고, 장어는 있을리가 없으니

겨울에 강하고 대량 사육이 용이한 돼지를 덮밥 재료로 사용하면서 이 지방의 독특한 식문화를 만들었다.

 

요시노야 등의 전국 체인점 메뉴에 올라오는 곁다리 부타동 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신선함으로 유명한 녀석인데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 오비히로의 밤거리로 나와 보니 지금 꼭 부타동을 먹어야 할 의무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어차피 내일 하루 더 머물 예정이라 급하게 이곳의 특산물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기도 했고

내륙 지역이라 홋카이도에서 겨울이 가장 매서운 곳인 만큼 뭔가 좀 더 몸을 따뜻하게 해 줄 무언가를 갈구하게 된다.

 

 

 

쌓여 있는 눈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시레토코에서 느꼈던 어딘가 푸근했던 겨울 분위기와는 달리

이곳의 바람은 정말 꽁꽁 싸맨 옷가지 사이의 조그만 틈새로도 가차없이 파고 들어오는 칼날같은 매서움을 자랑한다.

안면 근육을 제외한 모든 부위를 철저하게 방어하고 있는데도 몸이 덜덜 떨려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시레토코의 야외 온천에서 눈을 맞으며 즐기던 그 겨울과는 달리 산을 넘어 불어오는 내륙의 바람은 자비심이 없다.

 

체감온도가 영하 15도에 이르고 있어서 밤거리를 오래 즐길만한 여유도 없다. 사실 시레토코에서 건너온 터라 별로 보고 싶은 풍경도 아니긴 하지만.

그나마 오비히로가 꽤나 큰 도시라서 이 정도지, 토카치 평야 부근에는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곳도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태어난 모 유명 만화가의 아버지는 그런 추위에서도 빤스 한장만 입고 밖을 나돌아 다닌다고 하는데, 과연 인간의 적응력은 놀라울 따름.

 

 

 

먹을 게 없으면 부타동이라도 먹을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불쑥 시야에 나타난 인디언 카레.

그러고보니 왜 이제껏 이 녀석을 잊고 있었을까 싶다. 전혀 생각나지 않다가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 것은 분명 대자연의 뜻이라 믿으며 길을 건넌다.

 

외지 사람들이 오비히로 하고 떠올리는 음식이 부타동이라면 실제 지역민들의 소울 푸드로 인식되는 것이 이 인디언 카레.

오비히로 안에서는 카레 업계의 절대적인 정점에 군림하고 있어서 코코 이치방야 같은 전국구 체인점이 발 들일 틈도 없다.

이곳 사람들은 심지어 집에서 냄비를 들고 와서 카레를 싸 가기도 한다고. 젊은 창업자의 끝없는 노력이 만들어 낸 절묘한 루의 깊은 맛이 만들어 낸 전설이다.

 

 

 

카레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이젠 밖에서 사 먹는 카레에 만족하지 못하고 집에서 거하게 만들어먹는 습관이 생긴 본인이라

코코 이치방야 정도의 그럭저럭 괜찮은 카레도 만족감을 느끼는 정도는 아닌데, 이 인디언 카레는 본받고 싶은 맛 중 하나다.

 

자전거 여행때는 한여름이라 카레가 그렇게까지 잘 넘어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코를 찌르는 강렬한 향신료의 배합은 놀라웠다.

소고기, 돼지고기, 야채를 기본으로 한 세 종류의 루가 그 강렬한 향신료 안에서도 각자의 개성을 잘 표현하고 있는 점이 포인트.

 

해산물 카레 등 비싼 녀석도 있지만 이곳 인디언 카레는 지극히 저렴하고 서민적인 풍취가 강하기 때문에 아무리 싼 녀석을 주문해도 실망하는 법은 없다.

카레만으로 배를 채우려면 세 그릇 정도는 먹어치워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냥 허기와 추위를 달래는 정도로만 즐기기로 생각하고

중간 매운맛의 비프 카레를 주문한다. 이 정도라면 밖에 나와서 군것질 한 번 더 할 여지는 충분히 남겨놓는 양이다.

 

한국에서는 구경하기도 힘들 정도로 진하게 우려낸 카레 향기가 얼어붙은 코 속을 통과하는 순간 척수 부근에서부터 짜릿한 전기가 통하는 느낌.

집에서 만들어 먹을 때도 일본식 고형카레와 한국의 가루 카레를 서너 종씩 배합해서 루를 만들긴 하지만

이곳의 루는 시판용 카레가 아니라 갖가지 향신료를 직접 사용해서 그 독특한 풍미를 만들다 보니 흉내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건더기가 많은 한국의 카레와 달리 이곳은 고기 이외의 건더기가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야채의 겉모습이 아예 남지 않을 정도로 수십 수백시간을 끓여 일체화시켰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만 발전한 독특한 방식이라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지만, 적어도 여기에 입맛 들이면 한국의 카레는 그냥 맹물이나 마찬가지.

 

 

 

콧물을 참으며 전신을 자극하는 카레를 한 그릇 비우고 나니 행복감이 몰려온다.

오비히로에서 인디언 카레를 잊고 있었던 자신을 생각하니 이제 나도 늙었구나 싶다.

 

양이 허기를 해결한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편의점에서 내일 먹을 간식과 음료수까지 구입한 후 주변을 어슬렁 거리다가

들어가기 전에 조금 더 배를 채우자고 생각하고 모스버거로 들어간다. 여기 햄버거는 맛있는 반면 크기가 워낙 작아서 간식거리로는 유용하다.

 

카레를 즐긴 후라 달콤한 토마토소스의 맛이 약간 옅어지는 역효과가 있었지만

아삭아삭한 양파의 식감과 치즈의 부드러운 맛이 빈 속에 자극적이었던 카레의 향기를 중화시켜준다.

겨울 저녁이라 모두들 일찍 귀가했는지 한적한 분위기에, 숙소에 돌아가도 할 일은 없었기에 느긋하게 밀린 일기를 쓰며 햄버거를 씹는다.

밖에는 칼날바람과는 어울리지 않는 부슬눈이 내리고 있지만 내일만큼은 좀 더 펑펑 내려주길 바라고 또 바란다.

 

여행하는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바라던 날씨가 떡하니 나타나는 바람에

내일까지 그런 행운을 바라기엔 좀 욕심이 과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희망은 희망이다.

함박눈은 도시 여행에서는 매우 번거로운 녀석이지만 내일은 오히려 눈이 신나게 내려주는 게 일정에 도움이 된다.

 

카레와 햄버거로 속이 든든해지고 따듯한 가게 안에서 일기를 쓰고 있으니 스스륵 눈이 감겨온다.

숙소로 돌아와 뜨끈한 욕조에서 몸을 녹인 후 TV를 즐기며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몸이 쑤셔서 이리저리 뒤척여 줘야 좀 편안해 지는데 그러면 TV를 보기가 힘들어 살짝 귀찮다.

사실상 여행의 마지막 코스인 내일 여정에 행운이 따르길 기원하며 전등을 끈다. TV는 타이머 설정해 뒀으니 잘 떠들다가 알아서 꺼지겠지.

 

매일 아침 일어나서 몸을 떨며 보는 풍경이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이 호텔의 전망 좋은 객실은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쪽이지만

저 언덕에 추억을 가지고 있는 본인으로서는 오히려 이 풍경이 더욱 살갑게 느껴진다.

아마 살아가는 동안 이 풍경은 몇 번이고 더 보게 될 듯.

 

아침 날씨는 더할 나위없이 쾌청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이 하늘이 유지될런지.

오늘은 홋카이도에서 가장 큰 평야지대인 토카치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인 오비히로(帯広)까지 이동한다.

렌터카가 없는 본인으로서는 나갈 때나 들어갈 때나 버스를 타고 기차역까지 갈아타야하는 시레토코라는 곳이 가장 이동하기 귀찮은 곳이지만

어제의 황홀한 경험만으로 그 정도 수고는 얼마든지 상쇄할 수 있어서 부담이 없다.

 

단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도착 하기만 하면 오케이였던 때와 달리

아침에 나가는 버스 시간을 정확히 지키지 않으면 여러가지 문제가 생기는 출발일이라

근육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몸을 간신히 움직이며 새벽에 일어나 후다닥 조식을 챙기러 간다.

 

이곳에서 기차가 움직이는 샤리역까지 운행하는 버스는 90분 혹은 2시간에 한 대씩밖에 운행하지 않기도 하고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버스의 운행시간과 샤리역의 열차 운행시간이 연계되도록 조절되어 있기 때문에

만약 계획대로의 시간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면 이동 시간이 연쇄적으로 늘어나게 되어 어마어마한 손실이 생긴다.

첫 차를 타느냐 마느냐에 따라 오비히로에 도착하는 시간이 최대 3시간 넘게 차이날 수도 있어서

아무리 피곤한 몸이라도 날렵하게 움직여 짐을 싸고 나가야 한다. 체크아웃 시간이 널널한 관광호텔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는 점이 조금 아쉽긴 하다.

 

 

 

로비에서 샤리로 가는 버스를 어디에서 타는지 물어보니 손으로 그려서 인쇄한 지도까지 건네주며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거리는 눈길을 느긋하게 걸어도 10분이면 충분한 편이라 30분 일찍 나온 본인으로서는 안도감이 든다.

샤리행 버스와 열차는 시간 연계가 철저하니까 한번 버스에 타기만 하면 일사천리로 이동이 가능하다는 말도 건네 줘서 든든하다.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일은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나와보니 조그만 마을 안에서도 담을거리는 눈만큼이나 쌓여있다.

원래 어디까지가 길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보행자를 위해 깔끔하게 눈을 치워 놓았는데

반듯하게 잘 닦아놓은 길 옆으로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마치 처음부터 이런 모양의 길인 것 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일단 아스팔트 길이고 삿포로처럼 도로 밑에 열선이 깔려있지 않기 때문에 미끄러움 주의는 어제의 오호보다 더 신경써야 하지만.

 

 

 

버스 정류장에 일찍 도착해 편안한 마음으로 대기중인 버스에 앉아 있으니 입구에서 낯익은 얼굴이 올라탄다.

어제 함께 오호를 거닐었던 사카이 씨와 눈이 맞자 양측 모두 순간 어리둥절 하다가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사카이 씨는 어제 바로 삿포로로 돌아간다고 한 것 같은데 여기서 만나게 되니 더욱 놀랍기도 했고.

피곤해서 그냥 푹 쉰 다음 오늘은 쿠시로(釧路) 습지 부근의 온천 마을에 들렀다가 삿포로로 갈 예정이라고 한다.

오비히로행 역시 쿠시로 습지를 통과하기 때문에 이동 거리의 절반 정도는 같은 길을 가게 되었다.

 

홀로 여행을 좋아하긴 해도 이렇게 만들어진 인연은 언제나 대환영이기 때문에 즐겁게 동승한다.

어제까지는 오호 투어에 너무 정신을 뺐겨서 동행하던 사람의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돌아가는 길에 다시 만나니 비로소 사카이 씨의 이름이 떠오른다. 이런 우연이 없었다면 조금 더 빨리 기억에서 잊혀졌을 듯.

 

샤리 역에 도착하니 벌써 사람들이 꽤나 많이 모여있다. 겨울 비수기라고 해도 여전히 사람 사는 곳이다 보니 이곳 지역민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으니까.

10분쯤 뒤에 열차가 도착하는데 사카이 씨가 이제 막 문을 열고 있는 역내 매점에 들어가 맥주 없냐고 물어본다.

가게 주인이 턱하니 거대한 금속 드럼통을 꺼내더니 시원하게 생맥주 한 잔을 뽑아준다. 뭔가 신기한 볼거리로 느껴진다.

 

나도 한잔 하겠냐고 해서 이런 기회니 고개를 끄덕였는데, 당연히 본인 분의 맥주값을 내려고 하다가 저지당했다.

일본에 왔으니 손님 대접을 해야 한다며 사카이 씨가 웃는다. 일본인들이 더치페이에 철저하다는 일반 상식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좀 신선할 듯.

본인은 시골을 많이 달리다 보니 이미 이런 호의에는 나름 익숙해져 있기는 하다. 사실 도심을 벗어나면 일본 쪽이 이방인을 훨씬 더 챙겨주는 편이다.

 

 

 

굳이 삿포로가 아니라도 일단 홋카이도의 생맥주 레벨은 기본적으로 상당한 수준.

물 맑기로 유명한 곳이라 그렇기도 하고, 일본에서 가장 인적이 드문 끄트머리 기차역 매점에서 파는 생맥주도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아침부터 쌓인 눈을 바라보며 생맥주 한 잔이라는 매우 드문 경험을 즐기며 기차에 오른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서 조금 늦게 올라섰다면 앉을 자리도 없었는데, 다행히도 사카이 씨와 둘이 앉을 자리는 확보했다.

맥주를 손에 들고 기차에 타서 홀짝홀짝 마시는 경험은 처음이라 나름 신선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흘러가는 풍경을 보고 있는데 문득 건너편 창가에 훌륭한 풍경이 흘러가고 있다.

당연히 건너편에도 중국인 아주머니들이 앉아 있었기 때문에, 혼자였다면 소심함을 한껏 발휘해서 카메라엔 손도 대지 않았겠지만

사카이 씨가 망설임없이 카메라를 꺼내 건너 풍경을 담기 시작하니 본인도 슬며시 카메라를 꺼낼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다.

 

아주머니들을 피해 풍경을 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몇 장 찍고나니 용기를 낸 보람은 있다는 기분이 든다.

도쿄에서 시레토코까지의 거리는 거진 서울에서 도쿄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

이런 여행 패턴을 가진 사람은 나처럼 음울한 사람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플러스적인 성향이 강해서 옆에 있으면 도움을 많이 받는 느낌이다.

 

 

 

경험이 풍부한 사카이 씨다 보니 이것저것 알고 있는것도 많다.

어느 정도 달리다가 사카이 씨가 차장석 쪽으로 가자고 한다. 여기서부터는 찍을거리가 많다고.

짐을 자리에 놔 두고 이동한다는 게 살짝 부담되기도 하지만 일단 사카이 씨에게 이끌려 카메라만 들고 운전석 쪽으로 이동.

 

이런 스팟은 이미 유명한지 좁은 차장실 내부엔 사람들이 많이 서 있다.

운전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싶지만 워낙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보니 별로 신경을 쓰지 않나 보다.

덜컹거리는 원맨 열차 앞쪽에서 흘러가는 풍경을 보니 철도원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이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며 열차를 운전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실감된다.

 

 

 

이쪽 홋카이도에서는 꽤나 드문 터널을 지나는 노선이라서 더욱 유명한가보다. 그리고 어쩐지 이런 터널은 겨울과 어울린다. 카와바타의 영향일까.

사람들이 많아서 몸을 지지할 만한 공간이 없고 화각상 망원렌즈를 사용해야 해서 셔터 누르기가 힘들지만 셔터스피드를 높이고 손떨림 방지를 최대한 이용해 몇 장을 담아본다.

열차에는 이제껏 별로 관심이 없어서 이렇게 차장실 쪽 풍경을 담아본 적이 없는데

도심과 달리 이런 대자연의 품 속을 달리는 열차의 풍경은 상당한 흥미를 동하게 만든다.

여러가지로 정보가 풍부한 사카이 씨 덕에 모르고 지나갈 뻔 했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어 고마울 따름.

 

 

 

월급은 적고 고된 홋카이도 철도원의 생활이지만

매일 이런 풍경을 스쳐지나가며 열차를 조작하는 직업도 분명 급여 이외의 매력이 존재할 법 하다.

지하철 같은 곳에서 열차 몰아보라고 하면 아무래도 좀 진절머리가 나겠지만.

 

특히나 일본에서 가장 노후된 시설과 열차를 가지고 있는 홋카이도 철도는

디지털 기기에서 느끼기 힘든 육중함과 애상적인 매력이 남아있어서 철도 매니아들에게 사랑받는 곳이기도 하다.

사카이 씨는 딱히 철도 매니아가 아니지만 이 곳을 지나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매력에 눈을 뜨게 된 듯 하다.

 

어느 정도 풍경을 감상하고 나서 다시 자리로 돌아왔는데, 사카이 씨가 조금 뒤에 또 볼거리가 하나 있다고 기대감을 주입해 준다.

아침 맥주는 태어나서 처음이라 원맨 열차의 흔들림이 묘하게 느껴지지만 아직은 괜찮은 듯.

일단 헤어지기 전까진 사카이 씨가 모든 볼거리를 다 제공해 줄 것 같아서 편안함마저 느껴진다.

 

 

 

어느 정도 달리니 사카이 씨가 이제 앞으로 가자고 다시 일어난다.

여전히 정보에 빠삭한 사람들이 많이 서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산 아래로 기차가 돌진하는 모습이 보인다.

 

참 기묘하게 생긴 산이라 생각하면서도 그 육중한 근육질 몸매 밑으로 달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예술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이 많은 홋카이도라 이런 철로를 개설할 때 참 고생 많이 했겠다는 생각도 든다.

예전에 언급했듯이 교도소에서 많은 인원이 이곳 노동에 투입되었는데, 시체도 못 찾고 사라진 사람들이 꽤 많았다고.

 

짧은 순간이었지만 혼자였다면 결코 보지 못했을 장관을 소개해 준 사카이 씨에게 거듭 고맙다고 인사한다.

 

 

 

시레토코에서 오비히로까지는 꽤나 긴 여정이다.

 

직선거리상으로는 삿포로에서 아사히카와간의 1.5배 정도 되지만 철도는 홋카이도 섬의 외곽을 주욱 돌아가기 때문에

거리에 비해 이동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어림잡아 6시간 정도. 그리고 노후된 철로 사정때문에 정차해야 할 경우도 많다.

 

열차 자체는 홋카이도 남동부의 도시 쿠시로(釧路)에서 한 번 갈아타면 되지만 그 전에는 두 번 정도 정차를 한다.

이는 시골 철로가 단선 운행을 하기 때문에 마주보고 오는 열차를 미리 보내는 등의 방법을 써야 하기 때문.

 

그런 상황 속에서도 의외로 여기저기서 승하차 하는 승객들로 분주하다. 홋카이도에도 온천이 많아서 겨울 여행객들이 유지되나보다.

15분 정도 정차를 하게 되어 사카이 씨와 함께 밖으로 나와 공기를 마신다. 담배를 꺼내 들고 피냐고 물어봐서 어쩔까 하다가 한 대 받아든다.

사카이 씨는 나보고 담배 피는 줄 몰랐다며 놀란다. 어제 하루종일 오호를 돌아다니면서도 담배 피고싶어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러고보니 사카이 씨는 어제 오호를 벗어나자마자 바로 피웠던가.

본인은 여행 중 이런 식으로 권유받거나 하는 경우가 아니면 담배를 피지 않으니 헷갈릴만도 하다.

 

홋카이도에도 화산이 많고 그러기에 온천도 많은데 이 부근은 특히 그런 곳이 많기로 유명하다.

아는 사람은 아는 곳으로, 조금 더 한적한 곳에 가면 텅 빈 논밭처럼 넓은 평야가 있는데

그곳에서 삽을 들고 무릎 위쪽 정도까지 흙을 파내려가면 온천이 졸졸 솟아나오는 신기한 장소가 있다.

 

 

 

어차피 오비히로까지만 가면 오늘 일정은 잡아놓은 게 없기 때문에 이런 느긋함도 좋구나 싶다.

사카이 씨는 또 다시 재미있는 정보를 알려 준다. 여기서 10분 쯤만 더 기다리면 좋은 볼거리가 있다고.

 

사실은 이 열차가 정차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한데, 맞은편에서 기차가 놀랍게도 석탄으로 움직이는 증기기관차라는 것이다.

원래는 전부 폐기하기로 했지만 한 대만을 관광용으로 개조해 이 부근을 어슬렁거리게 하고 있다고.

일본 본토쪽에는 아직 몇 대인가 운행하는 녀석이 있지만 홋카이도에서는 이곳의 증기기관차가 유일하다.

 

타이밍을 일부러 잡은 것도 아닌데 그 녀석을 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다.

물론 사카이 씨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냥 정차시간에 꾸벅꾸벅 졸다가 놓쳐버렸을 수도 있었을 듯.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다가 슬슬 육교 위로 올라간다. 아무래도 멀리서 오는 기차를 찍으려면 높은 데가 좋을 듯 하니.

낡은 합판을 이어붙여 만든 옛날 육교인데 또 친절하게 유리창은 전부 달아놓았다.

얼어붙어 있으면 열기가 힘들거라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별 무리없이 열려서 장비를 갖추고 기차가 오기를 기다린다.

 

다른 사람들은 정보를 잘 모르는 것인지, 그냥 많이 봐서 관심이 없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도 기차를 보러 나오지 않아서 사카이 씨와 둘이서만 육교 위에 올라와 있다. 왠지 이득 본 기분이기도 하다.

연습삼아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온 원맨 열차를 담아본다.

이런 필름틱한 색상 왜곡은 앞으로 달려 올 증기기관차에게 적용해야 하지만 이것도 나름.

 

 

 

열악한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든 단선 철도지만 덕분에 이런 즐거움이 생기기도 한다.

멀리서 다가오는 증기기관차의 첫 인상은 그다지 우람하거나 은하철도의 느낌을 주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굴뚝에서 연기가 퍽퍽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보니 역시 실제 경험해 본 적 없는 친근함을 느낀다.

 

기차 하면 칙칙폭폭이 뇌리에 박혀있기도 하고, 워낙 미디어에서 폼 잡을 때 잘 나오는 녀석이라

실물로 달리는 모습을 보니 뭐가 현실적인지 언뜻 구별이 잘 가지 않는 느낌도 든다.

어찌 보면 이제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나 더 어울릴 것 같기도 하고.

 

 

 

관광열차라서 좌석이 전부 양쪽 창문을 향해 있고 운행 속도가 느린 녀석인데다 요금도 결코 싼 편은 아니지만, 상당히 인기를 끌고 있는 듯 하다.

승강장에서는 이곳에서 탑승 후 다시 반대편으로 출발하기 위한 관광객들이 많이 서 있고

개중에는 열차 안 승객들에게 즐겁게 손을 흔드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인사는 역시 전동 기관차보다 이런 녀석이 더 어울리긴 한다.

 

창문으로 나 있는 의자에 앉아서 이런 설경을 즐기며 정성스럽게 만든 도시락을 먹는다거나.

실제로 이 기차 안에는 중간에 난로가 있어서 위에서 밤을 구워먹을수도 있다고 한다.

 

나쁘지 않은 관광이긴 한데 아직까지는 그런 것에 큰 매력을 느낄 만한 나이는 아닌가 싶다.

뭔가 우수에 젖어볼 만한 시간도 없이 사카이 씨와 함께 서둘러 내려간다.

이 기차가 홈에 도착하면 다시 우리가 타고 갈 기차가 출발하니까.

 

 

미련이 남은 것은 아니지만 볼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눈에 새겨놓는게 여러모로 이득인 시레토코의 모습.

슬슬 구름이 다시 라우스산을 가리기 시작해서, 내려가는 중간중간 몇 번이고 카메라를 꺼내 희미한 흔적을 담아본다.

한동안 보이지 않을 듯 했던 정상이 구름 사이로 살짝 솟아있는 모습 또한 온전한 모습과 다른 매력을 뽐낸다.

 

옷을 두 겹이나 입긴 했어도 속이 질퍽거릴 정도로 땀을 많이 흘린데다가

태양이 낮아짐과 더불어 체감 온도도 확연히 내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피로가 빠른 속도로 몰려온다.

오전 10시쯤 볼일을 봤던 방광은 거의 터질 듯 하고, 아침에 든든하게 차 있었던 위장은 빨리 뭐라도 집어넣어 달라고 아우성 중.

 

하지만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가능한 한 이 곳의 풍경을 많이 봐 두고 싶은 마음 뿐이다.

 

 

 

호수와는 달리 산을 따라 흘러내리는 조그만 하천은 여전히 얼지 않은 부분이 남아있다.

사람의 흔적으로 보이는 눈길이 남아있는 것으로 봐서 저 곳을 거니는 팀도 있었던 듯 하다.

용캐도 저곳까지 내려갔구나 싶었는데 그 순간 조금 힘을 써서 내려갈 만한 샛길의 흔적이 보이자

동행하던 일행분이 나보고 같이 내려가 보자고 한다. 강가에서 보는 라우스산 쪽의 풍경이 멋질 것 같다며.

 

걷는 스키를 타고 내려갈 만한 곳은 아니라 조금 망설이긴 했다. 통풍의 후유증으로 엄지발가락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한번 스키를 벗으면 다시 신기가 꽤나 괴로웠기 때문에. 하지만 역시 저 밑에서 나를 유혹하는 설경의 힘에는 이길 수 없다.

 

 

 

운도 좋게 고생해서 내려간 하천 아래에서는 또 다시 타이밍 좋게 라우스산이 구름 너머로 보인다.

그것도 정상 부분만 또렷하고 밑에 은은하게 구름이 깔린 모습은 나를 찍어달라고 어필하는 듯이 보이기까지 한다.

 

파도마저도 얼어붙어 모든 것이 정지된 것 처럼 조용하던 오호 주변과 달리 힘차게 흐르는 하천의 물소리와 가까워지니

왠지 라우스산 너머는 그림처럼 현실감이 사라지고 일행들은 그 그림 속에서 다시 현실 속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을 느낀다.

 

내가 고생해서 내려오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는지, 같이 내려가자고 권유한 일행 분이 미안하다며 사과를 한다.

배려심을 포함하는 표정 관리를 잘 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괜히 일행에게 그런 마음이 들게 한 듯.

아마 사하라 사막 때도 그런 습관 때문에 멤버들 괜히 속썩인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이렇게까지 혹독한 겨울이라도 얼지 않고 흐르는 물이 있기 때문에 이 곳의 생명들이 이어지는 듯 하다.

여름이라면 불규칙성을 한껏 빛내고 있을 바위조각들이 눈으로 부드럽게 뒤덮혀 버려 꽤나 귀여운 모습으로 변신중이다.

 

고생해서 이 쪽으로 먼저 내려왔던 이름모를 팀이 이해가 가는 풍경.

 

 

 

내려갈 때는 거의 눈에 의지하다시피 해서 깨닫지 못했지만

올라갈 때 아무래도 발이 너무 깊게 파인다 싶어 고생을 좀 했다.

 

이곳저곳을 밟다 보니 그 면모가 드러나는데, 사실 우리가 이동했던 곳은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곳이었고

운 좋게도 옆으로 누운 굵은 나무 밑둥을 밟았기 때문에 깊이가 얕다고 생각했던 것.

 

저 밑둥을 밟지 않으면 허벅지 위까지 쑥쑥 빠져버리기 때문에 올라갈 수가 없었다.

여름이라면 아마 허공에 발을 딛고 허우적대는 광경이었으리라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든다.

투시 능력이라도 있으면 눈 속에 파묻힌 지형을 한번 들여다 볼 수 있을텐데.

쌓인 눈만으로 없던 길이 만들어지는 모습은 위험하면서도 신비롭다.

 

 

 

차를 타고 장비를 벗으니 등산 후 느끼는 이질감이 살아난다.

걸어다닐때는 익숙하지만 자동차 안에 들어가는 순간 몸 속에 대기중이던 찝찝함이 폭발하는 기분.

빨리 돌아가서 옷을 던져 벗어버리고 샤워를 해야겠다는 욕망이 솟아난다.

 

하지만 가이드분은 또 이 장면을 놓치기가 힘들다며 이미 몇 대의 차량이 멈춰 있는 언덕쪽에 주차를 한다.

우토로 마을에서 오호 쪽으로 가는 길은 언덕이라도 수풀이 빡빡한 편이라

이렇게 주위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스팟은 딱 한군데밖에 없다.

 

자전거 여행때도 온갖 악을 쓰며 간신히 올라가다가 페달을 멈추고 사진을 찍을 수 밖에 없었던 그 곳이다.

산맥 끝자락과 바다 사이에 소심한 듯 이루어진 우토로의 모습을 굽이돌아 감상할 수 있는 멋진 장소.

막 해가 지려는 시간이라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삼각대에 거대한 카메라를 장착한 후 셔터를 누르고 있다.

저 멀리 바다 근처에는 유빙 체험을 즐기는 사람들이 꼼지락거리는 모습도 보인다.

 

 

 

자전거로 언덕을 넘으려 한다는 말을 듣고 씁쓸하게 웃어주던 호텔 직원분의 미소가 잊혀지지 않던 여름의 사진.

분명 같은 장소지만 식상해 질 일은 전혀 없는 풍경들이라 감회가 새롭다.

 

사람의 접근을 거부하는 듯한 강렬한 생명력을 자랑하던 여름의 시레토코가

바다마저 얼어붙어 조용히 숨 죽이고 있는 겨울의 모습으로 변하는 데 6개월이라는 찰나의 시간만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지식으로 이해해도 이렇게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그 신비로움을 체감하기가 힘들다.

 

 

 

사무실에 들려 옷을 돌려드리고 나서 다시 호텔 앞까지 배웅을 받는다.

여러가지로 폐를 많이 끼쳤다고 인사를 드리니 웃으면서 다음에도 꼭 다시 방문해 달라고 하신다.

 

도쿄에서 온 일행분은 오늘 야간버스로 삿포로로 돌아가신다며 굉장한 활동력을 자랑하신다.

자기는 매년 이곳을 찾기 때문에 다시 온다면 만날 기회가 있으리라 한다.

본인 역시 모자라는 건 돈과 시간이지, 기회만 된다면 당연히 몇 번이라도 오고 싶은 곳이니

살다 보면 다시 한번 만나서 술잔이나 기울일 수 있지 않으려나.

 

호텔에 들어서서 일단 객실까지 들어가지도 못하고 1층에서 화장실을 찾아 밀린 액체를 방출한다.

가벼운 런너스 하이 상태였는지, 오호 주변에서는 그야말로 활기에 넘쳐 날뛰었는데

호텔의 은은한 조명과 온기 속에 들어오니 온 몸이 벽에 짓눌리는 듯한 감각으로 돌아온다.

 

황홀했던 석식 뷔페를 즐기기 전에 일단 씻기는 씻어야 하는데

이게 또 호텔 옥상의 대형 온천이 그냥 후다닥 씻고 나오기에는 너무 훌륭해서

조금 이른 시간에 온천에서 몸을 녹이기엔 또 뭔가 아쉬운 느낌이 들어서 난감하다.

1층 로비에서 무료 비치된 주스를 마구마구 퍼 마시며 잠깐 생각하기를, 일단 객실에서 가볍게 샤워만 하고

식사를 즐긴 후 밤 9시쯤 온천에서 쌓인 피로를 시원하게 풀어내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샤워를 마친 후 몸을 식히려고 잠깐 침대에 엎드려 TV를 보는데도 등줄기가 내려앉는 듯 피로가 노곤히 몰려온다.

여기서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들어가면 분명 황홀하겠지만 그랬다가는 다음 날 아침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어제 챙기지 못한 카메라를 가지고 식당으로 향한다.

호텔이 크긴 하지만, 대체 어디에 이런 공간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식당의 모습에 매번 압도된다.

폐가 될까봐 좌석 쪽은 담지 않고 음식 코너만 담았는데, 좌석 규모는 이 곳의 5배가 넘는다. 동시 수용 인원이 500명은 넘을 듯.

창가 쪽 좌석은 오호츠크해가 시원하게 보이는 대형 유리라 벌써부터 인기가 높다.

경관이 좋은 곳은 혼자서 앉아 즐기기에 테이블이 커서, 미안한 마음에 그냥 2인용 조그만 식탁에 혼자 자리를 잡는다.

 

 

 

높은 천장쪽에서 은은하게 엔야의 음악이 깔리는 이 곳의 분위기는 말 그대로 신비롭다고 표현할 만하다.

얼어붙은 바다와 뒤덮힌 눈 속에서 코와 눈을 자극하는 요리를 엔야의 음색과 함께 즐기는 시간은

아무리 피곤한 하루였더라도 입가에 미소를 띄게 만들 수 밖에 없는 매력을 한껏 뽐내고 있다.

 

호텔에서 자부심을 가져도 될 정도로 시설, 규모, 서비스, 요리 수준이 모두 최상급이다.

식기도 메뉴별로 따로 담을 수 있도록 구분이 되어 있어 음식이 섞일 걱정도 없다.

해파리 냉채나 특정 해산물 요리등은 1인분으로 나눠져 따로 아담한 그릇에 담겨 있어 먹기도 편하다.

 

해산물의 품질은 말할 것도 없고, 바로바로 구워내는 스테이크 역시 육즙 날아가지 않게 잘 구워 놨다. 굵은 후추까지 잘 뿌려놨고.

음식의 질에 대해 만족은 못하지만 여러가지를 즐긴다는 점을 좋아해 뷔페를 가끔 찾는 본인이지만

퀄리티에 실망하지 않고 먹으려면 최소 기준이 강남의 보노보노 정도라, 에슐리나 빕스 같은 곳에서는 그냥 싼 맛에 먹는다는 느낌인데

이곳은 11만원짜리 호텔 투숙비에 이런 석식과 만만치 않은 조식이 모두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보노보노와 동급 이상이다.

 

 

 

투숙객이 아닌 사람들도 식사하러 많이 찾아오는 모양인데

전용 식권을 사용한 사람들 테이블을 전부 기록해 놓는 듯, 투숙객에게만 내어주는 신선한 회 몇조각을 따로 전해준다.

테이블이 2인용이라 그런지 두 접시를 내려놓길래 '전 혼자 왔습니다만' 하고 물어보니

점원 아가씨가 웃으면서 '두 접시는 못드시나요? 라고 대답한다. 흔쾌히 두 접시를 혼자서 즐겁게 비웠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뷔페에 놓인 회의 품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재료 자체가 조금 더 비싼 것인 듯.

혹시나 하고 담아 온 게살도 맛살이 아니라 진짜 게살을 찢어놓은 녀석이라, 평생 게살 금단증상에 시달리는 나를 위로해 준다.

그릇이 구역화되어 있어 얼핏 보면 양이 적을 것 같지만 이걸 두세 접시 먹으면 상당히 배가 부르다.

메뉴가 상당히 다양해서 한 종류씩만 먹더라도 충분히 세 접시 이상 나오기 때문에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즉선 라멘, 소바, 우동 등도 바로바로 만들어주기는 하는데, 국물을 많이 마시면 다른 걸 집어넣을 수 없기 때문에 조금씩만 맛본다.

내장을 깔끔하게 드러내서 구운 빙어를 씹으면 맥주 한잔이 생각난다고 하는 연상을 해 보는데

원래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몸이 많이 피곤한 상태라 술은 다음 여행에 무리를 주리라 생각해 패스하기로 한다.

 

원래 술은 유료지만 이 날은 또 투숙객에게 와인 한잔씩 돌리고 있었는데, 그것도 사양하며 음식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구색내기에 급급하는 뷔페점과는 달리 디저트를 위해 어느 정도 위장을 비워놓을 가치가 충분한 녀석들.

아이스크림은 말할것도 없고 각종 젤리와 계란 케이크 등등 디저트만으로도 한 끼 채울 수 있을만한 품질이다.

퐁듀는 블랙과 화이트 초콜릿이 따로 흐르고 있어서 골라먹는 재미도 있고.

 

투숙 이후 두 번째 석식이지만 이렇게 배가 불러서 더 못먹는 것을 아쉬워할 정도로 만족스러운 뷔페는 매우 오랜만이다.

지붕도 굉장히 높은데 거기서 울려퍼지는 엔야의 몽환적인 음악이 식사를 좀 더 우아하게 만들어 줘서 오히려 조금 위축되는 느낌도 든다.

 

일기를 쓰며 소화를 시키고, 좀 더 들어가겠다 싶으면 다시 음식을 담고 하면서 시레토코의 마지막 밤을 여한없이 즐긴다.

 

이후의 옥상 온천 역시 매우 인상깊은 체험이었는데, 사진을 찍을 수 없어서 아쉬울 정도로 멋진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내부는 일반적인 온천과 다를 바가 없지만 낮은 계단을 살짝 올라가면 무려 야외로 통하는 문이 존재한다.

밖으로 나가면 증기로 가득한 노천 온천이 눈보라 치는 시레토코의 밤과 어우러져 현실감을 잊게 한다.

영하 10도에 펑펑 퍼붓는 눈을 맞으며 어깨까지 온천에 담그고 있으면 저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심지어 호텔 측에서 서비스로 자연센터 쪽에 거대한 조명을 쏘아주기 때문에

어두워서 거의 보이지 않던 하늘에서 눈이 쏟아지는 모습을 조명 사이로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오호를 탐험할 때는 화창한 날씨로 라우스 정상까지 보여주고

밤에는 이렇게 옥상 노천 온천에서 쏟아지는 눈꽃을 감상하며 몸을 녹이는 경험을 선사해주니

이번 여행의 운을 이곳에서 다 써버리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매번 절묘한 타이밍에 걱정이 되기까지 한다.

 

목욕 후에는 또 시원한 체험이 기다린다. 호텔 지하 암반에서 솟아나오는 천연수를 자연 정수되는 도자기 속에 담아 놓았다.

이 물은 맛있는 물 명선에도 몇 번이나 선정된 경력이 있다고 화려하게 선전을 해 놔서 과연 어떨까 하고 마셔 보는데

한 잔 마시는 순간 바로 다음 잔을 도자기 입구쪽에 가져다 대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온천 후 마시는 물이 원래 맛있긴 하지만 이 녀석은 확실히 시중에 판매되는 물과 느낌이 다르다.

물의 맛은 직접 마셔보지 않는 한 설명하기가 어려워 난감해도, 호텔 홈페이지 소개에서도 한 장을 차지할 만큼 자신있게 내 놓을 만한 녀석이다.

 

미련이 남지 않을만큼 보고 먹고 마시고 하며 흡족하게 보낸 시레토코 여행의 마지막 날이라

역시 긴 시간과 경비를 들여 이곳 땅끝까지 찾아온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음미하며 푹신한 침대의 감촉을 즐긴다.

내일은 또 이동하는데 하루를 꼬박 소비해야 하지만, 오늘의 만족감만으로도 내일을 즐겁게 보내는게 부족함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바람이 별로 없는 편이지만 멀리 라우스 산맥 쪽은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눈을 머금어 무거운 구름이 힘겹게 산을 넘어가는 모습이, 사람에게는 더없이 신비로워 보인다.

수십 번 이곳을 찾은 일행들도 좀처럼 자리를 뜨지 않고 동영상과 사진을 남기며 서 있다.

가장 커다란 DSLR을 든 본인이 제일 먼저 가방에 카메라를 집어넣을 정도로.

 

일행분들이 나한테 운이 좋은 사람이라 함께 오게 되어 고맙다고 말을 한다.

하루만에 이 풍경을 보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 일종의 복을 몰고 왔다고 생각해 주는 듯.

당연히 이쪽이야말로 육중한 덩치에 허둥대는 본인을 잘 커버해 주는 것만으로 고마울 따름이지만.

 

 

 

사진 찍으며 이동하려뎐 일행 분이 미끄러져 넘어졌다. 호수 위라서 눈이 비교적 적게 쌓인 평탄한 곳이지만

오히려 그 평탄성 때문에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바닥은 얼음이라 스틱을 지지할 수 없고, 다리로 일어나려 해도 스키가 미끄러질 뿐.

 

본인 역시 오호 첫 탐험 때 신나게 넘어져서 미친듯이 악을 쓴 기억이 아직 생생히 남아있기 때문에 웃을 일은 아니다.

근처에 다가가서 손을 붙잡아 주니 어렵지 않게 일어날 수 있다. 세삼스럽게 협동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는 시간.

내가 넘어졌던 곳은 수풀이 우거진 곳이라 도와주러 올 수 없었긴 했지만.

 

 

반대로 이야기해서 너무나 운이 좋았기에 그 가치가 강렬하게 다가오지 않는 단점 역시 나타나는 듯 하다.

 

시레토코에 있어서만큼은 그렇게 비가 많이 온다는 여름에도 한 번만에 화창한 날씨를 경험했고

정상 보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겨울의 라우스산 모습도 이렇게 온전하게 담아내고 있으니

왠지 언제 찾아와도 이런 모습쯤은 쉽게 볼 수 있는 것 처럼 착각하기 딱 좋은 편이다.

 

하지만 언젠가 흐린 하늘에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는 라우스산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제서야 이 날의 어마어마한 행운을 어째서 좀 더 황홀해하지 않았을까 후회하게 되지도.

 

 

 

풍경에 매료되어 꽤나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가이드분이 시계를 들여다보며 지금 출발해야 해 지기전에 밑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하신다.

 

보통 등산이라면 발목의 부담은 둘째치고 내려갈 때 체력적인 면에서 좀 편하리라는 생각도 할 수 있겠지만

이곳의 하산길은 올라가며 봤듯이 자동차 통행을 위해 다져놓은 길이라 눈도 많이 치워놓은 상태에다 경사도 상당하다.

 

프로 수준의 스키어라면 정말로 스키를 타고 순식간에 내려갈 수도 있겠지만

나같은 사람이 미끄러져 내려가다간 커브에서 델마와 루이스를 흉내낼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천천히 걸어서 내려가야 한다.

 

 

 

겨울이지만 최소한 저 휴게소 사용만 가능하게 해 놨다면 트래킹이 월등히 쉬워졌으리라 생각한다.

하다못해 화장실이라도 쓸 수 있으면 하지만, 주위 상태를 보면 폐쇄하는게 너무나 당연한 처사이긴 하다.

애초에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최대한 통제를 하는 곳인데, 겨울에 따뜻한 난로를 피워 곰이나 여우를 불러들일수는 없으니까.

 

천상의 풍경처럼 새하얀 모습과는 달리 봉긋봉긋한 언덕도 바닥의 형태를 알 수 없어 항상 주의를 기울이며 걸어야 한다.

눈 때문에 별로 높아보이지 않는 조그만 다리도, 위에 쌓인 눈의 두께를 보면 섬뜩해 진다.

저기서 미끌어져 떨어졌다간 구조대를 부르지 않는 한 혼자 올라올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보인다.

스키를 신은 채로 40cm 가까이 푹푹 꺼지는 눈 속인데, 저기서 떨어지면 아마 1m 넘게 눈 속에 파묻힐 테니까.

 

 

 

위험할수록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자연의 매력인지 사람의 오만인지.

 

가이드분이 조심스럽게 바닥을 확인하며 만드는 길 위를 힘겹게 따라가는 상황에서도

주위를 둘러싼 모든 풍경이 마음을 차분하게 흥분시키고 있다. 내가 지금 이런 곳을 걷고 있다는 벅찬 만족감이.

 

사하라 사막 때도 그랬듯이,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인과의 흐름으로 만들어 진 지형 지물 속에서

사람이 혼자 신나고 감동받아 날뛰는 모습은 뭔가 실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지구가 생명체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저 개미같은 것들이 혼자서 꼬물락 거리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이해가 될려나.

하지만 어찌보면 극히 자연스러운 이런 풍경 하나하나에 감동을 받는 사람이기 때문에 지루해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눈길을 걷는 매 시간마다 느끼고 있지만 어쩌면 이렇게도 좋은 타이밍에 시레토코를 찾을 수 있었는지 신기할 뿐이다.

라우스산을 포함한 시레토코의 척추가 되는 산맥 전부가 이렇게 또렷히 보이는 순간을 두 눈으로 감상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까.

 

여름엔 조심한다고 해도 사람 등쌀에 시달리는 곳인데, 그 흔적이 사라지고 여우 발자국만이 남아있는 설원은 좀 더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는 느낌이다.

 

이런 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으면 사하라를 함께 달렸던 사람들이 문득 생각난다.

적당히 힘든 트래킹이라 아무하고나 함께 가자고 권할 수는 없는 곳이지만, 그 사람들이라면 분명 이 곳을 좋아하리라는 확신이 생긴다.

 

 

 

한창 밝은 시간이지만 특히 산 위는 해가 빨리 지기 때문에 결코 이른 시간이 아니다.

잠깐 스키를 벗고 휴식을 취하면서 제설차가 세워놓은 눈벽 너머를 쳐다본다.

원래는 저 평원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가이드분이 설명해 주신다.

 

자연유산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이 곳 아이들이 산 아래 라우스 학교에 통학하기도 했다고.

겨울에는 아무래도 살아갈 방법이 전혀 없어서 대부분 마을 쪽으로 내려와서 지냈다고 한다.

출입이 통제되던 때, 이 곳 사람들은 집을 전혀 허물지 않고 그대로 떠났지만

시레토코의 자연은 손쉽게 그들의 흔적은 지워버리고 여전히 태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겨울에도 저 라우스산을 등반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저기에 필적할만한 난이도를 가진 산이 무엇일까 궁금하다.

바다와 접한 해발 1600m 짜리 산이라 적설량이 워낙 많은데다가, 주위에 활화산이 있는 만큼 정상쪽이 매우 가파른 형태라서

히말라야 등반하려는 팀들이 연습하는데 적합할 정도라고 하니 과연 어떨까 싶다.

 

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주위에 어떤 피난처나 산장도 없어서, 겨울 등정은 당일치기로 할 수 밖에 없다는 점도 굉장한 난점.

그 위용만큼이나 사람을 쉽게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본인이 육체파에다가 등산을 즐기는 활동적인 성격이라면 아마 도전 정신이 불끈불끈 솟아오를 법 한데.

 

 

 

묵묵히 길을 걸어 내려가면서도 다들 몇 번씩이나 뒤를 돌아보며

구름이 걷혀있다면 여지없이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앞으로 다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라우스산의 모습을 담는다.

탁 트인 설원 아래서나, 건장한 침염수 사이에서나 저 산의 정상은 여전히 놓치기 아까운 소중한 풍경이다.

 

쉽게쉽게 돌아갈 줄 알았던 하산길은 이렇듯 화창한 날씨가 오히려 발목을 잡아 사람을 쉽사리 떠나보내지 않는다.

이 곳을 오면서 나도 미러리스로 한 번 가봐야 하나 생각이 들 정도로 DSLR 의 덩치에 힘들었지만

이런 풍경이 눈 앞에 들어오면 일단 '그래도 좋은 카메라라 모자란 실력을 커버해 준다'는 생각에 뿌듯한 기분도 든다.

 

자전거 여행 때도 편의를 위해 컴팩트 카메라를 들고 갔다면, 돌아와서 평생 결과물에 아쉬워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묵묵히 내려가다가 수풀 사이에서 뭔가 이상한 모습이 보여서 일행을 세워 관찰해 본다.

꽤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 인공물이다.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아서 사진을 촬영한 후 고화소를 이용한 확대로 모습을 보여주니 가이드분이 알아차린다.

예전 사람이 살던 때 지어졌던 조그마한 공장의 굴뚝이라고. 가내수공업 정도의 작은 생필품 등을 만는 곳이었는데

저것이 굴뚝 윗부분이라고 하면 지금 보는 광경이 참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집 전체가 전부 눈 속에 파묻혀 있다는 뜻이니.

 

가이드분이 용캐 나무 사이에서 저걸 찾아냈다고 웃는다. 자주 오지 못하는 몸이다 보니 신경을 좀 곤두세워서 주위를 살펴보는가 보다.

 

 

 

가이드분이 웃으면서 말을 꺼낸다. 사실 내가 걷는 스키를 타고 트래킹하는 거 처음엔 좀 걱정 되었다고.

하지만 생각보다는 훨씬 빨리 적응을 해서 스노우 슈즈를 건네주지 않아도 괜찮았다고 하신다.

 

가이드분은 스노우 슈즈가 그렇게까지 편한 건 아니고, 나처럼 무게가 나가는 사람은 어차피 푹푹 가라앉기 때문에 별 효과가 없을거라 하시지만

그것보다도 일단 스노우 슈즈는 일종의 이단처럼 생각을 하시는 듯 하다. 이곳은 걷는 스키로 걸어야 제맛이라는 경험담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본인은 단시 스노우 슈즈도 신어본 적이 없어서 그냥 궁금할 뿐인데, 아무래도 걷는 스키로 이곳을 정복한 것에 만족감을 느끼면 되는 것인가 보다.

일단 처음 신은 것이 걷는 스키다 보니 중간에 힘들어서 갈아신었다고 하면 왠지 시레토코에 패배감을 느끼게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한창 내려가는데 젊은 남녀 커플이 밑에서 올라오고 있다. 가이드분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일단 가볍게 인사만 하고 지나쳤는데, 가이드분은 걱정이 되는지 자꾸 뒤를 쳐다본다.

사실 이곳의 겨울 트래킹은 허가받은 날짜 안에서라면 가이드 없이도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앞서 경험했듯 숙련자가 아니고서는 루트 잡기도 힘들고, 눈 밑의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에 권장하지는 않는다.

 

이 곳 가이드끼리는 모두 안면식이 있기 때문에 가이드가 함께 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방금 올라간 두 사람이 숙련자라고 해도 해가 지기 전까지 2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대체 왜 지금 이시간에 올라가고 있는지 다들 의아한 표정이다.

 

어떤 숙련자라도 해가 지고 나서 오호를 돌아다니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 가이드분은 아무래도 계속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꼼꼼한 성격상 하산 후 오늘 올라간 사람 명단을 조사해 보실 듯 한데, 별 일 없기를 기원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하산 때문에 긴장이 풀린 탓인지 조금씩 누적된 피로가 몸을 무겁게 하고 있지만 그럴수록 천천히 조심해가며 발걸음을 옮긴다. 

 

홋카이도에서 날씨가 휙휙 변하는 건 나름 익숙해졌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시레토코의 대자연 속에서 경험하는 격변은 또 각별하다.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아 뉴스레터(?)의 장면처럼 아름답게 내려앉는 눈꽃이 온 하늘을 뒤덮어 버리는 풍경은 참으로 절경이다.

아마 트래킹 초반부터 이런 눈이 팍팍 내렸다면 기가 팍 꺾였을 수도 있겠지만

푸른 하늘을 마음껏 감상하고 마음의 여유를 가질 만한 즈음에서부터 이렇게 내려주니 오히려 반가운 기분도 든다.

 

든든한 가이드분과 몇 년동안 이곳을 찾아 오는 단골 일행분 덕분에 두려움도 없이 묵묵히 먼 곳을 바라보고만 있다.

다들 비슷한 기분인 듯 대화도 없이 한동안 역동성과 고요함이 묘한 대비를 이루는 시간을 조용히 즐긴다.

 

 

 

해가 워낙 빨리 지기 때문에 이제부터 슬슬 다시 둘러보기 시작해야 한다는 가이드분의 말에 따라 다시 장비를 챙긴다.

물이 좀 부족하긴 하지만 어차피 남은 건 오호 중 가장 크고 휴게소에서 가장 가까운 첫 번째 호수만 돌아보면 되니까.

 

장비를 챙기고 막 떠나려는데 세상을 연기처럼 뒤덮던 그 눈발은 어디가고 순식간에 다시 화창한 하늘이 펼쳐진다.

홋카이도에 도착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경험했던 일이지만 정말 놀라지 않을 틈을 주지 않는다.

 

본인은 그냥 날이 맑아졌다는 정도였지만 가이드분은 조금 전보다 더 흥미진진한 표정이다.

구름이 점점 옅어지는 것을 보니 운이 좋으면 라우스 산봉우리가 보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겨났기 때문.

겨울에는 맑은 날 라우스 산의 꼭대기를 보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데, 이번에 보게 된다면 첫 참가인 나에게는 굉장한 행운이라고 한다.

 

 

 

첫 번째 호수로 향하는 길은 겉보기에도 쉽지 않다. 생각보다 가파른 경사에다가 수풀이 빡빡해서 스키를 게걸음으로 옮길 공간도 부족하다.

가이드분은 정해진 코스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상황에 맞게 루트를 만들어 가기 때문에 한동안 고민을 하신다.

결국 약간 두르더라도 덜 위험한 곳으로 가기로 한다. 우리와 엇갈린 또 한 팀은 걷는 스키가 아니라 스노우 슈즈를 신고 있기 때문에 경사 높은 곳으로 용감하게 전진중.

 

스키라는 게 그냥 슥슥 밀기만 하면 힘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평지에서 스무스한 이동을 위해서는 평소 걷는 것 처럼 발을 지면 위로 띄울 수 없는 점이 오히려 어색하게 작용해서

허벅지 뒤쪽에 굉장한 힘이 가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전신운동이라 해도 될 만큼 체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키를 신지 않고 일반적인 신발로 걸어다니는게 편한가 하면 그건 절대로 아니다.

애초에 스키라는 게 설원을 편리하게 이동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니까.

걷는 스키는 일반적인 스키보다 폭이 넓고 길이가 짧은 편이라 눈 위를 걸어도 몸이 덜 빠지는 장점이 있다.

그냥 신발로 이런 곳을 걸어다니면 기본적으로 무릎 위까지는 푹푹 빠지게 되니, 그것이 얼마나 힘들지는 설명 할 필요가 없을 듯.

문제는 본인 체중이 너무 강렬해서 앞의 두 분이 발목 정도까지 빠지며 스키로 밀고 나간다고 하면

나는 거의 정강이까지 잠겨서 이동하는 느낌이라 상대적으로 체력 소모가 심한 편. 그러니까 자업자득이라는 말이다.

 

 

 

고생 좀 해서 거친 수풀을 빠져나오니 드디어 첫 번째 호수에 도착한다. 한 쪽이 바다와 인접해 있고 휴게소에서 가장 가까우며 크기도 가장 큰 호수.

여름에는 불곰 출몰로 인해 첫 번째 호수만 둘러볼 수 있었기에, 이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과거와의 접점이 느껴지는 듯 하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나무로 된 고가도로 위에서만 걸어다니며 사진을 찍던 본인이, 그 울창하고 신비로운 매력을 내뿜던 호수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높이 3~4미터의 목책로 주변에는 전기 펜스가 설치되어 있어 불곰이 접금하지 못한다. 그 위에서 바라보는 시레토코의 풍경에 완전히 매료되어 다시 이 곳을 찾게 되었다.

 

 

 

여름 목책로 위에서 찍었던 사진. 1년 간의 자전거 여행 중에서도 단연 시선을 빼앗기는 장관 중의 장관이었다.

시레토코에서 가장 높은 라우스 산과, 드레스처럼 구름을 두르고 있는 산맥과 온갖 생명력으로 흘러넘치는 오호의 모습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이란 게 이렇게도 멋진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저절로 들게 만들어 주곤 했다.

 

한 시간에 한두 번밖에 버스가 오지 않는데다가 마지막 입장 시간도 매우 이른 편이라

관광 버스나 렌트카를 이용하지 않으면 느긋하게 즐기기 쉽지 않은 곳이어서 그 짧은 시간이 그토록 아쉬울 수가 없었다.

 

 

 

지금은 당연히 저 목책로 위에도 눈이 쌓여있어서 출입은 금지되어 있다.

여름의 목책로 높이와 현재를 비교해 보면 눈이 어느 정도 쌓여있는지 짐작이 갈 듯.

그 웅장하던 생명력이 모두 눈속에 갖혀버린 채 다시 봄을 기다리는 모습은 신비롭기 그지없다.

 

이 정도 수고를 들이지 않으면 이런 풍경을 감상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또 문명인의 생활이란 것이고.

호수를 가로질러 나 있는 북방여우의 가지런한 발자국을 보니

그 녀석도 얼어붙은 호수를 지나가며 화려했던 여름의 회상에 젖어보기나 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동행 분은 도쿄에서 살고 있다고 하는데, 매년 삿포로까지 7시간 가까이 기차를 타고 홋카이도로 온 다음

바로 삿포로에서 버스를 타고 이곳까지 오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고 한다.

 

이 곳을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라면 매우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나 같은 사람이라면 아마 도쿄에서 이곳으로 이사올 계획을 짜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한국이나 일본이나 아름다운 산과 들은 조금만 찾아보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지만

여름엔 불곰이 거닐고 겨울엔 얼어붙은 호수를 거닐 수 있는, 사람이 살지 않는 바다와 근접한 산맥 끝자락 풍경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겨울엔 그렇게도 보기가 힘들다던 라우스산의 정상이 아주 조금씩이지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아직 주위엔 구름이 많아서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지만 이 정도 모습만이라도 일행들은 열심히 사진 찍기 바쁘다.

한국에 비해 거칠고 가파른 일본의 산은 산맥의 아름다운 곡선보다 강한 힘이 느껴지는 굵은 선이 매력으로 다가온다.

 

눈이 얼마나 많이 쌓였는지 상층부는 수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설산의 위용을 자랑하는데

사실 라우스산은 출입 통제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도 등반이 가능하다. 경험을 쌓은 전문가가 아니면 매우 위험하긴 하지만.

 

 

여름의 그 압도적인 생명력을 모두 평탄한 눈밭으로 덮어버리는 겨울의 모습은

이 곳에 한 번 이상은 와서 원래의 모습을 느껴본 뒤에야 비로소 그 매력이 배가 되는 느낌을 준다.

 

불규칙적인 지형 속에 사냥꾼처럼 곳곳에 숨어 있는 습지와 그 주변을 가득 메운 수풀을 모두 동등하게 만들어 버리는 겨울 시레토코는

거대한 힘으로 밀어버린 듯 깨끗한 설원 속에 가지런한 여우의 흔적만을 남긴 체 느릿한 숨을 내쉬고 있다.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말을 워낙 많이 듣고 자라는 곳에서 살다 보니 그 개념에 대해 꽤나 흐리멍덩해 진 상태였는데

이 모습을 보면 그 사계절이란 게 축복은 축복이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바다와 마주닿는 쪽의 산들은 서서히 깎아지른 듯한 정상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덩달아 일행들의 셔터도 바빠지고 있다.

꼭 가장 높은 산만이 인상적이란 개념은 없고, 맨 끝의 산부터 라우스산까지 형제처럼 보이는 봉우리들이 위용을 뽐내는 모습은

어떤 강력한 인연으로 맺어진 형제자매가 어깨를 맞대고 서 있는 듯한 결합감을 느끼게 한다.

 

카메라를 꺼내고 넣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본인은 이제까지 조금씩 부담감을 안고 있었지만

정상이 드러나 갈수록 쉴새없이 사진을 찍어대는 다른 일행들 덕분에 개운해 진 기분으로 이곳저곳을 마구 찍어댄다.

 

 

 

분명 같은 모양이지만 여름과 겨울의 모습이 주는 느낌은 꽤나 다르다.

여름의 산이 바다에 빨려들어가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면 겨울의 산은 가만히 바다 쪽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

겨울의 산은 단색으로 통일되는 동시에 강한 햇빛에 의해 명암이 강해져 좀 더 우락부락해 보이는데

그럼에도 여름보다 조금 더 차분해 진 듯 하다. 아마 산이 변한 게 아니라 내가 그렇게 보이는 것이겠지만.

 

 

 

구름이 이동할 때마다 일행들의 일사불란하던 움직임은 무질서하게 변해간다.

걸어가면서도 몇 번씩 고개를 돌려 구름이 어디까지 가고 있는가를 확인하기도 하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라우스산의 정상이 보인다 싶으면 카메라를 꺼내들고, 그러면 나머지 일행들도 자연스럽게 멈춰서서 몸을 돌리게 된다.

 

눈 오는 설산의 모습도 물론 좋지만, 이런 하늘에서는 산의 혈관과 근육이 더욱 대비를 드러내기 때문에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이 바빠진다.

 

 

 

목책로 위에서 보던 풍경 속에 들어가 반대로 그 목책로를 풍경삼아 감상하는 경험은 참으로 신선하다.

사실 겨울 홋카이도 여행 계획은 삿포로 눈축제와 Y양을 만나기 위해 시작된 것이라

비행기를 타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시레토코에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여름에 저 목책로 위에서 오호의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저런 데 잘못 들어갔다간 습지에 가라앉아 버리는 거 아닌가 겁을 낼 정도였는데

겨울이라고는 하지만 그 위를 이렇게 걸어다닐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현실감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네이처 가이드분도 매년 도쿄에서 먼 길을 찾아오는 일행 분도 겨울의 시레토코를 잊을 수가 없는 것인가 보다.

 

 

 

현재 걷고 있는 수풀 언저리가 바로 여름 목책로 위에서 감탄하며 바라보던 그 첫 번째 호수의 저 멀리 가장자리라는 사실.

돌아와 사진을 정리하면서도 저 호수 위를 걷고 있었다는 실감을 느끼기 힘든 것도 여전히 납득이 간다.

 

시간이라는 요소 외에 아무것도 첨가되지 않은 동일한 장소에서 느끼는 낯설음은, 여러 곳을 이동하며 즐기는 여행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그래서 갔던 곳을 가고 또 가는 여행이라도 전혀 아쉽거나 지겹지 않은 법이기도 하고.

 

 

 

가이드분은 이미 이곳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시레토코의 모습이 무엇인지도 잘 파악하고 있다.

이제껏 실컷 출입금지 지역을 누비고 다니긴 했지만, 여름의 한계였던 목책로 끝을 넘어가 바다쪽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에서

겨울의 우리들은 저 한계마저 넘어서 직접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새로운 즐거움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사실 목책로가 상당히 높아서 저 위에서도 바다가 보이긴 하지만

그림 한 점처럼 구경만 하던 그 장소에 두 발로 걸어가 볼 수 있다는 체험 하나만으로도 사람은 충분히 흥분할 수 있다.

 

 

 

목책로 위에서도 언덕에 가려 보이지 않는 숨겨진 부분을 볼 수 있는 곳에 도착한다.

먼저 온 팀은 저 밑까지 내려간 듯 흔적이 보이는데, 가이드분 말로는 저기까지 갈 필요는 별로 없을 듯 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내려갔다가 고생 좀 하겠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기도 하고.

 

목책로 위에서 봤을 때는 언덕 뒤가 바로 바다인 줄 알았는데, 옆으로 돌아와 보니 뒤쪽에도 어느 정도 공간이 있다.

저 부분의 여름 모습만큼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지 않는 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진다.

마치 한쪽 면만 보이는 달의 모습을 보는 듯한 기분.

 

 

 

호텔 창문 안에서 바라보던 것과 달리 이런 곳에서 유빙을 보면 정말로 그 거대한 바다 위에 얼음이 떠다니는구나 싶다.

바닷물이 얼은 것이니 유빙도 짠 맛이 날까 궁금했지만 경치 구경하느라 금새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8개월이나 지난 이제서야 다시 생각이 난다.

 

여름에 배를 타고 이 쪽을 통과해 가다보면 가끔 해안가 부근에서 장난치고 있는 불곰들을 볼 수도 있다고 한다.

자전거 여행 때는 당연히 그 비싼 배를 탈 생각을 해 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다음에 일반적인 여행을 위해 찾아올 때는 반드시 멀미약을 챙길 생각을 하고 있다.

사방팔방이 탁 트인 곳이지만 어쩐지 다소곳이 숨겨져 있던 공간을 발견한 듯한 즐거움을 뒤로 하고 스키의 방향을 돌린다.

 

 

 

사진이란 녀석이 가지는 장점은, 특정 시공간에 대한 떨어져가는 기억력을 복구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미 4년이나 지난 추억이라 세세한 지형까지는 생각이 나지 않았었는데

목책로 뒤에 봉긋 솟은 저 언덕 옆을 지나면서 담은 사진과 비교해 보니 비로소 다른 시간대의 두 풍경이 시간을 초월한 하나의 관념으로 정립되는 기분이다.

 

이제 여름과 겨울의 모습을 모두 마음 속에 담을 수 있었으니

여름에 찾아가면 설원이 생각나고, 겨울에 찾아가면 푸르디 푸른 습지가 생각나는 즐거운 선순환만 남게 되었다.

 

 

스키를 신고 있기는 하지만 프로급 선수가 아니고는 어차피 하산할 때도 천천히 걸어서 조심소심 내려가야 하니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지금도 결코 이른 시간은 아니다. 조금이라도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무서운 추위가 엄습하니까.

 

아슬아슬하게 사람 애간장을 태우던 구름이 선심을 썼던 것인지, 돌아가기 시작한 우리들에게 살포시 커튼을 걷듯이 물러나 준다.

겨울 시레토코 여행 첫날이자 마지막 날에 깨끗한 하늘 아래서 라우스산의 정상을 직접 목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다른 두 명도 당연히 즐겁겠지만 본인은 이 모습을 보면서 그 자전거 여행때의 가슴 묵직했던 감동이 재현되는 기분에 마음이 벅차오른다.

 

 

 

길지 않은 사진생활이지만 이제껏 찍은 사진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한 장을 바로 이곳에서 담았다.

시레토코란 이런 곳이구나 하는 생각에 셔터를 누른 후 십여 분간 자리를 뜨지 않고 가만히 시선을 고정시켰던 기억이 난다.

 

안으로 들어가면 어디가 땅이고 어디가 습지인지 알 수 없을 듯한 두려움을 간직한 호수 주변의 경이로운 모습과

바다와 접한 그 다섯 개의 호수를 굽어보는 웅장한 라우스산의 풍경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자연이란 어떤 것인가 각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지금 그 출입 불가능했던 두려움 위를 걸어가는 기분은 언어로 설명하기가 참 난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