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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2.10.16  산인 여행 - 유시엔 1/3 18
  4. 2012.10.15  산인 여행 - 잡화점의 별 22
  5. 2012.10.11  산인 여행 - 비 그리고 비 18
  6. 2012.10.09  산인 여행 - ANTWORKS GALLERY 17

 

그리 길지 않은 코스길이지만 두 번째의 휴게소에 도착했다. 날씨가 더운 날엔 이렇게 한번씩 쉬어가는게 꽤나 도움이 된다.

 

센스있게도 휴게소 앞에는 이런 모래정원이 아담하게 펼쳐져 있다.

이는 일본의 정원, 사찰 등에서 자주 보이는 방식인데, 일본 근대 최고의 작가중 한명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가

그의 에세이에서 언급했듯이, 서양의 정원이 레크리에이션과 공간활용에 중점을 둔다면 일본의 정원은 그림을 감상하듯

미적 공간으로서의 기능에 충실하다는 특징이 있다.

 

이곳 모래 정원도 자연의 모습을 재현한 것인데, 띄엄띄엄 놓여있는 돌은 우리가 살고있는 육지를 의미하고

모래는 바다, 가지런한 줄무늬는 파도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

 

엄격하기로 유명한 일본의 차도(茶道)와 함께, 정원의 구조와 그 의미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가도

옛날 일본의 잘나가는 분들이 가져야 했던 소양과 덕목 중 하나였다고 한다. 좀 사치스러운 기분이 들긴 하지만.

 

 

 

맞은편에는 그늘이 시원한 휴게소가 자리잡고 있다. 바람도 잘 통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땀을 식히기에는 그만이다.

카메라 장비를 들쳐매고 이리저리 렌즈 바꿔가면서 곳곳마다 발걸음을 멈추는 이쪽으로서는 오늘의 날씨가 좀 부담스럽지만

별 힘들이지 않고 후다닥 감상중인 단체 관광객들은 여기서 별로 쉴 생각이 없는 듯 하다.

그냥 모래 정원 앞에서 기념사진 찍는데 더욱 정성을 쏟는 듯.

 

1년동안 자전거여행을 다니면서도 본인 얼굴이 찍힌, 소위 인증사진이란 건 두세 장밖에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사진에서 자기 모습 남기는 행위에 어떤 만족감이 존재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은 전부 내 시선이 머무는 곳의 흔적이고, 거울이라도 들고 다니지 않는 한 자기 모습을 볼 수는 없으니까.

 

반대로 여행중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찍은 본인 사진은 아마 그사람들 하드디스크에 잘 저장되어 있을 듯 하다.

나도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의 모습은 꽤나 많이 담은 편이니까.

 

 

 

날씨와 거리상의 문제로 결국 찾아가보지 못했던 아다치 미술관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려고

그 유명하다는 '미술관 창문을 통해 보이는 정원 모습'을 한번 흉내내 본다.

아무래도 이렇게 넓직넓직한 창문을 만들어 놓은 것 역시 아다치 미술관에 대한 오마쥬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미술관에 전시된 미술품보다, 창문너머로 보이는 정원의 모습이 더욱 유명한 아다치 미술관은

조금만 검색해보면 그 모습을 찾을 수 있으니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하다.

실제로 이곳 산인지역에 여행을 온다고 해도, 워낙 교통편이 드물고 거리도 꽤 떨어진 개인 미술관이라서

이것저것 둘러보다보면 놓치는 경우가 많은 곳이다. 그곳의 절경이라 불리는 모습을 보지 못해서 아쉽긴 하지만

휴게소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유시엔의 모습이 충분히 그 마음을 보듬어 주는 듯 하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정말 사계절 모두 한번씩 찾아와서 각각의 매력을 담아내고픈 생각도 들고.

 

 

 

아다치 미술관의 정원이 유명해 진건, 창틀이 마치 미술품 액자와도 같은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

그래서 대부분의 사진은 정방향에서 액자처럼 찍힌 모습뿐인데, 유시엔에서까지 그런 흉내를 내려니

살짝 아쉬운 느낌도 들어서 이렇게 아무렇게나 각도를 틀어 담아보기도 한다.

 

신나게 내린 소나기 덕분에 햇살도 쨍쩅하고, 물을 실컷 머금은 조경수들도 생동감이 넘친다.

3일 내내 비가 와서 조금은 우울해져 있었는데, 귀국날 그 소나기 덕분에 멋진 풍경을 구경할 수 있었으니

결국 전체적으로 보면 항상 플러스 마이너스가 상쇄되는 느낌. 어떤 여행이라도 끝나고 나면 그 총합은 제로가 되는 듯 하다.

 

 

 

땀도 식혔고 해서 슬슬 장비 점검해 마지막 코스를 둘러보기로 한다.

그 전에 외로운 섬이 만들어내는 파장을 한장 더 담아보고.

 

마치 우주 어딘가에 살아숨쉬고 있을 다른 생명체에게 날 좀 봐달라고 외롭게 소리치는 지구의 전파를 보는 듯 하다.

 

 

 

유시엔 산책도 마무리단계에 들어간다. 일반적인 코스와는 달리 두갈래로 나눠진 길이 있어서 안쪽으로 들어가 봤더니

언뜻 봐서는 정체를 알기 어려운 불상의 모습이 나타난다. 내 키보다 크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아담해 보이는 인상이고

특별한 미술적 가치를 가진 모습이라고 보기는 힘든 느낌이라서 의아스럽다.

 

일본식 정원 안에 불상이 안치되어 있는 모습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이 정원을 만든 사람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츠에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적당히 안내책자를 뒤적거리다가 얼핏 읽은 바로는,

이 유시엔(由志園)은 예전부터 전해지던 정원이 아니라고 했으니 아마도 근대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정원일 듯 하다.

중앙정부나 마츠에 시에서 만든것 같지는 않다. 이곳 다이콘지마까지 버스를 타고 오면서 풍경을 훑어보니, 정부나 시 차원의 계획 관광지로서

조성된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 그렇다면 아마도 이 지역 유지가 개인적으로 만든 정원일테니, 그 사람과 관계된 불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도달한다.

 

완성도와는 별개로 정원의 크기가 그렇게 크지 않은것 역시 그런 생각을 뒷받침해 준다. 정부나 마츠에 시에서 만들었다고 보기엔 좀 아담하다.

 

 

 

출발지였던 건물 앞으로 돌아왔다. 그리 길지 않은 거리였지만 경치 감상하랴 카메라 셔터 누르랴 해서 시간은 예상보다 많이 걸린 편.

그래도 워낙 여유있게 마츠에 시를 출발했기 때문에 승선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넘친다. 그쪽에도 유명한 볼거리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 너무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되긴 하지만.

 

출발할때는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안내인의 지도를 받아 바로 정원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알 수 없었지만

건물 안 테이블이 주르륵 늘어서 있는걸로 봐서 찻집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듯 하다.

시원한 건물 안에서 정원의 경치를 바라보며 차 한잔하는것도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옆구리에 같이 온 사람도 없고, 일기장마저 잊어버리고 온 여행이라서 혼자 차 마시는게 왠지 어색하다.

경치 감상만으로 반찬(?)을 대신할 수는 있지만, 그건 왠지 본인의 미적 우아함보다 더 잘난체 하는 행동이라는 느낌이 든다.

 

 

 

산책을 마무리하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뭔가 놓친건 없나 싶어서 주변을 더 살펴보게 된다.

바위 위에 끼는 이끼와 비옥한 토양 위에 끼는 이끼, 나무줄기에 끼는 이끼가 전부 다른 종류라는 것도

다시 한번 상기시키기 위해 이렇게 담아보기도 하고. 이 정도 기후에서 바위 위에 이끼가 낀다는건 꽤나 낮은 확률이다.

 

 

 

위의 바위와는 전혀 다른, 흐르는 개울가 옆의 그늘진 곳에서는 충분히 이끼가 번성할만한 여건이 조성된다.

인위적으로 조성된 곳이기는 하지만, 실제 개울가에서 저렇게 소복히 깔린 이끼를 보게 된다면

밟는게 아까워서 개울가에 다가가기도 힘들 듯한 느낌. 감상에 목적을 두는 일본의 회유식 정원에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물론 경치 감상하는 정원도 좋긴 한데, 잔디밭에서 개와 뛰어놀고 싶은 나의 희망상, 이런 정원은 입장료 내고 구경하는 정도로 만족할 수 밖에.

 

 

 

삼각대와 ND 필터가 있었다면 조리개를 F22 까지 조여놓고 좀 더 부드러운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던 곳.

한국인 단체 관광객도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렸고, 몇몇 개인관광객밖에 돌아다니지 않은 상황이라서

크게 방해는 되지 않겠지만, 일단 이런 좁은 정원에서 삼각대를 설치하는건 매너 위반이긴 하다.

 

카메라에 관심을 갖고 있으면 언제든 들려오는, 몰지각한 인간들의 행태에 대해 마음껏 비난하고 있는 입장이니

멋진 사진을 담을 수 있을것 같아도, 그것보다는 주위에 폐가 되지 않는지를 먼저 고려하는게 언행불일치를 막기 위한 수단일 터.

주인장한테 직접 가서 부탁하면 못 찍을만한 상황도 아니지만, 다른걸 떠나서 지금은 삼각대와 ND 필터가 없다. 그냥 그렇다고.

 

 

 

산책을 마치고 처음 출발한 건물로 돌아오자 가슴 시원한 모습이 기다리고 있다.

더운데 수고하셨다고 준비해 놓은, 얼음에 파묻힌 물수건을 보자, 이 정원에서 느꼈던 관리인들의 손길이 과연 착각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판기처럼 기계 한대 가져다놓고 척척 얼음 물수건이 나오게 한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손님에 대한 배려이겠지만

대나무 광주리에 아날로그식으로 놓여진 얼음에서는, 직접 손발로 뛰면서 손님을 맞이한다는 노력이 스며들어 있다.

주변과의 조화를 중시하는 정원답게, 얼음 위에 살짝 놓여진 단풍잎 두 장이 더욱 운치를 풍긴다.

 

시원한 물수건이 목덜미를 적시니 정원 산책의 만족도가 더욱 높아지는 듯 하다. 이런 배려라면 점수를 더 줘도 괜찮겠지.

이 앞에는 정원 운영에 도움이 되는 여러가지 기념품들이 포진하고 있을테니, 위치상으로도 절묘한 배치라고 생각한다.

 

 

 

자연의 정취가 가득한 정원에서, 에어콘이 완비된 현대식 건물로 들어갈 때의 위화감을 줄이려는 의도였을까.

자동문 앞에 과하지 않게 홀로 서 있는 꽃꽃이 모습도 과하지 않게 자기주장을 하는 중이다.

회유식 정원 관리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소소한 분위기 만들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이제껏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런 물수건이나 꽃꽃이에 눈길을 주고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거뜬히 카메라 셔터를 누를 가치가 있었다. 정원 산책할때만큼이나 나를 기분좋게 해 줬으니까.

 

 

 

건물 내부는 상당히 넓고, 정원을 향해 나있는 창문이 내 키의 세 배는 될 정도로 시원하게 뚫려있어서

어찌보면 정원쪽보다 더 밀도가 낮아서 널널하다는 인상이다.

 

마침 푹신푹신한 창가쪽 테이블에서 양복입은 장년층이 뭔가 이야기중이라서

전체 모습을 광각으로 담아내기는 좀 부담스러운 상황. 그냥 특이하다 싶은 녀석을 찾아보다가 이 인삼을 발견한다.

그러고보니 이곳 입장할 때도 붙어있었던 홍보 포스터에는 '모란과 고려인삼의 고장' 이라는 수식어가 적혀있던데

그 말이 허언은 아니었던 듯 하다. 고려인삼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고유명사화 되어 버렸으니 이곳에서 사용하는것도 큰 문제는 없을 듯.

반대로 생각하면, 당시 인삼계를 주름잡았던 고려인삼의 명성이 일본에서까지 이어지고 있구나 하는 느낌에 살짝 뿌듯하기도 하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일본쪽도 인삼 재배에 과학적이고 세심하게 접근하고 있어서

고려인삼이라는 타이틀을 제외하고, 순수한 약용효과로 따지자면 일본쪽 인삼도 세계 정상급에 속한다.

이곳 다이콘지마의 고려인삼도 전량 수출용으로, 일본 본토에서도 굉장한 가격대인 인삼을 수출용으로 쓴다는 건

본토보다 더 가격을 높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 요즘 중국이 떠오르기 전엔 소비의 블랙홀이라고 불리던 일본에서

자국 소비보다 수출쪽에 중점을 둔다는 건 그리 흔한 케이스가 아니다.

 

설명을 보니 이 인삼은 자연산으로 발견된 녀석중에서는 일본에서도 손꼽히게 큰 녀석으로

추정 가치는 수억원을 넘는 듯 하다. 그걸 이렇게 전시해놔도 되는건가 싶은데.

 

 

 

인삼 사진찍고나니 매점 카운터를 보던 할머니께서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정원 구경 잘 했고, 물수건 놔둔 것이 참 인상깊었다고 본말전도격인 칭찬을 하니 기뻐하면서 차라도 한잔 들라고 하신다.

종이컵에 담긴 녀석은 알싸한 맛이 감도는 인삼차. 과연 이곳은 인삼쪽으로도 유명한 곳인가 보다.

 

정원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가을이나 겨울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니 꼭 한번 다시 와보라고 하신다.

특히 가을의 유시엔은 정말 절경중의 절경이니 보면 좋을거라는데, 올해 가을이 한달 반정도밖에 남지 않았으니

그 사이에 다시 오는건 무리고, 잘해봐야 내년에나 올 수 있을것 같아서 마음 속으로는 조금 아쉬운 기분.

 

중간에 한국에서 왔다는 이야기 하니까 여느때처럼 깜짝 놀라주시고, 귀한 손님 오셨다는 듯한 대우를 해주셔서 약간 쑥쓰럽기도 하다.

단체 관광객은 한국쪽이 제일 많지만, 아마 이정도로 자기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한국 관광객을 보는게 그리 흔한 일은 아닐테니까.

처음부터 말은 잘 통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외국인하고 말이 통한다는 게 재미있으셨는지, 할머니는 정원에 대한 나의 궁금증을 자세히 풀어주신다.

 

산인 지방이 원래 낙후된 변경이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이 다이콘지마는 제주도처럼 화산 융기로 솟아난 섬인데다가

서울의 동 하나보다도 작은 손바닥만한 화강암 섬에서는 제대로 된 농사도 짓기 힘들었기 때문에,

마을 여성들은 이곳 특산품인 모란꽃을 한가득 등에 매고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며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다고 한다.

 

방금 전 보았던 불상은 그 여인들의 고생을 기리는 의미에서 세워진 것. 그러고보니 가슴팍에 모란꽃이 장식되어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이곳의 지주였던 사카에(栄)씨는 원래부터 장사에 소질이 많은 사람이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젊어서 안해본 장사가 없다고.

1950년대, 전후 더욱 피폐해진 마을의 사정을 실감한 사카에씨는

'여성이 꽃을 팔러 멀리 떠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일본 각지에서 관광객이 구경하러 오는 정원을 만들자'고 결심하게 된다.

사카에 씨 본인의 가계는 생활에 그리 궁핍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위에서 큰 반대에 부딪치기도 했지만

예전부터 정원을 만드는 것이 꿈이었던 그의 아버지 요시조(由蔵)씨가 아들의 의지를 지원해 주었다고.

 

주위의 논밭을 전부 사들이고, 화강암 덩어리인 토양에 흙과 나무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같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착공 당시엔 이름 그대로 이곳은 외딴 섬이었기 때문에, 중고로 배 한척과 불도저, 크레인을 각각 1대씩 들여와

끊임없이 육지를 옮겨다니며 자재와 나무를 실어날랐다고 한다. 지금은 육지를 잇는 도로가 만들어져 버스로 편하게 올 수 있지만.

그 때의 모습을 담은 흑백 사진이 건물 한쪽 벽에 전시되어 있는데, 할머니께서는 나를 직접 그곳까지 끌고 가셔서

자신이 지내왔던 세월의 흔적을 되짚어 가듯이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당시의 기억을 이야기 하신다.

 

착공 8년만에 일차 공사가 마무리되고, 사카에씨는 아버지 요시조가 꿈에도 그렸던 정원을 기억하기 위해서

유시엔(由志園)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 후로도 여러번 공사를 거쳐서 점차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외국인으로서 듣기 어려운 생생한 세월의 기억을 알려주셔서 감사의 표시를 하고, 기념으로 사진 한장 찍어도 되겠냐고 물어보자

할머니께서는 예상 외로, 그 건물 안에서 일하고 있는 점원들은 모두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굉장히 뻘쯤하다.

아무튼 다들 쑥쓰러워하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하면서 자리를 잡는다. 뒷 배경의 커다란 모란 그림도 유명한 화가의 작품.

나를 안내해 주던 할머니는 앞줄 왼쪽에 앉아계시는 분이고, 앞줄 중앙의 할머니는 사카에 씨의 따님으로, 유시엔의 2대 주인이라고 하신다.

 

오늘 귀국날이라서 바로 가봐야 한다는 말에 조금 아쉬워하시는 할머니.

만약 우연이 겹쳐서 귀국일과 관계없는 날에 이곳을 찾았다면, 함께 식사하는 정도의 대접은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가을의 유시엔은 정말 훌륭하니 꼭 다시 한번 찾아와 발라고 당부하시는 할머니를 보니, 뭔가 의무감이란게 드는 느낌.

실제로 이곳은 꽤나 마음에 드는 정원이고, 가을의 절경이 상상되는 듯 해서, 내년 가을에라도 인사하러 찾아가보게 될 것 같다.

 

또 하나 여행의 인연을 만들었으니 뭐라도 사 갈까 싶어서 기념품점을 둘러본다.

형체가 남는 물건은 어제 개미공방에서 구입했으니 넘어가고, 추천하고픈게 있느냐고 물어보니

요즘에 자신들이 개발한 모란전병을 추천해 주신다. 짭짤한 전병 사이사이에 모란을 닮은 분홍색 반점이 들어가 있는 녀석.

물론 모란 자체는 맛이 나지 않기 때문에 새우맛 소스를 대신 집어넣었다고. 고급스러운 새우깡 느낌이라 마음에 들어서 2개 구입.

하나는 집에서 먹고, 하나는 형님부부쪽으로 보내려고 한다.

 

 

 

폭우와 함께 천지를 진동시키던 벼락이 떨어지던 좀 전의 하늘에서

잠깐 정원 산책을 하고 온 것 뿐인데, 청명하게 펼쳐져 있는 하늘의 모습을 바라보니

정말 다른 시공간으로 빠져들었다가 꿈 속에서 깨어난 듯한 기분.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그냥 버스 코스가 맞아서 귀국하기 전에 들렀을 뿐인 유시엔에서는

훌륭한 풍경과 함께 사연 많은 현지인들의 배려로,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화려한 모란에 숨겨져 있던 고난의 시간이, 한 지역 유지의 노력으로 인해 본연의 아름다움을 되찾은 공간.

 

나와는 동떨어진 수백 년 전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정원이라던가

중앙정부나 시 차원에서 조성되고 관리되는, 시민을 위한 휴식공간으로서의 정원이 아닌

힘겨운 생활을 보내는 마을 여인들을 위한 마음으로 시작된 조그만 정원은, 그렇기에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장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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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가 여기저기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기 때문에 잘 둘러보면서 걸으면 거의 모든 지역을 다 볼수 있다.

수리중인지 원래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한두 군데 출입금지 푯말이 붙어있는 곳도 있는데

그렇게 넓은 정원은 아니기 때문에 멀리 서서도 감상하는데는 지장이 없다.

 

 

 

예를들면 이런 곳. 지나갈 수 없게 만들어서 아쉽긴 하다.

오리지날 정원은 통로를 저런 자갈로 깔아놨기 때문에, 주인장이 아침저녁으로 산책하고 나면

하인들이 매일 자갈을 고르게 펴서 깨끗한 형태로 만드는게 일이었다고 한다.

 

현재의 일본식 정원은 100% 확률로 개장시간이 정해져 있지만

옛날 이 정원의 주인은 해가 지고 나서도 정원 곳곳에 설치된 불빛과 초롱 하나 들고 밤의 정원을 즐길 수 있었을 듯.

연못가에 반딧불이라도 서식하고 있다면 밤에 보는 풍경도 참 운치있을것 같다.

 

 

 

여름 한철이 지나가고 아직 가을이 오지 않은 애매한 시기라서

푸른 초목과 이끼에 비해 화사한 꽃들은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중간에 모란관이라는 작은 건물이 한채 있는데

그곳은 초겨울이라고 할만큼 선선하며, 안에는 형형색색의 모란들로 이루어진 조그만 정원이 있다.

단순히 모란꽃만 모아놓은게 아니라, 작은 공간이지만 제대로 정원의 모습을 갖추고 있어서 훌륭한 볼거리.

모란은 향이 그다지 강한 편이 아니지만 폐쇄된 공간에 그만한 모란이 피어있으니 은은한 향기가 가득 차 있다.

 

사진 촬영금지라는 푯말이 적혀 있어서 그냥 감상만 했는데, 단체 한국인 관광객은 그런거 신경쓸 이유가 없다.

모란꽃 앞에 가족들 세워놓고 신나게 찍고 있는 모습을 보니, 사실 관광객으로 붐비지 않을때는 찍어도 큰 문제 없을듯 하다.

작은 건물이라서 사람들에게 방해될까봐 촬영금지라고 붙여놓은 듯 하니까.

 

어쩄든 관리자한테 허락을 받지 않았으니 모란관의 내부 모습은 촬영없이 눈으로만 감상하고 나왔다.

어쨰서 이 정원이 모란을 그렇게 중요시 하는지는 심히 궁금하다. 사시사철 다른 종류의 꽃이 피는 곳이라서 모란에 집중할 이유가 없는데

모란관이라는 별장까지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분명 이 정원과 관련된 뭔가가 있겠지. 훗날 알아보기로 한다.

 

 

 

밖은 덥고 모란관 안은 시원해서 나가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도 햇살 아래 반짝이는 이끼들 모습을 보니 땀 흘리며 셔터 누르는 보람이 있어 즐겁다.

 

 

 

숲 속의 숲이라고 할까. 고개를 숙이고 가까운 곳에서 지면을 바라보면

이제껏 봐 왔던 정원과는 다른 마이크로 세상이 따로 자리잡고 있는 듯 하다.

조경용으로 심어진 이끼는 나름 모습도 준수한 편이라, 방금 전 뿌린 비로 물방울을 머금고 있는 모습이 더욱 매력적.

 

 

 

절반쯤 코스를 돌다보면 차 한잔 마실 수 있는 조그만 가게에 도착한다.

분위기 타면서 한잔 해도 되겠지만 너무 여유부렸다간 버스 시간을 못맞출수도 있으니 조심하기로 한다.

호텔 숙박이라면 아무리 늦게 가도 관계없지만, 페리 승선시간에 늦으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나와버리니.

 

차 한잔은 넘기기로 하고, 그냥 그늘 벤치에 앉아서 숨좀 돌리며 주변의 꽃이나 찍어본다.

한달 정도만 더 넘기면 계절에 맞는 꽃이 활짝 필것 같아서, 그 모습도 기대가 된다.

 

 

 

가끔씩 코스가 두 부분으로 나눠지기도 하는데, 조그만 언덕으로 나 있는 길 앞에는 폭포가 있단다.

정원의 크기를 볼떄 폭포라고 할 만한 녀석은 아니겠지만 아마 인공적으로 지어졌을 그 폭포의 모습이 궁금하긴 하다.

 

사실 일본의 정원은 뭔가를 보기 위한 목적을 갖고 움직이는 길이 아니라

길을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는 것 자체가 목적인 곳이라서, 이렇게 걸어가는 코스의 사진을 담는게 목적에 더 부함하는 듯.

 

 

 

인공 폭포임에도 꽤나 볼만하다.

인공은 인공이지만 돌 색깔로 칠한 콘크리트가 아니라 진짜 돌을 쌓아 만든 녀석이라서.

 

그렇지 않은 곳도 많지만, 중간중간 제주도에서나 많이 보이는 현무암이 많이 놓여있는 걸 보고

이곳도 화산융기로 솟아난 곳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 본다.

여태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곳 유시엔이 속한 곳은 여의도같은 내륙의 섬이다.

내륙 호수이긴 하지만 바다와 연결된 곳이라서, 사실상 그냥 섬이라고 보는 편이 나을 듯.

 

이름은 재미있게도 다이콘지마(大根島), 다이콘은 무라는 뜻. 총각김치 만드는 그 무.

무리는게 생으로 먹으면 좀 매운 느낌이 있는데, 소바 양념장에 갈아넣는 무 종류중에는 특히 더 매운 녀석이 있다.

카라미다이콘(辛味大根)이라는, 의미 그대로 '매운맛 무'라는 이 녀석을 갈아서 양념장에 넣으면

시원시원하면서도 톡 쏘는듯한 매운맛이 소바의 맛을 더해준다.

 

아르바이트하던 소바집은 젊은 사장님부부과 그 부모님, 친척, 동네 할머니등이 이끌어가고 있었는데

키가 190은 되는 거구의 사장님은 전반적인 요리를 담당하기 때문에 그 외의 잡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힘 없는 다른 분들을 대신해, 재료중 가장 힘이 많이 들어가는 무 갈기는 항상 내가 도맡아 했던 기억이 난다.

 

점심시간에 카라미다이콘과 와사비를 듬뿍듬뿍넣고, 한입 먹을때마다 머리속이 찡해지는 느낌을 즐기고 있으니

역시 한국사람이구나 하는 말을 하면서 놀라워하던 그쪽 사람들의 모습이 기억난다.

 

아마 이곳이 제주도처럼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섬이라면, 벼농사보다는 무 재배같은게 주를 이루었을 수도 있겠지.

 

 

 

중간중간에 묘한 나무판이 보이길래 뭔가 싶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태우는 모기향이 설치된 상자였다. 대낮이라 잘 보이진 않지만 조금씩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미 시원하게 물린 뒤라서, 이 넓은 곳에서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녀석이란 건 알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조금이나마 손님들을 위하는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에 기분은 꽤나 흡족하다.

 

 

 

단체 관광객들은 이미 구경 다 마치고 기념품점에 와글와글 몰려있다.

나로서도 이곳 유시엔에서 좋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기념품에 대한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어제 이즈모의 개미공방에서 몇가지 기념품을 구입해 놓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번엔 패스.

애초에 이 풍경을 놔두고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기념품점에 들어갈 엄두도 나지 않았고.

 

 

 

이제 산책로도 중반을 넘은 듯 한데, 거닐어보면 참 즐거울듯한 연못 위 나무다리는

아쉽게도 출입할 수 없는 장소였다. 예전에는 실제로 거닐었던 곳이지만 지금은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게 조금 아쉽다.

 

사진 담으면서 여러번 느꼈지만, 단풍이 한창 물드는 시기의 유시엔은 정말 환상적일 듯 하다.

너무 꽉꽉 들어차있는 느낌이 드는 지금에 비해서, 소나무의 푸른색과 단풍의 붉은색이 적절히 혼합된 가을의 모습은

지금보다 훨씬 완성도있는 풍경을 선사해 주지 않을까 싶다.

 

가을에도 꼭 한번 들러보고 싶지만, 사진을 담을 당시가 9월 초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올해 가을에 다시 가기엔 좀 그렇지.

 

 

 

키우는 녀석인지 알아서 들어와 사는 녀석인지 모르겠다.

연못 안의 붕어들이야 구입해와서 기르는 녀석들이겠지만.

 

그래도 뭐 먹이 받아먹고 하다가 알아서들 정착한 녀석들이지 않을까 싶다. 천적도 별로 없고 사람도 안건드리고.

오리가 고개를 뒤로 접어서 턱을 앞가슴에 괴고 있는 저 모습은, 사람이 보기엔 뭔가 어색하지만 실은 편안한 휴식 자세.

일광욕을 즐기며 홀로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나보다도 저 녀석이 이 정원을 더 즐기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느긋하게 걷다보니 처음 출발했던 건물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면적 자체는 그리 크지 않은 정원인데, 오솔길마냥 시야가 가려지는 부분이 많아서

근처를 이리저리 돌아도 각각 다른 공간을 산책하고 온 듯한 느낌을 받게 하는게 나름 섬세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름의 강인한 생명력이 아직 충분히 남아있던 시기라서

조경수들이 뿜어내는 강렬한 녹색 에너지에 조금 지쳐갈 즈음이면

이렇게 사진을 만져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로와 몇몇 부분을 제외하면 어차피 푸른색 위주의 단색 풍경이었지만

무채색으로 바꾸고 나면, 화려한 색에 산란된 형태적 미학이 좀 더 쉽게 느껴지는 듯 하다.

 

 

 

모기들이 극성을 부리는 곳에서 렌즈를 갈아끼우는게 나름 귀찮은 일이긴 해도

광각으로 담은 이끼와 망원으로 담은 이끼의 모습이 큰 차이가 나기 때문에 즐거운 작업이다.

 

멀리서 보면 보슬보슬한 녹색 모래처럼 보이는 이끼지만

가까이서 보면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춘, 엄연한 조경수의 동료로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마크로 렌즈까지 가지고 왔다면 조경용 이끼의 모습을 좀 더 세밀하게 담을 수 있었겠지만

24mm 단렌즈, 50mm 단렌즈, 70-300 망원렌즈를 들고도 이렇게 헥헥거리는데.

 

육중한 본인의 카메라는, 일단 결과물에 불만을 주지 않기 때문에 굳건히 내 옆구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가방을 내려놓고 렌즈를 여러번 교환하는 도중에는 역시 가벼운 최신 미러리스 카메라들이 부러워지기도 한다.

완전 기계식 필름카메라와는 달리, 수명이 정해진 디지털 기기라서 언젠가는 다른 녀석으로 바꾸겠지만

훨씬 작아진 녀석을 만지작 거리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또 지금의 육중한 반사식 카메라의 느낌을 그리워하게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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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을 보여주고 입장료 반값 할인받은 후 짐 맡기는 곳을 물어보자 자기들이 직접 맡아주겠다고 한다.

백팩이 좀 커서 보관함에 안들어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기우였다. 애초에 보관함이 없으면 어떻하나 하는 생각도 했고.

입구 부분이 수리중이라서 약간 돌아가야 한다고 하는데, 정원쪽은 돌아보는데 큰 문제가 없다고 하니 다행.

 

변형된 입구로 들어가는데 안내하시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방금 도착하신 일행분이신가요?' 라고 물어본다.

아마도 같은날 이곳에 페리로 도착한 한국인 단체 관광객이 이곳에 온 모양인데, 그쪽과는 관계없다고 대답한다.

이렇게 절묘하게 타이밍을 맞출 리는 없을텐데... 아무래도 그쪽 팀 역시 비 그치기를 기다린 게 아닌가 추측해 본다.

 

얽히는 일 없이 혼자서 느긋하게 돌아보고 싶으니 전후방 주시해가며 전진.

 

아직 비구름이 지나가고 있는 도중이라서 그렇게 화창하진 않지만, 얼마 지나지 않으면 쨍쨍해 질듯한 하늘이다.

입구를 통과하고 처음 마주한 유시엔의 모습은 생각보다 넓으면서도 생각보다 좁은 듯 하다.

 

뭔 선문답인가 하면, 정원 전체의 크기는 생각했던것보다 커서

지역의 대표급 정원들에 비하면 좀 작아도 충분히 입장료를 지불할만한 넓이였다는 뜻이고

생각보다 좁다는 것은, 정원에 심어진 조경수들의 밀도가 좀 빡빡한 느낌이 들어서 확 트이는 시원한 느낌보다는 오밀조밀하다는 뜻.

 

 

 

그래도 살짝 주위를 둘러보니 한적한 시골마을의 외딴 정원이라고 우습게 볼게 아니다.

굉장히 세심히 주의를 들여 가꾸고 있다는 느낌이 확연히 드는 조경수들의 상태가 금방 눈에 들어온다.

 

일본의 정원이란 온갖 식물들을 최상의 상태로 보전하면서, 산, 물, 땅 등의 요소를 축소해 집약시킨 공간.

인위적인 느낌이 없잖아 있어서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어쟀든 이런 인공적인 미를 유지시키려면

마치 축산업에 종사하듯이 휴일없이 사시사철 관리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그런 면에서 이곳은 확실히 관리 하나는 잘 되어있다는 느낌.

 

 

 

입구가 달라졌기 때문에 원래 이 루트인지, 내가 지금 반대로 움직이고 있는건지 알 수 없지만

산책 시작하자마자 고풍스러운 건물이 눈앞에 들어온다. 정원 내부의 식당인데, 정원을 둘러보기도 전에 식당이 나오는건 조금 의아하다.

 

하지만 공사중이라고는 해도 소소한 서비스 정신을 잊을리가 없는 이쪽 사람들 탓에

내가 걸어가는 방향이 정확한 루트라고 나무 푯말이 확실히 박혀있기 때문에 어쨌든 지금은 이 방향이 맞다.

보통 식당이나 기념품점은 관광이 다 끝나는 지점에 세워놓는게 지극히 정상적인데, 어째서 이곳에 위치하고 있는건지.

 

아무튼 마츠에에서 밥은 여러가지 많이 먹고 왔으니 여기서 한끼 할 일은 없다.

정원을 바라보면서 한끼 하는 식사도 매력적이지만, 아무래도 여기에서까지 외국인 할인은 되지 않겠지.

 

정원의 미관을 전혀 해치지 않는 외관이나 색상, 소재 선택은 이곳의 완성도를 재차 어필하는 듯 하다.

 

 

 

이곳에 발을 들이면서 기분이 좋아진 이유중 하나는, 이곳이 상당한 수준을 자랑하는 이끼 정원이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기도 하고, 일본의 정원 중에서는 단연 이끼 정원이 마음에 들기 때문에.

 

유명한 정원이라고 해도 이끼 정원이 아닌 경우는 많다. 정원 전체를 이끼로 덮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노력과 수고가 필요하기 때문.

예전에 도쿄 옆의 하코네 이끼정원을 처음 방문했을 때, 태양빛에 반사되는 찬란한 이끼들의 향연이 너무나 인상깊었기에

오랜만에 접하는 이끼정원의 생명력 넘치는 모습은 일시에 기분을 고취시켜준다.

 

하코네 이끼정원에 대한 포스팅은 아주 옛날 녀석이 남아있으니 보실 분들은 이곳으로.

 

 

 

이끼 정원은 일반 정원에 비해 풍성함이라고 할까,

걸어가는 루트 이외의 장소가 전부 자연의 생명력으로 가득하다는 느낌을 들게 해주는 장점이 있다.

 

한국에서는 더더욱 힘들지만, 습한 기후의 일본에서도 이끼 정원을 유지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

수십 가지의 이끼를 배양해서 정원을 만들어도, 그 기후와 토양등 수많은 요소에 적합한 녀석 몇종만 간신히 살아남는다.

생장에 성공한다고 해도 그냥 놔둬서 되는 녀석들도 아니고, 사람이 만든 공간에서 살아가려면 사람의 철저한 관리가 필수.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이끼 정원은 별천지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자연적인 동시에 비현실적인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지금 저 사진의 토양 부분이, 이끼가 없는 평범한 흙이라고 생각해 보면 그 느낌이 어떨지 짐작이 갈까.

잔디와는 완전히 별개의 분위기를 만들기 때문에 한국인으로서는 생소한 풍경이다.

한국에서도 이끼 정원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지만, 야외에 광범위하게 만들기에는 기후상 어려움이 따른다.

 

가장 일본적인 맛을 느낄 수 있는게 이 정원이라면, 그 중에서도 이끼 정원이야말로 타국 여행이라는 느낌을 확실히 전해준다고 할 수 있다.

밀도가 조금 높긴 하지만 부족한 부분 없이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유시엔의 모습은 1등급 정원이라고 결론내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일본의 3대 정원이라는 곳중 두군데는 돌아봤지만, 그 몇대 어쩌구 하는 수식어에 휘둘리는 듯한 느낌.

훌륭하기로야 더할 나위 없지만, 그 이름값 때문에 언제나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정원의 모습은

본연의 가치를 감상하기에는 참으로 힘든 곳이다.

 

그런 점에서 이곳 유시엔은 한적하게 홀로 거닐만큼 여유가 있어서, 조금 빡빡한 느낌이 들어도 충분히 마음에 든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있으니 한국인 관광객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그쪽도 여기저기 사진찍기에 정신이 없긴 한데

대부분 가족이나 친구를 앞에 세워놓고 찍는 기념사진인듯, 나하고는 다른 차원의 생물 같으니 크게 신경쓰이지 않는다.

 

단지 사람들을 세워놓고 사진 찍는 반면 이동속도는 나보다 훨씬 빨라서, 내가 몇장 찍고 있으면 금새 앞질러 가버린다.

덕분에 이쪽은 얽힐 필요없이 천천히 진행할 수 있으니 나쁠거 없지만.

 

 

 

규모로 보면 그렇게까지 큰 편에 속하지 않지만, 이곳저곳 둘러봐도 상당히 알찬 느낌의 유시엔.

정원은 그 자체가 예술품이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동선과 그 주변의 풍경 등 설계시 고려해야 할 부분이 복잡하다.

걷다가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휴게소, 차 한잔 할 수 있는 가게 등도 철저하게 주변 풍경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한적한 시마네현이기 때문에 이렇게 멋들어진 풍경 촬영에 열을 올려도 방해받지도, 남을 방해하지도 않는 여유가 가능.

유명한 정원에 가면 걷다가 마음껏 사진 담을 공간마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이틀간의 페리 여행과 이어지는 비 때문에, 시작부터 뭔가 꿀꿀하고 초초한 기분이었던 이번 여행에서

오랜만에 홀로 녹음속을 마음껏 거니는 호사를 누릴 수 있어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듯 하다.

 

 

 

사진 찍을 포인트만 찾아다니는 건 아니고.

사진 한장 찍기전에 1분쯤 그자리에 서서 천천히 주변 풍경을 음미하는 시간도 잊지 않는다.

 

옛날 일본 다이묘들은 이런 정원을 자기 집 안에 떡하니 지어놓고 매일 산책하며 물고기들에게 먹이나 주는 호사를 누렸다.

극단적인 계급사회에서만 가능한 사치스러운 행위가, 다행히도 오늘날엔 약간의 입장료를 지불함으로서 체험이 가능하다.

 

물론 옛 다이묘들 중에는, 백성들 생활이 어려워지자 자기 소유의 저택과 정원을 팔아서 곡식을 구입해 나눠준 사람도 있긴 하다.

 

 

 

자연 그 자체라면,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예술성을 뛰어넘는 장관을 연출하지만

미약한 사람의 힘으로 그 흉내를 내려는 노력이 빚어낸 일본식 정원은, 아주 세심한 곳까지 신경을 써야 그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시멘트 길 위에는 자갈이라도 뿌려서 그 인공적인 느낌을 감춰야 하고

들어가서는 안되는 정원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철봉이 아니라 굽이진 대나무로 위화감을 없애야 한다.

 

소소한 곳에 신경을 쓴다면, 보는 사람 역시 소소한 곳까지 뜯어봐도 만족감이 드는 법.

나보다 늦게 도착했지만 벌써 저 멀리 기념품점에서 바글거리고 있는 단체관광객은 이런 요소들을 음미하고 있을려나.

 

 

 

햇살에 반짝이는 이끼의 모습은 가히 아름답다는 표현밖에 할 수 없다.

하코네 이끼 정원에서 받았던 그 감격을 실로 오랜만에 느낄 수 있으니 셔터를 누르는 횟수도 늘어난다.

 

이 사진을 찍으면서 왼편의 저 나무가 단풍으로 물드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잘 만들어진 정원은 사계절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가을의 유시엔이 매우 절실해지는 느낌.

봄과 여름에는 이렇듯 색이 좀 단조로워지는 느낌이 있지만, 가을의 정원은 그야말로 인간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절경을 뽐낸다.

 

물론 눈으로 덮인 겨울정원의 모습도 빠뜨릴수 없고, 자연을 모방한 정원이니 계졀의 변화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것도 당연하다.

 

 

 

이끼의 생육이 얼마나 까다로운지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잘 자라다가도 조금만 일조량과 습도 등이 변화하면 곧 죽어버리는 녀석들이라서

나무 앞쪽의 이끼들은 이미 누렇게 죽어버렸다. 물론 타이밍이 맞으면 다시 살아날 수도 있지만.

 

죽은 이끼들 사이로 다른 종류의 이끼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광경도 보인다.

정원을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변화도 민감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저 틈을 되살릴 것인지도 궁금하다.

 

 

 

반대로 그늘이 많아서 습도가 높은 지역의 이끼는 또 그 느낌이 다르다.

색도 진해지도 조밀해져서 이름 그대로 그늘에 걸맞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항상 일정한 색과 밀도를 유지하는건, 천해의 혜택을 받은 지형과 날씨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현재로서도 불가능에 가깝고

넓은 벌판에 고립된 정원이 아닌 이상 주변 건물들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긴 하다.

 

여기저기 사진 찍으며 돌아다니고 있으니 오늘 갈아입은 반바지 밑이 좀 가려워진다.

장소가 장소다보니 모기가 아주 신나게 활동중인듯 하다. 마지막 날이라서 편하게 반바지 입었는데 이런 함정이 도사릴줄은.

다 잡아낼수도 없으니 그냥 물리면 물리는대로 놔 두는수 밖에.

여담으로, 그때 물린 흔적은 한달 반이 지난 지금도 남아있다.

 

 

 

이끼 정원의 매력은 역광 촬영시에도 잘 드러난다.

빼곡한 조경수 덕분에 직광을 어느 정도 막아주기 때문에 빛은 부드러워지고

오밀조밀한 이끼가 지면 가까이서 반사되는 빛에 부드럽게 퍼지는 모습은 푸근하기 그지없다.

 

인공적인 산물이긴 해도, '이 곳은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모습. 한동안 걸음을 멈추고 감상하기를 여러 차례.

 

 

 

나무의 새순들은 어떤 운명을 맞을지 궁금하다. 조경수라는 목적상 이런 새순은 쳐내버리는게 대부분이긴 하지만.

새순 잎사귀 밑에 매미껍질이 보인다. 이번 여름은 한껏 더웠으니 이 녀석들, 원없이 울어대었으리라 생각해 본다.

늦여름이긴 하지만 아직 30도를 넘나드는 날씨라서, 어디선가 매미소리가 남아있는 듯 느껴진다. 착각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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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엔 입구가 아니라 꽃집 입구에 상당한 양의 우산이 곱게 접혀져 대기중인 모습.

버스정류장이 이곳이니 여기서부터 비에 젖지 않게 하기위한 배려인 듯 하다.

유시엔이 이렇게까지 큰 곳인가 싶을 정도로 우산 수가 많은데, 전부 가지런하게 접혀있고, 손잡이 끝부분엔 유시엔 스티커가 붙여져 있다.

 

이쪽으로서는 굳이 비오는데 돌아보며 사진 찍을만큼 급하진 않으니 사용할 일은 없지만

구경을 시작하기 전 이런 배려의 흔적을 접하게 되면 기분이 좋아질 만도 하다.

 

 

 

30분쯤 쏟아지고 나니 서서히 비구름이 물러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쏟아부은것 치고는 오래 내린 편.

이 정도라면 느긋하게 둘러보고 사카이미나토행 버스를 타더라도 페리에 늦을 일은 없을 듯 하다.

사카이미나토에도 나름 유명한 볼거리가 있으니 아주 넉넉한 것도 아니지만.

어차피 버스가 1시간에 두 대정도 오기 때문에 그 시간에 맞춰서 이동하는 수 밖에 없다.

 

오늘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으로, 오전중 마츠에를 돌아다닐 때는 깨끗하다가 버스 타고나서부터 비가 쏟아지고

조금 기다리니 또 다시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정원을 둘러볼 수 있다. 마츠에 성에서 폭우에 쫄딱 젖었던 경우에 비하면야.

 

 

 

유시엔으로 가는 길에 단촐한 꽃집의 분위기도 몇장 담으며 걷는다.

꽃집이 다들 그렇지만 꽃 외에는 그냥 평범한 콘크리트 건물 덩어리인데,

화분들 만으로 충분히 매력적인 공간을 만들어내는건, 역시 식물이 가진 힘이라고 할까.

 

 

 

오키나와에서도 자주 눈에 들어오던 거대한 꽃.

무궁화와 같은 종이라서 닮긴 닮았다. 한국에서 흔히 보이는 무궁화와는 크기나 색깔이 많이 다르지만.

비가 그치고 간접적이긴 해도 햇살이 들어오다보니 꽃들에게서도 활기가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름모를 꽃. 피어있는 모습도 물론 아름답지만, 피기 전의 꽃망울도 저렇게 모여있으니 나름 매력있다.

 

아파트 구조상 마음껏 식물을 들여놓을 수가 없어서 이런 곳에 오면 항상 아쉬운 느낌.

가끔 아파트 베란다 전체에다가 흙을 채워넣어서 조그마한 정원을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대구쪽 본가는 베란다를 트는 바람에 그럴 공간이 없지만, 서울쪽 아파트라면 불가능한 일만도 아닐듯 한데.

배수시설이나 꾸준한 관리 등 신경써야 할 부분이 많을 것 같아도, 조그만 화분에 담겨있는 녀석들보다 훨씬 보기좋을 것 같다.

 

 

 

희귀한 꽃들이 전시되어 있는건 아니지만, 마음 다잡고 구경하는 이런 시간에는

얼핏 길가다가 스쳐 지나가는 녀석들보다도 집중해서 보는 탓에,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매력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다.

일본의 정원이란 건, 겨울을 제외하면 응축된 에너지로 넘쳐나는 공간이라서

조금 있다가 구경할 녀석을 대비해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을 풀고 워밍업을 하는 시간이랄까.

 

 

 

버스정류장 위치를 생각하면, 이 꽃집과 유시엔은 한데 묶어서 생각하는것이 옳다고 본다.

일본식 정원과 함께하는 꽃집이란 것이 조금 생소하기도 한데.

규모는 큰편이지만 그냥 평범한 콘크리트 가건물에 식물들만 모아놓은 이 곳이

어째서 독립된 버스 루트까지 가지고 있는 유명한 정원 옆에 위치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시엔에 대한 정보가 완전히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에 의아한 것이 당연했지만

관람이 끝난 후 조그만 이벤트 덕분에 이곳이 가진 의미를 알게 된 시점에서는 여러가지로 마음이 따뜻해 진다.

그 이야기는 당연히 다음 포스팅에서.

 

 

 

요 조그만 길만 건너면 바로 유시엔이 보인다.

주위를 둘러보면 고층 건물은 고사하고, 마을 전체에 2층 이상의 건물이 없는 듯한 분위기.

아마도 이 길이 마을에서 가장 큰 도로일 것이다. 자전거 여행때 자주 봐왔지만, 일본에서 가장 마음 편한 모습이란 이런 것.

 

한국은 도시 외곽의 분위기를 뭐라고 찝어서 정의하기가 힘든데

일본의 도시 외곽은 상당부분이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다. 높은 건물이 거의 없이 나즈막한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데

도심지에서는 자리잡기 어려운,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상점들이 주를 이룬다.

땅값만 싸다면 높은 건물보다 낮고 넓은 건물이 월등히 저렴하기 때문에.

그 결과 주로 잡화점, 중고차 가게, 2층을 넘지 않는 대형 마트등이 외곽으로 빠져 있다.

대형 마트의 경우에도 굳이 지하 주차장을 만들 필요가 없이, 마트 앞에 상당히 큰 규모의 주차장을 가진 녀석들이 대부분.

자전거로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다가 서서히 중고차가 주르륵 진열되어 있는 모습이 보이면 도시로 들어가고 있다는 증거.

 

왼쪽 건물에 보이는 간판은 옷이나 그릇 등을 파는 잡화점 콘페이토(こんぺいとう)라고 적혀 있는데

거대 체인이 아닌게 확실한 저 가게 이름은 의외로 일본 각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도심지가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생활권인 외곽지역에 주로 위치하는지라 관광객이 찾아가기엔 힘든 곳.

대부분이 관광객이 버스나 철도 등을 이용해서 이동하는데, '창고'라고 불리는 잡화점이 위치한 곳은

이런 대중교통이 지나가지 않는 곳이 대부분인 평범한 도시 외곽이기 때문에 작정하고 찾아가지 않는 한 보기 힘들다.

 

도심의 유명한 잡화점으로는 돈키호테가 있지만, 외곽의 잡화점은 한국의 대형 마트만한 크기의 단층건물이 대부분.

돈키호테 따위는 가소롭게 보일 정도로, 정말 잡화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다양한 녀석들이 창고처럼 가득가득 차 있다.

좀 큰 도시 외곽의 잡화점은 악기, 의류, 반지, 시계, 음악, 영화, 게임, 장난감, 카드게임, 중고책 등등 없는게 없다.

콜렉터들이 군침흘리는 빈티지 기타나 구하기 힘든 모형건, 분위기와 달리 고가의 희귀 라이터 등도 눈길을 끈다.

 

조명은 어둡고 내부 마감 없이 짙은 나무색 등의 어두운 소재로 만들어져 있고, 통로는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큼 좁다.

난잡하고 시끄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잡화점은, 오랜 경험과 연구를 바탕으로 그런 분위기가 매상에 더 도움이 되기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이곳의 잡화점이야 그런 물건들을 들여놓을 일이 없으니, 그냥 옷이나 그릇등을 파는 것 같은데

콘페이토라는 이름의 잡화점이 의외로 많은 것은 나름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콘페이토는 포르투갈어(Confeito)로 '별사탕'이란 뜻. 건빵에 들어있는 그것. 발음을 차용해서 한자로는 '金平糖'이라고 쓴다.

1500년경 포르투갈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별사탕은, 당시로서는 만들기 힘들고 비싼 고급 과자였는데

재래식으로 별사탕을 만들때는, 특수한 가마솥을 가열하면서 정해진 시간에 맞춰 설탕물을 넣고 끊임없이 회전시켜줘야 했다.

여기서 별사탕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 참깨를 이용하는데, 이것이 사탕의 핵이 되어 주변에 설탕이 모이면서 별 모습이 된다.

 

잡화점에 콘페이토라는 이름이 자주 붙는 것은 그 빛나는 듯한 오묘한 모습과 함께, 사탕의 핵이 되는 참깨의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

들어와서 이리저리 구경하다보면, 생각지도 못하게 반짝하고 눈에 들어오는 상품을 찾을 수 있는 곳.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지만, 이렇게 가게 이름으로 그 원류를 연상해 볼 여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적절한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맞은편에 드디어 유시엔의 모습이 드러난다. 비 때문에 한참 지체되었지만 일단 목적지에 도달한 셈.

버스 정류정에 내려서 꽃집을 통과한 다음 보이는 유시엔의 정문 모습만으로는

저 너머 어디에 어떤 정원이 기다리고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앞에서 보면 그냥 평범한 가정집처럼 보이니까.

 

비는 그쳤어도 아직 구름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하늘이라 약간 아쉽지만, 저 멀리서 천천히 푸른 하늘이 다가오고 있으니

느긋하게 둘러보고 있으면 하늘 색도 촬영과 감상을 도와주리라고 생각한다.

이곳 역시 외국인에게는 입장료 반값 할인이 가능하니 부담이 없다. 등에 가득한 짐을 보관할 장소가 있기를 바라며 길을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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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에 일어나 조식을 꾸역꾸역 먹으면서 오늘의 일정을 생각해 본다.

오후 7시에 출항하는 페리는 6시까지 승선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넉넉하게 5시 조금 넘겨 터미널에 도착해야 한다.

시간이 아까워서 빠듯하게 도착할 수도 있지만, 한순간의 실수가 자칫 1주일동안 이곳에 고립되는 상황을 낳을수도 있기 때문에

최대한 느긋하게 도착해서 기다리는게 마음 편하다. 짧진 않지만 느긋하지도 않은 오늘이란 시간을 잘 활용하려면 어떻게 할까.

 

일반적인 관광객보다는 훨씬 느긋한 발상인데, 보통 하루에 한 곳 정도만 확실히 정해놓고 움직이는 본인 스타일상

오늘 가장 중점을 둘 곳은 이곳에서 페리 터미널로 가는 중간에 위치한 아담한 정원 유시엔(由志圓)이다.

크게 유명한 곳도 아니고 원래부터 가고 싶었던 곳도 아니지만, 마츠에 시와 페리 터미널의 딱 중간즈음에 위치한 곳이라서

돌아가는 길에 들르기엔 최적의 장소라 여행 계획때부터 코스에 넣어둔 곳.

 

문제는 유시엔이 너댓시간동안 돌아다닐만큼 큰 곳은 아닐듯 해서, 지금 바로 체크아웃후 뛰쳐나갈 이유가 없다는 것.

오후 1시쯤 도착하면 딱 알맞을 듯 한데, 그렇다면 이곳에서 12시 반쯤 버스를 타면 된다.

약 3시간 조금 넘는 시간을 이곳 마츠에에서 보내야 한다는 결론. 멀리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현립미술관이나 카라코보 공방 등등 구미를 돋구는 장소가 있고, 그냥 아담한 까페에서 커파나 홀짝여도 시간은 충분히 간다.

일단은 10시까지 체크아웃이니, 짐을 프론트에 맡겨놓고 나서보기로 한다.

레이크라인 버스를 타고 하염없이 창밖 구경이나 하다가 눈길이 가는 곳에 내리면 되겠지.

 

걸어서 5분거리인 마츠에 역으로 가는 도중에 만화 캐릭터같은 녀석의 동상이 서 있다.

시마네현과 인접한 돗토리현은 '게게게의 키타로'나 '명탐정 코난'같은, 시대에 한 획을 그은 만화가들의 고향인데

문화 컨텐츠쪽으로는 돗토리현에 뒤지지 않는 시마네 쪽에서도, 만화 쪽에서는 크게 내세울 만한 사람이 없는 편.

이 캐릭터는 한국에 정식 수입된 적은 없는 듯 하고, 상당히 오래 전 인기를 끌었던 녀석인 것 같다.

 

 

 

3일간 마음껏 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레이크라인 버스를 사진에 담아본 적이 없다는걸 깨달았다.

한 장도 남기지 못했다면 돌아와서 조금 아쉬웠을 듯. 관광용 버스 중에서는 디자인이 참 잘된 녀석이다.

원목은 아니지만 좌석도 나무로 되어있고, 안내에 능숙한 여성 운전자들이 반쯤 가이드 역할도 해 주는 훌륭한 녀석.

 

한쪽 방향으로만 순환하기 떄문에, 잘못타면 마츠에 역 바로 앞에서 승차해, 40분이나 걸려 역에 도착하는 사태가 벌어질수도 있다.

 

어제 이즈모에서 돌아온 후 마츠에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서 있을때도 이 때문에 재미있는 이벤트가 있었다.

수첩에 일기를 쓰지 않은 여행이라 완전히 까먹고 있었는데 지금 기억이 나서 읊어본다. 이래서 일기를 써야 한다니까.

 

신지코 온천역 앞의 버스 정류장은 마츠에 역과 크게 떨어져 있지 않지만, 그곳에서 레이크라인 버스를 타면

약 30분 가까이 마츠에 시내를 돌고 돌아 최종적으로 마츠에 역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래서 그냥 일반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던 중. 퍼펙트 티켓은 시영버스라면 어떤 것도 무료로 탈 수 있으니.

그런데 젊은 여성관광객 둘이 갑자기 앞에 와서 뭔가를 물어본다. 영어로. 네이티브는 아니고 적당한 아시안 잉글리쉬로.

영어로 말하는 모습만 봐도 아, 한국인이구나 싶었는데, 일본어에 익숙하다보니 막상 한국인의 영어는 알아듣질 못하겠더군.

아마 나를 일본인으로 생각하고 그나마 영어로 물어본 것 같은데, 내가 일본인이었더라도 그 영어를 알아들을수는 없었을거라 생각한다.

 

도중에 말 끊을 타이밍을 잡을수가 없어서, 질문 다 끝나고 한국어로 이야기하자 폭소가 터졌다. 나야 자주 겪는 일이긴 하다만.

레이크라인 버스는 시간이 너무 걸리기 때문에 마츠에 역으로 가는 일반 버스를 타고 싶은데 그걸 잘 모르겠다고 하신다.

마침 나도 그럴 예정이었으니 함께 일반버스를 탔다. 홀몸이 아니라서(?) 버스기사분께 마츠에 역 가느냐고 확인질문까지 하고.

 

딱히 친해지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버스 안에선 그냥 두분끼리 이야기하도록 뒤에서 앉아있었다.

내리고 나서 감사인사 한번 듣고 헤어졌을 뿐. 그래도 여행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생긴 것이니 이쪽 입장에서도 즐거웠다.

 

 

 

레이크라인 버스를 타고 천천히 흘러가는 경치를 감상한다.

현립미술관에서 내릴지, 카라코보 공방에서 내릴지를 머릿속으로 저울질하고 있는데

출발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창밖 너머에 중고서점 체인인 북오프가 보이자 순간적으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어제 비참한 패배를 맛봤던 친구녀석의 게임소프트를 저기서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떠오른다.

북오프는 기본적으로 중고서적을 판매하는 곳이지만 대부분 음악CD, 영화, 게임 등도 함께 취급하니까.

친구 부탁때문에 다른 관광지를 놓치는 것이 아깝다면 아까울수도 있지만, 사실 북오프 탐방은 원래부터 좋아하는 코스다.

한국에서 일본 원서 찾아보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라서, 일본에 오면 꼭 한두 번은 북오프를 찾아다니곤 하니까.

게임소프트가 없어도 그냥 읽고 싶은거 읽으면 되기 때문에 딱히 아쉬울 것도 없다.

 

결국 몇 초간의 짧은 고민끝에 현립미술관도, 아트공방도 포기하고 북오프 앞에 내려버렸다.

만약 여행 시작후 좀 더 열심히 돌아다녔다면 이곳도 일찍 발견해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그런 희미한 아쉬움은 금새 사라진다. 여행은 신기한 거 많이 본다도 성공하는게 아니니까.

숙련된 주방장이 완숙미 넘치는 손놀림으로 부드러운 면을 뽑아내듯이, 느긋하게 마음이 가는대로 즐기기만 하면 된다.

이런 여행에 익숙한 사람들이야, 가이드북에 실려있는 관광지들을 하나라도 더 체험해 보고 싶은 마음 이해하지만

자전거 여행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조급해 지는 순간을 많이 경험하게 된다. 느긋한 여행에서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다.

 

정류장에 내려서 한가롭게 휴식중인 호리카와 유람선의 모습을 담아본다.

마츠에 성 주변을 1시간 가까이 유랑하는 이 배는 선착장이 몇 군데로 나뉘어 있어서, 여행하다가 편한 곳에서 승선이 가능.

지금 이녀석 타기엔 시간이 좀 촉박하니 그냥 사진으로만 담기로 한다. 물이 영 깨끗하지 않는게 조금 거슬린다.

호리카와 강 원류는 깨끗한 편이지만, 워낙 지류가 여기저기 많이 나눠진 녀석이라 이런 곳은 물흐름이 좋지 않다.

 

 

 

북오프에 들어가기 전, 맞은 편 약국에서 오늘 저녁을 대비한 멀미약을 구입한다.

강한 녀석은 몸에 좋지 않으니 액상으로 된 조그만 녀석을 구입. 2병으로 나눠져 있어서 상태를 봐 가며 마실 수 있다.

가능하면 마시지 않는게 좋겠는데, 막상 어지러울 때 이녀석이 없으면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으니 일단 챙겨가는게 좋을 듯.

 

일본의 약국은 한국의 그것과는 좀 다르다. 한국의 약국과 똑같은 곳도 있는데, 왠만한 이마트만한 녀석도 꽤나 많다.

그런 곳에서는 전문 처방뿐 아니라 왠만한 보조식품, 미용도구, 비타민, 음료수, 심지어 과자나 컵라면까지 판다.

다이어트 라면이라던가, 묘하게 건강과 관련된 제품들로 채워져 있으니 일반 마트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긴 하지만.

 

일본은 의사 처방없이 구할 수 있는 상품들이 상당히 많아서, 약국이라고 해도 오만가지 상품이 존재한다.

한국에서 구경하기 힘든 곳이니 그곳을 둘러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는 관광.

 

멀미약을 구입 후, 옆에 보이는 도시락집으로 이동. 계속 목표였던 북오프를 재쳐두고 딴길로 새는 느낌이 든다.

한국에도 도시락집이 꽤나 성업중인데, 일본도 역시 편의점 도시락보다는 이렇게 바로바로 만드는 집이 더 맛있는 편.

호텔서 조식을 먹었으니 도시락까지는 필요없고, 그냥 반쯤 기념삼아 닭다리 한조각이나 구입해서 뜯어먹는다.

한국의 닭다리보다 양념맛이 훨씬 약하고 부드러운데, 저질 프라이드 치킨의 뼈 근처에서 풍기는 비린내가 없어서 먹기 좋다.

 

 

 

북오프는 마츠에 시의 크기에 비교하면 꽤나 준수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역시 중고품 전문점이기 때문에, 발매된지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게임소프트는 없었다.

인기가 있는 녀석인지, 그 게임소프트 중고를 고가 매입합니다 라는 안내문을 적혀 있다. 결국 친구녀석의 부탁은 실패.

애초에 마츠에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녀석이니, 이런 시골마을에서 게임 소프트를 구해달라는 것 자체가 무리였지.

 

그것과는 별개로 가볍게 읽을 책을 한권 샀는데, 페리 안에서는 아무리 멀미약을 먹어도 책을 읽기는 힘들 듯 하다.

그냥 한국에서 시간날때 읽으면 되니까 상관은 없다. 중고라고 해도 책이 워낙 깨끗하니 이득본 느낌도 들고.

 

의외로 약국, 도시락점, 북오프 세 군데만 돌아봐도 시간은 금방금방 흘러간다.

마츠에 시내는 버스가 그리 자주 돌아다니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남아도 미리미리 이동하는게 불상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다.

30분 정도 일찍 버스를 타고 역으로 돌아와서, 떠나기 전 마지막을 기념하는 먹거리라도 찾아볼까 해서 역 내부를 돌아다니는데

좋아하는 라멘가게 앞에서 발걸음이 멈추고 만다.

 

사실 마츠에는 화과자 같은 전통 먹거리들이 유명하고, 라멘은 유명한게 별로 없다는게 정설이라서 이제껏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가게 앞에 붙어있는 고객의 목소리에는 '도쿄에서 왔는데 여기서 이렇게 맛있는 라멘 먹을줄은 몰랐습니다' 등의 글이 쓰여있어서 흥미가 동했다.

립서비스일 가능성도 있지만 대부분의 글이 '멀리서 들렀는데 의외로 맛있었다'는 내용.

마츠에가 라멘으로 유명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맛있었다는 의미기 때문에 묘하게 신뢰감이 든다.

 

이곳의 메인은 닭육수에 소금으로 맛을 낸 시오라멘. 돼지육수를 중심으로 하는 다른 라멘과는 달리 시원하고 깔끔한 맛이 특징이다.

인연맺기의 명소 이즈모 타이샤가 세워진 지역이다보니 이 라멘도 인연맺기 라멘이라고, 커플을 상징하는 흰색 분홍색 메추리알이 들어가 있다.

숙주나물과 짭짤한 죽순도 전부 근교에서 구입한 지역특화 상품이라고 하는데, 마츠에가 아직은 청정지역이니 좋은 포인트가 될 듯.

 

점심시간이라서 볶음밥 세트를 주문했는데, 볶음밥은 매우 평범하고 그저 그런 맛이다. 덤으로 딸려온다는 느낌에 딱 맞을 정도.

라멘은 확실히, 이 정도라면 맛없다고 한탄할 정도는 아니다. 시원하고 칼칼한 국물맛이 목으로 넘어갈때 기분좋은 자극을 준다.

돼지 육수를 사용하는 다른 라멘들은 한국사람들이 먹기에 과하게 강렬하고 기름진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그럴때는 이런 시오라멘이 재격.

죽순은 미리 소금에 절여놓은 녀석이라서 반찬 대용으로 먹으면 괜찮다. 아삭아삭한 숙주나물과 면을 함께 집어먹으면 궁함이 좋다.

가격도 크게 비싼편은 아니라, 마츠에에서 라멘이 고프다면 이곳에서 먹어보는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 생각보다 맛있어서 만족한 케이스.

 

 

 

배도 충분히 채웠고 슬슬 버스시간이 다가오니 호텔로 가서 짐을 챙기기로 한다.

카메라 장비와 백팩을 들고 관광하러 돌아다니는건 꽤나 힘들지만

아마 유시엔 쪽에는 물품 보관소가 있을거라고 긍정적인 추측을 해 본다.

 

역 앞에 세워진 이 물 흐르는 기둥은, 표면에 묘하게 굴곡진 탓에 물이 0일정한 패턴을 형성하며 흘러내린다.

고속으로 찍으니 형태가 잘 보이지 않는데, 삼각대도 ND 필터도 없이 장노출을 할 수도 없고.

 

 

 

짐을 챙겨 역앞으로 돌아와 버스를 기다리는데 다시 하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변한다.

이건 비가 올까 말까 걱정할 필요도 없이 스트레이트한 자기주장이라서, 저 너머로 어마어마한 비구름이 올려오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로써 이곳 여행하는 3일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게릴라성 호우를 경험하게 되는데, 일기예보에서도 요즘 날씨가 참 이상하다고 멘트를 날리긴 하더라.

 

한국에서도 폭염과 태풍 때문에 말이 많은 여름이었지만, 그럴 경우 대체로 일본쪽이 한국보다 더욱 그 증상이 심한 편.

이쪽도 폭염과 폭우 때문에 사망자도 생기도 재산 피해도 꽤나 컸다고 한다. 여름이 지나가려니 이제는 게릴라성 호우가 출몰중이고.

하필이면 야외 정원 산책하러 가는데 저런 구름이 다가오고 있으니 조그마한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좀 전까지만 해도 덥고 쨍쩅한 하늘이었으니, 지나가는 폭우라면 내리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을거라고 기대해 볼 수 밖에.

 

유시엔까지는 일본의 느긋한 버스속도로 운행해도 20분밖에 걸리지 않는데, 역시 그 속도로는 비구름에 금새 따라잡힌다.

버스 안에서 만나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미친듯이 쏟아지는 비는

창문을 전부 닫은 버스 안에서도 귀가 얼얼할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천둥까지 뿌린다. 번쩍하고 몇초 지나지 않아 폭발음이 들리는걸 보면 굉장히 가깝다.

슬쩍슬쩍 바닷가가 보이는 시골길을 달리고 있는데, 옆에서 보기엔 시야가 거의 제로에 가까울 정도로 폭우가 쏟아진다.

조금도 과장 보태지 않고, 구름 위를 떠다니는 느낌. 왜냐하면 창밖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밑의 도로조차 보이지 않기 때문에.

기사분이 대체 어떻게 운전하는지 궁금할 정도로 시야가 제한되어 있다. 워낙 가까이서 내려치는 번개 덕에 마치 전장 한복판을 달리는 듯한 분위기.

 

 

 

유시엔에 내리는 사람은 세 명. 당연히 나를 포함해 젊은 한국인 커플 한쌍 뿐이다.

이런 폭우속에 야외 정원인 유시엔을 구경하러 내리는 사람들이란.

어차피 승선시간을 계산한 움직임이기 때문에 페리가 기다리는 사카이미나토까지 가 봤자 의미가 없긴 하다.

가슴이 후련할 정도로 신나게 쏟아지는 비를 보니 오히려 엔돌핀이 분비되는 듯 하다. 저절로 피식피식 웃음이 나온다.

어차피 유시엔에 배정한 시간은 충분히 남았고, 설마 3시간 가까이 비가 계속 오진 않으리라 생각하니까.

만약 정말 3시간 가까이 내린다면 그건 그거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비오는 정원을 어떻게든 슬쩍 둘러보고 돌아가는 수 밖에.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 바로 조그만 식물원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비 피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곳 통로를 지나면 바로 유시엔인데, 지금 가 봤자 의미가 없으니 벤치에 짐을 다 풀어놓고 비구경이나 한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중에는 번개가 내려치는 순간을 포착한 진귀한 녀석들이 있는데

타이밍만 잘 잡으면 정말 찍을 수 있을 만큼 번개가 가까운 곳에 떨어진다.

번쩍하고 나서 5~10초 정도 후에 우르릉 거리는 그런 번개가 아니라, 번쩍하고 1초쯤 되어 바로 귓전을 때리는 폭탄같은 굉음.

가까운 곳에서 번개가 칠때는 정말 온 하늘이 플래시 터트린것처럼 새하얗게 물든다. 아주 신선한 경험이라 즐겁다.

 

식물원은 지붕이 있으니 카메라 들고 두리번거려본다. 바깥에 내놓은 녀석들에게는 단비가 되고 있다.

식물원이라기 보다는, 동네 할머니가 손질하고 판매하는 조그만 꽃가게 같은 느낌인데

꽤나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대부분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긴 하지만.

 

 

 

이런 걸 분재라고 하던가. 작은 공간에 큰 녀석을 오랫동안 길러서 자연상태처럼 나이먹어 보이게 한다는 취미활동.

 

당연히 원래 지면에서 자라는 것보다 영양도 공간도 부족하니 일정 크기 이상으로 자라진 않는데

식물은 동물과 달라서 이런 식의 스트레스 요소가 오히려 수명을 연장시키기 때문에, 사실상 분재의 수명은 자연상태보다 더 길다.

일본에서는 500년 전의 분재가 아직 살아있다고 하니까. 하지만 역시 인간의 취미활동이지 이녀석들을 먼저 생각하는 행동은 아니다.

 

 

 

오키나와에서 자주 보던 녀석. 암술로 보이는 부분이 두세 개씩 피어나는게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도 본 기억이 날랑말랑 하는데 아직도 이름은 찾아보지 않고 있다. 이름 같은거 없어도 잘 클 녀석들이니까.

 

 

 

버스 정류장에서 바로 유시엔으로 이어졌다면 지금쯤 얼마나 생고생을 하고 있었을지.

비가 오니 제대로 구경도 못하고, 우산 빌려쓴다고 해도 사진 찍기는 보통 고역이 아니다.

작지만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식물원 덕분에 심심하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동네 아주머니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수다를 떨면서 이런 화분을 사 가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곳과 유시엔은 무슨 관계인지 조금 궁금하다. 버스 정류장 위치를 봐서는 이곳을 지나서 유시엔으로 가는게 정식 코스인데

그런 것 치고는 동네 아주머니가 열어놓은 평범한 가게같은 느낌. 적어도 관람을 위한 장소는 아니다. 대부분이 판매용이니까.

그런 반면에 번듯한 공공 화장실도 있고, 사람은 안들어 있지만 안내소를 겸한 사무실도 자리잡고 있는걸 보니 조금 애매하다.

 

애시당초 유시엔이라는 정원이 대체 뭐하는 곳인지도 모른다. 그냥 여행가기 전 볼거리를 슬쩍슬쩍 찾아보다가 눈에 들어왔고

위치상 페리 타기전에 들러보기 딱 알맞은 곳이었다는 이유 하나때문에 찾아온 곳이니.

비가 그치고 나서 유시엔에 들어가더라도 생각보다 별 볼일 없는 곳이면 좀 아깝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

 

 

 

뭐가 어찌됐든 이런 폭우 속에서 비를 피할 곳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

마츠에 시내를 돌아다닌다고 해도 이런 빗속에서 제대로 이동하기는 쉽지 않았을 테니까.

조금씩 약해지는 느낌이 드는데, 버스 안에서의 폭우는 정말 눈과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그래도 이틀 연속으로 쫄딱 젖었던 지난날보다는 훨씬 즐겁다. 일단 비는 맞지 않으니까.

탁 트인 농촌마을 하늘에서 쏟아내리는 비의 박력은 확실히 도시의 그것과는 다른 재미가 있다.

주위가 완전히 잿빛으로 변하는 것이 살짝 기분을 침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꿋꿋이 경고의 색을 발산하는 녀석이 더욱 돋보이는 장점도 있다.

언제가 되더라도 그치긴 그칠테니 자판기에서 음료수 하나 뽑아마시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어쨌든 여행이라서 이런 것도 좋은 법. 평일 낮에 내리는 비 구경하면서 느긋하게 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이란 것도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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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바를 거뜬히 비운 다음 역쪽으로 걸어간다.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 조금씩 피곤이 쌓일 즈음.

좀 전에 지나쳐 왔던 개미공방에 들어가 보려고 하는데, 젊은 커플손님이 안에 있어서 살짝 망설이기도 했다.

아트공방은 너무 시끄러워도 너무 조용해도 문을 열때 살짝 긴장감이 도는 느낌.

 

그래도 뭔가 재밌어 보이는 공예품들이 창문 너머로 보이길래 큰맘먹고 안으로 돌격한다.

 

 

 

주인장이 먼저 온 커플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동안

팜플렛에 소개되어 있던 녀석을 먼저 살펴본다. 지인의 작품을 대신 전시해 주는 특별 기간인 듯.

 

다양한 종류의 나무조각을, 원본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정도까지 다듬은 후

눈이 동글동글한 새 한마리를 그려넣고 격언이랄것도 없는 짧은 문구 하나를 적어놓은 녀석.

사용법은 스스로 만들어 보시라고 적혀있다. 목걸이나 열쇠고리로 제격일 듯 한데.

 

다양한 종류의 나무를 사용해서 손의 감촉, 무게, 색깔, 향기 등이 꽤나 차이가 난다.

모양도 불규칙한데다가, 뒤에 적혀있는 글자도 랜덤성이 강해서 한참 보고 있어도 고르는 맛이 있고.

문득 제천 솟대박물관에 늘어서 있던, 자연 그대로의 나무조각만 모아서 완성시킨 솟대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 하다.

도시에 살고 있으면 의외로 다양한 나무의 질감과 차이점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어서 더욱 반갑기도 하고.

 

막 태어난 조카한테 부적 대신으로 하나 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한참동안 만지지도 못하겠지만

생후 첫 선물이니 나이가 좀 먹은 후에 가지고 있어도 충분히 역할은 할 것 같고.

똑같은 녀석이 하나도 없어서 약 30분 가까이 심혈을 기울여 계속 적당한 녀석을 찾아본다.

 

주인장 아주머니가 아마 좀 당황스러웠을지도 모르지만, 여간해서는 뭔가 딱 맞는다 싶은게 손에 잘 들어오질 않는다.

결국 크기나 모양, 색깔이 제일 무난하다 싶은 녀석을 고르긴 했다. 뒤쪽에는 'ゆっくり、ゆっくり' 라고 적혀 있다.

뜻은 여기서 해석하지 않아야지. 조카가 혹여 몇년 후 뜻을 물어본다면 가르쳐 주겠다.

 

 

 

사진 촬영 허락을 받고, 그리 적극적이진 않지만 조금씩이나마 대화를 시도해 본다.

전부 자기 작품은 아니고, 지인들의 작품도 정기적으로 전시를 한다고. 방금 전의 나무조각들은 친구의 작품이지만

앞의 유리선반 위에 올려진 나무 조각품들은 본인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풍경을 보면 느껴지겠지만 상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공간이라기 보다는, 상품들과 공방이라는 공간 자체가 하나의 작품인 듯한 느낌.

뭔가를 구입해야지 라는 생각보다는 그냥 천천히 돌아보면서 분위기를 감상하는게 더 적합한 방법일 듯 하다.

 

 

 

여러가지 악세사리와 함께, 안쪽에는 가볍게 커피를 즐길 수 있는 테이블도 마련되어 있다.

마침 손님도 나밖에 없어서, 주인장 아주머니와 커피 한잔씩 하면서 재미있는 대화를 이끌어 갈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설명하기 어려운 부담감이 계속 엄습해 와서 그냥 소심하게 몇가지만 슬쩍 물어보는 수준으로 끝나고 말았다.

 

개인공방이라는 게 참 푸근하고 정감있는 곳일텐데, 나는 이상하게 이런 공간에 발을 들이는데 조금의 긴장을 필요로 한다.

좋은 공방은 판매를 위해 전시된 제품이 아니라 공방 자체가 주인의 예술성을 주장하는 공간이라서

굉장히 폐쇄적으로 집필활동을 하는 본인 성격상, 왠지 쉽게 건드려서는 안될 초조함을 느끼는 것일지도.

 

기회가 있다면 혼자보다는 누군가 함께 오는 편이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대할 수 있을 것 같다.

한참동안 혼자 둘러보고 있으니 주인장 아주머니는 까페 깊숙한 곳에서 여러가지 나무조각에다가 뭔가를 만들고 계신다.

이번 여행에서 기념품에 대한 생각을 아예 하지도 않았지만, 이곳은 몇개 집어가면 나름 괜찮은 선물이라는 느낌이 드는 곳이라서

먹는것 외에는 쓸일이 없는 자금을 조금 과감하게 투자해도 될 듯 하다.

 

 

 

조카의 생후 첫 선물로는 자연미 풍기는 위의 나무조각을 선택했고

줄 사람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내 마음에 드는거 몇개 사 가면 언젠가 누구한테 줄 일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주변을 둘러본 결과, 이 녀석들이 어쨌든 제일 귀엽고 앙증맞다. 이렇게 간단한 발상임에도 흉폭할 정도의 귀여움과 개성이 살아있다니.

 

여유가 아주 많았다면 종류별로 여러개를 사 오고 싶었지만, 아무리 단순해도 어쨌든 예술품의 일종이니 저거 한개에 내 밥값은 된다.

인연이 있으면 다시 올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일단 이것 중에서 하나, 그리고 이것과는 조금 다른 모양이지만 역시 훌륭한 조각품 하나를 구입.

 

아주머니께서 받침판 필요하시면 하나 가져가시라고, 동그랗고 넓적한 나무조각들을 여러개 보여주신다.

그냥 손바닥만한 나무줄기를 양파 썰듯이 잘라놓은 조각인데, 나무 공예품의 받침판으로는 딱이다.

이즈모의 지역특색이 살아나는 기념품은 아니지만, 이 부근이 예술로 유명한 곳이니까 이런 녀석들도 좋지 않을까.

이런 부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질 녀석들이 많아서, 왠지 지갑을 쥔 손이 두려워지는 느낌도 든다.

 

 

 

마츠에로 돌아가는 기차도 한시간에 한두 번 정도밖에 없기 때문에

괜히 시간낭비 하지 않으려면 돌아가는 기차 시간은 알아보고 가는게 좋다.

이런 말 하는 본인은 사실, 시간 남으면 앞에서 커피나 한잔 해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출발 5분전에 딱 맞춰서 도착.

 

일단 돌아가서 남는 시간을 좀 활용해 볼까 싶어서 전철에 올라탄다.

전철 오른쪽에 그려져 있는 고양이는 시마네현의 마스코트 시마네코.

왼쪽의 눈매 사나운 캐릭터는 '매의 발톱단'이라는 플래시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요시다군.

예산이 있다고 말하기에도 어색할 정도의 초저예산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캐릭터인데

혼자서 감독, 연출, 성우, 작화 전부 다 도맡은 원작자 FROGMAN 의 고향이 이곳 시마네현이라서

전국적 컨텐츠가 극히 부족한 이곳에서는 꽤나 밀어주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병맛넘치는 애니메이션을 시험삼아 한편. 참고로, 모든 목소리는 감독 혼자서 낸다.

 

 

 

 

 

전철 통로에는 시마네코의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이 찍혀 있다.

특출날 것 없는 마스코트지만, 이런 소소한 곳에 인상을 꾸준히 남기는 것이 정석이겠지.

돈이 많은 쪽은 그런 마스코트를 주인공으로 해서 아예 애니메이션까지 제작하곤 하지만

일본에서 뒤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적은 시마네현의 입장에서는 이런 형태로 노력하는게 좋은 선택이라고 본다.

 

 

 

한시간쯤 달려서 마츠에 역으로 돌아왔는데, 이쪽은 하늘 색이 영 심상치 않다.

일기예보란게 마츠에쪽에만 딱 들어맞는 녀석이었을까. 이즈모와는 그리 거리가 멀지도 않은데.

아무튼 어꺠에 살짝살짝 비가 흩뿌리는게 영 불안하기 그지없었지만

역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편의점보다 훨씬 저렴한 대형마트 이온(AEON)이 있어서 서둘러 그쪽으로 향한다.

이번 중국 시위대에게 박살난 그 이온 맞다.

 

도시락이나 음료수 전부 아껴봤자 300엔 정도밖에 차이나지 않지만, 이온에 가려는 건 그것때문만이 아니라

친구가 구해달라고 하는 게임소프트를 찾아보기 위해서. 하지만 워낙 시골이라서 그런거 없을 가능성이 높다.

안내센터에 물어보니 이곳 이온과, 다리건너 있는 전자제품 양판점 데오데오 두 군데가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일본만 가면 꼭 게임소프트 사달라고 하는데, 구할 수 있으면 구해주는게 어쩄든 나쁠거 없으니 발걸음을 옮겨본다.

날씨가 영 불안하긴 해도 이 정도면 맞아도 걸어가면서 말라버릴 정도의 가랑비라서 다행인데.

 

시골이라고는 해도 일단 시마네현 제1의 도시다보니, 이온 마트는 상당히 큰편이다. 건물 안애 영화관과 게임센터까지 있고.

전자제품쪽에서 찾아보니 친구가 찾는 게임은 신발매품이라서 이곳엔 아예 들어오지도 않았다. 유감이로군.

허탕치고 그냥 돌아가기는 뭣하니, 지하 식품매장에서 먹을거 대충 사고 푸드코트에서 소고기덮밥 한그릇 먹는다.

여행이란게 중간중간 군것질 없이는 금새 배가 허해지는 녀석인데다, 일본은 음식 양이 적어서 그냥 삼시세끼로는 포만감을 느낄 수 없다.

지금 소고기덮밥을 먹어도, 어차피 숙소에서 쉬다보니 입이 심심해질거라 생각하고 오징어다리와 맥주 한캔을 건져온다.

 

 

 

이온을 나오자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다. 조금씩 내리던 비가 억수같이 퍼붓기 시작한다.

어제 비를 신나게 맞은 경험이 있어서 더 이상 맞고싶진 않은데, 일단 시간은 넉넉하니 그냥 기다려 보기로 한다.

일기예보에서 맑다가 갑자기 소나기라고 했으니, 기다리다보면 다시 맑아질 거라고 희망적인 예측을 하면서.

 

그래도 약 30분간 아주 신나게 내리는데, 기다리는게 지겹긴 해도 우산 사서 나가기는 싫다.

이쯤되면 거의 자존심 싸움으로, 어차피 버리고 가야 할 싸구려 비닐우산을 비싼 돈 주고 산다는 건 아무래도 거부감이 든다.

비싼것도 아니고 몇백 엔밖에 하지 않긴 한데, 한국에 비하면 비싸고, 그런데다 돈 쓰기는 이상할 정도로 싫다.

 

그래서 비 그칠때까지 사진이나 찍으면서 논다.

대도시 전자상가 근처에 밀집한 메이드까페란게 여기도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고

그 메이드까페란게 다른 곳에서 본 샤방샤방한 것과는 달리,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은근히 들어가려는 그렇고 그런 업소같은 분위기라서 더욱 놀랐다.

저게 메이드까페라고 쓰여있지 않으면 캬바레로 보이지 메이드까페로 보이나?

보통 메이드까페 앞에서는 메이드복장을 한 아르바이트생들이 호객행위를 하곤 하는데

그러기는 커녕, 벽화에 그려진 메이드마저 검은색 실루엣으로 표현해놓다 보니 이건 뭐...

 

 

 

비가 오니 한 곳에서 주변을 계속 살펴보게 되고

고정된 화각에서 오래 살펴보다 보면 문득 담고 싶을만한 요소들이 슬그머니 떠오를 때가 있다.

사진 담으러 다닐때 조급해서는 안되는 이유중 하나지만, 이렇게 빗줄기에 의해 억지로라도 멈춰지지 않으면

사람이란게 자기 마음을 그렇게 간단히 컨트롤 할 수 없는 종족인가 보다.

 

비가 그치길 기다리면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다지 싫지 않은데

결국 또 신지코 호수의 일몰을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은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아쉽다.

어제부터 계속 저녁에는 날씨가 영 좋지 않은데, 지금 상태라면 일몰을 볼 수 있을만큼 하늘이 맑아질 가능성은 극히 희박.

그냥 인연이 아닌가보다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까지 미친듯이 보고 싶은것도 아니니 기회가 되면 언젠가 볼 일이 있겠지.

 

자전거 여행중에는 아주 멋진 일출스팟이 있다고 누가 소개해 줘서, 큰맘먹고 거금 들여 그곳 앞의 호텔에 하룻밤 투숙한 적도 있었는데

특수한 여행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평범한 여행중에는, 똑같은 상황이라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차이가 나는것 같다.

지금 자전거 여행중이었다면 신지코 호수의 일몰을 보지 못하고 통과하는것을 굉장히 안타깝게 생각했겠지.

 

 

 

바람을 동반한 폭우라서 전신주가 재미있는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비는 미친듯이 내리는데 정작 전신주는 한 쪽만 시커멓게 젖어있고, 반대편은 물기가 없이 깨끗한 것.

20분쯤 보고 있으니 서서히 반대편도 물들어가기 시작하는데, 왠지 중세의 공성전을 생각나게 해서 재밌게 관전중이다.

 

저 반대편 전신주마저 완전히 젖어버리면 내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라서, 비닐 우산을 하나 구입해버릴 것 같은 충동에 휩싸일듯 한데

묘하게도 30분쯤 내리던 비는, 아주 조금의 마른 공간을 남겨놓고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한다.

기회는 이때뿐이라고 생각하며 성큼성큼 진격.

 

 

 

그런데 하늘이 불쌍하다고 한번 던져준 기회를 또 이렇게 놓치고 만다.

비가 그쳤다고 열심히 걸어가다가, 강 건너편에 있다는 양판점에 결국 한번 가보자고 다리를 건너버린 것.

 

이온에서 숙소로 바로 걸어가면 15분쯤, 이온에서 데오데오에 들렀다가 숙소로 가면 30분쯤 걸린다.

사줘야 할 의무는 없지만, 그래도 혹시 거기엔 있을까 싶어서 결국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넓직한 다리 한가운데를 지나는 도중 결국 인내의 한계를 드러낸 빗줄기가 다시 무정히도 쏟아지기 시작한다.

방금 전과는 달리 다리 한가운데라서 숨을 곳도 없다. 결국 어제 마츠에 성에서와 같이 쫄딱 젖어버릴 수 밖에.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그 비를 맞아가며 다리 위의 풍경도 한장 남긴다. 그냥 될대로 되라는 기분이었으니.

다리를 건너면 바로 시민회관 비슷한 건물이 있고, 거기에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 보이니 거기까지만 힘내기로 한다.

그래도 5분 넘게 폭우를 맞았으니 어제와 똑같은 꼴이 되고 말았지만.

 

 

 

간신히 지붕있는 건물로 대피했지만 또다시 30분간 비가 그칠 생각을 않는다.

방금 쫄딱 젖어가며 건너온 다리가 유독 길어보이는 느낌.

일기예보를 보면 분명 우산을 들고 다녀야 했지만, 카메라 장비때문에 우산은 워낙 거치적거릴 뿐이라

비가 오면 맞을 각오를 하고 나왔다. 하지만 진짜로 맞아보니 이건 이거대로 영 기분이 좋지 않다.

 

여기서 데오데오까지는 5분쯤. 데오데오에서 숙소까지는 15분쯤 걸리니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비를 맞으며 이동하기에는 여러가지로 힘든 길이다. 꼭 이렇게 하루 한번씩은 비에 얻어맞는 여행도 참 오랜만.

이렇게까지 애를 써서 왔는데, 친구녀석의 게임소프트를 찾을 수 없다면 그건 그거대로 참 맥빠질듯 싶다.

 

결국 이 비도 30분 정도 지나니 물러가는데, 여기서부터는 오래된 상가거리가 주욱 이어지기 때문에 큰 걱정이 없다.

역 주변의 오래된 상가거리는 천막으로 지붕을 줄지어 만들어 놓은 경우가 많아서, 비가 와도 그 안을 잘 걸어가면 크게 문제가 없으니.

기대를 안고 데오데오로 들어갔지만, 이곳은 아예 게임기 코너가 존재하지 않았다. 크게 실망.

마츠에 시내의 관광지 한두군데는 더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그걸 다 포기하고 두 군데나 걸어다니 찾아본 게임소프트는 결국 꽝이었다.

게임을 살 수만 있었으면 젖어버린 옷과 머리카락도, 둘러보길 포기한 관광지도 다 흘려보낼 수 있었는데, 완전히 헛수고한 느낌.

하긴 이런 시골에서 최신 게임 사려고 돌아다닌다는것 자체가 좀 웃기는 일이긴 했다.

친구도 없으면 어쩔 수 없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부탁을 받은 쪽에서 성의없이 찾아보기는 힘들고.

 

답답한 가슴은 비닐봉투 안에 든 캔맥주 한병이 해결해줄거라 믿고, 어둑어둑한 구 상가거리를 지나서 숙소로 돌아간다.

내일은 귀국행 페리를 타는 날이지만, 출발이 저녁 7시라서 아직 여기저기 둘러볼 여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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