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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멘'에 해당하는 글들

  1. 2013.01.25  도쿄 산책 - 삿포로 라멘 스미레 18
  2. 2013.01.20  도쿄 산책 - 요코하마 라멘 박물관 20
  3. 2013.01.18  도쿄 산책 - 카모메식당의 고향 10
  4. 2013.01.07  도쿄 산책 - 관광, 식사, 그리고 쇼핑 18
  5. 2012.12.15  도쿄 산책 - 타이토구 토박이 18
  6. 2012.10.11  산인 여행 - 비 그리고 비 18

 

 

본인은 이런 추억에 젖을 만한 나이는 아니지만

어릴적 아버지께 들었던 기억은 난다. 마을에서 누가 흑백 테레비 한대 샀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애들은 물론 마을사람 전체가 모여와서 함께 시청하곤 했다는 그런 류의 이야기.

 

지금도 서울역 안의 거대 TV 앞에서는 여전히 시대를 뛰어넘은 광경을 쉽게 볼 수 있지만

이곳의 이 TV는 과연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 건지 조금 궁금하다.

정말 오리지날 흑백 브라운관을 어떻게든 계속 사용하고 있는건지

요즘 TV에다가 겉만 저렇게 옛날 티나게 만들어 놓은건지.

 

영상이 반복재생 되는걸로 봐서 내부에 현대식 장치가 되어있다는 사실까지는 알겠는데

아무래도 LCD 모니터가 아닌 듯한 느낌때문에 묘하게 느껴진다. 어디까지가 오리지날일지.

 

그러고보니 시골의 작은할머니 댁에는 이만큼 낡은 TV도 있긴 했다.

프레임이 나무로 되어 있고, 양쪽 옆에 붙박이 여닫이문이 있던 TV.

없어진지 오래지만, 지금까지 갖고 있었다면 나름 가치가 있는 녀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청법이다 셧다운제다 하면서 물심양면 완벽한 독재와 겸열의 부활을 꿈꾸는 요즘 한국의 꼬라지를 생각하면

이런 저속한 옛 거리 모습의 재현이란 낯뜨겁고 부끄럽기 그지없는 퇴폐적 풍경일텐데

이곳에서는 이런 풍경으로 돈 잘 벌고 있는듯 하다.

 

하긴 돈이 주머니에서 샘솟고 넘쳐서, 인터넷 따위 사용할 필요 없이

화려한 대구의 밤문화를 얼마든지 직접 즐길 수 있는 우리 국회의원 어르신들이야

자기 딸내미 나이의 여자들 껴안고 나뒹굴 수 있을테니, 이런 추한 옛 모습은 저속하게도 느껴지시겠지.

 

캬바레라는 말은 요즘 한국에서도 많이 쓰는지 모르겠다. 일본은 이 단어 별로 안쓰는 것 같던데.

요즘엔 스낵바라는 말을 많이 쓰는듯 한데, 이쪽 방면으로는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문에 붙은 찌라시는 칼립소 쇼라는걸 선전하고 있는데, 뭔가 싶어서 찾아봤더니 카리브해 부근의 경쾌한 전통 음악이란다.

1958년도의 허름한 캬바레라는건 의외로 국제화에 빨리도 눈을 떴나보다.

 

옆의 조그만 창문에 붙어있는 찌라시는, 호스티스 모집이라고 적혀있다.

그러고보니 청량리 롯데백화점 갈때, 그 뒤쪽의 그렇고 그런 거리를 지나간 적이 있었는데

2012년의 경험이지만, 생각해보니 1958년의 이 모습과 놀랄 정도로 비슷비슷한 느낌이다.

역시 가장 기본적인 운동을 산업화한 업종이다보니, 50년쯤 지나도 별로 발전이 없는건가 싶기도 하고.

 

 

 

시간이 점점 흘러서, 더 지채하다간 폐점시간까지 정말 라멘 못 먹을 위험성이 있으니

서둘러 한그릇 먹으러 발걸음을 옮긴다.

 

잠시 생각해 봤는데, 길을 잘못들어 지하 1층부터 시작한 탐험이니까

그건도 인연이다 생각해서 지하 1층에 위치한 라멘집으로 들어가 본다.

 

지난번 포스팅 사진에서 볼 수 있듯, 대부분의 라멘가게는 지하 2층에 빙 둘러서 영업중인데

좁디 좁은 1층 통로에도 영업중인 가게가 있다. 지하 2층이 왁자지껄한 시장 한복판이라면

지하 1층의 통로에 자리잡은 라멘가게는, 그 음침하고 어두운 조명만큼이나 훨씬 진득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마침 팔짱끼고 즐겁게 돌아다니는 젊은 커플들과 달리 난 아저씨 냄새 풀풀 풍기는 솔로니까 왠지 분위기에도 어울리는 듯 하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곳은 삿포로 라멘 전문점 '스미레'라는 곳.

삿포로 하면 역시 된장을 베이스로 한 미소라멘인데, 아무 생각없이 메뉴 자판기에서 미소라멘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순간적으로 옆에 있는 버튼에 눈길이 갔다. '옛날식 라멘(昔風ラーメン)' 이라는 메뉴가 눈에 보인 것.

 

이 옛날식 라멘이라는 이름은 참 오랜만에 들어본다. 자전거 여행의 여파도 있겠지만, 일본 중에서 홋카이도를 가장 좋아하는 나로서는

기억에 오랫동안 남아있는 단어인데, 이 단어를 다시 보는건 근 4년만이다.

 

'옛날식 라멘'이라는 건 오직 홋카이도에서만 사용되는 단어인데, 이것은 홋카이도가 라멘의 발상지이기 때문.

라멘이라는 이름이 정착되기 전에는 '중화 소바'라고 불린 이 음식은, 이름 그대로 중국에서 들여온 녀석.

메밀을 중심의 면문화가 발달했던 일본에서, 꼬들꼬들 쫄깃쫄깃한 중국식 면은 매우 생소하고 신기한 이미지로 다가왔었다.

 

중화소바가 가장 먼저 들어온 삿포로에서는, 생선육수 혹은 닭고기 육수에다가 간장으로 맛을 내麩고

돼지고기, 멘마, 계란, 나루토(저기 똥글똥글 말린 오뎅같은 녀석), 시금치, 후(麩) 를 넣는것이 일반적이었다.

한마디로 지금 사진에 나온 저 녀석이 최초의 일본 라멘의 모습이라는 뜻.

 

라멘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쯤에서 고개를 갸우뚱할수도 있겠는데,

쇼유라멘(간장라멘)과 뭐가 다른지 말이다.

 

사실 중화소바 = 쇼유라멘 이라고 생각해도 틀린게 없다. 그리고 삿포로에서만 이걸 '옛날식 라멘'이라고 부르고

다른곳에서는 그냥 중화소바라고 부르는 것과 거의 같은 라멘. 알고보면 조금 맥이 빠지는 이야기이긴 하다.

하지만 어쨌든 라멘의 시작점은 홋카이도의 삿포로였고, 지금은 된장라멘으로 유명한 삿포로지만

라멘의 시대를 연 것은 간장라멘이었다는 조그마한 잡지식.

 

중화소바라고 부르는 라멘은 기본적으로 이 녀석과 거의 흡사하지만

'옛날식 라멘'이라고 따로 구분해서 부를때는 반드시 시금치와 '후'가 들어가는 특징이 있다.

후(麩)는 사진의 라멘 중앙에 둥둥 떠있는 녀석. 얼핏 보면 오뎅 말린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유부 말린것 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한국에서도 통용되던 때가 있었으니 먹어본 사람도 있을 듯 하다.

 

저 녀석은 밀기울, 즉 두부의 비지처럼 밀가루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에서 추출해낸 글루텐이라는 성분을 말려서

마쉬맬로처럼 만든 것이다. 단백질의 일종이고, 밀가루 가공 찌꺼기로 만들기 때문에 단가도 매우 저렴해서

전후 영양부족에 시달리던 일본에서 많이 사용되던 녀석. 단지 저렇게 추출해낸 글루텐 덩어리는 무미 무취였기 때문에

그냥 먹기는 좀 그렇고 해서, 저렇게 육수 위에 얹어놓는 경우가 많았다. 유부덩어리처럼 국물을 흡수해서 맛이 생기니까.

 

우동위에 얹는 유부조각도 사실 저 '후'가 그 기원이다. 좀 먹고 살만해 지니 굳이 맛도 없는 글루텐 덩어리를 쓸 필요가 없었던 것.

하지만 일본의 어느 현 어느 마을에서는 아직 마을사람들 전체가 저 '후'를 국에 넣어서 맛있게 먹고 있다.

저런 조그만 녀석이 아니라, 물 빨아들이면 한국의 호빵만큼 커지는 녀석이라서, 국 안에 넣으면 거대한 건더기가 된다.

저게 복합성 단백질 덩어리라서, 물을 아무리 흡수해도 쭉 찢어지지 않고 여전히 질긴 습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국물을 잔뜩 흡수한 녀석을 쭉쭉 뜯어먹는 그 식감은 상당히 묘한 체험이다.

 

쓸데없는 콩알지식 이야기하느라 길어졌는데, 아무튼 오랜만에 옛날식 라멘이라는 이름을 듣고

비록 된장라멘이 더 맛있을지라도 후회없이 그 녀석을 선택하기로 했다.

이곳 요코하마 라멘박물관이 1958년의 모습을 이렇게도 멋지게 재현해 놨으니, 거기 어울리는 라멘은 당연히 옛날식 라멘이겠지.

 

사실 간장라멘은 모든 라멘의 베이스가 되는 모델이라서, 라멘박물관에서 굳이 이 녀석을 먹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긴 했다.

국물을 만들때 소금라멘이 가장 첨가되는게 적기 때문에 라멘의 기본은 소금라멘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소금라멘은 간장 -> 된장 -> 돈코츠로 이어지는 일본 라멘 가계도와는 완전히 별개로 만들어진 녀석이다.

 

 

 

취향에 맞춰 후추를 조금 뿌리고 후루룩 면발을 들이삼킨 순간

혀가 뇌에 보내는 신뢰성높은 화학신호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의심하는 시간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보기에 정말 평범한 간장라멘인데, 놀랄 정도로 맛있다.

 

간장라멘이 제일 저렴한 편이라서, 자전거 여행중 380엔 정도 되는 저렴한 중화소바 참 많이도 먹었는데

이곳의 옛날식 라멘은 900엔이나 하는 고가니까, 뭔가 다르긴 다르겠지 하고 생각은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되짚어봐도 이 라멘, 내가 이제껏 먹은 녀석중 다섯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맛있다.

 

면의 삶은 정도나 굵기 등을 개별 주문하지 않았는데도, 완벽한 식감에 제대로 우려난 닭육수의 가슴지리는 시원함이 나를 놀라게 한다.

사실 싫어하는 요리만 아니면 대강 맛있게 먹는 성격이라서 이런 표현은 잘 하지 않는데

이 라멘 정말 굉장히 맛있다. 간장라멘이 갖춰야 할 모든 기본기를 최대치까지 끌어올린 레퍼런스 라멘이라 할 만하다.

 

챠슈의 상태, 멘마의 식감, 적당한 반숙계란, 아삭아삭 파조각과 딱 적당히 삶긴 시금치 등등...

평소 번개처럼 음식을 입안에 털어넣는 식습관을 가진 본인이라도,

이번엔 천천히 면을 빨아당기고 숟가락으로 한모금씩 국물을 떠먹으며 최대한 맛을 음미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요 근래 먹은 라멘중에 이렇게 단점을 생각해내기 어려운 녀석은 처음이다.

 

물론 간장라멘이라는 녀석의 범위도 정말 넓어서, 면의 굵기, 삶는 정도뿐 아니라 면의 구성 성분과 뽑는 방법에 따라

완전히 직선으로 뻗은 녀석, 꼬물꼬물한 파마같은 녀석 등으로 다양하게 구분되고, 각각의 맛도 다르다.

간장 역시 무한대의 조합이 가능하다. 미림에 가까운 옅은 간장과 돼지뼈 육수의 조합도 있고

콜라만큼 시커먼 진한 흑간장과 닭육수의 조합 등등... 간장라멘의 바리에이션은 정말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그 모든 바리에이션 앞에 이름을 댈 수 있는게 이 '옛날식 라멘'이라고 생각.

가장 맛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간장라멘이 가질 수 있는 이상적인 가이드같은 느낌에서.

 

 

 

라멘박물관에 입점한 가게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일본 각지에서 모여든 최고의 가게라는

이시다씨의 자신감 넘치는 발언은 확실히 사실인 듯 하다.

일단 이곳에 입점하는 것만으로도 최상급 라멘이라는 평가는 기본으로 따 놓는 것이라고.

 

삿포로 라멘 '스미레' 에서 맛본 라멘을 생각해 볼때, 아무래도 수긍할 수밖에 없다.

라멘의 짠맛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 관광객들 입장에서야, 어디서 뭘 먹으나 그게 그거겠지만

본인은 적어도 일본 라멘에 있어서는 어느정도 평가를 할수 있을만한 입맛을 가지고 있고

이 곳에서 먹은 한 그릇의 라멘 레벨은, 편의상 1~10 까지로 구분한다면 9 레벨 이상의 S급이라고 확신한다.

 

식사를 마친 후 지하 2층으로 내려와서, 1층과는 다른 시끌벅적한 번화가의 모습을 만끽한다.

어디 붙어있는 설명을 슬쩍 읽었는데, 이곳 2층은 1958년대 어느 역 앞에 들어선 거리를 본따서 만들었다는 듯.

지금은 조금 다른 의미로 번성하긴 하지만, 어쨌든 역 앞의 에너지란 확실히 힘이 넘친다.

 

폐점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아서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남은 시간으로 따지자면 라멘 한그릇 정도는 거뜬히 더 먹을수 있지만

스미레에서 라멘 먹은지 5분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 먹어봤자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가 없다.

폐점시간이 3~4시간쯤 남았다면 느긋하게 배를 비운 다음 다른 라멘을 시험해 보겠지만.

 

여기는 또 친절하게도, 입장권 한번 끊으면 그 날은 박물관 밖을 나갔다 들어갔다 해도 관계없는 곳이다.

하지만 이시다씨와의 이야기에 푹 빠져버린 결과, 한밤중에서야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으니

폐점시간을 이렇게 앞두고서는 급하게 먹어봤자 라멘의 맛을 즐기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이것도 좋게 생각하기로 한다. 언젠가 요코하마에 제대로 숙소를 잡고 와서

한 이틀쯤 느긋하게 여유를 내서 이곳의 라멘을 차근차근히 격파해 나가야겠다는 계획을 만들게 해 주었으니 그걸로 만족.

 

어차피 오늘 아무리 용써봤자 안될일은 안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다음의 즐거움으로 남겨두는 수 밖에.

요코하마엔 크루즈 여행 매니아분과도 안면을 텄고 해서, 다시 찾을 이유는 충분히 만들어 놨다.

 

전봇대 위에 걸린 테레비는 정말 오래된 녀석이다. 시간이 되면 누군가가 테레비를 끄고 저 문을 닫아잠궈 버리는 것일까.

당시엔 레슬링이 유행한 듯 하다. 시기상으로 역도산이 활약할 때는 아닌가, 당시 레슬링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서 누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역도산이라는 사람이 한국사람이었다고 자랑스레 기억해야 할만한 인물이 아니라는것 쯤은 안다.

 

 

 

거의 끝물이라서 사람들이 적은 것 하나만큼은 참 기분좋은 일이다.

지하 2층은 1층보다는 좀 더 정리된 듯한 느낌이 들지만. 아무래도 타일이 너무 깨끗한 느낌인데.

 

타일고 그렇고 나무 벤치도 그렇고, 살짝살짝 예전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녀석들이 나와서 약간 아쉽다.

자전거는 상당히 옛날 녀석이고, 뒤에 실은 녀석은 아마도 우편물인 듯.

 

지하 2층은 라멘가게들이 밀집해 있어서, 붐빌때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붐비기 때문에

흐름을 위해서라도 저렇게 바닥에 표시를 해 놓을수밖에 없을 것 같다. 공간이 마냥 넓은건 아니기 때문에

시대 재현과 라멘가게의 원활한 흐름, 두 가지 요소를 만족시키기 위해 이것저것 머리를 쓴 흔적이 보인다.

 

 

 

어디로 향하는 계단인가 싶어서 올라가 봤는데, 마지막까지 센스넘치는 표지판으로 사람을 즐겁게 만들어 준다.

그 위의 금간 듯한 모습은 물론 가짜겠지. 아무리 봐도 진짜 금간 것처럼 보이긴 하는데, 설마 그러진 않았으리라 생각해 본다.

 

다음에는 정식 루트로 차근차근히 즐겨보는것도 나쁘지 않을듯 하다.

 

 

 

올라갈 때 벽에 걸린 사진을 보고 마지막으로 셔터를 한번 더 누른다.

이거 한국에서 비슷한 사진 가져와 바꿔치기해도 모를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고보니 어릴때 제일 맛있었던 불량식품은 뭐였을까...

사실 학교 앞 불량식품은 엄니께서 워낙 강력하게 억압하시는 바람에 또래 아이들 치고는 별로 먹어본 기억이 없다.

 

흰색과 검은색 콩처럼 생긴 밀가루 과자가 달달하게 맛있었던 기억은 나는데.

어릴적 제일 맛있는 과자는, 당시의 나에게 혁명적인 맛을 선사해준 치토스와,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탄산캔디였다.

발바닥 모양의 사탕에 찍어먹던 톡톡캔디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다가, 뭔가 위험했는지 어느 순간부터 사라져 버린듯 하다.

가끔씩 혀가 얼얼할 정도로 퍽 거리면서 터지는 녀석들이 있었는데 그게 문제였으려나.

 

 

 

300엔이 전혀 아깝지 않은 시간여행도 즐거웠고

900엔짜리 '옛날식 라멘'은, 내가 왜 여태껏 이곳을 찾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워하는 계기가 되었다.

 

요코하마 방문의 원래 목적이던, 이시다씨와의 토크 라이브도 문제없이 멋지게 끝났고

친구라고 부르기에는 여전히 어색하지만, 공감할 부분이 많은 즐거운 괴짜들과 인연도 만들고

정통 쉐프가 부지런지 만들어주는 멋진 요리도 즐기며 이야기꽃을 피웠으니

5일간에 달하는 이번 도쿄 여행은, 사실 이 이벤트 하나때문에 온 거나 마찬가지지만

오늘 하루만으로도 그 어떤 후회 한점 남지 않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은 것이나 마찬가지.

 

첫날부터 지금까지 별 생각과 의욕없이 터벅터벅 걸어다니기만 하던 내 컨디션을

일시에 흥분 상태로 각성시켜 준 듯한 기분이다.

 

특히 자전거 여행으로서는 별 의미가 없는 요코하마라도

이렇게 찾아오니 여기저기 즐길거리가 산재한 곳으로 변모하는 것 역시 재미있는 일면.

역시 어떤 형태의 여행이든 각자에게 맞는 즐길거리가 있는 법인가 보다.

 

신요코하마역 앞의 사거리는 교통량이 많아서인지, 이렇게 커다란 원형 고가도보가 만들어져 있는데

야간사진도 문제없겠다, 요코하마에는 좋은 추억도 남겼겠다, 높아진 텐션으로 여기저기 카메라에 담아본다.

 

 

 

이제 2년이나 지난 자전거 여행이라서, 정신차리지 않고 그냥 달려나간 곳의 기억은 애매해진다.

요코하마는 여행 거의 막바지에 슬쩍 통과했을 뿐이라, 기억에 남는 곳은 단 한군데도 없다.

 

자전거여행중이라면 어떨까 하고, 마음을 예전으로 살짝 돌린 후 육교위에서 주위를 바라보니

역시 자전거로 달리고 있었다면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픈 콘크리트 숲이라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하지만 오늘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낸걸 보니

참 여행이란 녀석은 이렇게도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최악의 여행 타입으로 생각하고 있는 단체 투어도

뭔가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지 않을까... 하고 머리를 굴려보는데, 아무래도 거기까지는 무리.

 

국딩 5학년, 한달간의 미국 여행중 1주일쯤 여행사 따라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건 여행이 아니라 거의 고문이었다. 대놓고 요구하는 팁에 흔해빠진 말장난, 형편없는 중국식당으로의 안내 등등.

아무래도 어릴때의 트라우마가 인격 형성에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건 사실인 듯.

 

 

 

숙소로 돌아오니 11시 40분쯤. 일본 여행하면서 이렇게까지 늦게까지 돌아다닌건 오랜만이다.

오늘 잠은 잘오겠구나 싶어, 그것마저도 즐거운 기분. 오늘은 어쨌든 모든 경험이 다 만족스러웠으니까.

 

내일부터는 또 할일이 별로 없어서 대강 부탁받은 물건이나 사러가볼까 싶다.

보고싶은 것들을 하루에 한개씩만 생각해 왔기 때문에, 시간이 상당히 널널하다.

오늘 이벤트는 날짜가 고정된 바람에 다른 계획을 수정해야 했지만

이제부터는 그냥 마음가는대로 뒹굴거리다가 어디 슬쩍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행하면서도 이렇게까지 게을러질 수 있다는걸 온몸으로 보여줘야 할것 같다.

 

라멘 박물관의 구멍가게에서 구입한 100엔어치 추억의 과자들.

사탕이야 별로 변한게 없고, 중간의 저녀석은 사이다맛 가위바위보 젤리.

왼쪽은 담배모양을 한 코코아 사탕이다. 그러고보니 국딩때 애들이 저걸로 폼잡는 모습을 본 기억이 난다.

본인은 엄니의 편집증적인 건강 염려로 인해 불량식품을 벌레보듯 하던 시절이었으니

그냥 옆에서만 바라보던 과자였는데, 나이 서른이 훌쩍 넘어서 드디어 처음으로 맛을 보게 된다.

 

일단 여행 중간중간에 천천히 먹기로 하고, 사탕 하나 빨면서 TV 보다가 새벽 2시쯤 취침.

 

 

원래는 붐볐을테지만, 9시가 다 되어가는 일요일 밤이라 사람들이 별로 없다.

입구쪽도 옛날 방식이라 그런지 제대로 안내표시가 없어서, 어디까지 내려가야 하는지 모르는 바람에

되는대로 지하1층의 어느 조그만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예상하지 못한 골목이 나온다.

 

아마 이곳이 정식 루트는 아닌듯 한데, 그러나저러나 아무 관계없다. 여긴 그냥 구경하고 라멘먹으면 되는 곳이니까.

 

운이 좋았다고 할까,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나타나는 옛날 구멍가게의 모습은 굉장히 인상적이다.

내가 어릴때는 이런 가게가 군데군데 있었는데, 정말 놀랄 정도로 재현도가 높다.

 

 

 

안에 들어가서 사진좀 찍어도 되겠냐고 물어보니 마음껏 직으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내 추억과 상당부분 겹치는 이 가게 안에서 유일하게 별로 겹치지 않는 요소가 가게 주인.

이곳의 할아버지는 굉장히 서글서글하고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는 타입인데

내 기억에, 예전 그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그렇게까지 친절한 표정을 지었던 적은 없었다.

 

이시다씨가 좀 전에 역에서 '그곳에 가면 자기도 굉장히 그리운 느낌이 든다'고 했었는데

과연 그럴만도 했다. 사실 한국에서도 학교앞 문구점에 아직 이런것들 팔고 있지 않으려나.

 

내 경우는 학교 문구점보다, 집 앞의 재래시장 귀퉁이 3~4평도 안되는 쪽방 가게에서 이런 것들 사먹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조립 로봇 장난감조차 50원짜리가 있었던 시절이니까. 500원짜리 프라모델은 각오 단단히 하고 사야 했다.

 

모양만 봐도 대충 한국의 소위 불량식품들과 다를게 없는 친근한 모습이다.

단지, 처음엔 참 정겹고 즐겁게 구경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조금 현실적인 생각이 머릿속에 똬리를 트는 기분.

 

이 사람들의 추억과 나의 추억이 이토록 겹쳐지는 것은

결코 쌍방간의 호의나 순수한 의미에서의 교류로 인해 생성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해방후 40년이 넘었던 그 시절조차 여전히 일제의 흔적은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는 형태로 사람들의 생활속에 녹아있었던 것이다.

 

이런 추억을 향유하는 그 감상적 즐거움조차 분노로 바꾸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어찌됐든 유년시절의 추억이고, 그저 맛있고 신기한 과자들을 싸게 먹을 수 있어서 재미있었던 기억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머리가 굵어지고 난 지금 회상해본다면

그 정형화된 이미지의 근원에 훨씬 복잡한 역사의 흔적이 세겨져 있음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

 

역시 내가 쓸데없이 네거티브에 꾸질꾸질한 성격인 걸까.

몇십년만에 다시 마주하는 추억의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한 켠에 침울해지는 마음이 자리잡는다.

 

 

 

얼굴은 냉정하게 유지하는데 일가견이 있지만

머릿속의 감정을 정리하는건 어쨌든 쉬운 일이 아니다.

조금 더 머리를 비우고, 그냥 순수하게 이곳 라멘 박물관의 옛 거리풍경을 즐기는데 집중하려 한다.

 

슬쩍 가게를 둘러보니, 그때 그 시절만큼 싼건 아니지만 그래도 동시대의 편의점보다는 저렴한 가격대를 유지하고 있다.

이 정도면 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괜찮은 가격대. 아무래도 입장료까지 받는 곳이다 보니 커버가 되는 듯.

추억의 불량식품에 사진빨도 잘 받고, 가격도 싸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다.

입구에 비치된 바구니를 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집어갈만한 녀석을 찾아본다.

 

 

 

아무리 싸다고 해도 손이 가는대로 마구 사버리면 의외로 돈을 써버리게 되는 것이 이런 불량식품류.

이곳에 왔다는 기념 정도의 의미로 적당히 세 개 정도만 담는다.

정겨운 먹거리는 널리고 널렸는데, 가방에 넣고 갈 부피를 생각하니 좀 작은것들로만 챙기게 된다.

이런 류의 간식거리는 가격에 비해 양이 많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해서, 겉보기에 좀 큰것들이 많으니.

 

가게 할아버지는 '딱 100만엔!' 이라고 기운차게 계산해준다. 물론 100엔이라는 의미.

구입하고보니 확실히 예전처럼 싼 가격은 아니다. 요즘엔 일본 편의점에서 100엔으로도 팝콘 한봉지 사먹을 수 있을 정도니까.

 

밖에서 좀 더 주위 풍경을 담고 있으니 할아버지가 나와서 그걸로 기념사진 찍어줄까 하고 묻는다.

본인 사진은 별로 찍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고, 완전한 수동렌즈라 촛점 맞추기가 쉬운편이 아닌 탓에

이리저리 설명을 해 드렸는데, 할아버지가 '비싼 녀석이니 맡기기 좀 그렇지?' 라고 짖궃은 말투로 장난을 친다.

 

 

 

시작부터 정해진 루트에서 완전히 벗어나 버렸기 때문에 홀가분하게 아무렇게나 걸어다닌다.

원래 저 가게는 라멘 투어 신나게 마친 후 돌아가기전 기념품 대용으로 들러보는 곳이었으니까.

 

2층은 두 사람이 간신히 나란히 설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골목길을 회상하며 만들어져 있다.

내가 어릴적에도 물론 여기저기 이런 좁은 골목이 있긴 했는데

어머니 연세쯤 되는 분들의 추억에 남겨져 있는 골목길은 정말 이런 느낌이었을 법 하다.

대구에 남아있는 몇몇 옛 골목들을 보며 어머니가 '예전엔 거리 곳곳에 이런 골목들이 빼곡했는데' 라고 말씀하신적이 있다.

 

방금 전 골목가게까지는 내 추억속에서 회상할 수 있는 범위지만

이 정도까지 가면 역시 나로서도 어딘가 이야기속에서만 들었던 법한 비현실감과 조우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낮에 학교 가면서 이런 골목 분위기를 보지 못한것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의 활동시기는 대부분 아침이나 대낮이었던 고로, 어둠속에서 본모습을 드러내는 이런 거리풍경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이런 박물관의 레벨을 가늠할 수 있는 요소라면 뭐니뭐니해도 그 재현도를 들 수 있겠는데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곳 라멘 박물관의 레벨은 정말 놀랍다고밖에 할 수 없다.

 

군데군데 불이 나간 전구, 너덜너덜해진 간판, 벗겨지고 녹물이 내려오는 콘크리트 벽 등등

지금 이 모든 요소요소들이 전부 철저한 계획아래 정교하게 재현된 녀석인지

아니면 정말 관리를 되는대로 해서 이렇게 되어버린건지 착각할 정도로 빼어난 완성도를 자랑한다.

 

어찌보면 개장 당시엔 저 전구가 다 켜져있었는데, 개장 후 20년이란 세월이 지나고 나니 이렇게 낡아버린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재현도가 뛰어난 이곳은, 계속 걸어다닐수록 점점 현실이라는 시공간에서 멀어져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현실과 망상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은, 망상이 현실만큼 현실적이라는 이유 때문이니까.

 

오른쪽 간판은 삿포로 미소라멘 '스미레' 라고 적혀있는데

그냥 옛날 거리 재현하기위해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고, 진짜로 이곳에서 영업하는 라멘부스중 한곳이다.

마리화나 몇대 빨고 이곳에 들어오면 정말 과거로 훌쩍 넘어온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굉장한 리얼리티.

 

 

 

이곳의 시간대는 아무래도 늦은 저녁, 해가 거의 지면으로 넘어가며 어슴프레한 핏빛만이 지평선에 살짝 스며드는 그런 순간인 듯 하다.

거의 밤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매우 어두운 곳이라서, 이때만큼은 새 카메라 갖고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감도 3200 까지 올리고 조리개를 F2.0 까지 개방해야 겨우 사진을 건질 수 있을 정도.

 

힘겹게 사진을 담으면서도 이 장소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매번 감탄을 금할수가 없다.

이건 1950년대를 그럭저럭 흉내낸게 아니라, 정말 그 시절의 시공간을 뚝 잘라서 가져온 레벨.

건축법상 의무적으로 표기된 소화기 안내판만이 나를 2012년에 붙들어놓는 유일한 이정표라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

 

벽의 낙서, 흘러내린 물 흔적, 색바랜 나무 문과 벽보까지. 무서울 정도의 현실감에 기분이 묘해지는 느낌.

옆의 안내도는 폼으로 만들어 놓은게 아니고 진짜 지도다. 재미있는건 대부분의 가게들이 간판만 존재하는 이름뿐인 녀석들이지만

그중에는 색깔만 살짝 다르고 아무렇지도 않게 끼어있는 진짜 라멘가게도 있다는 것.

 

 

 

골목길을 빠져나오자 눈 앞에 펼쳐지는 모습에 잠깐 넋을 잃고 발걸음을 멈춘다.

좁은 골목길에서부터 시작한 터라 이 박물관의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할 수 없었는데

이곳은 지하 2층이 진짜 라멘가게였던 것. 지하 1층의 좁은 골목거리는 이 가게들의 2층 뒤에 나 있는 샛길이었다.

 

물론 폐점시간이 다가올 정도라서 손님은 그리 많지 않았고

이 정도라면 어느 가게라도 쉽게 들어가서 원하는걸 먹을 수 있을듯 하다.

 

 

 

이곳에서 제일 비현실적인 녀석이라고는 저 하늘그림 그려진 지붕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몇 번을 봐도 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현실적인 재현도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시다씨가 극찬을 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한국인인 내가 느끼는 완성도보다는

직접 이 시대 이 공간을 살아온 이시다씨 입장에서라면 이 정도로 완벽한 고증은 하나의 예술로 느껴질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이 곳의 시대 고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정확하다.

내가 어릴 적에도, 경북 점촌이나 영천 시장골목 정도는 들어가야 간신히 남아있던 이런 담배가게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뽑아낸 듯이 재현해 놓았다. 물론 그 시절의 담배곽까지.

 

도쿄나 삿포로의 라멘 테마파크를 생각한 탓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라멘박물관이란 녀석은

실상을 알고보니 나머지 테마파크와는 비교하는게 어리석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녀석이다.

라멘을 팔아야 하는 공간에 '거만하게도' 입장료까지 받는 건가 싶었던 내 불만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

 

위에서도 언급했듯, 이곳에서 친근함과 그리움을 느낄지도 모르는 한국인의 입장에선

역사가 만들어온 지울 수 없는 상처의 흔적마저 다시 상기시키는 기분이 들 가능성 역시 있기 때문에

이곳과 마주치는 순간 어떤 기분이 들런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복잡난해한 곳.

 

 

 

 

아직 지하 1층을 한바퀴 둘러보지 못했기 때문에 좀 더 걸어본다.

원래 목적은 맛있는 라멘이었지만, 이제와서는 라멘은 그냥 마지막에 맛보면 되는, 그런 레벨로 내려가 버렸고

이곳의 풍경을 좀 더 담아보겠다는 일념이 빈 공간을 채우고 있다.

 

한국은 전후 일본보다 목조건물이 상당히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갔기 때문에

이런 풍경만큼은 한국과 일본의 추억이 상반되는 결과를 도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대문옆에 걸려있는 개량기 모습은 뭐, 예나 지금이나 추억거리가 되긴 하지만.

 

라멘 박물관 소개글을 보면, 1958년대 어린이들은 이런 골목길에서 이렇게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까지 놀곤 했었다고 한다.

인스턴트 라멘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쌀밥 대체음식으로 장려되는 녀석이었는데

라멘이라고 하면 딱 생각나는게 그 시절 이런 장소와 이런 시간대의 풍경이었다고.

 

 

 

정말 문열고 한번 들어가보고 싶을 정도라서 참는데 고생했다.

이 풍경이 진짜 현실이었다면, 아마 저 문 너머에서는 화려하지 않지만 맛있어 보이는 저녁이 준비되고 있겠지.

 

당시 일본은 고도성장시기에 한창 불을 붙이고 있던 시절이라

소시민들의 삶은 여전히 피폐했지만 그래도 나라 전체가 희망에 넘치던 시절이긴 했다.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는것도 그런 이유에서일듯.

 

반대로 한국은 이런 풍경을 감상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대가 조금 더 늦게 시작되었다.

그래서 나같은 젊은(?) 사람도 이런 거리의 풍경에서 조금씩이나마 향수를 느낄 수 있는것 아닌가 싶다.

 

 

 

디자인쪽에서 일해본 사람이라면 동감하겠지만

이런 식의 디테일을 살리는데 세심한 고증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사람이 다른 동식물의 차이점은 구별하기 어려워도, 같은 사람의 차이점은 손쉽게 구별해 내듯이

실제 존재했던 시대상을 재현하는데 있어서, 고증이 조금이라도 어색하다면 사람 눈에 단점으로 쉽게 들어오게 된다.

 

하늘에 홀로그램 쏴올려서 구름 만드는 하이테크까지는 구현하지 못했겠지만

정말 어디 하나 흡집을 잡고싶어도 도무지 찾을수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구성이다.

억지로 잡아내자면, 당시 이런 거리 곳곳에 널부러져 있던 각종 오물과, 지독한 냄새를 풍기던 절임반찬의 강렬한 인상 등등

후각적 요소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는 점 정도일까. 그것까지 구현한다면 아마 라멘 입맛이 떨어져 버리겠지만.

 

심지어 이곳의 구멍가게나 간식파는 가게 등에서는, 맥주나 음료수마저 옛날 유리병에 담긴 녀석을 제공한다.

라멘 가게를 찾는 구실을 만들기 위해 적당히 꾸며놓은 테마 파크들, 도쿄나 삿포로의 가게들이 딱 그 정도 수준이라서

5분에서 10분정도 슬쩍 걸어다니다가 적당히 라멘집 찾아 들어가는게 전부였는데

이곳은 일본 굴지의 라멘가게들이 경합하며 내 놓은 특급 라멘의 맛에 결코 떨어지지 않을만큼

외적인 구경거리가 가득한 곳이라서, '라멘'과 '추억의 거리'가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

어느 한쪽에 편중되어서 나머지 한쪽을 지탱해주는, 손님 입장에서는 왠지 끼워팔기라는 느낌을 받는 그런 테마파크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시다씨를 만나는 것 말고는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던 요코하마에서

이런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건 개인적으로 큰 성과다.

자전거 여행때는 멈춰서기도 어려운 대도시여서 그냥 통과해 버렸는데, 그렇기에 더욱 이번 방문의 가치가 높다.

 

천천히 둘러보며 여기저기 사진을 찍다보니 맨 처음 출발지였던 구멍가게 앞으로 돌아온다.

아무래도 나 말고는 아무도 저 앞의 문을 들락날락 하는 사람이 없는걸 보니

혼자서 길을 완전히 잘못 든 것 같지만 이제와서는 아무래도 좋다.

 

이제는 일본 최고라고 불리는 이곳의 라멘중 하나를 골라서 맛있게 음미해야 할 시간인데

편안하게 추억을 씹어먹으며 걸어다니던 이제까지와 달리 이건 중요하기 그지없는 선택이다.

 

 

이시다씨가 추천해준 요코하마의 관광지는 라멘박물관이라는 곳.

이야기는 들어본 적 있다. 자전거 여행때도 이곳에서 발을 멈췄다면 분명 그곳부터 들러봤을 듯.

하지만 자전거 여행 마지막에 들른 요코하마인데다, 며칠전 온천으로 유명한 아타미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한 뒤라서

이런 번화한 도시는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그냥 통과한 후, 고양이들이 기다리는 느긋한 섬 에노시마에서 마지막 노숙을 즐겼던 기억이 난다.

 

라멘박물관이란 건 확실히 군침이 돌긴 했는데, 그거 하나만을 위해서 요코하마까지 갈 필요가 있나 하는게 이전까지의 생각이었고

도쿄 오다이바의 라면국기관, 홋카이도 삿포로의 라면공화국 등등과 별로 다르지 않은 곳일거라는 판단도 들었다.

확실히 각 지역의 다양한 라멘을 일정 수준 이상의 맛으로 즐기기에 나쁘지 않은 곳이지만

어설프게 옛날 마을 분위기를 흉내낸 그런 라멘전문점이란게, 관광 스팟으로 지정할 만큼의 가치는 없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시다씨가 너무나 흔들림없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라멘박물관을 추천해 주니

이건 내가 알고있던 다른 지역의 그렇고 그런 라멘가게 모음집과는 다르다는 예감이 든다.

이 사람이 오다이바의 라면국기관 같은 곳을 나한테 추천할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니.

 

슬쩍 떠보는 말투로 라멘국기관 같은 곳이냐고 물어보자, 분위기는 그런 곳인데 차원이 다르다고 한다.

일본에 존재하는 그런 류의 라멘판매점의 원류가 되는 곳이 이곳 요코하마의 라멘박물관이고

다른 곳과는 비교하는게 부끄러울 정도의 퀄리티라고. 볼거리도 많지만 입점해있는 라멘가게들의 실력 역시 전국 최상위권이란다.

라멘의 성지같은 곳이라서, 그곳에서 점포는 낸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 맛을 인정받을 정도.

 

얼핏 관광가이드에서 봤을때는 라멘공화국 등등과 별로 다를것 없나 싶었는데

역시 가이드에서 선전용으로 떠드는것과는 차이가 있나보다.

 

일행들과 차례차례 헤어지고, 활기넘치는 여성 한분이 갈아타는 곳 가르쳐 주겠다며 함께 했는데

전광판에 적혀있는 단어로 보건데 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요코하마 거주중인 사람이 가자는데로 따라갔다.

하지만 역시나 그쪽의 착각으로, 갈아타야 할 곳을 지나쳐서 한 정거장 더 와 버렸다.

아무리 요코하마 거주중이라도, 술의 위력에는 다들 계란 말이가 되는 법.

중간에 발이 휘청해서 내가 부축해주기까지 했으니. 결국 그 여성분은 연신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별로 화난건 아니고.

그래도 이 사람들 딴엔 한국서 처음 오는 사람을 위해 최대한 가이드를 해 주려는 마음이었으니.

 

그 자리에서 내가 술을 제일 적게 마셨기 때문에, 사실은 내가 그사람들 배웅가줘야 아닌가 생각도 들었지만

일단 모두와 헤어지고나서 한정거장 돌아와 신요코하마역으로 이동한다.

일본의 적지 않은 대도시가 그렇듯, 도시 이름이 들어가는 역보다 '신' 이 앞에 붙은 역이 더 화려한 경우가 많다.

낮에 왔다면 이런 호화찬란한 쇼핑몰에서 시간 보내는것 역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겠지만

오늘은 이시다씨 토크 라이브 듣는데 모든 시간을 다 할애했으니까. 물론 후회는 없다.

 

 

 

대강 신요코하마역에서 동서남북만 계산해서 무작정 걷는다.

 

혼자 여행할 때의 나쁜 버릇이라면 나쁜 버릇인데, 지도같은거 그냥 머릿속에 잠깐 그려볼 뿐이고

대강 목적지가 표시된 방향으로 그저 걷고 걸을뿐. 그래서 목적지를 지나치는 경우도 많고, 빙 둘러서 시간 걸릴때도 많다.

하지만 시간에 구애되지 않는 여행이기도 하고, 그렇게 의미없이 걸어다니며 그 지역의 분위기란걸 조금이나마 피부로 느낄 수 있으니까.

목적지만을 향해 돌격 앞으로 하는 여행은 역시 다른 사람과 함께 가는 여행만으로 족하다.

 

그런고로, 이번에도 한바퀴 빙글 돌아서 라멘박물관에 도착. 마음먹고 찾으려고 했어도 그리 쉽게 찾을곳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냥 발걸음 가는대로 걸어가던 내 앞에서, 일가족들이 두리번거리며 라멘박불관 찾고 있는 모습을 봤으니까.

특히나 밤에 오게되면, 정말로 겉에서 봐서는 어디가 라멘박물관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평범한 현대식 건물이다.

 

너무 평범해서 외부 사진 찍을 생각조차 잊어버리고 그냥 들어가 버렸으니까.

다른 지역의 라멘 테마파크와 달리 이곳은 입장료라는게 존재한다.

어차피 라멘도 돈내고 먹어야 하는데 어째서 입장료가 따로 필요한건지.

하지만 그건 도쿄나 삿포로의 라멘 파크에서나 통하는 말이고, 이곳은 입장료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이시다씨가 추천해 줬으니.

저녁 8시 30분은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지만, 일본에서라면 대다수의 관광지는 폐점했을 시간대라서

휴일이지만 입장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 정도면 라멘 먹을때 줄서서 기다릴 필요도 없을 듯 하다.

 

맛있는 라멘은 너무나 좋아하지만, 아무리 맛있어도 몇십분씩 기다려 식사하는것에는 큰 거부감을 느끼는 성격이라서

이런 곳에 올때면 항상 긴장하게 된다. 특히 점찍어놓은 라멘가게가 있다면, 그곳을 포기할것인가 줄서서 기다릴것인가에 대한 문제로까지 번지기도 하고.

 

박물관에 들어가자 라멘을 파는 가게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어디 프라모델샾에 들어온거 아닌가 싶은 풍경이 펼쳐진다.

슬쩍 둘러보니 아무래도 1층은 그냥 출입구 + 기념품점 정도의 역할만 할 뿐이고, 본격적인 구경은 지하로 내려가서 시작하는 듯.

 

입구 앞의 거대한 대자보에는 카모메식당이라는 단어와, 그 주위를 무수히 감싸는 응원댓글이 빼곡히 적혀있다.

카모메식당이라는 단어만 봐서는, 어째서 이렇게 대자보에 붙어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바로 위를 보니 금새 이해가 된다. 이 카모메 식당은 미야기현 케센누마(気仙沼)의 대표로서 이곳 박물관에 입점한 것.

 

케센누마는 지난 후쿠시마 대지진때 가장 극심한 피해를 받은 곳이다.

지진 당일 자정무렵부터 방송되던, 마을 전체가 불길에 휩싸인 케센누마의 모습은 잊혀지지 않는다.

말 그대로 지옥이라는 표현밖에 생각나지 않는 모습. 오일 탱크가 터져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암흑과 불길 뿐.

인구 7만 5천의 아늑한 항구마을은, 인구의 80%인 6만명이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이곳 카모메 식당은 원래 케센누마에서 유명한 라멘집이었다는데

케센누마 복구를 위해 케센누마출신의 도쿄 라멘집 사장님이 이곳에 입점했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카모메 식당을 응원하기 위해 한마디씩 힘을 보태고 있다.

영화 카모메 식당을 본 사람들도 많을거라 생각하는데, 현실은 훨씬 잔혹할 뿐이지만

그래도 역시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게 되는 것은, 사람들의 유대감 밖에 없다고 본다.

영어는 물론 아랍어인지 러시아어인지 모를 언어도 적혀있는걸 보니, 뭔가 굉장하다는 생각.

 

 

 

대자보 반대편에는 뭔가 다양하기 그지없는 라멘 소개가 벽면 가득히 펼쳐져 있다.

한국 역시 라면시장의 경쟁은 상상을 초월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스턴트 라면이고

이곳에서는 라멘도 하나의 요리에 들어가는터라, 기상천외한 비법과 조합을 가진 라멘이 수두룩하다.

 

맛이 있을지 없을지는 둘째치고, 일단 이 정도 다양한 라멘이라면 한번씩은 먹어봐야 평가라도 할수 있을텐데.

이 날은 이시다씨 토크 라이브가 목적이었고, 라멘박물관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한 여흥에 지나지 않았지만

일본 최고를 자랑하는 지역 라멘들의 각축장인 이곳에 오니, 역시 아쉬운 느낌을 금할 수 없다.

 

어차피 지금 상태로는 한그릇밖에 못먹을테니까. 아무래도 요코하마에 다시 가봐야할 이유가 생기는 듯 하다.

물론 아직 이곳 라멘을 먹어보지 않았으니, 그냥 입소문 뿐인 곳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었지만

맛에 대해서 여행만큼이나 일가견이 있는 이시다씨가 적극 추천한 곳이니 맛없지는 않을거라 생각은 한다.

 

 

 

늦은 녀석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던 탓일까

루트를 완전히 거꾸로 잡아서, 라멘 다 먹고 다시 올라올 때 들러야 할 기념품점으로 들어가버렸다.

어차피 여기서 라멘 사갈 생각은 없으니 큰 문제는 없다.

 

지하에서 경합중인 라멘가게들의 면과 스프 등이 가지런히 포장되어 전시중이다.

일단 면과 스프 육수 등등, 모두 가게에서 직접 만드는 녀석들이라 확실히 인스턴트보다는 맛있겠지.

하지만 인스턴트가 아닌 고로, 한 봉지 8천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가격을 자랑한다.

이렇게 되면 가게에서 다 만들어져 나오는 녀석과 가격차이가 거의 없다.

직접 집에서 만들기엔 너무나도 손이 많이 가는데, 거기다 가격까지 이 정도니...

물론 남에게 선물하는 용도로는 나쁘지 않을듯 하다. 어쨌든 이곳 외에서는 구입할 수 없는 특산품이니까.

 

 

 

라멘박물관은 1994년 설립된 세계 최초의 라멘 테마파크로

세워진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1950년대 후반의 도쿄 거리를 매우 훌륭하게 재현해 놔서

라멘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 재현된 길거리 풍경에 반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러나저러나 추억을 가장 중요한 마케팅 포인트로 잡은 곳이라서 그런지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어린시절 로망을 불태웠던 장난감 자동차 서킷이 1층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영업시간이 끝나서 레이스의 열기까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어릴때 봤다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큰 서킷이 인상적.

나 어릴때는 이런 서킷이 없어서 그냥 자동차나 조립해서 아파트 놀이터에서 달리곤 했었는데.

 

워낙 본격적인 서킷이라 그런지 상금이 걸린 대회도 벌어지는 듯 하다. 구경만큼은 한번 해보고 싶다.

 

 

 

라멘가게의 도구들. 실제로 1960년대에 쓰이던 것들이긴 한데

옛것을 바꾸길 싫어하는 일본의 특징답게, 사실 지금도 상당수의 라멘가게에서 당연한듯 사용중인 것들이다.

 

일본은 특히 음식가게 점원들의 목소리가 큰게 특징인데

주방 사람들은 손님을 맞이하러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찌렁찌렁 울리는 '어서옵쇼!' 가 고육지책으로 자리잡았다.

이제는 문화의 한 부분으로 굳어져서, 접대 목소리가 작으면 매상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게 일반적.

 

물론 현대식 식당이나 고급 일식당, 양식당 등에서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다. 규동이나 라멘등의 서민음식점에서의 이야기.

 

 

 

이곳 라멘박물관에 적혀있는 빼곡한 지역별 라멘 연대기를 다 읽어보려면

최소 몇시간은 걸릴 듯 해서 포기하고, 나도 알고있는 일본의 4대 라멘을 담아본다.

 

삿포로의 미소라멘, 도쿄의 쇼우라멘, 키타가타의 쇼유라멘, 큐슈의 돈코츠라멘.

키타가타는 도쿄에서 그리 멀지않은 거리라 특색은 떨어지는 편이지만, 아침식사로 라멘을 먹을 정도로 라멘매니아가 많기도 하고

곱슬머리에 가까운 꼬들꼬들한 면발을 유지하는게 그쪽만의 특징이기도 하다. 정통 키타가타 라멘은 도쿄 라멘과 확실히 다르다.

 

2008년 자전거 여행때는 키타가타 라멘에 대해서 전혀 몰랐는데, 우연히 그곳의 조그만 식당에서 먹었던 라멘과 교자의 맛은

내가 뭔가 숨겨진 맛집에 들어온건가 싶을 정도로 굉장히 맛있어서, 처음으로 키타가타 라멘의 위용을 실감하게 해 줬다.

 

글쎄, 한국사람 입맛에는 삿포로와 큐슈의 라멘이 들어맞지 않을까 생각은 해 보는데

짠걸 못먹는다는 사람은 일단 일본라멘이란 것 자체를 포기해야 하니까.

본인 역시 기분같으면 하루 네 그릇 정도 라멘을 먹어도 전혀 질리지 않을 것 같지만

나트륨 덩어리인 일본 라멘을 그러게 먹다간 정말 죽어버릴것 같기 때문에 참고 있을 뿐이다.

 

여행 자전거 여행때는 별 걱정없이 하루 두 그릇 정도는 헤치웠다. 땀을 워낙 많이 흘렸으니까.

 

 

 

1층엔 대자보, 기념품점, 라멘의 역사, 레이싱 서킷 정도가 볼거리다.

사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라서, 아직은 별 감흥이 없다.

 

하지만 이 서킷만큼은 정말 굉장하다. 장난감 레이싱에 크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국민학교때는 프라모델 조립으로 돈 꽤나 날렸던 역사를 갖고 있는 본인이라서

가끔 서킷을 갖춘 곳을 찾아가서 구경하곤 했는데, 이 서킷은 여지껏 본 녀석중에서 가장 큰 녀석이라 놀랐다.

 

8살~13살 정도의 나이에 이곳을 부모님과 함께 찾아오게 되었다면, 이 서킷에서 자기 자동차가 달리는 모습을 꿈꾸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은 서킷을 달리는 자동차보다, 색바랜 채로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프라모델이 더 눈길을 끈다.

대부분이 자동차 종류이긴 한데, 단순한 최신 제품이 아니라 분명 빈티지급으로 보이는 녀석들도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극히 평범한 건담류 프라모델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자동차 중심, 물론 RC 헬리콥터 같은 녀석들도 있다.

 

나이 들어도 이런 취미 가진다는거, 사실 꽤나 동경하는 성격이다. '어른이' 혹은 '키덜트'라는 표현도 칭찬으로 들린다.

나이 처먹어야 생기는 취미라는게 딱히 더 엘레강스하고 럭셔리하게 보일 이유가 있나 싶으니까.

이런 걸로 행복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효율적인 인생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1층 구경을 대강 끝내고 본격적인 라멘 탐방을 위해 지하로 내려간다.

지하로 향하는 통로는, 마치 목욕탕 입구를 보는 듯한 타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람이 바글바글할때는 몰라도 혼자서 이렇게 내려가고 있으니 괜히 부담된다.

영업시간은 확실히 확인하고 왔지만, 유명하다는 곳에 이렇게 사람이 없으니 그건 그거대로 겁이 나는 법.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는 순간부터 과거로 시간여행하는 기분이 들 수 있도록

세심한 부분까지 모두 철저하게 50~60년대풍을 연상시키는 소품들로 채워져 있다.

때묻은 거울과 낡은 맥주 간판, 의도적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몇개 빠져있는 바탁 타일까지.

 

일단 여기까지만 봐도, 오다이바나 삿포로의 라멘 테마파크들과는 위용이 다르다는걸 실감할 수 있는데

과연 이시다씨가 극구 추천해 준 이곳의 본모습이 어느 정도일까 점점 기대가 고조되는 듯 하다.

 

10시가 되니 소라마치의 문이 열린다. 가면 갈수록 사람이 많아질테니 여기도 재빨리 치고빠져야 할 듯.

'하늘마을'이라는 뜻의 소라마치는, 사실 마을이라기보다는 거대 쇼핑몰이지만

적어도 지상층 몇군데만큼은 마을 주변의 가게처럼 살짝 소박하게 장식해놓았다.

 

이게 몇층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층은 살짝 맛만 보는 느낌이고

위로 올라가면 한국의 백화점따윈 쌈싸먹을 정도로 거대한 쇼핑몰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층은 작은 가게들이 모여서 간단한 기념품, 먹을거리를 팔고 있어서

사실상 내가 볼일있는건 이곳 뿐.

 

 

 

사실 호텔 조식을 뱃속에 집어넣고 왔기 때문에 오전 10시에 뭘 먹을 필요는 없었지만

점심시간 맞춰서 가면 대기열이 어떻게 될런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곳이라서 겁난다.

 

거기다가 슬쩍 둘러보려고만 했던 상점가에, 내 시선을 사로잡은 라멘사진이 떡하니 놓여있어서

이건 어쩔수 없다고 생각하며 막 개점한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아침부터 라멘이라니 가게 주인장도 이상하게 생각하는거 아닌가 싶었는데

옆의 중국인 관광객도 잘 먹고 있는데다, 그 후에 찾아온 백발의 일본인 관광객 두명은

군만두와 생맥주까지 시켜서 잘 먹고 있는걸 보니 괜한 걱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배가 전혀 고프지 않아서 왠만하면 그냥 넘어가려 했지만

여지것 일본서 먹어본적 없는 새우라멘의 모습을 보고는 패배를 선언할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는 기본적으로 해물을 베이스로 한 면음식은 라멘보다 짬뽕과 우동이다.

물론 해물라멘도 없진 않고, 새우로 맛을 낸 라멘은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꽤 유명하기도 한데

여기서 본 이 라멘은 구성이 꽤나 독특해서 눈길을 끌었다.

 

새우 베이스의 라멘은 보통 바다내음을 강조하게 위해 소금으로 간을 하는 시오라멘이 주를 이루는데

이쪽은 일본식 된장인 미소라멘을 베이스로 하고, 국물맛을 내기 위한 우려내기용 작은 홍새우에다가

짭쪼름한 튀김옷을 얇게 입힌 큼지막한 새우를 건더기로 올려놓은 푸짐한 녀석.

 

사실 양은 가격에 비해 작은 편이라서, 한끼 식사라고 생각하면 분명 이것만으로 모자라겠던데

배가 고프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는 오히려 무리하지 않고 먹을만한 분량이라서 나름 다행이라면 다행.

 

죽순 절임인 멘마도 오돌오돌하게 맛있고, 계란도 적당히 간이 들어가서 합격점이다.

일본 라멘의 짠맛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질색하는것도, 당연히 지역간 식감의 차이이니 이해하는데

일단 기본적인 레시피를 볼때, 멘바나 계란이 제대로 절여지지 않고 밋밋하게 나오는건 레벨이 떨어진다는 의미.

그런데 겉치레로 붙어있다는 생각이 드는 챠슈는 별로 훌륭하지 않다. 새우가 메인이니 어쩔 수 없는건가.

 

1100엔이나 하는 고가라멘인데다가 양은 적어서 추천하기에는 좀 꺼려지는 녀석이지만

일반적인 미소라멘과는 달리 새우의 미묘한 단맛이 우러나 있는 국물은 괜찮은 경험이다.

짠 건더기들이 우르르 들어가는 편인데도, 그걸 계산해서 미소국물의 간을 살짝 싱겁게 조절해 놓은게 마음에 든다.

물론 이건 평균적인 일본인들의 시점에서 하는 이야기고, 한국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짠 편이다.

애초에 한국사람들이 이정도면 되겠지 싶은 맛의 라멘은 일본에서 인기가 없을 걸.

1년간 자전거 여행하며 일본 각지에서 120그릇이 넘은 라멘을 먹어치운 나로서도

어쨌든 첫경험인 새우미소라멘이었다. 새로운 경험에 투자한 금액이 좀 비싸긴 헀지만.

 

 

 

빵빵해진 배를 잡고 촛점없는 눈으로 소라마치를 서성인다.

하다못해 부모님이라도 함께였다면 이것저것 구경하는 부모님을 뒤에서 바라보는 재미라도 있을텐데

쇼핑에 조금도 관심이 없는 본인 혼자서 이런곳에 와 봤자 뭘 하겠는가 싶다.

단지 스카이트리와 함께 조성된 유명한 관광 스팟이니 한번 둘러나 보자 하는 기분.

 

어쨌든 도쿄까지 왔으니 뭐좀 사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또 하나의 거대 쇼핑몰이 생겨서 기분좋을듯 하다.

기본적으로 사진촬영 금지인데다가, 메인 통로쪽에 사람이 워낙 많아서 사진을 못담았을 뿐이지

한국의 백화점과 비교하면 실례일 정도로 규모가 상당히 크다.

조카 기저귀사러 청량리 롯데백화점에 가본적이 있는데, 그것의 2.5배 정도는 크지 않을까 싶다.

 

시부야나 신쥬쿠의 쇼핑타운은 워낙 대규모 물량공세라서 이곳과 비교하기 힘들지만

단일 매장으로는 오다이바의 비너스 포트를 능가하는 규모라고 느껴진다.

 

거기다 개장한지 6개월밖에 되지 않아서 모든 것이 반짝반짝 새 건물에

가벼운 기념품에서부터 캐쥬얼한 의류, 꽤나 고급 브랜드까지 없는게 없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로, 쇼핑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아침부터 저녁 폐점시간까지 얼마든지 돌아다녀도 모자람없는 곳이라고 생각.

 

이번 여행은, 허구헌날 시골구석이나 찾아다니다가 오랜만의 도쿄여행이라 그런지

지인들로부터 뭐 사달라는 요구를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이 받은 여행이었고

그 중 헬로키티 브랜드의 조그마한 핸드백도 들어있었는데, 여기는 헬로키티 매장만 서너개가 넘는다.

 

묘하게도 대부분의 헬로키티점은 정말 아이들 수준에 맞춘 그런 물품들을 파는 곳이고

나머지 한군데는, 패션에 관심있는 여성들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고급 브랜드와의 콜라보레이션 매장.

그곳의 헬로키티 핸드백은 패션의 패도 모르는 내가 봐도 '이거 괜찮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녀석이었다.

 

크게 화려하지도 않으면서도 헬로키티 특유의 원색 강조가 잘 나타나 있고

재질은 가벼우면서도 방수기능이 기본적으로 첨가된 고가 원단이라고 점원이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일본어를 알아들어도 패션 관련 단어를 알아들을수가 없는 나는 오랜만에 일본에서 이국맛을 실컷 느꼈는데

어쨌든 굉장한 인기품이고, 2012년 겨울 한정품목이라서 재고 수급도 간신히 맞추고 있다는 듯.

 

물론 브랜드 사치품에 비하면 공짜나 다름없는 8700엔의 가격이지만, 내가 부탁받은 헬로키티 핸드백은 3000엔 짜리였다.

아무리 좋아보여도 이 가격차는 좀 아니다 싶어, 훗날 바이어(?)와 연락이 가능할 때 한번 물어보기로 하고

이번엔 그냥 구경만 하고 나왔다. 조금 쫄았지만 다행히도 친절한 점원은 인상 변하지 않고 웃으며 배웅해주셨다.

 

 

 

콩글리쉬로 윈도우 쇼핑이라는건 신나게 즐겼지만, 사실 소화좀 시키려고 돌아다닌 것 뿐이라

뭘 봤는지 기억은 거의 나지 않는다. 글쎄, 내가 좀 부자라서 현금뭉치를 수십만엔쯤 들고온 사람이라면

지나다니다가 괜찮다 싶은 옷 몇벌 사서 이미지 체인지를 해 보는것도 나름 행복을 누리는 방법일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굉장하다는 인상을 받으며 출구를 찾아 헤매고 있던 도중, 재미있는 상품을 발견하고

점원에게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는 척하며 슬쩍 사진을 담아본다.

사실은 대놓고 찍어도 별로 뭐라 할사람 없겠지만, 쇼핑몰 안에서의 촬영은 언제나 긴장된다.

 

부피에 비하면 꽤나 비싼 녀석인데, 정말 잘도 이런 상품을 만들어내는구나 싶다.

스카이트리형 초콜릿이다. 밑의 마을모형 역시 초콜릿. 스카이트리는 화이트초콜릿으로 임팩트를 줬다.

조금 엉성하긴 해도 스카이트리 옆의 스미다가와 강까지 표현해 놓은걸 보니, 진짜 신경좀 썼구나 싶다.

 

스카이트리 모양이 모양이다 보니, 제품의 포장은 비효율의 극치를 달릴수밖에 없지만

그 효율을 높여보자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처럼 스카이트리 모양의 초콜릿만 덜렁 팔고있었다면

이렇게 내가 사진을 담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 자연스럽게 고급 기념품이라는 이미지도 생기고.

 

사소하지만 이런 발상의 전환이 기념품 장사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기념품의 덕목은 가격대 성능비가 아니라 임팩트다.

누워있는 스카이트리 초콜릿과, 이 녀석을 나란히 전시한다고 생각해 보라. 어디에 눈길이 갈지.

 

물론 사들고 가서 혼자 까먹어 버린다면야 가격 싼녀석이 제일 좋겠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일본의 기념품은 주위 사람들한테 선물 주기위해 사 가는 것이다.

어떤걸 선물로 줬을때 상대방이 더 좋아할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을 듯.

 

 

 

흡족한 기분으로 소라마치 관광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다.

이곳으로 올때 전철을 타 봤기 때문에, 아사쿠사까지는 그냥 걸어서 가기로 한다.

 

어디서든 스카이트리를 카메라에 담느라고 관광객들이 정신없는데

영락없는 노숙자 할아버지가 관광객들에게 촬영 스팟을 조언해주고 있다.

 

여기 이 지점에서 찍으면 전부 다 담을수 있다느니, 시간대별로 멋지게 보이는 촬영장소 등을 읊어대는데

반쯤은 관광객들에게 하는 말이지만 얼핏 들으면 그냥 혼잣말같기도 하다.

관광지라서 사람들이 좀 온화해 진건지, 그 설명 들으며 고맙다고 인사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 그 땟국물 줄줄 흐르는 노숙자 할아버지한테 카메라 맡기도 자기들 좀 찍어달라고 부탁도 한다.

 

굉장히 보기좋은 광경인데, 유럽에서나 볼만한 모습을 여기서 보니 내가 좀 어리둥절했다.

 

소라마치와 스카이트리를 한 화면에 담아보려고 했는데 이 거리에서는 35mm 렌즈로도 무리였다.

소라마치는 긴 직사각형의 건물이라서, 둘을 한꺼번에 담으려면 이거보다 더 광각렌즈를 사용하던가

파노라마 형식으로 이어붙어야 가능할 듯 하다. 하지만 파노라마는 귀찮아서 그냥 패스.

그거 못담았다고 내가 아쉬워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자연경관 풍성한 곳이 아니라 도쿄같은 도시에서 35mm 보다 더 광각이 필요할줄은 몰랐다.

 

소라마치는 쇼핑몰뿐만 아니라 수족관까지 포함된 복합센터라서, 인파에 휩쓸릴 각오만 있다면

하루 꼬박 소비해도 전혀 아쉬울 것 없는, 도쿄 관광의 새로운 중심지로 명실공히 입지를 다지고 있다.

수족관은 물론 본인도 참 좋아하지만, 전망대 입장료와 미지의 라멘탐험으로 이미 출혈이 상당하고

몰려드는 인파만큼은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어서 그냥 도망치기로 결정.

 

만일 친구나 지인들과 함께 무리를 이루어서 왔다면 이런 불평없이 얼마든지 인파에 치여가며

평범한 관광을 즐기겠지만, 홀로 떠도는 여행에서는 스스로의 기분에 반하는 행동은 절대로 하고싶지 않다.

 

 

 

날씨는 화창하기 그지없어서 걷다보면 땀도 슬쩍 흐를 정도다.

영하의 한파속을 헤매는 서울에서 왔으니 체감적으로 더욱 덥게 느껴지기도 하고.

느긋하게 25분쯤 걸으니 다시 스미다가와 강을 넘어서, 어제 신나게 셔터누른 장소로 돌아온다.

 

역시 제일 간편하게 담을 수 있는 위치는 이곳이라는 생각. 옆에 똥덩어리와 아사히 빌딩도 볼만한 녀석들이고.

도착을 늦게 하는 바람에 첫날 사진이 전부 해질무렵이었는데, 역시 대낮에 사진 찍으니 거리낄게 없어서 좋다.

 

 

 

이곳 촬영포인트 주변에서는 노인 두명이 작은 음악회를 열고 있다.

한 사람은 구슬픈 하모니카를, 한 사람은 점잖게 한 곡조 뽑아내고 있는데

옛날 노래들이라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건 사카모토 큐의 '위를 보며 걷자' (上を向いて歩こう) 정도밖에 없었다.

 

이 곡은 일본인들에게는 국민가요로 모르는 사람이 없고

아시아 노래중에서는 최초로 1963년 빌보드차트 1위를 한 기록으로 유명하다.

재미있게도 해외에서는 제목 발음이 어려워서 '스키야키'로 알려진 그 곡.

 

'눈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위를 보며 걷자'는, 심금을 울리는 가사의 내용덕분에

안그래도 유명한 이 곡이 후쿠시마 대지진 이후로 어마어마한 반향과 함께 다시 대인기를 얻었다.

대지진 이후 TV CM에서 이 곡이 부드럽게 흘러나올때, 일본 국민들의 기분은 과연 어땠을까.

절망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곡의 분위기가 그토록 잘 어울릴수는 없었겠지만

조금 삐딱하게 본다면, 그렇게 생각하는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현재의 상황이 더욱 적나라게 느껴진다고 할까.

 

 

 

아사쿠사에서 아키하바라로 바로 가는 전철은 없기때문에

버스나 타고 가자고 정류장에서 기다리는데, 15분이나 기다리고나서야 깨달았다.

적혀있는 노선표를 자세히 보니 일요일엔 아키하바라 행 버스가 3~4시간에 한대씩 온다.

 

도쿄 한복판에서도 이런일이 벌어지는구나 싶어서 허탈한 마음과 함께 그냥 전철을 탄다.

갈아타면 요금도 비싸지만 버스 정류장에서 한대 얻어맞고 조금 체력이 빠진 상태라서 어쩔 수 없다.

오타쿠와 전자제품의 성지 아키하바라(秋葉原), 원래 이곳은 한국의 용산처럼 조그만 영세가게들이

수도없이 밀집해서 이루어낸 개미집과 같은 장소였는데, 지금은 거대 체인 요도바시 카메라가

어마어마한 크기의 매장을 역앞에 떡하니 건설하는 바람에 그 독특한 매력이 많이 퇴색되어 버렸다.

 

진짜 매니아들의 아키하바라는, 골목골목 구멍가게를 누비며 이 세상 어떤 전자부품이라도 구할 수 있었던

그런 시절의 모습을 가리키지만, 이제와서는 대기업의 천편일률적인 제품과

귀여운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뿌리는 페로몬에 이끌려 하악거리는 오타쿠들의 천국으로 그 모습을 바꾸었다.

 

하긴 나도 20년전 처음 도쿄에 갔을때는 무조건 아키바부터 달려가서 게임팩 사는데 열중했으니까.

지금도 그때 뭐 구입했는지 기억난다. 슈퍼패미콤이라는 가정용 게임기의 'FEDA' 라는 녀석.

난 왜 이런걸 이렇게 오랫동안 잘 기억하는지 모르겠네...

 

게임팩 구입후엔 친구 강군과 함께 버추어 파이터 하려고 종횡무진하던 추억이 서린 곳이다.

그때 버추어 파이터 2가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라 게임센터에서도 요금이 2배 비싼 200엔이었지만

태어나서 경험해본적 없는 폴리곤 덩어리들의 환상과도 같은 향연에 돈을 마구 쏟아부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보니 그 게임센터 아직도 영업중이긴 하다. 내부 구조는 많이 바뀐것 같더라만.

 

여담으로, 원래 이 지역의 한자명을 읽으면 '아키바하라'가 되는데

공무원이 한자를 잘못 읽어서 '아키하바라' 라는 전철명이 붙어버린 황당한 역사가 서린 곳이다.

이게 또 재미있는게, 요즘엔 다들 이름을 생략시켜서 '아키바' 라고 읽는데 이게 사실은 제대로 된 이름이었다는 것.

 

 

 

스카이트리에서 이곳으로 온 이유는 이것저것 많은데, 주된 목표는 역시 부탁받은 선물 구입이다.

요도바시 아키바는 단순히 전자제품이나 카메라만 파는게 아니라

백화점이라도 해도 될만큼 없는게 없는 가게라서, 의류같은 패션 상품이 아닌 이상 어지간한건 다 구할 수 있다.

 

여기서 구입할건 쿄세라의 세라믹 부엌칼. 가볍고 오래가고 잡내가 없다는 장점이 있다고 한다.

한국에도 팔긴 하지만, 최상급 프리미엄 브랜드는 팔지 않고 한단계 낮은 등급의 제품만 있어서

도쿄 가는김에 좋은거 사가기로 했다. 훗날 돌아와서 한번 써보니 확실히 좋긴 하더라.

 

칼 하나에 10만원이나 하는걸 보고 덜덜 떨었지만, 막상 돌아와보니 독일제 부엌칼은 하나에 몇십만원씩 한다.

정식 교육을 받은 셰프들의 칼이야 수백만원짜리도 전혀 비싸지 않은 레벨이긴 한데

가정집 주방에서 대체 뭘 만드시길래 수십만원제 칼이 필요한지까지는 내가 알수있는 범위가 아니다.

쿄세라의 세라믹 칼은 어찌됐든 무지하게 가볍고 절삭력이 좋아서 어느정도 돈값을 하겠지.

 

요도바시 안에는 서점도 있어서 부탁받은 유아용 동화책 몇권과 내가 읽을책 몇권을 산다.

계산은 같이 했다. 지인의 부탁이 아니고 엄니를 통한 2중 부탁이었던 터라 이 정도 수고비는 챙겨도 되겠지.

읽고싶은 책은 산더미같은데, 중고책방이라도 가야지 신품서점에서 구매하기에는 너무 비싸다.

물론 새 책을 산 이유는 내가 돈내는거 아니니까. 그래도 항상 정도는 지킨다.

 

이러저러해서 참 인연이 깊은 아키바인데, 역을 나서는 순간 굉장한 상실감이 밀려온다.

아키하바라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던 라디오회관(ラジオ会館)이 건물채로 사라지고 없었던 것.

지금은 새 건물을 짓기 위해 각종 장비들이 가동되고 있다.

 

라디오회관은 아키하바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층 건물중 하나로, 그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초기엔 라디오 트랜지스터 등을 파는 작은 가게들의 집합체였다. 아키하바라라는 장소와 동시에 태어난 역사의 산 증인.

 

 

 

2010년 자전거 여행때 담은 라디오회관의 모습.

노란색 네온싸인이 걸려있는 건물이다. '세계의 라디오회관 아키하바라' 라는 촌티나는 제목의 전광판.

 

2000년 이후로야 아키바 대부분이 그렇듯 전자부품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가전제품, 애니메이션, 만화, 피규어 등으로 채워졌지만

이게 1953년에 지어진 건물이라, 아무리 개축을 거듭해도 결국은 노화를 피할 수 없어서

전면 해체후 재시공이라는 처방을 받고야 말았다. 물론 해체 한참 전부터 이곳에 입주해있던 회사들은

슬금슬금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고 있었지만, 새 건물이 들어서는 즉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거라고.

 

아키바의 터줏대감 같은 건물이라서, 이 건물이 해체되던 때엔 아쉬워하며 사진을 찍는 오덕들이 많았다.

본인도 만화책 살때는 반드시 이곳 라디오회관의 'K-BOOKS'를 이용했던만큼 감회가 새롭기도 했고.

왜 거기서 만화책을 샀느냐 하면, 특이하게도 저 서점이 부스 두개로 나뉘어

한쪽은 비닐 안벗긴 새책을 팔고 다른 부스에서는 중고책을 판매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중고책은 보존상태가 상당히 좋아서, 일단 신품부스에서 신나게 구경하고 구입할 책을 정한 후

중고부스에서 그 책을 찾아 구입하면 금액을 상당히 절약할 수 있었다.

물론 중고품이 없는 책은 어쩔 수 없이 신품을 구매할 수밖에 없었지만.

 

여담이지만 K-BOOKS 는 그것 외에 어른용(!) 만화책도 샘플본을 많이 비치해서, 구입하지 않고도 읽어볼 수 있다는 크나큰 장점이 있었다.

세계 어디든 어른용일수록 구입전까지 내용물 못보도록 철저하게 막는게 일반적인데, 그걸 과감히 깨트린 영업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어른용 만화책은 그림 수준이 좀 떨어져서 본인은 별 관심이 없다?

 

 

 

친구가 닌텐도 게임소프트를 부탁해서 그것도 찾아봐야 하는데

일단 그걸 오늘 구입할 생각은 없다. 게임소프트는 중고유무와 가격대 등을 넓게 조사해 봐야

쓸데없이 돈 더주고 구입하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조사하는데 하루, 구입하는데 하루 정도는 투자해야 한다.

 

얼핏 둘러본 바로는 그게 굉장히 인기있는 신작게임이라서 어지간한 곳에 중고물품이 없다.

이렇게 되면 다음에 구입할때 이야기가 좀 편해지긴 한다. 신품가격 제일 저렴한 곳만 골라가면 되니까.

 

20년전의 전자상가 천국은 이미 사라졌지만, 여전히 외국인들에게는 너무나 신기한 곳이라서 지루하지 않다.

세상 어디에 이렇게 길거리 전체가 게임, 애니메이션, 만화가게등으로 가득찬 곳이 있겠는가.

굳이 이런 분야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이 길거리는 충분한 문화충격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저기 SEGA의 빨간 건물은 20년전 친구 강군과 내가 버추어 파이터 하려고 뻔질나게 들락날락한 곳.

그거 말고, 자기 사진을 찍어서 모니터에 그걸 띄워놓고 펀치머신으로 두들기면 얼굴이 찌그러지는 게임도 있었다.

내가 강군하고 원수지간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서로의 얼굴을 묵사발로 만들며 배를 잡고 뒹굴었던 기억이 난다.

 

 

 

아키하바라라는 매니아 지향 상점가가 이렇게 유지된다는건 사실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화면 하단부의 사람이 보인다면, 저 소프맙 건물이 어느정도 규모인지 알 수 있을 터.

 

아키바에는 이런 건물이 수십채씩 거리 전체에 줄지어 늘어서 있다.

건물에 걸린 거대한 그림들은, 얼핏보면 그냥 애니메이션이겠지 싶어도

사실은 아이들이 만져서는 안되는 어른들(!!)의 게임 광고다.

 

어른용 게임이다보니 수요는 적고 제작은 힘들어서, 게임 하나당 10만원이 넘는 고가를 자랑해도

열심히 구입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보니 이렇게 오늘도 아키바는 돌아가고 있는 것.

 

실제로 인파를 뚫고 성인코너로 들어가보면 그건 그거대로 훌륭한 타국문화체험의 현장이다.

한국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풍경이 펼쳐지니, 성인물에 관심이 없어도 그 분위기를 즐기는것 자체는 충분히 관광이라고 할 만하다.

사실 항상 이런곳 안에 들어가서 어슬렁거릴때는, 이정도 극단적인 문화적 괴리를 생산하는 배경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할 때가 대부분.

물론 혈기왕성한 중고딩때 이런거 체험해보라는 뜻은 아니고. 어른이라면 이 오묘한 분위기 자체가 재미있는 경험이 될것이다.

 

여성분들은 또 여성분을 위한 그렇고 그런 코너가 있으니 그런데 가보는것도 좋고.

 

 

 

부탁받은 책 몇권 사고, 그냥 선물도 책으로 사고, 내가 읽을 책도 사고 하니 가방이 미어터진다.

이미 카메라는 들어갈 공간이 없어서 어깨에 매고 있는데, 이곳 가게들은 공간이 매우 협소해서

어깨에 카메라 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통행에 방해가 될 정도. 굉장히 조심해가며 이동하다보니 진이 빠진다.

 

오늘 책 구입비용만 거의 10만원쯤 나왔는데, 그중에 내가 산건 5만원쯤 된다.

어쨌든 도쿄까지 왔으니 내가 만족하게 싸들고 돌아갈만한 녀석은 책밖에 없고.

 

아키바는 정말 올때마다 느끼지만, 한산할 때가 없는 곳이다.

이쯤 되면 이미 매니아들만의 전유물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실제로 일본 최대의 아마추어 동인작가전인 코믹마켓에는 3일간 70만명이라는 믿을 수 없는 인파가 모인다.

이 3일간 도쿄 시내의 모든 숙소가 마비될 정도니까, 직접 보지않으면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는 곳.

 

자전거 여행때 이것도 경험이다 싶어서 여름 코믹마켓에 잠깐 들른적이 있는데

인간이 이럴수도 있구나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이 사진 퍼와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이런 느낌이다.

 

 

 

아키바에서 이것저것 부탁받은 물건 구입하고 가방이 빵빵해지니 어깨와 발이 뻐근해진다.

아침에 먹은 라멘덕분에 배는 고프지 않고, 이럴때 유용한 녀석은 조금 먹고 시간 오래 때울수 있는 녀석.

쥐꼬리만한 용량을 자랑하는 모스버거에서 한숨 돌린다. 하지만 여기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10분쯤 기다렸다.

 

좋은 재료를 쓰고, 주문받은 후에 만들어서 바로 내놓기 때문에 맛이 괜찮은 모스버거지만

가격대비 크기가 정말 눈물날 정도로 작은 녀석이라, 이걸로 배 채울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다.

모스버거 특유의 양파향 나는 토마토소스는, 그래도 햄버거 소스중에서는 인스턴트 냄새가 덜 나는 편이어서

깔끔한 치즈와 함께 베어물면 나쁘지 않은 맛이다. 어디까지나 일반 패스트푸드점과의 비교우위일 뿐이지만.

 

모스버거에 들어가서 제일 마음에 드는 녀석은 언제나 음료수 컵에 그려져있는 그림.

사진은 있지만 이곳에 올리지 않는다. 혹시 갈일 있으면 음료수 컵 그림을 잘 살펴보시길.

모스버거의 정체성이랄까, 가장 모스버거 답다는 느낌이 들어서 참 친근감을 느끼는 녀석이다.

 

버거는 그냥 자릿세 대신이라고 생각하고, 피로를 풀며 메모장을 꺼내서 펜을 깨작거린다.

 

 

오늘 루트는 생각하면 참 단순하고 대강대강인듯 하다. 스카이트리와 아키하바라 두 군데밖에 둘러보지 않았다.

시간이 아까운 관광객들에게는 너무 낭비가 심한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사실 8시 반에 숙소를 나와서 라멘 먹을때 20분간 앉은것 빼고는 8시간 넘게 계속 걸어다닌 셈이라서

모스버거에 앉았을 때 몸이 밑으로 쑤욱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지금부터 힘내서 야경보기 좋은곳을 찾아다니면 너댓시간은 더 관광을 즐길 수 있겠는데

그런 식의 강행군은 오직 함께 가는 일행이 있을때만 시도하는 성격이다.

 

자기 물품보다 남한테 부탁받은 물품을 구입하는게 더 피곤한듯 하다.

논리적인 이유가 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되게 피곤하다. 이 안에 든게 전부 내가 갖고싶은 것들이었다면 아직 팔팔할텐데.

 

밖으로 나오니 해가 슬슬 지고있다. 어느센가 아키바의 명물로 자리잡은 돈키호테 빌딩의 AKB48 극장이 앞에 보인다.

AKB48 은, 아마 나보다 더 잘 아는 한국인들도 많을거라 생각하는데... 요즘 일본 연예계의 최강 아이돌 그룹이라고 보면 될듯.

한국의 최강 아이돌은 소녀시대인가? 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애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처음엔 무명이었던 그 그룹이 꾸준히 공연하던 곳이 이 아키바의 극장. 지금은 국민아이돌로 상승했기 때문에

AKB 전용 극장마저 생겼고, 조그마한 이벤트라도 있는 날엔 저 앞에 팬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물론 내가 그 아이돌들 이름이나 얼굴을 구별할 수 있는건 아니지만, 오랜 일본여행끝에 하나 몸에 익힌건 있다.

'에이케이비 사십팔'이 아니라 '에이케이비 포티에잇'이라고 읽는단다.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에 도착해서 가방을 어깨에서 내려놓으니 비로소 해방감이 느껴진다.

저녁 6시쯤의 이른 귀가라서, 오늘은 느긋하게 피로를 풀 수 있을듯 하다.

할일이 없어서 소중한 여행중에 이렇게 빨리 돌아왔냐고 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별로 할일이 없기도 하고.

사실 내일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번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가 있기 때문에

조금의 문제도 생기게 하지 않기 위해서 휴식을 취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뜨끈하게 목욕 끝내고 편의점에서 사온 간식거리를 씹으면서 TV 보다가 11시쯤 잠자리에 든다.

TV가 예전에 비해 좀 심심하다는 생각이 드는건 왜일까.

 

 

여행 전날 잠 못자는건 이제 전통이다.

 

이번엔 짐을 잔뜩 짊어지고 서울서 부산까지 내려가 약 3시간 가까이 여기저기 걸어다니며 체력을 소비해서

11시쯤 이제 좀 피곤하구나 싶은 묘한 피로와 기분좋은 탈력감이 엄습해 오도록 컨디션을 세심하게 조절했다.

 

여행 한번 가는데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항상 전날 잠을 못자서 여행 첫째날은 헤롱거리다가 날을 보내버리곤 했으니.

 

 

 

11시쯤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따뜻한 이불속으로 들어가는 곳까지는 완벽한 작전이었으나

사실 바이오리듬이 새벽 3시 취침 오전 10시 기상으로 정착되어 있던 신체를 간과한 것이 패배의 원인.

 

너무 일찍 잔 탓인지 새벽 3시쯤 되니까 잠이 깨서, 일부러 자려고 해도 의식이 또렷해지고 만다.

오전 11시 출발편이니 공항엔 9시쯤 도착해야 하고, 여기서 김해공항까지는 리무진으로 40분쯤 걸린다고 하니

계획대로라면 7시 반쯤 일어나서 가볍게 짐을 챙기고 상쾌한 기분으로 출발해야 했는데

새벽 3시에 잠이 깨어버리니 그대로 밤을 샐 수도 없고 다시 잠도 오지 않고 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펼쳐진다.

 

잠이 안오는데 계속 누워있으니 머리가 지끈거려서 별 수 없이 노트북의 전원이나 올린다.

별다른 계획은 없는 느긋한 여행이지만, 오랜만에 도쿄 간다고 하니 주위에서 일제히 물건 구매요청이 들어왔다.

평생동안 가장 많은 요청을 받았다고 봐도 될 정도. 대강 하루정도는 쇼핑에 시간을 할애해야 할 듯.

 

물건 사러 돌아다니는건 서점이나 아키바같은 매니아 지향소 외엔 극히 드문 경우라서

일단 물건들이 대충 어디어디쯤 산재되어 있는지 정도는 알고 가야 현장에서 허둥거리지 않을 것 같다.

 

 

 

결국 슬금슬금 날이 밝아지기 시작하는 5시 30분을 넘어서야 겨우 한시간쯤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두시간쯤 자고 일어나니 여전히 졸리고 머리는 어질어질하고 컨디션은 최악.

옛날 대학시절이었다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냥 그대로 엎어져 대낮까지 잠잤음에 틀림없는 그런 상태.

 

하지만 비행기가 기다리고 있으니 그럴수도 없고, 짜증으로 가득한 얼굴을 씻어낸후 리무진 버스를 타러 간다.

김해공항까지는 40분쯤 걸린다고 해서 느긋했는데, 부산의 악명높은 교통 탓인지 1시간 10분이나 걸려서야 공항에 도착.

 

저가항공 에어아시아의 악명은 익히 들어왔기 때문에 버스 안에서 조마조마할 수 밖에 없었다.

'지구가 멸망해도 에어아시아는 환불해주지 않습니다'를 캐치프라이즈로 내세웠던가?

아마 그런적 없겠지만 세간의 이미지는 그런 편이다.

 

혹시 늦게 와서 탑승수속을 해 주지 않는게 아닐까 걱정하며 공항으로 들어간다.

안내데스크에 에어아시아가 몇번인지 물어보니 14번이라고 하길래 가 봤더니

40명은 넘어보이는 중국인 행렬이 이어져 있어 정신이 아찔해진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에어아시아의 마크가 아니라서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려보니, 16번 데스크에 텅텅 빈 에어아시아 마크가 보인다.

김해공항 안내데스크의 신용도는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듯.

 

조금 늦었지만 무난히 수속을 밟고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

지금부터 나리타로 이동해서 다시 도쿄로 들어가면 빨라봤자 오후 3시가 넘고

저가항공에서는 기내식은 커녕 물도 돈주고 사먹어야 하기 때문에, 아침이라도 먹고 가려고 2층의 한식집에 들어가 갈비탕을 주문.

 

만원이 넘는 가격까지는 공항음식점이니 그럴만 하다고 스스로 납득을 시킬 수 있었지만

그 육수에 담궈져서도 꾸준히 비린내를 발산하고 있는 저급 중의 저급 갈비 몇 점이 들어있는 모습을 보니

그래도 몸을 사리는 편인 이 블로그 포스팅에서도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는 소재가 생겨서 나름 뿌듯한 기분이라고 긍정적인 발상을 해 본다.

 

그 갈비탕 진짜 개판중의 개판이다. 개밥보다 조금 나은 정도라고 하면 되려나.

 

공항 검색대는 보안강화기간이라서 평소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소지품 모두 철저하게 검사를 하고

노트북과 카메라, 줄줄이 전선과 베터리 등등 수많은 도구가 담긴 내 백팩과 사이드백은 두 번씩이나 검색대를 통과한다.

결국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직원이 나를 데리고 와서 뭔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한다.

 

규정이 그렇겠지만, 위험에 대비해서 짐은 승객 스스로가 풀어서 보여줘야 하는데 이게 마치 범죄자가 된 듯한 기분을 만끽하게 해 준다.

비닐에 한 웅큼 들어있는 깔끔한 냄새의 새하얀 가루덩이를 보고 직원의 눈초리가 본격적으로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는데

그 가루의 정체가 절약정신에 빛나는 여행푸어인 본인이 집에서 퍼담아온 분말세제라는 사실에 허탈한 미소가 퍼지는 모습을 보니

왠지 멍청한 공무원들을 느긋하게 따돌리며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는 모 비밀요원이라도 된 듯한 기분에 살짝 머리가 가벼워진다.

 

 

 

나리타에 도착한 것은 참으로 오랜만. 도쿄는 더 이상 관광목적으로 올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출발 전날 서울에 엄청난 폭설을 시작으로 기온이 급격하게 내려갔기 때문에

혹시나 싶어서 조금 두꺼운 옷도 가지고 왔는데, 도착해보니 쓸데없이 짐만 늘린 꼴이 되어버렸다.

최고온도 11도에 최저온도 3도. 강수확률은 0%에 한없이 화창한 날씨가 이어진다.

 

여러가지 사정상 항상 사용하던 교통카드 SUICA도 본가에 놔 두고 왔기 때문에 또 구입해야 했다.

나리타에 도착하면 도쿄까지의 교통비 + 도쿄에서 숙소까지의 교통비 해서 3천엔 가까이 나가기 때문에

매번 마음이 편치 않다. 하지만 가까운 하네다 공항 도착편은 저가항공이 범접하기 어려운 영역이고.

 

잠을 엉망으로 잔 탓인지 머리도 지끈거리고 컨디션은 엉망이다. 타국에 도착한 들뜬 기분 역시 눈꼽만큼도 들지 않는다.

도쿄에서는 거의 항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이곳 타이토구(台東区)의 숙소를 찾아오는데

이곳이 도쿄 안에서는 반쯤 슬럼구라고 해도 될 정도로 좀 못사는 동네라, 백팩커나 노숙자, 일용직들을 위한 저가숙소가 많이 있기 때문.

한인노동자가 많은 신오오쿠보(新大久保) 쪽도 적당히 저렴한 숙소가 있긴 한데, 난 여행중 한국인들 보고싶지 않다.

그런 이유로 타이토구는 도쿄에서의 고향이라 할 만한 곳.

반대로 말하면 전혀 여행기분이 나지 않는다는 단점이 되기도 하지만.

 

타이토구라고 해도 슬럼지역만 있는게 아니고, 그 유명한 관광지인 아사쿠사(浅草)도 있긴 한데

사실 아사쿠사 역시 예전엔 슬럼가였다. 일렬로 늘어선 명물 상점가인 시타마치(下町)역시 한자의 뜻을 생각해 보면 금새 알 수 있고.

일단 아사쿠사까지는 걸어서 15분쯤 되는 가까운 거리에 숙소를 잡았기 때문에

짐을 풀고나서 아사쿠사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간다. 딱히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가슴이 설레지도 않지만.

 

타이토구도 진짜 슬럼가라 할 만한 곳은 골목 여기저기 쓰레기 천지인데, 이곳은 그래도 아사쿠사 근처라서

상당히 깔끔하게 정비해 놓았다. 길가에 떨어진 쓰레기도 없고, 화단도 꽤나 정성들여 가꾸어 놓은 모습.

 

 

 

내게 있어 신선한 볼거리라고 하면 현재로서는 이 녀석밖에 없다.

 

자전거 여행을 시작했던 2010년 5월에도 이 장소를 찾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저 똥덩어리 옆에서 뭔가 올라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저게 뭐지 하던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도쿄에서는 스카이트리에 대한 기대가 꽤 컸었는데

타워에 관심이 없는 나는 몇개월이나 지난 여행 한창중에서야 저 녀석 이름이 스카이트리라는 사실을 알았을 정도니.

 

 

 

이게 2010년 한창 건설중이던 스카이트리의 모습.

원근감 탓에 별로 커 보이지도 않았다. 도쿄타워보다는 좀 큰가 하는 정도였는데.

 

사실은 도쿄타워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고, 착공 당시 계획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634m 짜리 타워였다.

실제로 인류가 만든 가장 높은 타워로 기네스북에 등제되기도 했는데, 비정하게도 그 타이틀은 단지 며칠간만 이어졌을 뿐.

당시 세계 여기저기서 어리석은 마천루 경쟁이 이어지고 있었던 때라서

며칠만에 바로 아랍 에미리트의 '부르즈 할리파' 가 830m 의 높이로 그 타이틀을 가져가 버리긴 했다.

아직도 전파송출탑으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녀석이라고 하니, 그걸로라도 위안을 삼아야 할 듯.

 

도쿄 시민들에게는 꽤나 자긍심 고취에 도움이 될 만한 아이템일지도. 일단 세계 유수의 높이를 가진 타워니까.

 

 

 

 

2008년 계획 당시엔 610m 로 높이를 정했지만 634m 라는 높이가 된 이유는

'634' 라는 숫자를 '무사시'라고 읽을 수 있기 때문.

 

과거 도쿄를 무사시노쿠니(武蔵国)라고 불렀기에, 일본인들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유 정도로 충분할 듯 하다.

원래 내가 자전거여행을 끝내고 도쿄로 돌아올 2011년 5월쯤엔 개장을 준비하던 시기였어야 하는데

다들 알다시피 후쿠시마 대지진으로 인해 개장이 1년쯤 늦춰져서 2012년 5월에야 처음으로 관광객들을 받기 시작했다.

 

일본은 2011년부로 지상파 디지털 전환이 완료되었고, 고층빌딩이 많은 도쿄 지형상 고층 전파송출탑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 일환으로 만들어진 타워지만, 실상은 연간 550만명이 저 타워를 오르기 위해 비싼 입장료를 지불하는 굉장한 관광지가 되었다.

타워를 오르지 않는 사람들도 지상쪽의 거대 쇼핑몰 소라마치(空町)를 둘러보기 위해 오기 때문에

실제 스카이트리로 인한 관광객 창출은 연간 2500만명이라고 한다. 언제까지 이어질진 모르겠지만 꽤 괜찮은 장사인 듯.

 

일단 입장료를 내면 하단의 전망대에 올라갈 수 있고, 거기서 또 요금을 내면 100m 위의 위쪽 전망대에 오를 수 있다고 한다.

사실 타워 높이는 634m 이지만 전망대는 300m, 400m 부근에 위치하고 있으니 조금 맥빠지는 현실.

 

현재 도쿄에서는 단연 가장 화제가 되는 관광지이긴 한데, 애초에 타워를 좋아하지도 않는 내가

몇만원이라는 입장료를 내면서 저기를 올라가야 할까 하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 반면, 도쿄는 이제 가슴뛰는 새로운 관광지가 아닌 본인 입장상, 여행 맛이라도 좀 느껴보려면 저기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고.

 

대충 찾아본 바로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한번 올라가는데 1시간 이상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고 한다.

일단 밑의 쇼핑몰 소라마치에라도 한번 들러봐야 할 테니, 아침에 일찍 가서 상황을 보고 결정해야겠다고 생각.

1시간 줄서야 한다면 공짜로 올라가라고 해도 안 가겠지만.

 

 

 

해질 무렵의 스카이트리는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았다.

화창한 푸른 하늘에 반사되는 인공구조물의 기하학적 상쾌함도 없었고, 야경을 비추는 라이트역시 아직 점등되지 않았으니.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를 하는데...

스카이트리는 저 아사히 똥덩어리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저렇게 보일 뿐

실제로는 굉장히 높고 압도적인 건축물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런데 첫인상은 역시 임팩트가 없다.

 

도시 복판의 타워에서 가장 볼만한 광경은 뭐니뭐니해도 야경임에 틀림없지만

그걸 나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있는것도 아닌 고로, 스카이트리는 야경보러 사람이 미어터지기 때문에

밤에 찾아가 볼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인파에 밀려서 사진 담을 여력도 없을테고.

 

겨울이다 보니 해가 일찍 져서 뭔가 의욕적으로 둘러볼 생각도 들지 않는다.

무료 항공권을 받게 되어서 아무 예정도 없이 온 도쿄라, 이렇게까지 의욕없는 관광도 참 오랜만이다 싶다.

걷다보면 힘이 나겠지 싶어서 아사쿠사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아사쿠사쪽은 서민들의 생활력이 느껴지는 활기찬 동네지만, 그 전까지는 그냥 단조로운 빌딩들의 연속.

왠지 현재 기분을 생각해보면 이런 평범하고 단조로운 풍경이 딱 들어맞는다는 느낌이다.

기분에 맞춘 사진 결과물을 담는건 괜찮은 행동이지만, 다른 관광객처럼 들뜨고 재미있는 사진도 좀 담았으면 하는데.

 

 

 

기분이 들지 않는데 상쾌한 사진 따위 찍을수가 있나.

언제나 그랬듯이 기분 가는대로 담아본다.

 

도착 첫날 오후 늦게 시작한 여행인데 벌써부터 이렇게 텐션이 떨어져 있으니 스스로도 좀 걱정이 되긴 한다.

어제부터 조금씩 조카 우는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해서 조금의 죄책감도 남아있었는데

여러가지 요인이 더해진 끝에 이런 로우텐션이 되어버린 듯.

 

솔직히, 지금 나의 기분을 풀어줄 녀석은 딱 두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맛있는 거 잔뜩 찾아먹는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사진질.

조카 돌보느라, 푸른 하늘아래서 새 카메라로 사진 찍어본 일이 거의 없었다 보니

뭔가 담고 싶어서 조금씩 근질근질하던 차에, 도쿄는 한없이 맑은 하늘이 계속된다고 하니.

 

여행의 감성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던 예전과는 조금 방향을 바꿔서

사진을 마구마구 찍어서 여행의 텐션을 올려야겠다는 이상한 결과가 나와버린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해 봐야지.

 

 

 

사진질과 더불어 텐션을 올려주는 요소는 단연 먹을거리.

일본 3대 라멘이라고 불리는 키타가타(喜多方)라멘을 파는 라멘집을 들어가 본다.

사실 맛있는 키타가타라멘을 먹을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일본 3대 라멘이라고 하면 홋카이도의 삿포로, 후쿠오카의 하카타, 후쿠시마의 키타가타를 꼽는데

애초에 도쿄에서 장사하는 이상 본고장의 오리지날에 비할 수가 없다는 건 다들 아는 상식이다.

 

그런데도 여기 들어와서 별 특색없어보이는 라멘 한그릇을 주문한 이유는, 이곳이 아사쿠사이기 때문.

하층계급의 주 생활무대였던 아사쿠사 주변은, 소위 말하는 저급 문화가 발달한 곳이었다.

지금에 와서야 잘나신 분들의 문화보다도 더 사람사는 맛이 난다고 해서 인정받긴 하지만

어쩄든 별것 아닌 잡화점, 싸구려 먹을거리와 장난감등이 주된 상품이었던 마을.

 

이런 아사쿠사이기 때문에, 딱히 뛰어나다고 할것도 없는 무난한 라멘 한그릇이라도 불평없이 먹을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무난 무난 말은 하지만, 아침에 먹었던 김해공항의 갈비탕보다는 백배 낫다.

엔화 그대로 계산해도 이 라멘이 갈비탕보다 더 싼데, 그 개똥같은 비린내 갈비 생각하니 이건 아주 맛있는 편.

아사쿠사라서 이런 라멘도 맛있게 먹긴 했지만, 어느 정도는 아침의 그 악몽을 지워내려고 입좀 헹구는 의미도 있었다.

 

 

 

가볍게 한그릇 비우고 다시 아사쿠사쪽으로 향한다.

원래는 숙소에서 컵라멘 사들고 먹기도 하는데, 저녁으로 라멘을 먹어버렸으니 오늘은 자중해야 할 듯.

일본 라멘은 나트륨 함유량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아서, 저녁 연속 두그릇을 먹거나 하면 다음날 거울에서 호빵맨을 볼 수 있다.

 

자전거 여행처럼 땀을 비오듯 흘리는 나날이었다면 삼시세끼 라멘도 어렵지 않았는데.

가뜩이나 기분 난잡한데 자전거 여행 생각까지 하면 돌이킬 수 없이 다운되어 버리니 일부러 잊어버리려고 한다.

 

속속들이 다 구경한 아사쿠사지만 그래도 한가닥 기대되는 점이 있다면

고감도에 강한 신형 카메라를 들고 해질무렵의 아사쿠사 거리를 구경해 본 적은 없다는 것.

매번 대낮에만 오다 보니 밤거리의 풍경을 놓쳤는데, 사실 사람 붐비는 도시의 본모습은 밤거리에서 드러난다.

반대로 첫날은 대낮 사진을 한 장도 찍지 못했다는게 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그 친숙한 아사쿠사라도, 여지껏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보여줄 것 같아서 기대가 된다.

 

 

 

오후 4시 30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해는 거의 다 저물어가는 상황이다.

겨울 여행은 이게 참 괴로운데, 해가 지는것과 관계없이 시간만 보고 평소처럼 즐기면 되지 않느냐 하지만

사람의 바이오리듬이란게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걸 여행중 체감할 수 있었다.

 

여름엔 7~8시까지 열심히 돌아다녀도 몸이 깨어있다는 느낌이 들지만

겨울에 5시를 넘어버리면, 마음속으로 아직 5시밖에 되지 않았다고 아무리 읖조려도 피로가 몰려오는게 느껴진다.

 

그나마 아사쿠사는 해가 져도 수많은 인파가 여전히 북적이는 곳이라 조금 더 힘을 낼 수 있어 다행.

아사쿠사 관광의 시작을 알리는 카미나리몬(雷門) 앞의 사거리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니

내가 익숙해하던 도쿄의 모습과 다른 얼굴을 볼 수 있어서, 드디어 조금씩이나마 여행의 시동이 걸리는 느낌이 든다.

기껏해야 똥덩어리 보이던 북동쪽 스미다가와(隅田川) 건너편에, 복잡한 빌딩숲을 가볍게 무시하는 듯한 스카이트리의 위용이 보인다.

 

새로운 모습을 보는 것, 여행에서 빠트릴 수 없는 즐거움인데

저 멀리서 단순한 배경이 되어줄 뿐이지만, 이곳 아사쿠사에서도 사람들이 길가다 서서

연신 휴대폰의 셔터를 눌러대는 모습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스카이트리라는 건물 하나가 아니라, 저 녀석으로 인해 변화된 사람들의 모습 하나하나가 전체적인 변화를 구성하고 있다고.

스카이트리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나에게 이런 변화를 감지시켜 주는 계기가 되어 주었으니 가볍게 감사.

 

8시에 일어나 조식을 꾸역꾸역 먹으면서 오늘의 일정을 생각해 본다.

오후 7시에 출항하는 페리는 6시까지 승선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넉넉하게 5시 조금 넘겨 터미널에 도착해야 한다.

시간이 아까워서 빠듯하게 도착할 수도 있지만, 한순간의 실수가 자칫 1주일동안 이곳에 고립되는 상황을 낳을수도 있기 때문에

최대한 느긋하게 도착해서 기다리는게 마음 편하다. 짧진 않지만 느긋하지도 않은 오늘이란 시간을 잘 활용하려면 어떻게 할까.

 

일반적인 관광객보다는 훨씬 느긋한 발상인데, 보통 하루에 한 곳 정도만 확실히 정해놓고 움직이는 본인 스타일상

오늘 가장 중점을 둘 곳은 이곳에서 페리 터미널로 가는 중간에 위치한 아담한 정원 유시엔(由志圓)이다.

크게 유명한 곳도 아니고 원래부터 가고 싶었던 곳도 아니지만, 마츠에 시와 페리 터미널의 딱 중간즈음에 위치한 곳이라서

돌아가는 길에 들르기엔 최적의 장소라 여행 계획때부터 코스에 넣어둔 곳.

 

문제는 유시엔이 너댓시간동안 돌아다닐만큼 큰 곳은 아닐듯 해서, 지금 바로 체크아웃후 뛰쳐나갈 이유가 없다는 것.

오후 1시쯤 도착하면 딱 알맞을 듯 한데, 그렇다면 이곳에서 12시 반쯤 버스를 타면 된다.

약 3시간 조금 넘는 시간을 이곳 마츠에에서 보내야 한다는 결론. 멀리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현립미술관이나 카라코보 공방 등등 구미를 돋구는 장소가 있고, 그냥 아담한 까페에서 커파나 홀짝여도 시간은 충분히 간다.

일단은 10시까지 체크아웃이니, 짐을 프론트에 맡겨놓고 나서보기로 한다.

레이크라인 버스를 타고 하염없이 창밖 구경이나 하다가 눈길이 가는 곳에 내리면 되겠지.

 

걸어서 5분거리인 마츠에 역으로 가는 도중에 만화 캐릭터같은 녀석의 동상이 서 있다.

시마네현과 인접한 돗토리현은 '게게게의 키타로'나 '명탐정 코난'같은, 시대에 한 획을 그은 만화가들의 고향인데

문화 컨텐츠쪽으로는 돗토리현에 뒤지지 않는 시마네 쪽에서도, 만화 쪽에서는 크게 내세울 만한 사람이 없는 편.

이 캐릭터는 한국에 정식 수입된 적은 없는 듯 하고, 상당히 오래 전 인기를 끌었던 녀석인 것 같다.

 

 

 

3일간 마음껏 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레이크라인 버스를 사진에 담아본 적이 없다는걸 깨달았다.

한 장도 남기지 못했다면 돌아와서 조금 아쉬웠을 듯. 관광용 버스 중에서는 디자인이 참 잘된 녀석이다.

원목은 아니지만 좌석도 나무로 되어있고, 안내에 능숙한 여성 운전자들이 반쯤 가이드 역할도 해 주는 훌륭한 녀석.

 

한쪽 방향으로만 순환하기 떄문에, 잘못타면 마츠에 역 바로 앞에서 승차해, 40분이나 걸려 역에 도착하는 사태가 벌어질수도 있다.

 

어제 이즈모에서 돌아온 후 마츠에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서 있을때도 이 때문에 재미있는 이벤트가 있었다.

수첩에 일기를 쓰지 않은 여행이라 완전히 까먹고 있었는데 지금 기억이 나서 읊어본다. 이래서 일기를 써야 한다니까.

 

신지코 온천역 앞의 버스 정류장은 마츠에 역과 크게 떨어져 있지 않지만, 그곳에서 레이크라인 버스를 타면

약 30분 가까이 마츠에 시내를 돌고 돌아 최종적으로 마츠에 역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래서 그냥 일반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던 중. 퍼펙트 티켓은 시영버스라면 어떤 것도 무료로 탈 수 있으니.

그런데 젊은 여성관광객 둘이 갑자기 앞에 와서 뭔가를 물어본다. 영어로. 네이티브는 아니고 적당한 아시안 잉글리쉬로.

영어로 말하는 모습만 봐도 아, 한국인이구나 싶었는데, 일본어에 익숙하다보니 막상 한국인의 영어는 알아듣질 못하겠더군.

아마 나를 일본인으로 생각하고 그나마 영어로 물어본 것 같은데, 내가 일본인이었더라도 그 영어를 알아들을수는 없었을거라 생각한다.

 

도중에 말 끊을 타이밍을 잡을수가 없어서, 질문 다 끝나고 한국어로 이야기하자 폭소가 터졌다. 나야 자주 겪는 일이긴 하다만.

레이크라인 버스는 시간이 너무 걸리기 때문에 마츠에 역으로 가는 일반 버스를 타고 싶은데 그걸 잘 모르겠다고 하신다.

마침 나도 그럴 예정이었으니 함께 일반버스를 탔다. 홀몸이 아니라서(?) 버스기사분께 마츠에 역 가느냐고 확인질문까지 하고.

 

딱히 친해지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버스 안에선 그냥 두분끼리 이야기하도록 뒤에서 앉아있었다.

내리고 나서 감사인사 한번 듣고 헤어졌을 뿐. 그래도 여행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생긴 것이니 이쪽 입장에서도 즐거웠다.

 

 

 

레이크라인 버스를 타고 천천히 흘러가는 경치를 감상한다.

현립미술관에서 내릴지, 카라코보 공방에서 내릴지를 머릿속으로 저울질하고 있는데

출발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창밖 너머에 중고서점 체인인 북오프가 보이자 순간적으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어제 비참한 패배를 맛봤던 친구녀석의 게임소프트를 저기서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떠오른다.

북오프는 기본적으로 중고서적을 판매하는 곳이지만 대부분 음악CD, 영화, 게임 등도 함께 취급하니까.

친구 부탁때문에 다른 관광지를 놓치는 것이 아깝다면 아까울수도 있지만, 사실 북오프 탐방은 원래부터 좋아하는 코스다.

한국에서 일본 원서 찾아보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라서, 일본에 오면 꼭 한두 번은 북오프를 찾아다니곤 하니까.

게임소프트가 없어도 그냥 읽고 싶은거 읽으면 되기 때문에 딱히 아쉬울 것도 없다.

 

결국 몇 초간의 짧은 고민끝에 현립미술관도, 아트공방도 포기하고 북오프 앞에 내려버렸다.

만약 여행 시작후 좀 더 열심히 돌아다녔다면 이곳도 일찍 발견해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그런 희미한 아쉬움은 금새 사라진다. 여행은 신기한 거 많이 본다도 성공하는게 아니니까.

숙련된 주방장이 완숙미 넘치는 손놀림으로 부드러운 면을 뽑아내듯이, 느긋하게 마음이 가는대로 즐기기만 하면 된다.

이런 여행에 익숙한 사람들이야, 가이드북에 실려있는 관광지들을 하나라도 더 체험해 보고 싶은 마음 이해하지만

자전거 여행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조급해 지는 순간을 많이 경험하게 된다. 느긋한 여행에서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다.

 

정류장에 내려서 한가롭게 휴식중인 호리카와 유람선의 모습을 담아본다.

마츠에 성 주변을 1시간 가까이 유랑하는 이 배는 선착장이 몇 군데로 나뉘어 있어서, 여행하다가 편한 곳에서 승선이 가능.

지금 이녀석 타기엔 시간이 좀 촉박하니 그냥 사진으로만 담기로 한다. 물이 영 깨끗하지 않는게 조금 거슬린다.

호리카와 강 원류는 깨끗한 편이지만, 워낙 지류가 여기저기 많이 나눠진 녀석이라 이런 곳은 물흐름이 좋지 않다.

 

 

 

북오프에 들어가기 전, 맞은 편 약국에서 오늘 저녁을 대비한 멀미약을 구입한다.

강한 녀석은 몸에 좋지 않으니 액상으로 된 조그만 녀석을 구입. 2병으로 나눠져 있어서 상태를 봐 가며 마실 수 있다.

가능하면 마시지 않는게 좋겠는데, 막상 어지러울 때 이녀석이 없으면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으니 일단 챙겨가는게 좋을 듯.

 

일본의 약국은 한국의 그것과는 좀 다르다. 한국의 약국과 똑같은 곳도 있는데, 왠만한 이마트만한 녀석도 꽤나 많다.

그런 곳에서는 전문 처방뿐 아니라 왠만한 보조식품, 미용도구, 비타민, 음료수, 심지어 과자나 컵라면까지 판다.

다이어트 라면이라던가, 묘하게 건강과 관련된 제품들로 채워져 있으니 일반 마트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긴 하지만.

 

일본은 의사 처방없이 구할 수 있는 상품들이 상당히 많아서, 약국이라고 해도 오만가지 상품이 존재한다.

한국에서 구경하기 힘든 곳이니 그곳을 둘러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는 관광.

 

멀미약을 구입 후, 옆에 보이는 도시락집으로 이동. 계속 목표였던 북오프를 재쳐두고 딴길로 새는 느낌이 든다.

한국에도 도시락집이 꽤나 성업중인데, 일본도 역시 편의점 도시락보다는 이렇게 바로바로 만드는 집이 더 맛있는 편.

호텔서 조식을 먹었으니 도시락까지는 필요없고, 그냥 반쯤 기념삼아 닭다리 한조각이나 구입해서 뜯어먹는다.

한국의 닭다리보다 양념맛이 훨씬 약하고 부드러운데, 저질 프라이드 치킨의 뼈 근처에서 풍기는 비린내가 없어서 먹기 좋다.

 

 

 

북오프는 마츠에 시의 크기에 비교하면 꽤나 준수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역시 중고품 전문점이기 때문에, 발매된지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게임소프트는 없었다.

인기가 있는 녀석인지, 그 게임소프트 중고를 고가 매입합니다 라는 안내문을 적혀 있다. 결국 친구녀석의 부탁은 실패.

애초에 마츠에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녀석이니, 이런 시골마을에서 게임 소프트를 구해달라는 것 자체가 무리였지.

 

그것과는 별개로 가볍게 읽을 책을 한권 샀는데, 페리 안에서는 아무리 멀미약을 먹어도 책을 읽기는 힘들 듯 하다.

그냥 한국에서 시간날때 읽으면 되니까 상관은 없다. 중고라고 해도 책이 워낙 깨끗하니 이득본 느낌도 들고.

 

의외로 약국, 도시락점, 북오프 세 군데만 돌아봐도 시간은 금방금방 흘러간다.

마츠에 시내는 버스가 그리 자주 돌아다니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남아도 미리미리 이동하는게 불상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다.

30분 정도 일찍 버스를 타고 역으로 돌아와서, 떠나기 전 마지막을 기념하는 먹거리라도 찾아볼까 해서 역 내부를 돌아다니는데

좋아하는 라멘가게 앞에서 발걸음이 멈추고 만다.

 

사실 마츠에는 화과자 같은 전통 먹거리들이 유명하고, 라멘은 유명한게 별로 없다는게 정설이라서 이제껏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가게 앞에 붙어있는 고객의 목소리에는 '도쿄에서 왔는데 여기서 이렇게 맛있는 라멘 먹을줄은 몰랐습니다' 등의 글이 쓰여있어서 흥미가 동했다.

립서비스일 가능성도 있지만 대부분의 글이 '멀리서 들렀는데 의외로 맛있었다'는 내용.

마츠에가 라멘으로 유명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맛있었다는 의미기 때문에 묘하게 신뢰감이 든다.

 

이곳의 메인은 닭육수에 소금으로 맛을 낸 시오라멘. 돼지육수를 중심으로 하는 다른 라멘과는 달리 시원하고 깔끔한 맛이 특징이다.

인연맺기의 명소 이즈모 타이샤가 세워진 지역이다보니 이 라멘도 인연맺기 라멘이라고, 커플을 상징하는 흰색 분홍색 메추리알이 들어가 있다.

숙주나물과 짭짤한 죽순도 전부 근교에서 구입한 지역특화 상품이라고 하는데, 마츠에가 아직은 청정지역이니 좋은 포인트가 될 듯.

 

점심시간이라서 볶음밥 세트를 주문했는데, 볶음밥은 매우 평범하고 그저 그런 맛이다. 덤으로 딸려온다는 느낌에 딱 맞을 정도.

라멘은 확실히, 이 정도라면 맛없다고 한탄할 정도는 아니다. 시원하고 칼칼한 국물맛이 목으로 넘어갈때 기분좋은 자극을 준다.

돼지 육수를 사용하는 다른 라멘들은 한국사람들이 먹기에 과하게 강렬하고 기름진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그럴때는 이런 시오라멘이 재격.

죽순은 미리 소금에 절여놓은 녀석이라서 반찬 대용으로 먹으면 괜찮다. 아삭아삭한 숙주나물과 면을 함께 집어먹으면 궁함이 좋다.

가격도 크게 비싼편은 아니라, 마츠에에서 라멘이 고프다면 이곳에서 먹어보는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 생각보다 맛있어서 만족한 케이스.

 

 

 

배도 충분히 채웠고 슬슬 버스시간이 다가오니 호텔로 가서 짐을 챙기기로 한다.

카메라 장비와 백팩을 들고 관광하러 돌아다니는건 꽤나 힘들지만

아마 유시엔 쪽에는 물품 보관소가 있을거라고 긍정적인 추측을 해 본다.

 

역 앞에 세워진 이 물 흐르는 기둥은, 표면에 묘하게 굴곡진 탓에 물이 0일정한 패턴을 형성하며 흘러내린다.

고속으로 찍으니 형태가 잘 보이지 않는데, 삼각대도 ND 필터도 없이 장노출을 할 수도 없고.

 

 

 

짐을 챙겨 역앞으로 돌아와 버스를 기다리는데 다시 하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변한다.

이건 비가 올까 말까 걱정할 필요도 없이 스트레이트한 자기주장이라서, 저 너머로 어마어마한 비구름이 올려오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로써 이곳 여행하는 3일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게릴라성 호우를 경험하게 되는데, 일기예보에서도 요즘 날씨가 참 이상하다고 멘트를 날리긴 하더라.

 

한국에서도 폭염과 태풍 때문에 말이 많은 여름이었지만, 그럴 경우 대체로 일본쪽이 한국보다 더욱 그 증상이 심한 편.

이쪽도 폭염과 폭우 때문에 사망자도 생기도 재산 피해도 꽤나 컸다고 한다. 여름이 지나가려니 이제는 게릴라성 호우가 출몰중이고.

하필이면 야외 정원 산책하러 가는데 저런 구름이 다가오고 있으니 조그마한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좀 전까지만 해도 덥고 쨍쩅한 하늘이었으니, 지나가는 폭우라면 내리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을거라고 기대해 볼 수 밖에.

 

유시엔까지는 일본의 느긋한 버스속도로 운행해도 20분밖에 걸리지 않는데, 역시 그 속도로는 비구름에 금새 따라잡힌다.

버스 안에서 만나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미친듯이 쏟아지는 비는

창문을 전부 닫은 버스 안에서도 귀가 얼얼할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천둥까지 뿌린다. 번쩍하고 몇초 지나지 않아 폭발음이 들리는걸 보면 굉장히 가깝다.

슬쩍슬쩍 바닷가가 보이는 시골길을 달리고 있는데, 옆에서 보기엔 시야가 거의 제로에 가까울 정도로 폭우가 쏟아진다.

조금도 과장 보태지 않고, 구름 위를 떠다니는 느낌. 왜냐하면 창밖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밑의 도로조차 보이지 않기 때문에.

기사분이 대체 어떻게 운전하는지 궁금할 정도로 시야가 제한되어 있다. 워낙 가까이서 내려치는 번개 덕에 마치 전장 한복판을 달리는 듯한 분위기.

 

 

 

유시엔에 내리는 사람은 세 명. 당연히 나를 포함해 젊은 한국인 커플 한쌍 뿐이다.

이런 폭우속에 야외 정원인 유시엔을 구경하러 내리는 사람들이란.

어차피 승선시간을 계산한 움직임이기 때문에 페리가 기다리는 사카이미나토까지 가 봤자 의미가 없긴 하다.

가슴이 후련할 정도로 신나게 쏟아지는 비를 보니 오히려 엔돌핀이 분비되는 듯 하다. 저절로 피식피식 웃음이 나온다.

어차피 유시엔에 배정한 시간은 충분히 남았고, 설마 3시간 가까이 비가 계속 오진 않으리라 생각하니까.

만약 정말 3시간 가까이 내린다면 그건 그거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비오는 정원을 어떻게든 슬쩍 둘러보고 돌아가는 수 밖에.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 바로 조그만 식물원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비 피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곳 통로를 지나면 바로 유시엔인데, 지금 가 봤자 의미가 없으니 벤치에 짐을 다 풀어놓고 비구경이나 한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중에는 번개가 내려치는 순간을 포착한 진귀한 녀석들이 있는데

타이밍만 잘 잡으면 정말 찍을 수 있을 만큼 번개가 가까운 곳에 떨어진다.

번쩍하고 나서 5~10초 정도 후에 우르릉 거리는 그런 번개가 아니라, 번쩍하고 1초쯤 되어 바로 귓전을 때리는 폭탄같은 굉음.

가까운 곳에서 번개가 칠때는 정말 온 하늘이 플래시 터트린것처럼 새하얗게 물든다. 아주 신선한 경험이라 즐겁다.

 

식물원은 지붕이 있으니 카메라 들고 두리번거려본다. 바깥에 내놓은 녀석들에게는 단비가 되고 있다.

식물원이라기 보다는, 동네 할머니가 손질하고 판매하는 조그만 꽃가게 같은 느낌인데

꽤나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대부분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긴 하지만.

 

 

 

이런 걸 분재라고 하던가. 작은 공간에 큰 녀석을 오랫동안 길러서 자연상태처럼 나이먹어 보이게 한다는 취미활동.

 

당연히 원래 지면에서 자라는 것보다 영양도 공간도 부족하니 일정 크기 이상으로 자라진 않는데

식물은 동물과 달라서 이런 식의 스트레스 요소가 오히려 수명을 연장시키기 때문에, 사실상 분재의 수명은 자연상태보다 더 길다.

일본에서는 500년 전의 분재가 아직 살아있다고 하니까. 하지만 역시 인간의 취미활동이지 이녀석들을 먼저 생각하는 행동은 아니다.

 

 

 

오키나와에서 자주 보던 녀석. 암술로 보이는 부분이 두세 개씩 피어나는게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도 본 기억이 날랑말랑 하는데 아직도 이름은 찾아보지 않고 있다. 이름 같은거 없어도 잘 클 녀석들이니까.

 

 

 

버스 정류장에서 바로 유시엔으로 이어졌다면 지금쯤 얼마나 생고생을 하고 있었을지.

비가 오니 제대로 구경도 못하고, 우산 빌려쓴다고 해도 사진 찍기는 보통 고역이 아니다.

작지만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식물원 덕분에 심심하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동네 아주머니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수다를 떨면서 이런 화분을 사 가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곳과 유시엔은 무슨 관계인지 조금 궁금하다. 버스 정류장 위치를 봐서는 이곳을 지나서 유시엔으로 가는게 정식 코스인데

그런 것 치고는 동네 아주머니가 열어놓은 평범한 가게같은 느낌. 적어도 관람을 위한 장소는 아니다. 대부분이 판매용이니까.

그런 반면에 번듯한 공공 화장실도 있고, 사람은 안들어 있지만 안내소를 겸한 사무실도 자리잡고 있는걸 보니 조금 애매하다.

 

애시당초 유시엔이라는 정원이 대체 뭐하는 곳인지도 모른다. 그냥 여행가기 전 볼거리를 슬쩍슬쩍 찾아보다가 눈에 들어왔고

위치상 페리 타기전에 들러보기 딱 알맞은 곳이었다는 이유 하나때문에 찾아온 곳이니.

비가 그치고 나서 유시엔에 들어가더라도 생각보다 별 볼일 없는 곳이면 좀 아깝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

 

 

 

뭐가 어찌됐든 이런 폭우 속에서 비를 피할 곳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

마츠에 시내를 돌아다닌다고 해도 이런 빗속에서 제대로 이동하기는 쉽지 않았을 테니까.

조금씩 약해지는 느낌이 드는데, 버스 안에서의 폭우는 정말 눈과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그래도 이틀 연속으로 쫄딱 젖었던 지난날보다는 훨씬 즐겁다. 일단 비는 맞지 않으니까.

탁 트인 농촌마을 하늘에서 쏟아내리는 비의 박력은 확실히 도시의 그것과는 다른 재미가 있다.

주위가 완전히 잿빛으로 변하는 것이 살짝 기분을 침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꿋꿋이 경고의 색을 발산하는 녀석이 더욱 돋보이는 장점도 있다.

언제가 되더라도 그치긴 그칠테니 자판기에서 음료수 하나 뽑아마시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어쨌든 여행이라서 이런 것도 좋은 법. 평일 낮에 내리는 비 구경하면서 느긋하게 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이란 것도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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