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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에 해당하는 글들

  1. 2015.11.03  앓던 이가 빠진 느낌 4
  2. 2014.10.17  2월 14일 시레토코 - 멀었던 두 시간의 결합 2
  3. 2013.12.24  과거로의 여행 - 무인역 8
  4. 2013.12.18  과거로의 여행 - 돌아가기 15
  5. 2013.12.10  과거로의 여행 - 산책 한 걸음 14
  6. 2013.12.03  과거로의 여행 - 키소의 비와 밤 16

 

 

 

친구 강군과 일본에 처음 갔을때가 중학생 때였는데

그때 숙소에서 TV 보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CM이 있었습니다.

 

당시엔 물론 일본어도 전혀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정식 방송보다는 오히려 CM 쪽이 훨씬 기억에 남았었죠.

 

일본 TV에서 기억에 남은 건 이 CM과 배트맨2 영화밖에 없었습니다.

 

흥얼흥얼 리듬은 기억나는데 과자 이름을 까먹은 터라 20년동안 대체 무슨 과자 광고였을까 고민만 하고 있었는데

우연찮게 일본 라디오 채널에서 진행자가 어릴적 먹었던 맛있는 과자 이름이 o'zack 이라고 말하는 걸 들었네요.

일본어를 모르던 시절이라 정확하진 않았지만 분명히 오~ 어쩌고 하는 부분이 있어서 혹시나 했습니다.

 

구글을 검색해 보니 드디어 20년만에 제 뇌리에 남았던 광고를 찾을 수 있었네요.

인터넷의 발달이란 이런 소소한 즐거움도 마련해 주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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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에서 날씨가 휙휙 변하는 건 나름 익숙해졌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시레토코의 대자연 속에서 경험하는 격변은 또 각별하다.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아 뉴스레터(?)의 장면처럼 아름답게 내려앉는 눈꽃이 온 하늘을 뒤덮어 버리는 풍경은 참으로 절경이다.

아마 트래킹 초반부터 이런 눈이 팍팍 내렸다면 기가 팍 꺾였을 수도 있겠지만

푸른 하늘을 마음껏 감상하고 마음의 여유를 가질 만한 즈음에서부터 이렇게 내려주니 오히려 반가운 기분도 든다.

 

든든한 가이드분과 몇 년동안 이곳을 찾아 오는 단골 일행분 덕분에 두려움도 없이 묵묵히 먼 곳을 바라보고만 있다.

다들 비슷한 기분인 듯 대화도 없이 한동안 역동성과 고요함이 묘한 대비를 이루는 시간을 조용히 즐긴다.

 

 

 

해가 워낙 빨리 지기 때문에 이제부터 슬슬 다시 둘러보기 시작해야 한다는 가이드분의 말에 따라 다시 장비를 챙긴다.

물이 좀 부족하긴 하지만 어차피 남은 건 오호 중 가장 크고 휴게소에서 가장 가까운 첫 번째 호수만 돌아보면 되니까.

 

장비를 챙기고 막 떠나려는데 세상을 연기처럼 뒤덮던 그 눈발은 어디가고 순식간에 다시 화창한 하늘이 펼쳐진다.

홋카이도에 도착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경험했던 일이지만 정말 놀라지 않을 틈을 주지 않는다.

 

본인은 그냥 날이 맑아졌다는 정도였지만 가이드분은 조금 전보다 더 흥미진진한 표정이다.

구름이 점점 옅어지는 것을 보니 운이 좋으면 라우스 산봉우리가 보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겨났기 때문.

겨울에는 맑은 날 라우스 산의 꼭대기를 보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데, 이번에 보게 된다면 첫 참가인 나에게는 굉장한 행운이라고 한다.

 

 

 

첫 번째 호수로 향하는 길은 겉보기에도 쉽지 않다. 생각보다 가파른 경사에다가 수풀이 빡빡해서 스키를 게걸음으로 옮길 공간도 부족하다.

가이드분은 정해진 코스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상황에 맞게 루트를 만들어 가기 때문에 한동안 고민을 하신다.

결국 약간 두르더라도 덜 위험한 곳으로 가기로 한다. 우리와 엇갈린 또 한 팀은 걷는 스키가 아니라 스노우 슈즈를 신고 있기 때문에 경사 높은 곳으로 용감하게 전진중.

 

스키라는 게 그냥 슥슥 밀기만 하면 힘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평지에서 스무스한 이동을 위해서는 평소 걷는 것 처럼 발을 지면 위로 띄울 수 없는 점이 오히려 어색하게 작용해서

허벅지 뒤쪽에 굉장한 힘이 가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전신운동이라 해도 될 만큼 체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키를 신지 않고 일반적인 신발로 걸어다니는게 편한가 하면 그건 절대로 아니다.

애초에 스키라는 게 설원을 편리하게 이동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니까.

걷는 스키는 일반적인 스키보다 폭이 넓고 길이가 짧은 편이라 눈 위를 걸어도 몸이 덜 빠지는 장점이 있다.

그냥 신발로 이런 곳을 걸어다니면 기본적으로 무릎 위까지는 푹푹 빠지게 되니, 그것이 얼마나 힘들지는 설명 할 필요가 없을 듯.

문제는 본인 체중이 너무 강렬해서 앞의 두 분이 발목 정도까지 빠지며 스키로 밀고 나간다고 하면

나는 거의 정강이까지 잠겨서 이동하는 느낌이라 상대적으로 체력 소모가 심한 편. 그러니까 자업자득이라는 말이다.

 

 

 

고생 좀 해서 거친 수풀을 빠져나오니 드디어 첫 번째 호수에 도착한다. 한 쪽이 바다와 인접해 있고 휴게소에서 가장 가까우며 크기도 가장 큰 호수.

여름에는 불곰 출몰로 인해 첫 번째 호수만 둘러볼 수 있었기에, 이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과거와의 접점이 느껴지는 듯 하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나무로 된 고가도로 위에서만 걸어다니며 사진을 찍던 본인이, 그 울창하고 신비로운 매력을 내뿜던 호수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높이 3~4미터의 목책로 주변에는 전기 펜스가 설치되어 있어 불곰이 접금하지 못한다. 그 위에서 바라보는 시레토코의 풍경에 완전히 매료되어 다시 이 곳을 찾게 되었다.

 

 

 

여름 목책로 위에서 찍었던 사진. 1년 간의 자전거 여행 중에서도 단연 시선을 빼앗기는 장관 중의 장관이었다.

시레토코에서 가장 높은 라우스 산과, 드레스처럼 구름을 두르고 있는 산맥과 온갖 생명력으로 흘러넘치는 오호의 모습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이란 게 이렇게도 멋진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저절로 들게 만들어 주곤 했다.

 

한 시간에 한두 번밖에 버스가 오지 않는데다가 마지막 입장 시간도 매우 이른 편이라

관광 버스나 렌트카를 이용하지 않으면 느긋하게 즐기기 쉽지 않은 곳이어서 그 짧은 시간이 그토록 아쉬울 수가 없었다.

 

 

 

지금은 당연히 저 목책로 위에도 눈이 쌓여있어서 출입은 금지되어 있다.

여름의 목책로 높이와 현재를 비교해 보면 눈이 어느 정도 쌓여있는지 짐작이 갈 듯.

그 웅장하던 생명력이 모두 눈속에 갖혀버린 채 다시 봄을 기다리는 모습은 신비롭기 그지없다.

 

이 정도 수고를 들이지 않으면 이런 풍경을 감상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또 문명인의 생활이란 것이고.

호수를 가로질러 나 있는 북방여우의 가지런한 발자국을 보니

그 녀석도 얼어붙은 호수를 지나가며 화려했던 여름의 회상에 젖어보기나 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동행 분은 도쿄에서 살고 있다고 하는데, 매년 삿포로까지 7시간 가까이 기차를 타고 홋카이도로 온 다음

바로 삿포로에서 버스를 타고 이곳까지 오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고 한다.

 

이 곳을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라면 매우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나 같은 사람이라면 아마 도쿄에서 이곳으로 이사올 계획을 짜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한국이나 일본이나 아름다운 산과 들은 조금만 찾아보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지만

여름엔 불곰이 거닐고 겨울엔 얼어붙은 호수를 거닐 수 있는, 사람이 살지 않는 바다와 근접한 산맥 끝자락 풍경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겨울엔 그렇게도 보기가 힘들다던 라우스산의 정상이 아주 조금씩이지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아직 주위엔 구름이 많아서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지만 이 정도 모습만이라도 일행들은 열심히 사진 찍기 바쁘다.

한국에 비해 거칠고 가파른 일본의 산은 산맥의 아름다운 곡선보다 강한 힘이 느껴지는 굵은 선이 매력으로 다가온다.

 

눈이 얼마나 많이 쌓였는지 상층부는 수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설산의 위용을 자랑하는데

사실 라우스산은 출입 통제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도 등반이 가능하다. 경험을 쌓은 전문가가 아니면 매우 위험하긴 하지만.

 

 

여름의 그 압도적인 생명력을 모두 평탄한 눈밭으로 덮어버리는 겨울의 모습은

이 곳에 한 번 이상은 와서 원래의 모습을 느껴본 뒤에야 비로소 그 매력이 배가 되는 느낌을 준다.

 

불규칙적인 지형 속에 사냥꾼처럼 곳곳에 숨어 있는 습지와 그 주변을 가득 메운 수풀을 모두 동등하게 만들어 버리는 겨울 시레토코는

거대한 힘으로 밀어버린 듯 깨끗한 설원 속에 가지런한 여우의 흔적만을 남긴 체 느릿한 숨을 내쉬고 있다.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말을 워낙 많이 듣고 자라는 곳에서 살다 보니 그 개념에 대해 꽤나 흐리멍덩해 진 상태였는데

이 모습을 보면 그 사계절이란 게 축복은 축복이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바다와 마주닿는 쪽의 산들은 서서히 깎아지른 듯한 정상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덩달아 일행들의 셔터도 바빠지고 있다.

꼭 가장 높은 산만이 인상적이란 개념은 없고, 맨 끝의 산부터 라우스산까지 형제처럼 보이는 봉우리들이 위용을 뽐내는 모습은

어떤 강력한 인연으로 맺어진 형제자매가 어깨를 맞대고 서 있는 듯한 결합감을 느끼게 한다.

 

카메라를 꺼내고 넣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본인은 이제까지 조금씩 부담감을 안고 있었지만

정상이 드러나 갈수록 쉴새없이 사진을 찍어대는 다른 일행들 덕분에 개운해 진 기분으로 이곳저곳을 마구 찍어댄다.

 

 

 

분명 같은 모양이지만 여름과 겨울의 모습이 주는 느낌은 꽤나 다르다.

여름의 산이 바다에 빨려들어가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면 겨울의 산은 가만히 바다 쪽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

겨울의 산은 단색으로 통일되는 동시에 강한 햇빛에 의해 명암이 강해져 좀 더 우락부락해 보이는데

그럼에도 여름보다 조금 더 차분해 진 듯 하다. 아마 산이 변한 게 아니라 내가 그렇게 보이는 것이겠지만.

 

 

 

구름이 이동할 때마다 일행들의 일사불란하던 움직임은 무질서하게 변해간다.

걸어가면서도 몇 번씩 고개를 돌려 구름이 어디까지 가고 있는가를 확인하기도 하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라우스산의 정상이 보인다 싶으면 카메라를 꺼내들고, 그러면 나머지 일행들도 자연스럽게 멈춰서서 몸을 돌리게 된다.

 

눈 오는 설산의 모습도 물론 좋지만, 이런 하늘에서는 산의 혈관과 근육이 더욱 대비를 드러내기 때문에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이 바빠진다.

 

 

 

목책로 위에서 보던 풍경 속에 들어가 반대로 그 목책로를 풍경삼아 감상하는 경험은 참으로 신선하다.

사실 겨울 홋카이도 여행 계획은 삿포로 눈축제와 Y양을 만나기 위해 시작된 것이라

비행기를 타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시레토코에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여름에 저 목책로 위에서 오호의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저런 데 잘못 들어갔다간 습지에 가라앉아 버리는 거 아닌가 겁을 낼 정도였는데

겨울이라고는 하지만 그 위를 이렇게 걸어다닐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현실감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네이처 가이드분도 매년 도쿄에서 먼 길을 찾아오는 일행 분도 겨울의 시레토코를 잊을 수가 없는 것인가 보다.

 

 

 

현재 걷고 있는 수풀 언저리가 바로 여름 목책로 위에서 감탄하며 바라보던 그 첫 번째 호수의 저 멀리 가장자리라는 사실.

돌아와 사진을 정리하면서도 저 호수 위를 걷고 있었다는 실감을 느끼기 힘든 것도 여전히 납득이 간다.

 

시간이라는 요소 외에 아무것도 첨가되지 않은 동일한 장소에서 느끼는 낯설음은, 여러 곳을 이동하며 즐기는 여행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그래서 갔던 곳을 가고 또 가는 여행이라도 전혀 아쉽거나 지겹지 않은 법이기도 하고.

 

 

 

가이드분은 이미 이곳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시레토코의 모습이 무엇인지도 잘 파악하고 있다.

이제껏 실컷 출입금지 지역을 누비고 다니긴 했지만, 여름의 한계였던 목책로 끝을 넘어가 바다쪽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에서

겨울의 우리들은 저 한계마저 넘어서 직접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새로운 즐거움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사실 목책로가 상당히 높아서 저 위에서도 바다가 보이긴 하지만

그림 한 점처럼 구경만 하던 그 장소에 두 발로 걸어가 볼 수 있다는 체험 하나만으로도 사람은 충분히 흥분할 수 있다.

 

 

 

목책로 위에서도 언덕에 가려 보이지 않는 숨겨진 부분을 볼 수 있는 곳에 도착한다.

먼저 온 팀은 저 밑까지 내려간 듯 흔적이 보이는데, 가이드분 말로는 저기까지 갈 필요는 별로 없을 듯 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내려갔다가 고생 좀 하겠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기도 하고.

 

목책로 위에서 봤을 때는 언덕 뒤가 바로 바다인 줄 알았는데, 옆으로 돌아와 보니 뒤쪽에도 어느 정도 공간이 있다.

저 부분의 여름 모습만큼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지 않는 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진다.

마치 한쪽 면만 보이는 달의 모습을 보는 듯한 기분.

 

 

 

호텔 창문 안에서 바라보던 것과 달리 이런 곳에서 유빙을 보면 정말로 그 거대한 바다 위에 얼음이 떠다니는구나 싶다.

바닷물이 얼은 것이니 유빙도 짠 맛이 날까 궁금했지만 경치 구경하느라 금새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8개월이나 지난 이제서야 다시 생각이 난다.

 

여름에 배를 타고 이 쪽을 통과해 가다보면 가끔 해안가 부근에서 장난치고 있는 불곰들을 볼 수도 있다고 한다.

자전거 여행 때는 당연히 그 비싼 배를 탈 생각을 해 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다음에 일반적인 여행을 위해 찾아올 때는 반드시 멀미약을 챙길 생각을 하고 있다.

사방팔방이 탁 트인 곳이지만 어쩐지 다소곳이 숨겨져 있던 공간을 발견한 듯한 즐거움을 뒤로 하고 스키의 방향을 돌린다.

 

 

 

사진이란 녀석이 가지는 장점은, 특정 시공간에 대한 떨어져가는 기억력을 복구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미 4년이나 지난 추억이라 세세한 지형까지는 생각이 나지 않았었는데

목책로 뒤에 봉긋 솟은 저 언덕 옆을 지나면서 담은 사진과 비교해 보니 비로소 다른 시간대의 두 풍경이 시간을 초월한 하나의 관념으로 정립되는 기분이다.

 

이제 여름과 겨울의 모습을 모두 마음 속에 담을 수 있었으니

여름에 찾아가면 설원이 생각나고, 겨울에 찾아가면 푸르디 푸른 습지가 생각나는 즐거운 선순환만 남게 되었다.

 

 

스키를 신고 있기는 하지만 프로급 선수가 아니고는 어차피 하산할 때도 천천히 걸어서 조심소심 내려가야 하니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지금도 결코 이른 시간은 아니다. 조금이라도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무서운 추위가 엄습하니까.

 

아슬아슬하게 사람 애간장을 태우던 구름이 선심을 썼던 것인지, 돌아가기 시작한 우리들에게 살포시 커튼을 걷듯이 물러나 준다.

겨울 시레토코 여행 첫날이자 마지막 날에 깨끗한 하늘 아래서 라우스산의 정상을 직접 목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다른 두 명도 당연히 즐겁겠지만 본인은 이 모습을 보면서 그 자전거 여행때의 가슴 묵직했던 감동이 재현되는 기분에 마음이 벅차오른다.

 

 

 

길지 않은 사진생활이지만 이제껏 찍은 사진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한 장을 바로 이곳에서 담았다.

시레토코란 이런 곳이구나 하는 생각에 셔터를 누른 후 십여 분간 자리를 뜨지 않고 가만히 시선을 고정시켰던 기억이 난다.

 

안으로 들어가면 어디가 땅이고 어디가 습지인지 알 수 없을 듯한 두려움을 간직한 호수 주변의 경이로운 모습과

바다와 접한 그 다섯 개의 호수를 굽어보는 웅장한 라우스산의 풍경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자연이란 어떤 것인가 각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지금 그 출입 불가능했던 두려움 위를 걸어가는 기분은 언어로 설명하기가 참 난감하다.

 

소야노 어머니가 역까지 바래다 주신다고 하셔서 시간은 널널하겠다 싶었는데

짧은 거리일수록 사실상 걸어가는 것과 자동차로 가는 것의 시간 이득차는 점점 없어진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일본에서는 장애인용 휠체어를 몇 년에 한번씩 제공해 주는데

이번에 소야노 어머니가 좀 튼튼한 녀석을 주문했더니 생각보다 의자 덩치가 커서 자동차 위쪽의 수납함에 들어가는게 아슬아슬하다.

일반인이라면 의자를 이리저리 옮겨도 보고 하겠지만, 메뉴얼대로 들어가지 않으면 손쓸 방도가 없는 것이 장애인의 고달픈 점.

옆에서 내가 도와주기는 했지만 덕분에 시간이 좀 간당간당한 편이다.

 

쇼야 군은 마츠모토로 가고, 난 나고야로 돌아가기 때문에 서로 반대편 정거장이다.

도착 5분 전까지는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눈다. 일단 예의상으로라도 연락없이 불쑥 찾아와 미안했다고 말해 둔다.

한 시간에 한 대 오는 전철을 기다리는 건 의외로 그렇게 지루하지 않다.

산골 마을이라는 걸 어필이라도 하듯, 역 옆으로 조금 걸어가면 작은 신사도 있어 구경갈 수도 있고.

 

 

 

쇼야 군이 자전거 학원을 다닌다는 건 생각지 못한 전개였는데

이것도 인연인지, 그 소식을 들으니 자전거 세계일주를 계획중인 나침반님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느낌이 든다.

 

나침반님이 자전거 제작에 들어갈 무렵이 되면, 함께 도쿄로 가서 세계 정상급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해보기로 했다.

다행히도 장거리 여행용 자전거는 일단 속도보다는 내구성 중심이라 제작이 크게 어렵지는 않다고.

 

쇼야 군은 아직 작별이 익숙한 나이가 아니라 이렇게 역 앞에 서 있으면 조금 서먹한 느낌도 든다.

마을의 유일한 친구는 자위대 지원했다가 키가 작다는 이유로 떨어졌고, 반동으로 경찰쪽에 들어가 버렸는데

음낭친구인 둘도 이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갈림길을 걸어가고 있다.

 

일본은 신칸센이 있어도 자주 지역을 왔다갔다 할 만큼 교통요금이 저렴한 것도 아니고 해서

성인이 되어 고향이나 친구와 멀어지게 되면 그리 쉽게 만나거나 하지는 못하는 편이다.

마치 돈 없어서 새마을도 못 타고 무궁화호로 서울과 부산을 왔다갔다 하는 케이스라고 할까.

 

이곳 키소에서 도쿄까지만 해도 바로 가는 전철이 없을 뿐더러, 버스로 4시간 반이 걸린다.

지도를 찾아보면 알겠지만 키소와 도쿄는 일본 전체에서 본다면 상당히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쏟아지던 비가 조금 잠잠해져서 키소의 마지막 풍경을 열심히 찍어대고 있었는데

문득 마츠모토로 가던 2010년의 기억이 겹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때는 엄청 쨍쨍하고 무더웠다.

2013년 이 순간의 쇼야 군은 바로 이 자리에 서서 건너편의 나를 바라보고 있다.

 

당시엔 마츠모토에 놀러가던, 좀 더 시간을 들여 나가노에 놀러가던

다시 돌아올 곳이 정해져 있다는 이유만으로 마음도 편안하게 순수한 관광을 즐겼던 기억이 난다.

자전거 여행을 다시 시작하고 나면 항상 뒤에서 무엇인가가 쫓아오는 듯한 느낌이 들곤 했는데.

아마도 그 쫓아오던 것은 계절이란 녀석이 아닐까 싶지만, 그보다 더 심리적인 압박감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연락없이 찾아가다 보니 이번엔 소야노 집안에서 뭔가 제대로 식사를 먹질 못했다. 저녁에 치즈 조각과 함께 맥주 한 잔이 전부라고 할까.

당연히 부담갖지 않게 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지만

소야노 가족들이 괜히 나한테 대접도 제대로 못했다고 미안해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드는 걸 보면

무슨 선택을 해도 항상 반대쪽의 후회는 남아있는게 삶의 갈림길이란 녀석이라는 기분이다.

 

2010년 내가 신세를 지던 당시엔, 지금 나 때문에 이렇게 해 주시는 건가 싶을 정도로

매일매일 맛있는 것만 잔뜩 만들어 주셔서 죄책감마저 들 정도였는데

쇼야 군도 원래 자기 어머니가 요리하는거 좋아한다고 말해주기도 했고

소야노 어머니도 자식들 다 떠나고 적적하던 찰나에 내가 와 줘서, 밥 만드는 보람이 있었다고 좋아하셨다.

 

그 마음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주는대로 맛있게 많이많이 먹었던 기억이 난다.

너무 사양을 하지 않고 게걸스럽게 먹었나 싶기도 하지만. 적어도 맛 없어서 억지로 먹은 식사는 한 번도 없었다고 확신한다.

 

밥솥에 송이를 포함한 각종 야채를 조미 간장과 함께 넣고 쪄 낸 송이밥은 심각하게 맛있어서

일본 사람들이 보면 놀랄만한 크기의 그릇에 마구 퍼담아 입에 집어넣곤 했었다.

소야노 어머니는 '원래 밥이 좀 남도록 만드는데 싹 비웠네요'라고 웃으셨는데, 어디까지 분위기를 읽었어야 했을지.

 

 

 

소야노 어머니의 밥도 맛있었지만, 도로 앞 휴게소에서도 키소의 명물 먹거리를 많이 판매하고 있었다.

산책하던 도중 슨키 카레(すんきカレー)라는 녀석이 있어서 신기한 마음에 하나 사들고 왔다.

 

한국에서는 일본어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단어라 대체 슨키가 뭔가 싶었는데

소야노 어머니가 설명해 주시길, 이 지방만의 독특한 순무절임이라고 한다.

 

보통 절임이라고 하면 소금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슨키는 매우 독특하게도 소금이 아니라 유산균을 이용한 발효 절임 음식.

산간지방인 키소에서는 '쌀은 빌려줘도 소금은 빌려주지 마라'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소금이 귀하디 귀한 지방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유산균을 이용한 독특한 절임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정말로 지역적 특색이 강한 희귀 음식에 들어가지만

내 입장에서는 잘 말린 시래기와 살짝 느낌이 비슷해서 위화감없이 먹을 수 있었다.

물론 이걸 카레에 넣어 만들 필요까지 있었나 싶긴 했지만, 카레의 향이 워낙 강렬해서 슨키마저도 느슨해진다.

 

제작 방식상 시래기와 비슷한 맛이 나는게 당연하지만 여기는 바람만으로 건조시키는게 아니라

유산균이 든 절임물에 넣고 진짜로 삭히는 개념이라, 시래기보다 훨씬 새큼하고 쌉싸름한 산미가 입맛을 자극한다.

나이 든 한국 사람이라면 꽤나 좋아할 만한 녀석. 이걸로 시래기국을 만들어도 꽤나 재미있는 녀석이 만들어질 듯 하다.

 

실은 이후에 소바집 쿠루마야 사장님이 나와 함께 슨키 절임 받으러 건너 마을에 가자고 권유해 주기도 했다.

겨울에 따뜻한 국물 먹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키소 지방의 고유 음식인 슨키를 조합해서

가츠오부시 국물에 슨키를 듬뿍 넣은 슨키 소바가 이곳의 겨울 특별 메뉴였던 것.

수십 년동안 이런 가게들을 위해 슨키를 만들어 온 농가에 직접 들려서 매년 구입해 온다고 한다.

 

뜨끈뜨끈한 슨키 소바도 먹어봤는데, 혀를 싸르륵 자극하는 산미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맛이 강한 시래기국을 먹는 느낌이지만 결코 동일하지는 않은 묘한 매력이 있는 음식.

젊은 사람들에게는 별로겠지만, 짠 거 싫어하는 중장년층에게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메뉴라고 생각한다.

 

 

 

숙련된 프로 요리사 쿠루마야의 사장님도 지지 않고 내 체중 증가에 도움을 주셨다.

창업 3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소바집 딸내미 분께서 공교롭게도 메밀 알레르기가 있어서

점심때 딸이 집에 있으면 사장님은 항상 소바 이외의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

 

내 경우엔 소바가 질려서 먹기 싫어진다는 경우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지만

업으로 삼고 일을 해 오시는 가게 분들 몇몇은 소바가 지겹다며 밥과 반찬으로 점심을 때우기도 한다.

내가 소바만 줄창 흡입해대고 있으니 가끔 사장님이 '가게 부담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소바만 먹는가' 싶어

다른 것도 먹어보라고 권하는 경우도 있었다.

 

난 면 종류를 원래 미친듯이 좋아하는 데다가, 이곳 소바는 결코 한국에서 접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었기에

후회 남기지 않으려고 끝도없이 소바만 먹어대고 있었다. 그래도 가끔 사장님의 호의를 생각해서 본의아니게

따로 만들어 주시는 식사를 즐기기도 했는데, 어느 날 만들어 주신 카레가 참 인상적이었다.

 

소바집 사장님이 왠 카레인가 싶지만, 젊을 때 오가사와라 제도까지 가서 음식수련을 했을 정도로

요리라는 행위 자체에 장인정신을 발휘했던 사장님이라서 사실 못 만드는 요리가 없다고 보면 된다.

참고로, 오가사와라 제도를 구글 지도에서 한번 찾아보시길.

 

딸내미 분이 먹고싶다고 말만 하면 뭐든 척척 만들어 내는 모습이 참 인상깊었다.

본업이 음식점 치프가 아니었다면 내조 킹 남편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칠 위인이 되었을 텐데.

 

사장님을 이 녀석을 음식점용 카레라고 불렀는데, 일반적으로 집에서 만드는 카레와는 전혀 다른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

마치 한국에서 먹는 중국음식점의 전가복이나 해삼탕을 연상시킬 정도로

전분을 듬뿍 넣고 신선한 야채와 카레 소스를 강력한 식당용 화력으로 확 볶아내어 만드는 녀석인데

일본사람 취향에 맞춰서 너무 달짝지근한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맛의 색다름이라는 점에서 볼 때는

한국서 결코 먹어본 적이 없는 매우 독특한 카레였음에 틀림없다. 카레 소스가 물처럼 흐르는 게 아니라 탕수육 소스처럼 탱글탱글하다.

 

 

 

라면보다 짜장면보다 소바가 더 좋기 때문에, 쿠루마야에서의 점심시간은 나에겐 천국이었다.

조금의 거짓도 없이 하루 두 끼 정도의 소바라면 죽을 때까지 질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하지만 친절한 쿠루마야 분들은 내가 자신들의 가게에서 좀 더 다양한 맛을 즐겨보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어서

예약 손님의 수가 갑자기 변경되거나, 예상보다 반찬이 좀 더 남았을 때에는 그 남은 도시락을 나한테 주기도 하셨다.

 

이 도시락은 단체 예약시에만 주문 가능한 녀석으로, 일반적으로는 메뉴에 등재되어 있지 않다.

소바로 유명한 곳이다 보니 도쿄에서도 단체 관광버스 타고 이곳으로 식사하러 오는 경우가 빈번한데

그럴 경우 다른 메뉴로는 도저히 시간을 맞출 수 없기 때문에 만들어 내는 도시락.

이런 녀석이라면 손님 오기 30분 전쯤까지 대량으로 만들어 세팅해 놓을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멀리서 오는 손님한테 아무렇게나 내어 놓는 싸구려 도시락은 절대 아니다.

간 무를 머무린 버섯, 곤약 무침, 신선한 채소 등등 상당한 정성이 들어가는 밑반찬에

연한 간장을 밑에 깔아놓고 살짝 올린 메밀 두부도 그 있는듯 없는듯한 고소함이 매력적이다.

이 도시락과 함께 소바 한 자루씩 제공하는 것이 단체 예약손님에게 내 놓는 기본 코스.

 

개수가 안맞아 남은 도시락을 나보고 먹어보라고 건네줬을 때 기념으로 사진도 찍었다.

이게 내가 점심값으로 일당에서 공제하는 금액보다 훨씬 더 비싼 도시락이라서

반쯤 농담이긴 하지만 이걸 먹는다는 건 쿠루마야 직원들에게서는 제비뽑기에 당첨되는 그런 개념이기도 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난 아무리 비싼 도시락보다도 소바 팍팍 건져내서 흡입하는게 제일 행복했지만.

사실 소바집 메뉴 중에서 소바가 제일 싸다.

 

 

 

쿠루마야에서 떠날 날이 얼마 남지않은 나를 위해 고기집에서 회식을 열어주었다.

참가비가 있었지만 결코 나한테는 받으려 하질 않아서 고기를 넘길 때 조금 목이 매이는 기분이 들었다.

 

많은 한국사람들이 구워먹는 고기의 원조는 한국이며 일본은 아주 늦게서야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고기 맛은 한국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없잖아 있는데, 그 이론이 통하는 경우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제 와서는 고기값이 일본보다 더 싸다고 말할 수도 없을 정도인데다가, 일본은 그 특유의 꼼꼼함 때문인지

한국의 고기집보다 훨씬 더 세세하게 부위를 분류해서 조금씩 시켜먹을 수 있어서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일본에서는 고기집에 가면 한국 고기집의 메뉴와 더불어 소혓바닥, 곱창, 간 등등도 함께 주문할 수 있다.

 

이 날만큼은 고기도 신나게 집어먹고 술도 마구 들이키고 해서 광란의 하룻밤을 보낸 기억이 난다.

휴게소에 돌아와서 한국의 엄니한테 전화를 했는데, 술이 들어간 탓인지 자꾸 일본어만 튀어나와서 당황했었다.

 

 

 

식당 업무란 거의 노동집약적이라, 나이 든 여성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기업화된 대형 음식점이 아니고 전부 가족들처럼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이다 보니

손님이 좀 뜸해서 가게의 저력을 100% 발휘하지 않아도 될 때에는

누가 정해놓은 것도 아닌데 알아서 쉴 사람은 쉬고 일할 사람은 일하는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나 같은 경우는 일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서포트가 중심이라서

굳이 쉬지 않아도 괜찮은데도 불구하고 틈만 나면 커피 마시고 쉬라고 권유를 받아서 고마웠던 기억이 난다.

쉬는 시간에 간식 즐겨먹는 것도 이런 일의 즐거움이라고 해야 할까. 참 다양한 과자 많이 준비해 놓았다.

그 중에서 내가 좋아했던 건 나고야 명물인 우이로(ういろう)였는데, 가끔 나고야에 가는 사장님이

내가 이걸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난 후 꾸준히 사 오셔서 원없이 먹곤 했다. 참 지금 생각하면 낮짝 두꺼운 일이지만.

 

우이로는 양갱과 떡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녀석으로, 팥이나 쌀을 적당히 반죽해서 쪄 내는데

바리에이션이 다양하고, 양갱처럼 과하게 달지 않은 은은한 달콤함이 마음에 들었다.

 

 

 

떠날 무렵 날씨가 추워지면 소야노 가족과 함께 해 먹던 전골.

당시 일본에서 크게 유행한 녀석인데, 전골 자체보다는 그 어마어마한 편리함 때문에 인기를 끌었다.

 

준비할 것이라고는 버섯, 양배추, 얇게 썬 고기 등 전골의 기본 재료들 뿐.

물조차 필요없다. 그냥 재료를 나베(냄비)에 넣고 뚜껑을 덮은 후 가열하면 끝이다.

소야노 가족들은 나에게 재미있는 볼거리를 하나 소개한다는 들뜬 마음에 꽤나 신나게 재료를 준비하곤 했다.

 

 

 

당시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이 냄비는 타진 나베라고 하는데, 척 봐도 일본의 전통 냄비는 아니다.

이 녀석은 원래 모로코의 전통 냄비라고, '타진'이라는 단어 자체가 냄비를 뜻하기 때문에 사실상 '냄비 냄비'라는 이상한 이름이 되어버린다.

 

물이 적은 모로코에서 발달할 만한 냄비로, 중앙 부분의 파인 곳으로 수증기가 집중되어 다시 재료로 떨어지는 순환 구조를 하고 있다.

싸구려 타진은 유리나 금속 재료를 사용하지만 원래는 두꺼운 도자기로 만들어야 수분과 열기가 충분히 내부에서 순환할 수 있다.

수분이 많은 생야채만 잘 넣어놓으면 물 한방울도 넣지 않고 훌륭한 전골요리가 만들어 진다.

국물 먹으면 비만의 원인이 된다고들 하니, 이렇게 물기 별로 없이 만들어진 전골을 소스에 찍어 먹는게 유행이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지만 확실히 물조차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찜요리라서 재료 본연의 맛을 즐기기에 좋은 음식이다.

훗날 한국 귀국할 때 이 냄비만큼은 하나 사 갈까 고민했는데, 언제든지 살 수 있으니 그 때 바로 구입은 하지 않았다.

자취생에게도 매우 환영받을 만 하고 해서 조사해 보니 한국에도 역시 많이 들어와 있다.

 

 

 

열차를 기다리는 15분 동안 멍하니 서서 옛 추억들을 되감아 본다.

 

2010년 당시엔 다시 출발하는 자전거 여행이라는 느낌 때문에

아쉽고 서운하면서도 다시 앞으로 나아갈 에너지에 흥분되었는데

이번엔 인사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아서 예전보다 더 적적한 느낌이다.

 

아예 못 만날 사람들도 아닌데 항상 헤어질 때는 묘한 기분.

 

떠나 보내는 건 오히려 낫지만, 내가 탈 열차가 쇼야 군보다 먼저 와서 배웅을 받는 모양이 되어 버렸다.

열차 창문에서 어색하게 손 한번 흔들고 나고야로 가는 긴 열차길에 몸을 맡긴다.

나고야까지 직통으로 가는 열차가 없어서 한번 갈아타는 시간까지 합하면 3시간 가까운 이동.

 

 

 

키소를 찾아갈 때는 오랜만에 보는 녹색 풍경의 향연에 눈이 즐거울 따름이었지만

나고야로 돌아갈 때는 풍경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람의 잔향이 남아있을 때는 자연 풍경도 뇌리에 들어오지 않는가 보다. 그래서 다들 인연을 만드는 것일지도.

 

 

 

기온이 키소와 거의 비슷하지만, 역시 나고야의 밤은 습하고 무덥다.

내일 하루 자유시간이 더 있지만 사실상 이번 여행은 오늘로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키소에서의 하룻밤을 위해 덤으로 즐긴 8일이 아쉽지는 않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정을 소화해 버린 후의 여행은 잔잔한 여운 정도밖에 남지 않는다.

 

며칠 전 나고야에 도착한 날과 같은 호텔의 같은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지만

왠지 그때보다 조금 더 쓸쓸하고 아쉬운 기분만 남아있다.

과거로의 여행은 항상 플러스 마이너스 해서 남는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듯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할 수는 없는 의무감과 같은 감정이 이끄는 것이 그런 되짚어 가는 여행이기도 하고.

 

키소와 같은 곳이 내 인생에서 점점 늘어난다면 그건 그거대로 인연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 지는 고통을 초래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인연은 본인이 계획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저 묵묵히 갈 길을 가다가 나를 부르는 인연이 있을 때 거기에 응답할 뿐이다.

 

 

 

잠자리는 2층의 적당한 방에 들어가기로 한다.

에전에 언급한 적이 있듯, 소야노 집안 남자들은 정리라는 개념을 우주의 특이점 만큼이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

1,2층 모두 합해 70평이 넘는 상당히 큰 주택임에도 어른 한 명이 누워 잘 공간 만들기가 쉽지는 않다.

 

한국에서라면 뭐,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그램에 나올 법한 수준인데

예전엔 덕분에 이 공기좋은 시골집에서 눈과 코가 따가워 죽을뻔한 적도 있었다.

 

이번에 연락을 미리 하고 갔으면 가족들이 일부러라도 내가 잘만한 곳은 치워 놨을 테지만

잡동사니에 둘러싸여 딱 한 사람 누울만한 공간에 밀폐되어 자는 잠이란 것도 의외로 안락한 편이다.

자전거 여행 당시, 1인용 텐트에 누워 있으면 내가 자전거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전륜 양쪽에 2개, 후륜 양쪽에 2개의 가방을 모두 뜯어서 텐트 안에 넣으면

자전거에 달아 놓았을 때와 똑같이 누워있는 내 상체와 하체 양쪽에 위치하게 되기 때문.

거의 몸에 밀착되다시피 하는데 그게 또 홀로 자전거 여행의 적막함을 꽉 채워주는 느낌이라 나쁘지 않았다.

 

밤에 비가 시원하게 쏟아져서 아침엔 서늘할 정도다.

소야노 아버지는 오늘도 일이 있어서 일찍 박물관에 나가신다. 2층까지 올라와서 나하고 악수한다.

 

쇼야 군은 게임이나 컴퓨터, 애니메이션쪽에 관심이 많아서 가지고 있는 장비도 어마어마하다.

사정상 소야노 부모님은 물건 사주는 데 있어서 별로 부족함이 없는 편이었고 (성인식 이후엔 어찌 될런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이런 시골에서도 쇼야 군의 PC 는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최고급 사양을 자랑한다. 케이스 가격만 30만원짜리.

거의 1년 내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컴퓨터를 끄는 시간이 없으며, 토렌트나 위니 같은 공유 프로그램은 24시간 돌아간다.

쇼야 군이 2층에서 자던 곳이 이 컴퓨터 앞이고, 그 외엔 사람이 잘 만한 공간이 없었으므로 나 역시 PC 소음 들으며 잠을 잤다.

쇼야 군은 1층 소파에서 적당히 잤다고, 물론 잠자리 가리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죄책감 느낄 정도는 아니다.

 

게임기도 쇼야 군과 동시대 녀석들은 전부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되고, 아이폰, 아이패드, 노트북, 1080P 급 액션캠 등등 없는게 없다.

소야노 집안이 원래 가계가 부족하던 집이 아닌데다가, 어머니의 사고 이후 정부 보조금이나 세금 혜택도 많아져서

금전상 별로 부담되는 일은 아니었겠지만 쇼야 군에게 어떤 도움이 되었을지는 짦은 인연의 내가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갖고 싶은거 다 사주는 응석이 아이를 망친다는, 아주 교과서적인 해설이 이곳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쇼야 군은 부모님의 이런 경제적 여유와 함께, 얼핏 보기에 과도하게 보이는 헌신적 마인드가 없었다면

홋카이도의 어느 시골에서 자전거를 탄 나와 만날 일은 영원히 없었을지도 모르니까.

사람과 가정에게는 당사자들 외에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본질적 문제가 있고, 그건 옳던 그르던 자신들의 기준으로 해결을 봐야 한다.

 

 

 

잘 자라고 있는 논을 보니 2010년 생각이 난다.

8월부터 11월까지 생활한 키소 마을이다 보니 중간에 한창 추수철에 포함되었다.

소바집 사람들도 적지 않은 수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다 보니 휴일 맞춰서 일손 도와주러 가느라 바쁜 나날.

 

소야노 가족도 집 뒷마당에 자기 논이 있어서 1년에 한 번씩 기계를 빌려서 후다닥 끝내버린다.

원래는 이것보다 3배 정도는 컸지만, 소야노 어머니가 다친 이후로 관리도 힘들고 해서 많이 줄여버린 거라고.

이제는 이런 키소 마을이라도 농사만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집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노령화가 계속되고 젊은이들은 도시로 떠나가니, 논밭은 있어도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어

예전에 비해 상당수의 논밭이 메밀밭으로 전환하는 중이라고. 메밀밭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어마어마한 수확량을 보여주는 편이다.

다행이랄까, 나가노 현 주변엔 자연의 힘이 남아있어서 메밀은 그냥 쑥쑥 자라고, 소바로도 유명하니 그럭저럭 푼돈벌이는 된다고.

 

농기계는 한국의 농협과 비슷한 JA 에서 대여하는데, 마을 사람들이 대금을 모아서 대여한 후 날짜별로 돌아가며 사용한다.

괜히 나한테 말도 하지 않고 기계를 돌리기 시작하는 바람에 잠결에 일어나 밖으로 나갔는데, 쇼야 군과 아버지는 벌써 한창 작업중이었다.

 

기계 덕분에 쇼야 군과 나는 그냥 가지런히 잘 잘린 뭉터기를 묶어서 구석에 몰아놓기만 하면 된다.

사람이 벤다면 세 명이서도 하루 꼬박은 걸릴만한 일을 1시간 30분만에 다 끝내버리고

바로 트럭에 짚단을 실어 탈곡기로 이동한다. 농촌 마을에는 여기저기 무인 탈곡기가 있어서 이제 힘쓸 일은 다 끝난 셈.

날씨가 더워서 겨우 짚단 수십 개 만드는데도 땀 좀 흘렸지만, 탈곡기에서 쏟아지는 햇쌀을 보고 있으니 뿌듯하기 그지없다.

 

이제는 '쌀의 소중함' 이라는 말은 꺼내기만 해도 촌스러워하는 시대이긴 하지만

자기 방구석만한 공간만큼의 농사라도 직접 지어보기만 한다면

식사때 입으로 들어가는 쌀알이 얼마나 위대해 보이는지 실감할 수 있을 텐데.

거진 쓰잘데기없는 교육프로그램 몇 개 없애버리고 진짜 '자기가 지은 쌀로 밥 만들어 먹기' 프로젝트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본다.

 

탈곡기를 사용하고 나면 온 몸에 가루가 묻어 간질간질한데, 이 날 운좋게도(?) 온수기가 고장나는 바람에

키소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냉수로 시원하게 샤워 즐겼던 기억이 남아있다.

 

 

 

이곳 키소와 마츠모토 등지에서는 가을이 되면 추수만큼이나 바빠지는게 송이버섯 따는 일이다.

일본 최대의 송이버섯 생산지인 마츠모토 주변엔, 버섯이 나는 야산 한두 개만 소유하고 있으면

떼부자라고 할 만큼 자생 송이가 잘 나오기로 유명하다.

 

개인 소유가 아닌 산에서는 마을 진흥회 회원들이 팀을 짜서 송이를 따낸 후, 균등 분배하는 식으로 운용한다.

송이가 자라는 산이라는 게 등산로가 존재하는 그런 상냥한 곳이 아니기 때문에 요즘 키소 마을도 나이 걱정을 많이 하는 편이라고.

소야노 아버지 정도 되는 분이 상당히 젊은 축에 속한다고 하니 가만히 넘길 문제는 아니다.

 

물이 좋아서 밥맛도 원래 심각하게 좋은 곳인데

내가 있던 2010년엔 송이버섯의 가격 파괴가 걱정될 정도로 너무나 송이 농사가 잘 되는 바람에

시장애 내다 팔 분량을 제외하고 가져오는 송이들마저 A급 이상의 무시무시한 녀석들이었다.

 

다듬기만 하면 거진 수백만 원 어치는 될 만한 송이를 산에서 담아와, 몇날 며칠을 송이 된장국, 송이 오곡밥, 송이 찜, 송이 구이 등으로 즐기곤 했다.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도 참 난감했는데, 이런 것을 그냥 막 먹으려니 부담감에 위에서 경련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돈을 지불하려니 그냥 산에서 따 와서 연례 행사로 먹는 식사라 그 분들이 받을리도 없다는 점에서 진퇴양난이었다.

 

 

 

키소는 요즘들어 많이 더워졌다고는 하지만, 험한 산세를 낀 마을이라 여전히 밤이 되면 그럭저럭 서늘해 지는 곳이다.

웅웅거리는 컴퓨터 옆에서 쪽잠을 청하니 2010년의 출발 전 추억이 떠오른다.

 

많이 추워지던 시절이라 월동 준비에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소바집 쿠루마야 분들과 회식하러 고기집에 갔을 때 선물로 이걸 건내주셨다.

당시 한국에는 들어오지 않았지만 입소문을 타고 유명했던 그 유니클로의 히트텍.

일본에서는 1천엔 짜리 싸구려라, 광고는 굉장한 첨단기술로 만든 보온 내복인 것처럼 소란을 떨지만

그냥 한겹 더 입어놓으면 조금이나마 따뜻하겠지 하는 그런 수준밖에 되지 않는 녀석이었다.

 

그래도 나를 위해 일부러 유니클로에서 옷을 사 주셨던 기억에, 옷보다 그 마음이 따뜻했던 추억이 남아있다.

키소에서 가장 가까운 유니클로 매장은 자동차로 40분 거리에 있었으니까.

 

훗날 저 비닐봉투도 곱게 싸서 한국에 가지고 돌아왔다. 엄니는 주접을 떠는구나 하고 웃으셨지만.

 

 

 

자기 전 휴게소까지 내려갔다 오는 산책길에서도 예상치 못한 여러 만남을 갖는 게 여행의 즐거움이기도 했다.

휴게소 화장실 바닥에 이상한 녀석이 있어서, 일부러 돌아가 카메라까지 가져와 담아봤다.

소야노 아버지는 어릴 적 몇번 본 적이 있는 녀석이라고 갸우뚱 하신다.

 

여행중 만난 생물체에 대해서는 일단 알아보자고 생각했기 때문에 훗날 귀국 후 여러가지 조사를 해 보니

제대로 된 이름도 붙여져 있지 않은, 산거머리의 일종이라고 한다. 거머리종이긴 해도 피를 빠는 건 아니고.

산 속의 습한 곳에서 생활하고, 물이 더러우면 그냥 녹아버린다고 하니 보기보다는 깔끔한 녀석인 듯 하다.

 

그 화장실 앞에서는 아시아 전 지역을 여행중인 이탈리아 사람도 만날 수 있었다.

키소 휴게소는 밤에도 문을 닫지 않는 무인안내소가 있어서 헝그리 여행자들에겐 훌륭한 휴식처가 된다.

대부분의 휴게소는 저녁 이후로 안내소 문을 닫아버리기 때문에 야외노숙이 되기 십상이지만

겨울엔 난방까지 틀어주는 24시간 무인 안내소는 그야말로 천국과 같은 곳. 이탈리아인도 행복해 하는 눈치였다.

 

 

 

비가 온 후의 키소 마을 역시 아침을 상쾌하게 만들어 준다. 이곳은 정말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다.

해발이 높다보니 비구름이 자주 산기슭에 걸리는데, 이 풍경이 또 환상적이다. 특히 해 뜰때나 해 질무렵의 골든 타임에는.

 

소야노 군은 빡빡한 1학기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터라 아침부터 꽤나 뒹굴뒹굴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슬슬 독립할 나이긴 해도 여전히 성인식 마치지 않은 소년이라

이 느긋한 키소 마을에서 빡빡한 도쿄에 상경해 전철 50분씩 타고 학원에 다니는 생활에 익숙해지기 쉽진 않을 듯 하다.

특히 도쿄같은 곳에서 만드는 인간관계는 소야노 군에게 큰 시련이 될 수도 있으니, 내색은 안하지만 조금 걱정도 된다.

 

두 달만 더 있으면 이 집앞 논마지기도 예전처럼 황금색으로 물들고 있을텐데.

농촌의 사계절은 놓치기 아까울 정도로 변화무쌍하다. 그 변화만 바라보고 있어도 삶이 바쁘게 느껴지는게 진짜 농촌.

 

 

 

여름날씨가 흉폭할 수록 거대 산골짜기 사이에 위치한 키소 마을같은 곳은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날씨를 자랑한다. 폭우가 쏟아지고 나면 살을 꿰뚫는 햇볕이 뒤를 따른다.

기념 사진이라도 남기려고 카메라 들고 밖으로 나오니, 사진 찍기엔 최고의 날씨를 보여주고 있다.

 

소야노 군은 자신이 배우는 자전거에 대한 지식이 마음에 드는지 여러가지를 설명해 준다.

일본이 자전거 산업으로는 세계 최강에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전문적으로 자전거 지식을 가르치는 곳은 없었다고.

자기가 2회 입학생이기 때문에, 꾸준한 노력과 약간의 운만 따라준다면 시장 선점의 효과를 볼 수 있을거라 한다.

 

자전거에 대해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자전거 공학은 넓게 봐서 우주선 제작에까지 연결되는 기술의 결정체다.

어떤 소재든 실험할 수 있고, 그 반면 재료비가 상대적으로 적게 들어가는 구조를 하고 있으며, 실전 테스트 역시 어렵지 않은 녀석이라

고분자 탄소강과 카본으로 프레임을 떡칠한 수백, 수천만원대의 자전거도, 실험용으로는 저렴한 편이다.

 

그 외에도 자전거는 사람 손이 여전히 기계보다 우위를 점하는 제작 분야라서, 도전할 가치가 충분한 시장이기도 하다.

소야노 아버지가 탔었고, 지금은 소야노 군이 산책용으로 사용하는 사진의 저 자전거도 60년대 이탈리아 장인이 만든 모델.

소야노 군은 프레임을 이리저리 분해해 가면서 형태별 강도와 저항성 등에 대해 신이 나서 설명을 해 준다.

 

자전거 이론에 대해 듣는 것 역시 나에게는 충분히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한번 파고들면 주위가 보이지 않는 열정을 보이는 소야노 군의 모습을 보는 것 역시 흐뭇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역시 반쯤 이쪽 가족이 되어버린 탓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기도 한다.

 

 

 

낮엔 대자연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는 곳이지만, 대자연이 이렇게 낭만적인 녀석인 것만은 아니다.

모든것이 풍성한 여름이야 모든 것들이 풍요로움을 즐길 수 있지만

가을이 넘어가면 이 풍경은 점점 가혹한 경쟁의 전장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겨울이 빨리 찾아오는 이곳에서는 10월에 들어서기 무섭게 하루에 한두 번씩 곰 출몰 주의보가 내려진다.

슬슬 먹을게 줄어드는 시기라 맷돼지는 물론이고, 평소에 보이지 않던 곰까지 마을 주변에 출현한다.

 

지금 사진 찍어대는 이 풍경조차 사실 소야노 집 5m 앞의 모습인데, 이런 풍경이 마냥 보기 좋은 그림이 아닌 것은 그 때문이다.

밤에 산책하러 갈 때도 괜스레 무서워 질 정도라, 자전거 여행 할 때보다 더 스릴넘치는 시간이기도 했다.

소야노 아버지가 밤에 산책나가는 나한테 강력 렌턴과 방울 한 쌍을 건네줄 때 정말 오싹할 정도였으니.

 

 

 

내가 이 집을 찾은 2010년 당시엔, 소야노 가족도 여러가지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시절이다.

소야노 어머니가 사고로 하반신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후, 수 년에 걸쳐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안 모든 구역을 베리어 프리로 바꾸고, 장애인 혼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샤워 장비도 갖추고.

 

중간에 시공업체가 계약기간을 준수하지 않고 돈만 받아먹어서 소송까지 갈 뻔한 시기도 있었고

업체측에서 소송을 무마하기 위해 계약외의 앞마당 차고까지 하나 더 만들어 주던 시기가 바로 내가 도착했던 때다.

 

왼쪽에 슬쩍 보이는 저 차고는, 완공되는 당일 집에 놀러온 소야노 형이 그대로 갖다 박아버리는 바람에 찌그러졌지만

이번에 와 보니 박은 곳은 말끔하게 수리되어 있다.

추억이 사라진 듯 해서 약간 아쉬웠지만, 나와 소야노 가족은 멀쩡한 차고 기둥만 봐도 웃을 수 있으니 그걸로 족하다.

 

 

 

소야노 군은 나하고 닮은 점이 없잖아 있어서, 오히려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알아차리는 부분이 있어 가끔 난감하다.

단지 14년의 시간이라는 차이만큼의 연륜이 나와 소야노 군의 간격을 조금이나마 만들어 주는 갭이라고 할까.

내가 잡아낼 수 있는 것을 소야노 군은 잡아낼 수 없고, 조금 더 나이를 먹으면 소야노 군 역시 지금의 내 심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소야노 군의 말투와 톤, 대화 사이의 'pause', 대화의 흐름 등 모든 요소에서 미묘한 차이점을 느끼는 것.

소야노 군이 자신의 의도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더라도 나는 그 의도와 관계없이 대화 깊숙히 가라앉아 있는 사실을 잡아낼 수 있다.

괜히 소야노 군을 속이는 것 같은 기분도 들어서 가끔 우울해 지지만, 이건 내 의도대로 생각할 수 없는 반사적인 행동이다.

 

단지 이번에 만난 소야노 군은 , 여전히 자신의 앞날에 대해 그리고 자신 스스로에 대해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갈 의지와 그에 따른 준비를 차근차근히 실행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생애 첫 뿌듯함을 느끼는 듯 했다.

머리가 불안하고 어지러워도 두 발을 내밀다 보면 앞으로 전진하게 되어 있다고 슬쩍 말해준다.

사하라 사막에서도 느꼈던 사실이니 그것만큼은 조언해 줄 수 있다.

 

 

 

집안은 확실히 리쿠때문에 좀 더 냄새가 나고 지저분해 진 느낌이지만

워낙 애교가 많은 녀석이라 소야노 어머니 재활에도 도움이 되는 듯 하니 나쁠 거 없다.

 

소야노 집안 가족이다 보니 이 녀석도 왠만한 강아지 저리가랄 정도로 사정이 많은 녀석.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무려 오키나와에서 비행기를 타고 이 집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토이 푸들이라 몸도 굉장히 약해 어릴적엔 죽음의 고비도 많이 넘겼다고.

지금은 뭐 이쪽 가족들을 닮았는지 엄청 건강해 졌지만.

 

머리가 굉장히 좋고 순해서 기분 나쁠때 오줌으로 항의하는 것까지 잘 익힌 녀석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소야노 아버지에게 만큼은 끊임없이 짖고 물고 난리도 아니다.

장난인가 싶었는데, 한때는 옷도 찢기고 피까지 날 정도로 물린 적도 있다고 하니.

 

유독 소야노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거나 나갈 때만 그런 현상이 심한데

아무래도 이 녀석 머리에서는 몸이 불편한 어머니와 건강한 아버지의 이동 루트에서 뭔가 유추를 하는지도 모른다.

교정사를 불러 고쳐야 할 만큼 큰 문제도 아니라서 그냥 애교로 놔 두고 있는데, 소야노 아버지가 이 녀석을 엄청 좋아하니까.

 

수컷이라 그런지 남자를 좋아한다는데(?) 나를 굉장히 잘 따르고, 쓰다듬어주면 배를 발랑 뒤집어 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소야노 어머니를 제일 좋아해서 틈만 나면 휠체어 위로 뛰어올라가지만

어머니가 자기를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면 그제서야 털털털 내 옆에 와서 풀썩 누워버리는 영리함도 보여주지만.

 

 

 

원래 엄청 깔끔한 타입이었던 소야노 어머니가 보시기에 스트레스가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지만

이집 남자들이 청소, 정리에 대해 초인적인 무신경함을 발휘하는 능력자들이라 사실상 포기 상태인 듯.

 

의료, 봉사쪽으로 활동을 오래 하신 분이라 생각의 전환이 빠르다는게 오히려 삶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하반신 마비 후 자신이 마음대로 청소할 수 없는 집안 현실을 앞에 두고

한탄과 분노로 자신을 몰아세우는 것과, 살다보니 지저분한 것도 익숙해 지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

 

맨날 노력이니 끈기니 포기하지 말라느니 하는 가증스러운 혀만 놀리는 소위 '멘토'라는 것들이 득세하는 세상이라

어쩔 수 없다는 말에 지나치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 같지만

포기하지 않아서 그게 스트레스가 된다면 포기하는게 훨씬 낫다. 이것은 특히 심신이 미약한 사람들의 치료와 큰 관련성이 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포기하면 안된다고 자신을 몰아세우는 건 그냥 수명만 깎는 길이다.

후천적 장애를 짊어진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이것은 포기가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거기에 맞는 마음가짐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런 고로, 2010년 당시보다 쪼금 더 어지러워져 있는 이 모습에 오히려 조금 안도가 된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하룻밤 신세 진 김에 바닥 한번 쓸고 닦아는 드렸다. 리쿠 오줌때문에 조금 찐득해 지려는 참이었으니.

 

 

 

새벽까지 비 온 후 그렇게도 화창하던 날씨가 또 한번 격변한다.

지나가는 소나기인 듯 하지만 아주 시원하게 쏟아주니 이건 또 이거대로 반갑다.

자연이 풍요롭기만 하면 어떤 상황이든 보기 싫은 모습은 없다.

 

이런 환경 탓인지 이곳 특산품인 옥수수는 진짜 맛있다.

적당히 노릇노릇 구워진 옥수수를 씹어물면 달달하고 진하게 고소한 맛과 탱탱함이 나를 즐겁게 한다.

 

옥수수는 보기와 달리 신선도가 매우 중요한 녀석으로, 수확 후 1주일만에 원래 맛의 70% 이상이 사라져 버리는 품종이다.

이곳에서 바로 딴 녀석을 찌고 구워서 먹었을 때 그 황홀함은 그 신선도의 탓일지도 모른다.

 

키소는 여름이 좀 늦은 편이라 아직 수확철이 아니라서 먹을 수 없었다.

TV에 나오는 '줄 서서 먹는 음식점'에서 30분, 한 시간씩 기다렸다가 후다닥 먹고 나오는 그런 체험보다는

차라리 옥수수 맛있는 곳에 차 타고 가서 제철 옥수수 따자마자 바로 구워먹어 보기를 추천한다. 차원이 다르다.

 

 

 

한 시간쯤 뒤에 출발해야 하는데 비가 쏟아지니 약간 난감한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소야노 군이 자기도 오늘 성인식 정장 보러 마츠모토에 가야 한다고 해서

어머니가 역 앞까지 차로 바래다 주시기로 하셨다. 아마 나름 신경 써 주신 것이겠지.

 

이럴 경우엔 극구 사양하는게 일반적이지만, 소야노 어머니의 경우 감사의 인사 한번 하고 받아들이는게 낫다.

사고 후 4년만에 장애인용 자동차를 한 대 뽑으신 게 2010년이었는데

그 이후 연습을 많이 해서 어지간한 장거리 아니면 쉽게 운전이 가능하다고 하신다.

 

이동에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자동차 운전이 굉장히 즐겁고 도움되는 치료법이기 때문에

걸어서 20분밖에 걸리지 않는 역까지 태워주신다고 해도 내가 굳이 말릴 필요가 없다.

두 손으로 조절하는 엑셀과 브레이크의 감촉이 소야노 어머니같은 사람에게는 얼마나 뿌듯할까.

 

 

 

아침엔 산등성이를 타고 흐르는 물안개.

오전엔 풀내음 풍기는 짜릿한 여름 햇살에, 점심무렵엔 폭우로 진중한 모습을 보여주니

한 곳에서 이동하지 않고 이렇게 셔터 눌러재끼는 재미도 참 각별한 것이다.

 

도시에서는 일 주일에 한두 번도 셔터 누르기 귀찮을 뿐이고

요즘처럼 밤에 온갖 트리와 전구가 빛나는 시기도 시큰둥할 뿐이었는데

이 곳에서는 카메라를 그냥 어깨에 걸쳐놓는게 더 편할 정도로 눈을 쉬게 할 여유가 없다.

 

이 앞에 바다만 있었다면 아마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은 지 몇 년은 지났을텐데.

대구 사람이다보니 역시 바다에 동경을 품고 있는건 당연할지로 모르겠다.

사실 소야노 군도 바다가 보고 싶어서 여행을 시작한 것이니, 내륙 주민들의 생각은 이런 데서 닮아있는 것일지도.

 

 

서둘러 지인들에게 인사를 나누고, 내일 돌아가야 한다고 못을 박아놓은 지금은

이삼 일 정도 머무르며 느긋하게 추억을 회상하지 않고 왜 이렇게 도망치듯 서두르는 것일까 스스로도 의아하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본능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것도 나름 이유는 다 가지고 있는 법이다.

 

자전거 여행 도중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을 갖고 이곳에 도착했을 땐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종일 누워 자기만 해도 그 잠이 달콤하게 느껴졌을 만큼 한계에 달해있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나보다 먼저 자전거 여행을 재개하는 쇼야 군을 따라갈 수도 없이

계약한 기간만큼 묵묵히 시간을 보내며 자금을 모으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지금은 그렇게 가끔 고개를 하늘로 올려들고 눈을 감은 채로 자전거를 타며 자유에 탐닉하던 내가 아니라

여름 휴가철을 맞아 없는 시간 쪼개서 간신히 날아와, 원래는 자전거에 실어 놓던 백팩을 등에 메고

버스와 전철을 이용해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사람이다. 자전거 여행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지금의 나는 이곳에서 자전거 여행 당시와 달리 돌아갈 길만 남아 있고 앞으로 나아갈 길은 없는 여행자의 신분일 뿐.

인사하러 온 사람이라면 딱 그만큼만 하는 게 좋다. 추억은 새록새록하지만 지금의 나는 자전거 여행자가 아니다.

 

 

 

저녁에 소야노 아버지가 직장에서 돌아오셨다.

술을 많이 마시면 살짝 흥이 올라오는 분이지만, 평소엔 조용조용하고 나긋나긋한 분.

살짝 어리숙해 보이는 말투와 쑥쓰러운 듯 벗겨진 앞머리를 쓸어올리는 손짓이, 되려 그 사람의 순수함을 드러내는 타입의 사람이다.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금방 달려 내려오고 싶었지만, 오늘은 천문대쪽에 학생 관람이 있어서 빠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소야노 아버지는 이곳 산자락 천문대에 근무하고 계셔서, 밤에 별 보는 일의 특성상 출퇴근 시간이 상당히 불규칙한 편이다.

한창 바쁠 때 소야노 어머니를 위시한 천문대 근무 남편을 둔 아내들은 '과부 클럽'이라는 가명으로 모임을 만들어 친목을 도모했다고도.

 

나가노 현은 인적이 드문 산골을 찾기가 쉽고, 해발이 높아 공기도 깨끗한 편이라 천체 관측에 좋은 지역.

기온이 낮은 겨울에 가장 잘 보이지만 한때는 주변 스키장 때문에 관측이 어려웠던 적도 있다고 한다.

요즘엔 스키 열풍도 어느 정도 잠잠해 진 편이라 조용한 산속 생활을 즐기고 있는 중.

 

오늘은 예정이 잡혀있어서 어쩔 수 없었지만, 소나기가 워낙 쏟아지던 때라 사실 헛수고이긴 했다고 하신다.

 

 

 

2010년 당시, 이 곳을 떠날 시간이 다가오자 소야노 아버지가 내게 천문대를 소개시켜 주셨다.

원래 인적이 드문 곳이긴 해도, 천문대 부지는 정말로 잡광에 민감한 곳이기 때문에

산을 중턱쯤 오르자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로도 구분이 어려울 만큼 암흑으로 뒤덮힌 모습이 인상깊었다.

 

중간에 놀란 맷돼지가 소리 지르며 산길을 뛰쳐나가는 모습에 자칫하면 큰 사고가 날 뻔 했지만.

 

천문학에 관심은 많지만, 단순히 교양 서적 정도의 개념으로 브라이언 그린과 미치오 카쿠 정도만 즐겨 읽는 본인이라

우주를 직접적으로 쳐다보는 소야노 아버지의 현장감 살아있는 설명은 책과는 다른 흥분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처음 관측을 시작할 때엔 이런 디지털 센서는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요즘엔 천체 촬영도 디지털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소야노 아버지는 멋적게 웃으면서 그것 때문에 예전처럼 별 바라보는 시간이 줄어서 아쉽다고 하신다.

 

흔히들 쓰는 필름 판형의 1.5배쯤 되는 센서를 8개 병렬로 연결한 천체 망원경의 심장.

내 손바닥 보다 조금 큰 센서의 집합체는 진공에서 영하 수십 도 이하로 내려간 상태로

밤하늘의 빛을 증폭시키고 또 증폭시켜 별의 모습을 담아내 준다. 저 장비 하나만 10억은 쉽게 넘는다.

 

 

 

천문학에 있어서 천체 관측은 이제 낭만 넘치던 주류에서 살짝 자리를 물러선 느낌이다.

키소의 천문대는 일본에서 가장 크고,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슈미트 망원경으로 유명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런 디지털 망원경의 발달로 인해 대구경 아날로그 망원경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대량 생산이 불가능한 특수용도 기계를 사용하는 현장에서는 언제나 그렇지만

필요한 장비와 기계는 알아서 디자인 해 알아서 작동시켜야 한다.

그러다 보니 외관 같은건 아예 고려 대상에도 들지 않고, 단지 작동만 잘 하면 된다는 공돌이 특유의 난잡함이 연구소 전체에 만연해 있다.

 

주변 정리 따윈 내팽개치고 필요한 장비에만 열중하는 모습이 금새 보이는데

이런 모습을 보면 왠지 동지애를 느끼게 되는 것을 보면, 나도 어지간히 정리 싫어하는 성격인가 보다.

 

 

 

우주에 대한 상상은, 나에게 있어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가장 저렴한 방법 중 하나였다.

단지 머릿속의 지식과 새로 들어온 정보, 허블과 몇몇 관측선이 보내오는 보물같은 사진 몇장만 있으면

몇 시간이든 그 거대하고도 극도로 미세한 조화의 절정을 탐닉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천문대에서 소야노 아버지가 나를 위해 일반인들에게 공개하지 않는 여러 장비와 자료를 소개해 주던 당시엔

상상이 현실로 내려오는 듯한 묘한 탈력감과 함께, 현실에 존재하는 우주의 모습을 이렇게 지켜본다는 흥분감이 공존했었다.

 

이곳의 망원경과 좀 전의 센서를 이용해 수십 시간 촬영한 결과가 바로 이 사진.

먼지처럼 보이는 점들이 별이다. 어쩌면 성운일 수도 있고.

천체 촬영용 센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노이즈 감소이다.

별과 노이즈를 구분할 수 없다면 그건 이미 센서로서 의미가 없으니까.

그래서 진공 상태의 박스 안에서 영하 수십도 이하로 냉각되어 작동하는 이런 센서들은

노이즈 비율이 일반 디지털 카메라의 수천분의 1도 되지 않는다.

당연히 이런 센서는 특수 제작하는 녀석들이라, 카메라 매니아들이 본다면 군침 흘릴만 하다.

 

우주의 기원까지 밝혀내려고 힘을 쓰는 요즘 분위기를 생각하면, 보통 천문학도 어마어마하게 발달했을거라 생각하겠지만

사실 아무리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고 또 발전해도 우주는 너무나 넓다.

수십년간 키소에서 돌아가는 중인 망원경을 통해서도, 여전히 가끔 새로운 별을 찾아내기도 한다고.

 

흑백 사진에 찍힌 별과 성운의 모습은, 형이상학적 위상에서 나에게 지적 즐거움을 안겨주던 우주가

지금 같은 공간에 나와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현실을 일깨워 주는 듯한 경외심을 들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물론 제대로 말하자면 지금 사진에 찍힌 저 빛의 원류는 나와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는 녀석이 아니긴 하다.

저 별들은 이미 지금 시점에서는 수억년 전에 사라지고 없는 잔상일 수도 있으니.

 

소야노 아버지가 콩알 지식을 소개해 주셨는데, 우리가 보는 별의 사진이 십자가 모양으로 빛나는 것은

원래 그런게 아니라 카메라 셔터막이 십자형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카메라의 작동 원리를 아는 사람은 사실 어렵지 않게 추측 가능하지만, 우주라는 개념이 워낙 사람과 멀어진 환상같은 존재라

십자 형태로 빛나는 우주 사진만으로 '별은 십자 모양으로 빛난다'고 믿어버리는 사람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소야노 아버지는 내가 우주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신이 나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준다.

원래 학생들이 견학 오면 이곳에서 간단한 실습과 함께 설명이 이루어지는데

나에게는 세세한 설명 필요없으니 적색 편이에서부터 감마선 버스트 등을 이용해 가며

연구소에서 관측하고 있는 천체의 상황에 대해 한 차례 강연을 펼쳐주셨다.

 

본인은 일본어로 의사 소통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편이지만 막상 이런 천문학 용어는 일본어로 뭐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어째어째 한국어로 알고 있던 용어들을 한자 훈음으로 발음해 보며 단어를 교정해 나가는 초보 단계에서 어물쩡 거리고 있어야 했다.

 

소야노 아버지는 매번 쑥쓰러운 표정으로, 자기는 공부는 커녕 글도 잘 못 읽는 바보였다고 말을 하시곤 하는데

실제로 학생 때는 집에서 농사 거들고 하루종일 산을 뛰어다니며 생활했을 뿐이었다고.

 

전후 일본, 그것도 이 산골짜기 키소에서 공부라는 개념은 애초에 너무나 희박한 존재였긴 했지만

그래도 산에서 별 바라보는 일이 너무 낭만적으로 느껴졌던 소야노 아버지는

별 보는걸로 먹고 살수 있으면 좋겠다는 일념으로 이렇게 천문대에 일하게 되었다고 하신다.

 

순박한 시골 아저씨로 보이는 분이지만, 어릴적 부터 키소의 험한 산맥들을 놀이터처럼 뛰어놀던 분이라

젊은 당시엔 거의 프로 선수에 근접하는 스프린터, 자전거 라이더였으며

현재도 50세 이상 100m, 200m 육상 일본 신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매년마다 참가해서 한 번도 기록을 넘겨준 적이 없는 분이다.

목표는 70세 이상 실버 대회까지 꾸준히 일본 신기록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몸 관리만 잘하시면 낙승이라 생각한다.

아닌게 아니라 지금도 자기 집에서 이곳 키소 천문대까지 자전거로 출퇴근이 가능한 체력이니.

내가 두번다시 자전거로 갈쏘냐고 이를 가는 하코네 고개쯤 되는 지형을 이 사람은 그냥 출퇴근길로 생각한다는 뜻.

 

문제는 몸 관리를 별로 안 하는 분이라...

하루 하루의 에너지를 완전히 소진해 버리고 눕자마자 잠에 빠지는 그런 부지런함이 인생의 전부였던 사람이다.

생활에 있어서 여분의 에너지, 혹은 여유라는 것을 태생적으로 가질 수 없는 성격이고

그래서 시간이 남을 때 오히려 안절부절하는 그런 분이다. 여행은 안좋아하는데 드라이브는 좋아하는 타입.

 

 

 

근래엔 잠만 자고 있어서 아련한 느낌이라는 키소의 천체망원경.

슈미트형 망원경은 일종의 반사망원경으로, 촛점식 망원경에 비해 넓은 우주를 좀 더 밝게 담을 수 있다.

렌즈 제조가 굉장히 까다로운 편이라 대구경의 슈미트 망원경은 우주 프론티어 시절에 그 나라의 광학기술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이기도 했다.

 

니콘에서 만든 105cm 슈미트 망원경은 당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컸기 때문에 굉장히 유명한 녀석이었다.

지금은 가끔 오는 학생들 학습용으로 사용되고, 좀처럼 지붕이 열리지 않는 아련한 녀석이 되어 있다.

천문학의 발전은 별의 낭만에 이끌려 이 길을 선택한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하는데

이제는 많은 천체과학자들이 직접 별 쳐다보는 일도 없이 수많은 디지털 데이터와 전파 분석에 매달리는게 현실이다.

 

소야노 아버지는 여기서 별을 자주 못 보니, 연말 보너스를 털어서 집에서 볼 수 있는 망원경을 구입하셨다.

그래서 나는 아이같은 어른을 좋아하고 동경한다. 소야노 아버지는 진짜로 우주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소야노 아버지가 슈미트 망원경 하단부를 열고 한번 들어가 보라고 하셨다.

평생 살다보니 천체망원경 내부로 들어가는 경험도 할 수 있다니.

 

카메라 렌즈 경험이 많은 사람은 이 구조가 그렇게 어색하지 않다고 느낄 듯 하다.

보통 일반적인 카메라 렌즈중 500mm 반사, 속칭 오반사 라고 불리는 렌즈의 내부구조와 비슷하다.

 

중앙의 원통 뒤쪽에 센서를 장착하고 별의 궤적을 따라가며 장시간 촬영을 한다.

엄청 어두웠지만 차마 이 내부 사진을 안 남길 수가 없어서 어떻게든 찍어 봤다.

2010년 당시 내 카메라는 고감도 노이즈가 매우 취약했던 녀석이라

아마 내 사진생활 중 가장 감도가 높은 한 장이 아닌가 한다.

 

  

 

본인은 남들이 마음 편하게 말 걸수 있는 스타일이 아니지만

소야노 가족들은 내력이 있기도 하고, 나와 꽤 오랫동안 살다 보니 나름 허물없게 지낼 수 있었다.

 

쇼야 군은 놀랍게도 일주일 뒤에 성인식이라고 한다.

물론 놀랍지 않게도 술은 벌써부터 잘 마시고 있지만, 사실 3년 전 자전거 여행때도 질펀하게 마시긴 했다.

 

일본에서 성인식은 한국과 달리 상당히 규모가 크고 중요한 행사인데

특히 쇼야 군의 성인식은 가족에게나 나에게나 큰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타이밍이 어긋나 버린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직장만 아니면 비행기 값을 물고라도 1주일 더 머물겠지만.

 

쇼야 군과 자전거 여행으로 만난 인연인데도 소야노 가족 이야기만 하고 쇼야 군 본인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고, 아직은 이런 곳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쇼야 군이 다니는 도쿄의 자전거 학원은, 세계 유수의 테크니컬과 유명 선수들을 강사로 초청해

진짜 전문적인 자전거 장인을 배출하겠다는 목표로 세워진 일본 최초의 자전거 전문 학원이라고 한다.

희망자들에게 1년에 한 번씩 이탈리아 연수도 보내서, 그곳 장인들의 실력을 눈으로 경험할 수도 있다고.

아버지의 체력을 물려받은 쇼야 군은, 자전거에 제트 엔진이라도 단 것처럼 종횡무진하는 실력이었지만

자전거 하드웨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고, 내가 좀 도와준 덕분에 어렵지 않게 친해지는 계기도 되었다.

 

학원에서 한 학기 수강한 쇼야 군은 벌써 상당한 전문가가 되어 있었고

매일 작업대에서 프레임의 구성 요소와 무게와 강도사이의 밸런스를 연구하는 수준이 되어 있다.

제대로 배워서 자기 가게를 갖고 싶다는 쇼야 군은, 약간씩이지만 어둡고 흐릿하기만 하던 자기 앞길의 방향을 잡아가고 있는 듯 하다.

 

이야기꽃을 피우다 밤 12시쯤 되자 소야노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슬슬 자리에서 일어난다.

비가 오긴 하지만, 홈 스테이 당시 꼭 자기 전엔 휴게소까지 밤 산책을 즐기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 일과였다.

물론 당시엔 자전거로 시원한 라이딩을 즐기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었지만

자전거가 없는 지금은 곰이라도 나올 법한 어두운 시골길을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걷는다.

농담이 아니고, 손전등 없이는 휴게소까지 내려가기 힘들다.

 

밤의 키소 휴게소는 꿀잠을 자기 위해 정차된 트럭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가끔 밖에 음료수 사러 나오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한국보다 훨씬 더 장거리를 운행하는 트럭 기사들은 어쩐지 이야기가 잘 통하는 느낌.

그것과 별개로 쓰레기 투기를 일본에서 제일 많이 하는 부류가 트럭 운전사라고 하니 그건 좀 아쉽다.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3개월간 보았던 풍경을 아무 말 없이 1시간 가량 바라본다.

 

사하라 사막 마라톤은 아직 한 번밖에 가지 않았는데, 두 번 간다면 아마 이런 기분이 들 것인가.

하지만 추억은 굉장히 섬세해서, 조금만 비틀리거나 색이 바래도 당사자가 느끼는 괴리감은 크게 느껴진다.

다음엔 역시 자전거를 들고 와야 하나 싶은 생각을 하며 음료수 한 캔과 담배 한개피를 꺼낸다.

  

 

 

키소 후쿠시마는 요즘 원전문제로 소란스러운 그 후쿠시마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나가노현 나카센도 역참마을로 유명한 곳이다.

 

이런 산골마을이 나름 유명했던 이유는 예전 에도 막부시대 쇼군이 지방권력 견제를 위한 '산킨 코타이'(參勤交代) 제도 때문.

쇼군의 영향력이 미치기 어려운 변경지 영주들을 불러들여 수도 에도에서 1년, 자신의 영지에서 1년 근무하게 하는 근무지 이동 제도였다.

영주의 가족들 역시 에도로 불러들여 사실상 인질 역할을 했기 때문에 영주들에게는 경비 부담도 크고 힘들었던 제도.

비인간적인 제도이긴 하지만 권력 유지에의 열망은 이런 것쯤 눈에 밟히지도 않을 듯 하다.

 

아무튼 그 산킨 코타이 제도로 인해 지방과 에도를 오가는 사람은 줄어들 줄 몰랐고

에도로 향하는 주요 행로였던 이곳 키소 후쿠시마는 덕분에 끊이지 않는 여행자들을 위한 숙박업으로 번성할 수 있었다.

 

 

 

이곳 키소 후쿠시마에서는 당시 행렬을 재현하는 축제를 1년에 한 번씩 열고 있는데

본인이 이곳에 머물렀던 2009 년도엔 비가 심하게 와서 축제가 중지될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단순한 축제라면 비가 와도 큰 문제 없겠지만

이 가장행렬에 사용되는 의상이나 소도구들은 실제로 오래 되기도 한, 상당히 가치있는 소품들이라

비를 맞아도 될런지 하는 주최측의 고민이 있었다고. 다행히 비닐 비옷을 덮긴 했지만 축제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예전에 비해 상당히 규모가 축소되고, 관광객이 오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어른들이 많았는데

비 때문인지 그런 걱정 때문인지 조랑말 위에 탄 영주의 얼굴이 조금 더 엄숙해 보이는 듯 했다.

 

실제로도 사실상 인질로 불려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기분 좋게 출발할 수 있을리가 없었을 듯.

에도까지는 결코 순탄치 않은 길이라, 쇼군에게 바치는 진상품과 여행 도구들, 시종들과 호회무사까지 합해서 100여명이 넘는 무리를 이루었다고 한다.

의도는 못마땅하지만 그 여파로 인해 산속 역참마을들이 번성하게 된 아이러니함이 돋보이는 역사의 흔적.

 

 

 

키소의 영주가 키소 후쿠시마에서 에도까지 향하던 길을 마을 안에서 압축해서 재현하는 것이 축제의 본편.

원래 키소에서 에도까지는 7개소의 관문을 지나가야 했는데, 축제에서 실제로 에도까지 갈 수가 없으니

마을 각각의 지점에 가상의 관문 7개를 새워놓고 그곳을 천천히 지나가는 것으로 해결해 놓았다.

 

천천히 행렬 뒤를 따라갈 수도 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만 당시엔 비가 많이 와서 사람들의 참을성도 옅어진 상태였고,

본인은 원래 아르바이트 중에 사장님이 한번 가보라고 시간을 내주셔서 잠깐 들렀던 터라 그렇게 느긋하게 돌아다닐 순 없었다.

 

그래서 자전거 타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거기서 쿠루마야의 진짜 사장님(?)을 만나게 되었다.

사실 쿠루마야의 주방을 담당하는 치프를 사장님이라고 불러서 그냥 입에 붙어 버린 셈이데

서류상 쿠루마야의 진짜 사장님은 치프의 와이프의 오라버니 되는 분이다.

몸이 안좋아서 간간히 보조 업무만 할 뿐이라 실질적으로 가게를 이끌어 가는 분은 당연히 주방의 치프인데

앞서 말했듯 다들 친인척 관계에다가, 어릴 적부터 이 마을에서 같이 살아온 사람들이라 그런 거 별로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

 

여담으로, 치프와 와이프분의 젊은 시절 열애 행각은 마을 안에서도 유명했다는 듯.

 

아무튼 거의 모든 축제 준비를 마을 사람들이 직접 해 온 탓에, 진짜 사장님도 며칠 전부터 열심히 일 돕고 있다고.

굽고있던 곤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