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리는 2층의 적당한 방에 들어가기로 한다.
에전에 언급한 적이 있듯, 소야노 집안 남자들은 정리라는 개념을 우주의 특이점 만큼이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
1,2층 모두 합해 70평이 넘는 상당히 큰 주택임에도 어른 한 명이 누워 잘 공간 만들기가 쉽지는 않다.
한국에서라면 뭐,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그램에 나올 법한 수준인데
예전엔 덕분에 이 공기좋은 시골집에서 눈과 코가 따가워 죽을뻔한 적도 있었다.
이번에 연락을 미리 하고 갔으면 가족들이 일부러라도 내가 잘만한 곳은 치워 놨을 테지만
잡동사니에 둘러싸여 딱 한 사람 누울만한 공간에 밀폐되어 자는 잠이란 것도 의외로 안락한 편이다.
자전거 여행 당시, 1인용 텐트에 누워 있으면 내가 자전거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전륜 양쪽에 2개, 후륜 양쪽에 2개의 가방을 모두 뜯어서 텐트 안에 넣으면
자전거에 달아 놓았을 때와 똑같이 누워있는 내 상체와 하체 양쪽에 위치하게 되기 때문.
거의 몸에 밀착되다시피 하는데 그게 또 홀로 자전거 여행의 적막함을 꽉 채워주는 느낌이라 나쁘지 않았다.
밤에 비가 시원하게 쏟아져서 아침엔 서늘할 정도다.
소야노 아버지는 오늘도 일이 있어서 일찍 박물관에 나가신다. 2층까지 올라와서 나하고 악수한다.
쇼야 군은 게임이나 컴퓨터, 애니메이션쪽에 관심이 많아서 가지고 있는 장비도 어마어마하다.
사정상 소야노 부모님은 물건 사주는 데 있어서 별로 부족함이 없는 편이었고 (성인식 이후엔 어찌 될런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이런 시골에서도 쇼야 군의 PC 는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최고급 사양을 자랑한다. 케이스 가격만 30만원짜리.
거의 1년 내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컴퓨터를 끄는 시간이 없으며, 토렌트나 위니 같은 공유 프로그램은 24시간 돌아간다.
쇼야 군이 2층에서 자던 곳이 이 컴퓨터 앞이고, 그 외엔 사람이 잘 만한 공간이 없었으므로 나 역시 PC 소음 들으며 잠을 잤다.
쇼야 군은 1층 소파에서 적당히 잤다고, 물론 잠자리 가리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죄책감 느낄 정도는 아니다.
게임기도 쇼야 군과 동시대 녀석들은 전부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되고, 아이폰, 아이패드, 노트북, 1080P 급 액션캠 등등 없는게 없다.
소야노 집안이 원래 가계가 부족하던 집이 아닌데다가, 어머니의 사고 이후 정부 보조금이나 세금 혜택도 많아져서
금전상 별로 부담되는 일은 아니었겠지만 쇼야 군에게 어떤 도움이 되었을지는 짦은 인연의 내가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갖고 싶은거 다 사주는 응석이 아이를 망친다는, 아주 교과서적인 해설이 이곳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쇼야 군은 부모님의 이런 경제적 여유와 함께, 얼핏 보기에 과도하게 보이는 헌신적 마인드가 없었다면
홋카이도의 어느 시골에서 자전거를 탄 나와 만날 일은 영원히 없었을지도 모르니까.
사람과 가정에게는 당사자들 외에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본질적 문제가 있고, 그건 옳던 그르던 자신들의 기준으로 해결을 봐야 한다.
잘 자라고 있는 논을 보니 2010년 생각이 난다.
8월부터 11월까지 생활한 키소 마을이다 보니 중간에 한창 추수철에 포함되었다.
소바집 사람들도 적지 않은 수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다 보니 휴일 맞춰서 일손 도와주러 가느라 바쁜 나날.
소야노 가족도 집 뒷마당에 자기 논이 있어서 1년에 한 번씩 기계를 빌려서 후다닥 끝내버린다.
원래는 이것보다 3배 정도는 컸지만, 소야노 어머니가 다친 이후로 관리도 힘들고 해서 많이 줄여버린 거라고.
이제는 이런 키소 마을이라도 농사만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집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노령화가 계속되고 젊은이들은 도시로 떠나가니, 논밭은 있어도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어
예전에 비해 상당수의 논밭이 메밀밭으로 전환하는 중이라고. 메밀밭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어마어마한 수확량을 보여주는 편이다.
다행이랄까, 나가노 현 주변엔 자연의 힘이 남아있어서 메밀은 그냥 쑥쑥 자라고, 소바로도 유명하니 그럭저럭 푼돈벌이는 된다고.
농기계는 한국의 농협과 비슷한 JA 에서 대여하는데, 마을 사람들이 대금을 모아서 대여한 후 날짜별로 돌아가며 사용한다.
괜히 나한테 말도 하지 않고 기계를 돌리기 시작하는 바람에 잠결에 일어나 밖으로 나갔는데, 쇼야 군과 아버지는 벌써 한창 작업중이었다.
기계 덕분에 쇼야 군과 나는 그냥 가지런히 잘 잘린 뭉터기를 묶어서 구석에 몰아놓기만 하면 된다.
사람이 벤다면 세 명이서도 하루 꼬박은 걸릴만한 일을 1시간 30분만에 다 끝내버리고
바로 트럭에 짚단을 실어 탈곡기로 이동한다. 농촌 마을에는 여기저기 무인 탈곡기가 있어서 이제 힘쓸 일은 다 끝난 셈.
날씨가 더워서 겨우 짚단 수십 개 만드는데도 땀 좀 흘렸지만, 탈곡기에서 쏟아지는 햇쌀을 보고 있으니 뿌듯하기 그지없다.
이제는 '쌀의 소중함' 이라는 말은 꺼내기만 해도 촌스러워하는 시대이긴 하지만
자기 방구석만한 공간만큼의 농사라도 직접 지어보기만 한다면
식사때 입으로 들어가는 쌀알이 얼마나 위대해 보이는지 실감할 수 있을 텐데.
거진 쓰잘데기없는 교육프로그램 몇 개 없애버리고 진짜 '자기가 지은 쌀로 밥 만들어 먹기' 프로젝트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본다.
탈곡기를 사용하고 나면 온 몸에 가루가 묻어 간질간질한데, 이 날 운좋게도(?) 온수기가 고장나는 바람에
키소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냉수로 시원하게 샤워 즐겼던 기억이 남아있다.
이곳 키소와 마츠모토 등지에서는 가을이 되면 추수만큼이나 바빠지는게 송이버섯 따는 일이다.
일본 최대의 송이버섯 생산지인 마츠모토 주변엔, 버섯이 나는 야산 한두 개만 소유하고 있으면
떼부자라고 할 만큼 자생 송이가 잘 나오기로 유명하다.
개인 소유가 아닌 산에서는 마을 진흥회 회원들이 팀을 짜서 송이를 따낸 후, 균등 분배하는 식으로 운용한다.
송이가 자라는 산이라는 게 등산로가 존재하는 그런 상냥한 곳이 아니기 때문에 요즘 키소 마을도 나이 걱정을 많이 하는 편이라고.
소야노 아버지 정도 되는 분이 상당히 젊은 축에 속한다고 하니 가만히 넘길 문제는 아니다.
물이 좋아서 밥맛도 원래 심각하게 좋은 곳인데
내가 있던 2010년엔 송이버섯의 가격 파괴가 걱정될 정도로 너무나 송이 농사가 잘 되는 바람에
시장애 내다 팔 분량을 제외하고 가져오는 송이들마저 A급 이상의 무시무시한 녀석들이었다.
다듬기만 하면 거진 수백만 원 어치는 될 만한 송이를 산에서 담아와, 몇날 며칠을 송이 된장국, 송이 오곡밥, 송이 찜, 송이 구이 등으로 즐기곤 했다.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도 참 난감했는데, 이런 것을 그냥 막 먹으려니 부담감에 위에서 경련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돈을 지불하려니 그냥 산에서 따 와서 연례 행사로 먹는 식사라 그 분들이 받을리도 없다는 점에서 진퇴양난이었다.
키소는 요즘들어 많이 더워졌다고는 하지만, 험한 산세를 낀 마을이라 여전히 밤이 되면 그럭저럭 서늘해 지는 곳이다.
웅웅거리는 컴퓨터 옆에서 쪽잠을 청하니 2010년의 출발 전 추억이 떠오른다.
많이 추워지던 시절이라 월동 준비에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소바집 쿠루마야 분들과 회식하러 고기집에 갔을 때 선물로 이걸 건내주셨다.
당시 한국에는 들어오지 않았지만 입소문을 타고 유명했던 그 유니클로의 히트텍.
일본에서는 1천엔 짜리 싸구려라, 광고는 굉장한 첨단기술로 만든 보온 내복인 것처럼 소란을 떨지만
그냥 한겹 더 입어놓으면 조금이나마 따뜻하겠지 하는 그런 수준밖에 되지 않는 녀석이었다.
그래도 나를 위해 일부러 유니클로에서 옷을 사 주셨던 기억에, 옷보다 그 마음이 따뜻했던 추억이 남아있다.
키소에서 가장 가까운 유니클로 매장은 자동차로 40분 거리에 있었으니까.
훗날 저 비닐봉투도 곱게 싸서 한국에 가지고 돌아왔다. 엄니는 주접을 떠는구나 하고 웃으셨지만.
자기 전 휴게소까지 내려갔다 오는 산책길에서도 예상치 못한 여러 만남을 갖는 게 여행의 즐거움이기도 했다.
휴게소 화장실 바닥에 이상한 녀석이 있어서, 일부러 돌아가 카메라까지 가져와 담아봤다.
소야노 아버지는 어릴 적 몇번 본 적이 있는 녀석이라고 갸우뚱 하신다.
여행중 만난 생물체에 대해서는 일단 알아보자고 생각했기 때문에 훗날 귀국 후 여러가지 조사를 해 보니
제대로 된 이름도 붙여져 있지 않은, 산거머리의 일종이라고 한다. 거머리종이긴 해도 피를 빠는 건 아니고.
산 속의 습한 곳에서 생활하고, 물이 더러우면 그냥 녹아버린다고 하니 보기보다는 깔끔한 녀석인 듯 하다.
그 화장실 앞에서는 아시아 전 지역을 여행중인 이탈리아 사람도 만날 수 있었다.
키소 휴게소는 밤에도 문을 닫지 않는 무인안내소가 있어서 헝그리 여행자들에겐 훌륭한 휴식처가 된다.
대부분의 휴게소는 저녁 이후로 안내소 문을 닫아버리기 때문에 야외노숙이 되기 십상이지만
겨울엔 난방까지 틀어주는 24시간 무인 안내소는 그야말로 천국과 같은 곳. 이탈리아인도 행복해 하는 눈치였다.
비가 온 후의 키소 마을 역시 아침을 상쾌하게 만들어 준다. 이곳은 정말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다.
해발이 높다보니 비구름이 자주 산기슭에 걸리는데, 이 풍경이 또 환상적이다. 특히 해 뜰때나 해 질무렵의 골든 타임에는.
소야노 군은 빡빡한 1학기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터라 아침부터 꽤나 뒹굴뒹굴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슬슬 독립할 나이긴 해도 여전히 성인식 마치지 않은 소년이라
이 느긋한 키소 마을에서 빡빡한 도쿄에 상경해 전철 50분씩 타고 학원에 다니는 생활에 익숙해지기 쉽진 않을 듯 하다.
특히 도쿄같은 곳에서 만드는 인간관계는 소야노 군에게 큰 시련이 될 수도 있으니, 내색은 안하지만 조금 걱정도 된다.
두 달만 더 있으면 이 집앞 논마지기도 예전처럼 황금색으로 물들고 있을텐데.
농촌의 사계절은 놓치기 아까울 정도로 변화무쌍하다. 그 변화만 바라보고 있어도 삶이 바쁘게 느껴지는게 진짜 농촌.
여름날씨가 흉폭할 수록 거대 산골짜기 사이에 위치한 키소 마을같은 곳은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날씨를 자랑한다. 폭우가 쏟아지고 나면 살을 꿰뚫는 햇볕이 뒤를 따른다.
기념 사진이라도 남기려고 카메라 들고 밖으로 나오니, 사진 찍기엔 최고의 날씨를 보여주고 있다.
소야노 군은 자신이 배우는 자전거에 대한 지식이 마음에 드는지 여러가지를 설명해 준다.
일본이 자전거 산업으로는 세계 최강에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전문적으로 자전거 지식을 가르치는 곳은 없었다고.
자기가 2회 입학생이기 때문에, 꾸준한 노력과 약간의 운만 따라준다면 시장 선점의 효과를 볼 수 있을거라 한다.
자전거에 대해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자전거 공학은 넓게 봐서 우주선 제작에까지 연결되는 기술의 결정체다.
어떤 소재든 실험할 수 있고, 그 반면 재료비가 상대적으로 적게 들어가는 구조를 하고 있으며, 실전 테스트 역시 어렵지 않은 녀석이라
고분자 탄소강과 카본으로 프레임을 떡칠한 수백, 수천만원대의 자전거도, 실험용으로는 저렴한 편이다.
그 외에도 자전거는 사람 손이 여전히 기계보다 우위를 점하는 제작 분야라서, 도전할 가치가 충분한 시장이기도 하다.
소야노 아버지가 탔었고, 지금은 소야노 군이 산책용으로 사용하는 사진의 저 자전거도 60년대 이탈리아 장인이 만든 모델.
소야노 군은 프레임을 이리저리 분해해 가면서 형태별 강도와 저항성 등에 대해 신이 나서 설명을 해 준다.
자전거 이론에 대해 듣는 것 역시 나에게는 충분히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한번 파고들면 주위가 보이지 않는 열정을 보이는 소야노 군의 모습을 보는 것 역시 흐뭇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역시 반쯤 이쪽 가족이 되어버린 탓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기도 한다.
낮엔 대자연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는 곳이지만, 대자연이 이렇게 낭만적인 녀석인 것만은 아니다.
모든것이 풍성한 여름이야 모든 것들이 풍요로움을 즐길 수 있지만
가을이 넘어가면 이 풍경은 점점 가혹한 경쟁의 전장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겨울이 빨리 찾아오는 이곳에서는 10월에 들어서기 무섭게 하루에 한두 번씩 곰 출몰 주의보가 내려진다.
슬슬 먹을게 줄어드는 시기라 맷돼지는 물론이고, 평소에 보이지 않던 곰까지 마을 주변에 출현한다.
지금 사진 찍어대는 이 풍경조차 사실 소야노 집 5m 앞의 모습인데, 이런 풍경이 마냥 보기 좋은 그림이 아닌 것은 그 때문이다.
밤에 산책하러 갈 때도 괜스레 무서워 질 정도라, 자전거 여행 할 때보다 더 스릴넘치는 시간이기도 했다.
소야노 아버지가 밤에 산책나가는 나한테 강력 렌턴과 방울 한 쌍을 건네줄 때 정말 오싹할 정도였으니.
내가 이 집을 찾은 2010년 당시엔, 소야노 가족도 여러가지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시절이다.
소야노 어머니가 사고로 하반신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후, 수 년에 걸쳐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안 모든 구역을 베리어 프리로 바꾸고, 장애인 혼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샤워 장비도 갖추고.
중간에 시공업체가 계약기간을 준수하지 않고 돈만 받아먹어서 소송까지 갈 뻔한 시기도 있었고
업체측에서 소송을 무마하기 위해 계약외의 앞마당 차고까지 하나 더 만들어 주던 시기가 바로 내가 도착했던 때다.
왼쪽에 슬쩍 보이는 저 차고는, 완공되는 당일 집에 놀러온 소야노 형이 그대로 갖다 박아버리는 바람에 찌그러졌지만
이번에 와 보니 박은 곳은 말끔하게 수리되어 있다.
추억이 사라진 듯 해서 약간 아쉬웠지만, 나와 소야노 가족은 멀쩡한 차고 기둥만 봐도 웃을 수 있으니 그걸로 족하다.
소야노 군은 나하고 닮은 점이 없잖아 있어서, 오히려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알아차리는 부분이 있어 가끔 난감하다.
단지 14년의 시간이라는 차이만큼의 연륜이 나와 소야노 군의 간격을 조금이나마 만들어 주는 갭이라고 할까.
내가 잡아낼 수 있는 것을 소야노 군은 잡아낼 수 없고, 조금 더 나이를 먹으면 소야노 군 역시 지금의 내 심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소야노 군의 말투와 톤, 대화 사이의 'pause', 대화의 흐름 등 모든 요소에서 미묘한 차이점을 느끼는 것.
소야노 군이 자신의 의도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더라도 나는 그 의도와 관계없이 대화 깊숙히 가라앉아 있는 사실을 잡아낼 수 있다.
괜히 소야노 군을 속이는 것 같은 기분도 들어서 가끔 우울해 지지만, 이건 내 의도대로 생각할 수 없는 반사적인 행동이다.
단지 이번에 만난 소야노 군은 , 여전히 자신의 앞날에 대해 그리고 자신 스스로에 대해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갈 의지와 그에 따른 준비를 차근차근히 실행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생애 첫 뿌듯함을 느끼는 듯 했다.
머리가 불안하고 어지러워도 두 발을 내밀다 보면 앞으로 전진하게 되어 있다고 슬쩍 말해준다.
사하라 사막에서도 느꼈던 사실이니 그것만큼은 조언해 줄 수 있다.
집안은 확실히 리쿠때문에 좀 더 냄새가 나고 지저분해 진 느낌이지만
워낙 애교가 많은 녀석이라 소야노 어머니 재활에도 도움이 되는 듯 하니 나쁠 거 없다.
소야노 집안 가족이다 보니 이 녀석도 왠만한 강아지 저리가랄 정도로 사정이 많은 녀석.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무려 오키나와에서 비행기를 타고 이 집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토이 푸들이라 몸도 굉장히 약해 어릴적엔 죽음의 고비도 많이 넘겼다고.
지금은 뭐 이쪽 가족들을 닮았는지 엄청 건강해 졌지만.
머리가 굉장히 좋고 순해서 기분 나쁠때 오줌으로 항의하는 것까지 잘 익힌 녀석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소야노 아버지에게 만큼은 끊임없이 짖고 물고 난리도 아니다.
장난인가 싶었는데, 한때는 옷도 찢기고 피까지 날 정도로 물린 적도 있다고 하니.
유독 소야노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거나 나갈 때만 그런 현상이 심한데
아무래도 이 녀석 머리에서는 몸이 불편한 어머니와 건강한 아버지의 이동 루트에서 뭔가 유추를 하는지도 모른다.
교정사를 불러 고쳐야 할 만큼 큰 문제도 아니라서 그냥 애교로 놔 두고 있는데, 소야노 아버지가 이 녀석을 엄청 좋아하니까.
수컷이라 그런지 남자를 좋아한다는데(?) 나를 굉장히 잘 따르고, 쓰다듬어주면 배를 발랑 뒤집어 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소야노 어머니를 제일 좋아해서 틈만 나면 휠체어 위로 뛰어올라가지만
어머니가 자기를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면 그제서야 털털털 내 옆에 와서 풀썩 누워버리는 영리함도 보여주지만.
원래 엄청 깔끔한 타입이었던 소야노 어머니가 보시기에 스트레스가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지만
이집 남자들이 청소, 정리에 대해 초인적인 무신경함을 발휘하는 능력자들이라 사실상 포기 상태인 듯.
의료, 봉사쪽으로 활동을 오래 하신 분이라 생각의 전환이 빠르다는게 오히려 삶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하반신 마비 후 자신이 마음대로 청소할 수 없는 집안 현실을 앞에 두고
한탄과 분노로 자신을 몰아세우는 것과, 살다보니 지저분한 것도 익숙해 지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
맨날 노력이니 끈기니 포기하지 말라느니 하는 가증스러운 혀만 놀리는 소위 '멘토'라는 것들이 득세하는 세상이라
어쩔 수 없다는 말에 지나치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 같지만
포기하지 않아서 그게 스트레스가 된다면 포기하는게 훨씬 낫다. 이것은 특히 심신이 미약한 사람들의 치료와 큰 관련성이 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포기하면 안된다고 자신을 몰아세우는 건 그냥 수명만 깎는 길이다.
후천적 장애를 짊어진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이것은 포기가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거기에 맞는 마음가짐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런 고로, 2010년 당시보다 쪼금 더 어지러워져 있는 이 모습에 오히려 조금 안도가 된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하룻밤 신세 진 김에 바닥 한번 쓸고 닦아는 드렸다. 리쿠 오줌때문에 조금 찐득해 지려는 참이었으니.
새벽까지 비 온 후 그렇게도 화창하던 날씨가 또 한번 격변한다.
지나가는 소나기인 듯 하지만 아주 시원하게 쏟아주니 이건 또 이거대로 반갑다.
자연이 풍요롭기만 하면 어떤 상황이든 보기 싫은 모습은 없다.
이런 환경 탓인지 이곳 특산품인 옥수수는 진짜 맛있다.
적당히 노릇노릇 구워진 옥수수를 씹어물면 달달하고 진하게 고소한 맛과 탱탱함이 나를 즐겁게 한다.
옥수수는 보기와 달리 신선도가 매우 중요한 녀석으로, 수확 후 1주일만에 원래 맛의 70% 이상이 사라져 버리는 품종이다.
이곳에서 바로 딴 녀석을 찌고 구워서 먹었을 때 그 황홀함은 그 신선도의 탓일지도 모른다.
키소는 여름이 좀 늦은 편이라 아직 수확철이 아니라서 먹을 수 없었다.
TV에 나오는 '줄 서서 먹는 음식점'에서 30분, 한 시간씩 기다렸다가 후다닥 먹고 나오는 그런 체험보다는
차라리 옥수수 맛있는 곳에 차 타고 가서 제철 옥수수 따자마자 바로 구워먹어 보기를 추천한다. 차원이 다르다.
한 시간쯤 뒤에 출발해야 하는데 비가 쏟아지니 약간 난감한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소야노 군이 자기도 오늘 성인식 정장 보러 마츠모토에 가야 한다고 해서
어머니가 역 앞까지 차로 바래다 주시기로 하셨다. 아마 나름 신경 써 주신 것이겠지.
이럴 경우엔 극구 사양하는게 일반적이지만, 소야노 어머니의 경우 감사의 인사 한번 하고 받아들이는게 낫다.
사고 후 4년만에 장애인용 자동차를 한 대 뽑으신 게 2010년이었는데
그 이후 연습을 많이 해서 어지간한 장거리 아니면 쉽게 운전이 가능하다고 하신다.
이동에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자동차 운전이 굉장히 즐겁고 도움되는 치료법이기 때문에
걸어서 20분밖에 걸리지 않는 역까지 태워주신다고 해도 내가 굳이 말릴 필요가 없다.
두 손으로 조절하는 엑셀과 브레이크의 감촉이 소야노 어머니같은 사람에게는 얼마나 뿌듯할까.
아침엔 산등성이를 타고 흐르는 물안개.
오전엔 풀내음 풍기는 짜릿한 여름 햇살에, 점심무렵엔 폭우로 진중한 모습을 보여주니
한 곳에서 이동하지 않고 이렇게 셔터 눌러재끼는 재미도 참 각별한 것이다.
도시에서는 일 주일에 한두 번도 셔터 누르기 귀찮을 뿐이고
요즘처럼 밤에 온갖 트리와 전구가 빛나는 시기도 시큰둥할 뿐이었는데
이 곳에서는 카메라를 그냥 어깨에 걸쳐놓는게 더 편할 정도로 눈을 쉬게 할 여유가 없다.
이 앞에 바다만 있었다면 아마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은 지 몇 년은 지났을텐데.
대구 사람이다보니 역시 바다에 동경을 품고 있는건 당연할지로 모르겠다.
사실 소야노 군도 바다가 보고 싶어서 여행을 시작한 것이니, 내륙 주민들의 생각은 이런 데서 닮아있는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