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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4.12.17  2월 17일 삿포로 - 마지막 밤 4
  5. 2014.12.15  2월 17일 삿포로 - 삿포로 비어가든 9
  6. 2014.12.11  2월 17일 홋카이도 - Skyfall 6

 

 

외국인이 느끼고 싶은 일본적인 특색이 무엇일까.

일반적인 한국인과 비교하면 일본과 많이 친숙하다 보니 이제 슬슬 타국 여행에서 바라는 무엇인가가 애매해지기 시작한다.

물론 지금이라도 쿠라시키 등 일본적인 특징이 확연히 남아있는 곳에 간다면 눈이 즐겁겠지만

이곳 대마도의 이즈하라는 일본이라 느끼기엔 너무나 평범하고 평범한 곳이다보니 감각이 무뎌지는 느낌이다.

 

사진을 담으면서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이렇게 작은 바닷마을이 그래도 관광객을 위한 여러가지 소소한 치장을 한 깔끔한 곳이라는 특징 정도가

내가 지금 외국 여행중이구나 하는 마음속 위치를 다잡아주는 요소인 듯 하다.

 

 

 

불꽃 속으로 뛰어드는 날벌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어리석음과 동시에 형이상학적 존재에 대한 열망 등을 불러일으키는 시적 존재라지만

그런 짓을 하는 건 벌레 뿐만이 아닌 듯 하다. 저 높이 다리 위에서 멀쩡히 잘 자라고 있는 식물이 기어코 다리 밑으로 가지를 뻗어

결국에는 그 몸을 담궈 죽어버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

 

마을을 가로지르는 이 물은 담수인지 해수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높이를 생각했을 때 소금이 안 섞여있지는 않을 법 하다.

물론 소금물이든 맹물이든 저렇게 물 속까지 가지를 뻗어버린다면 어느 쪽이든 살아남긴 어렵다.

 

마지막 남은 것인지 남들보다 먼저 핀 것인지 멀리서 당겨찍은 사진으로는 분간이 어려운 꽃 한송이가

수면이 올라옴직한 높이 아슬아슬하게 피어 있다. 물 속으로 전진하는 나뭇가지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저 물과 만나고 싶다는 원초적인 본능 하나만으로 중력에 순응한 것인지. 그렇다고 해도 그건 제삼자가 어리석다고 비웃을 일은 결코 아니다.

 

 

 

골목을 조금 지나면 이곳 이즈하라에서 가장 큰 도로가 나온다. 호텔다운 호텔도 그 부근에 있을까 싶어 발걸음을 옮긴다.

마음은 서두르고 있지만 여전히 눈 가는데로 카메라 셔터를 놓지 않고 있어서 어떻게 보면 참 태평스럽다.

 

거진 깡촌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낡고 조그만 집들이지만 가끔 꽤나 깔끔하고 덩치가 큰 녀석들도 보인다.

이 정도 되면 그냥 주택은 아니고 어떤 용도를 가진 건축물이지만, 단정한 돌담 사이사이에 아름답게 흔적을 남긴 나뭇가지가 운치를 더해준다.

제주도의 돌담은 장인 수준의 감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흉내도 내지 못할 자연 미학의 정수를 담고 있는데

조금 밋밋한 사각형 바위가 잃어버리기 부드러움을 매꿔주듯 자라난 나뭇가지들이 나름 멋을 내고 있어서 마음에 든다.

 

 

 

언뜻 보기에 이즈하라에서 가장 좋아보이는 호텔로 들어가 빈 방이 있는지 물어봤는데 만실이란다.

혹시나 했지만 정말 이런 일이 벌어지니 좀 곤혹스럽다. 프론트의 할머니도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오늘은 손님들이 정말 많이 왔다고 하신다.

하긴 오늘 하루만 한국에서 2만명이나 이곳을 찾는다고 하니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예상은 했지만.

 

부산에서 대마도로는 남쪽의 이즈하라, 북쪽의 히타카츠 두 군데 선착장에 도달하니 반을 뚝 자른다고 해도 이 조그마한 마을에 약 1만명의 관광객이 돌아다니고 있는 셈.

자전거를 들고 단체로 탑승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니 많이많이 줄인다고 해도 이 정도 규모의 마을이 감당하기 쉬운 수는 아니다.

 

이제는 괜찮은 호텔도 필요없으니 왔던길을 돌아가서 허름해 보이는 호텔로 무작정 들어간다.

바닷바람과 햇빛에 그을린 아저씨가 프론트에 서 있는 호텔로 들어가 빈 방을 물어본다.

무슨 일인지 한동안 고민하던 아저씨는 내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할 즈음 '딱 하나 남아있긴 하다'고 말해 준다.

뭣 때문에 그렇게 망설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호텔 경영 방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보니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다.

 

1층 로비가 내 방보다 더 작은 호텔이지만 1박 요금이 6천엔이라고 한다. 도쿄 한가운데서도 6천엔이면 왠만한 비지니스 호텔은 다 들어갈 수 있다.

이곳에 오는 관광객은 앞서 언급한 시마토쿠 쿠폰을 거진 구입하는 편이고 숙박업소는 대부분 쿠폰을 받기 때문에

실제로는 6천엔보다 싸게 묵을 수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요금 자체를 그런 사정에 맞춰서 높게 잡아놓은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썩 달갑진 않지만 어쨌든 노숙은 면했으니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간다.

일본에서 1년간 자전거 여행을 하며 1주일에 한 번은 호텔로 들어간 본인 입장에서 이 가격에 이런 방은 처음 본다.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10인치쯤 되는 아날로그 TV에 냉장고 따위는 없이 얼음물이 담긴 보온병 하나.

 

침대에서는 노숙자라도 묵다가 방금 뛰쳐나갔는지 심히 역겨운 노폐물 냄새가 코를 찌른다.

진지하게 이 정도라면 며칠동안 시트를 갈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

더운 날씨다 보니 그래도 에어콘만은 달려있는 게 반갑기는 하다. 에어콘 없는 숙박시설도 많이 가 봤으니 그래도 이 정도라면.

 

 

 

대마도쪽 숙박시설이 좋지 않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 정도일줄은 몰랐다.

물론 단제로 오거나 자금을 넉넉하게 쓴다면야 꽤나 괜찮은 곳을 구할수도 있지만

대체로 그런 곳은 나같은 도보 여행자가 가기 힘든 곳에 위치해 있어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다.

 

대마도는 관광 자원의 절대 다수가 한국인인지라 후쿠시마 대지진 당시 한국인 관광객이 딱 끊기자

이곳은 본토와는 관계없는 곳이라고 대마도 시장이 직접 부산을 찾아 여객선의 운항 재개를 요청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런 관계일수록 민족이 다른 두 나라의 뗄 수 없는 관계에서는 조금씩 갈등이 빚어나오게 마련.

한국 관광객의 추태에 진저리를 치는 주민도 있고, 본토 사람들 레벨까지 대접해 줄 필요는 없다는 인식도 없지는 않다.

 

그래서 한국 관광객이 많은 날에 오고싶지 않았는데. 하필이면 근래들어 최대 인원이 오는 날이 되다보니 여러가지로 심란하다.

호텔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달리 갈 곳도 없고, 호텔 사장 역시 나 하나쯤 없어봤자 이미 객실 회전율은 그를 즐겁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자전거 여행중이었다면 사실 저 정도 수준에 머물 필요도 없이 텐트 쳐 놓고 누워 자는게 훨씬 편할 듯. 그런 기억이 있기 때문에 더 아쉬운 기분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런 걸로 후회해 봤자 소용없으니 해가 지기전에 마을 구경이나 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선다.

일단은 이 곳이 이즈하라의 중심지. 이마트의 절반도 안되는 크기의 슈퍼 '티아라'가 위치한 곳이다. 대마도의 유일한 현대식 쇼핑센터.

편의점도 없는 곳이지만 이 쇼핑센터에는 무려 모스버거가 입점해 있다.

 

 

 

물가는 확실히 싸고 시마토쿠 쿠폰도 사용할 수 있으니 저녁거리 푸짐하게 싸들고 돌아가기엔 충분한 곳.

1층 외곽에 인포메이션 센터가 있어서 들어가 본다. 내일 니이(仁井)를 거쳐 히타카츠(比田勝)로 갈 예정인데

외국인 여행자는 1천엔에 버스 프리패스를 구입할 수 있으니 반드시 구입해야 한다. 그냥 타면 3천엔이나 하니까 무조건 이득.

 

인포메이션 센터로 들어가 프리패스를 어떻게 구입하느냐고 묻자 40대를 조금 넘어보이는 여성이 친근하게 일어서 안내해 주겠다고 한다.

센터를 나와서 10m 정도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조그만 버스센터가 있는데 거기까지 함께 걸어가서 안내를 해 줬다.

이건 과잉 친절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나로서는 매우 고마울 따름. 친절한 사람은 역시 친절하구나 싶다.

 

 

 

프리패스를 구입 후 마음은 홀가분해 졌지만 사실 오늘 일정은 완전히 엉망이다.

대마도는 어쨌든 번화한 곳은 아니기 때문에 관광지 중에서도 영업을 일찍 끝내기로 유명한 곳인데

여객선이 예고도 없이 2시간 넘게 지연되는 바람에 히즈하라에 도착하고 나니 여행할 시간이 2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사실 입장료는 내고 들어가 볼 만한 곳은 별로 없어도 이즈하라에 위치한 반쇼인(万松院)이라는 사찰은 한 번쯤 들어가 봄직 한데

개장시간이 6시 까지라 아무래도 재 시간에 도착은 어려울 법 하다. 지금 벌써 5시 반이 넘었으니까.

그래서 평소 하던대로 마을 풍경이나 담으며 산책 겸 반쇼인 쪽으로 걸어가 본다. 어차피 그러려고 온 것이니.

 

 

 

일본에서도 좀처럼 보기 어려운 '돌로 엮어 만든 지붕'이 있는 가옥이 이곳 대마도에 남아있다는 말을 들어서

걷는 중간에 보인 관광안내센터에 들어가 물어보니 그건 이즈하라에는 없고 자동차로 1시간쯤 가야 하는 어느 마을에 있다고 한다.

단 3일간의 여행이고, 내일은 니이와 히타카츠로 가는 것만 4시간 넘게 소모될 터이니 아무래도 구경은 무리인 듯 하다.

 

대마도는 여행하려면 렌트카가 필수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확실히 여행을 즐기려면 꼭 필요할 것 같다.

버스로는 이동성이 너무나 제한되고, 하루에 몇 코스 운행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4~5일간 느긋하게 시간 들일 곳도 아니고.

반쇼인으로 이동중에 뭔가 굉장한 대문이 보인다. 어디에서나 보이는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저곳을 많이 들락날락 거리고 있다.

 

아주머니들이 곁을 지나가며 '저 안에 덕혜옹주 기념비가 있대'라고 대화하는 것을 듣고 저기가 거긴가 싶었다.

혼란스러웠던 역사의 희생자 중 한 명이었던 덕혜옹주는 이곳의 번주인 소우 타케유키(宗武志)와 결혼하며 사실상 유배된 조선의 왕족.

결혼생활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고 전해지지만 유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그녀는 결국 정신분열증과 우울증이 겹쳐 훗날 이혼까지 당하게 된다.

죽기 전 한국으로 돌아와 몽롱한 정신에도 창덕궁에 돌아왔을 때는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인지 눈물을 흘렸다고.

 

영화 '마지막 황제'도 그랬지만 부조리한 역사 속에 휘말려 불행한 인생을 보냈음에도 결국 숨을 거두기 전 자신의 진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점 덕분에

그나마 아련하지만 마지막 위안을 얻고 떠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절대로 노리고 심은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역사의 흔적이 남은 곳에서 수국을 보면 힘들었던 근대 한국의 애상이 떠오른다.

오세호 작가가 무려 일본에서 연재했던 만화의 제목이 '수국 아리랑'이어서 그런가.

실제로 아리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수국이 있긴 한데, 어차피 일본이 원산지이던 꽃을 개량한 것이라 별 의미는 없다.

 

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저곳으로 향하고 있지만 본인은 비석에 관심이 없다.

어차피 한국인 관광객용으로 만들어 진 것인데다가 저 안에 있는 비석은 덕혜옹주와 소우 타케유키의 결혼기념비이기 때문에.

 

 

 

길을 쭈욱 걸어가면 끝에 반쇼인이 나온다. 어차피 들어가는 건 포기했으니 천천히 경치 구경이나 하며 걷는다.

관광지이긴 하지만 크게 유명한 곳도 아니라 마을이 깔끔한 것도 아니고 그다지 볼거리도 없는 이즈하라지만

공장같은 거 없이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만큼은 어느 지역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곳이라 산책하는 즐거움은 충분하다.

 

날씨가 시원한 편은 아니라 땀이 흐르긴 해도 햇살이 기분나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공기는 신선하다.

자연의 건강상태는 흐르는 물 근처의 식물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지저분한 하천 주위의 식물이 그렇게 힘겹고 흉하게 보인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는 조금 충격이었다.

이곳은 이렇게 걷다가 카메라 셔터를 누를 만큼의 가치가 있다.

 

 

 

이즈하라는 조그만 마을이지만 대마도라는 섬 자체는 결코 작은 편이 아니다.

제주도의 1/3이나 되는 크기라서 거진 당일치기로 여행하는 한국사람들에게는 실감나기 힘들기도 하고.

대부분이 산지라서 그런지 마을 주변의 초목들도 그 생명력이 대단하다.

기본적으로 주변의 풀이나 나무들이 모두 만족스러울 만큼 싱싱하고 깔끔한 느낌이 든다.

오염이 심한 도시에 인위적으로 박아놓은 조경수들과는 다른 느긋함이 느껴진다고 할까.

 

 

 

걷다보니 아주 강력해 보이는 거미집을 볼 수 있었다.

보통 거미집 하면 생각나는 그런 모양과는 달리 상당히 빡빡하게 지어놓아서 철옹성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탱글탱글한 거미가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데 어떤 녀석인지는 모르지만 손으로 잡기에는 좀 무서워 보인다.

 

며칠만에 지은 집인지 궁금하기도 한데, 사람이 한동안 건드리지 않았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이것도 충분히 볼거리니까.

 

 

 

자전거 여행 덕분에 매우 익숙해진 일본의 시골 풍경이지만

보통 대도시 중심으로 돌아다니는 일반적인 여행자들에게는 꽤나 생활감 넘치는 풍경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법 하다.

대마도가 일본인 쪽에서 봐도 굉장히 시골이라 외국인 입장이라면 도보로 이동 가능한 범위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도 나름 괜찮지 않을까.

 

반쇼인 쪽으로는 이미 관광객들의 발길이 거의 끊긴 시간이라 이 주변은 거의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침부터 KTX 타랴 항구에서 사람들에게 치이랴 배멀미로 고생하랴 시끌벅적했던 터라 비로소 조금씩 여행의 위안을 얻고 있다.

 

 

 

조금 더 올라가면 무슨 성터라는 곳이 모습을 드러낸다.

뭔가 재건공사 비슷한 것을 하고는 있을 듯 한데, 사실 남아있는 흔적이라곤 이 돌무더기밖에 없다.

이곳 예산이 엄청 풍부하다면야 터를 중심으로 뭔가 세울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힘들 듯.

 

이곳 주민들도 나름 역사의 흔적을 다시 세워서 고장의 지표로 세우려고 노력을 하는데

한국으로 치면 울릉도보다도 한참 더 외진 곳이니 역사적으로도 크게 내세울 만한 흔적이 부족하긴 하다.

 

 

 

일단은 반쇼인에 도착하긴 했다. 역시 문은 굳게 닫혀있다.

마지막 관광객으로 보이는 한국인 그룹이 차를 타고 이 곳을 빠져나가고 있다.

아쉬움은 없다. 어차피 대마도 여행은 뭔가를 보러 온 여행이 아니다.

 

이 곳만큼은 한국인 관광객을 위해 공을 들인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대마도 사람들에게 중요한 곳이었기에

꾸며진 관광지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는다. 저 대문도 1600년대 모모야마 양식으로 지어진 대마도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양식이다.

물론 화재로 여러 번 소실되었고 지금은 그냥 그 양식으로 재건해 놓은 것이지만.

 

 

 

대문 너머에는 대나무가 시원시원하게 뻗어 있다.

실제로 이곳의 볼거리는 돌계단을 한참 올라가서 번주들의 묘소 쪽에 서 있는 삼나무이지만

어차피 볼 수도 없고, 삼나무라 하면 마음의 고향 중 하나인 키소(木曽)에서 눈이 빠지도록 구경했으니 아쉽지는 않다.

 

초여름이라 아직 해가 지려면 한참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폐관 시간만큼은 칼같이 지키는 면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이곳을 주욱 올라가면 대마도 번주였던 소우 가문의 묘소가 나온다.

돌계단이 가지런하게 놓여있는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다. 밤에 올라갈 수 있다면 더욱 분위기가 좋을 법 하다.

여행 첫날이 대게 그렇지만 배멀미에 고생하다 보니 체력도 많이 깎이고 해서

개장시간 내에 도착했더라도 여기를 올라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한번 고민을 해 봐야 하는 지경.

 

오히려 이렇게 폐장되고 나니 홀가분하게 사진이나 담고 마음에 남긴 것 없이 돌아갈 수 있을 듯 하다.

 

 

 

저 쪽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사찰이 있고 조선통신사 유물도 전시해 놓았다고는 하는데

더 들어갈 수가 없으니 그냥 정겨운 풍경만 남기고 돌아선다.

 

일단 입장료를 받는 관광 명소인데, 앞에 위치한 건물이 너무나도 일반적인 주택의 분위기를 풍기기에

혹시 여기 관리하는 사람들은 그냥 저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어쨌든 돌담 하나는 잘 지어 놓았다는 느낌이다.

한국과 비슷해 보이는 면도 없잖아 있지만, 일본은 나무의 종류와 형태가 한국과 많이 달라서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왼쪽 위에 보이는 삼나무는 일단 한국에 생식하지 않는 녀석이기도 하고, 저런 나무를 신성시한 일본은

한국보다 직선의 미를 살리려는 경향이 있어서 나름의 독특한 문화적 차이를 느끼게 한다.

결국 위로 거슬러 가다보면 미세한 자연 환경의 차이에서 그 민족의 문화 전체가 갈리는 것이니까.

 

반쇼인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조금씩 푸르던 하늘이 식어가고 있다. 식어간다기 보다는 오히려 홍조를 띄우는 느낌이지만.

어차피 이 시간이면 딱히 더 찾아갈 곳도 없다. 하지만 가보지 않은 마을 안을 돌아다니는 건 언제나 훌륭한 여행 코스가 된다.

아마 이런 곳보다 이즈하라 시내의 평범한 민가들에서 셔터를 누를 기회가 더 많으리라 확신하며 왔던 길을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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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간의 일본 자전거 여행중 루트상으로도 자금상으로도 가기가 힘든 지역은 역시 섬이었다.

교통비가 들지 않는 자전거 여행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추가요금이 붙는 행동이니.

여행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와서 '못 가본 곳 중에서 짧고 저렴하게 다녀올 수 있는 섬'을 생각하니 대마도밖에 생각이 안 난다.

 

몇몇 가 본 사람 말로는 별로 볼 게 없어서 굳이 갈 필요는 없다고 하는데

개인적인 성향이 별로 볼 것 없는 곳에서 유유자적하는 여행을 즐기는 편이라 별 문제는 되지 않는다.

 

짧은 연휴기간 어렵지 않게 저렴한 선박을 구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부산역에서 항구까지 이동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있으니 심상치 않은 정보가 운전사 아주머니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오늘 대마도 가는 사람들이 어마어마해서 버스도 자주 왔다갔다 해야 한다고. 오늘 하루만 약 2만명 가까이 간다고 한다.

 

그 작은 섬에 한국인 관광객이 2만명이나 간다는 정보에 앞날이 심히 걱정되지만 이미 예약해 놓은 거 어쩔 수 없다.

 

막상 항구에 도착하니 또 무슨 이유인지 말도 해주지 않고 2시간 가량 출항이 연기되었다고 매표소 직원이 선고하듯 안내해 준다.

미안하다는 말 따위는 일언 반구도 없이 묵묵하게 연기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매표소를 보고 출발 전부터 기분이 나빠진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떠나는 여행이지만 어쨌든 출발 전부터 이렇게 무책임한 상황에 직면하니 오늘 기분 좀 풀 수 있을지 걱정이다.

어마어마한 승객들 사이에서 지루한 대기시간을 마치고 고속선에 승차해 후다닥 대마도에 도착.

대구에서 부산 가는 시간보다 더 짧은 뱃길이라 외국에 간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선착장을 나서니 사방엔 온통 한국인 관광객 밖에 없다. 정말 많이도 왔다.

숙박이고 뭐고 아무것도 예약해 놓지 않고 덜렁 왔기 때문에 슬슬 걱정도 된다.

최악의 경우엔 그냥 아무데서나 노숙하면 되지만 어느 곳이든 붐비는 건 질색이다.

 

일본보다 한국이 훨씬 가까운 곳이고, 일본에서 굳이 이 곳에 관광올 사람이 많지 않아서

이곳의 관광 경제는 거의 한국이 책임지다시피 하다 보니 여행도 수월하리라는 생각을 할 지도 모르지만

사실 이제껏 대마도에 가기를 꺼려한 이유가 그것이기도 하다. 외국 여행중에는 한국 사람과 마주치기 싫다.

 

 

 

대부분이 산지라 바다와 맞닿은 풍경은 조화롭지만 그 외에 관광을 목적으로 할 만한 요소는 거의 없다.

물론 이쪽에서는 별로 남아있지 않은 몇몇 역사적 유물과 조그마한 동네 신사,

심지어 본토에서는 널리고 널린 모스버거 매장까지 지도에 표시해 놓을 만큼 관광객들을 위한 어필에 열심이긴 하다.

 

대마도에서 가장 큰 마을인 이즈하라지만 본토에서는 꽤나 시골마을에 속하는 편.

하지만 본토는 자전거가 쉽게 달릴만한 길이 대부분 해안선에서 살짝 안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에

굳이 찾아가지 않는 한 이 정도로 해안과 딱 붙어있는 마을을 볼 일이 별로 없다. 덕분에 조금은 신선한 느낌이다.

 

 

 

썰물처럼 관광객이 빠져나가니 항구 주변은 매우 한산해진다. 이제 좀 숨을 쉴 만 하다.

'1000년의 시공을 넘어서'라는 문구와 함께 통신사 그림이 그려져 있는 간판 하나만 봐도 이곳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섬 자체는 작지 않은 편이지만 워낙 산밖에 없어서 농업이 발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한국과의 무역이 오래 전부터 중요했었고

무역이 원활하지 않을 때는 결국 먹고 살기 위해 해적으로 변할 수 밖에 없어서 교류와 침략을 번갈아가는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

조선 초기부터 이 곳은 일본의 중앙정부보다 조선 조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었고

죽이지도 못하고 살리지도 못하는 묘한 공생관계가 500년 이상 이어져 왔다.

 

마냥 친근하지는 않았지만 외부 위협에 대한 적절한 완충지 역할을 해 오던 이 곳은

이제 섬의 가장 큰 수입원이 한국에서 오는 관광객들의 지갑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관광객들이 살갑지만은 않다.

인과를 따지자면 한국 잘못은 아니어도 어쨌든 관광 와서 잘난척 하고 쓰레기 짓을 벌이는 사람들 때문에

그들이 써 주는 돈과는 별개로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지만은 않은 곳.

 

 

 

관광지라고 조성해 놓은 곳도 상당수가 한국인들 입맞에 맞는 것들이라 오히려 본인에게는 별 관심을 일으키지 않는다.

일본 전역에서 가장 전쟁이 적었던 곳인 만큼 그만큼 후세에 남겨진 굵은 흔적도 적다고 할 수 있어서

역사적으로 본인의 흥미를 끌 만한 무언가는 별로 남아있지 않다.

 

덕혜옹주가 이 곳의 영주인 소우 타케유키(宗武志)와 결혼한 역사가 있어 비문 정도는 세워놓았지만

어디까지나 한국의 관광객을 위한 자료라는 느낌이 강할 뿐 굳이 이곳에서 한국의 역사를 찾아야 할 이유는 보이지 않는다.

 

관광지라고 할 만한 곳이 정해진 탓에 상당수 한국 관광객의 루트가 거의 비슷비슷하지만

본인은 그저 3일간 조용히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산책이나 하고 싶었기 때문에 여행 정보는 찾아보지 않았다.

 

 

 

나름 이렇게 여기저기 만들어 놓은 소박한 그림이나 감상하며 걷는 것이 전부.

조선은 처음엔 해적질 하는 이곳 사람들을 정벌하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래서는 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생계를 위한 약탈은 그 지역이 멸망하지 않는 한 이어질 수 밖에 없으니.

 

그래서 통신사를 파견하고 대일 무역창구로 이곳을 이용하면서부터 오랜 시간에 걸친 미묘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 곳의 영주는 조선에서 얻는 무역 이익도 결코 포기할 수 없었기에 양국의 완충제 역할을 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는 듯.

심지어 임진왜란때도 전쟁을 막으려 조선에 통신사를 요청하기도 했지만 발발 후에는 어쩔 수 없이 일본군 선봉에 서기도 했다.

역시나 전쟁 중에 많은 사상자를 내고 전후에도 무역이 끊기는 바람에 극심한 혼란을 겪었으니, 이 곳만큼 조선과 일본 양 쪽의 관계에 민감한 곳도 없었다.

 

역사라는게 다들 그렇지만 마냥 좋거나 나쁜 쪽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는 경우가 많아서

이런 대마도야말로 '애증의 관계'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섬이 아닌가 싶다.

 

물론 현 한국의 돌아가는 꼴은 100%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나쁜 쪽으로 흘러가고 있으니 예외는 어디든 있지만.

 

 

 

주차된 차량 밑에 냥이 한 마리가 두리번거리고 있어서 담아본다.

카메라를 밑으로 집어넣어 보지 않으면 거의 보이지 않고, 찍고 나서도 완전히 시커먼 상태였는데

다행히도 RAW 파일 촬영을 하다보니 어렵지 않게 복구 가능했다.

 

이 정도 거리에서 사진 찍는것 까지는 그닥 개의치 않치만 더 이상 다가오려고도 하지 않는 녀석.

생각보다 어린 편인데 환경이 좋아서인지 꽤나 건강해 보인다. 오사카나 히로시마에서 만난 찌든 녀석들과는 대비가 된다.

 

 

 

조금만 걸어가면 숙소가 밀집한 번화가가 나타나니 서두를 것도 없이 관광객이 사라진 공간을 마음껏 즐긴다.

부산에서 여기까지 꽤나 구름이 많아서 찝찝했지만 가끔씩 푸른 하늘이 구름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곤 해서 기분이 좋아진다.

 

대마도는 여러 해류가 맞물리는 곳에 위치해 있어 어장이 매우 풍부해 낚시터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라고 한다.

한국인 중에서도 상당수, 일본인 관광객의 절반 이상은 낚시를 위해 이 곳을 찾는다는 말도 있다.

 

어업 중심의 섬마을이라면 그냥 조용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게 더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지만

그건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요즘에 와서야 상상해 볼 수 있는 배부른 이야기일 뿐이고

한 번 삶의 질이 높아진 이상 그걸 다시 되돌리는 건 역사 이래로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현상임에 틀림없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이 곳은 쌀을 재배할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어서 간신히 콩 등의 작물만 수확할 수 있었기에

조선과의 무역이 단절되면 굶어죽지 않기 위해 노략질을 일삼을 수 밖에 없는 곳이었다.

무역이 성행하면서 평균 수입이 두 배 가까이 뛰어올라 지금에까지 이어졌고

현대 역시 한국인 관광객이 주 수입원이다 보니 그 점을 포기할 수는 없다. 풍족함이란 마약과도 같아서 사람은 그 흐름을 거스르기 어렵다.

 

심지어 훨씬 먹고살만 한 오키나와조차 이제와서는 미군 주둔덕에 수입이 많이 생기니 그것도 괜찮지 않느냐는 말을 하는 젊은층이 생기고 있으니까.

 

 

 

관광때문에 수입과 동시에 골치아픈 일도 많이 떠안았지만

여전히 천혜의 자연을 자랑하는 곳이라 주변에 피어있는 꽃들도 모두 생생한 활기가 넘친다.

도심 한가운데 인위적으로 심어 놓은 조경수들은 뭔가 찌들어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가 힘든데 이런 곳은 알아서 잘 자란다는 느낌이 확 든다.

 

베낭 한개와 카메라 가방 하나를 짊어지고 있어서 이동은 나름 자유로운 편이라

숙소 잡을 생각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며 사진이나 담고 있지만 이제 슬슬 위험하지 않을까 싶다.

 

대마도에는 남쪽의 이즈하라(厳原)와 북쪽의 히타카츠(比田勝)가 항구를 가진 큰 마을인데

부산에서는 이 두 지역 모두에 페리가 왕복하기 때문에 관광객이 반수로 준다고 해도

2만명이라는 대인원이 이 조그만 마을의 변변치 않은 숙소가 다 커버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진짜로 노숙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슬슬 잠자리를 찾아봐야 할 듯.

그 전에 항구로 돌아가 시마토쿠 쿠폰을 구입한다. 대마도 관광에서는 빠지기 힘든 아이템.

관광에 의존하는 이 곳 특성상 소비를 증진시키기 위해 발행하는 이 쿠폰북은 5천엔을 주고 구입할 수 있다.

5천엔 짜리 쿠폰북 안에 1천엔 짜리 쿠폰이 6장 들어있어 사실상 1천엔을 서비스하는 셈.

 

물론 거스름돈을 돌려주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반드시 1천엔 이상 소비시에 사용해야 한다.

다행히도 초과 금액은 현금으로 지불 가능하니 이 점만 유의하면 저렴한 관광이 가능하다.

어차피 대마도엔 쇼핑하러 오지 않는 이상 물건 살 게 별로 없지만

상대적으로 숙박비가 비싼 곳이고 어지간한 숙박지에서 이 쿠폰을 사용가능하기 때문에 1만엔을 내고 쿠폰북을 2권 구입한다.

 

단체 관광객의 경우엔 숙박비를 지불한 뒤일테니 1권만 있어도 이 곳을 즐기기엔 충분한 양이다.

 

 

 

바다위에 동동 떠다니는 귤이 많이 불어있다.

주변에 뭔가 날아다니고 있는 걸 보니 저렇게 소금에 찌든 녀석이라도 뭔가 흡수할 게 남아있나 보다.

 

 

 

날씨는 덥지만 하늘이 좋아질 때면 카메라를 들어 주위 풍경을 담으며 걸어간다.

평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곳이라 적지 않은 집이 산 위로 슬금슬금 올라가는 풍경이다.

부산이나 나가사키와 비슷하지만 이 쪽은 그 둘에 비하면 사실상 평지가 없는거나 마찬가지.

 

요즘엔 이쪽 지역 삼나무가 크고 튼튼해서 본토에서 인기가 있다고 하지만

수백 년 전엔 정말 먹고살기 힘들었겠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수가 없다.

 

 

 

홀로 여행의 즐거움이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동행자의 심기 살필 필요없는 느긋함에 있다고 본다.

이곳은 몇 안되는 관광지도 오후 5시 정도만 되면 거의 문을 닫아버리는 깡촌이라

많은 관광객들이 재빨리 숙소로 이동해 짐을 풀고 서둘러 길을 나서기 때문에 이미 이 부근엔 관광객이 한 명도 없다.

 

본인은 처음부터 목적이란 게 없이 거니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고 이 곳에 왔기 때문에

밤이 되면 미친듯이 불탈 오징어잡이 어선의 전구를 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다.

좀 더 대인 친화력이 강한 성격이었다면 아마 새벽 오징어잡이에 함께 해도 되겠냐고 물어보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것만큼은 여전히 힘들어서 그냥 이렇게 소심하게 사진이나 남기며 구경하는 데 만족하고 있다.

 

 

 

떨어진 지 오래 된 듯한 자전거가 바다 속에 쳐박혀 있는 것도 신기한 볼거리.

새들 부분은 썩어 없어진 건지 누가 빼 간건지 모르겠지만 사라져 있다.

 

저런 모습만으로도 온갖 추측이 머릿속에서 난무한다. 처리하기 싫어서 버린 건지 우연히 빠졌는데 건지기 싫었던 건지.

고무는 왠만해서 썩지 않기 때문에 환경에 좋지 않을 듯 한데, 일본에서 이렇게 바다에 빠진 자전거 보는 것은 처음이다.

 

자전거하고는 나름 인연이 깊은 편이라 저렇게 본연의 목적에 벗어나 처박혀 버린 녀석을 보고 있으면 살짝 마음이 찡하다.

1년간 12000km 가까이 120kg 가까운 무게를 짊어지고 달려주었던 본인의 자전거는

펑크 한 번 나지 않고 타이어 교채 한 번도 없이 그렇게 달려주고도 여전히 현관 앞에서 조용히 대기중이다.

 

언젠가 분명 다시 한 번 그 자전거로 긴 여행을 떠날 날이 오겠지만 그건 꽤나 시간이 지나고 나서일 듯.

그 때 다시 새들에 앉으면 2010년의 그 기억이 세포속에서 슬금슬금 깨어날 것이다.

 

 

 

한국과 인연이 깊은 곳이긴 하지만 역시 일본은 일본인지라, 없는 공간에도 소박하게 꾸미는 습관은 여전한가 보다.

관광지가 아닌 평범한 주택가를 거닐어도 현관 근처에 인형이다 꽃이다 해서 장식하는 데 도가 튼 사람들이라

이곳에서도 해풍의 영향을 받아가며 언뜻 난잡해 보이지만 소박하게 꾸며놓은 모습이 정겨운 느낌이다.

 

주택에 살았다면 본인 역시 저렇게 해 보고 싶지만 아파트에서는 식물들이 그렇게까지 생기가 있지 않아서 한계가 느껴지는 점이 아쉽다.

별장용으로 쓰고 있는 시골의 초가집 옆에는 각종 야채가 알아서들 신나게 자라고 있어서

틈나면 가서 뜯어와 쌈싸먹고 하는 것이 소소한 대리만족이라고 할까.

 

 

 

이즈하라 시내는 도로와 인도의 구분이 불명확하다.

워낙 좁은 거리다 보니 단차를 만들어 놓으면 되려 공간 활용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일 듯.

 

이런 시골이라도 도로 깔끔한 것은 여전해서 걸어다니면 기분이 좋아진다.

일본의 투기 쓰레기 문제는 마을 안이 아니라 도시와 도시를 잇는 산간도로 사이가 진짜 골치덩이.

장거리 트러커들의 숙식 찌꺼기들이나

재활용품이라며 마을에서 수집한 쓰레기들 중 돈 될 녀석들만 골라내고 나머지를 산간도로 옆에 던져버리는 악덕업자들 때문에

관광지에서는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어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자전거 여행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는 한 보기 힘든 광경이지만, 그 모습을 보면 일본도 안되는 놈들은 안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행이랄까 이곳 대마도는 큰 공장도 없고 트러커들도 없어서 산간 도로 주변이라도 그런 쓰레기는 없으리라 예상해 본다.

 

 

 

규모는 작지만 어쨌든 관광으로 먹고사는 마을이다 보니 마을 정비에도 힘을 들인 흔적이 보인다.

모든 것이 낡았지만 관리만큼은 제대로 하고 있다는 느낌. 이건 한국처럼 모든 것을 새것으로 바꾸면서도 관리는 개판인 것과 정 반대다.

 

작은 마을 둘러보기란 이렇게 그 지역 사람들이 어떤 정성을 들여서 마을을 가꾸고 있는가를 살짝살짝 엿보는 것에 재미가 있다.

보여주기 위한 모습보다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를 관찰하는 것이 여행의 재미인데, 사실 이 곳은 그 재미밖에 없는 곳이기도 하고.

 

 

 

호텔이라고 이름붙이기가 어색할 정도로 낡은 건물들이 몇 군데 보인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누워 쉴 만한 호텔이 어디 있을까 둘러본다.

대마도는 본토에 비해 호텔이 비싸고 시설 낡았기로 유명한 곳이라 만족하기는 좀 힘들겠지만.

 

괜찮다 싶은 리조트형 호텔은 나같은 홀로 여행자들이 도달하기 힘든 언덕배기에 위치해 단체로 손님을 실어나르는 구조라

아무래도 본인과는 인연이 없다. 그냥 대충 이 곳 시내에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십여 명쯤으로 구성된, 총천연색 등산복을 입은 중년 관광객 무리가 어딘가의 골목에서 튀어나와 이동중이다.

인솔자로 보이는 사람을 따라 어디론가 서둘러 가고 있다. 짐이 전혀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숙소에 들어갔다 나오는 중인 듯.

한국 사람들 돌아다니는 수를 보니 잘못하면 농담이 아니라 숙소 못 잡고 노숙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은 속도를 올려서 숙소를 찾아보기로 한다. 호텔이라 붙여놓은 건물 대부분이 도저히 호텔로는 보이지 않는 수준이지만.

 

 

 

히터를 틀어놓고 잤는데도 콧등이 시려서 잠을 깨보니 밤중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나보다.

눈은 막 그친 참인데, 새벽까지 너무 많이 오는 바람에 홋카이도 전역의 철도 대부분이 운행중지가 되어 있다.

어제 이동했던 오비히로에서 삿포로까지의 구간도 오후가 되어야 운행이 재개되는 듯 해서, 하루만 늦었다면 꼼짝없이 이곳에 갇힐 뻔 했다.

 

삿포로가 대도시이긴 해도 어제 밤처럼 시야를 가릴 정도의 눈이 쏟아지면 조심해야 한다.

몇 년 전에 불과 자기 집 대문 십여 미터 앞에서 길을 잃어 동사한 사람이 뉴스에 나왔을 정도니까.

 

자금과 시간적 여유만 널널하다면야 폭설로 인한 귀국 연기라는 사고도 한 번쯤 겪어볼 만한 일이지만

이제부터 미련 가지는 것은 만족스러웠던 여행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없으니 시원한 기분으로 짐을 챙긴다.

 

신 치토세 공항 국제선은 차별이라 느껴질 정도로 한산하다. 홋카이도를 찾는 외국인들에게는 신경 쓸 것 없다는 뜻인가.

홋카이도 모든 지역의 쟁쟁한 기념품, 선물, 식당가가 포진한 국내선과 달리 국제선쪽엔 편의점 수준의 가게 한두 점포밖에 없다.

자국민 우선이 나쁜 건 아니지만 일본어를 모르는 외국인들이 선물을 사기 위해 국내선 라인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

 

 

 

현실적으로는 당연히 신 치토세 공항의 수요와 크기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다.

원래 자위대 공항이었던 녀석을 민간용으로 확장 개조했기 때문에 마음껏 확장하기엔 힘든 면이 있었으니까.

 

국제선도 원래 국내선 귀퉁이에 마련되어 있었을 정도지만 워낙 수요가 폭증하는 바람에 새로 지은 것이 지금의 국제선.

수요가 없어서 간당간당한 다른 지방 공항들과 달리 수요에 비해 공급이 너무 딸려서 골치를 안고 있는 곳이다.

이런 국제선과 국내선간의 현격한 차이와 거리를 해소하기 위해 나름 신경은 쓰고 있다.

 

무빙워크도 있지만 그보다 더 편리한 수송을 위해 사파라 관람열차같은 전동차 두 대가 왕복중이다.

나이든 사람이나 짐이 많은 사람만 타는 거 아니냐고 물어보니 그런 거 없고 그냥 마음껏 타시라고 하며 나를 불러세운다.

걸어가도 전혀 문제는 없지만 이것도 경험이다 싶어 뒤에 탄다. 기념 사진도 한 장 남기고.

 

운전중에는 보행자를 위해 경쾌한 맬로디가 울려퍼진다. 사소하지만 공항에 대한 인상을 좋게 만드는 배려.

 

 

 

이번 여행의 마지막은 생각보다 짐이 많아졌다.

원서 사 오는건 매번 있는 일이니 예상 범위 내였지만 본가에 전해줄 과자와 나침반님에게 전해줄 과자 등 부피가 큰 녀석들이 많다.

부피로 친다면, 사실 홋카이도 특산품이 아니라 닛신의 컵누들 1박스가 제일 많이 나가기는 하지만.

 

본인이 일본에서 가장 좋아하는 컵라면인데 예전에 나침반님한테 맛보기로 몇 개 드렸더니 꽤나 상성이 좋았던 터라

온갖 맛있는 먹거리가 가득한 이곳 홋카이도에서 편의점 직원에게 부탁해 컵누들을 박스채로 창고에서 가져오게 했다.

아무렴 어떠랴. 어차피 자기한테 맛있는 거라면 희소성 따윈 상관 없다.

 

 

닛신은 그 엽기성을 자랑하는 CM으로도 유명하다.

이제까지의 닛신 CM만 모아놓아도 어지간한 코메디 프로에 꿇리지 않을 듯.

 

롯카테의 고급 과자인 '마루세이 버터 샌드'와 홋카이도산 감자튀김인 '쟈가포클' 등을 몇 개 구입한다.

본가와 나침반님에게 각각 가지고 가려니 생각보다는 지출이 많은 편.

일본에서는 여행 후 지인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행동이 사실상 강제나 마찬가지인 예절의 일부분이라

학생들의 경우 부모가 선물용 용돈을 따로 주는 경우도 있다. 지인들 거 몇 개 사기만 해도 금액이 상당하니까.

 

원래 본인에게나 남에게나 선물은 거의 사 가지 않는 편이지만 홋카이도라면 건질거리가 좀 있으니 오랜만에 소비를 즐겨본다.

 

눈축제는 끝났는데 공항은 여전히 스노우 미쿠로 성황중이다. 과자를 사니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미쿠 종이가방에 넣어준다.

일단 이것도 희소성이라면 희소성이니 곱게 가져와서 여전히 방에 보관중. 막상 희소성 생각하니 재사용할 엄두도 나지 않아서 조금 난감하다.

 

 

 

10일 전 이 공간에 미쿠라는 괴생물체가 빡빡히 들어서 있었는데

공식적인 축제도, 개인적인 축제도 끝난 지금은 매우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다.

원래는 이렇게 넓은 곳이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눈축제 기간 중 그러지 않아도 빡빡한 공항에 대량의 오덕을 몰고다니는 미쿠까지 들어서 있었으니까.

 

 

 

하지만 미쿠의 저력은 만만하지 않아서, 구석에서 여전히 방문객들의 마지막 지갑까지 털어가려고 눈을 번뜩이고 있다.

앞서 말했듯 여행 후 선물은 사람들간의 친근감의 척도로 사용될 수도 있는 중요한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이기 때문에

필요한 사람에게만 주려고 구입해도 그 부피가 감당하기 힘들어 질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공항에서 택배 서비스가 성황중인 것. 한국과는 이런 점에 있어서 정서가 많이 다르다.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미쿠가 덤벼들고 있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야마토 택배와 미쿠가 콜라보레이션을 맺었다.

 

일반인이라면 저걸로 택배 서비스를 보내는 정도는 홋카이도에서의 소소한 이벤트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고

오덕이라면 아마 택배 보내지 않고 박스만 사 갈 듯한 느낌이 든다. 본인도 젊을 때는 열혈 오덕이었으니 왠지 상상이 된다.

 

 

 

어제 징기스칸 폭풍흡입과 더불어 오늘 아침도 조식을 빵빵하게 즐기고 왔기 때문에 식사는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혹시나 또 폭설로 열차가 연착될까봐 시간을 매우 넉넉하게 잡아 도착했고

쇼핑도 대충 다 끝냈으니 남는 시간은 역시 식당에서 때우는 것이 제일 좋다.

 

벌써부터 줄이 생겨서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음식점도 있지만 지금은 라멘이나 고기류는 조금 부담스럽다.

가벼운 음식을 찾으려고 몇 바퀴 돌다가 한산한 소바집으로 들어간다.

 

이 블로그를 오래 접한 사람들은 본인이 나가노현의 300년 넘은 소바가게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듯.

그래서 이런 공항 소바집에서 엄청 기대를 크게 하는 건 아니지만, 일단 나가노의 가게 역시 메밀을 이곳 홋카이도에서 공급받고 있을 정도로

홋카이도 메밀은 품질이 상당히 좋기로 유명하다. 속에 부담이 없어서 선택한 메뉴니 기본만 해 주면 후회없을 듯 하다.

 

국수 자체는 나쁘지 않은 레벨이지만 역시 소바는 찍어먹는 소스인 쯔유가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나가노의 쯔유와는 비교하기가 아쉬운 평범한 레벨이라서 그냥 그렇군 하면서 후루룩 집어넣는다.

 

 

 

뿌듯하고 아쉬운 기분으로 활주로를 벗어나는데 하늘이 마지막으로 멋진 선물을 선사해 준다.

방금 전 신 치토세 공항은 운이 좋게도 살짝 눈이 그친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위로 올라와 보니 알 수 있었다.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의 외계인 공중전함의 공습을 생각케 하듯 일렬로 위압감을 뽐내는 눈구름이 장관을 연출한다.

그러고보니 이곳에 입국할 때도 두터운 눈구름을 내려다보며 두근두근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고마운 날씨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눈만 오면 지루할까봐 맑은 하늘도 하루에 몇 번씩 보여주고, 꼭 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시간엔 여지없이 쏟아부어 주었으니까.

10일간의 짧은 여행동안 날씨가 이렇게까지 도와 준 적은 드물다. 여름의 혹한보다는 오히려 편안했던 편이기도 하고.

 

 

 

여러 번 가면 점점 식상해져서 발걸음이 뜸해지는 곳도 있지만

홋카이도는 적어도 짦은 생애 한 순간동안은 아무리 찾아가도 지루해 질 틈이 없는 곳이다.

가장 일본적이지 않은 곳에 살짝살짝 보이는 일본적인 특성이 특히 그렇다.

나름 일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는 본인이기 때문에 더욱 그 묘한 이질감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혼자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일거리만 찾을 수 있다면 이 근방에서 가장 정착해서 살고 싶은 곳이다.

시야를 길게 본다면 사실 나가기 좋아하는 성격상 평생을 틀어박히지는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만족스러운 여행이든 후회가 남는 여행이든 끝이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 아쉬움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예 여행에 인생을 던져버리는 사람들도 있는 것 아닐까.

 

 

 

돌아와서 바로 나침반님과 만난다. 내려가기 전에 선물을 전해줘야 하니까.

동대문의 밤거리에 도착하니 역시 사방에서 오감을 자극하는 '여기가 한국'이라는 느낌이 엄습해 온다.

멀리서 보면 쌍동이같아도 가까이서 보면 정말 달라도 이렇게 다른가 하는 생각이다.

 

국밥을 주문해도 알았다던가 고개를 끄덕인다던가 하는 리액션 하나 없이 휙 돌아 가버리는 아줌마 모습을 보니 다시 한번 '역시나 한국'이다.

사실 더 풍족해질리도 없지만, 아무리 풍족해진다 해도 불친절이 친절로 바뀔 일은 절대로 없다. 친절은 부유함에서 오는 사치가 아니다.

 

 

 

나침반님에게는 닛신 컵누들 한박스와 쟈가포클 한박스, 마루세이 버터 샌드를 선물로 건내드린다.

나침반님 집에는 냉장고가 없기 때문에 살짝 걱정이긴 하지만 25도 이하에서만 보관하면 괜찮다고 적혀있으니 뭐.

 

오비히로에서 시작한 제과점 롯카테의 간판 스타같은 녀석으로, 모든 재료를 토카치산으로 사용한 고급이다.

가지고 온 선물 중에서 크기는 가장 작지만 가격은 가장 비싸다. 포장이 너무 고급스러워서 부담갈 정도.

본인이 사서 먹는 것이야 아무렇게나 포장해도 관계없지만 역시 선물이 주가 되는 과자다 보니 예의바르게 포장되어 있다.

 

 

 

다행히도 훗날 나침반님이 맛있었다고 평가하셔서 구입한 보람이 있었다.

집에도 하나 들고 왔는데, 엄니는 역시 포장에 질겁을 하셨다. 뜯기가 아깝게시리 뭐하러 이렇게 멋지게 싸 놓았냐고.

 

허물없는 가족끼리야 사실 이런 거 구입해 봤자 감흥없이 확 뜯어서 팍팍 씹어먹을 뿐이다.

아무래도 '가족끼리 시식용' 이라고 저렴하고 엉성한 포장지를 두른 상품을 따로 발매해 줬으면 싶다.

 

 

 

쿠키 속에 진한 버터, 그리고 사이사이에 건포도가 들어간 살짝 고풍스러운 과자다.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본인에게는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지만, 분석적으로 파고든다면 재료의 질이 워낙 뛰어나서 아껴 먹고 싶은 기분이 든다.

 

달고 짠 맛과 함께 스폰지처럼 부드러운 쿠키와 농후한 버터의 고소함이 조화롭다. 요 한 조각이 2000원쯤 하니 결코 싼 가격은 아니다.

개인적으로야 양보다는 질이기 때문에 싼 과자 많이 먹는것 보다야 이런 거 한개씩 먹는게 훨씬 만족감이 크긴 하다.

입맛이 저렴한 편인지, 그냥 신선한 오징어만 씹고 있어도 다른 과자 생각이 나지 않는 편이지만

역시 1년이나 되다 보니 사진 정리할 때 가끔 이 녀석의 맛이 생각나기도 한다.

 

 

 

오타루에서 이별할 때 Y양이 선물로 덥썩 사 줬던 초콜릿.

선물은 사실 이쪽에서 줘야 하는데 갑작스럽게 하나 받아버려서 조금 난감했다.

 

연락을 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는데, 지금도 키타미에서 한국어 교습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본인 역시 키타미 주변에 일자리만 있으면 당장 짐 싸서 날아갈 생각이었지만 아쉽게도 교습소 원장이 한국인이라 그건 포기.

오랜만에 안부나 물어볼까 싶다. 사실 여건만 된다면 2015년 2월에도 당연히 날아가고 싶지만.

 

 

 

왁자지껄한 밤풍경이 한국의 매력이라고 하지만 역시 이런 도시 모습은 내 취향이 아니다.

활기와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이라고 해서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개인적으로 이런 모습은 활기가 아니라 발버둥으로밖에 안보인다.

 

나침반님은 서울 토박이지만 역시 나만큼이나 서울 좋아하지 않는 듯. 그러니 떠날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것이겠지.

일단 바닥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는 점에서 삿포로와 크게 차이가 난다. 10일동안 눈바닥 말고는 본 기억이 없다.

눈에 있어서만큼은 아직도 부족하다는 기분. 황량한 아스팔트 도로를 보니 금새 홋카이도가 그리워진다.

 

사람이라면 무릇 자제심을 갖고 살아가야 하니 2015년 겨울에 다시 날아가는 사치스러운 일은 하지 않겠지만

시간이든 자금이든 여유만 있다면 언제나 파묻히고 싶은 곳이 홋카이도라는 점에는 변화가 없다.

인셉션의 마지막 장면이 오버랩되는 기분으로 나침반님과 헤어진다. 이제 깨어날 시간.

 

 

 

고기를 다 먹고 짐을 챙긴 후 나오는데 문득 이 아이스크림 생각이 난다.

삿포로 시내의 호텔이나 역 등에서 제공하는 정보지에는 여러가지 음식점 할인 쿠폰이 들어있는데

대부분 소소한 할인이나 단체 몇 인분 이상 주문시 서비스로 딸려나오는 음식 등이라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반드시 들르는 이곳 비어가든의 후식 무료제공 티켓은 꽤나 흥미를 동하게 만드는 녀석이었다.

 

티켓을 제시하면 홋카이도산 우유를 사용한 아이스크림을 하나 준다고 해서 입가심으로 그만.

홋카이도의 이름있는 소프트크림은 매우 농후하고 부드러운 우유향기가 입안 가득히 퍼져서 황홀한데

비어가든은 일단 맥주 전문이라 그런지 상급 소프트크림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해서 살짝 아쉽긴 했다.

 

이번엔 겨울이라 그런지 이걸 먹을 수 있는 무료 티켓을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아무리 겨울이라도 징기스칸으로 텁텁해진 입을 헹구는데 참 유용할 텐데 아쉬울 따름.

물론 돈 주고 사먹을 수는 있다. 이곳은 징기스칸과 맥주가 무제한이지만 따로 주문할 수 있는 해산물, 소시지 디저트 등이 마련되어 있으니까.

 

한 번 무료로 먹고 나면 좀처럼 지갑을 열기가 힘든 게 나같은 가난뱅이의 습성일까.

 

 

 

밖으로 나오니 눈 내리는 모습이 더욱 심상치 않다.

배가 너무 불러서 버스 타고 돌아가는 건 소화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숙소까지 걸어갈까 싶은데

여름이라면 몰라도 지금 이 눈을 뚫고 갈 수 있을지 살짝 겁이 난다.

 

그래도 여기서 징기스칸을 먹고 나면 걸어거 돌아가는게 연례행사처럼 몸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눈 때문에 그 익숙함을 깨트리고 싶지는 않아 각오를 단단히 하고 밖으로 나선다.

비어가든을 찾은 사람 외에는 밖에 돌아다니는 모습 보기가 힘들 정도로 다들 꽁꽁 틀어박혀 있는 모양.

 

 

 

나보다 조금 먼저 비어가든에서 나온 관광객들 역시 비슷한 기분인지 꺅꺅거리며 눈 속을 걸어가는 중이다.

눈 내리면 발광하는 강아지들 모습이 이런 광경속에서는 나름 이해가 가는 기분도 든다.

눈 때문에 시야가 10m 될까말까 한 풍경은 원래 서식지에서는 결코 구경할 수 없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눈 속에 파묻힌 공중전화 박스를 보니 무심코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엄습하기도 한다.

저러다가 눈 무게때문에 유리창 깨지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홋카이도 도착부터 오늘까지 눈이 내리지 않은 날은 하루도 없었지만 이 정도의 폭설은 처음이다.

눈이 많이 올수록 좋다는 눈축제 역시 이런 눈이라면 관람이 어려웠으리라 생각할 정도로 쏟아붓는다.

 

양고기와 맥주를 너무 많이 집어넣은 탓인지 슬슬 아랫배에 위험신호가 감지되고 있지만

눈을 못 뜰 정도로 눈이 쏟아질수록 기분은 점점 흥분 상태에 돌입하고 있다. 장관은 장관이다.

물론 여행 중이니 이런 사치스러운 기분을 부릴 수 있는 것이겠지만. 출근길 시민이나 강원도 부대 장병들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풍경일 듯.

 

 

 

평소엔 그닥 볼 것 없는 주거지역이지만 눈이 내리면 뭐든 신기한 모습으로 변한다.

자동차도 거의 다니지 않아 주변이 모두 생크림으로 덮힌 듯한 분위기.

 

혼자 서 있으니 왠지 발광을 한 번 해보고 싶은 기분이지만 카메라의 안위도 걱정될 뿐더러 속에서 힘찬 고동을 준비중인 찌꺼기들이 위험하다.

다행히도 아무리 눈이 많이 와서 시야가 흐려져도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그냥 계속 직진만 하다보면 역에 도착한다.

자전거 여행으로는 결코 찾을 일이 없는 겨울 홋카이도의 모습을 10일동안 뇌리 깊숙히 새겨놓고 갈 기회를 마련해 주니

마음 속으로는 얼마든지 더 내려보라고 응원을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바람까지 불어대서 추위가 뼛속까지 사무친다는 점은 좀 힘들었지만.

맥주와 양고기가 열을 만들어주고 있어서 그나마 서럽다는 생각까지 들지는 않았다.

 

 

 

슬슬 서두르지 않으면 억압에 항거하겠다고 뱃속이 단호하게 주장중인데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가지 못한다고 가던 길에 놓인 북오프가 또 발걸음을 잡는다.

그러고보니 잊고 있었지만, 사실 비어 가든에 갈 때마다 돌아오는 길에 이곳을 들른 추억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삿포로 중심가쪽에도 북오프가 있긴 한데 사람이 항상 빡빡해서 책 구경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꼭 이 지점을 찾곤 했다.

나만 그런 건 아닌지 좀 전까지 코뺴기도 보이지 않던 차들이 이 앞에 포진중이다. 눈 내리고 밖에서 돌아다닐 수 없으니 책이나 읽으러 오는 듯.

 

어차피 괄약근도 간당간당하니 저기 들어가서 볼일이나 보고 책을 좀 읽으면 금상첨화겠다 싶어 발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곳은 화장실이 수리중이니 사용할 수 없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가는 날이 장날인 듯.

이마에 땀까지 송글송글 맺히고 있어서 이건 책 구경 따위의 여유를 부릴 수 없을 것 같다.

 

일단 밖으로 나가 살짝 옆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는 편의점에 들어간다.

밖에서 쏟아지는 눈과 비교해도 결코 밀리지 않는 기개로 배출을 마친 후 미안한 마음에 간식거리라도 하나 사 들고 나온다.

다시 북오프로 들어가 편안해진 배를 어루만지며 가지런지 늘어선 수많은 책을 황홀하게 구경하다가 적당히 몇 권 구입한다.

 

배가 홀가분해지니 마음의 여유도 생겨서 좀 더 느긋한 기분으로 걸어가니, 역에 도착할 때쯤엔 다시 눈이 그쳐가고 있다.

이 눈이 내일 아침까지 계속 내린다면 귀국행 비행기도 걱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는데 그나마 다행.

사실 이렇게 눈이 쏟아져도 치토세 공항은 항상 비행기 이착륙으로 정신없이 바쁘기 때문에 별로 걱정스럽지도 않다.

 

여행의 마지막 밤이라는 아쉬움에 TV만 바라보며 좀처럼 잠을 청하지 못한다.

돌아가면 또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리겠지만

이번 여행은 모든 코스에서 원하는 것 이상의 만족감을 달성할 수 있었기에 그런 사치스러움은 조금 경감될 듯 하다.

 

 

비어가든에 도착하니 하늘이 맑다. 깔끔할 때 비어가든 모습이나 담아주기 위해 셔터를 누른다.

먹으러 오는 곳이기도 하지만 건물 자체가 가치를 지닌 붉은 벽돌집이라 구경하기에도 좋다.

생애 첫 비어가든은 자전거로 도쿄에서 이곳까지 달려오기도 했고 싱싱한 20대였기 때문에 미친듯이 고기와 맥주를 흡입했던 기억이 난다.

 

바지 고간쪽이 자전거와의 마찰 때문에 구멍이 나 버려서 난감했지만 누가 쳐다나 볼까 싶어 그냥 입고 다녔는데

문제는 행색이 워낙 노숙자같아서,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서 있던 한국인 부부에게 '한국서 오셨나봐요' 하고 말을 거니

몰래카메라라도 걸린 듯 꺅 하면서 기겁을 하던 모습에 살짝 충격을 받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물론 그쪽은 금새 친근하게 대답해 줬지만.

 

 

 

비어가든 주변엔 거대 쇼핑몰도 있어서 구경하기 좋지만

여행자들의 경우엔 시내에도 구경할만한 쇼핑몰이 많아서 굳이 이곳까지 둘러볼 필요가 없다는 게 아쉬운 점.

시간을 느긋하게 잡아서, 3~4시쯤 이곳에 와 쇼핑몰을 구경한 뒤 비어가든으로 들어가도 나쁘지 않지만

비어가든에서 배를 채우려면 쇼핑몰 안쪽의 먹거리가 전부 무의미해 지기 때문에 약간 김이 빠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 부근은 관광객이 비어가든 외에 별로 즐길거리가 없는 거주지 구역이지만

삿포로 역과 버스 연계가 매우 충실한 편이라 거대 쇼핑몰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가 봐도 될 듯.

한국 물가가 얼마나 미쳐 돌아가는지를 확실히 체감해 볼 수도 있다.

 

 

 

붉은 벽돌집은 겨울의 눈과 굉장히 잘 어울리지만 사실 이곳은 여름이 좀 더 낫다.

더울때 먹는 맥주가 각별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비어가든이라는 이름답게 공원처럼 주위 조경이 아름다워서.

 

여름 삿포로는 눈축제가 열리는 중앙공원 전부를 비어가든으로 만들어 온갖 맥주를 야외 잔디에서 즐길 수 있다.

여름에 맥주, 겨울에 눈축제라는 두 가지 큰 이벤트만으로도 이 곳의 활기는 일년 내내 사그라들줄 모른다.

대구에서 치맥축재라며 사람들 줄 세워놓고 그깟 치킨조각 조금과 김빠진 맥주 한 잔 돌리는 모습을 보니

축제의 의도와 방향성이 얼마나 그 축제를 아름답게 혹은 추하게 만들 수 있는가를 세삼 느낄 수 있었다.

 

원래 저 양조주 근처에 블루 포피라는 희귀종을 키우고 있어서 여름즈음엔 귀한 구경을 할 수 있다.

 

 

 

자전거 여행때 찍은 블루 포피 사진. 학명은 메코놉시스라는 희귀 양귀비로, 원래 부탄 고지대에서 발견된 야생종이다.

고산지대 양귀비중에서도 특히 귀하다는 푸른색 양귀비이고

일본이나 한국 여름기후에서는 생존하기 어려운 녀석이지만 노력끝에 이곳에서 번식에 성공했다고 한다.

 

물론 삿포로의 여름은 예전에 비해 월등히 더워지고 있어서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미지수.

정확한 정보는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식물로 알고 있어서, 이쪽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홋카이도 관광겸 이곳으로 오면 좋을 듯.

 

 

 

사진 몇장 찍고 있는데 다시 눈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잠시도 방심할 틈이 없다.

물론 건물 내부는 고기굽는 열기로 후끈후끈할 테니 크게 문제는 되지 않지만.

 

건물 풍경과 함께 산책을 즐긴다던가, 삿포로 맥주 역사에 관심이 있다던가 하지 않는 이상 사실 이곳의 가격대 성능비는 그다지 좋지 않다.

1인당 3000엔 정도의 요금을 내면 양고기 징기스칸과 맥주가 무제한으로 나오지만

삿포로 시내에서 그 정도의 금액이라면 무제한이 아니더라도 배 터질만큼 징기스칸을 즐길 수 있으며

양고기 품질도 이곳보다 훨씬 좋은 맛집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기 때문에. 맥주야 삿포로 어디든 레벨이 높은 편이고.

 

하지만 관광객으로서 이 곳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건 삿포로에 한 가지 아쉬움을 남기는 행위이기도 하고

거대한 양조 기계를 볼 수 있는 2층 뻥 뚫린 벽돌집의 디자인을 즐기며 뛰어난 서비스를 맛볼 수 있는 이곳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

 

맛 뿐만 아니라 여행 기분을 즐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역시 이 곳을 추천할 수밖에 없다.

 

 

 

눈축제가 끝났다고 해서 눈이 그치지는 않기 때문에 여전히 이곳의 겨울은 현재진행형이다.

매일 이렇게 쏟아붓는 눈 청소하고 길 만드는 것도 여간 힘들지 않을텐데.

 

삿포로 시민들에게는 정신적 상징이나 마찬가지 건물인데다, 이 정도 넓은 공간에서 회식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별로 없기 때문에

식당 안은 항상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시끄럽기 그지없다. 일본은 일반 음식점은 조용하지만 술집은 묘하게 시끄러운데

이곳은 일본답지 않은 호탕함을 즐길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런 곳에 몇 번이고 혼자서 고기 구우러 오는 본인도 어지간이 제정신은 아니지만.

다행히도 이곳만큼은 혼자 와도 그다지 눈치 볼 일이 없다. 거의 모든 음식점을 혼자 즐기는데 매우 익숙한 본인이라도

고기집만큼은 어지간해서 혼자 찾지 않는데, 여기는 그런 눈치 볼 필요가 없어서 즐겁게 즐길 수 있다.

사실 혼자 가서 보통 일본인 가족 2~3인 정도가 먹는 양을 먹어치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곳은 수용인원이 많기도 하고, 제대로 요리를 즐기기 위한 사람들을 위한 레스토랑도 있어서

원하는 건물과 음식 내용에 따라 티켓을 구매해야 한다. 매표소 사람들은 영어도 곧잘 알아들으니 문제는 없다.

본인처럼 몇 번이고 이곳을 찾은 사람이라면 이제 슬슬 다른 건물에서 식사를 즐겨도 될 법하지만

그래도 항상 징기스칸 무제한이 반기는 가장 앞쪽 벽돌집을 찾게 된다. 왠지 이제는 하나의 정해진 코스처럼 느끼고 있으니.

 

낮에 이곳을 찾으면 맥주 박물관도 견학해 볼 수 있다. 삿포로 맥주의 역사와 맥주 제조공정 등을 구경해 볼 수 있어서 나름 재미있다.

한 잔에 100엔짜리 삿포로 클래식 생맥주를 견학 후 조그마한 바에서 시음해 볼 수 있는데

그 맛은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본인에게도 꽤나 충격을 줄 정도로 깔끔하다. 이래서 국산 맥주가 욕을 먹는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눈이 심상치 않을 정도로 많이 쏟아지고 있어서 지채하지 않고 들어가기로 한다.

본인만의 징크스라도 해도 되겠지만, 이곳에 올 때는 버스를 타도 돌아갈 때는 항상 걸어서 숙소까지 가는 일이 일상화 되어 있다.

배가 터질 정도로 먹어댔으니 가볍게 밤거리를 산책하며 삿포로의 야경을 구경하고 걸어가면 적당히 속도 진정이 되기 때문에.

 

거리상으로는 느긋하게 걸어도 30분 걸리지 않아 삿포로 역에 도착할 정도니 무리가 없지만

만약 식사 후에도 이 정도로 눈이 내리고 있다면 조금 고심해 봐야 할 듯 하다.

 

 

 

식당 안은 여전히 왁자지껄하다. 맥주와 고기를 즐기며 소리를 지르면 소화도 잘 될것 같다.

기름이 많이 튀기기 때문에 옷가지와 가방 등을 넣을 수 있는 비닐백을 좌석마다 준비중이다.

 

징기스칸은 양고기를 야채와 함께 구워먹는 홋카이도의 소울 푸드인데, 정작 양고기가 부족해서 현 삿포로 시내 징기스칸의 99%는 호주산 or 유럽산 양고기다.

일본산 양고기는 매우 고가로 특급 요리점에서나 구경할 수 있다고. 맛은 호주산이라 해도 괜찮으니까 별 문제 없지만 뭔가 아이러니한 상황이긴 하다.

 

고기는 로스구이용과 생고기가 준비되는데, 직원들이 상시 테이블을 둘러보다가 고기가 떨어졌다 싶으면 알아서 추가 주문여부를 물어본다.

홋카이도의 지형을 그대로 본뜬 불판은 올 때마다 인상적. 불판 중앙에 떡하니 놓인 별모양이 이들의 프라이드를 대변해 주는 듯 하다.

먼저 지방을 불판 여기저기에 골고루 발라 윤기를 내는 일부터 시작한다. 양고기가 지방이 좀 있는 편이라도 쉽게 들러붙기 때문에 꼼꼼히 바르는 편이 좋다.

 

 

 

식당 한켠에는 맥주 제조에 쓰이는 거대 양조기가 구릿빛 광채와 함께 전시중이다.

이렇게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고기 레벨이 약간 떨어지더라도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많다.

아니 관광객이라기 보다는 주말 나들이나 회사 회식등으로 이곳을 찾는 현지인들이 더 많다.

본인 역시 삿포로에 살고 있다면 한 달에 한 번은 꼭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아무래도 혼자 이곳을 찾는 일이 흔하지는 않다 보니 약간 차질이 생긴다.

원래 징기스칸은 바닥에 야채를 가득 깔고나서 그 위에 고기를 얹어 익히는 것이 정석.

고기의 육즙이 밑의 야채에 스며들고, 고기가 타서 들러붙지 않기 때문에 깔끔하게 먹을 수 있다.

 

하지만 혼자 온 본인으로서는 한꺼번에 고기를 많이 구워먹을 수가 없기 때문에 야채 위를 고기로 덮을수가 없다.

야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꼼꼼하게 고기를 덮어야 제대로 된 방법이라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덮으면 혼자서 처리가 힘들다.

 

그래서 그냥 첫 번째 접시는 대강대강 주위에 야채르 놓고 생고기를 중앙에 얹는다. 이렇게 하면 그나마 육즙이 옆으로 내려가니 흉내는 낼 수 있다.

 

 

 

맥주는 가볍게 한 잔 마신다. 술을 많이 마시지 않으니 애주가들처럼 마구 퍼마실수는 없지만

이곳에 오면 기본적으로 500cc 두 잔은 마실 정도로 마음의 각오를 하고 있다. 신선한 삿포로 생맥주는 그만한 가치가 있기도 하고.

 

찍고나면 바로 테이블 밑 의자로 숨겨버리며 카메라에 기름이 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생각보다 기름이 많이 튀기기 때문에 방심했다간 렌즈 앞이 기름범벅이 될지도 모른다.

 

 

 

육즙을 머금은 숙주나물과 양배추는 고기에 뒤지지 않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

최소한 두 명이었다면 업무 분담이 가능해서 좀 더 편안한 흡입이 가능하지만

고기를 혼자 구우면 사진 찍고 고기 굽고 맥주 마시고 타기 전에 접시에 담아 먹는 모든 행위를 혼자 진행해야 한다.

 

홀로 여행의 장점이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이런 점에서만큼은 아쉬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애초에 고기 굽기를 혼자 하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기도 하지만. 삿포로에서 이곳을 찾지 않기는 또 아쉽고 해서 조금 난감하다.

 

양고기 특유의 냄새를 많이 잡았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소나 돼지고기와는 그 향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처음 먹었을 때 거부감이 심하다면 다시 찾지는 않을 터이지만, 본인은 고기라면 어지간하면 다 환영이라 폭풍 흡입중이다.

 

 

 

두 번째 잔은 흑맥주로 부탁한다. 이곳은 일반 생맥주와 흑맥주, 그 둘을 섞은 갈색 맥주를 무제한 마실 수 있는데

본인은 종류별로 마셔보기엔 술이 약한 편이라 그냥 두 잔 정도로 만족해야 할 듯하다.

 

한국에서 흑맥주 처음 마셨을 때는 영 쓰기만 하고 매력을 느끼지 못했지만

술을 목숨처럼 좋아하는 친구가 구인네스를 한 캔 가지고 왔을 때 흑맥주의 매력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고

이곳 비어가든에서 마셨던 흑맥주에서 비로소 흑맥주만의 무게감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2008년 처음으로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자전거 여행으로 녹초가 된 직후였고

밥이라 해 봤자 하루 12시간 40여일간 달리면서 편의점 주먹밥 정도밖에 먹은 게 없었으니

거의 눈이 뒤집힌 채로 고기와 야채를 7접시 정도 먹었던 기억이 있지만

 

지금은 편안한 기차여행이고 점심때 뜨끈한 수프 카레까지 먹었으니 헝그리 정신이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네 접시 정도 먹으니 배가 한계임을 분명히 하는 신호를 내보낸다. 역시 먹는것도 젊을 때 많이 들어가는 것인지.

 

로스를 좀 많이 주문해서 원래 정석대로의 모습을 구현해보려 한다.

원래는 좀 더 수북히 쌓아서 야채가 보이기는 커녕 공기 빠져나갈 구석도 없게 만드는 것인데

아무래도 그랬다가는 타기전에 먹느라 너무 허둥댈 위험이 있어서 이 정도로 타협을 보기로 한다.

 

 

 

맥주 세 잔까지는 아무래도 무리라 마지막 입가심을 위해 무알콜 진저 에일을 부탁한다.

진저 에일이 아동용 음료수는 아닐텐데 비어가든의 마스코트인 삿짱의 얼굴이 예쁘장하게 찍힌 컵에 담겨온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음료수지만 일본서는 탄산음료 중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달달하긴 하지만 생강의 상쾌한 씁쓸함이 조금 남아있어서 무작정 달기만 한 콜라 등을 싫어하는 본인 마음에 드는 녀석.

 

야채까지 합하면 총 5접시를 맥주 1000cc, 음료수 500cc 와 함께 혼자서 먹고 마시니 배가 거의 폭발직전이다.

아주 많이 오버하는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그냥 용인해 주긴 하지만, 일단 시간제한도 2시간이기 때문에 아슬아슬하다.

일행이 한 사람만 더 있었다면 2시간을 다 채우지 못할 정도로 느긋하게 즐겨도 충분하겠지만

혼자 고기 굽고 맥주 마시고 사진 찍고 하다보면 2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정신없다.

 

삿포로 사람들은 일본에서 고기 잘 먹기로라면 오키나와와 쌍벽을 이루는 매니아들이라

이곳의 징기스칸은 그야말로 식사가 아니라 전쟁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도쿄같은 얌전한 본토사람이 이쪽 토박이들과 고기 먹으러 갔다가 제대로 입에 넣지도 못하고 패배하는 경우도 많은 듯.

그런 전투적인 흡입을 본인 혼자서 하고 있으니 왠지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지막 접시째는 진짜 이러다가 토하는거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절박하다.

뭐든 과하면 좋은게 아닌데, 이곳 비어가든에서는 왠지 배 터질만큼 채워넣지 않으면 굉장히 아쉬워진다.

이건 전후 시대 사람들이 먹었던 꿀꿀이죽의 맛을 잊지 못하고 풍족해 진 후에도 부대찌개를 찾는 그런 심정일려나.

 

생애 첫 징기스칸을 골골 골아가던 자전거 여행 중에 즐기다 보니 이곳에서는 미친듯이 먹어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뇌리에 박혀있는 듯.

 

어쨌든 더 이상 먹었다간 정말 못볼 꼴을 보이게 될 것 같아서 남은 것들 대강 입에 쑤셔넣고 남아있는 진저 에일을 윤활유삼아 위 속에 밀어넣는다.

숙소에 도착하면 폭풍 배설이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지만 이 정도면 삿포로의 마지막 밤에 어울리는 진수성찬이었다고 자찬해 본다.

 

 

 

한겨울의 폭설 속에서도 열기를 잃지 않는 비어가든 내부를 기념으로 남기고 자리를 정리한다.

이제와서는 맛을 즐긴다기보다는 삿포로를 찾을 때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반사적인 일상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온 몸에 진득하게 베어버린 징기스칸의 미묘한 냄새는 사진을 정리할 때마다 입맛을 돌게 만든다.

 

맥주와 징기스칸이면 삿포로의 하룻밤은 언제든 즐겁게 보낼 수 있다.

 

조식을 든든히 챙겨먹고 삿포로행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걸어간다.

삿포로까지는 4시간 정도 걸리지만 갈아타지 않아도 되니 걱정할 일은 없다.

 

단지 눈이 그쳤다고는 하지만 어제보다 훨씬 매서운 바람이 강렬하게 몰아치고 있어서, 홋카이도 여행 중 처음으로 뼛속까지 추위를 느낄 수 있다

하늘의 눈이 아니라 땅에서 일어나는 눈은 훨씬 매서운 법.

산더미처럼 쌓인 눈이 칼바람 때문에 온 사방으로 흩뿌려지고 있어서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는 것 처럼 느껴진다.

 

 

 

한번 땅으로 내려왔다 다시 흐트러지는 눈은 어찌나 매서운지.

기온은 영하 10도 정도지만 바람 탓에 체감온도가 영하 20도를 넘나들고 있다.

포근하게 보였던 눈이 칼바람에 굳어버린 것인지 지금 피부를 때리는 눈송이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매섭다.

 

 

 

레일 너머가 신기루처럼 흐려지는 풍경은 조금 뒤에 이쪽으로 몰아칠 눈보라를 더욱 두렵게 만든다.

이게 극지방에서 강화된다면 소위 말하는 블리자드가 되리라 생각.

 

도저히 이래서는 못버티겠다 싶어 역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안내방송이 나온다.

다른 지역의 폭설 때문에 기차가 25분 정도 연착된다고 한다. 이번 여행에서 첫 연착.

평소라면 그냥 기다리면 되지만 개방된 공간에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는 상황이라 조금 귀찮아 진다.

 

역사 안으로 들어갔더니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 올라오는 앞에서 오밀조밀 모여있다. 다들 밖에서 기다릴 수가 없으니까.

밀도가 너무 높아서 그냥 1층으로 내려가 개찰구를 나와버린다.

어차피 홋카이도 레일 패스는 따로 티켓을 기계에 집어넣거나 하지 않고 역무원에게 제시만 하면 되기 때문에 몇 번이고 들락날락할 수 있으니까.

 

역내 매점에서 따뜻한 옥수수 스프 한 캔을 사들고 손을 녹이며 주변을 서성인다.

25분이란 시간이 참 애매해서 다른 곳을 돌아볼 여유도 없고, 그렇다고 가만히 서 있으니 꽤나 지겹다.

 

역에서는 거의 2~3분에 한 번씩 연착 소식을 방송하고 있다. 전광판에도 당연히 연착 정보를 표시해 놓았다.

10분쯤 뒤에 도착하는 열차는 내가 예약한 차가 아니라 그 전 시간에 도착하는 열차이기 때문에

자칫하다가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4시간을 서서 가야 할 수도 있으니 이런 점은 주의를 요한다.

워낙 쉴세없이 연착 소식을 방송중이라 어지간하면 헷갈리지 않을거라 생각하지만 외국인이라면 좀 난감한 상황일지도.

 

다행히도 25분 뒤에 온 열차는 따뜻해서 기다린 보람은 있었다. 미리 예약해 놓은 터라 창가 자리에 앉아 경치를 감상한다.

 

 

 

지루해지기 쉬운 기차 여행이지만 홋카이도만큼은 그럴 틈이 없다.

원채 조용한 객실 안이지만 참다 참다 결국 카메라를 꺼내든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쉬운 장면이 수도 없이 펼쳐진다.

 

조심해서 셔터를 누르고 이제 괜찮겠지 싶으면 금새 더욱 황홀한 광경이 눈앞을 지나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아예 긴장을 하고 있지 않으면 이런 이동중 사진은 항상 보던 것보다 조금 아쉬운 장면만을 간신히 담을 수 있다.

그렇다고 4시간 넘게 계속 창밖을 뚫어져라 주시할 수도 없고 해서 그냥 마음을 비우고 중간중간 무덤덤하게 셔터를 누르기로 한다.

 

 

 

홋카이도의 날씨는 수직적이기도 한 동시에 수평적이기도 하다.

한 곳에 머무를 때도 쨍한 하늘에서 폭설로 휙휙 바뀌기도 하고

기차로 빠르게 이동중일 때 역시 푸르던 하늘 아래를 넘어가면 갑자기 시야를 막아버리는 눈보라가 떡하니 나타나기도 한다.

 

울창했던 푸른 생명력들의 역동성이 전부 바람과 눈으로 스며들어 간 건지, 살아있는 건 나무와 풀숲이 아니라 하늘이라는 생각이 든다.

눈보라 속을 부담없이 찍을 수 있게 해 주는 열차의 든든함이 고맙기도 하지만 역시 속도가 속도이다 보니 감도를 좀 높여야 한다.

아예 감도를 낮추고 자연스러운 패닝샷 기분을 내는 것도 괜찮지만 창가에 보이는 풍경이 눈에 들어올 때의 감정을 좀 더 고스란히 담고 싶다는 기분.

 

 

 

대도시는 그렇다 치고 중간중간 위치하는 작은 마을은 어떻게 겨울을 넘기는지 궁금하다.

홋카이도 자동차들은 기본적으로 출고시부터 스노우 타이어를 포함하고 있다고 하고

얼음보다는 눈이 많은 곳이라 생각했던 것보다 잘만 달린다. 본인처럼 눈이 적은 지방에서 살아온 사람은 조마조마한 기분.

 

여름의 초목이 지겨워 질 때쯤이면 이렇게 세상을 뒤덮어버리는 눈밭이 만들어지기를 반복하니 역시 기후변화가 다양한 지역은 심심하지 않아서 좋다.

 

 

 

푸르던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진행 방향의 심상치 않은 하늘 쪽은 열차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기다리고 있다.

지면의 모양이나 색깔마저도 단조롭게 변해버리는 겨울이지만 하늘만큼은 변화무쌍해서 부족한 역동성을 채워준다.

 

눈을 잠깐 감고 졸다가 깨어나 보면 대체 여기가 무슨 세상인지 모를 정도로 변해버리는 점이 매우 인상적.

눈길 자동차 운전에 어느 정도 숙련이 된다면 그냥 드라이브만 해도 인상적인 장면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을 듯 하다.

 

 

 

여기서부터는 그저 창밖을 바라보다 무의식적으로 셔터를 누르기만을 반복하던 무아지경의 시간이라

글로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던 음악과 함께 하니 예술 전시회를 감상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순간들이 필름처럼 지나가고 난 뒤 갑자기 평온해 보이는 거대한 설원과 그 위를 거니는 젖소들이 나타난다.

땅이 넓으니 목장도 여유가 느껴지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방목장인지 모르겠다.

 

여름에 이런 곳을 지나갈 때는 확실히 울타리가 보였지만 지금은 거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다.

울타리 너머에서 자전거 세워놓고 사진을 찍고 있으면 소들이 호기심 초롱초롱한 눈으로 앞까지 다가오기도 했다.

 

거친 눈보라를 뚫고 나자 온화한 풍경이 펼쳐지는 순간은 마치 소설 '설국'의 첫 장면을 연상케 한다.

정말로 도착시간도 얼마 남지 않아서, 여행의 끝을 조용히 축하해 주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오랜만에 삿포로로 돌아오니 여전히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분주한 도시 풍경은 이제껏 즐겼던 차분함과 거리가 있지만 조금씩 현실 세계로 돌아오고 있다는 반가움도 없지 않다.

 

삿포로를 떠나기 전 마지막 밤을 뜨겁게 달궜던 눈축제장의 스키 점프대는 빠르게도 해체 수순을 밟고 있다.

축제란 건 준비하는 기간이나 열리는 도중이나 열기가 넘치지만 이렇게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숙연해지는 강도도 그만큼 크다.

부자가 아니라 매년 겨울 이곳을 찾아오는 사치를 누릴수는 없으니 이제 내려놓을 감정은 내려놓고 돌아가라는 느낌이 든다.

 

 

 

숙소에 짐을 맡겨놓고 삿포로에서 해야 할 몇 안남은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저녁에 맥주 공원에서 징기스칸을 즐기는 것은 제외하고라도 겨울 삿포로의 별미인 수프 카레를 먹지 않고 떠나기는 아쉽다.

 

오비히로뿐 아니라 오늘은 홋카이도 전역의 날씨가 그리 좋지 않았는지 쓰러진 자전거가 한층 더 무섭게 느껴진다.

대체 쓰러진 자전거가 저만큼 파묻힐 정도라면 눈이 얼마나 왔다는 것인지. 마치 물 속에 잠긴 듯한 그 모습은 여전히 이곳의 기후에 대해 감탄하게 만든다.

 

 

 

축제가 성대하게 열린 만큼 해체 작업도 보통 일이 아니다. 아마 준비 기간과 마무리 기간을 합치면 축제 기간의 몇 배는 되지 않을까.

원래 축제란 그런 것이지만 이런 아련한 모습 또한 다음 축제를 위한 안식의 시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삿포로는 여전히 흐렸다가 맑았다가 눈이 쏟아지는 정신없는 날씨를 자랑하고 있다.

내일 귀국이니 이제는 억눌러 놓았던 구매 욕구를 풀어재끼는 일만 남았다.

서점을 돌아보며 읽을 만한 책을 10만원 어치 정도 쓸어담는다. 가능하면 한국에 발매될 일이 적을 듯해 보이는 책을 중점적으로 공략한다.

 

나름 긴 여행이다 보니 자금을 좀 넉넉하게 가지고 왔는데, 그렇다고 해서 남은 자금을 전부 써버리기엔 아까워서 꼼꼼하게 검토를 하며 구매한다.

이 정도면 내일 공항에서 선물 몇 개 사들고 가도 2만엔 이상 남아있을 테니, 다음 여행의 자금 보충으로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듯 하다.

 

 

 

오비히로에 맞먹는 추위를 뚫고 이리저리 해맨 끝에 건물 지하 구석에 아담하게 숨어있는 수프 카레점을 찾아낸다.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가게에다 카운터 석에 앉아도 부담없어 보이는 친근한 아가씨가 맞이해 줘서 긴장이 풀린다.

 

수프 카레는 홋카이도에서 탄생한 변종으로, 워낙 추운 홋카이도의 겨울을 좀 더 후끈하게 즐기기 위해 고안된 카레.

점성이 없는 찌개같은 카레로 처음 볼 때는 위화감이 들 수도 있지만 짜릿한 카레의 자극은 더욱 강렬해서 매력적인 녀석이다.

한국 사람에게는 오히려 찌개 먹는 느낌으로 밥과 함께 먹으면 매우 훌륭한 궁합을 자랑한다.

얼어버린 콧속에 확 퍼지는 뜨끈뜨끈한 카레 수프의 얼큰함은 묘하게 한국 정서와 어울린다. 겨울의 홋카이도라면 꼭 먹어볼 만한 녀석.

 

지역 별미라 가격이 좀 세긴 해도 불만없이 즐길만한 음식이다. 맛은 기본적으로 보장이 되니 부담도 없고.

식사와 쇼핑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생각보다 졸리고 피곤하다. 어제까지의 강행군도 그렇고 장시간 기차 여행도 쉴 틈이 없었으니까.

90분 정도 쉴 시간이 있는데 침대에 엎드려 TV를 보니 슬금슬금 고개가 밑으로 내려간다.

날씨가 춥다 보니 들어왔다 나가는게 한층 번거롭지만 홋카이도의 마지막 밤에 징기스칸을 먹지 않는다는 건 뒷맛이 개운치 않다.

 

해가 지고 한층 추워진 공기를 마시며 눈덮힌 길을 조심조심 걸어 삿포로 역으로 향한다.

역에서 맥주공원까지 저렴하게 왕복중인 버스가 있어서 찾아가기도 편하다.

오비히로만큼이나 눈이 쏟아지고 있어서 여행 막바지의 아쉬움과 애상이 배가 되는 느낌이지만 고기와 맥주로 즐거운 마무리를 하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