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늦어지기 전에 자전거 끌고 대구로 내려가려고 나섰다.
강릉 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 주섬주섬 짐을 정리하고 출발.

출발 전엔 뭔가 상반되는 생각들이 자꾸 머릿속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1년이나 휘적휘적 떠돌아다니다 돌아와서 반년도 되지 않아 또 나간다는 건 역시 몹쓸 짓인것 같고.
그래서 여행이 아니라 자전거 회수라는 목적을 덮어 쓴 소박한 나들이라는 자기 합리화.
그리고 의외로 동해안 해안선이 자전거로 굉장히 힘들다는 수많은 블로그 포스팅이

상당히 이곳저곳 망가진 몸 상태와 맞물려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 낸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1년간 자전거를 굴려온 내가 동해안 도로를 못 갈 일은 없겠지만
여행 전의 정보 탐색은 뭐랄까, 적당히 겁 먹기엔 딱 좋을 정도라는 느낌?
워낙 고생했다, 업다운이 장난 아니다. 죽을 뻔 했다는 등등 수사가 많이 들어간 블로그가 많아서
대체 어느 정도의 난코스인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지.

장담하는데 나보다 짐 많이 얹고, 나보다 더 뚱뚱한 라이더는 없었을 거다.
짐과 내 몸무게를 합하면 100kg 가 넘으니.


1년간 자전거여행 해본 경험에 비추어 보면
10월은 축복받은 최고의 시기임에 틀림없다.
비는 적고 노숙하기에도 그리 힘들지 않은 날씨.

한적한 강릉 시내를 빠져나오니 예전 생각이 들어서 살짝 기분이 풀린다.
이젠 첫 페달을 밟던 그 때의 카타르시스가 느껴지진 않지만, 출발은 언제나 머리를 상쾌하게 하니까.

단지 살짝 오기를 부려서 카메라 장비를 좀 많이 가져온 터라
사진 찍다보면 '이번엔 좀 귀찮겠구만' 하는 생각이 자주 드는 건 사실.

모든 여행 하나하나가 다음 여행에서 덜 후회하기 위한 여러가지 실험의 일편이다.
그리고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런 여행만 하겠지.
그래도 하지 않는 것보단 덜 후회할거라고 언제나 생각하겠지.



해안도로를 살짝 달리다 보니 나타나는 강릉 통일공원.
이번 여행은 거의 완벽한 백지 상태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이런 공원이 있는줄은 전혀 몰랐다.
아마 라이딩 코스에서 보이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갔겠지.

15년전 한국을 경악시켰던 무장공비들이 침투시 사용했던 잠수정이 실물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다.
생각보다는 훨씬 컸다. 이게 전혀 들키지 않고 강릉 앞바다까지 잠행해 왔다니 허탈하다.


맞은편엔 퇴역함인 전북함이 전시되어 있다. 실물로 보는 함정이란 역시 대단하구나.
하지만 이곳 들어가려면 입장료가 필요해서 그냥 밖에서 감상하는 걸로 끝냈다.

미국에서 제작되어 한국으로 인도되고 1999년 퇴역한 함이라는데
최신함과 비교하면 뭔가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살아있는 느낌이다.
만재배수량이 3500t 이란다. 세계 최대의 항공모함인 니미츠급 조지 워싱턴호가 10만 4천t 이란것만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이걸 보니 그럼 니미츠급 크기는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군.

수치화된 데이터는 현실감이 없다는 걸 이 함정을 보니 세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서로 마주보고 전시되어 있기 때문에 재미있는 사진이 연출 가능하다.
아마 일부러 그랬겠지.

잠수정은 무기따윈 없기 때문에 실제 발견만 했다면 그 엄청난 사상사를 내지 않고 격퇴가 가능했을텐데...


잠수정 구경은 공짜라 내부로 들어가 봤다.
내 덩치로는 혼자 들어가도 거의 움직이지 못할 만큼 빡빡하다.
허리를 푹 숙여도 조금만 방심하면 머리를 박아버릴 듯.

하긴 2000톤급 잠수함도 내부는 한두 사람 겨우 줄지어 걸어갈 수 있을 정도였으니.
아, 이 녀석은 300톤급이다. 악에 받친 헝그리 특공대는 정말 무섭다.


이 녀석은 뭔가 싶었는데, 탈북한 북한 주민들이 사용헀던 배라더군.
이 정도라면 역시 들키지 않게 도망나올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서는 지구상의 어떤 피조물도 초라하기 그지없게 보이니.


통일공원내에는 편의점도 있어서 컵라면 하나 끓여먹고 푹 쉰다음 다시 출발했다.
출발하기 직전 일본 관광객을 태운 버스가 도착하더라. 가이드가 관광객들 앞에서 잠수정과 전함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굉장히 술술 쏟아져 내리는 일본어에 어울리지 않게 억양이 완벽한 한국식이다.

머리를 비우고 멍하게 들어보면 한국말 듣는 느낌이었는데, 물흐르는 일본어 설명과 함께 굉장한 괴리감을 느끼게 했었다.

다시 달리기 시작한 해안가 도로는 사방에 철책과 감시 초소가 서 있어서 과연 이곳이 한국이구나 싶었다.
바다 색깔도 조금은 다르다는 느낌이었지만, 어찌 보면 철책 자체가 관광 상품이 될 정도로 한국의 현 상황을 잘 나타내 준다.

느긋하게 달리다 보니 그 유명한 정동진이 등장.
관심이 없어서 그냥 지나치려는데, 해안가 쪽에서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계속 들려와 호기심을 자극한다.
심상치 않을 정도로 내지르는 괴성이라 뭔가 유명인이라도 온 걸까 싶어서 좀 망설이다가 방향을 틀어 정동진으로.

가 보니 보트 타고 있는 사람들이 내지르는 괴성이더군. 맥이 빠졌다.


무슨 드라마 촬영으로 유명해진 곳이라는데, 태어나서 처음 와보는 정동진은 그냥 적당히 넓은 해수욕장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미 명백한 비수기에 들어간 동해 해수욕장임에도 강릉 시내보다 사람이 더 많았다는 점이 나름 재미있었다.

끝나고 나서 이야기지만, 포항을 제외하고 어떤 곳에서도 이보다 더 많은 인파를 본 적은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산 위에 배가 놓여있길래 저게 뭔가 하고 유심이 쳐다보던 기억이 나는군.
스마트폰의 힘을 빌어 저 사공많은 배의 정체를 검색해 봤다. 꽤나 아이디어 잘 쓴 리조트라고 한다.
얼핏 다들 그렇게들 생각하겠지만 사실 배를 옮긴게 아니고 산 위에서 제작한 녀석이란다.

스마트폰 데이터량이 500m 인데다, 몇년간 동고동락한 나침반이 맛이 가버리는 바람에
지도 데이터를 자주 활용해야 하는 지금 상황에서 그런 데이터 검색은 좀 사치스럽긴 했지만.

이왕 자전거 안장에서 엉덩이를 뗐으니 슬쩍 한바퀴 둘러보기로 한다.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던 비명의 주인공.
한 번에 태울 수 있는 사람이 적어서 꽤 많은 인원이 대기중이었다.
중고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굉장히 많았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다. 휴일도 아닌데.


정동진에서 발걸음을 멈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게 해 준 것은
기쁨의 괴성도, 한량한 가을바다도 아닌, 빨래판같은 구름과 멋들어진 하늘색이었지.
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니 사실 저 곳이 진짜 바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변 중간중간에 놓여있는 흔들의자가 재미있었다.
이런 의자에서 흔들흔들 해 보는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난다.


흔들의자뿐 아니라 의자란 의자엔 전부 낙서가 빼곡하다.
이런 곳의 낙서야 뭐 애교로 봐줄 수 있으니 넘어간다고 쳐도
문화재나 자연 경관에까지 낙서해대는 행위는 참 꼴불견이지.

뭔가 동방신기를 좋아하는 중국 팬이 여기까지 온 모양인데, 정동진과 동방신기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고민 좀 해 봤다.
그리고 동방신기는 해체했나? 너무 보고 싶다니.

더더욱 의아했던 건 말끝마다 '우리' 동방신기.
동방신기 애들 할머니도 아니고 뭔 아기달래듯한 저 수식어는 뭘까.


재미있는 낙서 찾아다니는 것도 나름 신나는 일이다.
아빠를 장렬히 배신하는 자식의 낙서도 재미있고 (너네 엄마는 아빠거란다)
눈앞에서 운석이 떨어지는 지구 멸망 직전도 아니고, 평화로운 정동진에 와서
세삼스럽게 뭔 자아성찰인지 궁금했던 낙서도 재미있다.

혼자 여행해서 마음이 다잡아 진다면 난 이미 붓다와 술잔 기울이고 있을거다.
여행은 남는 거 없이 그냥 현재를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고,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건 못되먹은 버릇이라 생각.
아니 의미를 부여함으로 인해 여행의 순수성이 오히려 사라진다고 본다.

여행은 여행이고, 현대 사회에서 어떤 것보다 중요한 돈과 시간을 실컷 낭비하면서 얻는건 없는 비생산적인 행위지.
그러니까 거지처럼 움직이는 여행이라도 누구보다 사치스럽고 우쭐하고 배부를 수 있는 거다.


땀으로 범벅된 머리와 지끈지끈한 엉덩이를 식히며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정도가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만족감이 아닐까.

그리고 지랄맞은 병영체험 따위가 아니면 이런 사치는 돈으로 살 수 있는게 아니겠지.



바다쪽보다 한적한 반대쪽이 좀 더 보기 좋다.
사람이 없어서 더 그런 건지도 모르겠네.
정동진은 이 비수기에도 사람이 너무 많다. 만약 성수기였다면 돈 준다고 해도 오지 않을거다.


적당히 의미는 없어도 찍어놓으면 좀 있어보이려나 싶은 사진도 한번 찍어보고 해변가를 거닌다.


바다보다 상쾌했던 하늘을 다시 한번 올려다봐 주고 발걸음을 옮긴다.
오랜만에 탄 자전거라 그런지 역시 초반엔 엉덩이가 따끔하군.

내 몸상태에 뒤치지 않게 자전거도 사실 이곳저곳 성한 곳이 없다.
간단한 체크만 하고 튀어나온 터라, 타이어는 마모되어 민둥머리가 되어 있고
체인은 늘어나서 덜그럭거리며 100kg 가까운 무게를 지탱하는 터라 기어는 쉽게 변환되지도 않는다.

타이어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계속 덜컹거리며 위로 튀어 오르는 느낌이라, 이것만은 중간에 점검해 봐야겠다는 생각.
그러나저러나 15000km 를 달린 녀석이 타이어 펑크 한 번도 나지 않고 스포크 하나 부러지지 않은 걸 보면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정동진 바로 눈앞의 언덕은, 거리는 짧지만 엄청난 급경사다.
24단 기어를 최저로 돌려도 이 짐을 싣고서는 앞으로 나가지 못할 정도.
어쩔 수 없이 내려서 밀고 올라가는데, 그래도 좀 전에 봤던 사공이 많은 배는 가까이서 한번 보고 싶은 터라
쓸데없는 오르막을 또 15분 가까이 올라 헉헉거리며 접근한다.

적당한 위치에서 사진 찍고 다시 살짝 내려와 또 언덕을 넘는다. 어떻게든 자전거 위에 앉아서 넘을 수 있는 경사라면
30분이 되던 1시간이 되던 느긋하게 오를 수 있는데, 그 이상의 경사는 정말 고역이다. 15분만에 내려와서 다행이지.

망상해변이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곳까지는 언덕의 피곤함을 잊게 해 주는 편안한 도로다.
거의 개점휴업 상태인 길가 식당에 들어가서, 텃밭에서 일하고 계시는 주인장 부부를 직접 불러낸 끝에 육개장 한 그릇을 해치운다.
사실 들어가서 10분 가까이 혼자 서 있던 시간동안 이래가지고 도둑같은거 안 들어오려나 하는 걱정도 해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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