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하게 잠자리에 들때까지는 좋았는데 예상치 못한 적이 나타났다.
어딘가에 구멍이라도 뚫렸는지 밤새도록 모기가 출몰한 것.
처음엔 한두마리 잡고 누웠는데 이게 끝도 없이 계속 나오고 나오는 것이다.

게다가 바닷바람에 강하게 큰 녀석들인지 왠만해서는 안 붙는 눈이나 입 주변에까지 신나게 붙는다.
반대로 너무 무방비하게 달려만 드니 잡기는 편했지만 이상하게 끝도 없이 계속 나온다.
결국 새벽 4시까지 모기 14마리를 잡고 피곤에 지쳐 쓰러졌지만 그 와중에도 귀며 손이며 팔이며 계속 물린 탓에
결국 반쯤 깬 상태로 아침을 맞이하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나도 벽에 붙어있는 모기만 세 마리더라.

출발하려고 짐 챙기는데 할머니께서 물도 차가운거 받아가라고 식당쪽 정수기에서 꽉꽉 담아주신다.
모기 이야기를 하니 그렇게 들어올 리가 없는데 하시며 방 점검을 해봐야겠다고 하시더군.
그렇게 많았으면 모기약 받아가지라고 하셨는데, 새벽 3~4시에 혹시나 주무실까봐 내려가질 못했다.
어찌됐든 텐트에서 하룻밤 보낸 것보다 더 피곤한 상태에서 출발.

고래불 해수욕장 주변은 성수기때 굉장히 붐비리라는 예상이 가능한 곳이다.
넓은 주차장, 넓은 모래뻘, 고래를 잡진 않겠지만 거대한 고래상까지.
그런데 은근 꼬리의 위치가 좀 이상한 듯 하다. 고래가 저렇게 길었나?


어제 바람만 불지 않았으면 이곳에 느긋하게 잠을 청해도 괜찮을 뻔 했다.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으니 더 이상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비수기는 정말 조용해서 좋다.


한적한 도로를 달리던 도중 도로 한복판에 뱀이 뒹굴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중앙선에서 수십 센티 정도 떨어져 있어서, 자동차 한두 대라도 달렸다간 그대로 즉사할 것임에 틀림없다.
해가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지 몸이 안좋은지 아주 천천히 몸을 움직이긴 하는데 거의 움직이질 않는다.

나뭇가지 집어들고 슬금슬금 당겨서 갓길 수풀 속으로 밀어넣어줬다.
반항다운 반항도 없고 꿈틀꿈틀거리기만 해서 정상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건 거기까지.


꽤나 귀찮아보이는 산이 앞에 가로막고 서 있는 곳에서 자전거를 세워두고 숨을 골랐다.
오징어 말리는 풍경이 보기 좋기도 해서.


성수기는 밀려드는 인파로 바쁘겠지만 이곳 사람들에겐 지금도 바쁜 시기인가보다.
이제껏 달려온 거의 모든 어촌마을에서는 모두 오징어 말리느라 정신없으셨으니.

영덕, 포항쪽의 반 건조 오징어 피데기는 경상도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테고
날씨와 지형 탓인지 맛이 훌륭하다는 평이 많아 아직 조금 이른 시기임에도 자동차를 세워놓고 사가는 사람이 많았다.


이곳에서 이리저리 사진 찍으며 놀고 있으니 해안가에서 여행차림의 청년 두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고 그냥 하루정도 걸리는 거리를 여행나온 듯 한데, 그래도 슬쩍 반갑긴 하다.
어째 일본에서 만난 여행자들보다 더 소심하고 쑥쓰러워하는 것 같아서 몇마디 말도 못건네고 말았지만.


여기서부터 영덕 해맞이공원을 낀 강구까지는 조금 험난한 라이딩이 예상된다.
예전에 자동차로 와 본적이 있는데, 7번국도가 아닌 마을 어귀를 도는 구 도로는 약간 리아스식 해안의 성질을 띄고 있어서
경사도 급하고 업다운이 잦았던 기억이 나기 때문.

그래서 잠을 못자 지친 마음을 조금이라도 추스리려고 시간 좀 보내며 사진이나 찍으러 다녔다.


블로그에서 검색했던 동해안 도로의 난이도에 긴장하고 있었던 탓인지
1년간 자전거로 돌아다녔던 내 경험을 스스로 무시하고 있었던 탓인지
막상 달려보니 동해안 도로는 그냥 쉽다고 말하지 못할 뿐 어려운 코스는 아니었다.

태어나서 첫 장거리 라이딩이라면 뭐, 충분히 투정부릴 만한 코스지만
그리 많이 달렸다고 하지는 못할 나 정도의 경험만 있어도 이 길은 그냥 땀만 좀 흘리면 지나갈 수 있는 길이다.

예전에도 몇번 경험이 있지만, 여행 전에 인터넷에서 겁주는것에 너무 쫄면 안된다는 사실을 세삼 실감했다.
그렇게 어렵다고 써 놓으면 그 여행을 끝마친 자신의 가치가 좀 더 높아질거라는 무의식의 발로일까.
자전거 세계여행 준비 끝내고 인증사진 찍은 분에게 제일 많이 올라왔던 댓글이
저도 경험 좀 있는데, 그 장비로는 절반도 못가고 돌아오실겁니다. 너무 무겁고 짐많고 쫑알쫑알... 였었지.

일단 자기가 해낸 건 대단한 일이고, 남이 그런거 하려면 최대한 겁을 주는게 이쪽 사람의 본능일까.

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내가 간 곳은 준비만 하면 아무나 갈 수 있다고.
사하라 사막 마라톤? 난 그거 갈때까지 마라톤 풀코스 완주 한 번 해본 적 없다.
1년간 자전거여행? 난 지금도 자전거 타이어 교체 말고는 수리하는 방법 모른다.
운동? 내 몸무게가 지금 90kg 가깝다. 짐 싣고 달리면 100kg 넘는다.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이니. 땀흘리면 바로 픽 쓰러져 죽는 사람 아니면 못갈 길이 아니다.
무슨 극기훈련 가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가라고 만들어놓은 도로를 자전거가 못갈 일은 없다.

사하라 맴버 나침반님은 자전거끌고 융프라우도 갔다 오셨는데 뭘. 해발 3000m 가 넘는 융프라우 말이다.
내가 지옥을 경험하면서 넘었던 하코네나 키이 반도도 기껏해야 900m 정도밖에 안 된다.

힘들어서 포기할 수는 있지만 힘들어서 못 가는 여행은 없다. 사람의 적응력이란 걸 너무 우습게 보면 안된다.
중요한 건 가고 싶은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인 듯. 가고 싶은 사람은 주위 반응에 너무 신경쓰지 말길.


그러나저러나 역시 이런 해안도로는 힘들긴 하다.
사실 리아스식이라고 부를 정도까진 아니라 엄청난 난코스는 아닌데도
떨어진 체력과 더불어 구식 도로의 단점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라
저전거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데 땀 쫌 깨나 흘려야 하는 곳이다.

여름엔 고생 좀 하겠지만, 마음 느긋하게 먹고 느린 걸음걸이처럼 한 발짝씩 페달 밟는 느낌으로 올라가면
어쨌든 끌고 올라가는 것보다는 쉽게 움직일 수 있다.


언덕 정상즈음에 잘 치장된 펜션이 꽤 많다.
비수기라곤 하지만 젊은 연인들이 간간히 차 타고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펜션 측에서 만든 것 같은데, 도로 맞은편 절벽과 맞닿은 곳에 그네랑 정자 같은 것도 만들어 놓은 덕에
땀 좀 식히면서 꽃 사진도 찍고 놀아본다.


몇 개의 자비심없는 업다운을 넘나들고 나니 멀리 풍력발전기가 보인다. 아마 저 곳이 영덕 해맞이공원이겠지.
그 이름답게 저곳에서 해맞이를 보면 참 멋질 것 같은데, 대낮에 도착해서 하룻밤 지셀 수는 없으니 그냥 구경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겠다.
그건 그렇고 도로에 사마귀들이 어찌나 많은지 그거 피해가는것도 고역이다.
얘네들이 뭘 잘못 먹었나, 전부 도로에 떡하니 나와서 움직일 생각도 별로 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한다.
연가시한데 조종당하고 있는 녀석인가 싶기도 한데, 물도 없는 도로 한복판에 나와있는건 그래도 의아하다.


영덕은 먹을것으로도,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곳이 많아서
조그마한 마을이라도 있다싶으면 반드시라고 해도 될 만큼 민박과 횟집이 줄줄 늘어서 있는데
나같은 홀로 라이더한테는 크게 도움이 되질 않는다.

오후 2시가 될때까지 몇 번의 횟집에 들어가 봤는데, 혼자서 먹을 메뉴가 없단다.
회는 최소 2~3인분이고, 매운탕도 회를 시켜야 나오는 거라서.

해산물로 유명한 곳이라 횟집 말고는 음식점이 별로 없다는게 더 서글프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석면 플레이트 지붕과, 사람이 살지 않는것이 확실한 폐가의 모습이 꼭 내 심정이다.
하다못해 음식점 옆 구멍가게에 들어갔는데도 술안주와 술밖에 팔질 않아서
냉장고에 든 아이스크림이나 한개 사들고 허기를 채워야 했으니.

어제 저녁 7시에 컵라면 먹은 이후로 오후 2시까지 먹은 건 아이스크림 한개.


해맞이공원도 당연히 언덕 위에 있어서 올라가는건 좀 귀찮았다.
하지만 여기서 큰 착각을 하고 말았는데
그냥 해안도로만 스윽 달리면 그 옆에 있는게 해맞이공원인줄 알았지.

내려오고 나서야 알게 됐는데, 그 도로에서 좀 더 산쪽으로 올라가면 바람개비공원이라든가 볼거리가 더 많았다고 한다.
신나게 바람을 타고 내려오고 나서야 그 표지판을 봤으니,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뭐, 영덕은 내 서식지에서 그리 먼 곳도 아니니 언제 가더라도 갈 기회는 더 있겠지라고 자조하는 수 밖에.


지금쯤이면 바다보단 산 쪽이 장관이겠지.
본격적인 가을을 맞아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산으로 산으로 몰려든다고 하더라.
이렇게 혼자 다니는 것에 익숙해지면, 앞으로는 어딜 가든 비수기만 골라 움직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가끔 성수기 관광지와 맞닥뜨릴 때가 있었는데, 컬쳐 쇼크에 가까운 인파에 정신이 혼미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도시에서 일상 생활을 보내다가 간다면 그리 문제될 것 아니지만,
하루 많아봐야 열댓 명 정도의 사람과 얼굴 스치며 지나가는 여행 중에
갑자기 수만 명의 인파에 휩쓸리면 가끔 스스로 나뭇가지에 매달린 새끼고양이가 이런 느낌일까 생각하기도 한다.


해맞이공원은 홀로 고독을 즐길만큼 한가하진 않았다.
주차장은 널널하지만 그래도 여남은 명 정도가 꾸준히 유지되고 있었으니. 더불어 간이 매점도.
주위를 둘러보며 사진을 찍으니 이 공원은 언덕 위쪽부터 아래로 나 있는 산책로가 즐길거리인 듯.

일조량의 차이 때문일까, '영덕해맞'과 '이공원'의 빈부격차가 안타깝다.


자전거로 힘겹게 언덕 올라온 터라 농담으로라도 자전거 세워놓고 혼자 산책로로 내려가고싶진 않다.
그냥 바람 쐬고 전망대에 올라가보고 사진이나 찍고 갈 생각.
이 때 조금만 주위를 둘러봤다면 이 바다 반대편에 다른 여러가지 시설물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텐데.
배가 빈 만큼 머릿속에도 든게 없었다는게 적당한 표현일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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