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와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울진과 영덕은 서로 대게의 원산지라고 주장하며 은근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실제로 예전부터 대게 많이 잡히는 쪽은 울진이었는데, 물류센터 역할을 하던 곳이 영덕이라 영덕 대게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뭐, 대게가 고양이처럼 영역 가지고 살아가는 애들도 아니고 해서
딱 붙어있는 울진과 영덕의 지리적 특성상 어느 쪽이 더 대게마을이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곳인가를 판단하는 건 그닥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색하긴 하지만 과거 식민지 시절 영국과 프랑스가 지네들 멋대로 선을 죽죽 그어버리는 바람에
아직까지도 온갖 내전과 폭력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모습을 느꼈다고 하면 과장된 생각일까.

일단 사진에 나온 대게라면 냉동보관해서 3~4일 정도는 맛있게 뜯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더 앞서긴 했다.


도 경계를 넘은 뒤부터는 크게 힘들다고 생각할 업다운도 없어서 몽롱한 기분으로 전진을 게속하던 중
표지판에 관동팔경의 하나라는 월송정이 나타나고나서 조금 고민했다.
이제껏 느긋하게 달려온 터라 예상했던 시간보다 많이 지채되었는데, 이런 거 보고 가도 괜찮을까 생각 좀 해봤는데


묘하게 날씨도 좋겠다, 멍하니 달리다보니 사진도 별로 찍은 것 같지 않아서 가 보기로 했다.
월송쪽으로 가기 전 모습을 드러낸 소나무숲도 꽤나 멋졌다.
이곳 소나무는 곧게 뻗은 황토빛 몸통과 푸른 솔잎이 멋진 조화를 이루어 그 명성이 높다.
아버지 친구분 중에는 평생 이곳의 소나무만 찍는 프로 사진가분도 계시단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월송정으로 향하는 길에 위치한 정원을 즐기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듯.
정확히는 평해 황씨 시조 대종회 소유의 정자와 연못, 구름다리가 어우러진 고즈넉한 정원이다.
이곳의 소나무는 전국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아름답다고 하더군.

문은 잠겨있지만 낮디 낮은 흙담 사이에 샛길이 얼마든지 나 있으므로 마음껏 즐겨도 된다.


월송정으로 향하며 접하는 수많은 소나무숲은 확실히 독특한 매력이 있다.
그닥 기개가 느껴지진 않지만 아담하면서도 하늘로 쭉쭉 뻗은 소나무 군체들은 다른 곳에서 쉽게 접하기 힘든 풍경.
슬슬 본격적으로 익어가는 벼이삭에 반사되어 한층 더 황금색으로 물들어진 태양빛이 새어들어오는 숲의 모습은 심히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러다가 월송정에서는 감동을 못받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관동팔경이라고 해서 기대를 한 탓인지, 실제로 월송정의 첫 모습은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다.
신라시대부터 이어졌다고는 하지만 원형은 파괴된지 오래고, 지금 서 있는 정자는 1980년에 만들어진 것이라
정자 자체의 운치를 느끼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그나마 멋들어진 소나무숲이 감싸고 있어서 음주가무엔 부족함이 없겠지만.


현재는 '越松亭'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일간에서는 '月松亭'이라고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마음에 든다.
보름달 즈음에 정자에 앉아 달빛에 비치는 파도소리를 안주삼아 술을 즐기는 것이 이 곳에 어울릴 듯한 느낌이라서.


60년대 복원했지만 복원 상태가 고증과 전혀 맞질 않아 80년대 다시 개축했다고 하는데
신라, 고려시대 양식에 대한 문헌이 남아있을리가 없으니 실제로는 거의 조선후기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아쉬운면이 없잖아 있고, 조그만 슈퍼 하나 외엔 아무런 편의시설도 없는 주위 모습을 보면
이게 과연 관동 팔경이라는 이름을 붙인 관광 명소인가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당연하게도 관리 사무소 같은 건 있지도 않으니 문화재적 가치가 전무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선전하는 듯 하다.


지금 남아 있는건 단지 '술마시고 놀기 좋은' 장소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 하다.
천 년도 넘은 예전 그 월송정 주변의 바닷가와 소나무숲은 아마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겠지.
그래서인진 몰라도 바닷가가 정자에서 꽤 먼데다가 소나무에 가려있어서 '越松'이라는 이름이 조금 아쉽다는 느낌이 든다.


아주 아담한 관광 회사에서 온 건지 아주머니 서너 명을 데리고 월송정을 설명하는 가이드분도 있었다.
정자 위에서 바라본 모습. 이곳은 아무래도 달이 뜰 무렵이 그 명성에 걸맞는 시간이 아닐까 싶다.
여행을 함께 한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 오늘 일정은 여기서 끝내고 근처 슈퍼에서 술이나 좀 사와서 달을 보며 즐겼을 것이다.

혼자서도 물론 가능한 일이었지만 아무리 혼자 움직이는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이런 곳에서 달을 벗삼아 혼자 홀짝이는건 내공이 필요하다.


하룻밤 묵어가기엔 최적의 장소였지만 아직 시간이 이른 터라 조금 더 달려보기로 했다.
아무리 비수기라고 해도 너무 쓸쓸한 모습의 월송정은 아쉬움을 많이 남겼다.

이곳의 진가는 아무래도 밤에 발휘되는 듯 하니, 다음엔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저녁즈음 와 보는게 좋을 듯 하다.


본격적으로 익어가는 벼를 바라보면서 시간 난 김에 일본의 소야노씨 가족한테 전화를 걸어 봤다.
예전 태풍 때 전화를 받지 않아서 뭔 일이라도 생긴 거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마침 그때 하와이로 놀러 가셨다고 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기억이 난다.

부부끼리 간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계속 천문대에서 일하시고, 따님과 둘이서 다녀왔다네.
재활치료를 위해서는 나가노의 매서운 산지보다 푸근한 하와이가 시설이나 환경면에서 훨씬 좋다고 하셨던 말이 기억나서
이번엔 아마 사전 탐사 겸 관광으로 가신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 본다.

여담으로, 따님 얼굴이 모 일본 연예인과 완전히 판박이다. 머리 자르러 가면 싸인해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


저녁이 되니 좋던 날씨는 어디 가고 바람이 강해지기 시작한다.
예전에 몇번 경험했던, 자전거가 휘청거릴 정도의 강풍이다.
느긋한 하루가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저녁부터 바람이 강해지면 노숙이 굉장히 힘들어진다.

일본에서 오기로 강풍 속에서 텐트를 친 적이 있었는데, 귀마개도 소용없고 텐트 전체가 밤새도록 휘청휘청거려서
거의 한 숨도 못 잤던 기억이 난다. 자연과 맞짱뜨는건 부질없는 짓이라는 진리를 뼈저리게 느꼈던 한 때.

슬슬 가게 안에 들어가기도 민망할 냄새가 몸에서 솔솔 올라오는 것을 보니 바람이 더 심해지기 전에 민박이나 한번 찾아볼까 하며 전진.
해안가엔 비수기라 문 닫긴 했어도 민박이 그럭저럭 눈에 들어왔는데 이곳은 의외로 그런 게 별로 없었다.
바다가 보일랑 말랑 하는 언덕 위쪽에 그럴듯한 모텔이 있어서 슬그머니 들어가 말을 걸어보니
나이 지긋하게 드신 노부부께서 혼자 자전거끌고 왔으니 싸게 해주신다며 만원이나 깎아주셨다. 비수기 가격까지 합쳐서 2만원.

예전에도 자전거 여행하는 사람이 묵은 적이 몇번 있단다. 이곳은 원래 바람이 강하다고 하시니 아마 비슷한 이유로 온 사람들 아닐까.

당연히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짐을 끌고 2층까지 올라가는게 좀 힘들긴 했지만
주인장께서 그것도 고려해 계단에서 가장 가까운 방을 준비해 주셨다. 역시 뻣뻣한 호텔보다 이런게 좋구나.
근처 슈퍼에서 컵라면과 과자, 음료수를 사온 후, 내 모니터보다도 작은 볼록TV에서 나오는 이름모를 버라이어티 쇼를 보며 배를 채웠다.

2중으로 된 창문조차 무서울 정도로 덜덜 떨리는 걸 보니 이곳에 들어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삐그덕거리는 몸을 끌고 욕조에 세제를 듬뿍 풀어 빨래를 한 후 욕조에 들어가 몸을 녹이고 슬금슬금 침대로 들어간다.
한국에서 모텔이라고 하면 다들 그렇겠지만 뭔가 얼룩이 군데군데 남아있는 이불이 조금 신경쓰이긴 했다. 뭐 그래도 감지덕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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