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명이 몰려서 혼잡스럽던 가게를 대충 정리하고 일반 고객들도 들어올 수 있도록 자리를 돌려놓는다.

8명이 테이블에 둘러앉자 이시다씨가 이곳 Mirai 의 주인장분을 소개해 주셨다.

 

이곳 주인장분은 남극의 오로라 이야기를 듣고 거기에 빠져들어서

29세때 남극에 간 후, 호화여객선 '아스카'에 일식주방장으로 들어가, 배로 세계일주 9번, 반주 12번, 세계 70여개국을 돌아다니셨다고.

2년전에 이곳 요코하마에서 작은 레스토랑을 차리고, 여행 매니아나 여객선 매니아들이 모여들 수 있는 곳을 목표로 하고 계신단다.

 

좁은 레스토랑의 벽이란 벽은 주인장분이 타고 세계를 누볐던 아스카호의 모습과, 영롱한 남극의 야경사진이 빼곡히 걸려있다.

실제로 남극기지에서 생활한 적도 있다고. 이건 뭐, 이시다씨 이야기 들으러 왔더니 가게 주인장부터 보통 인간이 아니다.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기도 했고, 여객선 셰프라는 직업상 요리는 상당한 수준급.

일식 주방장이었다고 하던데 특이하게도 일식과는 그닥 관계없어보이는 인터내셔널 푸드가 많다.

 

그중에서도 추천하는건 남극 드라이 카레라고 한다.

원래 일본에서 드라이 카레는 우편물을 우송하는 우편선에서 만들어먹기 시작한 것이 원류로

100년에 달하는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의 선박여행 식사메뉴중 전통있기로 유명한 녀석인데

주인장분의 경험을 살려서 개량, 남극 드라이 카레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사실 토크 라이브 중에도 드라이 카레를 주문해서 먹는 사람들이 있었고

주인장분도 마음껏 시켜먹어주시면 가계에 도움이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처음부터 뒤풀이 참가를 계획하고 왔고, 돈 아끼려고 조식을 마구 퍼먹고 온 터라 주문은 하지 못했다.

 

사실 왕복 교통비, 토크 참가비, 뒤풀이비, 필수 음료 주문비 등등...

여기 오기위해 투자한 금액을 전부 합치면 거진 10만원 정도는 나오기 때문에, 가난한 나로서는 무시하기 힘들다.

애초에 항공권조차 공짜인 여행이라서 6일간의 도쿄 체류 총비용이 40만원정도였고, 그 1/4 을 이곳에서 써버린 것이니.

제대로 된 요리는 인스턴트 풀어서 던져주는 싸구려 요리와는 좀 많이 다르기 때문에

이 레스토랑의 요리 수준을 보면, 가격이 비싼것도 이해가 안가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볶음밥 위에 스팸을 구워서 김으로 살짝 싼 이곳의 인기메뉴 스팸초밥이 한국돈으로 2개 9천원이나 할 정도로

독특한 맛체험에는 그만한 대가를 치뤄야 하기 때문에, 극빈여행중인 나로서는 선뜻 주문하기 힘든 곳이다.

 

다음엔 자금을 좀 넉넉히 들고 가서 (아무래도 여행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가면 좋을텐데)

이곳에서 진득하게 세계 각지의 레어 맥주와 함께 식사를 즐기며 이야기를 좀 했으면 싶다.

 

뒤풀이 식사는 천천히 조금조금씩 메뉴가 코스로 나왔는데, 그중엔 드라이카레를 밀가루피에 싸서 튀겨낸 녀석도 있어서

다행히 이곳의 최고 인기메뉴 드라이카레를 잠깐 맛이라도 볼 수 있었다. 진한 향기가 콧속까지 확 퍼지는게 느껴진다.

 

 

 

일본은 일본이다보니 양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다양한 메뉴가 차례차례 나오는 덕에

조금씩 조금씩 맛을 음미하는데는 더할 나위 없다. 혼자 와서 이런 메뉴를 전부 맛볼수는 없을텐데

뒤풀이 개념으로 단체식사를 하니 여러가지 맛 볼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일단 이시다씨와 와이프분은 그러려니 하고 재쳐두더라도, 이곳에 남은 나머지 6명이라면

당연히 여행을 싫어할 리가 없는 매니아 계급이라서, 서먹서먹한 첫인상 역시 여행 이야기로 풀어나가는게 제일 쉽다.

가뜩이나 낯가림이 심한데, 일본인들 사이에 혼자 끼여있다보니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수가 없었는데

다행히도 맞은편의 청년이 스스럼없이 가볍게 말을 걸어줘서 혼자서 황야의 늑대 역할을 하지 않고 참가가 가능했다.

 

이야기의 중심은 이시다씨가 될 경우가 많았지만, 다들 한사람씩 자기소개를 하고

서로서로에 대해 물어보고 하다보니 이시다씨도 그냥 평범한 동아리 회원같은 느낌으로 끼어들어온다.

세계일주에 대한 의문점에는 당연히 이시다씨가 이이기를 이끌어가지만, 사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여행 초보자는 아니니까.

 

남성 5명, 여성 3명으로 이루어진 인원이었는데, 젊고 약간 수줍은듯한 여성분 외에 나어지 한 분은

본인은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남편마저 질질 끌려갈만한 행동력넘치는 분인듯 하다.

여행 별로 가본적 없는데~ 라는 식으로 운을 떼도, 막상 들어보면 남자 저리가랄 정도로 갈곳은 다 가보는 듯.

 

이시다씨가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주인장분한테 그거 없냐고 물어본다.

한 명당 한 잔씩 돌리기엔 아무래도 가격이 가격이라서 불가능하고, 주인장분이 위스키로 보이는 술을 얼음과 함께 한잔 내놓는데

이 얼음이 1만 5천년전 만들어진 남극의 얼음이라고 한다. 다들 눈을 말똥말똥 뜨고 귀하신 몸의 행차에 주목한다.

 

단순히 남극의 얼음이라는 점 때문에 귀한게 아니고, 이 1만 5천년전의 얼음은 미네랄 워터와 달리 불순물이 거의 포함되어있지 않은

소위 자연발생한 증류수와 같은 얼음이라는 것. 그래서 위스키의 맛에 변화를 주지 않기 때문에 매니아들에게 호평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녀석은 눈이 내려 쌓이고 쌓인 압력으로 생성된 얼음이라 보통 얼음보다 기포가 훨씬 많다.

그래서 위스키에 이 얼음을 사용하면 그 구멍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기포덕에 맛이 부드러워진다고. 이름값이 아니라 진짜 고급얼음이란다.

 

 

 

다들 귀를 한번씩 대 보고 조금씩 마신 후 옆자리로 넘긴다. 나를 제외하면 다들 술 굉장히 좋아하는 듯 해서

음식 먹는 도중에도 각자 술을 마구마구 주문해서 마시고 있는데, 이 녀석은 워낙 귀해서 그렇게 마실수는 없는 듯.

 

맞은편에서 가볍게 말걸어줘서 나를 도와주는 세이야 씨가 친절하게도 그 술을 들고 포즈를 취해 준다.

얼굴근육이 굳어버린 나와는 달리 표정이 아주 크게 변화해서 사진 찍는 맛이 난다.

나야 뭐 술맛을 잘 모르지만, 귓가에서 느껴지는 탄산소리와 함께 가볍게 넘어가는 위스키 맛이 훌륭했다는 건 이해할 수 있다.

 

참고로, 이 세이야 씨는 25살 쯤 되었나, 15살때부터 자위대에 들어가서 지금은 이곳 요코하마 근처의 해군기지에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이시다씨 책을 읽고 팬이 되서 자주 만나다 보니, 이시다씨는 이분을 '고릴라'라고 부른다.

'세이야'라는 이름은 '聖夜' 라고 쓰는데, 감이 잡히는 분도 있을 듯.

생일이 크리스마스 이브라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 사람의 쾌활함에는 부모도 한몫 한 것 같다.

 

얼핏 봐도 쾌활한 청년으로 보이는데, 실상을 파고들어가보니 쾌활한 정도가 아니라 좀 무서운 사람.

어느날 좀 심심해서 무단으로 자위대 빠져나와서 자전거로 신나게 무단여행중에

도랑에 크게 굴러떨어져서 무릎뼈가 깔끔 깨끗하게 살을 찢고 튀어나오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고.

그런데 병원 가면 무단 탈주한게 자위대 귀에 들어갈까봐 겁이 나서 그 튀어나온 뼈를 그냥 손으로 다시 집어넣고

거기다 스카치 테이프를 둘둘 두른 후에 그냥 복귀해 버렸단다.

 

그러고 몇주 지난 후에야 병원을 다시 찾아서 무릎에 철심 하나 박아버렸다는 기묘하고도 이상한 이야기.

사람들이 믿질 않으니 바지 걷어서 그 날의 상처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거 사람 맞나?

 

그만큼 활동력도 있고, 체력은 거의 괴물같은 사람이라서, 맘만 먹으면 세계일주같은건 그냥 취미활동으로도 끝내버릴 듯 하다.

오키나와 출신이라고 하는데, 역시 지역 특유의 쾌활함은 사람의 DNA 속에도 녹아있는 것일까.

공부를 한 적이 없어서 자긴 바보라는 말을 쉽게쉽게 꺼내곤 하는데, 이런 건 바보가 아니라 순수하다고 표현하는게 나을것 같다.

내가 '일본에서 이렇게 주절거릴때, 뭔가 틀리게 말하는게 아닌가 싶어서 무심결에 조심하게 된다' 고 말을 하니

'일본사람들도 다 틀리게 말해요' 라고 웃더라. 사실 내가 배운 문법을 적용시켜보면 그 말이 틀리진 않다.

 

하긴 어디나 마찬가지겠지. 그 나라 말을 제일 잘못 사용하는건 언제나 그 나라 사람이다.

 

 

 

내 바로 옆에 앉은사람은 척 봐도 아티스트같아 보이는 사진가 신 씨.

주드 로 같은 살짝 벗겨진 머리에 가늘고 긴 체형, 머릿속에 그려지는 포토그래퍼의 전형같은 분위기다.

실제로 카메라 갖고 온 사람도 나와 신 씨밖에 없었다. 캐논의 5D Mark 2 를 들고 있다.

명함을 한장 받았는데, 뒷면은 자기가 찍은 흑백사진을 멋지게 인쇄해 놨다. 나도 이런 명함 하나 만들까 싶었는데

명함 뒤에 당당하게 내밀만한 작품이 없으니 좀 더 노력한 후에나 생각해 봐야 할듯.

 

이분도 여행을 좋아해서 자전거로 중국에서 시작해 인도까지 몇달 달려봤는데

좀 더 제대로 하고 싶어서 돌아온 후, 이시다씨같은 세계일주를 계획중이라고 한다.

다들 이렇고 그렇고 한 여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풀어내는걸 보니

혹시 나는 여기 낄만한 인간이 아닌건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기 시작한다.

난 뼈가 튀어나왔다고 그걸 맨손으로 집어넣고 테이프 발라버릴만큼 호탕하지도 않으니까.

 

하지만 뭐, 자기소개할때 일본일주 이야기와 사하라 마라톤 이야기 하니 다들 놀라주는 것 같아서

포장만 잘 하면 나도 대강 이 사람들하고 비슷한 레벨이라고 속여넘길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도 생긴다.

 

이시다씨 옆엔 와이프분. 결혼하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신혼여행은 아프리카로 갔다고. 반려자가 될 만한 사람과 공유하고 싶은 풍경이 사막이라, 그거 진짜 공감간다.

 

사실 와이프분은 이시다씨와 결혼하기 전엔 한 번도 여행이란걸 해 본적이 없다고.

하지만 한번 맛들이고나서는 이시다씨보다 더 나가고싶어서 고생중이란다. 여행이란게 그렇긴 하다.

시모네타라고, 한국어로는 외설적인 농담이라는 의미인데, 이시다씨도 한 외설 하지만 와이프분은 그걸 쿨하게 받아넘겨서

아무런 데미지가 없다고 한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농담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행복해 보이니까 그걸로 됐겠지.

 

일본일주한 경험으로 한번 물어봤는데, 이시다씨 말로는 일본이나 한국정도 지형은 난이도로 치면 세계 최정상급이라고.

일본이나 한국 일주할 정도면 전세계 못가는곳은 없을거라 하신다. 그 말을 들으니 조금 위안은 된다.

사실 세계일주 가는건 내가 아니고, 나침반님은 융프라우도 자전거로 오르신 분이라 별 의미가 없긴 한데.

 

세계일주의 힘든 점은, 지형의 난이도뿐만 아니라 자전거를 탈 수 없는 노면상태가 많다는 것.

95000km 의 주행거리라고는 하는데, 사실 1만km 정도는 걸어서 간거라고 한다.

도중에 자전거 앞프레임이 완전히 박살나 버리는 바람에, 그 50kg 짐과 자전거를 짊어지고 15km 넘게 걸어간 적도 있다고.

죽는구나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고 하는데, 나같으면 정말 때려치우지 않았을까 싶다.

 

 

 

제일 왼쪽분이 대장부(?) 여성분이고, 중간분은 이제 여행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분.

오른쪽의 훈남분은 역시 요코하마에 살고 있는 분으로, 카메라회사 캐논에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내 옆의 신 씨가 캐논 카메라를 꺼내들자 눈이 빛을 발하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나한테는 농담으로 캐논 써주세요라고 하는데, 사실 카메라쪽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부서라고.

신 씨가 카메라 좀 싸게 넘기라고 말했을때도 자기 구역이 아니라서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지금 여기 남은 사람들은, 자전거로 1년간 여행하는 나 정도가 지극히 정상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캐논훈남 역시 소싯적엔 어디나 훌떡훌떡 잘 돌아다녔고

여행 준비겸 해서 지금도 운동 꾸준히 하고 있으며, 옆의 자위대 세이야 씨 못지않은 괴물체력을 가지고 있다.

캐논 다니며 월급도 나이에 비해 안정적으로 잘 벌고 있는데 훗날을 위해 붓고 있는 보험금 때문에

생활이 빠듯하다는, 착실함의 표본을 보여주는듯한 생활력의 소유자.

 

외가 팔촌쯤 되는 친척이 한국사람이라고 한다. 친척 결혼식때 한국에 한번 가본적이 있다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요리도 차곡차곡 잘 나온다. 한국의 페이스에 비하면 좀 천천히 나오는 편.

먹는데 집중한다면 느린 페이스지만, 이야기를 중심으로 곁들여지는 느낌의 모임이니 이 정도 페이스도 괜찮다.

 

마지막으로 나온 피자는, 처음 외관만 봤을때는 좀 엉성한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한조각 집어먹어보니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맛있다. 정말 맛있다.

바삭바삭한 대신 피골이 상접한 도우와 달리 씹는 감촉도 좋고, 토핑들은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며 역할을 다한다.

나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많았는지, 한조각 먹고나서 '어라? 맛있다!'를 연발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거 주인장분이 들으면 '그럼 먹기전엔 맛없어 보였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그런 리액션이라서 약간 긴장했다.

 

아무튼 조그만 가게의 수제 피자는 어딘가 어설픈 느낌이 남아있다는 경험을 몇번 했던 나로서는

이만큼 완성도 높은 피자는 요 근래 처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진짜 맛있었다.

그냥 먹으면 그렇게도 맛없던 아보카도를 이렇게 쓰는구나 감탄도 할 수 있었고.

 

주인장분의 심상치 않은 이력도 그렇고, 훌륭하게 구비해놓은 세계 각지의 술도 그렇고

어디가서 요리사라고 칭해도 결코 부끄러움 없는 실력으로 만들어내는 요리도 특색덩어리라

다음엔 누구하고 같이 가더라도 이곳을 꼭 찾아와서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흐르고 점점 이야기가 무르익어가면

항상 그렇듯이 나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내 언어회로는 1:1 대화에만 특화되어 있는 듯, 다수의 사람들과 대화하는건 타이밍 잡기가 너무나 어렵다.

대신에 듣는건 어렵지 않아서, 갑자기 주제가 끼어들어와도 얼마든지 대처할 수는 있는데...

 

이름만 잘 가져다 붙이면 반사회성 장애의 일종으로 정의할 수도 있겠는데

본인 스스로는 별 신경쓰지 않고 있다. 병이라고 부른다면 뭐, 내가 병자라고 해서 바뀌는게 있나.

어렸을때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스퍼거에 근접하는 성격이었고,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정신과의사한테 진단서 한장쯤은 끊을 자신이 있다.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세상은 살기 불편한 곳이고, 무차별 살인마가 되지 않을 자신쯤은 있으니 인생 별 문제 없을거라 생각.

 

다행히도 다들 사진찍는데는 큰 저항감이 없는듯 해서 조금씩이나마 셔터를 눌렀다.

한국에서는 사진찍는데 워낙 경기일으키는 사람이 많아서 점점 소심해지는데

옆의 신 씨가 내 카메라 들고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이시다씨가 내 카메라로 내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물론 블로그 방침상 본인 얼굴은 올리지 않겠지만.

 

사진 너머로 보이는 점원 아가씨가 열심히 이리저리 뛰며 서빙중이었는데

그래도 12월이라고 산타복장을 하고 있는게 뭔가 대견해 보인다.

좀 더 용기있게 나갔다면 기념으로 저 분 사진도 한장 남길수 있었을 법 한데.

 

 

 

신 씨가 내 카메라로 찍은 사진.

수동렌즈긴 하지만, 이 사람한테야 내가 뭐라뭐라 필 입장이 아니다. 어쨌든 프로 사진가니까.

신 씨는 24-105 렌즈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엔 내가 가진 렌즈가 35mm 단렌즈라는데 조금 놀란 듯.

단렌즈치고는 무식할 정도로 큰 녀석이기도 하고, 거기다가 모터가 없는 수동렌즈라서.

 

한국 렌즈 제작사 삼양이 만든 순수 한국렌즈라서 일본에서 본 적도 없을거다.

수동렌즈라서 불편하긴 하지만, 가격 저렴하면서도 화질은 수백만원짜리 렌즈보다도 더 뛰어난 녀석이라 애용중이다.

 

 

 

뒷풀이가 길어졌는지, 일반 손님들도 차례차례 들어오기 시작해서

더 이상 있으면 폐가 될까봐 다들 주섬주섬 일어난다.

 

일반 손님들 오기전에 레스토랑 풍경을 좀 더 여러장 남겼을면 좋았을텐데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그 생각을 하지 못한게 이번 여행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심지어 1인용 조그만 화장실 안에도 빈틈없이 빡빡하게 사진이 걸려있었는데.

 

인생을 멋지게 사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구나 생각하며 조금이나마 레스토랑의 풍경을 담는다.

저기 액자에 보이는 여객선이, 주인장분이 몸담았던 '아스카' 호. 지금은 2호도 나왔다고 한다.

 

배에서 인생을 보낸만큼 여객선 세계여행의 매력에 대해서도 한참 열띤 토론이 벌어졌는데

사실 저런 여객선말고 아주 싼 녀석으로도 세게일주는 할 수 있단다.

하지만 그런 곳은 대부분 공동 침실인데, 거기서 큰 문제가 생긴다고.

만에 하나 성격이 안맞는 사람과 룸메이트가 되어버리면, 거기서 세계일주 끝날때까지 받는 스트레스는 말로 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런저런 토의 끝에 '여객선 세계여행은 나이 좀 더 먹고 자금 여유있을때 해도 늦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한 듯.

 

 

 

이시다 씨만 바라보고 달려온 요코하마인데, 막상 와보니 '끼리끼리 모인다'는 속담을 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나를 너무나도 초라하고 평범한 소시민으로 보이게 만드는 사람들이 포진해 있으니

좀 더 멋대로 살아도 별 문제 없겠다는 위험한 생각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듯 하다.

 

나가기 전 주인장분께 사진 한장 부탁하고 인사 나눴다.

이제부터 도쿄든 요코하마든 근처 오기만 하면 이곳은 일순위로 찾아오겠다고.

본인도 이야기 나누고싶은거 많으니 꼭 찾아오라고 당부를 하셨다.

 

실제로 이곳엔 여행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도 하고

프로젝터를 이용해서 여행 좋아하는 대학 교수들마저 토크쇼를 하는 등 나름 단단한 매니아층을 지닌 곳이다.

일본 TV 에서는 1년에 8~9번 정도는 소개되는 곳이기도 하고. 어딜 뜯어봐도 내가 단골이 되지 않을 이유가 없을 정도로 취향에 맞는 곳.

 

원전사고만 아니었으면 지인들 많이 데리고 갈 텐데,

사실 이제 도쿄 부근은 누가 가고싶다고 요청하지 않는 이상은 나 혼자 가게 될것 같아서 아쉽긴 하다.

 

주인장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 뒤풀이 팀은 밖으로 나와서 칸나이 역을 향해 걷는다.

사실 나를 제외한 대부분은 요코하마 부근에 살고 있는듯. 나는 도쿄로 간다고 하니 이시다씨가 도쿄 어디 살고 있느냐고 묻는다.

살짝 말이 엇나갔나 싶었는데, 도쿄는 며칠 전에 왔고 살기는 한국에서 산다고 하니 조금 놀라는 눈치다.

그럼 예전에 일본에서 산 적이 있구나 라고 말을 하는 이시다씨의 낌새로 봐서는, 맨날 하는 그 레퍼토리가 나오는 느낌.

일본에서는 산 적이 없다고 하니 그런데 왜 그렇게 일본어가 술술 나오는거냐고 다들 놀란다.

나머지 일행들이야 그렇다 치고, 이시다씨는 내가 한국서 메일 보낸거 알텐데 왜 그러는지... 아마 사소한건 까먹었을지도.

 

지금까지 다들 내가 도쿄에 살고있다고 생각했나보다. 이시다씨 보려고 한국서 비행기타고 여기까지 왔다고 하니 놀라는 눈치.

사실 이시다씨 때문에 도쿄 온것은 아니고, 조금 순서가 바뀌긴 했지만 어쨌든 이번 토크 라이브가 제일 큰 목적이긴 하다.

 

나는 기왕 요코하마까지 왔으니 뭐라도 유명한거 하나 둘러보고 가야겠다고 말하니

이시다씨가 그럼 라멘 박물관이지 라고 단언해 준다. 다행히도 밤 늦게까지 하기 때문에 지금 출발해도 문제없다고.

어디로 향하든 일단 모두들 칸나이 역까지 가서 헤어지기로 하고 조금 싸늘해진 요코하마의 저녁거리를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