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붐볐을테지만, 9시가 다 되어가는 일요일 밤이라 사람들이 별로 없다.

입구쪽도 옛날 방식이라 그런지 제대로 안내표시가 없어서, 어디까지 내려가야 하는지 모르는 바람에

되는대로 지하1층의 어느 조그만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예상하지 못한 골목이 나온다.

 

아마 이곳이 정식 루트는 아닌듯 한데, 그러나저러나 아무 관계없다. 여긴 그냥 구경하고 라멘먹으면 되는 곳이니까.

 

운이 좋았다고 할까,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나타나는 옛날 구멍가게의 모습은 굉장히 인상적이다.

내가 어릴때는 이런 가게가 군데군데 있었는데, 정말 놀랄 정도로 재현도가 높다.

 

 

 

안에 들어가서 사진좀 찍어도 되겠냐고 물어보니 마음껏 직으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내 추억과 상당부분 겹치는 이 가게 안에서 유일하게 별로 겹치지 않는 요소가 가게 주인.

이곳의 할아버지는 굉장히 서글서글하고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는 타입인데

내 기억에, 예전 그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그렇게까지 친절한 표정을 지었던 적은 없었다.

 

이시다씨가 좀 전에 역에서 '그곳에 가면 자기도 굉장히 그리운 느낌이 든다'고 했었는데

과연 그럴만도 했다. 사실 한국에서도 학교앞 문구점에 아직 이런것들 팔고 있지 않으려나.

 

내 경우는 학교 문구점보다, 집 앞의 재래시장 귀퉁이 3~4평도 안되는 쪽방 가게에서 이런 것들 사먹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조립 로봇 장난감조차 50원짜리가 있었던 시절이니까. 500원짜리 프라모델은 각오 단단히 하고 사야 했다.

 

모양만 봐도 대충 한국의 소위 불량식품들과 다를게 없는 친근한 모습이다.

단지, 처음엔 참 정겹고 즐겁게 구경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조금 현실적인 생각이 머릿속에 똬리를 트는 기분.

 

이 사람들의 추억과 나의 추억이 이토록 겹쳐지는 것은

결코 쌍방간의 호의나 순수한 의미에서의 교류로 인해 생성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해방후 40년이 넘었던 그 시절조차 여전히 일제의 흔적은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는 형태로 사람들의 생활속에 녹아있었던 것이다.

 

이런 추억을 향유하는 그 감상적 즐거움조차 분노로 바꾸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어찌됐든 유년시절의 추억이고, 그저 맛있고 신기한 과자들을 싸게 먹을 수 있어서 재미있었던 기억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머리가 굵어지고 난 지금 회상해본다면

그 정형화된 이미지의 근원에 훨씬 복잡한 역사의 흔적이 세겨져 있음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

 

역시 내가 쓸데없이 네거티브에 꾸질꾸질한 성격인 걸까.

몇십년만에 다시 마주하는 추억의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한 켠에 침울해지는 마음이 자리잡는다.

 

 

 

얼굴은 냉정하게 유지하는데 일가견이 있지만

머릿속의 감정을 정리하는건 어쨌든 쉬운 일이 아니다.

조금 더 머리를 비우고, 그냥 순수하게 이곳 라멘 박물관의 옛 거리풍경을 즐기는데 집중하려 한다.

 

슬쩍 가게를 둘러보니, 그때 그 시절만큼 싼건 아니지만 그래도 동시대의 편의점보다는 저렴한 가격대를 유지하고 있다.

이 정도면 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괜찮은 가격대. 아무래도 입장료까지 받는 곳이다 보니 커버가 되는 듯.

추억의 불량식품에 사진빨도 잘 받고, 가격도 싸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다.

입구에 비치된 바구니를 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집어갈만한 녀석을 찾아본다.

 

 

 

아무리 싸다고 해도 손이 가는대로 마구 사버리면 의외로 돈을 써버리게 되는 것이 이런 불량식품류.

이곳에 왔다는 기념 정도의 의미로 적당히 세 개 정도만 담는다.

정겨운 먹거리는 널리고 널렸는데, 가방에 넣고 갈 부피를 생각하니 좀 작은것들로만 챙기게 된다.

이런 류의 간식거리는 가격에 비해 양이 많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해서, 겉보기에 좀 큰것들이 많으니.

 

가게 할아버지는 '딱 100만엔!' 이라고 기운차게 계산해준다. 물론 100엔이라는 의미.

구입하고보니 확실히 예전처럼 싼 가격은 아니다. 요즘엔 일본 편의점에서 100엔으로도 팝콘 한봉지 사먹을 수 있을 정도니까.

 

밖에서 좀 더 주위 풍경을 담고 있으니 할아버지가 나와서 그걸로 기념사진 찍어줄까 하고 묻는다.

본인 사진은 별로 찍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고, 완전한 수동렌즈라 촛점 맞추기가 쉬운편이 아닌 탓에

이리저리 설명을 해 드렸는데, 할아버지가 '비싼 녀석이니 맡기기 좀 그렇지?' 라고 짖궃은 말투로 장난을 친다.

 

 

 

시작부터 정해진 루트에서 완전히 벗어나 버렸기 때문에 홀가분하게 아무렇게나 걸어다닌다.

원래 저 가게는 라멘 투어 신나게 마친 후 돌아가기전 기념품 대용으로 들러보는 곳이었으니까.

 

2층은 두 사람이 간신히 나란히 설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골목길을 회상하며 만들어져 있다.

내가 어릴적에도 물론 여기저기 이런 좁은 골목이 있긴 했는데

어머니 연세쯤 되는 분들의 추억에 남겨져 있는 골목길은 정말 이런 느낌이었을 법 하다.

대구에 남아있는 몇몇 옛 골목들을 보며 어머니가 '예전엔 거리 곳곳에 이런 골목들이 빼곡했는데' 라고 말씀하신적이 있다.

 

방금 전 골목가게까지는 내 추억속에서 회상할 수 있는 범위지만

이 정도까지 가면 역시 나로서도 어딘가 이야기속에서만 들었던 법한 비현실감과 조우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낮에 학교 가면서 이런 골목 분위기를 보지 못한것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의 활동시기는 대부분 아침이나 대낮이었던 고로, 어둠속에서 본모습을 드러내는 이런 거리풍경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이런 박물관의 레벨을 가늠할 수 있는 요소라면 뭐니뭐니해도 그 재현도를 들 수 있겠는데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곳 라멘 박물관의 레벨은 정말 놀랍다고밖에 할 수 없다.

 

군데군데 불이 나간 전구, 너덜너덜해진 간판, 벗겨지고 녹물이 내려오는 콘크리트 벽 등등

지금 이 모든 요소요소들이 전부 철저한 계획아래 정교하게 재현된 녀석인지

아니면 정말 관리를 되는대로 해서 이렇게 되어버린건지 착각할 정도로 빼어난 완성도를 자랑한다.

 

어찌보면 개장 당시엔 저 전구가 다 켜져있었는데, 개장 후 20년이란 세월이 지나고 나니 이렇게 낡아버린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재현도가 뛰어난 이곳은, 계속 걸어다닐수록 점점 현실이라는 시공간에서 멀어져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현실과 망상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은, 망상이 현실만큼 현실적이라는 이유 때문이니까.

 

오른쪽 간판은 삿포로 미소라멘 '스미레' 라고 적혀있는데

그냥 옛날 거리 재현하기위해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고, 진짜로 이곳에서 영업하는 라멘부스중 한곳이다.

마리화나 몇대 빨고 이곳에 들어오면 정말 과거로 훌쩍 넘어온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굉장한 리얼리티.

 

 

 

이곳의 시간대는 아무래도 늦은 저녁, 해가 거의 지면으로 넘어가며 어슴프레한 핏빛만이 지평선에 살짝 스며드는 그런 순간인 듯 하다.

거의 밤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매우 어두운 곳이라서, 이때만큼은 새 카메라 갖고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감도 3200 까지 올리고 조리개를 F2.0 까지 개방해야 겨우 사진을 건질 수 있을 정도.

 

힘겹게 사진을 담으면서도 이 장소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매번 감탄을 금할수가 없다.

이건 1950년대를 그럭저럭 흉내낸게 아니라, 정말 그 시절의 시공간을 뚝 잘라서 가져온 레벨.

건축법상 의무적으로 표기된 소화기 안내판만이 나를 2012년에 붙들어놓는 유일한 이정표라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

 

벽의 낙서, 흘러내린 물 흔적, 색바랜 나무 문과 벽보까지. 무서울 정도의 현실감에 기분이 묘해지는 느낌.

옆의 안내도는 폼으로 만들어 놓은게 아니고 진짜 지도다. 재미있는건 대부분의 가게들이 간판만 존재하는 이름뿐인 녀석들이지만

그중에는 색깔만 살짝 다르고 아무렇지도 않게 끼어있는 진짜 라멘가게도 있다는 것.

 

 

 

골목길을 빠져나오자 눈 앞에 펼쳐지는 모습에 잠깐 넋을 잃고 발걸음을 멈춘다.

좁은 골목길에서부터 시작한 터라 이 박물관의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할 수 없었는데

이곳은 지하 2층이 진짜 라멘가게였던 것. 지하 1층의 좁은 골목거리는 이 가게들의 2층 뒤에 나 있는 샛길이었다.

 

물론 폐점시간이 다가올 정도라서 손님은 그리 많지 않았고

이 정도라면 어느 가게라도 쉽게 들어가서 원하는걸 먹을 수 있을듯 하다.

 

 

 

이곳에서 제일 비현실적인 녀석이라고는 저 하늘그림 그려진 지붕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몇 번을 봐도 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현실적인 재현도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시다씨가 극찬을 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한국인인 내가 느끼는 완성도보다는

직접 이 시대 이 공간을 살아온 이시다씨 입장에서라면 이 정도로 완벽한 고증은 하나의 예술로 느껴질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이 곳의 시대 고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정확하다.

내가 어릴 적에도, 경북 점촌이나 영천 시장골목 정도는 들어가야 간신히 남아있던 이런 담배가게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뽑아낸 듯이 재현해 놓았다. 물론 그 시절의 담배곽까지.

 

도쿄나 삿포로의 라멘 테마파크를 생각한 탓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라멘박물관이란 녀석은

실상을 알고보니 나머지 테마파크와는 비교하는게 어리석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녀석이다.

라멘을 팔아야 하는 공간에 '거만하게도' 입장료까지 받는 건가 싶었던 내 불만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

 

위에서도 언급했듯, 이곳에서 친근함과 그리움을 느낄지도 모르는 한국인의 입장에선

역사가 만들어온 지울 수 없는 상처의 흔적마저 다시 상기시키는 기분이 들 가능성 역시 있기 때문에

이곳과 마주치는 순간 어떤 기분이 들런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복잡난해한 곳.

 

 

 

 

아직 지하 1층을 한바퀴 둘러보지 못했기 때문에 좀 더 걸어본다.

원래 목적은 맛있는 라멘이었지만, 이제와서는 라멘은 그냥 마지막에 맛보면 되는, 그런 레벨로 내려가 버렸고

이곳의 풍경을 좀 더 담아보겠다는 일념이 빈 공간을 채우고 있다.

 

한국은 전후 일본보다 목조건물이 상당히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갔기 때문에

이런 풍경만큼은 한국과 일본의 추억이 상반되는 결과를 도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대문옆에 걸려있는 개량기 모습은 뭐, 예나 지금이나 추억거리가 되긴 하지만.

 

라멘 박물관 소개글을 보면, 1958년대 어린이들은 이런 골목길에서 이렇게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까지 놀곤 했었다고 한다.

인스턴트 라멘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쌀밥 대체음식으로 장려되는 녀석이었는데

라멘이라고 하면 딱 생각나는게 그 시절 이런 장소와 이런 시간대의 풍경이었다고.

 

 

 

정말 문열고 한번 들어가보고 싶을 정도라서 참는데 고생했다.

이 풍경이 진짜 현실이었다면, 아마 저 문 너머에서는 화려하지 않지만 맛있어 보이는 저녁이 준비되고 있겠지.

 

당시 일본은 고도성장시기에 한창 불을 붙이고 있던 시절이라

소시민들의 삶은 여전히 피폐했지만 그래도 나라 전체가 희망에 넘치던 시절이긴 했다.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는것도 그런 이유에서일듯.

 

반대로 한국은 이런 풍경을 감상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대가 조금 더 늦게 시작되었다.

그래서 나같은 젊은(?) 사람도 이런 거리의 풍경에서 조금씩이나마 향수를 느낄 수 있는것 아닌가 싶다.

 

 

 

디자인쪽에서 일해본 사람이라면 동감하겠지만

이런 식의 디테일을 살리는데 세심한 고증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사람이 다른 동식물의 차이점은 구별하기 어려워도, 같은 사람의 차이점은 손쉽게 구별해 내듯이

실제 존재했던 시대상을 재현하는데 있어서, 고증이 조금이라도 어색하다면 사람 눈에 단점으로 쉽게 들어오게 된다.

 

하늘에 홀로그램 쏴올려서 구름 만드는 하이테크까지는 구현하지 못했겠지만

정말 어디 하나 흡집을 잡고싶어도 도무지 찾을수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구성이다.

억지로 잡아내자면, 당시 이런 거리 곳곳에 널부러져 있던 각종 오물과, 지독한 냄새를 풍기던 절임반찬의 강렬한 인상 등등

후각적 요소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는 점 정도일까. 그것까지 구현한다면 아마 라멘 입맛이 떨어져 버리겠지만.

 

심지어 이곳의 구멍가게나 간식파는 가게 등에서는, 맥주나 음료수마저 옛날 유리병에 담긴 녀석을 제공한다.

라멘 가게를 찾는 구실을 만들기 위해 적당히 꾸며놓은 테마 파크들, 도쿄나 삿포로의 가게들이 딱 그 정도 수준이라서

5분에서 10분정도 슬쩍 걸어다니다가 적당히 라멘집 찾아 들어가는게 전부였는데

이곳은 일본 굴지의 라멘가게들이 경합하며 내 놓은 특급 라멘의 맛에 결코 떨어지지 않을만큼

외적인 구경거리가 가득한 곳이라서, '라멘'과 '추억의 거리'가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

어느 한쪽에 편중되어서 나머지 한쪽을 지탱해주는, 손님 입장에서는 왠지 끼워팔기라는 느낌을 받는 그런 테마파크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시다씨를 만나는 것 말고는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던 요코하마에서

이런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건 개인적으로 큰 성과다.

자전거 여행때는 멈춰서기도 어려운 대도시여서 그냥 통과해 버렸는데, 그렇기에 더욱 이번 방문의 가치가 높다.

 

천천히 둘러보며 여기저기 사진을 찍다보니 맨 처음 출발지였던 구멍가게 앞으로 돌아온다.

아무래도 나 말고는 아무도 저 앞의 문을 들락날락 하는 사람이 없는걸 보니

혼자서 길을 완전히 잘못 든 것 같지만 이제와서는 아무래도 좋다.

 

이제는 일본 최고라고 불리는 이곳의 라멘중 하나를 골라서 맛있게 음미해야 할 시간인데

편안하게 추억을 씹어먹으며 걸어다니던 이제까지와 달리 이건 중요하기 그지없는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