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여행 4일째.

막상 생각해보면 어제 요코하마에서 이시다씨 만난 것 말고는 별로 관광다운 행동에 나선적이 없는듯한 기분이 든다.

이번 여행의 메인 목표는 이시다씨와의 만남이었고, 시간과 자금이 좀 널널하다면 버스타고 닛코(日光)에 가보려고 했는데

왕복 4시간은 걸리는 곳이라서 아무래도 하룻만에 다녀오기 아까운 느낌이 들어서 포기.

 

매번 포기에 포기만 계속해서, 열 번이 넘는 도쿄 방문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 닛코인데

거기에도 사실 여행에서 항상 일어나는 혼돈의 이벤트가 존재한다.

 

2008년도 최초의 일본 자전거 여행때, 홋카이도 최북단을 목표로 도쿄를 출발한 후 너무 들뜬 나머지

우츠노미야(宇都宮)의 갈림길에서 예정에도 없던 닛코를 즐겨보겠다고 자신만만하게 페달을 밟았었다.

닛코라는 관광지가, 그냥 버스에서 내려서 모여있는 사찰 구경하고 후다닥 돌아오는 곳인 줄 알았으니...

 

사실 닛코는 유명한 곳만 둘러보더라도 관광지 안에서 버스를 40분 이상 타고 움직여야 할 만큼 문화재가 산재한 곳이고

범위당 문화재 밀도가 일본에서 가장 높은 곳이며

나라와 쿄토를 구경하지 못해도 닛코만 잘 둘러보면 일본 문화재는 다 본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빡빡한 곳.

킨키지역의 코야산과 같이 선 정상 즈음에 사찰이 들어서 있고, 해발 1000m 가까이 된다.

 

이제 막 자전거 여행 시작한 초짜가 도쿄를 떠난 첫날부터 닛코 가겠다고 겁도없이

40kg 가까운 짐을 자전거에 실어놓고 6시간동안 계속 오르막길만 올랐으니 뭐.

그래도 올라가는 도중 정말 다른곳과는 뭔가 분위기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풍경들이 계속 이어져서

힘은 들었지만 쉬어가며 열심히 오르긴 했다. 중간에 타이어 펑크나는 바람에 때우느라 막대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지만.

 

아무리 유명한 관광지라도 훼손 방지를 위해, 하코네와 같은 갓길도 없는 좁은 2차선 도로밖에 없었던 터라

자동차한테 미안해서 도저히 도로로 달리지 못하고, 옆에 만들어져 있는 반쯤 비포장 도로인 산책길로 주행했는데

아프리카에서나 볼 법한, 그냥 나무판자 몇개 얹어놓은 듯한 개울가 다리에서 미끄러져 자전거째로 개울에 처박혀 버렸다.

 

 

 

자전거와 함께 떨어진 본인 몸은 아예 안중에도 없고

산지 며칠밖에 안된 따끈따끈한 여행용 자전거와, 가방 안에 든 수백만원짜리 카메라, 렌즈들이 너무나 걱정되어

떨어지는 순간 동시에 몸을 일으키며 놀라운 괴력으로 40kg 짜리 짐이 실린 자전거를 그대로 훌쩍 들어 다시 길 위로 올려놓았다.

 

후다닥 가방을 열고 카메라를 꺼내서, 방금 미끌어진 따끈따끈하고 빌어먹게 미끄러운 다리를 한장 찍어보니

다행히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니콘은 카메라 하드웨어 하나는 딱딱하게 잘 만드는구나 싶었다.

 

몸은 여기저기 멍이 들긴 했지만 피는 별로 나지 않는다. 어제 비가와서 축축해진 이런 다리는 조심했어야 했다.

본인 책임이니 어쩔 수 없었지만 자전거는 브레이크쪽에 약간 문제가 생겼고, 몇시간 전 펑크 때운 타이어는 또 상태가 좋지않다.

 

6시간동안 끙끙거리며 해방의 기회만 노리고 있던 불만과 분노가 한꺼번에 표출되는 바람에

입에서는 연신 Shit 을 연발하면서 짐을 챙기고 그대로 방향을 돌려 닛코행을 포기해 버렸다.

일본에 있을때는 머릿속 생각도 일본어로 하는데, 욕은 별로 마음에 드는게 없어서 항상 욕은 다채로운 영어의 힘을 빌린다.

 

언제까지 더 올라가야 할지 알 수도 없는 노릇이고, 특히 이 닛코로 가는 길은 이상할 정도로 다운힐이 없어

6시간동안 꾸준히 오르막만 나타났기 때문에 이미 참을성은 한계에 달해있었다.

조금 아쉬운 생각은 들었지만 개울가에 처박히고 나서부터 폭발해있는 짜증덕분에 망설이지 않고 왔던길을 내려가기 시작.

 

 

 

그래도 첫번째 자전거여행에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느끼게 해 준 코스였기도 하다.

내려갈때는 자신이 실력도 경험도 없는 무능한 패배자가 된 것 같아서 우울하기 그지없었지만

6시간 걸려 올라온 길을 2시간도 안되서 시원하게 내려올 때의 쾌감이 우울한 기분을 날려준다.

 

페달 한번 밟지않고 이렇게 시원 깔끔하게 달려 내려갈 수 있다는 건, 왜 자전거 매니아들이 생겨나는지 납득이 갈 만하다.

 

거기다 도중에 사과 파는 할머니가 계시길래 하나 먹어볼까 하고 다가갔는데

한국서 자전거 여행 왔다는 말을 듣고 '손자가 한국 농대에 교환학생으로 들어가 있다'면서 매우 반가워 하셨다.

자기들이 연구와 노력을 거듭해서 만든 우츠노미야산 사과라고, 한 개만 사먹어 보려고 했던 나에게

돈도 받지 않고 5개쯤 든 사과봉지를 그냥 건네주셨다. 그리고 그것과 별개로 즉석해서 하나 깎아서 건네주기도 하셨고.

 

떨어진 체력과 흘린 땀이 갈증을 푸는 반찬이 되었겠지만, 그걸 고려하고라도 사과는 놀랄 정도로 맛있다.

대구 경북이 이제는 사과의 고장이라고 불리기에 질이 많이 떨어진 편이지만

그래도 어려서부터 사과를 밥처럼 먹어온 본인이라서, 사과 맛에는 상당히 깐깐한 편이다.

할머니가 주신 사과는, 포장만 멋들어지게 하면 한 박스 15만원이 넘는 선물용 최상급 사과로 들어가도 전혀 모자람이 없다.

당도는 말할것도 없으며, 시원하게 한입 씹으면 마치 싱싱한 야채가 와삭하고 입안에서 부서지는 듯한 깔끔함이 느껴진다.

 

사과 한봉지를 넣을 공간마저도 아쉬운 여행이라서 조금 난감하긴 했지만

역시 시골인심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어서 감사히 받으며 인사를 주고받았다. 기념사진에는 슬쩍 우츠노미야 사과 선전도 해주시고.

 

구경하지 못한 닛코를 등지고 내려오면서 문득 생각이 들었다.

만약 다리에서 굴러떨어지지 않았다면 이렇게 돌아가지도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이 할머니를 만나서 사과맛을 보지도 못했을 테고

여행중 만나는 소중한 인연이 하나 없어졌을 것이라고. 물론 닛코로 향했다면 거기서 또 다른 인연을 만들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여행이란 이렇게 선택 하나하나가 어떤 식으로든 결과를 만들어 내며

거기에는 바쁘고 매마른 경쟁사회에서처럼,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릴지도 모르는 잘못된 선택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어떤 선택이라도 거기에 맞춰서 앞에는 새로운 길이 펼쳐지니, 여행중에는 후회라는 감정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훗날 2010년 자전거 여행때도, 확률적으로는 기적에 가까운 몇 번의 우연을 거치고 거쳐서 여러 사람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했으니

여행의 가장 큰 매력중 하나는 '마이너스가 없는 선택'이 아닐까 하는 지론을 갖게 된다.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실패란게 없으니까.

 

 

 

이야기가 완전히 딴 길로 가버렸는데, 어쨌든 그런 일이 있고나서 닛코는 나에게 상당히 의미깊은 곳이 되었고

도쿄에서 왕복 4시간이나 걸리는, 볼거리로는 쿄토에 버금가는 곳을 당일치기로 갔다온다는데 저항감이 있어서

이번에도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닛코는 나중에 자금 두둑하게 가지고 괜찮은 여관 하나 잡아서 며칠 즐겨볼 생각이다.

 

어제 이시다씨와의 미팅, 평소 안마시는 술도 2잔이나 마셨고, 바로 라멘박물관에 가서 신나게 돌아다닌 후

밤 11시가 넘어서야 숙소로 돌아오는 바람에 좀 피곤했나보다.

무료 조식 먹으려고 아침 8시에 알람을 설정해 놨는데, 분명히 알람소리는 듣고 직접 해제까지 한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제 일어나야지 하고 고개를 들자 벽에 걸려있는 시계는 9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으니, 이런 불가사의한 사건이 또 있을까.

 

조식 시간을 놓쳐버린 것도 아쉽긴 하지만, 잠을 꽤나 옅게 자기때문에 알람에는 쉽게 반응하는 나로서는

알람 끄고 잠깐 숨 한번 들이쉰 후 일어나니 1시간 40분이 지나있었다는 이 사실이 매우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4일째 월요일, 원래라면 닛코 갈까말까 고민하던 날이지만 닛코는 어젯밤 포기했기 때문에 잠깐 멍하니 생각에 잠긴다.

남아도는게 시간이지만 할 일은 미리 끝내놓는게 좋을듯 해서, 오전중에는 아키하바라 다녀오기로 했다.

숙소에서 전철로 10분밖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책이나 게임 소프트 사려면 최적의 장소.

지난번 잠깐 들렀을 때, 인파때문에 카메라와 가방이 매우 거치적거렸던 기억을 떠올리고

오전 외출시엔 아예 카메라 장비를 놔두고 가기로 결심한다. 텅텅 빈 카메라가방엔 어지간한 책 7~8권은 들어간다.

 

아키하바라는, 메이드 복장을 하고 아슬아슬한 스커트로 호객행위하는 젊은 처자들 도촬할거 아니면

별로 사진 담을만한 풍경은 없어서, 카메라가 없어도 그닥 아쉬울 것 없다.

여행중 카메라를 어깨에 메지 않고 나가는 일은 매우 드물기 때문에 그 행동 자체가 신기하다는 점을 빼면.

 

여행후 블로그에 포스팅하기 위해서라면 뭐라도 찍어오면야 볼거리는 늘겠지만

'물건 구입'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출발하는 아키바 행이기 때문에, 사진 촬영과는 관계가 없다.

인터넷을 뒤적거리다가, 예전 포스팅에서 언급했던 서점 'K-Books' 도 점포를 이전해서 영업중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해서

책을 구입하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노후된 라디오 회관보다는 훨씬 깨끗하고 넓어서 둘러보기도 편했다.

원래는 같은 층에서 나뉘어져 있던 신품 코너와 중고 코너가, 새로 옮긴 건물에서는 1층과 2층으로 나눠지는 바람에

신품 코너에서 확인후 중고 코너를 찾아보는 동선이 길어진 것은 조금 아쉽긴 하다.

 

친구한테 부탁받은 게임소프트도 구입했고, 선물로 줄 책도 좀 구입하고 해서, 부탁받은건 대부분 구매 완료했다.

남은것 몇가지는 이곳 아키바에서 구입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라, 내일 구입하기로 하고 숙소로 돌아온다.

 

2시쯤 돌아와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항공편에 대해 고민좀 해 본다.

저가항공의 단점이기도 한데, 귀국편이나 출국편 둘중 하나는 반드시라고 해도 될 정도로 시간이 너무 이르거나 늦은 편이 있다.

 

이번 출국편은 아침 일찍이라서 시간낭비 없이 첫날부터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었는데

결국 귀국편이 아침 8시 출발이라는 최악의 형태가 되고 말았다.

8시 출발이면 공항엔 적어도 6시 반에서 7시 사이에 도착해야 하는데, 우에노역에서 나리타 공항까지 일반 전철로 1시간 40분이나 걸린다.

여기서 우에노역까지 가는 시간을 고려하면, 새벽 4시 반쯤 일어나 5시까지 우에노역에 가서 첫 전철을 타야 시간을 맞출 수 있는 셈.

 

물론 새벽 4시에 버스나 전철이 운행할리 없기 때문에, 이곳에서 우에노까지는 택시를 타는수밖에 없다.

택시조차 길거리에서 그냥 잡아탈 수 있는 시간대가 아니라서, 호텔 프론트에 콜택시를 예약하기에 이른다.

가뜩이나 택시요금 무지하게 비싼 일본인데, 콜택시 예약요금까지 추가되면 몇만원 깨질 각오 해야한다.

사실 택시타고 10분도 안걸리는 거리지만 어쩔수가 없다. 부탁받은 물건이 너무 많아서 이걸 다 들고 걸으려면 우에노까지 1시간은 걸릴 듯.

 

에어아시아 측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아침편 비행기를 준비한건가 싶어

일본쪽 홈페이지 들어가 봤더니, 이곳이 아니라 신쥬쿠과 도쿄역 부근에는 새벽에도 운행하는 리무진 버스가 있었다.

물론 버스요금이 상당히 비싸고,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아사쿠사 부근보다 신쥬쿠쪽 숙박비가 더 비싸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계획을 세워도 결국 최종적으로 소요되는 시간과 경비는 비슷해지게 되어 있었다.

 

그것도 싫다면 그냥 한밤중에 공항으로 가서 로비에서 하룻밤 보내는게 제일 경제적이긴 하다.

 

이래저래 교통편 확인한 후, 프론트에 가서 이틀 뒤 체크아웃 날짜 새벽 4시 30분에 콜택시를 예약해 달라고 부탁했다.

4시 30분에 객실로 전화를 드릴테니 그때 짐챙겨서 나오면 된다고 한다.

또 이 호텔은 새벽에 프론트가 문을 닫기 때문에, 객실 키는 프론트에 놔 두고 가란다.

 

돌아가는 루트 확인을 마치고 오늘의 메인 여행코스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도쿄에서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것'은 대충 생각해서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이틀 전 구경한 스카이트리, 그리고 오늘 보러 가는 오다이바의 건담이다.

 

어차피 오늘 포스팅에서 건담이 나올 일은 없으니 거기 대한 설명은 때려치우기로 하고.

오다이바로 가려면 신바시(新橋)역이나 시오도메(汐留)역에서 무인 모노레일 유리카모메(ゆりまもめ)로 갈아타야 한다.

숙소에서는 시오도메 역으로 환승없이 갈 수 있으니 그곳으로 이동.

 

역에서 내려 바로 유리카모메를 향하진 않는다. 이곳에도 나름 볼만한 녀석이 있기 때문에.

걸어가는 길에 문득 멀리 보이는 도쿄타워가 이제는 굉장히 초라해 보인다.

같은 거리에서의 스카이트리라면 빌딩숲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불쑥 솟아나와서 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을텐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제 도쿄타워 정도의 높이는 이 도시의 숲속에서 별다른 이정표가 되지 못한다.

 

 

 

요 며칠간 계속 햇빛 쨍쨍한 대낮에 촬영하는 시간이 줄어들어서 기분이 묘하다.

의도하는 바는 아니지만, 요코하마 이벤트때에는 낮에 카메라 들 시간이 없었고

오늘은 아키바 갈 때 카메라를 놔두고 갔기 때문에, 오늘의 첫 셔터는 해가 슬그머니 기울어지고 있는 시간대에서 시작이다.

 

오다이바로 향하기 전, 이곳에서 공짜로 즐길 수 있는 볼거리는 단연 이 녀석.

척봐도 느껴지는 사람이 많겠지만,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전설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끄는 지브리사단의 작품인 거대 시계(大時計)다.

이 시계가 붙어있는 건물은 일본 TV, 줄여서 닛테레(日テレ)라고 하는 방송사 스튜디오로

이 녀석 명칭도 별 특색없이 닛테레 오오도케이(日テレ大時計) 인데, 그 디자인만큼은 거대 빌딩의 존재를 망각시켜버리는 듯 하다.

 

 

 

스튜디오 지브리가 5년간의 계획과 제작끝에 완성한 거대한 시계는

폭 18m, 높이 12m, 두께 3m 의 거대한 구조물로, 1228매의 동판을 한장한장 망치로 두들겨서 만들어 낸 예술품.

총중량이 28톤이나 되는, 시계탑이라고 부르기도 힘들고 그냥 시계라고 부르기도 뭣한 묘한 모습을 한 녀석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모티브로 한 건지, 양쪽 옆에는 다리처럼 보이는 지지대가 내려와 있다.

확실히 그 애니메이션을 본 사람이라면, 이 녀석이 뒤뚱뒤뚱 걷는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듯 하다.

 

 

 

이 시계 내부에는 32군데의 작동부위가 있어서, 정해진 시간이 되면 한 편의 인형극을 보는 듯 캐릭터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작동 시간은 아직 한참 남았기 때문에 굳이 그걸 보려고 기다리진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 녀석들도 감상하는 재미는 충분하니까.

 

아이들 대상으로 했다고 해서 어설프게 만든 느낌도 없고, 동판의 디테일과 색에서 느껴지는 적당한 부식감이 굉장히 매력적이다.

나우시카나 라퓨타 등의 애니메이션에서도 충분히 드러났지만, 이런 녀석들 표현하는데는 도가 튼 지브리 사단이라서

아이들에게나 어른들에게나 발걸음을 멈추고 즐길만한 가치는 충분하다는 느낌.

 

 

 

상당히 거대한 녀석이라서, 시간만 맞으면 이 구조물 곳곳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거진 2시간을 기다려야 하니 아무래도 무리. 이번 목적은 어디까지나 오다이바의 건담이니까.

 

이곳에서 진득하게 이 시계를 바라본 것은 두세 번 정도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개인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이곳에 올때마다 항상 정신병자가 되는 기분이 든다.

 

왜냐하면, 생애 처음으로 일본에 놀러갔던 1994년의 겨울, 그때도 이 녀석을 본 기억이 난다는 점 때문에.

오후 9시쯤에 종이 울리면서 뭔가 이리저리 움직이던 것을 구경하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하지만 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실은, 이 시계가 2006년 만들어진 녀석이라는 점.

 

2008년 일본에 갔을 때만 해도, 이 시계를 보면서 1994년의 추억을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그만큼 일말의 의심도 없이 94년에 이 시계를 보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2010년에 와서야 이 녀석이 2006년 만들어진 녀석이라는 사실을 접했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봐도 분명 이 녀석을 본 것 같은데, 어째서 2006년에 만들어 졌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는 친구 강군과 함께 갔었으니 강군은 혹시 기억이 날까 싶지만

이제까지의 경험상 아마 94년 여행에 대해서 강군이 나보다 더 잘 기억하고 있는 부분은 없을거라 생각한다.

 

명백한 사실 앞에서 초라하게 발가벗겨진 내 94년의 기억은 한참동안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는데

요즘 들어서 조사에 조사를 계속한 결과, 물증은 없지만 94년에 내가 본 거대한 시계라는게 어떤 것인지 살짝 감을 잡게 되었다.

 

시부야구의 에비스(恵比寿)라는 역 앞에 위치한 에비스 가든 플레이스라는 복합 쇼핑단지가 있는데

그곳에도 정해진 시간에 인형들이 나와서 춤추는 시계탑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에비스 가든 플레이스는 유명한 맥주회사 에비스에서 조성한 복합단지로, 쇼핑이나 먹거리 즐기는 부분에서는 유명한 곳이라

많은 일본 관광객들에게 친근한 장소이겠지만, 그런 류의 여행을 하지 않는 나로서는 완전히 미지의 장소였던 셈.

 

아마도 94년도엔 거기서 인형들이 나와 빙글빙글 도는 모습을 본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좀 더 확신을 하려면 이곳 닛테레 스튜디오에 들어가서 안내데스크에 '94년즈음의 이곳에도 비슷한 시계탑이 있었는지'를 물어보고

에비스 가든 플레이스에 가서 그곳의 시계탑을 다시 한번 확인해가며 희미해진 기억을 되살려 봐야 할 듯.

 

이번 여행에서는 에비스역 쪽으로 갈 일이 없어서 확인하지는 않았다.

뭐랄까, 이 감정은 궁금하다기 보다는 일종의 아쉬움을 간직한 추억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서둘러서 기억의 진위여부를 구별할 필요는 없다는 느낌이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이 이렇게도 왜곡될 수 있구나 하는 결론을, 스스로를 피험체로 삼아 재빨리 결론내릴 필요는 없으니까.

 

아마 언젠가는 에비스 가든 플레이스에서 잃어버렸을지도 모르는 94년의 기억을 다시 되살릴 기회가 오지 않을까.

 

 

 

 

 

지브리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이 시계는

도쿄 안에서도 비즈니스 단지로 유명한 이곳 신바시 부근에서 가장 이질적인 건축물임에 틀림없다.

사실 왜 이곳에 이런 모습의 시계가 있는지조차 의아하게 생각될 정도로

이 시계가 위치한 닛테레 스튜디오는, 아무런 특징도 없는 고층 빌딩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주위에도 뭔가 지브리스러운 곡선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으며

콘크리트 광장과 콘크리트 고층 빌딩, 수트케이트와 롱코트 넥타이의 셀러리맨들이 바삐 움직이는 이곳은

어딜 봐도 지브리식 동판 시계와 어울리는 점이 한군데도 없는 삭막하고 차가운 도심부 안의 도심부.

 

닛테레 스튜디오는 각종 버라이어티 쇼, 애니메이션 등을 제작 녹화하는 곳이라서

건물 1층과 그 주변엔 각종 캐릭터 상품 등 쇼핑몰이 형성되어 있으니, 거대 지브리 시계로 눈길을 끄는건 나쁘지 않은 선택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선택이 너무나도 뜬금없어 보이고, 주위와의 조화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스타일이라서 되려 눈에 띈다는게 특징이기도 하고.

 

  

 

 

좋게 생각하면 해석이야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런 삭막한 곳에야 말로 판타지 세계에서 걸어나온 듯한 움직이는 시계성이 어울린다고 생각할수도 있으니까.

사무적인 빌딩 숲에서 바쁘게 뛰어다니는 셀러리맨들에게, 이 녀석이 플라즈마 이온 공기청정기가 되어줄 수도 있지 않겠나.

 

잔업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며 역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앞에

종소리와 함께 마법에 걸린듯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동판인형들의 모습이

기분을 시원하게 하는 허브 캔디같은 역할을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언밸런스한 풍경도 납득이 된다.

 

 

 

도쿄에 도착한 뒤로 생각보다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던 탓에 묘하게 더운 옷이 부담되었는데

오늘은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의외로 찬 공기가 얼굴을 자극하고 있어서 오히려 상쾌한 기분이다.

 

30분쯤 시계 주위를 돌면서 이것저것 셔터를 누르다 보니 손가락의 감각이 점점 옅어진다.

몸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지만, 장갑 없는 촬영은 역시 오래 버티기 힘들다.

이제부터 이동할 오다이바는 도쿄 만 앞에 인공적으로 조성한 섬이라서 바닷바람이 생각보다 매섭다.

 

워낙 추위를 타지 않는 몸이다 보니, 적당한 점퍼 하나에 쿨맥스 소재의 반팔 셔츠만 입고 있어도 겨울을 날수 있다.

그러고보니 이번 겨울동안 한 번도 긴팔 셔츠를 입어본 적이 없다.

 

자전거 여행의 경험때문에 더 심해진 기분인데

영하의 날씨에서 아스팔트 위에 텐트치고 침낭속에 들어가서 덜덜 떨며 밤을 지새고 나니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11월까지 쿨맥스 반팔 셔츠 한벌로 밖을 돌아다니는 체질이 되어 버린듯 하다.

 

하지만 항상 카메라와 함께 하는 손가락만큼은 워낙 빨리 얼어버려서

겨울 촬영때는 역시 괜찮은 장갑이라도 있어야 하나 고민중이다. 촬영용 장갑은 쓸데없이 비싸서.

 

 

 

도쿄와 오다이바를 연결하는 무인 모노레일 유리카모메는 '붉은부리갈매기' 라는 뜻. 도쿄만에서 흔히 보였던 바다갈매기다.

 

모노레일이란게 제대로 성공하기에 매우 어려운 복권과도 같은 녀석인데

거의 사장될 뻔한 오다이바라는 인공섬이, 거대 쇼핑몰과 상업단지로 성공적인 정착을 이루어 내면서

유리카모메 역시 일본 전체에서 가장 성공한 모노레일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정말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대도심에서의 모노레일은 한순간 반짝하고 난 뒤에 똥만 남기는 녀석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한국에서 시도중인 몇몇 경전철이 심히 걱정될 따름이다. 하긴, 이제 도시가 부도나던 말던 내가 신경쓸 바가 아니긴 하지만.

 

대중교통이 대부분 그렇듯이, 진행 방향과 수직방향의 창가 풍경은 질리도록 보는 녀석이니

무인 전철인 유리카모메에서는 맨 앞뒤 진행방향을 감상할 수 있어서 그곳이 명당자리로 꼽힌다.

앞자리 잡을 수 있을까 기대하며 미끄러져 내려오는 유리카모메에 탑승하는데, 승무원 두 명이 앞좌석에 앉아있어서 깜짝 놀랐다.

유리카모메를 수십 번 타면서 승무원이 앉아있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기에 더욱 신선한 충격.

 

두 사람이 조를 이뤄서 군대 사격훈련때 하는 구호처럼 '브레이크 확인! 브레이크 확인!, 선로 이상없음! 선로 이상없음!' 하고

반복 복창을, 그것도 꽤나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번 전철은 점검용 유인전철인듯 하다.

앞자리를 차지하는 바람에 결국 정면 샷은 이 한컷밖에 찍지 못했지만, 유인 유리카모메도 새로운 경험이니 나쁠 것 없다.

 

 

 

유리창의 반사때문에 의도한 만큼 깔끔한 사진을 남길수는 없어도

대강 레인보우 브릿지 정도는 담아본다. 인공섬인 오다이바와 육지를 연결하는 이곳의 랜드마크.

 

상층부는 자동차용 도로이고, 하층부는 유리카모메와 자동차가 모두 달리는 구간인데

걸어서는 갈 수 있어도 자전거로 통과할 수 없는 곳이라서, 자전거 여행에서는 쉽게 소외되는 곳이기도 하다.

실제로 자전거로 갈 수만 있다면, 인공섬의 널널한 공간 덕분에 적당히 텐트치고 잘 만한 곳은 널리고 널렸는데 말이다.

 

걸어서 가려면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야 한다. 최소 2km 는 걸어야 하니까.

 

낮에는 별 특색없는 다리지만, 이름에 걸맞게 해가 지고나면 형형색색의 불이 켜지는 덕에 사진 촬영으로 유명한 곳.

오다이바 하면 레인보우 브릿지 사진 안담아오는 사람이 없어서 질리는 바람에, 본인은 한 번도 야경 찍은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카메라도 새로 바꾸고 했으니, 테스트라도 해 볼까 생각중이다.

 

 

 

다리를 통과중. 저 멀리 보이는 지역이 오다이바(お台場)다.

원래부터 이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인공섬은 절대 아니고,

사실은 1850년대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의 개방을 요구하며 프리깃과 범선을 이끌고 쳐들어 왔을 때

잠깐 시간을 달라고 해서 2년동안 그들을 미국으로 돌려보낸 후, 그녀석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포대를 설치하려고 만든 섬이 바로 오다이바.

한자나 일본식 발음을 유심히 살펴보면 알겠지만, 이름의 유래는 '포대를 세우기 위한' 장소라는 뜻이다.

 

2년쯤 뒤에 다시 페리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도쿄만으로 들어왔지만, 사실 그깟 포대로 어떻게 할 상대가 아니라서 강화조약을 맺어버렸고

오다이바의 대포는 단 한발도 발사되는 일 없이, 했던 일도 없고 하는 일도 없고 할 일도 없는 상태로 한참동안 방치되고 말았다.

 

지금이야 어마어마하게 면적을 키웠지만, 그 쓸데없던 인공섬이 지금은 굉장히 중요한 복합산업단지로 맹활약중이니 역사는 아이러니할 따름.

 

 

 

레인보우 브릿지를 통과하는 도중, 슬그머니 카메라를 들어서 희귀 승무원들의 모습을 담아본다.

a99 카메라는 미러가 움직이지 않는 구조라서 촬영시 소음이 상당히 작다. 아마 저들 귀에는 들리지 않았을 듯.

 

도촬은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지만, 타이밍도 절묘하게 앞좌석을 차지할 기회를 근본적으로 없애버린 것에 대한

사소한 장난이라고 할까. 앞얼굴이 나올 일도 없고 해서 그냥 여행의 추억거리 삼아서 남겨본다.

 

 

 

이번 여행이 얼마나 설렁설렁이었나를 이곳에 도착하고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일단 해안가 앞의 다이바 역에 내리긴 했는데, 그 건담이란 녀석이 어느 역의 어느 건물 앞에 세워진 녀석인지도 조사하지 않았던 것.

 

그냥 걸어다니다 보면 알아서 발견되겠지 하고 여기까지 멍하니 찾아온 것이다.

걸어서 못 돌아볼 건 아니지만, 오다이바는 상당히 넓은 곳이다. 이런 늦은 시간에 걷기 시작한다면 일주 한번 하는것도 불가능.

다행히도 각종 쇼핑몰이나 주요 빌딩들은 여기 해안가에서부터 거의 직선으로 뻗어 있기 때문에

조금만 발품 팔면 못갈 곳은 없다. 혹시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으니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건담을 찾아보는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