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고 간 렌즈가 35mm 와 70-300mm 라서, 중간화각이 조금 비어버리는 느낌이다.

망원렌즈를 사용하려니 전신 담기가 힘들어서 발품을 팔아 뒤쪽으로 물러나 찍는다.

 

확실히 예전에 비해 사진 찍는 풍경이 좀 바뀐 듯 한데

컴팩트 카메라 갖고 다니는 사람은 물론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지만

상당수의 관광객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대부분 화각이 넓은지 사진 찍으려고 뒤로 물러나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예전 사하라 사막 마라톤 당시엔 절대로 DSLR 급의 장비를 들고 달릴수가 없었으니

고르고 골라서 코닥의 이너줌 컴팩트 카메라를 들고 갔었는데, 내 실력에 비하면 훌륭한 사진을 남겨줬지만

그래도 역시 장비의 아쉬움은 있어서, 여행갈때는 어깨 부서지더라도 좋은 장비 갖고 다니려고 노력한다.

요즘엔 휴대폰 사진도 너무 잘나와서 딱히 카메라 갖고 다닐 필요가 없는걸까?

 

스마트폰을 가지고는 있는데, 그 녀석으로 사진 찍은건 열손가락으로 꼽아도 남는다.

스마트폰으로도 이 정도를 척척 찍어낸다면, 쓸데없이 크고 비싼 카메라 들고 다니는 꼴이 되니 걱정도 된다.

 

 

 

일본쪽 유머사이트에는, 2009년 진도 6 정도의 지진에 이녀석이 쓰러졌는데

혼자서 스윽 일어나더니 다시 제자리에 돌아가 서 버렸다는 이야기도 있고

밤에 관람객들이 없어지면 가슴의 해치가 열리면서 조종사가 나오는 모습도 봤다는 둥의 이야기도 있다.

 

물론 1:1 스케일의 로봇이라는 특징때문에 만들어진 소문일 뿐이지만

정해진 시간에 손이나 팔이나 머리가 살짝살짝이라도 움직이는 모습 보면

사실 이녀석은 겉모습만 아니라 실제로 애니메이션처럼 움직이는 병기가 아닐까 하는 상상이 드는것도 사실.

 

여기까지는 그냥 뜬소문이지만, 2009년 당시 전시를 마치고 해체작업을 시작할 무렵에

머리부터 차례로 해체하다 보니 건담 애니메이션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라스트 슈팅' 장면이 재현되고 말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디테일에 신경쓰는 일본인 특성에 건담 매니아들이 집대성되어 만든 모형이다 보니

2009년 해체했다가 이번에 다시 세우면서도 나름 애니메이션의 설정에 들어맞는 이유를 만들어 냈다.

주인공 아무로가 이 건담 타고 활약하는 도중에, 그의 반사신경을 기체가 점점 따라가지 못하게 되는 바람에

관절부의 운동성을 높히는 마그넷 코팅이라는 신기술을 채용해서 업그레이드를 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던 것.

이번에 새로 세워진 이 녀석은, 자세히 보면 2009년 버전과 비교해 팔다리의 관절부분이 미세하게 다르다고 한다.

고증에 대한 이런 집착이 때로는 관람객들에게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되기도 한다.

 

 

 

건담 모형 옆에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옴에 따라 화려한 치장을 한 다이바 시티의 단면이 보인다.

건담을 마음껏 즐긴 아이들은 이 빛으로 가득한 계단을 마구 오르내리면서 여운을 만끽하고 있다.

 

계단에 조명 설치하는것도 괜찮은 선택인데, 매끈한 벽면을 스크린 대용으로 사용해서 프로젝터로 글씨는 비추는 시도 역시 훌륭하다.

물리적인 공사를 요하는 것도 아니고, 묘한 조명과 어우러져서 미래지향적인 느낌을 준다.

옆에 초현실적인 크기의 건담도 서 있으니 더욱 잘 어울리는 듯한 느낌도 들고.

 

 

 

건담이란게 일본에서는 국민적인 브랜드로 자리잡기도 했고

요 근래 들어 만화나 애니메이션 매니아들의 소비자 충성도가 상당한 장사가 된다는걸 실감한 기업들이

저 건담까페같은, 완벽한 매이나지향 프렌차이즈를 공격적으로 확장하고 있는게 요즘 현실이다.

 

일단 인구와 소비층이 두텁기 때문에 가능한 시도라서, 한국의 경우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케이스지만

어쨌든 부럽긴 하다. 어떤 방식으로든 프렌차이즈의 다양화는 선택의 폭을 넓히는데 도움을 주니까.

 

어릴때는 프라모델에 빠져서 건담을 참 좋아했지만, 지금은 그냥 전시된 프라모델 구경하면서 감탄정도 해 주는 레벨이라서

괜히 음료값 비싼 저런 까페에 들어갈 일은 별로 없다. 만약 건담 좋아하거나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과 함께 왔다면

재미있는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한번 들어가 봤겠지만.

 

그리고 자금이 간당간당한 지금 상황에서 자칫 들어갔다간 쓸데없는 기념품에 손을 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기도 하고.

건담까페 대문 왼쪽에 세워져 있는 현수막에는 하로만(ハロまん)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하로' 라는건 건담에 나오는 마스코트적인 캐릭터로, 대강 이렇게 생긴 녀석이다. 애완동물같은 포지션.

'만'이라는 건 한국의 호빵과 같은 간식이라고 생각하면 되니, 하로만은 아마도 이 녀석 모양을 한 호빵을 의미하는 듯.

어릴적만큼의 애정이 있었다면 꼭 한번 사먹어 봤을법한 녀석이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건담에 크게 흥미가 없다.

 

 

 

건담만 주구장창 담다 보니 아무래도 사진에서는 크기가 잘 실감나지 않을 듯 해서

죄송하지만 동의없이 한 커플의 뒷모습을 비교대상으로 담아버리고 말았다.

 

여행같은거 가면 특히 좀 더 용기를 발휘해서 사진 찍어도 되겠냐고 물어보는 자세가 필요한데

이렇게 새가슴이어서야, 담고싶은 모습도 제대로 못 담는 사태가 벌어질 수 밖에 없다.

인도같은 곳에서는 사람들이 사진 찍히는걸 너무 좋아해서 막 덤벼든다는데

담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인도여행이 필요한 것일까.

 

이렇게 한바퀴 돌아가며 건담을 담고, 잠깐 카메라 꺼둔 채 눈으로 감상을 하고 있으니

아마도 좀 전에 열심히 기념사진 찍고 있었을 법한 젊은 여행객 무리가 나한테 다가온다.

맛폰으로 한국어를 일본어로 번역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자유의 여신상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적당한 아시안 엑센트 영어로 물어보는데

1초 정도 되는 짧다면 짧은 시간 속에서 내 머리가 너무 많은 요소를 복합적으로 처리하는 바람에 잠깐 말이 헛나가 버렸다.

 

외국사람이라면 그렇구나 착각할수도 있지만 왜 한국사람이 내가 한국사람이란걸 알아차리질 못하는가.

다정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분위기좋은 커플이나 일행도 아니고, 시커먼 옷에 덜덜한 덩치에 눈매 사납게 혼자 카메라 잡아든 나를 골라서 물어보는가.

지금 이 사람들한테 내가 한국사람이라는 걸 밝히게 되면 자신들의 착각에 대해 부끄럽고 미안해 할 것인가.

이 사람들의 착각을 너그러이 눈감아주려면 그들의 생각에 맞춰서 일본사람인 것처럼 반응을 보여줘야 예의에 맞는 것일까.

 

사실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니고 해서 놀랄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날따라 갑자기 이런 생각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내 머리를 휘젓는 탓에

적정한 결론을 내리기 전에 반사적으로 일본어가 입에서 튀어나오고 말았다.

사실 자전거 여행때부터 반드시 지키고 있는 사항인데, 일본에 도착하는 순간부터는 머릿속을 완전히 일본어 OS로 바꿔놓고 있다.

머릿속 생각도 한국어를 일본어로 변환하는게 아니라, 그냥 처음부터 일본어로 나오도록 연습을 했고

그게 지금은 꽤나 익숙해 진 탓에, 일본서 술 마시고 한국에 전화 걸었을 때는 한참동안 한국말이 안나와서 고생하기도 했다.

 

그런 고로, 머릿속이 멀티태스킹으로 정신없을 때 지극히 자연스럽게 일본어가 나와버린 것.

건담에서 자유의 여신상까지는 바닷가쪽으로 쭈욱 일직선이었기 때문에 길을 잊을 염려는 결코 없었지만

내가 일본어로 대답하자,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한국인 일행은 'Can you speak English?' 라고 묻는다.

이제 한국어로 대답하는건 불가능. 지금와서 대답한다면 내가 젊은이들을 갖고 논거나 마찬가지가 되니까.

 

일본어로는 머릿속 생각도 돌릴 수 있을 정도지만, 일본사람처럼 영어 발음 하는건 한 번도 시도해 본적이 없어서

그냥 배운대로 말해줬는데, 일본사람치고는 발음이 좋구나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네들 발음이나 내 발음이나 거기서 거기였으니까.

그냥 쭉 가라고 말해주니 이번엔 레인보우 브릿지는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묻는다.

자유의 여신상 보이는 곳에서는 레인보우 브릿지도 보인다고 대답해주자 고맙다고 밝게 인사하며 멀어져간다.

 

결코 악의가 있어서라거나 장난끼 같은 감정은 전혀 없었지만, 이래도 되는 것일까 살짝 생각에 잠기게 해 준 여행길의 에피소드.

사실 여행가서 한국사람에게 한국어로 말하지 않게 된 것에는 아주 사소한 이유가 있기도 하다.

2008년 자전거 여행때, 페리를 타고 홋카이도에 발을 들여 삿포로 맥주 박물관으로 향했다.

 

목표는 어디까지나 징기스칸과 삿포로 생맥주 무한 뷔페였지만, 개장시간 전에 오는 바람에 남는 시간동안 맥주박물관 견학을 하기로.

엘리베이터에 서 있는데 아기를 안은 젊은 부부가 한국어로 대화하고 있길래

여행 떠나고 처음으로 만난 한국인이라, 반가운 마음에 무심코 한국어로 '여행 오셨나봐요' 하고 말을 거니

마치 호러영화 사이코에 나오는 샤워실 마리온의 비명소리와 버금갈 정도로 '어머낫!!' 하고 깜짝 놀라길래 내가 더 놀랐다.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나 싶어서 걱정될 정도였는데, 물론 그쪽은 바로 웃으면서 '한국사람이신줄 몰랐어요' 하고 설명해 주긴 헀다.

 

하긴 살은 흑인 못지않게 탔고, 머리에 버프 뒤집어쓴채 다떨어진 넝마같은 옷 걸쳐입고 (훗날 알았지만 실제로 바짓가랑이가 걸레가 되어있었다)

혼자서 설렁설렁 돌아다니는 내가 한국사람이라고 짐작하는게 힘들법도 하다.

어쨌든 그날 이후로 내가 외국에서 한국사람한테 먼저 말 거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사실 한국에서도 먼저 걸지 않는다만.

 

 

 

건담을 실컷 구경했으니 이제 오다이바에는 별 볼일 없다.

레인보우 브릿지 야경이라도 한번 감상하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지금 가면 방금전 그 한국사람들하고 또 마주칠까봐.

죄지은 건 아니지만, 두번 세번 만나서 친해지다가는 결국 한국사람인거 밝혀야 할것 같아서 부담된다.

참 쓸데없는 걱정도.

 

문득 생각해보니, 오늘은 낮에 아키바에서 물건 사고 일기쓴다고 KFC에서 샌드위치 하나 먹은것밖에 기억나지 않아서

내부 구경이나 해볼까 싶어서 다이바 시티안으로 들어가 본다. 본인하고는 한참 인연이 없는 곳이지만

외국에까지 와서 그런지 이런 거대 쇼핑몰 모습도 나름 신기한 구경거리라고 자기암시를 걸지 못할것도 없어 보인다.

 

물론 아무리 외국이라고 해도 사람 붐벼터지는 대형 쇼핑몰에 들어가는건 나로서는 극히 드문 일이지만

이번엔 번듯한 이유가 있다. 뭐라도 배좀 채우고 싶었고, 지난번 의뢰받은 헬로키티 파우치를 여기서도 한번 찾아보기 위해서.

아키바 같은 곳은 전자제품이나 게임같은 매니아의 천국이지만 아무래도 헬로키티같은 샤방샤방한 아이템은 좀 드물다.

 

다행히도 1층 광장 주변이 푸드코트라서 가볍게 둘러보는데, 유명한 타코야키 체인점인 긴타코(銀たこ)가 있어서 그리로 갔다.

이 블로그 자주 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지난번 오사카 킨키지방 여행때 급성 통풍의 습격을 받아서

타코야키 하나 못먹고 간신히 살아돌아온 뼈아픈 추억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번엔 뭐라해도 타코야키를 먹어보려고 벼르고 있던 중이다.

괜히 이런데서는 용기가 솟아나서 직원에게 만들고 있는 모습 한장 찍어도 되냐고 물었다.

직원이 조금 망설이길래 아차 뭔가 잘못됐구나 싶었는데, 친절하게도 남들 모르게 한장 찍어가시라고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타코야키 다 먹고나서야 안 사실인데, 직원의 그 망설이는 태도는 긴타코의 제작과정이 비밀스러웠던게 아니라

다이바시티 전체가 원칙적으로는 카메라 촬영 금지장소였기 때문이었다. 다들 휴대폰으로야 아무렇게나 찍고 다니지만

본인 카메라는 누구에게나 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거대한 DSLR 이라서 직원이 당황했던 것. 세삼 미안하고 고맙고 그렇다. 

 

 

 

 

긴타코는 창업 초기인 1990년대엔 정말 고급스러울 정도로 빼어난 맛이 특징이었는데

전국적인 체인점이 된 후로는 그냥 대충 골라도 기본은 간다는 믿음을 줄 정도의, 하지만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릴 정도는 아닌 그런 가게가 되어버렸다.

 

그도 그럴것이, 개업 초기의 긴타코는 아시아 최대의 수산시장인 츠키지(築地)에서 매일새벽 직접 공수한 신선한 문어로 만드는 타코야키를 내세웠기 때문.

실제로 맛이 훌륭하기도 했거니와, 칸사이 지방 사람들의 프라이드라고 할 만한 간식인 타코야키를, 동쪽 지방에서도 맛있게 만들수 있다는 묘한 경쟁심리가 더해져

긴타코는 짧은 시간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타코야키 전문점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긴타코의 '긴'은 일본 최대의 번화가 긴자(銀座)의 '긴'으로, 창업시 목표가 긴자에 가게를 세우는 것이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 실제로 긴자에 본점이 있다.

 

지금은 항상 일정수준 이상의 타코야키를 제공한다는 정도로만 인식되는 녀석이라서

매니아들에게는 그닥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그래도 추운 바깥에서 건담 찍느라 얼어버린 몸에는 타코야키가 제격이다.

한국에서 끝장나게 추운 날 포장마차에 서서 오뎅과 국물 한잔으로 행복의 절정을 느끼는 것처럼

일본도 추운날 간식으로 이 타코야키가 몇 순위 안에 들어간다. 물론 한국이나 일본이나 1위는 단연 오뎅이지만.

타코야키는 바삭바삭한 겉에 비해 속이 흐물흐물하고 매우 뜨겁기 때문에

겨울날 밖에서 이녀석을 씹어먹으면 속에서 퍼지는 어마어마한 입김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그래서 붙여진 이미지일까.

 

배도 고프고 지난번 오사카에서 타코야키를 못 먹은 한도 있고 해서, 한알 한알 입에 집어넣을 때마다 행복감이 밀려온다.

누구나 그렇듯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코야키를 먹었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콱 씹는 바람에

그 뜨겁기 그지없는 걸죽한 액체에 입천장을 완벽하게 태워먹었던 추억도 있지만

지금은 워낙 요령이 생겨서, 만든 즉시 내놓은 타코야키도 아무 문제없이 잘만 씹어먹는다.

 

먹으면서 항상 하는 생각인데, 일본은 미각에 까다로운, 혹은 까다로운 척 할뿐인 매니아들이 워낙 많아서

타코야키 역시 가이드북까지 만들어가며 어디가 맛있고 하면서 열을 올리곤 한다.

 

다들 날카로운 송곳으로 절묘하게 회전시키면서 만들어내는 이런 제작방식에 익숙하겠지만

이렇게 제품화 되기 전의 타코야키는 지금처럼 겉은 바삭 속은 흐물이 아니라 그냥 바삭하게 구워낸 문어구이였을 뿐이다.

재료와 도구를 갖추고, 어느 정도의 요령만 익히면 그렇게까지 만들기 어렵지 않은 B급 요리 혹은 간식이기 때문에

이녀석 가지고 미묘한 맛의 차이를 가린다느니, 눈돌아갈 정도의 황홀한 맛이라느니 하는 수식어는 좀 낯간지러운 느낌이 든다.

 

물론 타코야키의 성지 오사카의 구석구석을 잘 뒤져보면, 정말 맛의 레벨이 틀린 가게가 몇군데 있긴 하지만

그것 역시 타코야키를 좋아하고 여러번 먹어본 사람에게나 통용될만한 이야기.

 

 

 

좀 비싸긴 했지만 만족스럽게 타코야키를 청소한 후, 헬로키티가 있을 법한 가게를 찾아서 다이바 시티 내부를 방황한다.

몇 군데 찾긴 했지만 역시 싼 것들은 너무 어린애틱하고, 비싼 건 아무리 못줘도 10만원은 넘는다.

부탁받은 3천엔 정도의 좀 덜 어린애틱한 파우치는 아무래도 찾을수가 없어서 의뢰인한테 문자로 연락을 넣어보니

그럼 그냥 사오지 않는게 좋겠다는 의견이 나와서, 헬로키티 파우치는 물품 리스트에서 지워버렸다.

 

조금 피곤해진 몸을 이끌로 마지막으로 레인보우 브릿지의 야경 감상하러 걷기 시작한다.

후지TV 앞에는 상당히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와 주변을 둘러싼 은하수같은 행렬이 눈길을 잡는다.

가까이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사실 레인보우 브릿지보다 이 녀석이 더 볼만한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트리를 감싸고 있는 야광 필름에는, 아무래도 후지TV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연예인들 사진을 모아놓은 듯.

 

 

 

해변가까지 거의 다 왔는데, 이곳에 올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고급 호텔들이 보여서 한 장 담아본다.

오다이바 내부의 호텔들은 두 곳으로 나뉘어 밀집된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유람선 선착장과 함께 레인보우 브릿지를 바로 감상할 수 있는 이곳 다이바(台場)역 근처에는

4성급 호텔이 주를 이루며 꽤나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5성급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스탠다드가 20~30만원쯤 하는 호텔이고, 좀 좋은 객실로 가면 200만원대를 넘는 곳도 있어서

가뜩이나 여행중 숙박업소에는 돈쓰고 싶지 않은 나에게는 그림의 떡같은 곳.

 

이곳과 반대편, 그러니까 레인보우 브릿지가 보이지 않는 아리아케(有明)역에도 호텔이 많은데

그건 아시아 최대의 컨퍼런스 타워 빅 사이트 (Big Sight)가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각종 회의와 전시회가 1년내내 열리는 곳이라서

호텔도 관광 중심의 고급보다는 10만원 초중반대의 납득할만한 가격을 가진 녀석들이 많다. 물론 그래도 나한텐 비싸다.

 

 

 

레인보우 브릿지의 야경이 보이는 장소에 도착.

역시 이제까지의 도쿄여행중 가장 많은수의 DSLR과 삼각대를 구경할 수 있었다.

 

일단은 35mm 단렌즈로 화각을 넓게 잡고 담아본다.

아무리 조명을 밝혔다고 해도 상당히 어두운 곳이라서 삼각대 없는 촬영은 실패 확률이 높다.

 

원거리 야경이다보니 조리개를 마냥 개방할수도 없고 해서, 이 정도가 손으로 담을 수 있는 한계가 아닌가 싶다.

물론 RAW 촬영이다보니 노출 조절의 범위가 커서 어렵지 않게 되살릴 수 있었지만, 이 경우는 최대한 덜 떨리는 사진을 담는게 관건.

F1.4 의 단렌즈로 이 정도지, 70-300mm 의 어두운 줌렌즈를 손으로 들고 촬영하는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려면 감도를 12800 까지 올려야 하는데, 그건 니콘이나 캐논의 플래그쉽 D4, 1DX 정도가 아니면 힘들다.

 

 

 

물론 손으로 들고 찍는 야경사진이란 건 결국 감도를 올릴 수 밖에 없고

본인 노이즈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성격이라서, 사실 마음가는대로 감도를 올려도 아예 못봐줄 사진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할 정도로 감도를 올리지 않으려 노력하는건, 아무래도 위화감 때문일까.

필름 써 본 사람들은 아마도 나처럼 '감도 1600, 3200 정도는 껌처럼 여기는' 지금의 디지털 센서들에 이런 위화감을 느낄거라 생각한다.

해상력을 유지한다는 전제를 달때, 필름은 많이 봐줘도 400 정도가 한계다. 800 이상의 필름은 해상력과는 다른 표현을 위해 사용하니까.

 

일반적으로 허용되는 감도가 400 정도라고 한다면, 증감 현상을 통해서 1600 정도까지는 뻥튀기를 할 수 있다.

이제는 증감 해주는 가게도 별로 없고, 이건 요즘 디지털 사용자들이 알 필요가 없는 내용이니 그냥 넘어가기로 하고.

아무튼, 그런 의미로 본인에게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감도는 최대 1600 정도, 많이 봐줘도 3200 까지다.

그래서 요즘 6400 까지도 잘만 찍어대는 디지털 센서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3200 이상은 손이 가질 않는다.

 

이렇게만 보면 영락없는 삼각대 사용자인것 같지만, 사진보다 여행이 중요한 본인에게 삼각대는 너무나 먼 존재.

 

 

 

 

 

손으로 들고 찍어봤으니 이제는 여행중 몸에 익은 스킬인 '적당한 삼각대 대용 찾아보기'를 시도해 본다.

자전거 여행중에 DSLR을 가지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인데, 삼각대까지 넣고 다닌다는건 좀 미친 짓이다.

그렇다고 어두워지고나서 아예 사진을 안찍을수도 없으니, 어떻게든 방법을 짜내다 보니 대강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요는 카메라를 얹어놓을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된다는 것.

다행히도 적당히 평평한 난간이 있어서 카메라를 얹어놓는다.

그리고는 렌즈때문에 앞으로 넘어지는걸 방지하기 위해 수첩이나 지갑 등을 바디와 렌즈 사이에 끼운다.

높이 조절을 위해서는 지갑 내용물을 다 비워야 할 수도 있지만 그 정도 수고야 삼각대 들고다니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극단적으로 수평이 맞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면 나중에 크롭해서 수평을 맞출 수 있으므로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삼각대에 비해 극단적으로 불안하기 때문에 촬영중 손으로 잡고 있어도 안된다. 손의 떨림에도 금새 결과물에 영향이 나타나기 때문.

당연하게도 셔터 누를때의 진동 역시 감지될 정도로 불안불안한 지지대라서 타이머 기능은 필수.

 

삼각대 촬영의 꽃인 벌브촬영은 불가능하다. 바람만 불어도 결과물이 흔들릴 정도니까 많이 버텨도 30초 정도.

그렇게 해서 찍은 30초 노출 사진이 위의 결과물이다.

 

저 위의 야경사진은 감도 3200 에 1/30초 촬영이고, 이 장노출 사진은 감도 100에 30초 노출시킨 녀석.

사실 원본크기로 봐야 감도에 따른 해상력의 감소 같은걸 느낄 수 있지, 이런 작은 사진으로는 그런거 구별하기 힘들다.

눈에띄게 차이나는건 역시 노출시간의 변화에 따른 해수면의 모습이랄까.

고정된 빛은 노출값만 동일하면 어차피 똑같은 모습이지만, 항상 출렁이는 바다 표면의 경우엔 단노출과 장노출의 모습이 판이하게 다르다.

든든한 삼각대와 ND 필터를 이용한 극단적인 벌브촬영이라면 그 결과는 더욱 극대화되어, 그럴 경우의 바다는 마치 안개속에 파묻힌 듯한 몽환적인 모습이 된다.

 

물론 알고는 있고, 지인거 빌려서 찍어보기도 했지만 본인은 삼각대를 쓸 일이 정말로 드물기 때문에

그냥 그런 멋진 사진은 그렇게 나오는구나 감탄만 하고 말 뿐이다.

여행 사진은 어디까지나 여행 당시의 내 시선과 감각을 따라가는 이정표일 뿐이지, 황홀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실 그런 점에서 현실과 점점 동떨어져가는 야경 장노출 사진을 별로 찍지 않는 것이기도 하고.

 

 

 

물론 지금은 거의 반 장난 형식으로 사진을 담고 있다.

그때는 정말 장난치는 기분이었으니까 여행의 기록으로서도 가치가 있을 듯.

 

적당한 삼각대 대용을 찾았으니 이제는 좀 전까지 찍지 못한 어두운 망원 줌렌즈로 야경을 담아보려 한다.

삼각대는 렌즈의 조리개값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의 아이템이니까.

 

낮에는 고층빌딩에 가려서 힘을 쓰지 못하던 도쿄타워도, 밤이 되니 온몸에 빛의 은총을 받아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레인보우 브릿지에 가리는 형국이라서, 높은 곳에서라면 다리와 타워를 동시에 간섭없이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려면 역시 해변가 4성급 호텔의 수백만원짜리 객실이 필요한가 싶어서, 역시 세상은 돈이구나 하고 한숨 한번 쉬어본다.

 

 

 

야경을 담은 후엔 다시 유리카모메를 타고 시오도메 역으로 돌아왔다.

오다이바는 관광객들만 가서 노는곳이 아니고, 제대로 된 주거시설과 수많은 회사들이 들어서 있는 상업지구라서

출퇴근 시간의 유리카모메는 만만히 볼 녀석이 아니다. 앉을 자리는 없었지만 다행히도 꽉꽉 눌려가며 갈 정도는 아니었다.

 

날씨가 매우 매서워지고 있지만 길을 빙 둘러서 다시 한번 지브리의 거대한 시계탑 앞으로 걸어왔다.

대낮 사진도 찍었으니 밤 사진도 한번 찍어볼까 싶어서.

 

특별히 유명한 관광 스팟이 아니지만, 역시 지브리의 디자인은 둥글둥글하고 온화한 느낌이라서 기분이 좋다.

특정 장소의 조명이 유난히 밝은것을 보니, 아무래도 정해진 시간에 움직이는 인형들이 나오는 곳인가 보다.

 

 

 

시계의 조명 역시, LED를 직접 밖으로 내놓지 않고 숫자 뒤를 비추는 식으로 표현한게 마음에 든다.

디자인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도쿄에서 이 녀석 감상해 보는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사진에 잘 안드러나서 그렇지 상당히 큰 녀석이라서, 작정하고 세부적으로 사진을 담으면

굉장히 디테일한 부분까지 뜯어볼 수 있다. 솔직히 질감이 참 마음에 들어서 직접 만져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동판을 직접 망치로 두들겨서 이어붙인 녀석이라고 하니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지브리 애니메이션에서 지나친 샤프함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와 비슷한 느낌일까.

아쉽지만 두 번의 시도 전부, 인형들이 움직이는 시간대와는 많이 떨어진 때에 도착하는 바람에

이녀석들의 공연은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을 듯 하다.

 

 

 

시오도메에서는 지하철로 숙소 근처까지 바로 갈 수 있으니, 넓직하게 조성된 통로를 걷는다.

예전 포스팅에서 언급했듯이 이곳은 도쿄의 비즈니스 중심단지에 속하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에는, 그 인파 자체가 하나의 볼거리가 될 정도로 이 광장같은 통로가 사람들로 가득 채워진다.

 

남아공에서 너무 느긋하게 생활하던 모 지인 여성은, 한국 와서 그 바쁘고 정신없는 생활력에 굉장히 감동했다고 하던데

그런 사람이라면 출근시간대의 이곳 모습도 한번 소개해주고 싶다. 도시라는 짐승의 혈류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장소.

 

 

 

지하철 쪽으로 걸어가는데 사람들이 가득 모여있길래 뭔가 싶었다.

카렛타 시오도메라는 이름의 이 건물은, 취급하는 장르는 좀 다르지만 테크노마트 같은 구조의 복합단지라고 할까.

47층으로 이루어진 이 건물의 지하와 지상 몇층, 그리고 최상층 몇군데는 각종 쇼핑거리와 까페가 들어서 있지만

중간의 40여층은 그냥 사무실이 입주해 있는 비즈니스 센터다. 이런 구조의 건물을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나하고는 일고의 인연도 없는 곳이라서 한 번도 들어가 본적이 없었는데, 그 카렛타 정문 상태가 심상치 않다.

이게 뭔가 싶어서 자세히 보니, 입구쪽 벽면 전체에 프로젝터용 스크린을 설치하고 영화를 상영하듯이 동영상을 재생중이었다.

아마 앞쪽에 프로젝터 장비가 있을거라고 생각은 하는데, 인파가 가득해서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기술적으로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만큼 큰 벽면에 이렇게 선명한 화질을 뿌려내는 모습은 좀 놀랍다.

 

기술적인 쪽으로 관심이 살짝 가긴 했는데, 이럴때는 그냥 어린애처럼 이론같은거 다 잊어버리고

앞에서 펼쳐지는 뮤지컬같은 분위기에 취하는게 더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시선을 집중하기로 했다.

 

 

 

춤과 노래가 이어지는 전형적인 뮤지컬 방식인데

소리는 잘 들리지 않고 거리는 멀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신데렐라가 아닌가 싶다.

영사 방식이나 작품 내용이나 묘하게 고전적이고 아날로그적인 느낌이 드는게 오히려 마음에 든다.

요즘 쉽게 접할 수 있는 영상매체는 좀 지나치게 디지털을 강조하는 듯 해서 좀 식상하던 참이라.

 

5분쯤 감상하고 있는데 10명쯤 되어보이는 일행이 사진좀 찍어줄 수 있느냐고 부탁해 온다.

예순은 되어보이는 부부와 좀 더 젊은 부부, 아무래도 친구 가족들과 함께 놀러나온듯 싶다.

설정을 이리저리 만지고 건네주는 카메라는 리코의 컴팩트 카메라. 적어도 카메라에 어느 정도 관심은 있는 분인가 보다.

 

한국에서는 그닥 인지도 없지만, 컴팩트 카메라계의 리코는 상급자 지향의 고급기로 정평이 난 회사.

카메라는 그냥 장난으로 만들고, 원래는 일본 유수의 광학회사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유명한 신도리코의 '리코'가 그 '리코'다.

한국에서 오히려 훨씬 인지도가 높은 카메라 브랜드 펜탁스를 이 회사가 인수해버려서, 이제는 리코 산하의 펜탁스 카메라가 될 정도니까.

 

뒤의 저 벽면이 나오도록 찍어달라고 해서 거의 무릎을 꿇다시피 해서 낮은 각도로 프레임을 만들어본다.

오토모드니까 역광보정 정도는 카메라가 알아서 할거라고 믿고 흔들림에만 주의해서 셔터를 누른다.

한장 담고나서 예비용으로 한장 더 찍어드린다. 이건 남에게 사진 찍어줄 때의 불문율같은 것.

 

고맙다고 연신 인사하는 할아버지 일행과 헤어졌는데, 왠지 미소가 아주 자연스럽고 기분좋은 사람이었다는 인상이 남는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서야 깨달았지만, 그 할아버지 역시 나를 외국인으로 보진 않았나보나 싶다.

반나절만에 두 번이라는 숫자는 나름 기억에 남을만한 추억이긴 하다.

 

편의점에서 컵라멘과 뼈없는 후라이드 치킨 한조각 사들고 와서 먹는데 생각보다 훨씬 남은 자금이 빠듯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냥 여행자금으로 생각한다면 내일 하루 충분히 버티고도 남는 금액이지만

부탁받은 선물이 중간중간 급작스럽게 늘어난 탓도 있고, 특히 돌아가는 날이 아주 이른 새벽이라

콜택시를 사용할 수 밖에 없어서, 거기에 대비해 일정 이상의 금액을 남겨놔야 한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내일 식사비조차 아껴야 하는 사태에 직면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서기 시작한다.

 

일단 그건 그거고, 어쨌든 굶어죽을일은 없으니 걱정은 내일부터 하기로 한다.

라멘과 치킨을 뜯으며 TV 보고, 한국보다는 확실히 추운 일본 숙소덕에 좀처럼 가동하지 않는 히터 스위치도 넣으며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