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갑자기 호텔 전화기에서 벨이 울리길래 깜짝 놀랐다.

프론트 직원이 '손님 오늘 콜택시 예약하셨는데요' 하고 말하길래 더욱 깜짝 놀랐다.

예약은 체크아웃 당일인 내일 새벽에 해 놓은거라고 하니까 자기는 'Tomorrow' 라고 들었다고 한다.

어쨌든 내일이라고 확인한 후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시간은 4시 45분쯤.

 

콜택시를 4시 반에 예약했으니, 택시기사는 15분 혹은 20분쯤이나 도로에서 기다리다가 할 수 없이 프론트를 불렀을 터.

본의는 아니라고 해도 괜한 수고를 하게 해서 찜찜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새벽 불시에 잠이 깬 터라 전화기에 제대로 응수를 하지 못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직원쪽의 미스라는 확신이 생긴다.

내가 외국인인걸 알고 있으니 직원은 자꾸 자기가 'Tomorrow' 를 들었다고 이야기하는데

지난번 포스팅에서도 썼듯이 난 일본에 왔을때는 머릿속 생각조차 일본어로 떠올리는데 익숙해 있다.

나하고 얼굴 맞대고 이야기를 해도 내가 일본사람이 아니라는걸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인데

그런 내가 호텔 직원한테 영어를 이야기 할리가 있나? 한국어는커녕 일본어보다 더 못하는게 영어인데 말이다.

 

어느 쪽이든 변명은 필요했을테니 직원에게 악감정을 가질 것까지는 없지만

이런 일이 있고나니 잠은 완전히 깨어버리고, 두시간동안이나 침대에 파묻혀서 당시의 잘잘못에 대해 끊임없이 되짚어보는 고행만이 남을 뿐.

 

조식 먹고나서 문득 네거티브한 생각이 든다. 여행중에는 항상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생겨난 방어기재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아무튼 직원에게는 좀 미안한 가정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 호텔은 새벽시간중엔 프론트가 휴무를 하기 때문에, 이 직원은 괜히 근무시간 외에 잠이 깨서

내 뒷수습을 해 준 셈이다. 그래서 슬그머니 든 짜증일런지, 아니면 순수한 착각의 산물로 인해

내일 새벽의 콜택시 예약을 그만 잊어버리고 만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

 

그다지 바람직한 추측은 아니지만, 어쨌든 오늘로 착각한 콜택시가 그만 취소되어버려서 내일 오지 않는다면

나는 비행기도 타지 못하고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버릴지도 모르니, 이런 경우엔 재차 확인해 두는것도 나쁘진 않다.

 

프론트 직원분한테 다가가자 그쪽에서 먼저 웃으며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여줘서 한결 기분이 풀린다.

내일 콜택시 다시한번 정확히 확인하고, 어제 직원이 내 이야기 받아적던 종이를 다시 펼쳐들었는데

거기엔 분명히 내일 날자가 프론트 직원의 손으로 정확히 적혀있었다. 동그라미까지 친 상태로.

여기서 '이거 봐요. 분명히 내일이라고 적혀있네' 라고 확인사살을 할 수도 있지만

가만히 입다물고 있는 것만으로도 오해만 풀린다면, 굳이 이 친절한 직원에게 면박을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그냥 웃으며 괜히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하다는 인사와 함께 내일 예약시간을 정확히 확인해 두었다.

나같은 사회부적응자 치고는 꽤나 스무스한 일처리였다는 만족감에 조식도 한층 더 맛있게 느껴진다.

 

내일은 새벽 4시 반에 공항으로 출발하니 사실상 오늘이 여행 마지막날.

닛코를 다녀오지 않은 이번 여행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행선지는 미리 정해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콘크리트 정글인 도쿄에서 숨막히게 돌아다녔으니 마지막으로 숨 좀 돌리는 의미로, 일본식 정원에서 산책이나 하기로 한다.

 

 

단지, 지갑속에 남은 현금을 탈탈 털어보니 불안감을 떨칠 수 없긴 하다.

남은 금액이 5천엔쯤 되니, 예정에 없었던 선물까지 계산에 포함하더라도 그리 흥청망청 쓴 것은 아니고

귀국 하루 남겨두고 이 정도면 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수준이긴 하지만

그 모든 계산을 무시하고 날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내일 새벽의 콜택시 요금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가뜩이나 요금 비싸기로는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일본의 택시인데, 콜택시 추가요금까지 붙으니 얼마나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리고 우에노 역에 도착해 거기서 공항까지 전철요금은 약 1천엔쯤.

그러니 콜택시 요금이 거진 2천엔쯤 나오는 최악의 상황으로 가정해 본다면, 오늘 맛있는거 사먹을 돈은 1천엔밖에 없다는 셈이다.

점심, 저녁, 그리고 간간히 먹을 간식을 생각하면, 1천엔으로 하루 버티는건 사실상 편의점 컵라면과 주먹밥 정도가 전부.

 

오늘 산책할 정원 리쿠기엔(六義園)의 입장료와, 거기까지 왕복 차비를 계산하면 1천엔도 남지 않을 가능성마저 있고.

그놈의 새벽출발만 아니었어도 5천엔은 느긋하게 즐길거 다 즐기고 책한권까지 사도 될 금액인데.

 

이렇게 머리 쥐어뜯던 내 고민은 사실, 맥이 풀려버릴 정도로 너무나 손쉽게 해결되었다.

돈이 없으면 ATM에서 뽑으면 된다는 결론에 도달해 버렸기 때문에.

시티은행 카드를 갖고 온게 아니라 저렴한 수수료는 기대할 수 없지만

4~5천원 정도의 수수료를 지불하면 편의점에서도 엔화를 바로 인출할 수 있다.

 

조식 먹고 옆의 편의점 가서 몇초만에 1만엔 한장을 뽑아내니, 이제껏 한 고민은 무엇인가 마음이 허전해진다.

외국 신용카드로는 1만엔 단위로밖에 인출이 되지 않아서 울며 겨자먹기로 1만엔 뽑은게 조금 아쉽긴 했다.

몇분 전까지 돈을 어떻게 세이브해야 할까 고민하던 나는, 갑자기 소지금이 3배로 펄쩍 뛰어버려 돈을 주체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어차피 남겨서 돌아가봤자 환전수수료때문에 손해밖에 못 볼 것. 여행 마지막날을 컵라면으로 때워야 하나 고민했던 나는

한순간에 '오늘은 사고싶은 책이나 사고 먹고싶은거 막 먹고 호탕하게 놀아보자' 라고 자신만만해 있다. 스스로 생각해도 좀 바보같긴 하지만.

 

목표지인 리쿠기엔은 우에노역에서 야마노테선 전철을 타고 바로 갈 수 있기 때문에

또다시 무료 셔틀버스의 힘을 빌어 공짜로 우에노역세 도착한다.

일부러 할 것까진 없지만, 호텔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셔틀버스나 조식같은거 많이 먹고 많이 이용할수록

왠지 이득봤자는 기분에 뿌듯해진다. 이런게 소시민의 소소한 기쁨이려나.

 

 

야마노테선 코마고메(駒込)역에 내려서 조금 걸으면 이곳 리쿠기엔에 도착한다.

도쿄에는 중앙에 큰 연못을 중심으로 돌길이 형성되어 있고, 그 주변을 잔디와 초목이 둘러싸고 있는 전형적인 일본의 '회유식 천수정원'이

접근하기 좋은 곳에 꽤나 여러군데 흩어져 있다. 과거엔 쇼군이나 지역 유지들의 개인 소유 정원이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국가에 귀속되어 문화재나 명승지로 등록되어 있다. 덕분에 이렇게 일반인들도 구경할 수 있는 것이고.

 

사실 객관적으로 본다면 도쿄 내부의 여러 회유식 정원중 이 리쿠기엔이 특별히 더 훌륭하거나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 아니다.

현존하는 도쿄의 모든 회유식 정원은 지진, 화재, 전쟁등으로 오리지날이 사라진지 오래고, 모두 전후 재건된 것들이니까.

 

그런 것들 재쳐두더라도, 이곳 리쿠기엔에 비해서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 훌륭한 경치와 매력을 가진 정원 역시 없지 않다.

구 시바리큐온지 정원(旧芝離宮恩賜庭園) 역시 경치가 빼어나고, 코이시카와 코라쿠엔(小石川後楽園) 같은 중국식 감각이 남아있는 정원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도쿄가 콘크리트 정글임에도 서울보다는 낫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큰 이유중 하나가 바로 이들 회유식 정원이 곳곳에 가동중이기 때문.

복잡한 빌딩숲에 둘러쌓여 있어도, 전철 조금만 타면 도쿄 어디에서든 자연 가득한 정원에서 산책을 즐길 수 있다는 요소가

도시로서의 가치에 얼마나 큰 차이를 가져다 주는지, 직접 다녀보지 않으면 실감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 가보지 않은 정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번 와본곳인 이곳 리쿠기엔을 다시 찾은것은

새로운 정원을 탐미하는 즐거움보다, 예전의 추억을 다시 곱씹어 보는 즐거움이 더 클 것이라는 개인적인 판단 때문이다.

 

 

이곳은 생애 첫 자전거여행을 시작한 2008년, 도쿄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찾아간 정원이기 때문에.

첫 자전거 여행으로 짐 40kg 가까이 싣고, 장거리 여행전용 자전거를 사고, 막 발매된 니콘 D700 과 렌즈군을 들고

도쿄에서 홋카이도 최북단까지 약 2000km 정도를 달릴 생각에 흥분도 되고 불안도 하고 정신없는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아늑한 정원이나 산책하면서 마음을 좀 다스리자고 생각하고 찾아온 곳이 여기 리쿠기엔이었다.

그때는 9월이라 도쿄는 아직 한창 더울때였고, 마음을 다스리는데는 훌륭하게 성공했다고 자신할 만큼

고즈넉하면서도 생명력 넘치는 모습에 매우 만족했었는데, 문제는 모기가 창궐하기 딱 좋은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터라

산책하고 사진찍는동안 정말 미친듯이 모기에 물어뜯겨서, 팔다리에 근육이 불어난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마음은 편안해지고 몸은 가려워지는 이면적인 성과를 안고 출발한 자전거여행은 나름 재미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긴 여행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었던 이곳 리쿠기엔이니

이번엔 오랜만에 찾은 도쿄 산책의 마지막 코스로 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것이다.

 

지금은 겨울이니 더 이상 모기의 습격에 벌벌 떨 필요는 없을테고

반대로 숨막힐 정도로 생명력을 뿜어대던 이곳의 초목들은 지금 꽤나 느긋한 겨울잠 중일 듯 하다.

실제로는 벚꽃과 낙엽으로 도쿄 내에서 가장 유명한 명승지라서

봄과 가을 시즌이 되면 지금처럼 느긋하게 둘러본다는 건 꿈도 못꾸는 호사가 되어버리니

멋진 풍경도 인파에 치여가면서는 보고싶지 않은 나에게는 지금같은 시기가 어울릴 법도 하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맨 먼저 보이는 빨간 의자와 양산.

자연적인 붉음과는 다른 강렬함이 항상 첫 번째로 눈길을 끈다. 나름대로 괜찮은 전략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입구 지나치자마자 지칠 일은 없으니 항상 이곳은 텅 빈채로 담게 된다.

이곳은 입구와 출구가 같은 곳이라, 정원 산책을 한바퀴 끝내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으니 그때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도 많긴 한데.

 

 

아직 제대로 된 정원 내부엔 들어가지도 않았지만 기분은 굉장히 좋다.

2008년 첫 장거리 자전거 여행때문에 잔뜩 긴장해서 심히 우울했던 나에게

아주 훌륭한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 준 곳을 다시 한번 찾게 된 즐거움이기도 하고.

 

이번 도쿄 여행중 제대로 된 산소 한번 들이마시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상쾌하기도 하고

의도치않게 매번 해질녘이나 해가 지고나서 카메라 셔터를 누를일이 많았기 때문에

이제야 화창한 날씨아래서 마음껏 카메라질좀 할 수 있겠구나 싶기도 했고.

 

입구 언저리에 아직 단풍이 남아있는걸로 봐서, 완전히 황량한 리쿠기엔을 상상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본인은 그런 황량한 정원도 얼마든지 좋아한다. 자연의 모습은 활기차던 숨죽이던 모두 빠트릴것 없이 멋지니까.

 

 

요즘들어서는 카메라를 꺼내는 일이 좀 줄어들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곤 한다.

이번 도쿄 여행사진을 봐도, 외국에 여행까지 와서 최고급 카메라 장비 들고 고작 하루에 50~60장 찍은게 전부다.

물론 요즘 유행하는 미러리스나 컴팩트나 휴대폰 사진에 비하면야 꺼내들고 조준하기 여간 힘든게 아니니

셔터 수가 줄어드는건 자연스러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여행사진이 하루에 50~60장이라는 건 그리 많은 편이 아니라고 생각.

 

하지만 오늘같은, 정원을 산책하는 날에는 유난히 셔터횟수가 늘어나는게 내 성격인가보다.

입구에서 10m 밖에 걸어들어가지 않았는데 벌써 사진이 4장째다. 어제까지는 4장 찍으려면 30분 정도 걸렸는데.

사실 도쿄라는 콘크리트 정글속에서 뭘 더 찍어야 할지 난감했던 것도 있고

리쿠기엔은 나에게 많은 의미를 지닌 곳이라, 평소보다 더욱 반갑고 기분이 들뜬 탓이라고 생각하는게 좋을 듯.

 

 

구름 한 점 찾아보기 힘든 청명한 날씨다. 도쿄에서 이정도로 맑은 날을 보는건 드문 일.

물론 서울보다는 확률이 조금 높긴 하지만, 그래도 이만큼 맑은 날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이 때가 12월 초였는데, 한국과 일본 동북부 전선이 묘하게 정체되어 있는 바람에

한기류가 정체된 곳에서는 눈도 어마어마하게 오고 날씨도 매우 매섭고 그랬던 시기다.

도쿄는 그런 전선의 바로 밑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날씨도 따뜻했고 아주 깨끗한 하늘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단지, 구름이 전혀 없는 탓에 오전부터 아주 강렬한 햇살이 내리쬐이고 있는 실정이라

이곳 정원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상당히 강하고 진한 모습으로 고정되어 버리는게 살짝 아쉽다.

이런 곳은 은은한 풍취가 어울리는데, 지금은 본인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보다 대비가 좀 더 강해보인다.

 

물론 흐리멍텅한 날이나 비오는 날보다는 나으니, 분에 겨운 투정할 필요없이 줄기차게 셔터를 누를 뿐.

 

 

자전거 여행 도중에도 도쿄는 몇번이고 거쳐갔지만

이곳 리쿠기엔을 찾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한 곳이었으니

여행이 끝나기 전까지 다시 찾고픈 생각이 없어서였을까.

 

지금에 와서는 그때의 흥분과, 여행 직후의 무기력 상태도 많이 호전되었고

도쿄에서의 도시냄새나는 여행을 마무리짓기엔 역시 이곳의 힘이 필요하다는 기분이 든다.

 

앞에 보이는 건물은 별도 예약과 요금을 주고 들어갈 수 있는 차실로

일반 관광객들이 산책하는 도중에 차 마시는 가게가 아니다.

건물이나 좀 직어볼까 싶어서 다가갔는데, 사실은 저 위의 대나무 입구에서부터

여기까지 전부 저 차실 예약하지 않은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이다.

 

제대로 돈을 내고 집회실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니 납득은 가지만

오늘은 저곳을 사용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슬쩍 들어갔다 나와도 뭐라 할 사람 없다.

애초에, 정말로 나이 지긋한 단체 몇몇을 빼면 저기를 이용할 사람이 별로 없기도 하고.

일단 도쿄의 주요명승지로 지정되어 있는 이곳은, 대실을 한다고 해도 흡연, 음주 불가, 음악 등의 큰 소리 불가등의 제약이 있고

말 그대로 차분하게 차와 간단한 식사를 즐기며 정원 풍경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곳이니까.

내가 애늙은이 소리 자주 듣는 편이지만, 젊은층이 이런 곳에서 모임 가지지는 않을거라 본다.

 

 

언제 찾아와도 뭐라 그리 겁나는지 새파란 얼굴로 맞아주는 소나무 덕분에

정말 한적한 겨울의 리쿠기엔도 생명의 향기가 느껴지는 듯 하다.

 

겨울 오전중에 이곳을 찾는 사람은 별로 없어서, 산책은 거의 혼자 하는 수준이라 다행이다.

오후부터는 날씨도 풀리고 하니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듯 하다.

그래봤자 꽃놀이 단풍놀이 하는 시기에 비하면 텅텅 빈 것이나 마찬가지니 별로 신경쓸 건 없고.

 

 

저기 수용인원이 총 25명이고, 전실을 하루 통째로 빌리면 12만원쯤 하던데

6개월 전부터 이용할 수 있으니 아마 시즌 무렵은 이미 꽉 차있을듯 하다.

 

단풍구경은 둘째치고, 벚꽃구경에는 술자리가 빠지면 섭섭한 일본사람들이라서

음주가 금지되는 이곳 리쿠기엔은 조금 아쉬운 생각 드는 사람도 많을 듯.

눈처럼 깔려있는 낙엽의 파도들이, 화려했던 시기의 이곳이 남긴 조그마한 여흥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이 난리치고 난 뒤의 모습은 별로 보기 좋지 않지만

자연의 잔치는 그 뒷모습도 여윤을 남기곤 한다.

 

 

사실 입구에서 제대로 된 루트를 밟으면 맨 처음 눈에 들어오는게 이 모습이다.

도쿄에 와서 5일동안 나무다운 나무, 숲다운 숲, 공기다운 공기를 접한 적이 없다가

이렇게 이곳에 오고 나니 왠지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평일 오전이라 사람도 별로 없어서, 멀리 담 너머 들려오는 도시의 잡음조차도

이곳에서는 적당히 자극을 주는 일종의 리듬으로 들리는 듯 하다. 시각적 풍요로에 청각 역시 너그러워지는 기분.

 

이렇게 보면 겨울이라도 충분히 푸르네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지금 이 풍경은 1년중 가장 쓸쓸한 모습이다. 겨울이라서 이것밖에 안되는 것이다.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것 같아서 2008년 9월에 비슷한 위치에서 담았던 리쿠기엔의 모습을 풀어본다.

봄엔 벚꽃, 가을엔 낙엽으로 색이 풍부해지지만, 여름부근까지는 그런 거 없다.

산책하고 있으면 마음도 잔잔해지는 곳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의 폭발하는 듯한 생명력의 향연은

도쿄 시내에서 없어서는 안될 오아시스 역할을 톡톡히 해 준다. 물론 요즘엔 에어콘 있는 곳이 더 편하겠지만.

 

 

지금은 겨울에다가 오전이고 해서, 정원은 아직 잠이 덜 깬듯한 차가움을 보여준다.

생각했던 것 보다는 단풍이 조금 더 남아있다고 해야 할까.

반대로 생각하자면 한창 가을무렵의 단풍이 너무도 대단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정원이란 곳이 그렇다.

어느 계절에 오던 모습이 워낙 달라서, 눈 앞의 풍경에 즐거워하면서도

다른 계절의 모습은 또 얼마나 다른 매력을 보여줄 것인가 궁금해져서, 또 다시 찾게 된다.

내 입장에서는, 리쿠기엔은 늦여름과 초겨울의 모습을 감상했으니 이제 봄과 가을이 남았는데

꽃놀이 무렵의 도쿄는 사실 내 상성과 심히 맞지 않는 곳이라 꺼려지긴 한다.

 

뭐, 평일날 아침 일찍부터 찾아온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구경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도쿄가 아닌 한적한 시코쿠의 정원에서는 인파가 꽤나 붐볐음에도 불구하고 꽃구경 실컷 했으니까.

 

막 걷기 시작했을 뿐이라 지치진 않았는데, 벤치에서 낙엽 감상이라도 할까 싶어 잠깐 앉는다.

2008년의 리쿠기엔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지만 주위를 둘러볼수록 그 때의 모습이 조금씩 머릿속에 그려지는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