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다씨가 추천해준 요코하마의 관광지는 라멘박물관이라는 곳.

이야기는 들어본 적 있다. 자전거 여행때도 이곳에서 발을 멈췄다면 분명 그곳부터 들러봤을 듯.

하지만 자전거 여행 마지막에 들른 요코하마인데다, 며칠전 온천으로 유명한 아타미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한 뒤라서

이런 번화한 도시는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그냥 통과한 후, 고양이들이 기다리는 느긋한 섬 에노시마에서 마지막 노숙을 즐겼던 기억이 난다.

 

라멘박물관이란 건 확실히 군침이 돌긴 했는데, 그거 하나만을 위해서 요코하마까지 갈 필요가 있나 하는게 이전까지의 생각이었고

도쿄 오다이바의 라면국기관, 홋카이도 삿포로의 라면공화국 등등과 별로 다르지 않은 곳일거라는 판단도 들었다.

확실히 각 지역의 다양한 라멘을 일정 수준 이상의 맛으로 즐기기에 나쁘지 않은 곳이지만

어설프게 옛날 마을 분위기를 흉내낸 그런 라멘전문점이란게, 관광 스팟으로 지정할 만큼의 가치는 없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시다씨가 너무나 흔들림없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라멘박물관을 추천해 주니

이건 내가 알고있던 다른 지역의 그렇고 그런 라멘가게 모음집과는 다르다는 예감이 든다.

이 사람이 오다이바의 라면국기관 같은 곳을 나한테 추천할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니.

 

슬쩍 떠보는 말투로 라멘국기관 같은 곳이냐고 물어보자, 분위기는 그런 곳인데 차원이 다르다고 한다.

일본에 존재하는 그런 류의 라멘판매점의 원류가 되는 곳이 이곳 요코하마의 라멘박물관이고

다른 곳과는 비교하는게 부끄러울 정도의 퀄리티라고. 볼거리도 많지만 입점해있는 라멘가게들의 실력 역시 전국 최상위권이란다.

라멘의 성지같은 곳이라서, 그곳에서 점포는 낸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 맛을 인정받을 정도.

 

얼핏 관광가이드에서 봤을때는 라멘공화국 등등과 별로 다를것 없나 싶었는데

역시 가이드에서 선전용으로 떠드는것과는 차이가 있나보다.

 

일행들과 차례차례 헤어지고, 활기넘치는 여성 한분이 갈아타는 곳 가르쳐 주겠다며 함께 했는데

전광판에 적혀있는 단어로 보건데 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요코하마 거주중인 사람이 가자는데로 따라갔다.

하지만 역시나 그쪽의 착각으로, 갈아타야 할 곳을 지나쳐서 한 정거장 더 와 버렸다.

아무리 요코하마 거주중이라도, 술의 위력에는 다들 계란 말이가 되는 법.

중간에 발이 휘청해서 내가 부축해주기까지 했으니. 결국 그 여성분은 연신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별로 화난건 아니고.

그래도 이 사람들 딴엔 한국서 처음 오는 사람을 위해 최대한 가이드를 해 주려는 마음이었으니.

 

그 자리에서 내가 술을 제일 적게 마셨기 때문에, 사실은 내가 그사람들 배웅가줘야 아닌가 생각도 들었지만

일단 모두와 헤어지고나서 한정거장 돌아와 신요코하마역으로 이동한다.

일본의 적지 않은 대도시가 그렇듯, 도시 이름이 들어가는 역보다 '신' 이 앞에 붙은 역이 더 화려한 경우가 많다.

낮에 왔다면 이런 호화찬란한 쇼핑몰에서 시간 보내는것 역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겠지만

오늘은 이시다씨 토크 라이브 듣는데 모든 시간을 다 할애했으니까. 물론 후회는 없다.

 

 

 

대강 신요코하마역에서 동서남북만 계산해서 무작정 걷는다.

 

혼자 여행할 때의 나쁜 버릇이라면 나쁜 버릇인데, 지도같은거 그냥 머릿속에 잠깐 그려볼 뿐이고

대강 목적지가 표시된 방향으로 그저 걷고 걸을뿐. 그래서 목적지를 지나치는 경우도 많고, 빙 둘러서 시간 걸릴때도 많다.

하지만 시간에 구애되지 않는 여행이기도 하고, 그렇게 의미없이 걸어다니며 그 지역의 분위기란걸 조금이나마 피부로 느낄 수 있으니까.

목적지만을 향해 돌격 앞으로 하는 여행은 역시 다른 사람과 함께 가는 여행만으로 족하다.

 

그런고로, 이번에도 한바퀴 빙글 돌아서 라멘박물관에 도착. 마음먹고 찾으려고 했어도 그리 쉽게 찾을곳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냥 발걸음 가는대로 걸어가던 내 앞에서, 일가족들이 두리번거리며 라멘박불관 찾고 있는 모습을 봤으니까.

특히나 밤에 오게되면, 정말로 겉에서 봐서는 어디가 라멘박물관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평범한 현대식 건물이다.

 

너무 평범해서 외부 사진 찍을 생각조차 잊어버리고 그냥 들어가 버렸으니까.

다른 지역의 라멘 테마파크와 달리 이곳은 입장료라는게 존재한다.

어차피 라멘도 돈내고 먹어야 하는데 어째서 입장료가 따로 필요한건지.

하지만 그건 도쿄나 삿포로의 라멘 파크에서나 통하는 말이고, 이곳은 입장료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이시다씨가 추천해 줬으니.

저녁 8시 30분은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지만, 일본에서라면 대다수의 관광지는 폐점했을 시간대라서

휴일이지만 입장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 정도면 라멘 먹을때 줄서서 기다릴 필요도 없을 듯 하다.

 

맛있는 라멘은 너무나 좋아하지만, 아무리 맛있어도 몇십분씩 기다려 식사하는것에는 큰 거부감을 느끼는 성격이라서

이런 곳에 올때면 항상 긴장하게 된다. 특히 점찍어놓은 라멘가게가 있다면, 그곳을 포기할것인가 줄서서 기다릴것인가에 대한 문제로까지 번지기도 하고.

 

박물관에 들어가자 라멘을 파는 가게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어디 프라모델샾에 들어온거 아닌가 싶은 풍경이 펼쳐진다.

슬쩍 둘러보니 아무래도 1층은 그냥 출입구 + 기념품점 정도의 역할만 할 뿐이고, 본격적인 구경은 지하로 내려가서 시작하는 듯.

 

입구 앞의 거대한 대자보에는 카모메식당이라는 단어와, 그 주위를 무수히 감싸는 응원댓글이 빼곡히 적혀있다.

카모메식당이라는 단어만 봐서는, 어째서 이렇게 대자보에 붙어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바로 위를 보니 금새 이해가 된다. 이 카모메 식당은 미야기현 케센누마(気仙沼)의 대표로서 이곳 박물관에 입점한 것.

 

케센누마는 지난 후쿠시마 대지진때 가장 극심한 피해를 받은 곳이다.

지진 당일 자정무렵부터 방송되던, 마을 전체가 불길에 휩싸인 케센누마의 모습은 잊혀지지 않는다.

말 그대로 지옥이라는 표현밖에 생각나지 않는 모습. 오일 탱크가 터져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암흑과 불길 뿐.

인구 7만 5천의 아늑한 항구마을은, 인구의 80%인 6만명이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이곳 카모메 식당은 원래 케센누마에서 유명한 라멘집이었다는데

케센누마 복구를 위해 케센누마출신의 도쿄 라멘집 사장님이 이곳에 입점했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카모메 식당을 응원하기 위해 한마디씩 힘을 보태고 있다.

영화 카모메 식당을 본 사람들도 많을거라 생각하는데, 현실은 훨씬 잔혹할 뿐이지만

그래도 역시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게 되는 것은, 사람들의 유대감 밖에 없다고 본다.

영어는 물론 아랍어인지 러시아어인지 모를 언어도 적혀있는걸 보니, 뭔가 굉장하다는 생각.

 

 

 

대자보 반대편에는 뭔가 다양하기 그지없는 라멘 소개가 벽면 가득히 펼쳐져 있다.

한국 역시 라면시장의 경쟁은 상상을 초월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스턴트 라면이고

이곳에서는 라멘도 하나의 요리에 들어가는터라, 기상천외한 비법과 조합을 가진 라멘이 수두룩하다.

 

맛이 있을지 없을지는 둘째치고, 일단 이 정도 다양한 라멘이라면 한번씩은 먹어봐야 평가라도 할수 있을텐데.

이 날은 이시다씨 토크 라이브가 목적이었고, 라멘박물관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한 여흥에 지나지 않았지만

일본 최고를 자랑하는 지역 라멘들의 각축장인 이곳에 오니, 역시 아쉬운 느낌을 금할 수 없다.

 

어차피 지금 상태로는 한그릇밖에 못먹을테니까. 아무래도 요코하마에 다시 가봐야할 이유가 생기는 듯 하다.

물론 아직 이곳 라멘을 먹어보지 않았으니, 그냥 입소문 뿐인 곳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었지만

맛에 대해서 여행만큼이나 일가견이 있는 이시다씨가 적극 추천한 곳이니 맛없지는 않을거라 생각은 한다.

 

 

 

늦은 녀석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던 탓일까

루트를 완전히 거꾸로 잡아서, 라멘 다 먹고 다시 올라올 때 들러야 할 기념품점으로 들어가버렸다.

어차피 여기서 라멘 사갈 생각은 없으니 큰 문제는 없다.

 

지하에서 경합중인 라멘가게들의 면과 스프 등이 가지런히 포장되어 전시중이다.

일단 면과 스프 육수 등등, 모두 가게에서 직접 만드는 녀석들이라 확실히 인스턴트보다는 맛있겠지.

하지만 인스턴트가 아닌 고로, 한 봉지 8천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가격을 자랑한다.

이렇게 되면 가게에서 다 만들어져 나오는 녀석과 가격차이가 거의 없다.

직접 집에서 만들기엔 너무나도 손이 많이 가는데, 거기다 가격까지 이 정도니...

물론 남에게 선물하는 용도로는 나쁘지 않을듯 하다. 어쨌든 이곳 외에서는 구입할 수 없는 특산품이니까.

 

 

 

라멘박물관은 1994년 설립된 세계 최초의 라멘 테마파크로

세워진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1950년대 후반의 도쿄 거리를 매우 훌륭하게 재현해 놔서

라멘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 재현된 길거리 풍경에 반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러나저러나 추억을 가장 중요한 마케팅 포인트로 잡은 곳이라서 그런지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어린시절 로망을 불태웠던 장난감 자동차 서킷이 1층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영업시간이 끝나서 레이스의 열기까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어릴때 봤다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큰 서킷이 인상적.

나 어릴때는 이런 서킷이 없어서 그냥 자동차나 조립해서 아파트 놀이터에서 달리곤 했었는데.

 

워낙 본격적인 서킷이라 그런지 상금이 걸린 대회도 벌어지는 듯 하다. 구경만큼은 한번 해보고 싶다.

 

 

 

라멘가게의 도구들. 실제로 1960년대에 쓰이던 것들이긴 한데

옛것을 바꾸길 싫어하는 일본의 특징답게, 사실 지금도 상당수의 라멘가게에서 당연한듯 사용중인 것들이다.

 

일본은 특히 음식가게 점원들의 목소리가 큰게 특징인데

주방 사람들은 손님을 맞이하러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찌렁찌렁 울리는 '어서옵쇼!' 가 고육지책으로 자리잡았다.

이제는 문화의 한 부분으로 굳어져서, 접대 목소리가 작으면 매상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게 일반적.

 

물론 현대식 식당이나 고급 일식당, 양식당 등에서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다. 규동이나 라멘등의 서민음식점에서의 이야기.

 

 

 

이곳 라멘박물관에 적혀있는 빼곡한 지역별 라멘 연대기를 다 읽어보려면

최소 몇시간은 걸릴 듯 해서 포기하고, 나도 알고있는 일본의 4대 라멘을 담아본다.

 

삿포로의 미소라멘, 도쿄의 쇼우라멘, 키타가타의 쇼유라멘, 큐슈의 돈코츠라멘.

키타가타는 도쿄에서 그리 멀지않은 거리라 특색은 떨어지는 편이지만, 아침식사로 라멘을 먹을 정도로 라멘매니아가 많기도 하고

곱슬머리에 가까운 꼬들꼬들한 면발을 유지하는게 그쪽만의 특징이기도 하다. 정통 키타가타 라멘은 도쿄 라멘과 확실히 다르다.

 

2008년 자전거 여행때는 키타가타 라멘에 대해서 전혀 몰랐는데, 우연히 그곳의 조그만 식당에서 먹었던 라멘과 교자의 맛은

내가 뭔가 숨겨진 맛집에 들어온건가 싶을 정도로 굉장히 맛있어서, 처음으로 키타가타 라멘의 위용을 실감하게 해 줬다.

 

글쎄, 한국사람 입맛에는 삿포로와 큐슈의 라멘이 들어맞지 않을까 생각은 해 보는데

짠걸 못먹는다는 사람은 일단 일본라멘이란 것 자체를 포기해야 하니까.

본인 역시 기분같으면 하루 네 그릇 정도 라멘을 먹어도 전혀 질리지 않을 것 같지만

나트륨 덩어리인 일본 라멘을 그러게 먹다간 정말 죽어버릴것 같기 때문에 참고 있을 뿐이다.

 

여행 자전거 여행때는 별 걱정없이 하루 두 그릇 정도는 헤치웠다. 땀을 워낙 많이 흘렸으니까.

 

 

 

1층엔 대자보, 기념품점, 라멘의 역사, 레이싱 서킷 정도가 볼거리다.

사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라서, 아직은 별 감흥이 없다.

 

하지만 이 서킷만큼은 정말 굉장하다. 장난감 레이싱에 크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국민학교때는 프라모델 조립으로 돈 꽤나 날렸던 역사를 갖고 있는 본인이라서

가끔 서킷을 갖춘 곳을 찾아가서 구경하곤 했는데, 이 서킷은 여지껏 본 녀석중에서 가장 큰 녀석이라 놀랐다.

 

8살~13살 정도의 나이에 이곳을 부모님과 함께 찾아오게 되었다면, 이 서킷에서 자기 자동차가 달리는 모습을 꿈꾸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은 서킷을 달리는 자동차보다, 색바랜 채로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프라모델이 더 눈길을 끈다.

대부분이 자동차 종류이긴 한데, 단순한 최신 제품이 아니라 분명 빈티지급으로 보이는 녀석들도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극히 평범한 건담류 프라모델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자동차 중심, 물론 RC 헬리콥터 같은 녀석들도 있다.

 

나이 들어도 이런 취미 가진다는거, 사실 꽤나 동경하는 성격이다. '어른이' 혹은 '키덜트'라는 표현도 칭찬으로 들린다.

나이 처먹어야 생기는 취미라는게 딱히 더 엘레강스하고 럭셔리하게 보일 이유가 있나 싶으니까.

이런 걸로 행복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효율적인 인생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1층 구경을 대강 끝내고 본격적인 라멘 탐방을 위해 지하로 내려간다.

지하로 향하는 통로는, 마치 목욕탕 입구를 보는 듯한 타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람이 바글바글할때는 몰라도 혼자서 이렇게 내려가고 있으니 괜히 부담된다.

영업시간은 확실히 확인하고 왔지만, 유명하다는 곳에 이렇게 사람이 없으니 그건 그거대로 겁이 나는 법.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는 순간부터 과거로 시간여행하는 기분이 들 수 있도록

세심한 부분까지 모두 철저하게 50~60년대풍을 연상시키는 소품들로 채워져 있다.

때묻은 거울과 낡은 맥주 간판, 의도적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몇개 빠져있는 바탁 타일까지.

 

일단 여기까지만 봐도, 오다이바나 삿포로의 라멘 테마파크들과는 위용이 다르다는걸 실감할 수 있는데

과연 이시다씨가 극구 추천해 준 이곳의 본모습이 어느 정도일까 점점 기대가 고조되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