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예모 감독만큼 필모그라피에 극단적인 변화를 추구한 감독이 또 있을까.

비록 그의 작품 전반에 깔려있는 시각적 미장센의 극단적인 추구라는 요소는 데뷔 이래로 변한 게 없지만
훗날 중국을 대표하는 감독으로서 이름을 날리게 될 듯한 느낌을 충분히 전해주었던 데뷔작 붉은 수수밭(紅高梁, 1988)에 이어
개인적으로 감독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홍등(大紅燈籠高高掛. 1992)을 볼 당시만 해도 그 믿음은 현실로 이루어지는 듯 했다.

기술과 노하우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영상미로 시선을 사로잡던 서극 감독이
거대 자본과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단시간에 그 매력을 습득해버린 헐리우드 영화에 밀려버린 반면

색의 대비를 통해 전달의 힘을 극대화시키는 장예모 감독의 미적 감각은
과연 누가 이 감각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강렬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감상한 그의 작품 영웅(英雄, 2002)에서
그는 마치 공산당에게 끌려가 페이스오프를 당한 가짜 감독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큰 변화를 보여줬다.
분명 영웅이라는 작품에서도 눈을 떼지 못할 정도의 아련하고 절제된 영상미는 빛을 잃지 않았지만
황당할 정도의 극단적 주제의식이 작품 전체에 듬뿍 발려있는 모습은
감독의 전작들을 경험한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분명 중국 정부에서 엄청난 지원금을 받은 작품이고, 그네들이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작품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은 사실이지만
장예모 감독의 필모그라피에서는 추악한 사생아로 이름 남겨지지 않을까 내심 걱정되었는데
그 다음 작품 연인(十面埋伏, 2004)를 본 후로는 반쯤 기대를 접은게 사실이다.

그 후에 야연(夜宴, 2006)을 만든 풍소강 감독에게 기대감을 넘기는게 좋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으니.

20년 전의 장예모에게서 느꼈던 기대감은 그렇게 무참히 무너졌고
이제 이 감독에게서는 눈을 돌리는게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황후화라는 작품 역시, 중국 사상 최대의 제작비가 들어간 스펙타클한 작품이라는 소문이 돌 때부터
아예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긴 했다. 그 제작비는 다 어디서 나온 건가.
이 작품이 개봉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장예모 감독은 중국의 영웅이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중국 공산당의 영웅이라고 하는게 맞겠다.

하지만 무심결에 보게 된 이 작품은 또 한번 나에게 심각한 고민거리를 안겨주게 되었다.
다시 한번 기대를 걸어볼 만한 감독이 아닐까 하는.

역시 예상대로 이번 작품에서는 물주인 공산당 측에서 엄청난 비난여론이 일어나고
금새 장예모 감독은 중국을 욕먹이는 저질 폭력씬이나 찍어대는 삼류로 탈바꿈하고 말았다.
꽤나 화려한 수익을 올리긴 했지만 장예모 감독 영화중에서는 가장 욕도 많이 먹었고.

수천 명에 가까운 엑스트라와 역사상 어느 작품에서도 볼 수 없었던 찬란하기 그지없는 미장센도
과격하고 엉성하기 그지없는 작품의 스토리텔링에 묻혀버린 느낌이 든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 작품이 장예모 감독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아도 될까 하는 이정표가 되었으니
이는 그의 전 작품들에게서 실망했던 점이 어느 정도 해소되고,
일정 수준까지는 예전의 작품 성향을 되찾은 듯한 느낌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작품의 제목인 '滿城盡帶黃金甲'은 한국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중국 역사중 '황소(黃巢)의 난'의 주인공
황소가 쓴 '국화'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인데, 독특하게도 실제 작품의 내용은 중국의 희극인 뇌우(雷雨)의 리메이크다.

영화 외적인 부분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시대 배경은 황소의 시구가 쓰여졌던 때와 비슷하고, 내용은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뇌우와 거의 동일하니
이 정도로 제목과 내용이 묘하게 어울리는 작품도 별로 없을 듯.
더군다나 '滿城盡帶黃金甲'의 뜻은 '온 성안 모두가 황금갑옷을 두르리'라고 하니 그야말로 직설적인 제목이다.

항간의 평가처럼 '스펙타클 부부싸움'이 이야기의 전부인 이 작품은
내가 좋아하는 장예모 감독의 전작들처럼
어두운 욕심과 광기에 사로잡혀 처절하게 무너지는 인간 군상의 자화상을 여지없이 그려내고 있는데
특히 그 광기에는 선악의 구분이 없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그러하다고 말하는 듯한
허무할 정도의 염세주의가 살짝 서려있는 작품이다. 그래서 보고 나면 기분이 참 더러워지기도 하고.

거기에 인간 세상이 아닐 정도로 화려한 황궁의 모습이 겹쳐지니
웅장한 금빛 황궁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지독한 감옥으로 변신한다.
손가락 하나로 수천 수만명의 목숨을 유린하는 절대 권력의 황실에서
세상의 온갖 추악함이란 추악함은 다 모아놓은 듯한 암투를 벌인다는 설정이
아주 불쾌하게 다가올 계층은 과연 누구일까. 그거야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이번 작품엔 의외로 코믹한 요소도 꽤나 실려있는데
피비린내가 화면 밖으로까지 풍길 정도의 살육이 끝나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착착 청소되는
황궁 내부의 모습과, 기계로 착각할 만큼 일사분란한 청소부(?)들의 모습에서
현대 중국 지배계층의 일그러진 모습이 투영되는 듯 해서 계속 웃음이 멈추질 않았더라.

공산당 측에서 그렇게 갈갈이 열받아 날뛰는 이유는
퍼부어준 돈만큼 지배계급을 우월한 성군의 존재로 표현해주지 않았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카리스마 덩어리 주윤발이 역을 맡은 황제는 그야말로 쪼잔함과 소심함의 극치를 달리면서도
겉으로는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는 압도적인 지배자로서의 모습을 끝까지 냉철하게 유지하고 있으니
이걸 이해할 정도의 머리를 가진 공산당 측에서는 얼마나 열이 받치겠나.

장예모와 오랫동안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던 공리 역시 주윤발과 함께
이 빈약한 작품에 힘을 불어넣어 주고 있는데, 이 둘의 연기가 너무 굉장한 수준이라
나머지 인물들을 꼭두각시처럼 만들어 버리는 일종의 부작용까지 만들고 만 듯한 느낌.

제작비에 비해 정말 소박한 영화이고, 도저히 메이저 시장에서 받아먹일만한 묘사가 아닌데도
아마 나처럼 예전의 장예모를 추억하며 일말의 희망을 갖게 된 사람들이 적진 않을 것 같다.
전개도 상당히 엉성하고, 인물들간의 비중 분담에 실패해서 작품 전체의 균형성을 봤을 때
결코 수작의 범위에 들어간다고는 하기 힘든 작품이지만
중국 공산당이 갈갈이 날뛰는 반대급부만큼 여러가지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작품이다.

물주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힌 장예모 감독의 다음 작품이 그래서 더욱 기대가 된다.

Play Station
주걸륜의 엔딩곡 '국화대(菊花台)'는 참으로 심금을 울린다.
국내엔 CD가 발매되지 않은 것 같아서 중국 사이트에 넘쳐나는 음악을 다운받았는데
만약 정식발매가 되었다면 바로 구입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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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야생고양이의 잠자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아니, 애초에 '잠'이라는 행위를 편안하고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야생동물이 얼마나 될까.

그 중에서도 고양이란 녀석은 특별하다.
수천년동안 사람과 함께 지내왔고, 그 뛰어난 적응력으로 대다수의 야생동물들이 절멸한 대도시 안에서도
여전히 밤의 지배자로, 밤의 도둑놈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으니까.


하지만 소음과 기척에 민감한 고양이가 도시에서 생활한다는 건 말만큼 쉬운 일이 아닐 듯.
도시의 야생고양이들은 안심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지나가는 모든 것들이 자기보다 위협적인 존재로 가득한 곳.

유린해야 할 상대는 거의 사라지고, 과거 자신의 먹잇감들이 하던
쓰레기나 뒤지는 일에 익숙해져버린 도시의 최하층 천민인 고양이는
이미 막강한 포식자의 위치를 잃어버린지 오래.


가식적이든 지능적이든 사람의 손길에 익숙해진 고양이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사냥의 본능과 한적한 고독의 즐거움을 포기한 대신
가만 있어도 귀엽다며 달려드는 사람들의 손길과 넉넉한 식사, 그리고 편안한 잠을 얻었다.


자식이 부모를 선택할 수 없듯
애초에 이 녀석들에게 자발적인 선택권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운과 우연의 기구한 일치로 인해
사랑받는 애완동물이 되던가, 증오를 한 몸에 받는 도둑고양이가 되던가.

그걸 인간들이 불쌍하다 애처롭다 그래도 이게 낫다 등의 잣대로 판단하는건
애완고양이든 도둑고양이든 이미 반쯤은 '고양이'로서의 자신을 거세당한 녀석들에게
그 오만함을 너무 과하게 들이대는 행동이 아닌가 싶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마찬가지다.

왜 가면 갈수록 사회가 썩어있다고 부르짖는 사람들이 많아지는가.
형식적으로는 분명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물리적인 편안함을 얻었고
배가 고파 굶어죽는 사람도 형식적으로는 줄어들었고
하찮은 병 하나 치료하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도 형식적으로는 줄어들었는데.

문제는 그게 형식적인데 있다는 점이겠지.
그리고 어디선가 그 모순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에 현대사회의 불행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겠지.

그래서 양떼나 몰고 농사나 지으면서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며 대를 이어가던 시절과
모든것이 포화되었으면서도 너무나 부족한 무언가 때문에 매말라가는 지금의 상태 중
어느 것이 더 행복하고 좋았던 시절인가를 선택하는 것은 전적으로 당사자 본인의 몫.

그저 사람은 욕심이 많아서
만족을 하지 못하는 것 뿐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사람이 할 수 있는 판단만 해야 한다.
어느 쪽의 고양이가 더 고양이다운가, 더 행복한가는 사람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고양이들은 그저 환경에 적응하려고 발버둥칠 뿐이고
그것은 인간이 이렇게 발전하기 훨씬 전부터 야생에서도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던 일이니까.


애완동물이든 반려동물이든
그런 형식적인 단어에는 그저 사람의 죄책감과 가식의 껍데기만 늘어붙어 있을 뿐
결국 사람은 자신에게 모자라는 것을 채우기 위해서 고양이를 필요로 한다.

분명히 고양이의 의지보다는 사람의 강제성이 더 크게 작용했겠지만
그래도 고양이 역시 자신의 생존을 위해 무의식적으로 사람을 필요로 한 것이겠지.


그래서 길들여진 고양이의 편안한 잠을 옆에서 보는 것은 행복하다.

아마 찰나의 운명이 빗겨갔다면 평생 그런 편안한 잠 한번 자 보지 못했을 녀석은
'그래도 홀로 도시의 밤거리를 누비며 자유로웠던 시절이 좋았는데'
라는 불만을 품지는 않을 테니까.


녀석들은 그저 주어진 환경에 적응했을 뿐.
불평이 있다면 약간의 지루함과
 다이어트랍시고 음식을 조금씩 주는 인간에 대한 불만 정도 아닐까.

좀 더 지성이란 걸 갖고 있다고 자부하는 인간은
그들의 머릿속 진실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는 영역이니까.


다만 내가 고양이의 잠자는 모습을 보며 느끼는 행복감은
분명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혹은 내가 동경하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는 데서 오는
사소한 대리만족감 때문일 것이다.

그게 고양이에게 사람이 바랄 수 있는 최소한이자 최대한의 매력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