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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에 해당하는 글들

  1. 2010.04.13  크레이지 (The Crazies, 2010) 20
  2. 2010.04.08  황후화 (Curse Of The Golden Flower, 2006) 18
  3. 2010.03.24  더 문 (Moon, 2009) 16
  4. 2009.11.07  디스트릭트 9 (District 9, 2009) 2
  5. 2009.07.24  렛미인 (Let The Right One In, 2008) 8
  6. 2009.07.04  작전명 발키리(Valkyrie, 2008) 8

2010년 수작 호러영화의 첫 발을 내딛는 작품.

그런데 일단 배급사 좀 까고 봐야겠다.
초반부 최고의 살떨리는 명장면을 재현한 저 멋진 포스터!
너무너무 멋져서 대형 포스터 하나 구입할까 싶을 정도인데 말이다.


니네 지금 장난하냐?
'서스펜스 재난 블록버스터' 란다.
이건 과장이 아니라 거의 사기에 가까운 만행.
그리고 웃기게도 이 포스터는


이녀석을 Ctrl + V 신공으로 갖다 붙힌것에 불과하다.
이건 한마디로 영화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제작사가
대충 블록버스터처럼 꾸며서 초반에 잔돈이나 좀 벌어볼까 싶은 생각으로
대충대충 끼워맞춘 포스터로 홍보하는 B급 영화로밖에 취급하지 않았다는 것.

포샵질 좀 더 제대로 못하냐? 창문이 덜 지워졌잖아. ㅡㅡ;

각설하고

이 작품은 호러영화의 거장이자 좀비들의 아버지(?) 조지 A. 로메로 감독의 1973년 동명작의 리메이크.
한국 개봉명은 '분노의 대결투'인데 그때는 개봉명으로 낚고, 40년 후엔 포스터로 낚는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쓰레기 영화로 분류되던 호러영화라는 장르를
누구보다 강력하고 냉소적인 시선의 사회 비판력을 가진 매체로 변신시킨 1등 공신 로메로 감독은
비록 이 작품의 오리지날 버전 당시부터 이미 조금씩 진부함이 느껴진다는 평을 받았고
요즘 행보도 개인적으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긴 하지만

호러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자유분방함을 교묘히 이용해서,
다시 말하자면
머리 굳으신 분들이 '관대함'이라는 그럴듯한 미사여구를 사용해 용인할 수 있는 장르적 특성을 악용해서
직접적으로 그려댔으면 당장 위에서 싸다구 날아왔을 법한 신랄하기 그지없는 비판과 냉소를
'좀비'라는 아름다운 생물체를 통해 멋지게 스크린 위에 구현해 낸 로메로 감독의 업적은

호러영화뿐만 아니라 영화사 전체를 통틀어 거대한 한 획을 그은 역사적인 것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다.

베트남전과 대공황의 후유증이 어느 정도 가시고 난 다음의 좀비영화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다시 케첩하고 순대나 양산하는 B급으로서의 책임을 묵묵히 수행해 오던 도중
잭 슈나이더 감독의 '시체들의 새벽' 리메이크 이후 다시 한번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갈피를 잡은 것이다.

B급 연출에 익숙한 호러영화 매니아들과 함께
때깔좋은 구성을 좋아하는 평민들(?)까지 휘어잡기 위해
진부하게 느껴질 요소는 과감히 잘라내고
쌈마이와 스타일리쉬의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들며
구석구석에 냉소의 흔적을 잊지 않고 깔아주던
좀비영화 최고의 리메이크작 새벽의 저주(Dawn Of The Dead, 2004)는
마치 로메로의 환생이라고 생각될 만큼 21세기에 딱 들어맞는 멋진 리메이크로 돌아왔다.

그 후, 로메로 감독 자신도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는 있지만
역시 예전의 느낌을 지금까지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듯 했고
'로메로 영화의 정통 리메이크 계승자'를 자처할 수 있는 작품 제 2탄은
아무래도 이번 작품 '크레이지'가 될 듯 하다.

칭찬으로 들릴 수도 있고, 불평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번 작품 '크레이지'는 잭 슈나이더 감독의 '새벽의 저주'와 그 구성이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
원작이 같은 감독의 작품이니 당연하지 않냐는 질문이 나올법도 하지만
그것은 내 언어구사력이 나경원 머리통 휘갈기는 수준밖에 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고
좀 더 부연하자면, 리메이크하는 방식이 '새벽의 저주'와 굉장히 흡사하다는 뜻이다.

초반부 관객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던 '새벽의 저주'의 멋진 오프닝.
컨트리 포크의 전설 조니 캐쉬가 부른 'The Man Comes Around'가 흐르며 나오는 실제 영상들은
가뜩이나 섬뜩한 노래 가사와 맞물려 그야말로 '세상은 쫑났구나'라고 느끼게 만드는 강력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크레이지'의 감독 브렉 아이즈너는 평범한 전작 '사하라'에서 보여준 인상 때문에 그다지 기대가 가지 않았는데
이번 작품은 아마 철저하게 슈나이더의 리메이크를 본받기로 했는지
오프닝마저 조니 캐쉬의 'We'll Meet Again'을 사용하는 엽기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이 노래의 가사도 의외로 이 작품의 성격과 그럭저럭 들어맞으니 할 말 없다.

여담으로, 'The Man Comes Around'는  '엑소시스트(The Exorcist, 1973)' 의 감독으로 유명한
윌리엄 프레드킨의 작품 '헌티드(The Hunted, 2003)의 엔딩곡으로도 사용되었다. 세기말적인 분위기와 워낙 잘 어울리는 곡이라.

더더욱 여담으로, 20세기 중반 비틀즈를 넘어서는 인기를 구가했다고도 전해지는
전설적인 컨트리 가수 조니 캐쉬는 그를 모델로 해서 '앙코르(Walk The Line, 2005)'라는 영화도 만들어졌다.

이야기가 끝난 후 엔딩 스크롤 올라가면서 후일담을 슬쩍 끼워넣는 방식마저 그대로 채용했으니
이 작품 '크레이지'는
로메로 감독에게 무한한 찬사를 바치며
리메이크의 정석을 만들어준 슈나이더 감독의 모든 것을 보고 배우며 실천한 녀석이다.

단지, '새벽의 저주'에 비해 조금 더 무거워진 듯한 느낌은 확연히 드는데
'새벽의 저주'가 은근슬쩍 코믹한 장면들을 여기저기 집어넣으면서
호러 매니아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과격하고 잔혹한 장면도 절적히 버무린데 비해

'크레이지'는 시종일관 어둡고 음침하며
매니아들을 위한 서비스씬 보다는
강렬하고 과장된 음향효과와, 고전적인 촬영 트릭을 이용해서
좀 더 정통적인 호러영화의 공포감을 관객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리메이크에 대한 중압감 때문이었을지, 선배 감독들에 대한 존경의 뜻이었을지...

'새벽의 저주'와 비견될만한 웰메이드 호러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새벽의 저주'를 뛰어넘을만한 작품은 아니라는 생각은 지워지지 않는다.
좀 더 대중적인 호러영화의 공식을 채용해서
공포감을 느끼는 관객은 '새벽의 저주'보다 더 많을지 모르지만
너무 정석적이라 오히려 21세기 호러영화의 '자유로움'이 부족해서 조금 숨이 답답하다고 할까.

이 작품에서 가장 무서운 녀석들은 '미친'사람들이 아니라
가장 '이성적'인 사람들이라는 건, 원작에서도 작품 전체를 꿰뚫는 주제 중 하나인데
그걸 너무 정석적으로 접근했다고 할까...
그 얼굴없는 괴물들을 비추는 감독의 시선만큼은 슈나이더의 것이 아니라 로메로의 것인데
이것이 작품을 조금 딱딱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적어도 호러영화 리메이크라면 조금은 더 유연하게 접근해도 괜찮지 않았나 생각한다.

하지만 근래 개봉된 호러영화중에선 단연 빼어나게 잘 만든 축에 속하고
적당한 완급 조절, 평균 이상은 되는 배우들의 연기, 원작을 욕먹이지 않는 충실한 고증 등
긴장감을 느끼고 싶은 일반 관객이나
즐거움을 느끼고 싶은 호러영화 매니아나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만큼 여러가지 요소를 적절히 배합한 멋진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장예모 감독만큼 필모그라피에 극단적인 변화를 추구한 감독이 또 있을까.

비록 그의 작품 전반에 깔려있는 시각적 미장센의 극단적인 추구라는 요소는 데뷔 이래로 변한 게 없지만
훗날 중국을 대표하는 감독으로서 이름을 날리게 될 듯한 느낌을 충분히 전해주었던 데뷔작 붉은 수수밭(紅高梁, 1988)에 이어
개인적으로 감독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홍등(大紅燈籠高高掛. 1992)을 볼 당시만 해도 그 믿음은 현실로 이루어지는 듯 했다.

기술과 노하우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영상미로 시선을 사로잡던 서극 감독이
거대 자본과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단시간에 그 매력을 습득해버린 헐리우드 영화에 밀려버린 반면

색의 대비를 통해 전달의 힘을 극대화시키는 장예모 감독의 미적 감각은
과연 누가 이 감각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강렬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감상한 그의 작품 영웅(英雄, 2002)에서
그는 마치 공산당에게 끌려가 페이스오프를 당한 가짜 감독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큰 변화를 보여줬다.
분명 영웅이라는 작품에서도 눈을 떼지 못할 정도의 아련하고 절제된 영상미는 빛을 잃지 않았지만
황당할 정도의 극단적 주제의식이 작품 전체에 듬뿍 발려있는 모습은
감독의 전작들을 경험한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분명 중국 정부에서 엄청난 지원금을 받은 작품이고, 그네들이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작품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은 사실이지만
장예모 감독의 필모그라피에서는 추악한 사생아로 이름 남겨지지 않을까 내심 걱정되었는데
그 다음 작품 연인(十面埋伏, 2004)를 본 후로는 반쯤 기대를 접은게 사실이다.

그 후에 야연(夜宴, 2006)을 만든 풍소강 감독에게 기대감을 넘기는게 좋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으니.

20년 전의 장예모에게서 느꼈던 기대감은 그렇게 무참히 무너졌고
이제 이 감독에게서는 눈을 돌리는게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황후화라는 작품 역시, 중국 사상 최대의 제작비가 들어간 스펙타클한 작품이라는 소문이 돌 때부터
아예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긴 했다. 그 제작비는 다 어디서 나온 건가.
이 작품이 개봉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장예모 감독은 중국의 영웅이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중국 공산당의 영웅이라고 하는게 맞겠다.

하지만 무심결에 보게 된 이 작품은 또 한번 나에게 심각한 고민거리를 안겨주게 되었다.
다시 한번 기대를 걸어볼 만한 감독이 아닐까 하는.

역시 예상대로 이번 작품에서는 물주인 공산당 측에서 엄청난 비난여론이 일어나고
금새 장예모 감독은 중국을 욕먹이는 저질 폭력씬이나 찍어대는 삼류로 탈바꿈하고 말았다.
꽤나 화려한 수익을 올리긴 했지만 장예모 감독 영화중에서는 가장 욕도 많이 먹었고.

수천 명에 가까운 엑스트라와 역사상 어느 작품에서도 볼 수 없었던 찬란하기 그지없는 미장센도
과격하고 엉성하기 그지없는 작품의 스토리텔링에 묻혀버린 느낌이 든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 작품이 장예모 감독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아도 될까 하는 이정표가 되었으니
이는 그의 전 작품들에게서 실망했던 점이 어느 정도 해소되고,
일정 수준까지는 예전의 작품 성향을 되찾은 듯한 느낌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작품의 제목인 '滿城盡帶黃金甲'은 한국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중국 역사중 '황소(黃巢)의 난'의 주인공
황소가 쓴 '국화'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인데, 독특하게도 실제 작품의 내용은 중국의 희극인 뇌우(雷雨)의 리메이크다.

영화 외적인 부분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시대 배경은 황소의 시구가 쓰여졌던 때와 비슷하고, 내용은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뇌우와 거의 동일하니
이 정도로 제목과 내용이 묘하게 어울리는 작품도 별로 없을 듯.
더군다나 '滿城盡帶黃金甲'의 뜻은 '온 성안 모두가 황금갑옷을 두르리'라고 하니 그야말로 직설적인 제목이다.

항간의 평가처럼 '스펙타클 부부싸움'이 이야기의 전부인 이 작품은
내가 좋아하는 장예모 감독의 전작들처럼
어두운 욕심과 광기에 사로잡혀 처절하게 무너지는 인간 군상의 자화상을 여지없이 그려내고 있는데
특히 그 광기에는 선악의 구분이 없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그러하다고 말하는 듯한
허무할 정도의 염세주의가 살짝 서려있는 작품이다. 그래서 보고 나면 기분이 참 더러워지기도 하고.

거기에 인간 세상이 아닐 정도로 화려한 황궁의 모습이 겹쳐지니
웅장한 금빛 황궁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지독한 감옥으로 변신한다.
손가락 하나로 수천 수만명의 목숨을 유린하는 절대 권력의 황실에서
세상의 온갖 추악함이란 추악함은 다 모아놓은 듯한 암투를 벌인다는 설정이
아주 불쾌하게 다가올 계층은 과연 누구일까. 그거야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이번 작품엔 의외로 코믹한 요소도 꽤나 실려있는데
피비린내가 화면 밖으로까지 풍길 정도의 살육이 끝나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착착 청소되는
황궁 내부의 모습과, 기계로 착각할 만큼 일사분란한 청소부(?)들의 모습에서
현대 중국 지배계층의 일그러진 모습이 투영되는 듯 해서 계속 웃음이 멈추질 않았더라.

공산당 측에서 그렇게 갈갈이 열받아 날뛰는 이유는
퍼부어준 돈만큼 지배계급을 우월한 성군의 존재로 표현해주지 않았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카리스마 덩어리 주윤발이 역을 맡은 황제는 그야말로 쪼잔함과 소심함의 극치를 달리면서도
겉으로는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는 압도적인 지배자로서의 모습을 끝까지 냉철하게 유지하고 있으니
이걸 이해할 정도의 머리를 가진 공산당 측에서는 얼마나 열이 받치겠나.

장예모와 오랫동안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던 공리 역시 주윤발과 함께
이 빈약한 작품에 힘을 불어넣어 주고 있는데, 이 둘의 연기가 너무 굉장한 수준이라
나머지 인물들을 꼭두각시처럼 만들어 버리는 일종의 부작용까지 만들고 만 듯한 느낌.

제작비에 비해 정말 소박한 영화이고, 도저히 메이저 시장에서 받아먹일만한 묘사가 아닌데도
아마 나처럼 예전의 장예모를 추억하며 일말의 희망을 갖게 된 사람들이 적진 않을 것 같다.
전개도 상당히 엉성하고, 인물들간의 비중 분담에 실패해서 작품 전체의 균형성을 봤을 때
결코 수작의 범위에 들어간다고는 하기 힘든 작품이지만
중국 공산당이 갈갈이 날뛰는 반대급부만큼 여러가지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작품이다.

물주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힌 장예모 감독의 다음 작품이 그래서 더욱 기대가 된다.

Play Station
주걸륜의 엔딩곡 '국화대(菊花台)'는 참으로 심금을 울린다.
국내엔 CD가 발매되지 않은 것 같아서 중국 사이트에 넘쳐나는 음악을 다운받았는데
만약 정식발매가 되었다면 바로 구입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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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 제작비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는 500만 달러 초저예산 영화이자
2009년 시체스 영화 최우수상을 수상한 작품.

보통 아카데미가 보수적이라는 관념의 대명사로 표현되듯 중소 규모의 인지도있는 영화제에서 이름을 날리는 작품들은
대부분 좀 철학적이고 덜 재미있는 작품이라는 선입견이 팽배한 듯 한데, 전자는 그럭저럭 들어맞는다 쳐도 후자는 아니라고 본다.

특히 이번 42회 시체스 최우수상을 거머쥔 이 작품은 내가 그토록 목말라하던 우주 프롤레타리아(?) 영화라서
부푼 마음을 안고 극장에 갔는데, 하느님이 보우하사 독립영화만세~ 관객이 단 한명도 없었다.

새벽 1시 반쯤 마지막 상영이라, 올라가는데 프런트 직원이 불러세우더라.
'손님 어디 가십니까?' -> '영화보러 가죠' -> '1시 반 마지막 영화 말씀하시나요?' -> '네'
도대체 그 건물 전체에서 그 시간에 문 연곳은 극장밖에 없는데도 그걸 꼬박꼬박 물어보는 직원의 의도가 심히 의아했지만
극장 전체를 통째로 전세냈다는 즐거움 덕에 그냥 넘어가주기로 했다.

영화 끝나고 나갈때도 이미 극장 복도엔 직원외엔 단 한명도 없는 정적 그 자체였으니 좋은 경험했다.

이 작품을 SF라고 부르기 껄끄러운 이유는, SF의 사실적 고증에는 완전히 눈감은 듯한 설정을 보여주는데다
소재만 근미래를 채용했을 뿐이지 실상은 40년전 광산업에 종사하던 Blue Collar들의 자화상과 전혀 다른 점이 없기 때문.
거기다가 충분히 관객들의 다양하고 즐거운 고민거리를 충족시켜주는,
심리적 고뇌를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소소한 장치들 역시 요소요소에 적절히 삽입되어 있어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저예산 영화치고는 때깔도 상당히 좋은 느낌이다.

스포일러때문에 직접 언급하진 않겠지만
이 작품에서의 샘 락웰은 감독이 원하는, 작품에 필요한 딱 그만큼의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해내면서
사실상의 원맨쇼나 다름없는 이 작품에 굉장한 생기를 불어넣어준다.
샘 락웰의 어색함과 두려움, 진실에 대한 갈망이 담긴 눈동자가 마치 물리적인 호소력에 의해
가슴에 압박을 느낄 정도의 상태를 체험하게 되는 사실에 그저 관람 내내 즐겁고 즐거울 뿐이다.

목소리와 화상 통신에까지 나오는 모든 인물을 다 합해도 총 등장인원 10명이 되지 않는
이 극단적인 단절의 작품은, 그 10명에게서 60억 인류의 모든 자화상을 다 그려내려고 노력했고
결과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성공적이었다고 밖에 칭찬할 말이 없다.

영화가 끝나도 계속 머리싸매는 고민을 즐길 수 있었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프레스티지(The Prestige, 2006)의 설정처럼
이 작품도 샘 록웰의 (어느 쪽이든) 심리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개인적인 납득, 혹은 부정적인 견해를 파고드는데
영화 러닝 타임보다 더 긴 시간을 할애할 수 있을 만큼 흥미로운 구성을 보여준다.

프레스티지의 장면을 생각해 보자.
순간이동 장치에 들어서는 순간까지 '나'라는 존재는 이 우주에 단 하나 뿐.
하지만 이동이 끝나는 순간부터 완벽히 하나였던 자아는 합쳐질 수 없는 두 개로 나눠지고
분명 1초 전까지 나였던 '상대방'은 이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행동을 보일지 예측할 수 없는 타인이 된다.
그리고 순간이동 장치의 한 쪽에밖에 놓여있지 않은 한 자루의 총.

매번 장치를 통과하면서
'자신의 자아는 과연 총을 맞고 죽어가는 쪽이 될 것인가 총을 쏘아 방금 전까지 자신이었던 타인을 죽이는 쪽이 될 것인가'
라는 두려움에 떠는 그 느낌은 아무리 거머쥐려 해도 잡히지 않는 아지랑이같은 애절함과 비슷한 감정이다.

이 'Moon'이란 작품은 이런 정체성의 정의에 대해 다양한 시선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10명도 안되는 등장인물을 통해.

타인의 정체성 따윈 안중에도 없이 이익을 위해 악마와 손을 잡는 'SARANG'스러운 인물.
조작되고 통제된 감옥속에서, 자신이 감옥에 갖혀있다는 의식조차 갖지 못하는 노예 계급.
진실을 알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생명도 버릴 수 있는, 좀 더 인간다운 인물.
그리고 인간 본성이 다다라야 할 선의 정점인, 냉정한 공정함을 갖춘 가장 비인간적인 존재 '거티'

이 모든 사회 구조적인 계층과 인물상을 이렇게까지 우겨넣을 수 있는 작품은 그리 흔치 않다.
너무나 진부한 소재, 식상할 정도로 반복되어 온 불평등과 윤리성에 대한 질문, 최소한의 안전 장치조차 밥말아먹은 SF 요소의 오류투성이.
찰랑거리는 액체수소만큼이나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공식들을 다 머무려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초저예산 영화는 그저 조용할 뿐이다.
헬륨 3를 채취하는 달표면처럼 조용할 뿐이다.
하지만 헬륨 3를 채취하는 거대한 굴착 기계의 괴물같은 역동성 역시 갖고 있다.
매우 힘있고 단단하며, 감독의 의지를 과장없이 드러내는 힘을 갖고 있다.

이런 무언의 파괴력을 가진 작품이야말로
저예산, 혹은 독립영화들이 가진 최고의 매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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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문 (Moon, 2009) :: 2010. 3. 24. 00:29 Movie


SF가 속빈 강정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더라.
덕분에 이런 영화가 '이건 SF의 탈을 쓴 풍자영화다'라는 표현까지 얻어먹고 있다.
SF영화의 특성상 시청각적 자극을 유도하는 경우가 많고, 그 부작용으로 어중이떠중이 영화나 철저한 상업용 블록버스터 영화가 워낙 많이 나와서
그 반동으로 이걸 SF라고 부르기 아쉬워하는 사람이 생기는가 보다.

SF영화를 무시하지 말라.
SF영화가 겉멋만 든 저급 영화라고 생각하는 선입견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순간 당신의 영화에 대한 무지함을 자뻑하는 결과가 된다.

영화 역사상 SF라는 장르는 수많은 B급 혹은 말초신경 자극적 작품의 홍수 속에서도
어떤 장르보다 지독하게 현실을 파고드는 특징을 잃어버리지 않고 이어져 왔다.
뭔 말이다냐 싶으면 두말하지 말고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2001: A Space Odyssey, 1968)나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82)를 감상하시길.

동 감독의 짧은 독립영화 'Alive in Joberg'를 장편용으로 다시 제작한 이 작품은
나의 우상 피터 잭슨이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전폭적으로 지지해 줄 만큼 그와 나의 취향에 딱 맞다.
구역질과 혐오에서 웃음을 찾으면서도 순수한 아름다움의 추구에 대한 열정이 공존하는 기괴한 피터 잭슨의 영화관에 비추어 보면
닐 블롬캠프의 6분 남짓한 단편영화는 잭슨의 욕망을 순식간에 충족시키고도 남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잭슨 감독이 적극적으로 파고들지 않았던 거대한 담론에 대해 노골적으로 파고드는 탓에
최고의 풍미와 함께 눈까지 즐겁게 만드는 일품 요리와 같은 두 가지 성과를 잡아냈다고 평가하고 싶다.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시민으로서, 가슴을 아프게 하는 묘사가 한두 가지가 아닌 탓에 기분이 조금 무거워지기도 하지만
(외계인의 태아를 즐겁게 태워죽이는 모습, 예전 잭슨 감독의 작품이라면 크게 웃으며 즐길수 있겠지만 여기선 그러지 못한다)
한없이 진지해지기만 해서는 잭슨의 후계자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을 터.
모든 현실적, 정치적 감정을 배제하고도 후반부의 액션씬은 원초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이 작품에서 토악질을 느껴야 할 장면은 인간의 몸이 풍선처럼 빵빵 터지는 곳이 아니라
사위를 산 체로 해부하는데 무덤덤하게 동의하며 딸에게 태연히 거짓말 하는 장인의 얼굴이다.

메뚜기와 바퀴벌레를 닮은 추악하고 멍청한 외계인의 모습.
강제 퇴거를 위해 살인 말고는 무엇이든 스스럼없이 저지르는 인간의 모습.
이건 감독의 창작물이 아니라 1970년대의 남아공 District 를 그대로 가져온 다큐멘터리나 마찬가지.
그리고 그런 일은 지금도 세계 어디에서나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어떤 나라에서는 퇴거하지 않는다고 정말로 불에 태워 죽이기도 하더라.

이렇게 영화 속에서 노골적으로 까발려주는 비참한 현실에 몸부림치다가도 감독은 우리에게 따스한 손길을 잊지 않는다.
나의 열받은 머리속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는 후반부의 신나는 학살 씬에서 나는 감독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이제껏 열받은 거 신나게 뒤풀이나 해보자는 느낌의 후반 전투 장면은 2천만불의 저예산 영화라고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박력 만점이다.
올해 나의 불쾌지수를 하염없이 올려주었던 MCG의 로봇 뿅뿅물이 이거 10분의 1만 따라갔어도 내 수명이 그렇게 줄어들진 않았을 거다.
특히 주인공 비커스의 나약하고 이기적인 성격이 큰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감정의 이동도 무난하게 소화해 낸 덕에
그의 절규와 그의 배신과 그의 마지막 대사가 이 작품을 단순한 쾌감충족식 SF 액션으로 변모할 수 있었던 함정에서 구해낸다.

조금 진부하지만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데 어색함이 없는 잔잔한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비로소 웃으며 일어날 수 있다.
로드 오브 워(Lord Of War, 2005)의 결말이 행복하다면 되려 허탈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이런 희망적인 결말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관용이 스며있다.
이것이 SF라는 장르가 가지는 최고의 장점 중 하나가 아닐까.
SF는 미래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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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배경은 1982년의 스웨덴.
전 세계의 수많은 관객들도 그랬고, 감독 자신도 밝혔듯이 이 작품은 시대상을 부각시킨 배경을 활용하진 않았다.
'판의 미로(Pan's Labyrinth, 2006)'처럼 알고 있다면 감상에 큰 플러스 요소가 되는 작품과 달리
1980년대 스웨덴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감상엔 아무 지장이 없다.

이 작품이 '굉장히 스웨덴틱한 영화'라는 평을 받는 이유는 시간적이 아닌 공간적 배경을 기막히게 잘 살렸기 때문이니까.
잘 만든 영화는 어디서든 통한다는 말이 과연 틀리지 않았다는걸 증명하듯
이 작품이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이유는 '너무 잘 만들어서'라고밖에 할 수 없겠다.
북유럽의 끔찍할 만큼 아름답고 황량한 자연이 그 지역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고독의 본능을 심어주었고
사람이 만든 영화 역시 (원작 소설도 마찬가지) 그것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태어났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배경, 인물에서 느껴지는 고독.
함께 모여 수다를 떨 때도 어딘가 지쳐 보이는 사람들.
학생들이 가득 차 있을 때도 여전히 삭막해 보이는 교실은
혼자 남은 오스칼이 교실의 불을 끌 때, 사방에서 숨을 죽이던 암흑같은 고독으로 일순간 덮혀버린다.

시대상의 변화에 따라 뱀파이어는 훈남 호스트로도, 근육질 액션스타로도, 백마탄 왕자님으로도 나타나는데
북유럽의 근원적 고독을 등에 안고 태어난 12살의 뱀파이어 이엘리는 내가 본 최고의 뱀파이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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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의 외모, 수백 년의 인생, 중성적 존재이자 동물적 본능에 가까운 야수.
그리고 왕따당하며 내면에 폭력과 증오를 키워가는 진짜 12세의 인간 오스칼의 내면적 대변자.

이 수많은 요소를 한 몸으로 표현해낸 이엘리 역의 리나 레안데르손은 영화를 찍을 당시 11세였다.
그야말로 감탄을 금할 길이 없는데, 감독이 가장 중요한 이 배역을 찾는데 꼬박 1년을 보냈다는 인터뷰를 보고 '과연!'이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나이프를 나무에 꽂으며 억눌린 분노를 표출하는 오스칼과
단지 살기 위해서 실제로 사람을 죽이고 피를 빠는 이엘리.

마음 속으로 수십 번을 살인하는 오스칼이 그 나이 또래가 겪는 혼란을 나름대로 소화해 내는 평범한 인간이라면
살인과 흡혈행위에 아무런 분노와 폭력성을 내제하지 않은, 수백 년을 성숙한 개체인 이엘리는
오스칼에게 선택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덫을 치며 그를 성장시키는 전지자에 가깝다.

장르적으로 명백히 성장드라마에 속하는 이 작품이지만 그 성장의 주인공은 12세의 오스칼이지 이엘리가 아니다.

그녀는 오스칼에게 첫사랑의 섬세함과 애매함을 가르쳐 주고
내면에서 끓고 있는 폭력성의 표출을 도와주며
자신이 갖고 있는 수백 년간의 고통을 체험시켜주며
오스칼에게 선택의 기회를 던져준다.
가끔 다정하지만 의지할 수 없는 어른인 오스칼의 부모 역할을 톡톡히 대신해 주고 있는 것.

특히 마지막 수영장 씬의 고요한 학살 장면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아름답기까지 한 폭력의 대리 표출이었다.
역대 호러영화의 전당에 들어가도 될 만큼의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이 장면은
'양들의 침묵(The Silence Of The Lambs, 1991)'에서 한니발 렉터가 경비원들을 살해한 후 즐기는
평온한 음악과도 같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주는 최고의 명장면중 하나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며, 감독은 '자기 생각으론' 분명한 해피 엔딩이었다고 하지만
결국 오스칼의 미래는 영화의 첫 장면과 완벽하게 오버랩된다는 피할 수 없는 진실에
진정으로 씁쓸한 소년의 성장 이야기는 더욱 아름다우면서도, 예정된 슬픈 비극을 향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순환선을 그린다.

자기와 사귀자는 말을 들은 이엘리가
한동안 망설이다가
'지금과 변하는 것이 없다'는 오스칼의 말에
'그럼 사귀자'고 대답하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영생의 존재로서의 동반자의 역할이 절실하다.
그리고 그것이 성장기를 거치는 아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무성애적 사랑이기 때문에
이 작품의 가치는 더욱 극대화 된다.

오스칼은 이엘리와 같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 그가 맞이할 미래는 이엘리가 몇 번이고 반복해 온 허무함으로 끝남을 알고 있으니까.

고전적인 뱀파이어물은 신물이 났다며 온갖 변종 꽃미남, 미녀들을 생산하는 영화계지만
2008년에 이런 우직할 정도의 정통 뱀파이어물이 눈 돌아갈 정도의 영상미를 과시하며 등장한 것은
결국 인류 역사와 함께 할 영원의 생명을 가진 뱀파이어라는 소재는
아무리 식상하다고 해도 그 근원에 인간 본성이라는 공통 분모를 갖고 있는 이상
그 수명을 다할리는 없다는 사실을 기분좋게 일깨워준 사건이었다.
 




* 마지막 장면의 모스 부호는 스웨덴어 'PUSS'
영화를 다 본 후 이 단어의 뜻을 찾아보시길.

* 왜 이엘리가 '자신이 XX가 아니라도 괜찮아?' 라고 묻는가에 대한 대답은
영화 중간에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장면에 나와있지만
원작 소설에 비해 굉장히 압축된 영화상에서 굳이 넣지 않아도 될 장면을 넣은 것은
애초에 이엘리가 오스칼의 이성적 상대가 아닌 내면의 동일체로서의 역할이기 때문에
성별이 존재하지 않는 편이 감독의 의도에 잘 들어맞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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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당시 독일과 현 대한민국의 상황이 심히 비슷한 고로 감상이 자꾸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긴 했지만
이 작품은 굳이 애써 영화를 영화로만 즐기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류의 감정이입이 감상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작용한다.

유럽에서, 특히 독일에서는 2차대전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만 갖고 있어도 누구나 알고 있는 실화지만
한국에서는 이 실화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이 없으니 좀 더 적절한 긴장감 조성이 가능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히틀러가 2차대전 말미에 자살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일부러 이 영화에서 반전을 기대하는 우를 범하진 말길 바란다.

결말이 만천하에 다 까발려진 내용을 영화화한다는 것의 의미는
결국 감독과 배우의 역량이 관객의 나머지 기대치를 뒤덮을 정도로 뛰어나야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인데
슈퍼맨 리턴즈(Superman Returns, 2006)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를 거둔 브라이언 싱어가 선택한 이 작품은
다행히도 그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가진 작품이었다.
(슈퍼맨 리턴즈는 영화 자체가 아니라, 감독이 작품 선택을 잘못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CG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대부분의 촬영이 실제 사건이 일어난 곳에서 이루어진 사실 등
철저한 리얼리티를 추구한 결과 미장센 부분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매력을 뿜어낸다.
깔끔한 화면과 박력있는 사운드가 50년 전의 미장센과 만나는 묘한 이질감이 오히려 매력으로 작용.

작품의 특징은 초중반의 잔잔한 진행 가운데서도 항상 불안한 긴장감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는 점.
적절한 구성과 상황에 맞는 대사만으로 자칫 획일화되기 쉬운 인물들의 특징을 정확히 묘사하는 능력을 보면 역시 브라이언 싱어로구나 싶었다.
유독 안티팬이 많은 탐 크루즈라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나 역시 안티로 비춰질까 해서 약간 움찔하지만
이 작품의 주연으로서 합당한 연기를 보여주었나 한다면, 상당히 미묘한 해석의 갈등이 머릿속에서 일어난다.
분명 전시 독일 장교라는 신분을 생각한다면 적당히 딱딱하고 1950년대틱한 훌륭한 연기임에 틀림없지만
조연들의 열연이 거의 하극상을 일으킬 정도로 대단한 편이라 작품 전체를 휘어잡을 인상을 주는데는 실패했다고 본다.

암살작전이 실행되는 후반부부터는 결말이 어떨지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면에서 눈을 떼기 힘들 정도로 팽팽한 긴장감이 작품 전체를 가득 채운다.
어떤 화면을 봐도 '어차피 실팬데 뭐' 라고 매번 자신을 굳세게 세뇌하며 영화 감상하는 무뇌아들이라면 심심할지도.
내가 바랬던 브라이언 싱어의 영화는 바로 이런 것이다! 라는 느낌에 온 몸의 세포가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을 다른 관객들에게 적극 추천하느냐? 그건 아니다.
감독이나 배우, 역사적 현실에 관심을 가지는 부류가 아니면 이 작품은 분명 어딘가 지루하다.
히틀러 암살이라는 사건이, 그리고 발키리라는 작전이 가지는 거대함을 다루고 있다고 보기엔 아무래도 화면에 뿌려지는 규모가 너무 소박한 점이 있어서일까.
짧은 시간에 최대한 인물들의 상관관계를 풀어내려는 시도는 나쁘지 않았지만 워낙 역사적으로 얽히고 섥힌 배경이 많은 혼란의 시기여서 이 역시 충분하다고는 못하겠다.
영화에서 나오는 거의 모든 장면이 현실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감독의 재량을 넘어서는 극적 긴장감을 만드는것은 태생부터 무리한 일이 아니었나 싶다.

혹자는 '저 작전이 실패하면 피해를 입을 주위 사람들 생각해 봤나'며 클라우스 대령을 비판하기도 하는데
그러니 인류 역사 이래 지구는 이모냥 이꼴로 돌아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