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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2.03.22  후쿠오카 여행 - 프롤로그 19

 

 

 

 

 

좀처럼 생기지 않는 5월의 긴 연휴 전날, 금요일 저녁 엄니께서 갑자기 부산 가자고 문자를 보내셨습니다.

하루 자고오면 좋긴 한데, 전국의 모든 숙박, 교통편이 마비상태였던 연휴 바로 전날 연락을 받아서야

아무리 찾아봐도 엄니와 제가 묵을만한 숙소는 찾을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급한대로 열차표나 끊어놓고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엄니께서는 역시 퇴직하신 후 좀 지루하신지 먼저 여행 이야기를 꺼내시는 듯.

 

매번 대구와 서울만 왔다갔다 하셔서 이번에도 엄니는 기차타고 1시간 반은 가는줄 알고 계시더군요.

45분만에 도착하니 눈 깜짝할 사이입니다. 부산엔 거진 20여년간 갈 일이 없다가 요 근래 들어서 자주 가게 되네요.

 

 

 

 

토요일 연휴 첫날이라서 사람도 엄청 많았지만

평소에 볼 수 없는 빼곡한 슬픔의 메아리가 벽 가득히 붙어 있는 모습은 사람을 숙연하게 만듭니다.

 

요즘 이 지옥같은 사건때문에 매우 우울한데

기분 전환 좀 하려고 나온 곳에서도 첫 눈에 들어오는 이 벽보때문에, 뷰파인더 들여보는 눈시울이 흐려지더군요.

 

 

 

갑작스러운 당일치기 여행이라 딱히 계획한 건 습니다.

 

엄니께서는 교장단 회의때문에 부산에 자주 내려가셨는데

자갈치 시장은 몇번 가 봤어도 옛날 그 느낌이 나지 않아 실망하셨다네요.

 

그래서 엄니가 가보지 못한 센텀 신세계 백화점으로 가 봤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백화점이라는 말 하나만 신기할 뿐, 내용물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엄니께서는 아이쇼핑도 좋아하시니 한번 구경해 보는것도 괜찮을 듯 싶었습니다.

 

 

 

아침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식사부터 해결하려고 위로 올라갑니다.

아무래도 토요일 연휴 첫날이다 보니, 점심시간 즈음에 갔다간 먹기가 힘들어질 것 같아서 서두른 면도 있었죠.

 

어쨌든 큰 백화점이니 식사도 좀 괜찮으려나 싶었는데, 이탈리안 요리점에 들어가 점심 코스요리를 선택해 봅니다.

두 사람 다 코스요리 먹을 필요는 없으니 엄니는 스파게티 하나 주문하고, 코스는 둘이서 같이 먹기로 합니다.

 

처음 나오는 빵과 고구마 등의 수준이 예사롭지 않은 걸 보고 이 집은 그래도 좀 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올리브유에 발사믹 식초 소스도 적절합니다.

 

 

 

 

코스 요리는 여러가지가 나오지만 역시 둘이서 만족스럽게 먹을 만한 양은 아니더군요.

백화점 식당이라는 게 가격대 성능비가 영 아닌 곳이 많긴 한데

이곳은 양은 좀 적어도 요리 하나하나가 괜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데서 점수를 줄 만 합니다.

 

 

 

코스용 스파게티는 한번 후루룩 넘기면 끝날 정도의 크기지만

크림 향기 농후하고 새우의 질감도 탱글탱글하게 잘 살아있는 편입니다.

 

3만원 후반대라는 코스 요리 가격대가 굉장히 무서운 일반 서민입니다만

엄니 여행 가이드를 하는 수고비라고 할까요. 살떨리지만 맛있게 먹었죠.

 

 

스테이크는 미디엄 레어로 주문했는데, 아주 완벽한 수준으로 굽혀나왔습니다.

소스도 훌륭하고 속의 육즙도 비린내 없이 깔끔하네요. 코스요리라 크기가 작은게 아쉬울 정도였으니.

 

음식은 제대로만 만들면 뭐든 맛있게 먹는 타입입니다만, 역시 못 만든 요리 많이 먹는것 보다는 제대로 된 요리 조금 먹는게 낫긴 합니다.

 

 

 

 

밥 먹고 휴식 겸 해서 12층 정원으로 나가봤는데, 왠걸 백화점이 크다 보니 아예 공원이 옥상에 떡하니 만들어져 있더군요.

각종 재활용품을 이용한 공룡 정원이라 아이들이 눈을 반짝거리며 활보하는 중입니다.

 

입장료도 없는데 매우 잘 가꾸어 져 있어서, 나름 장사 수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백화점이구나 싶었죠.

 

 

 

 

옆에는 추억의 회전목마를 타려고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회전목마는 요금이 들지 않지만 백화점 영수증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역시 머리 잘 썼네요.

 

이렇게 아이들과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백화점 내부에 있다는 건 매출에 적지 않는 영향을 미칠 듯 합니다.

 

날씨는 대구보다 좀 서늘하고 바람이 많아서, 그늘에 앉아있으면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아늑한 날씨였습니다.

이제 두 살이 되어가는 조카가 여기 온다면 상당히 좋아할 것 같은데

서울쪽엔 옥상에 이 정도 공원이 조성된 백화점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외국인도 많이 보이고, 아이는 없어도 젊은 커플들끼리 놀러다니는 모습도 많이 보입니다.

 

제 얼굴이 좀 순해진 건지, 요즘 기준으로 굉장히 거대한 카메라를 어깨에 매고 있어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이 날 부산에서는 저한테 사진 좀 찍어달라며 스마트폰을 건네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곳에서도 두 번쯤 만난 듯 한데, 불행히도 전 스마트폰으로는 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어서

저한테 맡겨봤자 별 도움이 안됐을 것 같네요. 일단 어찌저찌 터치해서 찍어는 드렸습니다만.

 

 

 

동물들이 대부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을 조합해서 만든 것들이라

아이들이 보면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도움이 될 듯 합니다.

 

재활용품인가 싶었는데, 이 타이어 악어의 몸뚱아리는 아무래도 깨끗한 새것 같아서.

 

 

 

 

국제영화제 시기가 되면 즐거운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곳입니다.

부산도 이렇게 날씨 좋은날이 그리 흔치는 않을텐데, 급하게 달려온 여행이지만 날씨덕분에 흡족했습니다.

 

 

 

 

엄니는 여전히 사진 찍히는 것에 별 관심이 없어서 갈 길 가십니다.

사실 찍어도 별로 보시질 않기 때문에, 사진 찍는 제가 제일 많이 보는 편이죠.

 

 

 

 

2월 여행 이후로 카메라를 만지는 건 처음이라 그새 어색해 진 느낌이네요.

조카가 같이 와서 뛰어다니고 있었으면 재미있는 사진 많이 건졌을 텐데.

 

 

 

 

산책용 공원으로서도 손색이 없지만 아이들이 놀 만한 것들도 알차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엄니께서는 저보고도 회전목마 한번 타보라고 하셨지만 그럴 나이는 아니죠.

 

그러고보니 예전엔 50원, 100원씩 주고 시장 근처에서 봉봉 위에서 날뛰고 했었는데

그때는 그것만으로도 그렇게 재미있을수가 없었죠. 아이들에겐 그 정도 자극만으로도 충분한가 봅니다.

 

 

 

 

진짠가 싶어서 슬쩍 들어가 쳐 봤는데 소리가 제대로 울렸습니다.

아무래도 엉덩이쪽 드럼은 그렇게 너무 쳐보다가 찢어진 게 아닌가 싶네요.

 

 

 

 

스테고 사우르스 비슷한 녀석인데 꼬리를 타고 몸통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유치원 쯤 될 나이에 이곳에 왔다면 한참 재미있게 놀았을 것 같네요.

 

 

 

 

공룡 공원이지만 어째 사람의 두개골도 삐까뻔쩍하게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전 아무리 봐도 터미네이터가 생각나서 묘한 기분이었네요.

 

 

 

 

12층에서 지하까지 내려오며 여러가지 구경 했습니다.

 

전 백화점 구경엔 그닥 큰 흥미가 없었지만

역시 큰 백화점이다 보니 100인치 근처의 대형 TV라던가, 최신 미러리스 카메라 등도 전시되어 있어서 재밌게 구경했죠.

 

지하까지 내려와 보니 거기도 먹을거리가 매우 많습니다.

배가 꺼질 시간은 아니었으니 가볍게 휴식이나 하면서 돌솥 팥빙수라는 것도 한번 먹어봤네요.

 

팥빙수는 역시 이것저것 많이 넣은 건 별로 마음에 안들어서 이런 게 좋습니다.

 

 

 

 

백화점 구경 실컷하고 바닷바람을 만끽하러 근처의 광안리로 갑니다.

센텀시티에서 지하철로 얼마 걸리지 않으니 이동하기 좋더군요.

 

원래는 밤에 가야 화려한 불빛을 감상할 수 있지만, 당일치기 여행이라서 그냥 이걸로 만족하야 할 듯.

 

엄니는 이제 지하철과 버스 등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연세가 되셔서

주민등록증 척 올려놓으니 공짜 표가 탁 튀어나오더군요.

원래 대중교통을 이용할 일도 거의 없어서 매우 신기하고 재밌어 하십니다.

 

 

 

 

광안리는 외국인이 굉장히 많군요. 성질 급한 몇몇은 벌써 바다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아직 물이 상당히 찰 텐데... 역시 젊음은 좋은 것이로구나 싶네요.

 

시즌에서도 벗어난 광안리의 대낮 풍경은 아직 깔끔한 편입니다.

이게 해수욕 시즌이 되면 앉을 자리도 마땅치 않은 쓰레기 천국이 된단 말이죠.

 

 

 

 

바다가 없는 내륙 토박이다 보니 그냥 모래사장에 앉아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은 관광이네요.

가끔씩 이렇게 슬쩍슬쩍 도촬도 하고. 클로즈 업은 아니니까 괜찮다고 생각해 봅니다.

 

 

 

 

광안대교도 그렇고, 밤의 화려한 네온싸인도 그렇고, 볼거리가 많은 광안리라고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바다의 모습과는 거리가 좀 있어서 그닥 감흥은 없네요.

 

그냥 엄니 바람쐬러 같이 나왔다는 게 제일 마음 편안합니다.

 

 

 

 

엄니는 오랫동안 학교에 종사하신 분이라 이번 참사를 견뎌내기를 너무 힘들어 하시더군요.

저도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비참함과 분노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데

아주 조금이지만 연휴라는 이름을 변명삼아 머리를 비워보려고 노력한 하루였습니다.

 

매번 매번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는 일들 뿐이라

지금 하고 있는 일 끝나면 정말 진지하게 나라를 떠나볼까 생각중입니다.

 

 

 

 

원래 그늘 같은 거 생길리가 없는 허허벌판입니다만

바다 뒤의 빌딩들이 하도 촘촘히 박혀 올라와 있어서 자연적으로 그늘이 만들어지더군요.

 

앉아 쉬기엔 편안했지만, 모래사장에서 빌딩 그늘에 숨는다는 것이 그렇게까지 즐거운 일은 아닙니다.

 

이곳 광안리는 저희 부모님이 신혼여행으로 돌아본 곳 중 하나라서

엄니에게는 나름 추억이 깃든 장소이기도 합니다.

 

전 10년 전쯤 갑자기 부모님이 신혼여행 코스 다시 도는데 같이 가자고 해서 거제, 통영, 광안리를 돈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이미 상당히 개발이 된 상태라, 부모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광안리의 모습은 평생 볼 수 없겠죠.

 

 

 

 

진짜 신혼부부인지 그냥 컨셉 촬영인지 모르겠는데

커플 두 쌍이 사진사들과 함께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더군요.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저런 드레스로는 꽤나 추울텐데, 열심히 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이런 바람 속에서 그것도 역광으로 반사판과 스트로보도 없이 마구 촬영하는 모습을 보니

진짜 예비 신혼부부가 맞긴 한건가 싶은 생각도 들더군요.

 

 

 

 

수상보트 타는 아저씨는 해안가 쪽으로 물을 팍팍 튀기는 쇼를 피로하고 있습니다.

재밌다 싶어서 찍고 있는데 또 다시 몇몇 젊은이들에게 사진 좀 찍어달라고 스마트폰을 건네받았죠.

 

찰칵 하고 건네주려는데 아가씨들이 그게 아니라 세 장 연속으로 찍히니까 그대로 폰을 들고 있어달라고 합니다.

음, 요즘 디지털 촬영은 그런 건가 보더군요. 그래서 다시 한번 구도를 잡고 세 장 찍힐 때까지 가만히 들고 있었습니다.

 

물론 필름시절에도 다중노출을 이용해 사람의 궤적을 찍는 방법은 있었습니다만

스마트폰의 세 장 촬영은 어떤 결과물을 보여줄 지 궁금하기도 했었죠.

 

첫 번째가 실패하고 다시 카메라 찍으려 뭔가 누르다가 그 분들 갤러리 폴더에까지 들어가 버리는 추태를 연출했습니다.

아직까지 컴터 관련으로는 현역 수준의 지식을 갖고 있는 저로서도 스마트 기기라는 건 역시 손 밖의 물건인 것 같네요.

 

 

 

저 멀리 보이는 아이파크 아파트 등은 로얄층이 십억자리대를 넘는 가격이라고 하던데

이곳 광안리에서 저 모습을 볼 때마다 사람의 삶이란 참 다양하구나 싶은 생각이 항상 듭니다.

 

저기서 수십억 들여서 살고 있으면 매일 아침 일어나 참 뿌듯하고 행복한 기분이 들까 궁금하기도 하고.

전 그 수십분의 일 가격으로도 저 곳 풍경보다 수십배는 더 아름다운 살곳을 많이 알고 있는데 말이죠.

 

 

 

저녁 8시 기차를 예약해 놨는데, 부산 교통은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조금 이르지만 저녁 맛있게 먹고 역으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광안리는 별로 먹을만한 곳이 없다고 들었는데 걱정이네요.

 

 

 

 

 

외국인들이 연을 들고 날리길래 어디서 가져왔나 싶었는데

좀 더 걸어가보니 아주머니가 연을 팔고 있더군요.

 

바람이 많이 불던 날이라서 연날리기 매우 좋았습니다.

 

 

 

 

부산은 지리적 특수성도 그렇고 주변 도시들간의 연결 상태도 그렇고

개발 열풍으로 따지만 서울 이상가는 굉장한 기세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어째 올 때마다 공사 공사에, 끝도 없이 들어서는 바닷가 빌딩들 때문에 점점 답답해지는 느낌도 듭니다.

 

특히 센텀시티 주변은 이게 서울인지 부산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변해버려서...

 

25년 전의 해운대 글로리 콘도에 갔을때만 해도 굉장히 한적한 바닷가를 슬금슬금 걸어다니는 매력이 충만했는데

지금은 대체 여기가 어딘가 싶을 정도의 빌딩 숲으로 뒤덮혀 버렸더군요.

 

25년 전에는 해운대에 글로리 콘도만큼 크고 높은 호텔이 없어서 홀로 유유자적했는데 말입니다.

그 때는 국민학생이라 카메라를 모르던 시절인데, 지금 생각하니 사진 한 장 찍어놨으면 좋았을 텐데 싶네요.

다행히도 구글링 해 보니 아직 그 때의 사진이 남아있어서 추억에 젖기도 했습니다.

 

 

 

 

 

광안리에서 어떻게 하면 맛있는 저녁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바닷가 횟집은 너무 그렇고 그러니 경험해보지 못한 조개와 장어 무한리필집을 한번 가보자고 큰맘먹고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속은 기분. 조개 리필과 장어 리필이 따로 가격 책정이 되어 있더군요.

밖의 홍보 간판엔 그게 그렇게 자세하게 쓰여 있지 않아서 왠지 손해봤다는 기분도 들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심한 건 장어를 초벌구이도 없이 그냥 날 것 그대로 던져 주는 것이었죠.

장어는 초벌구이 후 소스를 어떻게 바르느냐가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이건 뭐, 그냥 대충 알아서 구워서 소스 찍어먹으라는 식이었습니다.

 

이건 그냥 장어의 장자도 모르는 사람들끼리 와서 술안주로나 즐길 만한 레벨이더군요.

초벌구이 후 소스를 발라서 다시 구운 장어하고, 그냥 구워서 소스에 찍어먹는 장어는 완전히 다른 요리나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무한리필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에 엄니같은 레벨의 동행을 데리고 가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가격도 굉장히 비쌌지만, 이걸 무한이랍시고 자꾸 먹다간 제 혀가 저를 욕할 것 같아서 그냥 너댓마리만 먹고 나왔습니다.

 

 

 

저녁을 완전히 실패해 버리는 바람에 기분이 다운된 채 부산역으로 돌아갑니다.

 

속이 영 더부룩하고 다리가 좀 피곤하기도 해서 택시를 탔는데

부산의 교통사정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긴장도 하고, 택시 기사분도 '지금쯤 많이 밀릴 건데요' 라고 겁을 주셨지만

운이 좋았는지 15분만에 쾌속으로 부산역에 도착했습니다. 용캐도 전혀 밀리지 않고 신나게 달렸네요.

 

빨리 온 덕에 시간도 널널해서 커피집에 들어가 시원한 탄산음료를 마시며 개똥같았던 장어리필의 기억을 씻어냈습니다.

 

엄니께서는 직장 다니실 때는 연휴 때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하려 하셨는데

반대로 퇴직하고 나신 후엔 심심한 탓에 더욱 밖으로 나가는 경향이 강해지셨네요.

저야 뭐 엄니가 어디 가자고 하시면 좋다고 따라나갈 수 있으니 나쁠 거 없습니다.

 

단지, 역시 즉흥적인 여행은 준비 기간도 짧고 숙박 찾기도 어려워서 몸이 좀 힘들긴 하네요.

다음엔 좀 더 미리 말씀해 주시면 숙소도 잡아놓고 신나게 즐기다 올 수 있겠는데 말입니다.

 

원래 엄니와 오사카 갔다 온 여행기를 올리는 도중이었습니다.

역사에 남을 추악안 대참사 때문에 기분이 완전히 다운되어 4월달은 그냥 넘겨버렸네요.

몸풀기로 부산 여행기 올리고, 다음 포스팅부터는 다시 오사카 여행기를 올려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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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부산 :: 2014. 5. 11. 22:30 Photo Diary

 

 

엄니를 택시에 태워 보내드리고 2시간 정도 까페에 들어가서 커피 홀짝거리며 책을 읽었습니다.

삼계탕 먹고나서 땀으로 범벅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어디 둘러보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더군요.

 

다행히 어제 부산가는게 확정된 후 부랴부랴 전자책에 새로 나온 책들 몇권 넣어왔기 때문에 읽을거리가 부족하진 않았습니다.

꾸물한 날씨가 좀 나아진다 싶어서 슬금슬금 밖으로 나와봤습니다. 카메라가 무거워서 더운날엔 참 고역이군요.

이럴때는 미러리스같은 카메라가 참으로 부럽기도 하지만, 일단 갖고 있는 녀석이라도 열심히 활용해야겠죠.

 

그냥 하염없이 걷다가 보니 거대한 롯데백화점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35mm 렌즈로는 한번에 다 잡을수 없는 거대한 녀석이었습니다.

좁고 복잡한 도로를 걸어가다가 갑자기 확 트이는 공간으로 나오니 땀에 절은 머리도 잠깐 시원해졌지만

아직 그리 크지 않은, 약간 색바른 듯한 익숙한 건물들 사이로 유독 거대한 백화점이 떡하니 서 있는 모습은

뭔가 이질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수가 없겠더군요.

 

겨우겨우 제 빛을 찾아가는 하늘을 이렇게 가려버리는 건물은 원래 별로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그래서 발과 마음이 향하는 대로, 백화점과는 반대편으로 나 있는 골목길로 걸음을 옮기게 되는군요.

 

도장 파는 집, 오디오 가게, 각종 기계부속품 가게, 나름 깔끔하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듯한 모텔 등등

성충으로 완전히 탈피하기 전의 곤충을 보는 듯한 느낌의 골목길입니다.

 

자주 거닐던 일본의 골목길과 다른 점이라면, 길가에 한없이 주차되어 있는 차량들과 이런 쓰레기봉투 정도일까요.

 

 

 

까페에서 몸을 좀 식혔지만 습기많은 하늘 아래서는 그닥 소용이 없네요.

연신 땀을 닦아가며 어딘지도 모르는 골목길을 그저 걷기만 합니다.

 

집 안이나 근처에서만 입고 다닐법한 시원시원한 옷을 걸친 노인분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습니다.

자갈치 시장과 국제시장 근처에서는, 시원시원하기는 해도 결코 동네 슈퍼갈때는 입지 않을법한 옷을 입은 커플들이

진득한 날씨 속에서도 잘도 철썩철썩 붙어 다니는 모습이 보였는데, 몇백 미터만 걸어가도 분위기는 이렇게 바뀌는군요.

 

마침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을 나이대와 겉모습을 한 채로 걸어다니니, 정말 외국에 온 듯한 느낌입니다.

 

 

 

골목길을 빙 둘러서 걷다보니 다시 대로변으로 나오게 되는군요.

전철로 서너 정거장 정도의 거리에 부산역이 있으니 느긋하게 걸어가면 될듯 합니다.

 

엄니께서는 회의 마치고 저녁 드실때 저한테 전화 주시고 하셨으니, 저도 그때쯤 저녁 챙겨먹고 역으로 가면 OK.

센텀시티처럼 완전히 물길이가 끝난 곳은 아니지만, 이곳도 대로변부터 시작해서 점차 세련된 도시의 옷을 갈아입고 있는 중이네요.

여객터미널 근처를 지날때엔 자꾸만 후쿠오카행 페리가 눈앞에 어른거렸지만, 꾹 참고 지나칩니다.

 

 

 

또 다른 골목길엔 어떤 예술가의 조각상들이 길을 따라서 전시되어 있더군요.

힘든 일을 마치고 시원하게 널부러진 사람을 조각한 녀석으로 기억하는데

신발 벗고 맨발로 누워있으면 개운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골목 주변 곳곳에는 노인분들이 비슷한 모습으로 느긋하게 앉아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들어옵니다.

병원복 차림으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노인은, 이 동상처럼 꼼짝도 앉고 길 한복판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더군요.

 

 

 

비가 온 덕에 물 긷는 소녀가 더욱 리얼하게 느껴집니다.

아예 속이 텅 비어있었다면 비가 올때마다 훌륭한 리얼리티를 느낄 수 있었겠지만

조금 생각해 보니, 그랬더라면 아마 쓰레기통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드네요.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골목을 끝없이 걸어갑니다.

대충 부산역 방향이라는 것만 알고 있으면 어디로 걸어가나 상관없으니, 도보여행은 그 정도가 딱 좋죠.

자주 보이던 외국인도 점점 모습을 감추고 있는데, 부산이라면 이런 곳을 걸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난번 부산에 왔을때는 광안리와 센텀시티만 둘러본 터라, 이게 내 기억속에 있는 부산이 맞는가 싶었는데

자갈치시장 근처에서 시작한 이번 산책은 아련하게 남아있던 부산이라는 느낌을 잘 살려주는 곳을 볼 수 있어서

광안대교를 둘러싼 어마어마한 가격대의 최신 고층 아파트의 몽환적인 모습보다는 좀 더 친ㄴ근감이 듭니다.

 

 

 

요즘같은 시대에 계획도시로 만들어졌다면 아마 다 깍아내 버렸겠지만

한국의 근대사와 함께 시작된 도시로서의 부산은, 산지가 많은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개발되어 왔기 때문에

서서히 자취를 감춰가는 달동네도 쉽게 볼 수 있고, 바다와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도 마을 곳곳에 언덕배기가 많이 있네요.

 

작동을 하는건지 마는건지 알 수 없는 스쿠터가 새로 정비된 깔끔한 도로 위에, 대강대강 산을 깎아서 만들어진 언덕 아래 세워진 모습은

뭔가 있어야 할 장소에 딱 맞게 서 있다는 느낌을 주는군요. 센텀시티에 이런 녀석이 놓여있으면 이렇게 어울리지 않겠죠.

 

 

 

바다를 빙 둘러싸듯이 급한 경사의 언덕이 마을 곳곳에 남아있군요.

살짝 대만의 지우펀 느낌이 나기도 하고, 부산은 이렇게 성장해 왔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미 굳어진 도시의 모습을 다시 만들기에는 힘든 면이 상당히 많으니

이런 모습은 꽤 오래 갈거라고 예상해 봅니다만, 어쩌면 모르는 사이에 사라져서 사진으로만 남을지도 모르겠네요.

 

 

 

엄니께서 7시 전에 부산역에 도착할거라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6시쯤 눈에 보이는 돼지국밥집에 들어가서 땀을 식히고 국밥을 한그릇 주문했습니다.

 

부산엔 밀면, 냉채족발, 돼지국밥이 유명하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막상 대구 돌아와서 엄니한테 이야기를 하니 돼지국밥이 유명하다는 말은 들어보질 못했다고 하시네요.

이름난 맛집을 찾아간것도 아니라서 크게 기대도 하지 않았고, 실제로도 맛있어서 남에게 추천할만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기름기 둥둥 뜨는 고기와, 당면이 아니라 고기속으로 채워진 순대의 씹히는 맛이 나쁘진 않았습니다.

사각사각하는 부추무침을 한젓가락 집어서 씹어넘기면 궁합이 괜찮더군요.

 

손수건은 땀에 절어서 방금 세탁한 것처럼 축축해져 버렸고

번들번들한 얼굴과 낡아빠진 옷차림을 조합해 보니, 좀 전까지 시장에서 쌀포대 좀 옮기다 온 사람처럼 보일것 같습니다.

제가 음식점 주인이었다면 저 사람 밥값 낼 돈은 있으려나 하는 생각도 해봄직 하다는 자조적인 생각이 드는군요.

뭐, 카메라와 카메라 가방이 옷차림과 어울리지 않는 고급이라서 그런 오해는 순식간에 풀리겠지만.

 

그러고보니 걸레짝같은 바지도 사실은 꽤나 고급 브랜드의 비싼 옷이긴 하네요. 입다보니 이렇게 된 것일 뿐.

 

 

 

부산역 광장은 (주)예수를 믿으라는 인간들이 튀기는 침과 아코디언 소리로 가득합니다.

광장이 넓어서 기분이 시원하지만, 제일 좋은 볼거리는 2층으로 올라가서 바라보는 맞은편의 모습이네요.

 

부산역에 내리자마자 보이는 이 풍경이 사실 부산에서 제일 인상적입니다.

고지전을 하듯이 여전히 산에서 내려올 기미가 없는 달동네의 모습과

시끌벅적한 도로가의 혼란스러운 모습이 이곳의 활기를 무언으로 표현하고 있군요.

 

지난번엔 일본어로 돈 좀 달라는 거지가 들러붙더니

이번에는 엄니 학교 학생쯤으로 보이는 녀석이 와서 5백원만 달라고 들러붙습니다.

스무살도 안되어 보이는데, 아마 윗선에서 구걸을 시키는 녀석이 있겠죠.

옷차림을 비교하면 사실 제가 그녀석한테 돈 받아야 할 것 같은데.

 

부산은 항상 반나절 정도의 짧은 기간동안만 불러보게 되는데

역시 서울과는 다른 부산만의 맛을 계속 이어 가줬으면 하는 사치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혼잡하고 낡아보여도 서울보다는 그게 어울리는 곳인것 같아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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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니께서 회의차 부산에 당일치기로 내려가셔야 하는데

혼자서는 심심하다고 하셔서 마침 시간도 있겠다 같이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엄니의 왕복 차비나 식사비 등은 정식으로 지급되는 거라서 크게 부담이 없었죠.

 

가까운 대구 살아도 어지간하면 가 볼 일이 없던 곳이라서, 회의는 2시지만 아침 10시에 부산 도착했습니다.

시간이 남아도는 관계로 역 안의 까페에서 커피 마시며 케이크와 베이글이나 쥐어뜯으며 아침의 여유를 만끽하는 중.

 

엄니는 좀 진한 커피를 마시면 속이 쓰리다고 하셔서, 아메리카노를 묽게 해 달라고 주문했습니다.

당일승차권을 보여주면 10% 할인까지 되니 가볍게 먹어줍니다.

 

전 옛날 부산역의 기억조차 없지만, 엄니께서는 이렇게 많이 바뀐 거냐고 놀라시더군요.

서식지가 대구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구의 관문인 동대구역과 비교를 하게 되었는데

동대구역은 시작부터가 확장이 거의 불가능한 구조로 되어 있어서, 아무리 쥐어뜯어도 부산역만큼 만들기는 힘들 듯.

지금의 부산역은, 입구를 빠져나오는 순간 펼쳐지는 모습이 참 인상적입니다.

 

 

 

배가 빵빵하니 점심은 좀 있다가 먹기로 하고, 근처에 간단히 구경할만한 곳을 찾다가 국제시장으로 향했습니다.

배가 빵빵하니 자갈치시장은 패스하고 향한 국제시장인데, 역시나 엄니의 기억속에 있던 곳과는 너무나도 달라졌네요.

예전엔 대구의 서문시장 같은 곳이었다면, 지금은 동성로처럼 되어버렸다고 할까요.

 

밤새 신나게 비가 온 터라 하늘엔 구름이 잔뜩 끼었지만 날씨는 찝찝하고 텁텁합니다.

부산이 대구보다 더 더운건지... 조금만 걸어다녀도 온통 땀범벅이 되는군요. 습도가 너무 높네요.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며 이리저리 골목길을 걷다가 용두산 공원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가 보여서 올라갑니다.

 

전 기억도 없지만 엄니께서는 이곳에 와 본적이 있다고 하시네요.

에스컬레이터는 기억이 안나신다고 하는데, 50m 정도밖에 안되는 작은 산이지만 이 녀석 덕분에 쉽게 올라갔습니다.

주변 풍경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하시고, 확실히 새로운 느낌은 없지만 조용하고 푸근한 분위기입니다.

국제시장 등등 굉장한 번화가 주변에 이렇게 쏙하니 솟아있어서 기분전환 하기에는 참 좋은 위치로군요.

 

 

 

사실 볼거리는 별로 없습니다. 좀 눈에 뜨이는 녀석이라고 해 봤자 부산타워의 묘한 모습 정도인데.

그래도 주변에 비해 고지대다 보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서 땀에 절은 제 목덜미를 식혀주는 것만으로도 만족.

주차장엔 관광버스도 많이 서 있던데, 대부분 중국 관광객이었습니다.

별로 볼 게 없지 않나 싶었지만 웃으면서 여기저기 사진 찍는걸 보니 괜찮은 듯?

 

 

 

매우 높은 확률로 저기 올라가려면 입장료가 필요할 테니

올라갈 생각은 하지도 않고 그냥 구경만 하다가 공원을 뒤로 합니다.

날씨가 좋았다면 한번 올라가 봤겠지만, 당시엔 뭐 눈에 뵈는게 있어야...

 

 

 

용두산이란 이름답게 용 조각상이 멋들어지게 서 있었습니다.

산세가 용의 형상을 닮아, 왜구를 물리칠 기상을 나타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네요.

 

일제시대 당시에는 신사도 세워지고, 이승만 시절에는 그색히의 호를 따서 우남공원이라고 개명되기도 하는 등

여러가지로 굴곡이 많았던 공원이라고 합니다. 한국전쟁때는 피난민들의 판자촌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지금의 한가해 보이기까지 하는 공원의 모습 뒤에는 역사라고 하는 숨은 그늘이 서려 있는 것이겠죠.

 

 

 

제대로 피었다 싶은 꽃은 이 무궁화밖에 없었습니다.

비가 그친지 좀 된 터라 생명력 넘치는 물방울은 많이 사라졌지만

온통 회색빛 하늘 아래서 유일하게 존재를 과시하는 저 색상만큼은 여전히 뷰파인더를 끌어들이는군요.

 

 

 

사진 찍고나면 반드시 확인 후, 좀 이상하다 싶으면 지워버리라고 통첩을 보내는 엄니.

사실 제 입장에서는 '에고 늙었는데 뭐 아무렇게나 나오면 어때'라는 사상보다는 훨씬 좋으니까

분부하신대로 영 이상하게 찍힌 건 지워버리고 다시 한번 곱게 담아드리려고 노력해 봅니다.

 

말단 양호교사에서 기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교장직을 맡게 되었지만, 그동안 받은 스트레스만큼

사회적 활동을 지속할 수 있다는 장점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겠죠. 앞으로도 계속 카메라 결과물에 신경써 주기를.

 

 

 

솔직히 말해서 부산에 온 뒤로 계속 근질근질합니다.

몇달 전에 부산항에서 배 타고 여행떠나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어서 말이죠.

 

내가 지금 바다와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지금이라도 맘만 먹으면 당장 항구로 달려가서 표 끊고 대강 환전하고

5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대마도로 휙 떠나버리는 건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하지만 자기 신분을 스스로 잘 파악하는 것도 인간된 도리이니...

불끈불끈하는 마음을 억누르고, 지금은 자숙해야 할 시기라고 몇 번이고 세뇌를 거듭합니다.

2시에 엄니가 회의 참석하시고 나면 너댓시간동안 저만의 시간이 생기니

병아리 눈꼽만큼밖에 돌아본 적이 없는 부산이라는 도시를 만끽하는 것으로 만족하자고 말이죠.

 

 

에스컬레이터 말고도 빙글빙글 돌아가며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일단 점심시간이 다 되었고, 회의에 늦으면 안되니까 그냥 계단으로 후다닥 내려가기로 합니다.

 

용두산공원은 정상이 훵하니 비어있어서, 이런 산책로 주변이 제일 우거져 있더군요. 그걸 배경으로 한 장 담아봅니다.

옷 선정을 잘해 오셔서 강렬한 대비를 선사해 주시네요. 인물사진은 거의 담지 않지만 왠지 보람이 있습니다.

 

나름 신경쓴 옷차림을 하고 오신 엄니 옆에 다 떨어진 옷 걸쳐입고 어슬렁거리는 노숙자같은 제가 붙어다니니... 뭔가 난해한 조합.

 

 

 

엄니께서는 휭하니 앞으로 나가버리셨지만 저는 걸어가면서 순간순간 눈에 들어오는 녀석들을 담느라 뒤쳐집니다.

이 무거워빠진 카메라와 가방을 들쳐매고 온 만큼은 본전을 건져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죠.

 

흐물흐물해진 하늘을 대신해서 뷰파인더를 치장해 줄 녀석은 역시 생기 넘치는 식물 녀석들 뿐입니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배어내도 나무들은 여전히 힘을 다해 생명을 틔워내는군요.

훗날 이곳을 찾게 되었을 때는 이녀석들조차 배어내져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힘을 내고 있을 거라고 상상해 봅니다.

 

 

내려가면서 우연히 부산타워를 보니

주위의 나무들이 왠지 이글이글 불타는 형상을 하고 있는 듯 해서

 

타워링(The Towering Inferno, 1974)이라는 영화를 생각하며 담아봤습니다. 잘 타고 있네요.

불탄다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어릴 적 봤던 '불타는 소림사'라는 영화가 자꾸 생각납니다.

한국영화 말고 중국 무협영화였는데, 끝이 얼마나 황당한지 어린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녀석이었죠.

 

 

 

용두산 공원을 내려오고 나서는 뭘 먹을까 두리번거리다가 여러가지 광고로 도배를 해 놓은 삼계탕집에 들어갔습니다.

초복이 가까워서 그런지 사람들은 미어터지고 있었는데, 운이 좋아서 바로 들어가 앉을 수 있었죠.

 

바로 옆에 여자사람 두분이 삼계탕을 앞에 두고 사진을 열심히 찍길래 조금 의아했는데

말하는걸 들어보니 일본 관광객이더군요. 한국의 삼계탕은 일본에서 건강식으로 인기가 높습니다.

하지만 한국인인 제 입맛으로는, 그 집 삼계탕 그렇게 맛있다고 하진 못하겠더군요.

그 사람들이 그거 먹고 한국 삼계탕에 대한 안좋은 인식이 생기지 않길 바라며 꾸역꾸역 한그릇 비웠습니다.

 

아직 복날도 아닌데, 오늘 하루 그 집에서 대체 몇백 마리의 닭들이 사라져 갔는지를 엄니와 함께 토론하면서 대로변으로 걸어갑니다.

택시 타면 회의장까지는 금방이라고 하니, 엄니 택시 태워서 보내드리고 부산 하늘아래 덜렁 혼자가 되어버렸네요.

 

엄니께서 회의 끝나고 저녁식사 후에 부산역으로 돌아오실 때까지는, 혼자 여행하는 느낌을 살려보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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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가 본게 대체 몇년만인지 기억이 안 난다.
십여년 전 부모님 결혼기념일 기념으로 예전 신혼여행 코스를 돌아보는 이벤트가 있었는데
그때 살짝 지나친 적은 있지만 차에서 내린 건 국밥 한그릇 먹을 때 뿐이었으니 그건 횟수에 넣기 힘들고.
기억에 남아있는 부산은 약 20여년 전 해운대와 그 앞의 붉은 색 호텔 뿐이다.

뭘 타고 갔는지도 기억에 없고, 단지 호텔에서 해운대로 걸어나가는 동안 노점상에서 사먹었던
밑에 구멍뚫린 다슬기같은 녀석이 그나마 지금까지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이번에 본 부산역의 전경은 나름 신선하다. 별다른 특징이 있는 모습은 아니지만 겉모습만큼이나 내부도 넓직한게 듬직한 느낌.
그런데 부산역을 나오자마자 왠 짝퉁 일본인처럼 생긴 녀석이 가이드북에 '도와주세요'라고 적힌 한국어를 가리키며 돈달라고 조른다.
그냥 경찰서에 갖다 쳐넣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여행 전엔 마음을 평온하게 먹어야지.
일본어로 '돈은 없지만 열심해 해보쇼'라고 웃으며 한마디 던져줬다.


항구도시는 대체 활기차고 시원시원한 느낌과 더불어
신,구의 융합이 조화롭다기 보다는 조금 어지럽게 뒤섞인 혼란스러움이 느껴지는 곳이라고 개인적인 정의를 내리는데
부산의 경우엔 번쩍번쩍한 부산역과 산정상을 향해 돌진하는 듯한 마을, 적당히 예전 풍취를 느끼게 하는 재래시장 등에서
그런 정의에 부합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특히 요즘들어 무섭게 발전중이라고 하니.

좀 덥긴 해도 이 정도 날씨만 유지해 주면 이번 여행은 참 행복할 것 같다.
숙박자 대부분이 일본사람이라는 토요코 인에 들어가 보니 정말 일본쪽과 신기할 정도로 똑같은 구조다.
한국 대다수의 호텔, 모텔에 비해 턱없이 조그마한 객실이지만 오랜만에 들어와보니 나름 정겹다.

자전거 여행, 특히 대지진 당시 근 2주일 가까이 토요코인 야마구치점에 처박혀서 여행을 접을까 계속할까를 고민했던 추억이 있다.
그 외에도 야마구치점의 서비스 정신이 좋은건지, 원래 제공되는 조식외에 석식으로 무제한 카레가 제공되던 점도 틀어박힌 원인.

주 서식지인 서울과 대구에서는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산자락 마을이 여기저기 보이는 모습이 인상깊다.
아마 피난시절에 생긴 달동네가 이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지만, 이것도 부산의 지형적 특성인지 그런 곳이 참 많이 보인다.
그러고보니 나에게 있어서 부산이란 도시는 외국의 이름모를 도시와 다를바가 없는 듯.
KTX 타고 50분이면 가는 옆동네를 20년간 가 본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짧은 시간동안 어디를 둘러볼까 고민하다가 현 부산의 발전상을 느낄 수 있다는 센텀시티쪽을 선택했다.
성격대로라면 자갈치 시장같은 곳이 더 어울릴 것 같지만
20년간 미지의 영역이었던 부산의 최신 모습을 한번쯤 봐 두는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그리고 센텀시티는 광안리와 가까우니 그 놀랍다는 야경도 구경할 수 있어서 효율적이라는 판단도 한 몫 했다.


머나먼 센텀시티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몸으로 느낀 부산의 모습은
도시의 캐치프라이즈 '다이내믹 부산'이 딱 어울리는 느낌이다. 한 번도 각 도시의 캐치프라이즈에 동의한 적이 없었는데.
아, 주 서식지인 '컬러풀 대구' 캐치프라이즈도 어떤 의미로서 참 어울린다고 생각은 했다.
실컷 두드려 맞고 알록달록해진 괴팍한 노장 복서의 얼굴을 떠올렸으니까.

세계 최대의 백화점이라는 센텀시티 신세계 백화점은
뭔가 있어보이는 수식어와는 정 반대의 느낌을 받았다고 할까.
그 크고 거대한 건물 안은, 다른 수많은 백화점과 하등 다를 바 없이
우동과 짜장면이나 파는 그저 그런 푸드코트 안에서도 앉을 자리가 없어 바둥대는 사람들로 꽉꽉 채워진 곳이었다.

세계 최대라고 해 봤자 결국 개미같은 사람들에게 손쉽게 점령당해 버리는 놀이터.
덩치가 커지면 그만큼 사람들이 그 공간을 더 차지할 뿐. 다른 백화점들과 차별화 된 것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오히려 센텀 시티에서 더 볼만한 광경은
이런 초거대 백화점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늘을 뚫으며 위엄을 과시하는 고층 주상복합 건물들이었다.
이런 녀석들이 포진해 있으면, 센텀시티의 두 백화점은 단지 동네 슈퍼로밖에 보이지 않겠지.
과연 이것이 현재진행형 부산의 모습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현재진행형 부산이란 녀석은
여기저기서 껍데기만 뒤집어 쓴 서울의 냄새가 흠씬 풍기는 어색함으로 무장하고 있다.
사진을 찍으면서 '내가 지금 삼성역이나 강남역 주변을 찍고 있는건가'하는 생각이 끊이질 않으니.
부산의 최고급 아파트들 소유주가 어디 사람들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고.

신호등에 멈춰 선 젊은 커플이 이 추운 바람 속에서 팔짱을 꽉 끼고 즐거운 잡담중이다.
재미있게도 여자 쪽이 '돈 X니 많이 벌어서 여~ 살게 해주께' 라고 구수한 사투리로 말하고 있다.
한국처럼 좁고 밀집된 곳에서 그나마 지역색이라는 걸 유지해 주는 것이 사투리인 듯.

센텀시티를 슬쩍 구경후 아무데나 들어가서 소고기 국밥 한그릇 먹고, 옆의 까페에 들어가 커피 한잔.
바람이 너무 강하고 구름도 가득해서 광안리의 야경이 조금 걱정되긴 한다.
삼각대도 없고 노이즈도 형편없는 카메라를 쓰다 보니 멋들어지게 담는 건 애초에 포기하긴 했지만.
약간은 기대했었던 센텀 시티는 사실 부산의 모습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20여년간 외국이나 다름없었던 부산의 압축된 시간을 일거에 폭발시켜줄 임펙트를
광안리에서 기대하고 있다. 일단 한국 어느 지역에도 광안리같은 풍경은 없다고 하니까.


역에서 내렸을 때는 한적한 골목길이 이어졌지만
바다쪽으로 가면 갈수록 조금씩 사람들이 늘어나는 느낌이 들더니
이곳으로 나오자 일순 세상이 바뀌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골목을 빠져나오자 그곳은 광안리였다'

끝없이 늘어선 건물들의 압도적인 광채에, 소문의 광안대교조차 초라하게 느껴진다.
마치 바다가 도시에 삼켜진 듯한 모양새에, 그 바다를 최후까지 가둬버리는 광안대교라는 창살까지.



광안대교보다 찬란한 거리의 불빛이 더욱 눈길을 끈다.
그 대단하다는 홍콩의 야경도 이런 느낌일까.
모래사장에 나와 걸었던 처음 40분간 바다보다 길거리쪽에 훨씬 더 시선을 많이 두게 된다.
의심할 여지 없이 세계적인 절경이라 함에 부족함이 없다.

광안리는 파도마저 형형색색이구나.


한국에서 가장 긴 현수교인 광안대교.
부모님 말씀으로는, 20년 전의 광안리는 내가 자주 가던 포항의 조그마하고 한적한 해수욕장과 전혀 다를게 없는 곳이었단다.
광안대교와 함께 폭발적으로 상가와 주택가가 만들어져서 지금은 사람의 흔적이 자연의 흔적을 덮어버릴 정도의 별천지가 되었다.

분명 비수기일 지금도 사람들이 꽤나 붐빈다.
상가들은 밝기 경쟁이라도 하듯 화려한 불빛으로 시선을 빼앗는다.


인공물이라는 녀석은 조금만 선을 잘못 타면 흉물이 되어 버리곤 하는데
바다 위에 떡하니 서서 가끔 분수나 뿌려대는 저 녀석이 바로 그렇게 느껴진다.
빛의 향연으로 가득찬 이곳 광안리에서 저 이질적이고 초라한 녀석은 대체 뭔가.

이미 전통적인 유래나 역사가 담긴 무언가를 기대하기엔 너무 발전한 곳이라서
이 몽환적인 야경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텐데, 저 녀석만큼은 영 꼴불견이다.


저 멀리 보이는 아파트들은 왠만한 서울 부촌보다 더 가격이 높다고 하더라.
특히 광안대교가 잘 보이는 아파트는 다른 것보다 몇억원씩 더 비싸다고.
저기 살며 365일 끊이지 않는 인공 조명에 반짝이는 바다를 보는 것이 수억원의 값어치를 하는 것일까?

부산의 힘이랄까.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전진할 의지가 느껴지는 광안리는
여지껏 한국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압도적인 야경을 자랑한다. 처음엔 가슴이 쿵 하더군.
두 시간 반동안 거닐며 바다와 네온 불빛을 번갈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딱 하나 마음에 남는 것이라면
이곳은 마틴과 루디가 보고 싶었던 바다는 아닐 것이라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