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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인'에 해당하는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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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2.10.23  산인 여행 - 유시엔 3/3 21
  3. 2012.09.15  산인 여행 - 폭우속의 마츠에 22
  4. 2012.09.13  산인 여행 - 마츠에 성 21
  5. 2012.09.12  산인 여행 - 아무리 준비해도 16

 

 

여러가지로 절약이 가능했던 여행이라서 자금은 그럭저럭 널널하게 남았다.

가져간 현금의 1/3 정도 남았으니, 페리터미널에 가기 전 뭐라도 먹어볼까 싶다.

남들한테 줄 기념품은 이미 구입했고, 본인 것으로는 소설 원서 몇권 샀으니

여기서 할만한건 맛있는거 먹는 일밖에 없다.

 

식당에서 자리잡고 먹기에는 페리터미널로 출발하는 무료 셔틀버스 시간이 아슬아슬해서

딴거 없다 둘러보고 있는데, 오랜만에 소프트크림이 눈에 들어와서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보통 유제품이 아니더라도 싸잡아서 아이스크림이라고 부르는데

예전에 '하드'라고 부른 빙과류에는 크림이라고 할만한 것이 안들어가니 뭔가 잘못 정착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키타로 마을에 왔으니 키타로 관련 아이스를 먹어봐야지. 잠깐의 유흥으로 가격은 더 비싸지만

관광지에서 1~2천원 더 주고 새다른 아이템 먹는것까지 아까워하기는 좀 그렇다.

소프트크림 맛은 수박맛이라는 묘한 맛이 있어서 골랐고, 크림 위에 토핑으로 고를 과자 하나 고르라고 한다.

주인공인 키타로를 선택할까 싶기도 했지만 시각적으로 제일 정감가는건 역시 눈깔아버지 쪽.

 

 

 

사진좀 찍어도 되겠냐니 흔쾌히 대신 들어주신다.

날씨가 더운 날이라 크림 위에 얹은 초코소스가 금방 굳지 않고 조금씩 흘러내리는게 위태위태하다.

서둘러 사진 찍고 밖에 나와서 먹기 시작한다. 눈깔 토핑은 사실 퍼석퍼석해서 별 맛이 없다.

 

크림은 한국의 수박맛바에 유제품을 섞은 듯한 맛. 부들부들하면서도 맛은 강렬하다.

수박맛 향기가 강하고 설탕이 많아서 그닥 좋은 크림을 사용한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관광지에서 그런걸 바라진 않으니 별 불만없이 먹긴 했는데.

 

예전 자전거 여행시 신세를 졌던 키소(木曽)의 홈스테이 아저씨분이

맛있는 소프트크림 있다고 자동차를 몰고 30분이나 달려서 도착한 고원 목장지대의 아이스크림이

정말 놀라울 정도로 농후한 크림맛이라서, 그때 이후로 그냥 평범한 소프트크림은 애들 장난감으로 느껴진다.

일본 몇몇 산간지역에 그런 프리미엄 소프트크림이 있는데, 제대로 된 우유를 쓴 크림이라는게 그런 맛이라는건 처음 느껴봤다.

유럽에서도 그렇고 원래 소프트크림은 그런 맛이었을텐데, 기술이 발달할수록 어째 식음료의 질은 떨어지는 아이러니함은 뭘까.

 

 

 

미즈키 시게루의 흉상과, 그의 저서에 적혀있던 행복론중 한가지인 글귀에 쓰여있는 조각상.

해석하자면 '게으름뱅이가 되어라' 인데, 이걸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뭔가 이상한 결론이 나오게 될지도.

 

전쟁때 왼팔을 잃고, 40세가 넘을때까지 한끼 한끼 식사 해결해서 굶어죽지 않는것 하나만을 위안으로 삼으면서도

당시 천대받던 만화가의 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미즈키 시게루가 이런 말을 입에 담는다는게 어색하지 않을까.

 

원래 저서에 적혀있던 내용 없이 그냥 이 문구만 읽는다면 오해의 소지가 충분할 듯 하다.

그가 하는 말은, 재능과 노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정진해서

일하지 않아도 충분히 소득이 들어와 부자유스럽지 않게 느긋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위치의 사람이 되라는 뜻.

그런 게으름뱅이라면 나도 되고싶지만, 그러러면 좀 더 노력해야 할 듯.

 

워낙 치열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 이해할만한 발언이지만,

호화스럽게도 나는 의미 그대로 진짜 게으름뱅이가 되길 원한 미야자와 켄지의 시구가 더 가슴에 와닿는다.

'비에도 지지않고' 라는 시를 읽어보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지도.

외국어 시라서 한국어로 옮겼을 때 운율이 가진 느낌을 채현하긴 힘들지만 의미 전달은 어렵지 않은 편이다.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데, 주인공인 키타로도 독사진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해서 셔터를 누른다.

지금에서야 일본인들에게도 신기한 복장이겠지만, 묘하게 학생복과 묘지기의 복장이 섞인듯한 모습은

당시엔 그리 특이한 복장이 아니었던 듯. 주인공처럼 보이지 않는 평범함이 요즘엔 오히려 매력포인트가 된 듯 하다.

 

 

 

사실 이 키타로 동상은 혼자가 아니고, 옆의 바위 위에 아버지가 지켜보고 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위치상 둘을 한꺼번에 넣으면 눈깔아버지가 아예 보이지 않을정도로 작아져 버리기 때문에

잠깐 생각하다가 그냥 따로따로 남아버린 것.

 

맨날 키타로 어깨위에 앉아있어서 아버지가 아니라 포O몬스터의 O카츄같은 녀석으로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이 작품이 포O몬스터의 기초가 된 것일지도?

 

 

 

미즈키 시게루 로드의 마수는 역앞 파출소에도 그 힘을 뻗친다.

파출소 앞에는 기념 스탬프도 찍을 수 있고, 왠지 다른 파출소보다 들어가기 쉬워보이는 분위기.

경찰서라는게 일반인들한테는 워낙 흉흉한(?) 곳인데, 왠지 이곳에서는 들어가서 잡담이라도 해 보고 싶은 느낌이다.

 

자전거 여행중이라면 길 물어보기 위해서 쉽게 들어가겠지만 지금은 이야기거리가 없으니.

사실 장거리 자전거 여행자들과 경찰은 관계가 좋지 않아야 정상이긴 한데

의외로 대부분 친절하게 대해주는게 신기했다. 세세한 지도까지 출력해서 펜으로 루트를 그려주기도 하고.

 

많은수의 장거리 여행자들이 공원에서 노숙하거나, 공공화장실 옆에서 밥 지어먹거나 하기 때문에

도시 경찰들은 쉽게 쫓아버릴수도  없고 놔둘수도 없고 난감해하는 분위기.

그래도 일단 도와줄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잘 도와주는 모습이 나름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한밤중에 도착한 시골 마을 파출소에서는 위험하다고 노인용 야광 어깨끈도 하나 받기도 했고.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그날 밤 도로에서 맷돼지를 만나기도 했지만.

 

 

 

셔틀버스는 5분이면 출발한다. 역 앞에 돌아와서 맨 처음 찍었던 조각상을 전체적으로 담아본다.

캐릭터들 구경하는 재미도 있지만, 역시 이 조각상이 가장 느낌이 좋다. 미즈키 시게루의 인생이 담긴 듯 해서.

 

 

 

산책길 출발할때는 고양이소녀 전철이었는데, 지금은 눈깔아버지로 어느샌가 변신해 있다.

두 종류의 전철을 구경할 수 있었으니 왠지 이득본 느낌.

 

톳토리현은 매년 국제 만화박람회를 열어서 외국 작가들이나 젊은 지망생들을 불러모으고 있는데

워낙 장기간 다양한 이벤트를 벌이는 박람회에서 이렇게 3일 정도의 여행에서는 장님이 코끼리의 코를 만지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톳토리현이 사구 말고는 관광거리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장기간 박람회를 열 수 있는것이진 하지만

상당히 열성적으로 기획중인 만화박람회도 이곳 미즈키 시게루 로드 하나의 인기를 능가하기는 좀처럼 힘든듯 하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공무원들 하면 세금이나 축내는 녀석들이라는 느낌이 있는데

한 공무원이 우연히 기획한 미즈키 시게루 로드는, 공무원도 한다면 할 수 있다는 쾌거에 가까운 사건이라고 생각.

물론 나머지 대부분은 이런거 생각할 여유가 없겠지. 노느라고.

 

 

 

이 사진 찍고나니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페리를 탄 시간 이틀을 빼면 3일간의 여행이었는데, 이 3일간 길거리에 떨어진 쓰레기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

쓰레기 잘 버리지 않는다는 일본에서도 그렇게 쉽게 체험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여행지라고 알려진 도시에서는, 번화가에 가면 얼마든지 쓰레기 구경(?)정도는 할 수 있으니.

자전거 여행을 하다보면 외딴 도로가에 버려진 쓰레기들을 어마어마하게 볼 수 있다.

사실 도로가에 떨어진 쓰레기는 한국보다 더 많다. 트럭 운전수들이 먹다가 아무데나 버리기도 하고

가전 폐기물을 돈 받고 수거해서, 산골 도로 깊숙히 그냥 버리는 사기꾼들이 성행하고 있기 때문에.

산골도로가 워낙 많은 일본이라 인력을 동원해도 좀처럼 그런 곳의 쓰레기까지 정리하기는 힘든 모양이다.

 

이러나저러나 이번 여행에서는 기억을 더듬어봐도 길가에 쓰레기 떨어진 모습을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관광지이긴 하지만 일본에서 가장 촌동네라서 그런 걸까. 결론적으로 깔끔해서 기분은 좋았지만.

 

 

 

버스는 10분도 걸리지 않아 페리 터미널에 도착한다. 승선시간을 엄수해 달라고 해서 일찍 들어왔지만

정말 할게 없는 곳이니 심심하긴 하다. 한국쪽보다 훨씬 외딴 곳. 한국에서는 그나마 밖에 나가면  식당이라도 있었다.

여기는 식당이고 뭐고, 주위는 전부 물류창고밖에 없다. 사람 사는 흔적조차 안 느껴지니.

 

인내와 끈기를 갖고 할일없는 시간을 보냈는데, 한국인 단체관광객들은 예정시간을 훨씬 넘겨서 승선 직전에야 도착한다.

그래도 가이드하고 말이 다 되어 있었는지 관광객 여권을 뭉터기로 들고 와서 금방금방 승선권을 넘겨준다.

개인 관광객들에겐 승선 1시간 전부터 와서 대기하고 있으라더니, 단체 관광객들은 승선 15분 전에 오는건 뭔 짓인지.

 

이래서 단체 관광객들하고 같은 날짜에 움직이는게 싫다. 괜한 박탈감 느끼게 하니까. 그런 특권마저 관광비용에 들어있다면

그건 권력 남용이라고 부를만한 것이니 신경질 내도 관계없겠지.

 

 

 

이번 산인 여행 날씨는 참 묘하다. 유시엔 이동중 폭우를 만나고, 유시엔 관람시엔 화창하고

미즈키 시게루 로드까지도 이렇게 맑은  하늘이 있었나 싶었지만, 승선시간이 다가오자 순식간에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힌다.

대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극단적으로 바뀌는 건지. 일단 페리만 타면 끝이니까 이제와서 날씨 걱정할 일은 없지만.

 

승선을 마치자마자 카메라 집어들고 밖으로 나왔다. 몇  초만 늦어도 비가 쏟아질 듯한 하늘이라서

그 전에 사진이라도 남길까 싶은 마음에. 이게 10분 전만 해도 맑디 맑은 하늘의 모습이다.

 

 

 

그 다음부터는 별로 할 말이 없다. 일본서 사온 마시는 멀미약을 6시간 간격으로 한병씩 마시고 잔 것밖에는.

저녁식사는 운이 좋게도 출항하기 전에 미리 먹는 바람에 멀미걱정 없었다. 맛은 여전했지만.

 

멀미약 덕분에 덜 어지럽길레 이번에 산 책이라도 읽어볼까 하고 과감한 도전을 해 봤지만

역시 움직이는 배 위에서 책까지 읽는건, 아무리 멀미약의 힘을 빌어도 무리였다. 그대로 누워서 줄창 잠만 잤다.

 

12시간 달리고 달려서 강원도가 보이는 곳에 도달하니 이건 또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쨍한 날씨.

이번 여행은 예정에 없던 이벤트들이 자주 생기긴 했지만, 적어도 이런 하늘만큼은 여행중에 만날수 있길 바랬는데.

다 끝나고 돌아오니 이런 하늘이 반겨주는 모습은 왠지 더 서글프다.

 

 

 

바람도 없고 파도도 매우 잠잠해서, 바다는 흐늘거리는 실크 같은 느낌이다.

이것도 머피의 법칙이라고 할까. 멀미약 없을때는 넘실넘실 사람을 말려죽이더니

멀미약 먹는 날에는 왠지 바다가 매우 평온하다.

 

 

 

원래는 매우 부정적인 성격이지만, 여행중 만큼은 항상 긍정적이 되는 두얼굴의 사나이.

그래서 이제서야 나타난 화창한 하늘 역시, 바다 위에서 멋들어진 모습 연출해 주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산인 지역의 화창한 모습을 놓친 대신에 햇빛 반사되는 바다를 감상할 수 있었으니.

좋은 경험이긴 했지만, 다음엔 아무래도 비행기로 후딱 갔다오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년쯤 유시엔의 가을을 만끽하러, 직원 할머니에게 인사라도 하러 다시 들러볼까 하는 성급한 상상을 하며 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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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길지 않은 코스길이지만 두 번째의 휴게소에 도착했다. 날씨가 더운 날엔 이렇게 한번씩 쉬어가는게 꽤나 도움이 된다.

 

센스있게도 휴게소 앞에는 이런 모래정원이 아담하게 펼쳐져 있다.

이는 일본의 정원, 사찰 등에서 자주 보이는 방식인데, 일본 근대 최고의 작가중 한명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가

그의 에세이에서 언급했듯이, 서양의 정원이 레크리에이션과 공간활용에 중점을 둔다면 일본의 정원은 그림을 감상하듯

미적 공간으로서의 기능에 충실하다는 특징이 있다.

 

이곳 모래 정원도 자연의 모습을 재현한 것인데, 띄엄띄엄 놓여있는 돌은 우리가 살고있는 육지를 의미하고

모래는 바다, 가지런한 줄무늬는 파도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

 

엄격하기로 유명한 일본의 차도(茶道)와 함께, 정원의 구조와 그 의미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가도

옛날 일본의 잘나가는 분들이 가져야 했던 소양과 덕목 중 하나였다고 한다. 좀 사치스러운 기분이 들긴 하지만.

 

 

 

맞은편에는 그늘이 시원한 휴게소가 자리잡고 있다. 바람도 잘 통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땀을 식히기에는 그만이다.

카메라 장비를 들쳐매고 이리저리 렌즈 바꿔가면서 곳곳마다 발걸음을 멈추는 이쪽으로서는 오늘의 날씨가 좀 부담스럽지만

별 힘들이지 않고 후다닥 감상중인 단체 관광객들은 여기서 별로 쉴 생각이 없는 듯 하다.

그냥 모래 정원 앞에서 기념사진 찍는데 더욱 정성을 쏟는 듯.

 

1년동안 자전거여행을 다니면서도 본인 얼굴이 찍힌, 소위 인증사진이란 건 두세 장밖에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사진에서 자기 모습 남기는 행위에 어떤 만족감이 존재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은 전부 내 시선이 머무는 곳의 흔적이고, 거울이라도 들고 다니지 않는 한 자기 모습을 볼 수는 없으니까.

 

반대로 여행중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찍은 본인 사진은 아마 그사람들 하드디스크에 잘 저장되어 있을 듯 하다.

나도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의 모습은 꽤나 많이 담은 편이니까.

 

 

 

날씨와 거리상의 문제로 결국 찾아가보지 못했던 아다치 미술관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려고

그 유명하다는 '미술관 창문을 통해 보이는 정원 모습'을 한번 흉내내 본다.

아무래도 이렇게 넓직넓직한 창문을 만들어 놓은 것 역시 아다치 미술관에 대한 오마쥬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미술관에 전시된 미술품보다, 창문너머로 보이는 정원의 모습이 더욱 유명한 아다치 미술관은

조금만 검색해보면 그 모습을 찾을 수 있으니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하다.

실제로 이곳 산인지역에 여행을 온다고 해도, 워낙 교통편이 드물고 거리도 꽤 떨어진 개인 미술관이라서

이것저것 둘러보다보면 놓치는 경우가 많은 곳이다. 그곳의 절경이라 불리는 모습을 보지 못해서 아쉽긴 하지만

휴게소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유시엔의 모습이 충분히 그 마음을 보듬어 주는 듯 하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정말 사계절 모두 한번씩 찾아와서 각각의 매력을 담아내고픈 생각도 들고.

 

 

 

아다치 미술관의 정원이 유명해 진건, 창틀이 마치 미술품 액자와도 같은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

그래서 대부분의 사진은 정방향에서 액자처럼 찍힌 모습뿐인데, 유시엔에서까지 그런 흉내를 내려니

살짝 아쉬운 느낌도 들어서 이렇게 아무렇게나 각도를 틀어 담아보기도 한다.

 

신나게 내린 소나기 덕분에 햇살도 쨍쩅하고, 물을 실컷 머금은 조경수들도 생동감이 넘친다.

3일 내내 비가 와서 조금은 우울해져 있었는데, 귀국날 그 소나기 덕분에 멋진 풍경을 구경할 수 있었으니

결국 전체적으로 보면 항상 플러스 마이너스가 상쇄되는 느낌. 어떤 여행이라도 끝나고 나면 그 총합은 제로가 되는 듯 하다.

 

 

 

땀도 식혔고 해서 슬슬 장비 점검해 마지막 코스를 둘러보기로 한다.

그 전에 외로운 섬이 만들어내는 파장을 한장 더 담아보고.

 

마치 우주 어딘가에 살아숨쉬고 있을 다른 생명체에게 날 좀 봐달라고 외롭게 소리치는 지구의 전파를 보는 듯 하다.

 

 

 

유시엔 산책도 마무리단계에 들어간다. 일반적인 코스와는 달리 두갈래로 나눠진 길이 있어서 안쪽으로 들어가 봤더니

언뜻 봐서는 정체를 알기 어려운 불상의 모습이 나타난다. 내 키보다 크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아담해 보이는 인상이고

특별한 미술적 가치를 가진 모습이라고 보기는 힘든 느낌이라서 의아스럽다.

 

일본식 정원 안에 불상이 안치되어 있는 모습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이 정원을 만든 사람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츠에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적당히 안내책자를 뒤적거리다가 얼핏 읽은 바로는,

이 유시엔(由志園)은 예전부터 전해지던 정원이 아니라고 했으니 아마도 근대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정원일 듯 하다.

중앙정부나 마츠에 시에서 만든것 같지는 않다. 이곳 다이콘지마까지 버스를 타고 오면서 풍경을 훑어보니, 정부나 시 차원의 계획 관광지로서

조성된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 그렇다면 아마도 이 지역 유지가 개인적으로 만든 정원일테니, 그 사람과 관계된 불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도달한다.

 

완성도와는 별개로 정원의 크기가 그렇게 크지 않은것 역시 그런 생각을 뒷받침해 준다. 정부나 마츠에 시에서 만들었다고 보기엔 좀 아담하다.

 

 

 

출발지였던 건물 앞으로 돌아왔다. 그리 길지 않은 거리였지만 경치 감상하랴 카메라 셔터 누르랴 해서 시간은 예상보다 많이 걸린 편.

그래도 워낙 여유있게 마츠에 시를 출발했기 때문에 승선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넘친다. 그쪽에도 유명한 볼거리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 너무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되긴 하지만.

 

출발할때는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안내인의 지도를 받아 바로 정원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알 수 없었지만

건물 안 테이블이 주르륵 늘어서 있는걸로 봐서 찻집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듯 하다.

시원한 건물 안에서 정원의 경치를 바라보며 차 한잔하는것도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옆구리에 같이 온 사람도 없고, 일기장마저 잊어버리고 온 여행이라서 혼자 차 마시는게 왠지 어색하다.

경치 감상만으로 반찬(?)을 대신할 수는 있지만, 그건 왠지 본인의 미적 우아함보다 더 잘난체 하는 행동이라는 느낌이 든다.

 

 

 

산책을 마무리하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뭔가 놓친건 없나 싶어서 주변을 더 살펴보게 된다.

바위 위에 끼는 이끼와 비옥한 토양 위에 끼는 이끼, 나무줄기에 끼는 이끼가 전부 다른 종류라는 것도

다시 한번 상기시키기 위해 이렇게 담아보기도 하고. 이 정도 기후에서 바위 위에 이끼가 낀다는건 꽤나 낮은 확률이다.

 

 

 

위의 바위와는 전혀 다른, 흐르는 개울가 옆의 그늘진 곳에서는 충분히 이끼가 번성할만한 여건이 조성된다.

인위적으로 조성된 곳이기는 하지만, 실제 개울가에서 저렇게 소복히 깔린 이끼를 보게 된다면

밟는게 아까워서 개울가에 다가가기도 힘들 듯한 느낌. 감상에 목적을 두는 일본의 회유식 정원에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물론 경치 감상하는 정원도 좋긴 한데, 잔디밭에서 개와 뛰어놀고 싶은 나의 희망상, 이런 정원은 입장료 내고 구경하는 정도로 만족할 수 밖에.

 

 

 

삼각대와 ND 필터가 있었다면 조리개를 F22 까지 조여놓고 좀 더 부드러운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던 곳.

한국인 단체 관광객도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렸고, 몇몇 개인관광객밖에 돌아다니지 않은 상황이라서

크게 방해는 되지 않겠지만, 일단 이런 좁은 정원에서 삼각대를 설치하는건 매너 위반이긴 하다.

 

카메라에 관심을 갖고 있으면 언제든 들려오는, 몰지각한 인간들의 행태에 대해 마음껏 비난하고 있는 입장이니

멋진 사진을 담을 수 있을것 같아도, 그것보다는 주위에 폐가 되지 않는지를 먼저 고려하는게 언행불일치를 막기 위한 수단일 터.

주인장한테 직접 가서 부탁하면 못 찍을만한 상황도 아니지만, 다른걸 떠나서 지금은 삼각대와 ND 필터가 없다. 그냥 그렇다고.

 

 

 

산책을 마치고 처음 출발한 건물로 돌아오자 가슴 시원한 모습이 기다리고 있다.

더운데 수고하셨다고 준비해 놓은, 얼음에 파묻힌 물수건을 보자, 이 정원에서 느꼈던 관리인들의 손길이 과연 착각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판기처럼 기계 한대 가져다놓고 척척 얼음 물수건이 나오게 한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손님에 대한 배려이겠지만

대나무 광주리에 아날로그식으로 놓여진 얼음에서는, 직접 손발로 뛰면서 손님을 맞이한다는 노력이 스며들어 있다.

주변과의 조화를 중시하는 정원답게, 얼음 위에 살짝 놓여진 단풍잎 두 장이 더욱 운치를 풍긴다.

 

시원한 물수건이 목덜미를 적시니 정원 산책의 만족도가 더욱 높아지는 듯 하다. 이런 배려라면 점수를 더 줘도 괜찮겠지.

이 앞에는 정원 운영에 도움이 되는 여러가지 기념품들이 포진하고 있을테니, 위치상으로도 절묘한 배치라고 생각한다.

 

 

 

자연의 정취가 가득한 정원에서, 에어콘이 완비된 현대식 건물로 들어갈 때의 위화감을 줄이려는 의도였을까.

자동문 앞에 과하지 않게 홀로 서 있는 꽃꽃이 모습도 과하지 않게 자기주장을 하는 중이다.

회유식 정원 관리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소소한 분위기 만들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이제껏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런 물수건이나 꽃꽃이에 눈길을 주고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거뜬히 카메라 셔터를 누를 가치가 있었다. 정원 산책할때만큼이나 나를 기분좋게 해 줬으니까.

 

 

 

건물 내부는 상당히 넓고, 정원을 향해 나있는 창문이 내 키의 세 배는 될 정도로 시원하게 뚫려있어서

어찌보면 정원쪽보다 더 밀도가 낮아서 널널하다는 인상이다.

 

마침 푹신푹신한 창가쪽 테이블에서 양복입은 장년층이 뭔가 이야기중이라서

전체 모습을 광각으로 담아내기는 좀 부담스러운 상황. 그냥 특이하다 싶은 녀석을 찾아보다가 이 인삼을 발견한다.

그러고보니 이곳 입장할 때도 붙어있었던 홍보 포스터에는 '모란과 고려인삼의 고장' 이라는 수식어가 적혀있던데

그 말이 허언은 아니었던 듯 하다. 고려인삼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고유명사화 되어 버렸으니 이곳에서 사용하는것도 큰 문제는 없을 듯.

반대로 생각하면, 당시 인삼계를 주름잡았던 고려인삼의 명성이 일본에서까지 이어지고 있구나 하는 느낌에 살짝 뿌듯하기도 하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일본쪽도 인삼 재배에 과학적이고 세심하게 접근하고 있어서

고려인삼이라는 타이틀을 제외하고, 순수한 약용효과로 따지자면 일본쪽 인삼도 세계 정상급에 속한다.

이곳 다이콘지마의 고려인삼도 전량 수출용으로, 일본 본토에서도 굉장한 가격대인 인삼을 수출용으로 쓴다는 건

본토보다 더 가격을 높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 요즘 중국이 떠오르기 전엔 소비의 블랙홀이라고 불리던 일본에서

자국 소비보다 수출쪽에 중점을 둔다는 건 그리 흔한 케이스가 아니다.

 

설명을 보니 이 인삼은 자연산으로 발견된 녀석중에서는 일본에서도 손꼽히게 큰 녀석으로

추정 가치는 수억원을 넘는 듯 하다. 그걸 이렇게 전시해놔도 되는건가 싶은데.

 

 

 

인삼 사진찍고나니 매점 카운터를 보던 할머니께서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정원 구경 잘 했고, 물수건 놔둔 것이 참 인상깊었다고 본말전도격인 칭찬을 하니 기뻐하면서 차라도 한잔 들라고 하신다.

종이컵에 담긴 녀석은 알싸한 맛이 감도는 인삼차. 과연 이곳은 인삼쪽으로도 유명한 곳인가 보다.

 

정원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가을이나 겨울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니 꼭 한번 다시 와보라고 하신다.

특히 가을의 유시엔은 정말 절경중의 절경이니 보면 좋을거라는데, 올해 가을이 한달 반정도밖에 남지 않았으니

그 사이에 다시 오는건 무리고, 잘해봐야 내년에나 올 수 있을것 같아서 마음 속으로는 조금 아쉬운 기분.

 

중간에 한국에서 왔다는 이야기 하니까 여느때처럼 깜짝 놀라주시고, 귀한 손님 오셨다는 듯한 대우를 해주셔서 약간 쑥쓰럽기도 하다.

단체 관광객은 한국쪽이 제일 많지만, 아마 이정도로 자기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한국 관광객을 보는게 그리 흔한 일은 아닐테니까.

처음부터 말은 잘 통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외국인하고 말이 통한다는 게 재미있으셨는지, 할머니는 정원에 대한 나의 궁금증을 자세히 풀어주신다.

 

산인 지방이 원래 낙후된 변경이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이 다이콘지마는 제주도처럼 화산 융기로 솟아난 섬인데다가

서울의 동 하나보다도 작은 손바닥만한 화강암 섬에서는 제대로 된 농사도 짓기 힘들었기 때문에,

마을 여성들은 이곳 특산품인 모란꽃을 한가득 등에 매고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며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다고 한다.

 

방금 전 보았던 불상은 그 여인들의 고생을 기리는 의미에서 세워진 것. 그러고보니 가슴팍에 모란꽃이 장식되어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이곳의 지주였던 사카에(栄)씨는 원래부터 장사에 소질이 많은 사람이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젊어서 안해본 장사가 없다고.

1950년대, 전후 더욱 피폐해진 마을의 사정을 실감한 사카에씨는

'여성이 꽃을 팔러 멀리 떠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일본 각지에서 관광객이 구경하러 오는 정원을 만들자'고 결심하게 된다.

사카에 씨 본인의 가계는 생활에 그리 궁핍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위에서 큰 반대에 부딪치기도 했지만

예전부터 정원을 만드는 것이 꿈이었던 그의 아버지 요시조(由蔵)씨가 아들의 의지를 지원해 주었다고.

 

주위의 논밭을 전부 사들이고, 화강암 덩어리인 토양에 흙과 나무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같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착공 당시엔 이름 그대로 이곳은 외딴 섬이었기 때문에, 중고로 배 한척과 불도저, 크레인을 각각 1대씩 들여와

끊임없이 육지를 옮겨다니며 자재와 나무를 실어날랐다고 한다. 지금은 육지를 잇는 도로가 만들어져 버스로 편하게 올 수 있지만.

그 때의 모습을 담은 흑백 사진이 건물 한쪽 벽에 전시되어 있는데, 할머니께서는 나를 직접 그곳까지 끌고 가셔서

자신이 지내왔던 세월의 흔적을 되짚어 가듯이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당시의 기억을 이야기 하신다.

 

착공 8년만에 일차 공사가 마무리되고, 사카에씨는 아버지 요시조가 꿈에도 그렸던 정원을 기억하기 위해서

유시엔(由志園)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 후로도 여러번 공사를 거쳐서 점차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외국인으로서 듣기 어려운 생생한 세월의 기억을 알려주셔서 감사의 표시를 하고, 기념으로 사진 한장 찍어도 되겠냐고 물어보자

할머니께서는 예상 외로, 그 건물 안에서 일하고 있는 점원들은 모두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굉장히 뻘쯤하다.

아무튼 다들 쑥쓰러워하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하면서 자리를 잡는다. 뒷 배경의 커다란 모란 그림도 유명한 화가의 작품.

나를 안내해 주던 할머니는 앞줄 왼쪽에 앉아계시는 분이고, 앞줄 중앙의 할머니는 사카에 씨의 따님으로, 유시엔의 2대 주인이라고 하신다.

 

오늘 귀국날이라서 바로 가봐야 한다는 말에 조금 아쉬워하시는 할머니.

만약 우연이 겹쳐서 귀국일과 관계없는 날에 이곳을 찾았다면, 함께 식사하는 정도의 대접은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가을의 유시엔은 정말 훌륭하니 꼭 다시 한번 찾아와 발라고 당부하시는 할머니를 보니, 뭔가 의무감이란게 드는 느낌.

실제로 이곳은 꽤나 마음에 드는 정원이고, 가을의 절경이 상상되는 듯 해서, 내년 가을에라도 인사하러 찾아가보게 될 것 같다.

 

또 하나 여행의 인연을 만들었으니 뭐라도 사 갈까 싶어서 기념품점을 둘러본다.

형체가 남는 물건은 어제 개미공방에서 구입했으니 넘어가고, 추천하고픈게 있느냐고 물어보니

요즘에 자신들이 개발한 모란전병을 추천해 주신다. 짭짤한 전병 사이사이에 모란을 닮은 분홍색 반점이 들어가 있는 녀석.

물론 모란 자체는 맛이 나지 않기 때문에 새우맛 소스를 대신 집어넣었다고. 고급스러운 새우깡 느낌이라 마음에 들어서 2개 구입.

하나는 집에서 먹고, 하나는 형님부부쪽으로 보내려고 한다.

 

 

 

폭우와 함께 천지를 진동시키던 벼락이 떨어지던 좀 전의 하늘에서

잠깐 정원 산책을 하고 온 것 뿐인데, 청명하게 펼쳐져 있는 하늘의 모습을 바라보니

정말 다른 시공간으로 빠져들었다가 꿈 속에서 깨어난 듯한 기분.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그냥 버스 코스가 맞아서 귀국하기 전에 들렀을 뿐인 유시엔에서는

훌륭한 풍경과 함께 사연 많은 현지인들의 배려로,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화려한 모란에 숨겨져 있던 고난의 시간이, 한 지역 유지의 노력으로 인해 본연의 아름다움을 되찾은 공간.

 

나와는 동떨어진 수백 년 전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정원이라던가

중앙정부나 시 차원에서 조성되고 관리되는, 시민을 위한 휴식공간으로서의 정원이 아닌

힘겨운 생활을 보내는 마을 여인들을 위한 마음으로 시작된 조그만 정원은, 그렇기에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장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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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날에 배를 타고 온 한국인 관광객이 백명 가까이 되기 때문에 어디서든 스치게 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커플 두어 팀 빼고는 한국인이 보이지 않는다. 다들 뿔뿔이 흩어진 걸까.

단체관광객은 전용버스타고 여기저기 달리고 있는 중이겠고, 자유여행객들은 다들 다른곳으로 흩어졌나보다.

이곳 산인지방은 이렇다 할 유명한 관광지는 한두군데 정도밖에 존재하지 않지만

일본 특유의 '별것 아닌 소재도 잘 꾸며서 관광지로 만드는' 능력이 여기저기에 엿보여서

아기자기한 볼거리들이 흩어져 있으니, 그렇게 흩어지는 것일까 싶다.

 

사람의 힘으로 만든 것들은 어느 나라나 점점 비슷해져 가는 시대지만

그리 멀지않은 한국이라도 자연 풍경만큼은 일본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올때마다 꼭 한두장씩은 찍게 되는, 일직선으로 시원하게 뻗은 삼나무로 이번에도 눈요기.

 

 

 

마츠에 성을 내려오면서 보이던 연못.

아주 조그마한 곳이고, 흐르지 않는 물이다 보니 상당히 지저분한 느낌이다. 중간에 표지판이 세워져 있을 정도로 얕은 곳.

연못 앞에 '馬洗池' 라는 푯말이 보인다. 이름 그대로 말을 씻기던 곳인듯 하다. 과연 식수터는 아닌것 같았다.

 

 

 

이 연못의 맞은편에는 '기리기리 우물터' 라는 의미불명의 푯말이 세워져 있다.

우물터라는건 뭐, 말 그대로이겠는데 '아슬아슬'이라는 뜻의 기리기리가 어째서 붙어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아슬아슬한 우물이란 게 대체 무슨 뜻인지. 주변 풍경이 그렇게 아슬아슬해 보이지도 않고.

우물은 이미 사라져 버렸으니, 아슬아슬한 우물이 어떻게 생긴건지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

 

나름 일본어에는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본인이 이렇게 막혀버리니 뭔가 패배감을 느끼며 다시 길을 가는데...

 

다행히도 조금 더 걸어가니 이 정체불명의 우물터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어서 안도의 한숨.

그런데 일본어로는 열줄 가까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 반면, 한국어로는 단 두줄로 간단명료하게 설명해 놓아서

그냥 한글만 읽으면 거의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성의 부족이라고 밖에 할 수 없을 듯.

 

대강 설명하자면, 에도시대 축성공사때 벽면이 한쪽 무너지는 바람에 그곳을 깊게 파서 조사해 봤더니

사람 해골과 창이 발견되어, 정중히 제사지낸 후 벽을 다시 완성시켰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 깊게 파낸 구멍이 사람의 가마와 닮은 모습이었고, 그곳에서 물이 솟아난 덕에 그대로 우물이 되었다고 한다.

그 가마 닮은 구멍때문에 이 근처의 성문과 우물이 모두 '기리기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여기까지 읽고도 그게 기리기리하고 대체 뭔 관계인가 싶었는데

사실 기리기리(ぎりぎり)라는 단어는 가마(つむじ)의 오사카 사투리 버전이라는 진실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가마란 선모(旋毛) 라고도 하며, 사람 정수리의 소용돌이 모양의 머리털을 의미한다. 머리털의 선회점이라고 하면 다들 이해가 빠를 듯.

애초에 저 가마(つむじ)라는 단어 자체가 여간해서는 외국인이 배울 일이 없는 녀석이라서 깔끔쌈빡하게 모르는 단어인데

그걸 사투리로 '아슬아슬'과 똑같은 단어인 기리기리라고 썼으니 내가 알 턱이 있나.

 

어쨌든 실생활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이지만, 평생 잊어먹지 않을 단어 하나 배우고 뿌듯한 기분.

 

 

 

말 씻는 연못을 빙 둘러 내려와서 걸어가면 코이즈미 야쿠모 기념관이 나온다고 표지에 적혀있다.

사실 기념관은 한참 더 걸어가야 나오는 거리지만, 어쨌든 길은 맞으니 한동안 산책하는 기분.

 

물과 가까워지려고 하는 것은 나무의 본능인지, 이곳에도 수면쪽으로 가지를 드리운 나무가 있어서 한 장 남긴다.

여행중 이런 사진을 은근히 많이 남기는 기분이 드는데...

 

 

 

한국에서도 못 볼 풍경은 아니지만, 습도가 높은 일본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풍경.

나무에 자리잡은 무수한 이끼들을 보고 있으면, 그래도 역시 외국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녀석은 사람이 조경을 목적으로 기른 이끼가 아니라서 보기 좋은 느낌은 아니지만

생명력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보고 있으면 왠지 사진 찍고싶어지는 장면이다.

일본은 전체적으로 한국보다 고온 다습에 강수량이 많은 곳이라서 식물들의 생장력이 꽤나 강한 편.

 

 

 

말 씻는 우물터를 빙 돌자마자 후덥지근한 하늘 위에서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진다.

사실 성에 올라설 때 부터 조금씩 예상은 하고 있었던 일이라서 그냥 한숨 한번 쉬어줄 뿐.

여름날 비 오기 직전의 그 텁텁한 습도를 자주 경험해 본 사람들이라면, 곧 비가 오리라는 예측이 충분히 가능하다.

 

애초에 날씨가 영 불안정하다는 소식은 듣고 온 터라, 비가 오면 맞으면 되지라고 생각하고 있기도 했고.

카메라 가방과 카메라는 어느 정도 방수기능이 있고, 내 옷은 위아래 전부 등산용 쿨맥스 소재라서

비를 맞아도 30분 정도만 걸어다니면 금새 말라버린다.

카메라 장비도 짐인데, 언제 올지 모르는 비때문에 우산을 갖고 나오긴 싫어서 맨몸으로 나왔다.

 

사실 자전거 여행때 워낙 익숙해지는 바람에 그렇게 건성으로 대처해 버렸지만

엄연히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이번 여행에서는 조금 더 조심해야 할 상황이었다.

비맞으면 땀냄새와 섞여서 영 불쾌하기도 하고, 신발이 속까지 젖어버리면 그 꾸린내라는 건 엄청난 민폐라서.

자전거 여행때는 며칠 달리면서 비 맞고 나면, 냄새때문에 편의점에 들어가기도 미안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그런 배려심이 오랫동안의 배멀미로 인해서 다 사라져 버리고, 판단능력이 한없이 저하된 지금은

비맞으면서도 꽃한테 눈길이 팔려서 사진이나 찍고 있는 태평함을 연출해 버리고 만다.

 

 

 

하지만 살짝살짝 간보듯 내리던 비가 일순간에 폭우로 변하자 뭔가 잘못됐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소나기도 보통 소나기가 아니라, 맨살이 닿는 부분에는 방망이로 두드려 맞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의 미친듯한 빗줄기.

거의 사고가 마비되어서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운도 좋게 주위에 비 피할 수 있는 처마란 게 아예 없다.

간이 휴게소라고 소개되어 있는 친절한 장소도, 탁 트인 하늘아래 벤치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곳이라서 도움이 안된다.

 

처마가 있어보이는 유일한 장소는 바로 옆 언덕 위의 신사. 30초 정도면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는데

간신히 처마밑으로 피신했을때는 이미 옷 입은채로 바다에 뛰어든거나 마찬가지 꼴이 되고 말았다.

조금만 과장하면 대중목욕탕의 폭포수 기계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하늘이 무너질 듯이 콸콸 쏟아진다. 비 맞은 시간은 1분도 채 되지 않지만 속옷까지 홀딱 젖어버렸다.

 

카메라 가방은 재질이 워낙 두꺼워서 방수팩 없이도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었지만

몸으로 최대한 가리며 갖고 온 카메라는, 조금만 더 노출됐더라도 이번 여행 촬영은 황으로 날아가 버렸을 터.

뷰파인더 안쪽에 습기가 차서 닦이지도 않고, 자연스레 말라 없어질때까지는 거의 장님촬영이나 마찬가지 상황이다.

 

 

 

그래도 뭐, 일단 처마밑에서 비 피하고 있으니 더 이상 젖을 염려는 없고

망원렌즈로 쏟아지는 빗줄기 속의 피사체를 찾아서 두리번거린다.

 

비를 맞아가면서 하는 촬영은 참 고역이지만, 비 피할 수 있는 곳에서 비내리는 곳을 촬영하는 건 의외로 꽤 재미있는 일이다.

대비색이 부각되는 피사체를 찍으면 빗줄기때문에 주변 채도는 낮아지고, 몽롱한 꿈 속에서 한가지만 또렷하게 튀어오르는 느낌이랄까.

우렁찬 카메라 셔터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폭우라서, 부옇게 보이지 않는 뷰파인더를 바라보고 있으면 점점 현실감이 사라진다.

찍고 나서 화면을 보면, 방금 내가 봤던 것과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결과물이 나와주니 묘한 기분.

 

 

 

홀딱 젖어서 짜증은 나지만, 의외로 여행중에는 꽤나 긍정적이 되는 타입이다.

특히 카메라를 들고 갔을 때는, 어쨌든간에 다양한 환경에 노출되는게 다양한 추억거리를 남겨올 수 있으니까.

뷰파인더가 너무 흐려서 사실 화면 보기전까지는 저게 뭔지도 잘 몰랐다. 그냥 주황색 뭔가가 보이길래 찍어본 것.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된 나와는 달리, 저런 녀석들은 비가 오니 왠지 좀전보다 훨씬 생기가 도는 것 같다.

살짝 김빠진 느낌이 나던 방금 전의 말 씻는 우물터도 지금은 뭔가 왁자지껄하게 파티가 열렸을 것 같아서 근질근질하다.

아무래도 이 빗속을 뚫고 다시 그쪽으로 갈 수는 없지만.

 

 

 

버스 시간에 쫓기거나, 거래처와의 약속에 늦지 않는 한에서라면

사실 비 내리는 구경도 상당히 운치있는 놀이다.

 

한 걸음만 내딛어 빗속에 뛰어들면 눈도 뜨지 못할 격류속에 휘말린 기분이겠지만

든든한 처마 밑에서 이 세상과 단절된 듯 혼자 서서 비를 바라보고 있으면 기분좋은 고독감을 만끽할 수 있다.

고양이가 좁은 박스를 좋아해서 어떻게든 몸을 끼워보려고 애를 쓰는 것처럼

귀와 눈을 때리는 거대한 빗줄기를 남의 일처럼 쳐다보고 있으면

이 넓은 풍경 속에서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 이 경이로운 지구의 움직임 사이의 조그마한 틈새에 끼어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꼼짝도 못하게 사방이 막혀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한테만 주어진 안락한 공간이라는 안정감.

 

 

 

 

고개를 돌려보니 인공 폭포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이쯤되면 쏟아지는 비가 되려 고마운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밋밋한 여행이란 건 사실 마음가짐에 달린 것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알아서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주면 여행의 추억거리가 더욱 늘어나니까.

 

배멀미 때문에 거북하던 머리도, 한국인 관광객을 놔두고 혼자 버스를 타버린 죄책감도, 갑갑한 하늘때문에 흥이 바랬던 천수각도,

몽둥이같은 빗줄기로 머리 한방 맞고 나니 좀 개운해지는 느낌이다.

여행의 흥이란 이렇게도 예상치 못했던 변수에 의해서 다시 되살아나는 것이고, 삶이 지루해지지 않게 해 주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어차피 시간은 남아도는 여행.

숙소는 아무리 늦게 가도 뭐라 할 사람 없으며, 약속 장소에서 발을 굴릴 동행인도 없다.

물론 여기서 발이 묶인다면 돌아보려 했던 몇몇 관광지를 갈 시간이 부족해질수도 있겠지.

 

하지만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초초한 마음으로 달리는 것은

찌든 일상생활 안에서 싫어도 얼마든지 겪을수 밖에 없다. 뭐하러 여행에서 그런 초초함을 추구해야 하나.

시간이 늦으면 안 보면 되는 것이고, 빡빡한 여행일정 계획대로 소화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조금이라도 더 다양한 곳의 사진 더 많이 올려서 블로거들한테 칭찬 한마디 더 듣는 것밖에 없지 않은가.

 

되려 이렇게 혼자만의 공간을 강제로 만들어 나를 붙잡아 둔 폭우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우산을 갖고 오지 않아서 생길 수 있었던 시간의 낭비. 그 덕분에 두 손으로 카메라를 쥘 수 있으니까.

 

 

 

아무리 미친듯이 쏟아져도 소나기는 소나기. 10분쯤 내리니 저 멀리서부터 푸른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직 이곳은 빗줄기가 약해지지 않았는데도, 마츠에에 도착한 후 처음 접하는 맑은 하늘.

노란 신호등처럼, 이제 곧 끝나니까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하라는 배려깊은 풍경이라고 할까.

 

 

 

빗줄기는 충분히 약해졌지만, 기왕 기다리는거 완전히 그칠 때까지 그냥 서있기로 했다.

후덥지근한 날씨도 완전히 젖어버린 옷 덕분에 많이 시원해졌고, 옷은 한 시간만 걸어다녀도 다 마른다.

 

형체마저 흐트러진듯 보이던 모자상이 점점 제 모습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

멈춰진 듯한 10여분의 시간이 다시 현실감을 띄고 다가오는 듯 느껴진다.

 

 

 

사진에서 생기가 도는 것은 단지 비온 후 먼지가 씻겨 내려갔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여전히 머리는 알아서 흔들거리고 있지만, 이제부터가 제대로 여행한번 즐겨보자는 새로운 각오가 사진에도 영향을 미치는게 아닐까 싶다.

 

비가 오지 않아서 계속 발걸음을 재촉했다면 아마 오늘 하루의 대부분을 상당히 뚱한 기분으로 넘겼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엔 다들 비 맞으면서 신나했는데, 간만이긴 하지만 그때의 그 기분을 다시금 일깨울 수 있어서 상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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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시인지도 모르겠는데... 7시쯤 조식을 준다길래 기어가봤더니

아침이라고 간단히 드시라는 배려인지 어제 저녁보다 더 형편없는 메뉴다. 돈을 냈으니 집어먹어주는 수준.

 

9시에 하선했는데, 역시나 15시간동안 흔들렸더니 몸이 거기에 익숙해져 버렸다.

땅을 밟고 서도 머리가 흔들흔들 움직이는게, 오늘 하루동안 이 어지러움이 없어지지 않으리라는 건

지난번에도 겪어봤기 때문에 확실히 알 수 있다. 사람 몸이라는게 가끔 이렇게 엉뚱한 적응을 해버린다.

 

빠듯한 일정이니 왠종일 돌아다녀야 하겠지만, 가만히 서있어도 어질어질한 상황에서는 관광이 그리 즐겁지 않다.

무리하러 온 것도 아니고, 오늘은 대강 발가는데로 돌아다니다가 적당히 들어가서 쉬어야 할듯.

 

사키이미나토 여객터미널엔 동해항과 같이 아무것도 없고, 사카이미나토 전철역까지 가야 하는데

다행히도 무료 셔틀버스가 운행중이다. 동해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동해항까지는 그런 거 없었는데.

 

배멀미로 온갖 고초를 당한 내 인상이 심히 좋지 않으리라고 생각은 하지만, 좀처럼 얼굴을 펼수가 없다.

머리가 흔들리듯이 느껴지는게 아니라, 정말로 가만 서 있으면 머리만 저절로 움직인다. 누가 보면 술 취한줄 알겠네.

사카이미나토 역에 도착하니 그나마 사람사는 냄새가 난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볼거리인 미즈키 시게루 로드(水木しげるロード)가

펼쳐지고 있지만, 그쪽은 귀국날 구경할 생각이라서 카메라 꺼내지도 않았다.

지금은 일단 호텔에 가서 짐맡기기 전까지는 카메라를 꺼낼 기분이 전혀 들지 않으니.

 

단체 어르신 관광객들은 이미 알아서 버스타고 가버렸고, 젊은 자유여행 커플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다.

사카이미나토역 관광안내소에서 외국인을 위한 3일 교통권을 구입한다. 인연맺기 퍼펙트 티켓(縁結びパーフェクトチケット)이라고 하는데

이번 여행의 전초기지인 마츠에(松江) 근처의 시영, 민영버스와 전철, 공항과 항구까지 가는 버스 등등을 무제한으로 탈 수 있는 녀석.

3천엔짜리인데, 마츠에에 숙소를 잡은 여행객이라면 거의 어떤 상황에서도 99% 이득이 되는 티켓이니 반드시 구매해야 한다.

마츠에에서 공항이나 항구까지 왕복으로 왔다갔다 하는데만 2천엔이 넘게 나오기 때문에, 뭘 타고 돌아다녀도 3천엔보단 더 쓴다.

유일하게 JR 은 사용할 수 없지만, 이곳 근처엔 JR 타고다닐 메리트 자체가 없다. 일본 본토에서 이곳으로 기차타고 찾아오는 사람들 외에는.

 

왜 제목이 인연맺기인가 하면, 마츠에시가 속한 시마네(島根)현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가

인연맺기로 유명한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 신사이기 때문.

이렇게 외진 곳에 위치해 있어도, 이즈모타이샤 없이는 일본 전체의 신사가 존재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곳이다.

이 이유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즈모 갔을 때 다시 한번 이야기하기로 하고.

 

1년간 자전거여행을 하면서 인구 100명도 될까말까한 시골구석도 얼마든지 지나온 터라

내 입장에서 보자면 충분히 번화한 곳이라는 인상이자만, 관광 목적으로 콕 찝어서 일본을 다녀본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황량한 마을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을 듯한 분위기의 사카이미나토 역의 모습.

조금 더 이곳의 풍경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연산작용을 해 볼까 하는 생각이 없지도 않았지만

45L 짜리 백팩과 거대한 카메라가방을 짊어진 체로 멀미에 시달리고 있는 현 상황에서는 거의 뇌 속이 블루스크린이나 다름없다.

 

역 앞의 유일한 버스정류장에 한국 젊은이들이 줄지어 서 있는데, 앞에 슬쩍 가서 표지판을 보니

10시 15분에 마츠에로 출발하는 버스는 이곳이 아니라 길 건너 유람선 정박장에서 출발한다는 안내가 적혀있다. 일본어로.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수의 관광객이 마츠에로 가리라는 예측이 가능한데, 전부 여기 서 있다는건 뭔가 어색하다.

 

내가 길가에서 떨고있는 고양이에게 배풀던 온정의 천 분의 일이라도 사람을 향했다면, 그리고 머리가 저절로 춤추고 있지만 않았다면

거기 서 있던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혹시 마츠에 가는 버스 기다리고 계신가요?' 라고 물어보고

10분 뒤에 오는 버스는 여기서 타는게 아니라고 친절하게 가르쳐 줬겠는데. 여기에 정차하는 다음 버스는 10시 40분이나 되어야 온다고.

 

하지만 머릿속이 마비된 때문일까, 파도에 15시간동안 시달린 분풀이를 엉뚱한 곳에 한 것일까.

무심하게도 그냥 혼자서 뚜벅뚜벅 맞은편 선착장으로 걸어간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다.

이기적인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누구 한사람이라도 나한테 버스타러 가는 거냐고 물어봤다면 해결된 문제였지만

내가 말걸기 편안한 타입은 아니라는건 본인 스스로 잘 알고 있으니, 그건 좀 책임회피적인 생각이겠지.

 

결국 선착장에서 출발하는 버스에 탄 한국인은 나 혼자밖에 없었다. 전부 유람선 타고 바로 도착한 일본인 관광객들 뿐.

10시 15분의 이 버스는 이 유람선 손님들을 위해서 하루에 한 번 이곳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은근히 죄책감을 느끼면서 한적하기 짝이없는, 하지만 정비 하나는 제대로 되어있는 시골길을 달려 마츠에로 향한다.

 

마츠에시가 시마네 현에서는 큰 도시이긴 하지만 한국의 도시라는 개념에 비추어보면 꽤나 소박한 곳이다.

이건 이런 분위기의 일본 도시를 직접 눈으로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설명하기가 참 어려운데

하늘 위가 썰렁할 정도로, 높은 건물도 없고 그냥 나즈막한 빌딩들과 무채색 계열의 차분한 색깔로 이루어진 이 곳은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조그만 도시와 비슷하다고 쉽게 말하기엔 다른 점이 많다.

 

사실 일본과 한국의 지역개발에서 가장 큰 차이점을 보이는 것이 이런 소규모 도시나 마을의 개발상황인데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한국의 시골 농촌처럼 기본적인 공공시설이 극히 부족하거나, 기반시설이 없다시피 한 그런 느낌은 아니다.

인구 3백명쯤 되는 농촌마을에도 24시간 편의점은 늘어서 있고, 비포장도로는 커녕 시멘트 도로도 거의 없이 전부 제대로 된 아스팔트 도로.

허름해 보이는 시골 주택도 조그만 앞마당에 닛산 큐브쯤 되는 자동차가 들어서 있고, 가끔은 미니 이마트같은 종합 슈퍼도 들어서 있다.

물론 이것은 지역민심을 잡아서 표를 얻기위한 의원들의 무리한 예산집행이 원인인 경우가 많았고,

덕분에 시골치고는 너무나 잘 정비된 공공시설들 덕분에 정작 지자체 예산은 빵꾸가 나서 파산위기에 놓인 마을도 많다.

이유가 어쨌든, 비슷한 분위기가 많은 한국과 일본에서 진정한 다름을 느끼려면, 관광지가 아닌 진짜 시골에 가 보면 된다.

 

일본에서 좀 편하게 놀고 싶을때 항상 애용하는 비즈니스호텔 토요코 인(東横INN)에 짐 풀어놓고 밖으로 나온다.

사실 한국의 러브호텔과 비교해도 별로 비싸지 않은, 제대로 된 호텔치고는 상당히 저렴한 곳이지만 나한테는 굉장한 사치.

거대 체인호텔이다 보니, 반드시라고 할 만큼 역 주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서 도움이 된다.

비즈니스 호텔의 특성상 싱글룸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좋기도 하고.

 

카메라 가방을 제외한 백팩을 프론트에 보관하려고 가방을 벗을 때도 어지러워서 뒤로 넘어질 뻔할 정도로

여전히 멀미에 시달리고 있어서 기분은 엉망이었지만, 어쨌든 귀중한 하루를 그냥 보낼수는 없으니 다시 3분쯤 걸어서 마츠에 역으로 이동.

 

다행히 목표로 했던 레이크라인 버스가 정류장에 서 있어서 바로 탈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또 오기가 발동해 버린 것이...

어질어질한 상황에서도 좌석에 앉기보다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끽하려고 맨 뒷쪽 좌석이 없는 곳에 서서 이동해 버린다.

관광용 버스라서 뒤쪽에는 짐 놓을 수 있는 공간과 함께, 시원한 창문 너머로 여기저기 둘러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걸 포기하는게 지금 이 상황에서도 아까웠던 것. 드디어 처음으로 카메라를 꺼내서 버스의 내부를 한 장 담아본다.

아마 사카이미나토 역 앞에서 사진 한 장도 찍지 않고 여기와서 카메라 꺼내는 한국인 관광객은 나밖에 없었을 듯.

 

 

 

이 레이크라인 버스는 관광용으로 특화된 녀석으로, 약 50분간 마츠에 시내의 관광장소라 할 만한 곳을 전부 도는 코스를 취한다.

하지만 이 마츠에 시가 관광객으로 붐비는 그런 도시도 아니기 때문에, 이 버스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계속 순환하는게 특징.

그래서 코스를 거꾸로 가려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단점이 있기도 하다.

일본어가 안되는 관광객들은 이 버스 말고 일반 시영버스 타려니 말이 안통해서 겁도 날것이고.

 

복고풍 풀풀 풍기는 버스 내외부는, 한번쯤 타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는 경험이 된다.

이 버스의 운전기사분들은 전원이 여성이라는 점도 독특하다. 가이드 역할을 한다는 이미지 때문인지, 머리 잘 쓴 느낌.

50분이라는 이동거리도 사실은 여기저기 빙글빙글 돌면서 관광지 냄새만 나는 곳은 전부 다 정차하기 때문이고

실제 마츠에 시내를 한바퀴 빙글 도는것은 자전거로도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인구 30만의 도시라는 점을 기억해두자.

 

시마네현의 총 인구가 70만, 마츠에 시가 30만이라는 점을 보면 이곳이 얼마나 시골인지 짐작이 가능하다.

참고로 본인이 서식하는 대구시 인구가 약 260만명, 일본의 도시중에서는 적당히 작은편에 들어가는 히로시마시 인구가 120만명이다.

레이크라인 버스가 이동하는 도로 상당부분은 아예 중앙선조차 그려져 있지 않는 곳이 많을 정도.

이 버스 최고시속이 30~40km를 넘지 않기 때문에, 맞은편 차들은 그냥 알아서 슬쩍슬쩍 정지하거나 비켜간다. 느긋한 도시의 특권.

 

기반시설이 제대로 잡힌 소규모 도시에서 30km 로 느긋하게 달리는 버스를 타는 경험은 사실 그것만으로도 일종의 관광인 셈이다.

외국인 관광객들 중에서는 한국인이 압도적인 도시라서, 이 버스도 그렇고 관광지 근처엔 전부 한국어 안내가 적혀있다.

독도문제로 이미 한국인에겐 익숙한 그 시마네 현에서 말이지. 사실 이곳은 한국인 관광객 없으면 재정에 큰 문제가 생기는 곳이다.

일본 주요 도심에서 워낙 떨어진 곳이고, 도쿄에서 신칸센타고 6시간 넘게 달려야 올 수 있는 곳이니 말 다했지.

해외와 루트가 직행으로 이어진 곳은 한국의 인천공항과 동해항 페리터미널 단 두곳밖에 없다. 더 설명이 필요할까.

 

시마네 현에서 독도를 잡고 늘어지는 건 기탄없이 말해서 보수정권한테 예산좀 달라는 땡깡이지, 독도 영유권에는 관심도 없다.

한국인으로서 기분나쁜건 당연하겠지만, 정작 타케시마 돌려달라고 고함치는 애들은 딴 지역에서 온 녀석들이고

실제 50년을 넘게 산 거주민들의 대부분은 타케시마가 어디 있는 섬인지 지금도 모른다. 요 몇년 사이 처음 들어본 섬이라고.

지금 독도가지고 찌질거리는 녀석들의 대부분은 도쿄에 살고있는 정신줄 놓은 극우파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사실 시마네 현은 이름만 빌려주고 한국인들한테 굉장한 미움을 받는 셈이다. 그렇다고 예산이 더 책정된 적도 없다.

 

 

 

15분쯤 달리니 마츠에 제일의 관광지 마츠에 성앞에 도착한다. 일단 오늘은 이 주변을 둘러보기로.

동해항을 떠날 때 보다는 날씨가 나아졌지만 여전히 하늘은 구름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덥기는 또 상당히 후덥지근하다.

현재 온도는 32도에 습도가 70%를 넘는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그런 상황. 차라리 하늘이라도 쨍했으면 하는데.

 

레이크라인 버스는 1일 무한이용권이 500엔인데, 퍼펙트 티켓을 보여주면 그 500엔짜리 이용권을 3장 준다.

다음부터는 그걸 하루에 한장씩 이용하면 되는 셈. 물론 다른 시영버스, 전철도 계속 무료로 이용가능하다.

이 500엔짜리 1일이용권은 사용하고싶은 날짜에 스크래치를 해서 사용하는데, 그 덕에 남겨놓으면 내년에도 사용할 수 있다.

사실 이곳을 여러번 찾는 외국 관광객이 얼마나 되겠느냐만은. 참고로 본인은 쓸일이 없어서 하루치 남겨왔다.

 

이곳 마츠에는 관광자원이 풍부한 것도 아니라서 어지간한 곳도 꽤나 한적한 편이다.

1년에 단 한번 꽤나 붐비는 시즌이 있긴 한데, 그건 후술하기로 하고.

 

성 앞으로 걸어가다보면 '마츠에성을 국보로' 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

시민들의 마음이야 백분 이해하지만, 제 3자 입장에서 보면 여러가지로 난감하다. 정말 알쏭달쏭한 가치를 가진 성이라서.

 

현재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그 정도 자격은 충분하고도 남는 성이지만 과연 국보로서의 가치가 있을까 없을까는...

왜냐하면 아담한 천수각 하나만큼은 1611년 지어진 후 한 번도 분해, 해체, 파괴를 겪지 않은 살아있는 유산인데

그 외의 현존하는 모든 건축물은 근대 들어와서야 지어놓은 녀석이고, 예전의 모습은 그냥 유적으로만 남아있기 때문에.

그리고 천수각이 너무 아담한 것도 조금 걸린다.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히메지(姫路)성이나 까마귀 성이라 불리는 마츠모토(松本)성의 천수각은 솔직히 차원이 좀 다르기 때문에. 둘다 국보 지정.

 

사진에서 보이는 것들도 모두 역사적인 가치는 없는 건축물들이다. 유일하게 어마어마한 넓이를 자랑하는 저 해자만큼은 인상적이지만.

마츠에의 별명이 '물의 도시'인 만큼, 마츠에 전역을 관통하는 호리카와(堀川)강의 물길을 그대로 해자로 만들어 버린 것.

 

계속 언급하듯 시마네 현과 돗도리 현을 포함하는 산인(山陰) 지역은, 한 번도 일본 역사의 무대에서 중심을 맡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일본의 성 치고는 희한할 정도로 침략을 받지 않았다.

덕분에 현존하는 오리지날 천수각 12개 중에서도 가장 건축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것이 이 마츠에 성.

 

 

 

성을 올라가기 전에 보이는 정방형의 공터. 이것은 우마다마리(馬溜)라고 하는데, '말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총탄이 들어가있는 약실, 발사 직전 정자들을 보관하는 고환의 역할을 하는 곳.

전쟁중 출병 직전의 병사와 말을 전열하는 용도로 사용되던 지역이다. 우물도 있어서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었을 듯.

 

물론 지금 남은건 지도를 고려해서 만들어놓은 옛 공터뿐이고, 다들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았다.

실제로 이곳에서 전쟁이 벌어진 적은 손에 꼽을 정도긴 하지만.

 

 

 

좋지 않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성 주변의 조경은 참 멋들어진다.

현재 마츠에성은 주변이 산책로, 공원화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적 매력을 제외하고서라도 느긋하게 즐기기엔 안성맞춤인 곳.

국보로 지정되면 예산도 상당히 불어나기 때문에 이곳을 가꾸는데 큰 도움이 되겠지만, 일본 정부가 지금 아사직전이니 과연 어떨런지.

 

구름이 많아서 서늘한것 같지만 정말 더웠다. 의자에 걸터앉아 쉬면서 땀을 닦는데도 계속 자동 헤드뱅잉이 되는 바람에 난감.

 

 

 

근래들어 다시 세워진 녀석들이긴 하지만 일단 에도시대 건축 양식에는 정확하게 부함한다.

일본의 성은 다이묘들의 최후방어지 역할을 했기 때문에, 거주보다는 철저하게 수성(守城)에 목적이 맞춰져 있다.

건너오기 힘들게 만든 해자, 깎아지를듯한 성벽, 활과 총을 사용하기 위한 좁은 창문, 성벽으로 끓는 기름을 흘려내릴수 있도록 만들어진 구멍 등등.

 

물이 풍족한 마츠에라서 특이하게 천수각 안에 우물까지 마련되어 있으니, 수성전에서는 꽤나 효과적인 성이라 할 수 있다.

여러번 말하지만, 애초에 침략받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는게 아이러니.

 

 

 

조금 올라가니 흥운각(興雲閣)이라는 이름이 붙은 서양식 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성 내부에 왠 서양식 건물인가 싶어서 흥미가 동했는데, 특이하게 이 건축물의 설명에는 한글이 적혀있지 않다.

 

다행히도 읽을 정도는 되니까 읽어봣는데, 1903년 메이지 천황이 이곳을 방문한다는 말에 영접을 위해 지어진 건물이라는 듯.

산인지역에 천황이 방문한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한 일이었던 시절의 흔적인가보다.

허무하게도 그 직후 러일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천황의 방문은 취소되었고

4년뒤에 천황 아들내미가 방문했을 때 영빈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까, 러일전쟁 직전에 지어진 이 영빈관은 사실 러시아 건축양식으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지금은 새로 역사박물관을 다른 곳에 개장중이라서 이곳은 잠시 폐쇄중이라고 한다.

한번쯤 들어가보고 싶기는 했지만, 못들어간다고 그렇게 아쉬울것도 없는 곳이라서 사진 한방 남기고 돌아선다.

 

 

 

무더운 날씨에 죽치고 앉아서 휴식하기 딱 좋은 공간이 보인다.

나무그늘에 철저하게 둘러쌓여 있어서 충분히 서늘한, 고풍스러운 나무 의자가 꽤나 인상적.

종족 특성이기도 한데, 아무리 유명한 관광지에 가도 정작 눈길이 가는 것은 이런 녀석들이다.

 

그늘이라고 다 같은 그늘이 아닌 것. 살아있는 나무와 그 잎사귀들이 만들어내는 그늘은 콘크리트 지붕밑 그늘과는 향기가 다르다.

거기다 밑바닥은 흙으로, 의자는 나무로 되어있으니 이것보다 더 훌륭한 중간휴식처가 있을까.

관광객이 적어서 이런 곳을 독점할 수 있다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다. 자꾸 덜 유명한 곳을 찾아가려는 것도 이런 점 때문이려나.

 

앉아서 한숨 돌리고 있는데, 닌자 복장을 한 아저씨가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맞은편에서 오던 젊은 일본인 여성관광객 두명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안내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것 같던데.

아마도 저렇게 닌자 복장 하고 성 안내 가이드를 하는 사람인 듯 하다. 더운날 입까지 가리는 두건을 쓰고 고생하신다.

이야기 좀 걸어볼까 싶었지만, 소심하기로는 일본인 못지 않은 성격에, 더운데 괜히 붙잡고 귀찮게 하고싶지도 않아서 패스.

 

 

언덕을 오르면 바로 마츠에성 천수각의 모습이 보인다.

천수각 안으로 들어가려면 매표소에서 표를 끊어야 하지만, 들어갈 생각이 없다.

국보급 천수각에는 여러번 들어가 봤기 때문이기도 하고, 지금 몸상태가 저기 들어갈만한 의욕을 보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방어용으로 만들어진 천수각은 계단이 매우 가파르고 통로가 좁게 설계되어 있다.

흔들거리는 머리통으로 거기 올라가려면 고생 좀 하리라는 예상이 쉽게 가능하다.

당연하지만 에어콘같은거 없기 떄문에 더욱 고역이기도 하고.

 

더더욱 큰 문제는, 천수각에 돌아가서 내려다보면 마츠에 시의 전경이, 지금같은 하늘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점.

날씨가 화창했으면 머리통 붙잡고 올라갈을 것이다. 특히 이곳 마츠에 시는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매우 관대해서

여권만 보여주면 거의 대부분의 관광지 입장료를 절반으로 깎아주는 장점이 있다. 어디든 들어가서 보기만 하면 이득이라는 결론.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관광객 유치에 열을 올린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입장료 내고 들어갈만한 매력이 부족하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일본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역사적 가치가 충만한 천수각이지만 역시 너무 아담하다는 것이 조금 어색하다.

그만큼 평온한 지역이었다는 반증이니 나쁘게 볼 건 아니지만, 왠지 그림으로서 살짝 부족한 느낌이 드는 점은 어쩔 수 없다.

 

 

 

살짝 비교해보는 의미로, 지난 자전거 여행때 찍은 국보 마츠모토성의 천수각 사진을 첨부해 본다.

감상은 각자 알아서들.

 

 

 

들어갈 생각은 아예 접고 외부 모습만 느긋하게 감상한다.

여러 각도에서 찍고 싶었는데, 내 위치에서 오른쪽 모습은 공사중이라서 들어갈 수가 없다.

구름때문에 크게 의미가 없긴 하지만, 해의 위치를 생각하면 오른쪽에서 찍는 사진이 좀 잘 나올것 같은데 살짝 아쉬웠다.

 

1611년 건축 이후 한 번도 해체되거나 손상된 적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보존 상태는 놀라울 정도로 양호하다.

매번 '이게 근래들어 다시 만든건지 옛날 모습 그대로인지' 헷갈렸던 건축물들이 많은 일본이었는데

명확하게 옛날 건축물임에 틀림없는 마츠에성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한가지 결론이 나온다.

파괴되었다가 다시 세워진 여러 성들도, 정말 징할 정도로 옛모습 복원을 잘 해놨구나 하는 것.

 

일본의 문화재 관련 예산은, 한국의 예산과 비교하는게 솔직히 부끄러울 정도.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는 중앙정부에서 따로 예산편성과 관리를 맡기 때문에

국민은 부유하지만 정부는 가난뱅이인 일본의 현실을 따져보면,

아마 한국에서 비슷한 비율의 예산을 배정한다면 '먹고살기도 힘든데 이딴데 돈을 퍼붓냐'고 난리법석이 될 듯 하다.

일본은 알아서들 입장료 내고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 때문에 한국보다 좀 숨통이 트인다는 사실을 고려해 보면

역사에 대한 국민의식이란게 결코 과거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일본도 역사의식이란거, 쓸데없는 자긍심만 남아서 마약빤듯한 애매함에 도취된 사람들이 많긴 한데

내 입장에서는, 한국도 이번 연말 선거결과에 따라서 일본 욕을 할 수 있는 처지인가 아닌가가 판가름 난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지금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한국 국민들의 역사관이란 저기 북쪽 거지독재국가와 다를게 뭐 있나 싶기도 하고.

만약 그게 현실로 확정되는 날이 온다면, 난 더이상 일본의 어거지 역사관 욕 못한다. 부끄러워서 못한다.

 

 

 

히메지 성같은 매우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본의 성은 대부분 옻칠을 한 목재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게 또 대낮에 사진 찍을때는 꽤나 난감한 사항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번처럼 구름이 잔뜩 낀 날이라서, RAW 파일로 촬영후 극단적으로 명부와 암부의 차이를 줄인 덕에

하이라이트나 섀도우를 전부 없애는데 성공했지만, 쨍쩅한 날이라면 정말 얄짤없다.

고전적인 방법이라면 브라케팅을 이용한 HDR 기법으로 양쪽 모두를 살려야겠지만

삼각대도 없이 브라케팅을 사용할 수는 없고, 그냥 RAW 파일의 풍부한 데이터를 살린 간이 HDR 이라도 써먹을 수 밖에.

 

이거 JPG 원본은 완전 새까맣고 완전 새하얀 녀석이다.

 

 

 

까마귀 성이라는 별명을 가진 마츠모토성도 꽤나 시커멓긴 했지만

마츠에성도 못지 않게 옻칠을 한 모습. 사실 같은 별명을 가져도 무리없어 보인다.

 

일본 최고의 방어력을 가진 오사카성이 정말 허무하게 공략당하면서 잿더미가 되어버린 역사에 비해

사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어보이는 이 한적한 성이 건축후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역사를 만드는 사람의 힘이란 건 어찌보면 장난으로 던진 돌맹이에 맞아죽는 개구리의 그것과 같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 본다.

 

 

 

극단적인 명암차를 보정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사진이 부드러워지다보니

옻칠투성이인 수성전용 성의 이미지가 너무 곱게 나오는 것 같아서

그냥 고전적인 방식을 한번 선택해 본다.

 

여행중 사진은 최대한 그날의 인상 그대로를 남기는 쪽으로 보정을 하는 편이라서

꾸물꾸물한 하늘을 생각하면 위의 사진들이 그때 본 모습과 제일 비슷하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사진이란게 권력을 가진 창조와도 같은 녀석이라서, 좀 더 힘있게 선을 넣어보는것도 일종의 여흥이라고 보면 될 듯.

 

 

 

산책하기엔 참 좋은 마츠에성과 그 주변이지만, 쩍쩍 달라붙는 날씨와 흔들리는 머리통 때문에 흥이 오르질 않는다.

15분 정도 성 주위를 둘러보며 일기장을 갖고 오지 않은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열심히 머릿속에 저장한 후 발걸음을 옮긴다.

국내 여행때는 종종 그러지만, 해외 여행때 일기 쓰지 않고 돌아와서 포스팅 하는건 희귀한 일이라서

눈에 보이는 사물만큼이나 머릿속의 감상을 정리하는데 신경을 더 쓰게 된다. 가뜩이나 어지러운 머리가 더욱 골치아픈데.

 

왔던 길과 반대로 난 산책로를 걸어가면 코이즈미 야쿠모 기념관이 나오는가보다.

쇼핑을 목적으로 마츠에에 오는 사람은 바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으니

그 외의 목적으로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는, 특히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빼놓기 아쉬운 곳.

어차피 마츠에 시내 관광명소는 극히 한정되어 있으니 약간의 의무감이란 것도 작용하고, 천천히 경치 둘러보면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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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 첫 조카 구경좀 하고 버스타고 동해시까지 가는데 3시간 남짓.

동해항은 아주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다. 따로 시간보낼게 없어서 승선까지 2시간 반이나 남은게 조금 난감한 상황.

잡화점 직원분이 아주 친절하게, 고객이 아니더라도 터미널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해주신다.

딱히 필요한 건 아니지만 그 친절함에 이끌려 음료수도 한병 사 마시게 된다. 서비스의 중요성이란 이런 것.

 

아침부터 밥먹은게 없으니 항구 밖의 조그만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주문해서 아주 느긋하게 먹는다.

남는게 시간이라 급할것도 없다. 페럴림픽 축구도 구경하고, 음식점 꼬마형제들의 라이브 쇼도 은근히 감상한다.

 

형은 유치원생이나 초딩 1학년쯤 되어보이고, 동생은 아직 학교 갈만한 나이는 아닌 듯 한데

형이 낮잠 자고 있는 동안 NDS 포켓몬 게임이 어디가 막혔는지 동생이 안절부절이다.

엄니한테 가서 이것 좀 해달라고 졸라도, 엄니가 포켓몬을 어떻게 알수 있으리.

 

결국 엄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는 형 옆에서 오만 오도방정을 떨어서 깨우고 만다.

형은 짜증내면서도 게임기 받아들고 뭔가 만지작거리고, 엄니는 화내기보다는 그냥 웃으면서 동생을 나무라는 정도.

 

근 1시간에 걸쳐 식사를 마치고 다시 터미널에 돌아와 남은 음료수 마시며 멍하니 앉아있다.

사실 제대로 준비된 여행이었다면 그렇게 멍할 이유가 없었는데, 이번엔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매번 여행준비할 때, 이제 다 됐겠지 싶어서 여러번 체크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꼭 한두가지는 빼먹곤 한다.

복병이란 의외성이 있어야 빛이 나는 법. 백팩과 숄더팩 두 가지 안에 든 물품은 몇 번이고 체크를 해서 완벽하다.

중간에 코인세탁기에서 빨기 위해 더러워진 옷을 넣을 대형 비닐까지 완비했으니.

 

그런데 이번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는, 가방 내 소지품이 아니라, 맨날 들고다니는 아이팟 나노를 깜빡했다는 것.

옷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녀석인데, 가방에만 신경쓰다 보니 외출시에 절대로 몸에서 떼지 않는 음악기기를 까먹을 줄이야.

게다가 카메라 가방을 새걸로 바꾸고 처음으로 떠나는 여행이라서, 옛날 카메라 가방에 항상 들어있었던 필기도구도 깜빡했다.

필기도구와 아이팟, 밖에 나갈때면 신체 일부분처럼 붙어다니던 녀석이라서

새 가방으로 바뀐 이번에도 그냥 저절로 걸어들어와 주머니속에 박혀있을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덕분에 버스 3시간 타면서 음악 듣지 않았다. 아마 이런 일은 이어폰 고장나서 듣지 못했던 적을 빼면 극히 희귀한 케이스.

서울 출발할 땐 거장의 붓놀림과 같은 현란한 구름이 눈을 즐겁게 했는데, 대관령 넘을때는 폭우가 쏟아져서 걱정이었다.

바깥 풍경이 워낙 기세등등하게 변해서 음악 없이도 대충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동해항 터미널에서 움직이질 못하니 음악과 필기도구가 없는 나는 그냥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되고 만다.

 

승선 시간이 다가오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는데, 나처럼 젊은이 몇명도 있었지만 나이 지긋한 단체관광객이 많다.

 

동해항에서 사카이미나토(境港)항을 왕복하는 이스턴 드림호는, 일본 도착이 아침 일찍, 출발이 오후 늦게라서 좋긴 하지만

일본에서 단 1박만 할 수 있는 왕복구조를 갖고 있어서 (놓치면 1주일 뒤에나 배가 온다) 그런 여행에 기겁하는 나로서는

완전히 흥미 밖의 이야기었지만, 이번에는 특별한 경우로 2박까지 할 수 있는 스케쥴이 만들어졌다.

물론 2박도 나한테는 잠깐 한숨 돌릴정도의 기간일 뿐이지만, 어찌됐든 아침도착 저녁출발의 이점을 챙기면

꽉꽉 채워서 3일간의 여행 풀코스를 즐길 수 있으니 그럭저럭 만족하는 편.

 

배를 편도 15시간씩이나 타야 하기 때문에 명목상으로는 4박 5일의 여행이지만 사실은 2박 3일인 셈.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경비의 절반 정도를 절약할 수 있는 여행이라서, 장시간 페리여행에 질색하는 나로서도

차마 놓치기 아까웠던 탓에 훌쩍 떠나게 됐다. 배는 크면 클수록 멀미가 덜한데, 이스턴 드림호는 별로 크지 않다.

 

자전거 끌고 승선준비하는 젊은 사람도 서넛 보인다.

그때 그 생각이 나서 몸이 살짝 근질거리기도 했지만, 2박 3일의 자전거는 나한테는 동네 슈퍼 놀러가는거나 마찬가지.

자전거 매니아가 아니라 여행 매니아기 때문에, 그렇게 짧은 자전거 라이딩은 전혀 흥미 밖이다.

 

승선후 짐 풀어놓고 카메라부터 챙겨 선내를 훌쩍 둘러본다.

일본 국내를 돌아다니는 몇몇 괜찮은 페리와 비교하면 별로 잘 꾸며놨다고 할 수 없는 녀석.

그래도 없어보이는 내부를 직원들의 열정과 아이디어로 극복해 보자는 흔적이 여기저기서 보여서 나름 재미있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보게 되는 저 기세등등한 눈빛이 이 배의 구경거리.

 

 

 

승선후부터 날씨가 급격하게 나빠지고 있어서, 아무래도 내일 아침해 촬영은 포기해야 할듯 하다.

오후 4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너무 어두침침하다. 파도가 높진 않으니 출항은 하겠지만 은근히 겁이 날 정도.

운 나쁘게도 여행기간동안 산인지역은 날씨 좋은 날이 없다. 순간순간만이라도 괜찮은 하늘을 볼 수 있기를 바랄 수 밖에.

 

탈것에 약한 체질인데 이미 버스를 3시간이나 타고 온 몸이라서, 영 찌부둥한 기분을 떨칠 수 없다.

일단 멀미약 없이 한번 가보기로 했는데 솔직히 걱정이다. 사실 의외로 배의 성능에 따라 멀미가 줄어들 수도 있는데

이 녀석은 대강 둘러보니 내 멀미를 줄여줄만한 안락함까지 갖추고 있는 것 같진 않다.

 

 

 

일단 멀미가 시작되면 사진 찍으러 돌아다닐 여력도 없을 것 같아서

정박해 있는 동안 대강 바깥 풍경을 둘러본다. 대체 왜 이런 공룡뼈가 서 있는건지.

 

 

 

혼자 온 여행객도 있긴 한데, 대부분은 행복해 보이는 커플 천지.

안개때문에 별로 볼게 없는 상황에서도 즐겁게 샷 날릴 수 있는건 역시 옆구리가 든든해서일 듯.

사람 사진 찍는데 관심이 없는 성격이라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2층 갑판은 아무래도 저녁무렵부터 포장마차와 BAR가 영업을 하는 듯 하다.

아직은 덩그러니 빈 곳이지만, 기둥에 붙어있는 간판을 보니 그러한 듯.

난 멀미걱정에 도저히 이런 곳에서 술 마실수는 없겠지만.

 

 

 

3층 갑판에는 젊은 직원 한명이 투호 놀이장을 만들어놓고 손님들을 안내하고 있다.

자기보다 더 많이 넣는 분들에게는 맥주 한캔씩 지급하는 듯.

소박하지만 정감가는 프로그램들로 장시간 항해할 손님들의 지루함을 덜어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런 개그끼 넘치는 간판도 그 일환이 아닐까 싶다.

처음엔 밑의 문구를 보지못해서 '외상환영단' 이라고 읽은 탓에 거참 통도 크지 하는 생각이었는데.

 

별로 큰 페리가 아니라서 없는 시설 잘 활용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이 배 안에는 포장마차, 술집과 함께 아침에 한잔 할 수 있는 커피샵까지 마련되어 있으니.

 

후쿠시마와 홋카이도를 잇는 일본의 태평양 페리는 정말 화려한 내부장식과, 저녁식사후 밴드와 뮤지컬 공연까지 준비된 녀석이었는데

거기에 비하면 물론 초라할 수 밖에 없어도, 주어진 환경 안에서는 정말 열심히들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안개가 점점 짙어진다. 비가 내리지 않는게 신기할 정도로.

동해항은 군사시설과 인접한 탓에 사진 잘못 찍으면 큰일난다는 경고문까지 붙어있는데

오늘같은 날은 아무리 찍어대도 별 문제 없을 것 같다.

 

대구 -> 서울 -> 동해라는 코스를 밟고, 아이팟과 일기장이 없이 여기까지 오니

사실 멀미걱정과 더불어 기분이 상당히 침울한 상태. 인셉션 생각이 나기도 했다. 여기 지금 내 꿈속인가?

 

주위에서 열심히 사진 찍고있는 커플들의 들뜬 모습을 보면서, 여행시작때 들뜬 기분이 없어진 건 언제부터인지 생각해 봤다.

자전거 여행때는 사실 들떴다기보다는 정말 죽고싶은 심정이었으니 할말 없고.

아마 국딩때 미국가는 비행기를 14시간씩 타면서 고생을 한 후로 기대감이 사라진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대충 목적지에 도착해서 카메라 들쳐매고 걸어다니다 보면 조금씩 흥이 날거라고 스스로 위로할 수 밖에.

 

 

 

가시거리가 10m 쯤 될까말까 한 지금 상황에서

이 녀석이 앞으로 얼마나 밝게 불타오를 것인가 상상하는 정도가 유일한 소일거리.

그 많던 단체관광객 할배할매들은 의외로 외부까지 나오지 않고 대부분 방안에서 뭐 까먹으면서 잡담하는 듯 하다.

 

무료 목욕탕에 타올이 비치되어 있지 않다는 말에, 마누라 타올 빌려쓰는 분도 많다.

여성들은 아마 대중목욕탕에 단련되어 있었겠지만 남성들은 타올이 없다는 사실이 신기한 체험일 듯.

사실 페리나 크루즈에는 타올이 없는 경우가 많다. 훔쳐가도 잡을 방법이 없으니.

돋 받고 대여도 해주긴 하는데, 구입도 아니고 대여에 손을 쓴다는 건 굉장히 아쉬운 느낌이 들지 않을수가 없겠지.

 

 

 

얼핏 볼땐 그냥 전화기구나 싶었는데, 잘 보니 뭔가 이상하다.

밑에 걸려있는 또 하나의 수화기 비스무리한 건 어떻게 쓰는걸까.

 

고장난건가 싶었지만 아무래도 원래부터 저렇게 만들어진 녀석인 듯 하다.

직원 붙잡고 물어보면 좀 귀찮아 할려나.

 

직원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몇몇 승무원들을 빼고 잡일거리하는 대부분은 동남아인들이다.

고물가의 일본도 페리나 크루즈에 외국인을 쓰는 모습은 본 적이 없는데, 요즘은 바뀌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한국 승무원들보다 더 싹싹하고 인사 잘하고 잘 웃는 사람들이라서 기분은 좋은데

페리 사업이란 것도 참 빠빡하구나 하는 안스러운 느낌이 들긴 한다.

 

애초에 배가 여기저기 낡은 구석이 보여서, 쓰레기 떨어져 있진 않지만, 이불도 그렇고 그렇게 깔끔하다는 느낌은 없다.

배타고 즐기는 여행은 사실 멋들어지게 즐기려면 비행기보다 훨씬 돈이 많이 드는 고급 여행이라서

한국의 동해와 일본의 사카이미나토라는, 도시 이름을 단것 치고는 허벌나게 깡촌인 두 지역을 연결하는 이 페리에

고급스러움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긴 할 테지. 멀미걱정때문에 신경이 굉장히 예민해져 있다는 증거일 뿐.

 

 

 

만약 내가 멀미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체질을 타고 났다면

밤에 분명 이곳에 와서 오뎅국이라도 한그릇 맛있게 비웠을 테지만

워낙 멀미에 약한 몸이라서 소소한 즐거움이 될 이벤트는 전부 넘겨버리고

배가 출발하기도 전에 드러누워서 조금이라도 수면을 취하기로 했다.

 

출항하면 어차피 제대로 자지도 못할 터, 내일 아침부터 돌아다니려면 조금이라도 체력을 비축해 놓아야 하니까.

 

 

 

아주 잠깐 자고나니 금새 밥먹으러 오라는 안내방송이 흐른다.

이미 출항 후인데, 생각보다 훨씬 흔들리는게 조짐이 좋지 않다. 쑤욱 밑으로 꺼졌다가 불쑥 올라오는 느낌이 굉장히 불쾌하다.

 

이스턴 드림호는 티켓과는 별도로 저녁과 아침식사 식권을 반드시 구매해야 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승객 입장에서는 좋다고만 말할수는 없는 상술인데, 빙글빙글도는 머리를 부여잡고 가 본 식당에서는 더욱 실망.

한끼 8천원쯤 하는 식사인데, 바다 위가 아니라면 4천원 줘도 먹을 생각이 생기지 않는 퀄리티였다.

 

거의 인스턴트나 마찬가지인 반찬과, 색깔이 뭐라 형용할 수 없이 희물그레한 카레, 조미료맛밖에 나지 않는 군대식 국.

시장이라는 녀석을 길동무 삼지 않고서는 입에 집어넣을 의지도 생기지 않는 이런 식단을

출항후 생각보다 더 요동치는 배 위에서 먹자니 아주 지옥이 따로 없다.

돈 아깝다는 일념 하나로, 자칫 먹다가 토해버릴 것 같은 위험 속에서도 정말 정성을 다해 입에 집어넣는다.

뭔가 이쯤되면 대상이 무엇인지도 모르겠지만,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란 마음이 들게 된다.

 

이걸 입안에 집어넣으면서 확실히 든 생각은, 돌아올 때는 멀미약 먹어야겠다는 일념 하나뿐.

사실 멀미만 아니었어도 먹을만은 한 녀석이었다.

맛있는 음식에 대한 열망이 대단한 성격이긴 하지만, 군대식이라도 군침돌게 깨끗이 비우는 타입이기도 하니까.

 

결국 식사후 기절한듯 누워서, 안내방송이 속삭이는 야간 포장마차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뻗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목욕은 해야겠어서 비장한 각오로 욕탕에 가기도 했다. 운이 좋아서 아무도 없는 욕탕을 혼자 전세냈지만

탕 안의 물이 강력한 힘으로 출렁출렁거려서, 이거 정말 날 잘못 잡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홋카이도 토마코마이(苫小牧)에서 시가현 마이즈루(舞鶴)까지 운행하던 안락한 페리에서의 목욕은

배가 진행하는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느긋하게 욕탕에서 피로를 풀던 기억이 나는데,

아무래도 이쪽 코스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바다 상태가 안좋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돌아올 때의 파도가 어떤지 다시한번 관찰해 봐야겠다는 포부좋은 생각을 하면서, 2시간쯤 수면후 2시간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나날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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