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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에 해당하는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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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3.11.22  과거로의 여행 - 작은 마을 키소 20
  3. 2013.11.04  과거로의 여행 - 마츠모토 봉봉 4편 18
  4. 2013.10.30  과거로의 여행 - 마츠모토 봉봉 3편 18
  5. 2013.10.29  과거로의 여행 - 마츠모토 봉봉 2편 6
  6. 2013.10.28  과거로의 여행 - 마츠모토 봉봉 1편 10

 

 

휴게소에서 멍하니 한참을 시간 보내고 다시 언덕을 올라간다.

완만한 경사가 산자락까지 이어진 이 길에는 느긋한 밀집도의 주택가가 길을 따라 이어져 있다.

 

좀 더 깊숙히 들어가면 단순한 주거용 주택이라기 보다는, 도심의 좀 잘나가는 사람들이 여유를 즐기는 별장 단지가 나오기도 한다.

일본의 시골이 한국보다 정비가 잘 되어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곳은 확실히 경치가 좋은 편이다.

별장이 늘어서 있는 산자락의 수려한 환경이 아닌 순수하게 사람들 살아가는 논밭 사이의 주택가임에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뽐내는 장소가 한 두곳이 아니다.

 

일본에서 홋카이도의 해안가 말고는 '여기서 살고싶다'는 생각이 든 곳이 별로 없었지만

바다 근처가 아닌 산속 깊은 곳에서 그런 느낌이 드는 곳은 아마 이곳이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땅값이라던가 그런건 잘 모르겠지만

10년 전만 해도 거의 텅텅 빈 곳에 지금은 새로 집 짓고 들어온 사람들이 많다고.

가게 하나 차려도 될 만한 이런 예쁜 디자인의 집 역시

돈 좀 만지는 사람들이 놀러오는 별장이 아니라, 그냥 이곳에서 사는 주민들이 일반적인 주택이다.

 

예전에 소야노 가족과 이야기 할 때, 적당히 땅값만 싼 곳 고르면 주택 짓는것까지 합해서

한국돈으로 2억 조금 넘으면 무난할거라 하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나는데

가끔은 진지하게 이곳에 눌러앉아버릴까 하는 생각도 한다.

 

좋긴 하지만 역시 현실과는 달리 포기할 수 없는 꿈은, 홋카이도처럼 바다와 함께할 수 있는 그런 곳이라

이곳의 많은 인연에도 불구하고 말뚝을 막아버릴까 생각하면 꼭 마음속에서 막아서는 요소들이 있는게 아쉬운 점.

 

 

 

소야노네 집까지는 휴게소에서 도보로 5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임에도

오랜만에 즐기는 키소 마을의 정경에 도저히 발걸음이 쉽게 떼어지지 않는다.

번호판을 떼어버린 걸로 봐서 폐차 수순을 밟는 녀석인 것 같은데

저런 녀석마저 거부감없이 프레임속에 녹아들게 만드는 이곳의 풍경이 가지는 힘은 실로 강력하다.

 

한두 걸음 걸으면 또 이런 풍경들이 날 유혹하고

동네 할머니가 지나가면, 마치 반가운 사람이라도 만난 듯 수줍게 인사를 건넨다.

물론 그 할머니가 나를 알 리는 없지만 역시 시골이라 그런지 전혀 거리낌없이 웃으며 인사를 받아준다.

 

의외로 소야노네 가족과 몇 블럭 떨어진 곳에 살고있는 쇼야 군의 할머니만큼은

절대 사교적이지 않은, 꽤나 무뚝뚝한 표현력을 가진 분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무뚝뚝함은 상대에 대한 경계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평생 마을 이웃들 외엔 말 한번 걸어보기 힘들었던 사람들의 본능적인 수줍음인 것을 느낄 수 있어서 기분 나쁘지 않았다.

 

 

 

3년 전 마을 사람들이 나에게 꼭 한번 보여주려고 데리고 가던 온타케 산의 풍경은 이번엔 시간이 부족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산과 함께 살아가는 나가노 중부의 키소 마을과,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많은 마을들과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는 산이 이 온타케 산(御嶽山이다.

 

한국처럼 등산가기 좋은 친숙한 산이라는 느낌보다는, 마을의 조상님쯤 되는 신성한 산으로 추대받고 있어서

그만큼 이 산에 대한 사람들의 호감도라고 할까, 자부심은 굉장한 수준이다.

 

해발이 높은 산인데다가, 나가노 산맥의 특성상 기후 변화가 심해서 깔끔한 봉우리를 보기가 쉽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리서 보는 온타케 산의 위엄은 굉장한 것이었다.

 

 

 

점이 아니라 선의 형태로 아름다움을 간직한 한국의 산맥과는 달리

온타케 산은 화산의 분화로 생성된 독립봉으로, 일본 최대의 산맥지역인 나가노 중앙알프스 산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위엄을 자랑한다.

 

해발 3000 미터를 넘는 산 중에서는 일본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산으로

지진대 중앙에 위치한 산인데다가, 아직까지 가끔 연기도 나는 활화산이기 때문에 마냥 인자한 녀석만은 아니다.

예로부터 후지산과 더불어 일본에서 가장 신성한 산으로 유명한 녀석이라, 한국 등산객들도 상당히 많이 찾는 산.

 

자동차로 갈 수 있는 지역에서 밤 9시쯤 출발하면 정상에서 새벽 일출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키소 주민들이라면 평생 가장 기억에 남는 광경이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물론 쇼야 군은 나보고도 많이 꼬셨지만, 자전거 여행의 여파로 지친 데다가 주 6일 아르바이트로 바쁜 본인이라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자전거 여행이 끝난 지금은 날 잡아서 소야노 가족들에게 연락해 놓고 일출 보러 가 볼 생각을 하고 있다.

등산은 특히나 나이와 별 관계없이 즐길 수 있는 레져인지라 급할 거 없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소야노네 집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언덕을 내려오는 소야 군과 딱 마주쳤다.

원래 연락도 하지 않고 놀래켜 주려고 슬금슬금 이동중이었고, 소야 군은 올해부터 도쿄로 자취하러 갔다고 들었던 터라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보다 쇼야 군이 더 의아했을 듯. 뭔가 낯익은 사람이 올라오긴 하는데 설마 그게 나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테니까.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인사를 하자 몇 초간 얼굴을 유심히 살펴본 후 드디어 나라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란다.

서프라이즈를 기대했는데 이렇게 집앞 길위에서 만나버리니 오히려 긴장이 풀려서 안면 근육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낀다.

 

쇼야 군은 마침 도쿄에서 다니던 자전거 전문학교가 방학이라 본가로 돌아온 참이라고.

사실 본인이 소야노 집에 찾아간다고 전화를 하지 않은 것에는 쇼야 군의 사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괜히 내가 간다고 말했다가 쇼야 군의 귀에 들어가서, 무리하게 키소까지 돌아오는게 아닌가 싶어서.

하지만 인간의 인연은 항상 우연이 필연처럼 얽히는 묘한 타래와 같은 것이라, 결국 이렇게 다시 만나고 만다.

 

쇼야 군이 집에 들어가며 깜짝 손님이 왔다고 어머니한테 소리를 친다.

쇼야 군의 어머니는 하반신 마비라 전용 침대에 누워계시는데, 이때만큼은 너무 예의없는것 아닐까 걱정이 된다.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 얼굴을 보여드려도 처음엔 누군지 잘 모르는 표정이었는데

이쪽에서 먼저 인사를 하자 목소리로 구분을 했는지, '리 상~' 하면서 깜짝 놀라주신다.

 

대낮 시간대에 침대에 누워있다는 점이 마음에 좀 걸렸는데, 어제까지 열이 약간 있어서 쭉 쉬고 있었다고.

소야노 어머니의 상처는 자동차 사고로 생긴 척추 골절이라, 단순히 하반신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 외에도 여러가지로 몸이 아플 때가 있다.

몸 아픈데 괜히 신경쓰이게 하는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소야노 어머니는 오늘 거의 다 나았으며, 오랜만에 내 얼굴 보니 굉장히 기뻐서 기운이 난나고 웃으며 대답해 준다.

 

젊을 때 간호보조사, 노인복지사 등등 봉사활동과 관련된 일이라면 안해 본 것이 없는 분이라

자동차 사고가 난 뒤 허리 아랫부분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병상 위에서 깨달았을 때에도

'어차피 나이 더 들면 휠체어 생활하는데, 조금 더 앞서서 체험하는 것일 뿐' 이라고 생각할 만큼

누구한테나 웃음을 잃지 않고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해 주는 편이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힘든 내면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내 쪽에서 항상 순진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든 것도 사실이지만, 그 미소만큼은 정직한 것임에 틀림없어서

이 분와 이야기 할 때마다 나는 많은것을 배우고 얻어간다. 나에게는 인생의 스승 중 한명이나 다름없는 분.

 

 

 

일본인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넓은 소야노네 이층집은 여전히 별로 변한 게 없다.

차이점이라면 어머니 몸이 불편해 쇼야 할머니 집에 맡겨놨던 '리쿠'라는 푸들 강아지가 다시 집에 돌아와 있다는 점 정도.

 

리쿠는 쇼야 할머니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는지 그곳에서는 되게 우울해 했고, 할머니 쪽도 힘들다고 해서

어느 정도 불편함을 감수하고 다시 이쪽으로 불러왔다고 한다. 물론 리쿠는 엄청 기뻐하며 쇼야네 어머니한테서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사진은 내가 생활하던 현관 옆 빈방이었는데, 여행중 묵었던 어떤 비즈니스 호텔보다 더 넓은 방이었다.

물론 사람이 살던 방이 아니라 에어콘이고 뭐고 없어서 여름에 상당히 덥긴 했지만

자전거 여행중의 본인은 이미 불편함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서, 선풍기 한 대만으로도 천국일 뿐.

 

소야노 집안의 특징 중 하나로, 소야노 어머니 한분 빼고는 도무지 '정리'와 '청소'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점을 들 수 있다.

대를 잇고 이어 수백년간 시골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라 그런지, 한정된 공간에서 무언가를 정리한다는 생각 자체에 관심이 없는 듯 하다.

그냥 예전처럼 창고 하나 뚝딱 만들어서 거기다 뭐든 집어넣어 버리면 해결된다는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

애초에 시골 토박이일수록 쓰레기를 버린다는 개념도 없기 때문에, 안 쓰는 것이다 싶으면 그냥 창고행이다.

 

몇년 전 화재로 창고가 없어졌다지만, 당시 그 창고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 시절의 거울이나 갑옷, 검도 있었고

개화시대 초기 물건으로 추정되는 나무 벽걸이 시계 등등... 온전한 상태였다면 진품명품에서 고가에 팔릴만한 녀석들도 있었다고.

그러니까 이쪽 사람들은 500년 전의 물건도 자신들한테 쓸모없다고 그냥 창고에 처박아 놓는 그런 부류란 것.

 

현대식 주택에 살아도 그 마음가짐만은 훌륭히도 변한게 없어서

소야노 어머니가 몸이 멀쩡할 때는, 천성적인 깔끔함으로 그래도 집안이 깨끗했지만

몸을 다친 이후로 2층에 올라갈 수가 없게 되고나서는 그냥 포기해 버렸다고.

지금은 리쿠까지 가세하는 바람에 3년 전보다 좀 더 지저분해 진 듯 하다.

 

본인도 방이 돼지우리라고 엄니한테 지탄받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엄니를 소야노네 집으로 한번 초대하고픈 생각이 소떼처럼 밀려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아마 엄니가 이쪽 집안 모습을 본다면 기절하실것 같지만.

 

 

 

소야노 어머니는 들뜬 목소리로 여기저기 전화하기 바쁘다.

나한테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해 준 친구 카미무라 씨한테 연락해서 누가 우리집에 왔는지 맞춰보라고...

사실 이렇게 조용히 온 것도, 그냥 혼자 돌아다니면서 한분 한분 인사하기 위해서였는데

그렇다고 좋아서 여기저기 전화 걸고 있는 소야노 어머니를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카미무라 씨 따님은 내가 여기서 지낼 때 결혼식을 올리고 지금은 키소후쿠시마의 작은 선술집에서 남편과 함께 가게를 열고 있다.

거기서 저녁 한 끼 하면 어떻겠냐고 이야기가 나와서 전화해 보니, 불행히도 저녁에 가게 전체를 빌리는 모임이 있다고.

 

본인은 일단 한국에서 가져온 선물 전해주고 인사하는 것만 목표로 삼았지만

그 가게 술의 수준도 그렇고 안주나 음식 수준이 상당한 편이라 살짝 아쉽긴 했다.

 

카미무라 따님의 시어머님, 그러니까 남편의 어머니 되는 분은, 내가 가니까 놀랍게도 김치를 작은 접시에 담아 주셨다.

발효과정을 거치지 않은 기무치와는 달리 진짜 삭아있는 한국식 김치여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예전에 부산에서 생활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배워온 것이라고. 외국인이 그 정도 경험으로 김치를 담글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아주머니 요리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술과 요리가 참으로 맛있었던 곳.

 

카미무라 씨 일행과는 저녁 함께 먹기로 했고, 소야노 아버지는 오늘 일때문에 늦게 오신다고 하니 밤에 집에서 맥주나 한잔 하기로 한다.

그럼 시간 있을때 아르바이트로 신세를 졌던 소바집에가 가보려고 하니

소야노 어머니가 차로 태워주겠다고 자꾸 호의를 배풀어 주셔서 살짝 난감하기도 했다.

사실 자전거로 15분 가까이 걸리는 거리라 걸어가려면 왕복 1시간은 넘게 잡아야 하는 곳이긴 하지만

가는 길의 풍경이 워낙 좋아서, 사진이나 좀 찍으며 느긋하게 즐길까 싶었던 나의 계획은

그러고보니 이쪽 가족들이 내가 그렇게 발품 팔도록 놔두지 않으리라는 기본적인 추측을 하지 못함으로서 멋지게 빗나가 버렸다.

 

3년 전 내가 신세를 지던 당시 소야노 어머니는 상반신만으로 운전 가능한 특수차량을 주문해 받았고

타고 내리는 것까지 남의 도움 필요없이 혼자서 모두 해낼 수 있는 차량이라서

장거리를 제외한 많은 곳을 혼자 운전해 돌아다니며 집안에 틀어박히는 스트레스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역시 시간이 지나서인지 아주 능숙하게 휠체어에서 운전석으로 이동하고, 후크에 휠체어를 걸어 자동차 위쪽의 보관대에 집어넣고

두 손으로 엑셀과 브레이크도 자연스럽게 밟아가며 순식간에 나를 소바집 앞에 내려놓아 주셨다.

 

유턴해서 다시 올라가는 소야노 어머니 차량을 지켜본 다음에 주섬주섬 카메라를 꺼내서 소바집 쿠루마야(くるまや)의 전경을 담아본다.

원래 쿠루마야는 창업 300년이 넘은 전통있는 소바집인데, 오리지날은 마을 안쪽 거리에 아직 영업중이고

이곳은 예전 가족들이 분가하면서 도로가에 새로 만든 쿠루마야이다.

드라마처럼 사이가 틀어져서 분가한 건 아니고, 추구하는 맛이 달라서 하나 더 차린 것이라고. 이름도 두 가게 모두 '쿠루마야'를 쓴다.

 

이곳 사장님은 서글서글한 거구로, 음식에 대해서는 엄청난 열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장인이다.

마을 소방대 단장을 맡을정도로 활동적이면서도 매우 세심한 성격을 가진 분으로,

가게 바로 옆 키소 경찰청 사람들이 회식왔을 때 모두들 앞에서 '한국서 자전거 여행하며 알바하는 리 군'이라고 아주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정도라

쑥쓰럽기도 했지만, 그것 역시 이곳에서 생활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잘 봐달라고 부탁하는 의미였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만큼 고마운 사람도 없다.

 

그 사장님 눈썰미가 아주 좋은 편이라, 길 건너에서 사진찍고 있는 나를 주방 창문에서 단박에 알아보시고 '리 군~' 이라고 소리를 친다.

요리를 하면서도 항상 창가에서 손님이나 가게 관계자가 오는 것을 파악하고 있는 분이라, 3년만의 재회도 순식간에 파악해 버린다.

 

 

 

가게 입장에서야 좋은 일이겠지만, 점심시간을 넘겨 왔는데도 손님이 상당히 많아서 바쁜 편이다.

사장님과 인사를 한 후 주방쪽으로 들어가자 모든 직원들이 몰려들어 반가움을 표시한다.

직원 대부분이 친인척이고, 그렇지 않은 직원 아저씨도 10년 넘게 함께 해 온 분이라 모두들 가족이나 마찬가지.

 

본인 역시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한 몸이라, 일부러라도 돈 내고 음식을 먹고 싶었지만

그걸 허락해 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척하고 내어주는 소바를 감사 인사와 함께 후르룩 빨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여전히 내가 평생 먹어본 소바 중에서 최상의 맛을 자랑하는 녀석.

 

소바는 전문가 수준의 매니아가 되어야 알 수 있는 미묘한 맛도 있지만

나같은 일반인 레벨에서는 면의 목넘김과 소스의 깔끔한 맛 정도로 판단하는 수준.

이곳 소바가 너무 맛있어서 소야노 어머니한테 물어보기까지 했는데

소야노 어머니도 이곳에서 한번 먹어보고 이 주변 소바집 중에서도 상당히 맛있는 편이라고 감탄하시는걸 보면

절대 맛 없는 소바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도 이상하진 않을 것이다.

 

참고로 이 주변은 일본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소바 가게가 진을 치고 있다. 이곳에서 망하지 않고 장사한다는 것만으로도 레벨 보장은 된다는 뜻.

 

 

 

할아버지 한 분을 제외하면 건장한 남성 두 명이 모두 주방 요리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힘쓰는 일은 할머니들이나 아주머니들이 힘들어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때 운 좋게도 내가 바이트를 시작하면서 2층에 음식 나르기나 설거지 등의 업무를 맡았기 때문에

초보 알바생 치고는 나름 도움이 되어서 사람들이 좋아하던 기억이 난다.

 

일하는 내가 미안할 정도로, 틈만 있으면 앉아서 쉬라고 자리 내 주고 커피 타 주고 과자 주고 했는데

바이트 하면서 마음이 이렇게 편했던 적이 과연 한국에 있었던가 지금도 생각해 본다.

 

오랜만에 주방에 앉아있으니 다시 몸이 근질근질해서, 자기가 먹은 소바 그릇이라도 좀 씻으려고 싱크대 쪽으로 걸어가니

사모님이 웃으면서 일 안해도 된다고 말리신다. 하지만 기분은 이해하시는지 심하게 말리진 않는다.

괜히 안절부절하게 앉아있는 것 보다는 슬쩍슬쩍이라도 일 도와주는게 역시 맘 편하다.

 

강력한 성능으로 인해 한동안 나의 손가락 끝을 화끈하게 해 줬던 스팀세척기도 여전히 잘 작동중이다.

여름엔 쪄 죽을듯 했는데 겨울이 다가오자 세척기의 스팀마저도 따뜻하게 느껴지는 변화무쌍함이 음식점의 주방이라는 곳.

 

 

 

이곳에서의 수많은 추억은 간단히 끄집어내는 것만으로도 좀처럼 끝이 나지 않을듯 하다.

내가 바이트 하던 당시의 미친듯한 혼잡함과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시간대에 비해 생각보다 손님이 많았던 터라 약간의 미안함을 가지고 자리에 앉아서 그 때의 충실한 하루하루를 되짚어 본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아들은 이제 대학교 가서 집에는 없다고 하고

소바집 딸내미이면서 메밀 알레르기가 있는 따님은 내년에 결혼한다고 한다. 역시 변하지 않는 모습 속에서 사람만은 같은 시간을 걷는다.

 

2층 단체손님 지나간 자리를 정리하면서 '아들내미의 우유부단함에 대해' 걱정하던 사모님의 고민거리도 들어줬고

메밀 알레르기로 소바를 먹지 못하는 딸을 위해 볶음밥이나 카레 덮밥 같은 굉장한 요리들을 척척 만들어 던져주던 사장님의 모습도 새록새록하다.

 

젊은 시절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며 음식 수련을 한 사장님이라, 이런 주방과 조리도구만 있으면 못만드는게 없다.

지금 생각하면 참 황당하지만, 소야노네 가족이 사정상 1박 2일로 멀리 떠나가면서 나한테 집을 맡겨놓은 상황도 종종 발생했는데

그럴 때 편의점 도시락을 사 가려고 하니 사장님이 아무 말 없이 즉석해서 눈물나게 맛있는 도시락을 훌쩍 만들어 건네주시곤 했다.

당연히 다음 날 도시락을 씻어서 돌려드리며 500엔을 함께 드렸다. 일반인이라면 몰라도 프로 요리사들에게는 그만한 값어치를 지불하는 것이 예의니까.

 

 

 

소바를 끓이는 거대한 가마솥은 항상 열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 뒤쪽에 이렇게 소바를 놓는 대나무 판을 씻어서 올려놓는게 내 소소한 일과중 하나였다.

워낙 뜨거워서 아주 바싹하게 잘 마르는 곳이었으니. 의외로 겹치지 않게 착착 늘어놓는 이 일도 꽤나 재미있었다.

 

사모님은 굉장한 여장부이면서도 접객에 일가견이 있는 만능인으로

거대한 체구의 사장님이 요리 장인이라 그런지 젊으면서도 우직한 면을 가진 반면

여러가지로 도심지의 아이덴티티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분이라, 주방 외의 가게 주인이라 할 만하다.

 

체력적으로는 역시 건장한 사장님을 따라가기 힘들어서, 바쁜 하루가 끝나는 날엔 꽤나 힘들어 하시기도 하는데

이 정도 가게를 열면서도 평생 여행한번 제대로 갈 시간이 없다는 점에서 아쉬움과 함께, 자신의 일에 대한 책임감이란 것을 세삼스럽게 느끼기도 했다.

 

 

 

격일로 출근하시는 할머니께서 쉬는 날이라 전 멤버가 다 모이진 않았지만

내가 해 왔던 어떤 일보다 더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었던 이곳 소바집 멤버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다.

 

손님이 적은 편도 아니었는데 이곳 역시 소야노 쪽과 마찬가지로 휴게소까지 차로 태워주겠다고 한다.

사진도 좀 찍고 싶었기에 걸어서 올라갈 거라고 하니 꽤나 힘들고 시간 많이 걸린다면서 자동차 시동을 건다.

하긴, 나라는 사람은 이곳에서 애초에 혼자 걸어다닐만큼 홀로 서 있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세삼 깨닫는다.

 

1년간의 자전거 여행동안 질리지도 않고 고독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달려왔던 본인도

이 마을에서만큼은 그 고독을 즐길 여지가 별로 남아있지 않다.

한국에서라면 솔직히 기분 좋지만은 않은 일이겠지만 이곳은 고독하지 않아도 괜찮은 극소수 장소 중 한 곳이다.

뭔 배짱인지 지역 신문기자가 기사를 쓰고 싶다고 하는데 승락을 해 버리는 바람에 신문에도 나와버렸으니...

 

다음엔 좀 더 많은 지인을 데리고 와서 소바 맛을 좀 보여주고 싶다고 인사를 하며 추억의 쿠루마야를 뒤로 한다.

휴게소에 내려서 매번 하던 것처럼 자판기에서 음료수 한 캔을 뽑아 마신다. 이 날은 담배가 없어서 그건 패스하고.

소야노 집으로 돌아갈 필요없이, 도로 건너편의 카미무라 씨네 가게에 소야노 일행이 도착해 있다고 한다.

소바도 얻어먹고 해서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이런 날은 배가 터지더라도 이 사람들의 환대에 대답하는 것이 도리일 터.

쿠루마야의 추억을 다시 한번 곱씹으며 정갈한 모양새를 자랑하고 있는 카미무라 가게로 들어간다.

 

다음날 여전히 화창날 날씨와 함께 짐을 챙겨 마츠모토 역으로 향한다.

한 시간에 한 대씩 오는 원맨 열차 시각이 아직 남아서 역사 바깥의 모스버거에서 모닝 세트를 주문해 놓고 시간을 때운다.

시간이 널널하리라 생각했는데 체감상 그 작디 작은 모닝세트를 허겁지겁 먹어치운다고 느낄 정도로 여유가 없다.

아마도 여전히 긴장이 풀리지 않아서일 듯.

 

원맨 열차는 차량에 승무원이 한 명밖에 없는 열차로, 승객이 그렇게 많지 않은 구간이나 무인역이 많은 구간에서 운용한다.

한국과 달리 거리별 운임이 상당히 차이가 나는 일본 전철이기 때문에

무인역에서 정산할 수단이 마땅히 않은 바, 원맨 열차의 전철 끝 기관사쪽 문을 통해서만 내리게 되어 있다.

그 앞의 요금함 안에 본인이 내야 할 요금을 내는 방식.

 

그래서 무인역에서는 다른 출입문이 열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열리는 경우는 타는 사람이 바깥에서 버튼을 눌렀을 경우 뿐.

은근히 요금 안내고 타는 사람과 타이밍 맞춰서 나갈 수도 있겠다 싶지만

철도원들의 승객 체크는 의외로 철저한 편이고, 한적한 곳인 만큼 한번 찍히면 자칫 벌금 크게 물 수도 있으니

그냥 이런 허술함 역시 시골의 여유와 낭만의 일부분이라 생각하고 넘어가는게 좋을 듯 하다.

 

1시간 반 가까이 전철을 타고 창밖 풍경을 바라본다.

은근히 기억이 날 듯한 모습이 차창을 스치고 지나가면 문득문득 가슴이 지려오는 기분이다.

중간에 나라이(奈良井)역에서는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내리고 타고 한다. 대부분이 등산복 차림을 한 노인 관광객들.

 

과거 쿄토와 도쿄를 잇는 내륙도로 나카센도(中仙道)의 유명한 숙박지였던 나라이는

아직까지 그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중요 관광지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곳을 구경하러 온다.

 

나라이에 도착했다는 건 목적지와 가까워 졌다는 의미. 괜히 카메라를 꺼내 추억속의 풍경을 찍어본다.

 

 

 

하라노 역에 내리니 잠에서 깨어난 듯 신경이 예민해지는 기분이 든다.

처음 이곳에서 마츠모토나 나가노로 놀러 갔을 때는

전철역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고요하고 자연 풍만한 이곳 모습이 놀라고

한 시간에 한 대라는 차를 놓치면 어떻하나, 무인역이라는데 표는 어디서 뽑는건가 하면서 쓸데없이 긴장타던 기억이 난다.

 

그런 안절부절마저도 결국엔 아련한 아쉬움과 즐거움의 흔적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추억이란 녀석인 듯.

 

 

 

원래는 직원이 상주하던 유인역이었다.

매표소였음에 분명한 곳은 아크릴 시간표로 단절의 의사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3년만에 이 모습을 다시 접하니 지브리 애니메이션 바다가 들린다(海か聞こえる) 마지막 장면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일본의 무인역이라 하면 이곳과 함께 일본에서 가장 북쪽 무인역인 홋카이도의 밧카이(抜海)역이 나에게는 추억의 장소.

밧카이 역에서는 먹을것에 낚여서 NHK 에 출연하기도 하고, 하룻밤 자고 가기도 했는데

이곳 하라노 역은 바로 옆에 쇼야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굳이 이 안에서 텐트 칠 일은 없었다.

 

 

 

역을 나오고 나서부터는 한 장면 한 장면이 모두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추억의 집합체일 뿐이다.

첫 여행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새롭지 않은 평범한 풍경이지만

나의 이번 여행에는 이미 만들어진 이야기가 있다. 그 위에 다시 색을 덧칠하는 마음은 각별한 것이다.

그래서 여행에 대한 나의 지론은 확고하다. '간 곳에 또 가도 전혀 아깝지 않은 것이 여행'이라고.

 

당시 자전거 여행중이다 보니, 동네 슈퍼를 가도 항상 자전거로 이동했었고

당연히 마츠모토나 나고야, 나가노에 놀러 가려고 이곳 역으로 올 때도 자전거를 타고 와서 이곳에 세워놓았다.

2~3일 동안 무인역 앞에 고가의 자전거를 세워 놔도 전혀 걱정이 되지 않는 곳이었고

히로시마 근처에서 짐을 도둑맞은 적이 있는 나로서는, 일본에서 안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여행이란 건 남한테 자랑하려고 떠나는 것이 아님이 확실하지만

남들이 쉽게 가지 못하는 곳에서 자신의 존재를 은근히 드러낼 때의 뿌듯함은 분명 인간의 본능이리라고 이해는 한다.

단지 그것이 소요되는 시간과 금전의 양에 좌우되어

그곳에 쉽사리 가지 못하는 부류와의 비교가치로서 이용될 때 구린 냄새를 풍긴다는 것이 문제일 뿐.

 

그런 면에서 이곳 하라노는, 나에게 있어서는 은근히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그런 비밀스러운 가치를 지닌 곳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관광객도 이곳을 일부러 찾아오거나 부러워 할 일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도리어 마음이 편한 곳이기도 하다.

 

하라노 역 바로 옆에는 이 부근에서 가장 활성화된 키소후쿠시마(木曽福島)가 있어 그곳에 온천, 여관 등이 밀집해 있기 때문에

관광객이 이곳에 올 일은 없다. 단지 자동차나 바이크 여행을 즐긴다면 큰 휴게소가 있어서 자주 들르긴 하지만.

 

아무런 특징 없는 이곳 풍경이 나에게는 죽은 세포를 되살리는 짜릿함을 느끼게 한다.

 

 

 

걸음을 뗄 때마다 3년 전의 일상과 겹쳐지기 때문에 좀처럼 쇼야 가족네 집까지 도달하기가 힘들다.

하라노 역과 쇼야네 집 사이에는 나가노의 허리를 관통하는 주 도로가 나고야까지 주욱 이어지고 있는데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 무서운 트럭들 사이를 조심하며 건너거나

조금 돌아가긴 하지만 도로 밑으로 난 터널을 살짝 통과해 건너거나 한다.

 

횡단보도쪽으로 건너가도 괜찮긴 하지만, 횡단보도 바로 앞 가게가 본인과 큰 인연이 있는 집이라서

가능하면 쇼야네 집 사람들과 인사하는걸 첫 번째로 하고 싶었기 때문에 일부러 그곳을 피해 밑으로 건너갔다.

추억이란게 이렇게도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는 큰 원료가 되는 녀석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뭐하고 있는건가 싶기도 하다. 겨우 3년만에 만나는 사람들인데 말이지.

 

 

 

건널목을 건너면 휴게소가 보이는 저곳으로 올라오게 되고

터널을 지나 샛길로 올라오면 여기에서 합류한다. 쇼야네 집은 여기서 고개를 돌려 반대쪽 언덕으로 간다.

 

하지만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휴게소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지인과 만나는 것은 쇼야네를 처음으로 하고 싶지만, 나는 이곳에서도 혼자임을 즐기는 시간이 많았다.

나름 체력을 요하는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상당한 경사를 자전거로 올라 이곳 휴게소에 도착하는 저녁 무렵엔

항상 벤치에 앉아서 음료수 한 캔과 담배 한모금으로 노을에 취하는 게 일과였다.

 

 

 

3년 전은, 본인 뿐만 아니라 쇼야 군에게도 여러가지 변화와 고통을 감내해야 할 시기였다.

친구가 적었던 쇼야 군의 소울 메이트가 자위대에 지원하기로 결정했던 시기였고

여전히 일본 일주 도중이긴 했지만 쇼야 군 역시 스스로 변화해야 함을 인식해야만 했다.

 

섬세하고 예민한 쇼야 군의 심리에 나라는 정체불명의 외국인이 끼어들어 몇 달간을 함께 한 시간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 나에게도 그의 고민과 고통은 무시할 수 있는 남의 감정이 아니었다.

키소의 풍요로운 풍경은 전혀 변함없이 나를 차분히 들뜨게 하지만

사람들끼리의 인연이란 시간과 공간이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항상 변화하며 서로 맞물리고 때로는 흩어지며 이어진다.

 

 

 

일반적으로 일본의 시골은 정비가 워낙 잘 되어있어서

한국과 가장 이질감이 많이 느껴지는 지역 중 하나이긴 하지만

특히나 이곳 키소 마을은, 시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에 어색함마저 느껴질 정도로 아담한 주택이 많다.

 

당연히 빈촌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굉장한 부촌도 아닌듯 하고

그럼에도 2층 주택과 그 앞의 텃밭, 마당의 조합은 키소의 대자연에 위배되지 않는 제한선이라도 갖고 있는듯

과시라는 인간의 욕망을 거세해버린 느낌의 조화로움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휴게소로 내려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자판기에서 싸고 양 많은 탄산 오렌지 쥬스를 하나 뽑아들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 짐을 내려놓은 후 한숨을 한번 내쉰다.

 

인생에서 단 3개월간의 순간이었지만, 이곳은 나에게 있어서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아무리 더워도 그늘에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그냥 주위 모든 풍경을 다시 한번 시야에 담아낼 뿐.

이렇게 한숨이 자꾸 나오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버스나 자동차로 관광하는 사람들은 한번쯤은 이곳 휴게소에 내리는데

그것은 앞서 말한 내륙도로 나카센도의 거리상 정중앙이 바로 이 지점이기 때문.

 

이 지점이 쿄토와 도쿄간 거리를 정확히 반으로 나누는 곳이기도 하고

마침 이곳에 서면 저 멀리 키소 8경중 하나로 유명한 키소 코마가타케(駒ヶ岳)의 석양을 즐길 수 있다.

 

코마가타케는 당시 한국인 등산객이 사망한 그 산과 인접해 있어서

저 아름다운 풍경이 그리 우습게만은 보이지 않게 되기도 했다. 해발 3천미터 산을 그렇게 쉽게 오르려 하다니.

 

관광객들에게는 그냥 중앙에 가족 세워놓고 한장 찍는 정도의 장소이겠지만

본인은 매일 저녁 이곳에서 눈으로 보면서도 신기하게만 느껴지는 풍경의 변화를 즐기고 또 즐겼다.

 

 

 

주차 공간은 매우 넓지만 크게 특색있는 휴게소는 아닌 이곳은

시골 휴게소들이 그렇듯 반쯤은 마을 주민들의 시장같은 모습으로 운영되고 있다.

 

휴게소는 보통 지역의 유명한 먹을거리를 주무기로 삼는데

키소는 철마다 다양한 채소가 유명하긴 해도, 장사가 되는 요리를 꼽을만한 게 별로 없는 듯.

키소엔 일본에서 소바 맛있기로 유명한 곳이라 휴게소가 소바 팔아봤자 느낌이 오지 않는다.

 

무더운 여름날부터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까지 이곳에 머물렀는데

해발 2천미터 산맥 양쪽의 계곡을 따라 형성된 이곳 마을과 도로는

일반적인 산보다 훨씬 대기의 흐름이 변화무쌍해서, 갑작스러운 비는 이미 갑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바다를 훨씬 좋아하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이곳 계곡사이 마을인 키소라는 곳의 끝없이 다양한 모습은 정말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곤 했다.

 

3년 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힘겹게 휴게소까지 돌아와 벤치에서 쉬고 있는데

폭우와 동시에 찬란한 햇살이 옆에서 치고 들어오듯 반짝이는 그 풍경은

대체 여기가 어디인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초현실적이었다.

다행히도 아르바이트 하러 가면서도 항상 카메라를 들고 다녔기에 담을 수 있었던 사진.

 

 

 

스펙트럼이 원래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무지개가 떠도, 무지개 위쪽과 아래쪽의 하늘색이 전혀 다른 이런 풍경도 신기했다.

이건 키소만의 특징은 아니겠지만, 사실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떡하니 나타나는 무지개를 그만큼 본 적이 드물었다는 이유도 있고.

 

그 외에도 밤에 산책 좀 하려고 손전등 하나 들고 휴게소로 내려오면

음료수 자판이 위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청개구리떼가 너무 귀여워 흥분하던 기억도 난다.

20여년 전만 해도 비만 오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청개구리가 이렇게 반가워지는 시대다 보니

세삼스럽게 이곳 키소가 정겨워지는 이벤트였다.

 

 

 

나가노의 산들은 옷을 빡빡하게 입고 있는 편이다.

이곳 지역의 삼나무들은 매우 곳도 굴고 단단한 상품으로 유명해서

황제의 궁전이나 각지의 주요 신사의 기둥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되는 국가 소유의 재산이었다.

 

당시엔 워낙 귀한 삼나무였고, 아무리 산골 깊숙히 위치한 이런 마을이라고 해도

땔감이나 가옥의 유지 보수 등 나무가 풍족하다고 할 만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에

몰래 삼나무를 베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던 탓에, 일본 정부에서는 당시 삼나무 숲을 관리 감독하는 직책을 만들고

그 감독관에게는 살인면허의 일종인 키리스테고멘(切り捨て御免)이라는 무사들의 권리가 주어졌다.

 

'키리스테고멘'이란 무례를 범한 상인, 농민계급을 무사가 칼로 죽여도 면책받을 수 있다는 법으로

상상과는 달리 매우 엄격한 규칙에 의거해 있고, 죽인 후에도 강도높은 조사를 받는데다가

설사 정당방위로 죽였다고 해도 칼을 압수당하고 무조건 20일간 구류를 당하는 등, 무식할 정도로 야만적인 법은 아니었다.

 

하지만 삼나무의 관리직은 생계가 힘들어 나무를 훔치는 서민들을 상대로 하는 무자비한 감독관이었기 때문에

지역 농민들에게 적대감을 많이 살 수 밖에 없는 관직이었다.

 

지금 만나러 가는 쇼야네 가족이 그 감독관의 후손. 물론 지금은 마을 사람들끼리 악감정 같은 거 없지만

가끔씩은 쇼야네 가족들 입에서 스스로 그런 말이 나오기도 한다. 그때 불쌍한 사람을 죽이는 바람에 가문에 안좋은 화가 낀 건 아닌가 하고.

 

 

 

위쪽 사진 오른쪽을 보면 바위같은게 보이는데, 그걸 확대해서 찍어보았다.

뭐, 관광 상품으로 유명한 것은 아니고 사실은 이름도 없는 바위인데

쇼야 군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 정말 큰 비가 와서 산사태가 일어나고, 그 바람에 정상 부근에서 굴러 떨어져 박혀 버린 바위라고.

 

당시엔 마을 전체가 피난가야 하는게 아닌가 할 정도로 큰 산사태였다고 하니

저렇게 어마어마한 바위도 굴러내려오고 그러는 거 아닌가 싶다. 주위 나무를 보면 알겠지만 집채만한 바위다.

 

쇼야 군은 집에 있을때 심심하면 저곳에 올라가 바위 위에서 풍경 바라보는게 일상이었다고.

나보고도 몇번 가보자고 꼬시긴 했는데, 사실 저 산은 등산을 위한 산이 아니라 제대로 나 있는 길이 없다.

특히 저 바위로 향하는 루트는 정상까지 올라가서 다시 내려가야 하는데, 거기는 이곳 토박이들이 아니면 지나갈 수도 없는 길이라서.

 

자전거 여행으로 많이 지쳐있을 때라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는데, 혹시나 다시 산사태로 바위가 이사가기 전에 한번 올라가 봐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약 30분간 휴게소를 거닐며 떠오르는 상념을 즐기느라 머릿속이 바쁘다.

소야네를 만나기 껄끄러워해서 일부러 시간을 끄는 건 아니고

그냥 생각했던 그대로의 풍경이 여전히 눈 앞에 펼쳐지는 걸 보고 굉장히 가슴이 벅차오른 탓.

 

다시 이곳을 찾아온 게 역시 틀린 판단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곳의 자연은 시시각각 나를 만족시켜 주고, 지루할 틈 없게 만들어 준다.

 

자전거 여행중 만난 인연이 이렇게 확대되고 확대되어

지금은 새로운 가족과 고향이 생긴 것 같은 큰 마음 속 덩어리가 되었으니

훗날 너덜너덜한 인생을 뒤돌아보는 일이 생긴다고 해도

그때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래도 그런 일이 있었지' 라고 웃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제 1년에 하루 열리는 마츠모토 축제도 슬슬 끝을 향해 달려간다. 슬슬 도로에 주저앉아서 쉬는 사람들도 눈에 띄기 시작한다.

일본의 8월 첫째 주 토요일이라는 시공간이 가지는 공포스러움은, 사계의 변화가 뚜렷한 나라의 사람들에게는 신기루같은 항변일지도 모르겠다.

다들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를 수도 없이 겪으면서도 오히려 북극 사람이나 적도 사람들보다 날씨에 덜 민감한 듯 하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본인 역시 11월의 싸늘한 날씨에 익숙해져, 그 때의 섬뜩한 더위가 벌써 사진 속의 추억처럼 바래지고 있으니까.

 

한바탕 날뛰고 나서 들이키는 음료수의 짜릿함이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쾌락일 듯.

4시간이나 계속되는 축제다 보니 지쳐 나가떨어질 참가자나 관광객들이 좀 생기리라 예상했는데

어째 가면 갈수록 거리에 사람이 더 많아지는 기분이 든다.

 

물론 춤 자체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조금씩 줄어들고

삼삼오오 무리들이나 달달한 커플들이 자기네들만의 시간을 가지는 뒷풀이 공간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밤까지 계속되는 축제라면 역시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축제가 끝나가면서 한가지 궁금한 점이 생긴다.

지금 이곳 축제 거리에 모인 사람들은 마츠모토 시 인구보다 더 많은 20만명이 넘는데

이 사람들 다 어디로, 어떻게 돌아가는 것일까. 여기가 서울처럼 큰 도시도 아니고.

 

특히 축제 끝날때 까지 주요도로가 전부 보행자 천국이라서, 대충 다들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싶다.

이런 축제 후라면 뒷풀이 거하게 하고 새벽에 한시간쯤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전혀 힘든 일은 아니겠지만.

 

본인은 축제 장소 한가운데 서 있는 호텔에 투숙중이니 돌아가는거 하나는 신경쓸 게 없어서 홀가분하다.

 

 

 

짧지 않은 축제가 끝을 향해 달려가자 일본인 특유의 질서가 조금씽 무너지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것도 아니다.

아무리 마이크에서 떠들어대도 이미 힘이 다한건지, 춤 추는 도중에도 길을 건너려 사이사이를 뛰어다니는 사람들 통제가 되지 않는다.

진행요원이 대열 사이사이에서 '건너가지 마세요'라고 소리를 질러도 스스럼없이 건너가 버린다.

강제력을 가지고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진행요원들은 그냥 속이 탈 뿐.

 

사실 춤추는 사람과 부딪친다거나 하는 사고는 사소한 것일 뿐이지만

운영위원회 입장에서는 어쨌든 제일 신경쓰이는게 물리적인 부상이니까.

 

무단횡단하는 사람들은 이미 통제가 거의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다행히도 본인이 보는 한 사고가 생긴 일은 없었다.

 

 

 

뭐 하는 팀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들이 앞쪽에, 여자들이 뒤쪽에 서서 춤을 추는데

복장도 강렬하지만 안무 역시 일반적인 동작과는 달리 무릎과 허리를 지면에 엎드리듯이 굽혀가며 몸을 크게 휘젓는 과격한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다른 팀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의 체력이 소모되는 안무인데, 다들 의무감에라도 휩싸인 듯 악과 깡으로 춤을 이어가고 있다.

 

복장을 봐서는 무슨 빠칭코 회사 직원들이거나, 아니면 폭주족 팀원들 같은 분위기.

사회적으로 눈총받는 그룹들이긴 해도 사실 축제 때 분위기 제일 잘 띄우는 사람들 역시 좀 놀아본 사람들이다.

상세한 사정까지는 알 수 없지만 일반적인 참가 팀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는 건 확실히 기억한다.

 

 

 

축제의 규모에 비해서는 부담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게 이 마츠모토 봉봉인 듯.

큰 축제는 원래 준비할 것도 많아서 아예 축제 준비를 전업으로 삼는 사람들도 없잖아 있다.

아오모리의 네부타 축제는 네부타라는 거대한 구조물 만드는 데 1년이 걸린다. 축제 역시 1년에 한 번씩 열리고.

축제 후엔 그 인형들 바다에 띄워 불태워버리니, 사실상 평생 축제 인형 만든다는 의미.

 

하지만 이 축제는 뭐, 의상 맞추고 안무 연습만 하면 되니 크게 부담은 없을 것 같다.

네부타 축제처럼 일본 3대 축제에 들어가는 유명한 녀석들은 인건비와 규모를 감당하기 힘들어

점점 찾아오는 사람도 줄고 축제 규모도 축소되어가는 분위기인데, 마츠모토 봉봉은 매년 관광객이 꾸준히 늘어가고 있다.

 

사람들이 발걸음을 옮기게 하는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한 해석이 필요하다. 특히 관 주도로 열리는 축제 관계자들은.

세계대회 열리는 기간엔 문화, 예술을 즐긴답시고 재즈축제 열고 잰척 하더니

대회 끝나니 재즈축제 없애버리고 치맥축제 따위나 열어서 거지들 줄세우기나 하는 꼬라지 보니 참 한숨밖에 안나오더라.

 

 

단지 지역 사람들 모여서 춤추며 돌아다니는 이 축제가

어째서 이 도시 인구보다 더 많은 20여만명의 관광객들을 매년 불러모으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돈 내고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다, 온 김에 좀 더 둘러보고 갈 만 하다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야 한다.

축제가 돈을 밝히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은 결코 수면위로 스스로 올라와서는 안되는 양면성을 가진다.

 

사람들은 축제를 즐기러 온 거지 가게들 선전 보러 온게 아니다.

축제는 축제대로 관광객을 만족시켜줘야 그 뒤에 지갑이 열리게 되어 있는 것.

축제 참가에서 장사나 좀 하고 가겠다는 마인드 가지고 있는 회사들

그것보다는 아예 축제 자체를 회사들 선전하는 장소로 만들어 버리는 조직위가 더 문제이긴 하지만.

 

 

 

습한 더위 속에서 4시간 가까운 강행군을 하면서도 이렇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이 축제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가장 단순한 증거일 듯 하다.

 

쉬는 시간마다 스피커에서 미아가 된 아이 보호하고 있다는 메세지가 흘러나오고 있지만

묘하게도 그리 걱정되지 않는 것은, 충분히 통제되고 있는 상황에서의 사고는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안도감 때문일까.

 

 

 

거의 마지막 휴식시간이 아닌가 싶다. 어째 사람들은 점점 힘이 나는 듯 하다.

스피커에서는 여느 때의 안내방송이 아니라 뭔가 시상식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방송하고 있다.

 

몇몇 눈에 띄는 팀이 있긴 했는데, 아무래도 시상식장까지 가서 구경하는건 너무 힘들것 같아서 패스.

애초에 여기 참가한 사람들 중에 반드시 시상해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은 없을거라 본다.

 

축제를 성공적으로 마쳐가며 뿌듯한 기분으로 맥주 한캔씩 따는 참가자들 사이에서

혼자 조용히 이곳저곳 누비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나 같은 홀로 관광객은 기분이 묘하다.

쓸쓸하다거나 초라하다거나 하는 기분은 아니고, 축제를 즐기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구나 싶은 생각.

 

실제로 춤은 안 췄지만 또 하나 예정에 없던 귀중한 체험을 할 수 있어서 만족스럽다.

비록 이 축제를 보게 된 이유가 쓸데없는 자괴감에서 비롯되긴 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 또한 여행의 한 부분으로 각인되었으니까.

 

 

 

굉장히 화려한 총천연색 의상을 자랑하는 팀. 간판이 있긴 한데 이쪽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쉬는 시간 외에는 이동하기가 힘들어서, 내가 참가 팀의 몇% 정도를 본 건지 알 수가 없다.

한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면 아마도 모든 팀들을 한 번쯤은 볼 수 있었겠지만 그러면 너무 심심할 테니까.

 

보통 축제 끝나면 뒤풀이로 또 한번 시끌벅적해 지는데

이렇게나 사람들이 많으면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궁금하다. 가게는 거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없을텐데.

젊은 사람들은 벌써부터 인도 아무데나 퍼질러 앉아서 술 마시며 여자 꼬셔대고 있다.

나도 슬슬 편의점에서 먹을 거 좀 챙겨 나와야 하는데, 사람이 너무 바글바글해서 타이밍 잡기가 힘들다.

 

 

 

마지막 춤이 시작된다. 으레 그렇듯이 참가자들의 목소리나 동작은 더욱 커진다.

4시간 동안이나 마징가 Z 같은 노래를 듣고 있으니 그것도 이미 익숙해져서 흥이 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남녀노소 참가할 수 있는 축제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세삼스럽게 느낀다.

 

도로가에 위치한 전망 좋은(?) 가게 안은 벌써 사람들이 가득 앉아서 아련한 눈길로 행렬을 바라보고 있다.

기분같아서는 어디 가게나 패스트푸드점 같은데 들어가 마지막 마무리를 지켜보고 싶기도 한데

빈 자리가 있을리 없기 때문에 깔끔하게 포기하고 편의점에 들어간다.

 

화장실 가려는 사람들의 줄과 물건 사려는 사람들의 줄이 섞여있어서 혼잡하지만

의외로 편의점에서 먹을거리 사는 사람은 적은지 도시락 같은 건 충분히 남아있는 상태였다.

하긴 축제날 편의점 도시락 사먹는다는 건 뭐랄까, 이곳 사람으로서는 이미 최후의 수단 같은 행동일 테니까.

나는 인파 헤치고 줄 서서 간신히 타코야끼 하나 집어물고 하는 짓은 하기 힘들다.

 

 

 

생각해보니 이번 여행은 이상할 정도로 예정외의 이벤트가 많다는 느낌이 든다.

히다 타카야마에 갔을 때도 운 좋게 그날 저녁 마을축제가 있었고.

 

축제 시작때까지만 해도 키소 마을에 가지 않고 하루 더 눌러앉아 있으려는 본인의 소심함에

매우 우울한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활기찬 사람들의 축제를 구경하며 좀처럼 담기 어려운 사진을 찍어대고 있으니

그 죄책감이 조금은 사그라드는 듯 하다. 내일은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으니 당연히 키소로 향하겠지만, 그 전에 얼굴이 좀 풀려서 다행이다.

 

마지막 음악이 흐르고 춤은 모두 끝났지만, 한참 동안 동료들끼리 인사, 지나가던 지인들끼리 인사, 수고한 팀들간 인사 등으로

끝났다는 생각이 거의 들지 않는 시간이 흘러간다. 운영팀에서는 우수팀 시상하느라 정신이 없고 슬슬 사람들은 한잔 하러 가거나

집으로 돌아가는 등 소금이 물이 녹아내리듯 서서히 흐트러지는 집단의 모습이 보인다.

 

편의점에서 어렵지 않게 맥주 한 캔과 도시락 하나를 싸들고 숙소로 돌아온다. 9층의 객실에서도 여전히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여운을 남긴다.

결국 축제가 끝난 지 한 시간이 넘어서야 드디어 모든 만남이 끝나고 고리는 해체되어 서서히 흩어진다. 본인은 이미 목욕을 마친 상태.

맥주 한잔 들이키며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축제 현장에 건배 한 번.

 

애들 나이가 몇 살인지는 모르겠지만, 훗날 이 축제의 기억이 남아있을지 모르겠다.

본인의 경우 어릴 적의 기억이란 건 대부분 사회생활 시작부터 구체적으로 그림이 잡혀가는 듯 한데

유치원 가기 전의 기억은 매우 단편적이고 흐릿한 기억밖에 없지만

유치원 때부터의 기억은 입학식때부터 꽤나 상세히 기억이 난다. 유치원 구조까지도.

 

이런 큰 축제에서 어마어마한 인파와 시끄러운 음악소리를 직접 뛰어들어가 경험해 봤으니

이 애들이 내 나이즈음이 되어도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을까 싶다.

 

 

 

문득 축제 생각하니, 내가 어릴 당시의 한국이란 지금과 달라도 많이 다르다는 기억이 난다.

유치원 때부터 국민학교 저학년까지 내가 겪을 수 있었던 최대의, 그리고 유일한 축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추수감사절 부근에 펼쳐지는 미군부대 내의 축제와 불꽃놀이였다.

 

설날에 용돈이나 받고 추석에 친척들하고 놀이터나 나가보는 그런 시시껄렁한 놀이밖에 없었던 당시엔

1년에 단 한번 미지의 철창 문이 열리는 미군부대 축제는 마치 외국 여행을 온 듯한 신비의 세계였다.

 

그림 그려진 나무판의 구멍 안에 공을 넣으면 인형을 주는 놀이에서, 나이가 어린 애들 전용 구멍이 상당히 컸기 때문에

무리없이 확확 집어넣고 인형을 서너 개씩 막 건져오던 기억이 난다. 그 인형들 정말정말 좋아해서 4년 이상 가지고 놀았었는데.

 

어릴적 가장 기억에 남는 축제가 미군부대의 추수감사절 축제였다는 사실을 마츠모토 봉봉을 보며 떠올리니

요즘이나 수십년 전이나 한국의 어린이가 겪어야 할 정체성 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기분이 든다.

사실 요즘 애들이야 이런 축제 연습한다고 학원못가고 LOL 못하고 그러면 얼마나 서글프겠는가. 벌써부터 인생은 바쁜 것이다.

 

 

 

여기는 무슨 가장 행렬 팀인지, 중간중간에 이상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다.

유카타 차림의 여자사람들이 춤추는 모습은 참 보기 좋다.

일본의 전통 의상을 좋아한다기 보다는, 어떤 축제라도 자국의 전통의상 입고 참가하는게 가장 보기좋은 것이 당연하니까.

 

한국에서는 유카타와 키모노의 구분을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한복과 유카타를 비교하기도 하는데

실상 한복은 예절을 갖춘 행사에 입는 키모노의 일종인 후리소데(振袖)와 비교할 대상이지 유카타와 비교할 대상이 아니다.

유카타는 목욕 후에 파자마 대용으로 입는 간단하고 편리한 옷이라서.

 

개량한복이 적절한 가격과 뛰어난 편의성으로 발전된다면 한국 축제에서도 이런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겨울이라면 괜찮겠지만 8월 첫째 주 토요일 저녁의 기온은 30도 가까이에, 습도가 50%를 넘는 지옥의 언저리였다.

개구리 아저씨,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사진처럼 축 늘어져 버리는게 아닌가 심히 걱정되었지만

휴식시간에 수분 섭취를 잘 하고 있는지 아직까지는 생생하다.

 

그 옆에는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분도 열심히 부채 휘두르고 있다. 여기가 남반구인가?

 

본인 역시 소박한 소망으로, 사하라 사막 마라톤 대회에 다스 베이더 복장으로 완주해 보는 꿈을 꾸곤 하는데

막상 실제로 비슷한 짓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나마 현실 감각이 돌아오곤 한다.

 

 

 

'나가노 고전'이라는 학교에서 출전한 팀이다. 매우 활발하고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

내가 카메라 가져다 대니 긴장하는게 아니라 앞으로 쑥 다가와서 웃으며 부채춤을 춰 준다.

 

고전이라는 학교는 고등학교와 직업전문대를 합친 일종의 특수학원으로

취업쪽에 굉장히 강한 학교라 요즘 일본에서는 나름대로 입지를 다지고 있는 편이다.

물론 이러나저러나 인문계보다 날라리들이 많고 출석률이 떨어진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지만

학교 잘 안다닌다고 잘 다니는 학생보다 인간이 덜 됐다던지 하는 캐캐묵은 상식따위가 통하지 않는 시대니까 별 문제 없다.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환하게 웃어주는 모습을 일본이나 한국에서 보는 건

집앞을 걸어가는데 UFO와 충돌할 뻔 해서 외계인이 뚜껑 열고 나와 '죄송합니다 다치셨으면 보험으로 하죠'  하고 떠나는 경험만큼 진귀한 편이다.

 

 

 

마츠모토에서 가장 큰 축제다 보니 어지간한 대기업들 역시 필수 참가나 마찬가지.

NTT 도코모 사원분들도 열심히 춤추고 계신다.

절도있게 잘 추긴 하는데 역시 이쯤 되면 좀 전의 학생들과는 달리, 축제 역시 사회활동의 일종이라고 몸에 베어버리는 느낌이 든다.

하기 싫으면 안 하는게 축제일 터인데, 축제란 것도 사람이 만든 것이라

규모가 커지면 자연스럽게 권력의 집중이 이루어지고, 그렇게 되면 개인의 의사와는 조금 거리가 멀어지는 것일 듯.

 

NTT 정도 되니 팀원 수도 100명을 넘어가는 듯 하고, 대규모 인원이 펼치는 대규모 춤사위는 꽤나 박력이 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데, 생후 1년 이내로 보이는 아기들도 많다.

유모차는 움직이기가 워낙 불편해서 안고 나온 사람도 많고.

 

그런데 결코 조용하다고는 할 수 없는 축제라, 아기들 귀는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한다.

물론 F1 그랑프리처럼 귀를 파괴해 버리는 소음은 아니지만 아기의 청각에 대해 잘 모르니 괜히 신경쓰인다.

나 역시 한국사람이라 그런지, 아기에 있어서는 쓸데없이 애지중지, 과보호하는 민족성이 깊게 스며들어 있는 걸까.

머리로는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는 거 알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만큼의 과보호로 빠지는 경향이 있다.

 

아기 분유타는데 개량 숟가락 위로 분유가 솟아나왔다고 날 아기 살해자처럼 노려보던 그 날의 일은 죽을 때까지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아기 크면 나중에 말해줘야지. '내가 니 분유를 5g 정도 더 타서 배불려 죽이려고 했는데 니 아비가 막아내는 덕에 아직 살아있는 거란다'

 

 

 

점점 해가 지고 있어서, 사람들은 어둠이 가져다주는 흥분의 마약에 점점 취해갈 준비를 하는 듯 하다.

본인 역시 인생 절반을 야행성으로 살아왔지만 요즘엔 사진 찍는다고 밤이 점점 힘들어지는 느낌.

삼각대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런 북적이는 곳에서 삼각대 척 펼쳐놓는 야만스러운 짓은 할 수 없으니까.

 

통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듯, 막 해가 지려는 이 때가 참가자들의 피로도가 올라가는 시기일 듯.

 

 

 

체력적으로 힘든 축제이긴 하지만 자발적 참여라는 플러스 요소 덕인지 다들 싱글벙글하다.

축제 시작된지 2시간이 넘어가고 있지만 도로는 여전히 쓰레기 한점 없다.

마츠모토가 원래 물 좋고 공기 맑은 곳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이름값을 지키려 하는 것인지 원래 깨끗하긴 한데

이런 대규모 축제에서도 바닥이 이렇게 깨끗하다는 건 정말 본받아야 할 점이다.

 

세상에 전부 나 같은 사람만 있다면 쓰레기 무단투기는 없어질 텐데.

이건 자만이 아니고, 본인은 평생 살면서 쓰레기 무단투기를 해 본적이 없다.

대신 나 같은 사람만 있다면 이런 축제는 존재하지도 않겠지만.

 

날이 어두워지니 미리 준비해놓은 대형 라이트가 도로 곳곳에서 불을 밝힌다.

도심이라 밤이 되어도 어지간히 불빛이 남아있긴 해도, 축제 특성상 최대한 밝은 게 안전할 테니까.

 

 

 

나처럼 평생 처음 축제를 체험하는 외국인들에게야 1년에 단 하루 4시간의 축제라

놓치기 힘든 순간의 연속임에 틀림없겠지만, 대부분의 참가자들에게는 그냥 일년에 한번 주기적으로 열리는 놀기좋은 날일 뿐.

 

축제 기간엔 노점상들이 장사 휘어잡는게 보통인데, 이 축제는 도시 인구만큼이나 관광객이 찾아오는 초대형이라서

도시 곳곳의 가게들 역시 미어터지는 사람들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우렁찬 함성소리를 반찬 삼아서 스테이크를 썰어먹는 기분은 어떨런지. 사진 왼쪽의 가게는 '가스트'라는 패밀리 레스토랑이다.

 

미리 먹어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게, 음식점은 물론이고 편의점란 편의점도 줄이 장난이 아니다.

사실 반 정도는 화장실 사용하려고 대기하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날씨가 좀처럼 시원해지지 않는 것은 이 사람들이 발산하는 열정 때문인가 싶기도 하다.

 

 

 

1년에 단 하루의 여름밤 축제가 슬슬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다.

이미 3시간 넘게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춤추며 행진한 사람들의 얼굴엔 땀이 흥건하다.

하지만 노래가 끝나고 휴식시간을 알리는 안내가 흐르면 점점 더 활기찬 얼굴로 아이스박스에서 맥주와 음료수를 꺼내 든다.

 

춤 출때 보다 휴식을 즐기며 삼삼오오 모여있는 모습이 더욱 동질감 느껴지는 듯 하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내 주위엔 이런 데 뛰어들어 화기애애할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시원하게 한건 했다고 만족스러워 하는 저 모습은 순수하게 부럽고 동경하는 장면이다.

 

대구 치맥축제라는 괴이한 이벤트가 잠깐 생각났는데

먹이 받아먹는 동물처럼, 불볕더위에 한참 줄서가며 공짜 맥주와 치킨 몇조각 얻었다고

그렇게나 환한 미소를 띄우며 의기양양해 하던 젊은이들 모습은 별로 동경스럽지 않았다는 기억이 난다.

 

 

 

안내방송에서 시상식 이야기도 나오는 걸 보니 이 축제에도 팀별 시상을 하고 있는 듯 하다.

대부분의 팀들이야 상 받으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만.

 

대규모 축제 때야 사람들 많이 모이는 건 익숙한 모습이지만

딱히 다른 이벤트가 없이, 마을 사람들이 춤 추는 것 하나만 이루어지는 이 축제가

이렇게까지 바글바글한 것은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통과의 단절을 쿨하고 시크한 것으로 여기는 한국에서는 뿌리내리기 힘든 형태의 축제인데

사실 한국도 일본만큼이나 자기가 사는 마을에 대한 소속감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쿨하고 시크해봤자 그딴 허세는 조금만 흔들리면 날아가버리는 연기같은 녀석이니까.

 

 

 

처음 축제가 시작될 때는, 춤이 그렇게까지 과격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약간 김이 빠졌는데

언뜻 짧아보이는 4시간의 축제동안 이렇게 계속 춤을 추는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닌 듯 하다.

 

물론 축제 자체의 난이도는 여느 다른 축제에 비해 낮은게 사실. 대부분의 축제는 특정 행사를 중심으로 하며

그 행사는 무거운 물건을 들고 으쌰으쌰하는 경우가 많아서 마을 장정들이 특훈을 거친 후에야 겨우 완료할 수 있을 정도니까.

그에 비해서 이 축제는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겠지만, 그 덕에 남녀노소 모두 참가할 수 있고

몇몇 젊은 팀들은 안무 동작 자체를 거창하고 과격하게 바꿔서 상당한 체력을 필요로 하는 식으로 바꿔 놓기도 한다.

 

축제를 즐기면서 체력이 떨어지고 피로해 진다고 해도, 아마 기분이 다운되는 일은 없을거라 생각한다.

학생 때 하드락이나 핌프 등의 막나가는 언더 공연에서 신나게 흔들어 본 적이 몇번 있는데

셔츠를 짜면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어깨동무하며 뛰어다녀도 피곤해서 괴롭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었다.

그렇게 운동을 하라고 하면 입에서 육두문자부터 튀어나올텐데.

 

 

 

일본의 거대 체인 '이온'에서도 당연히 참가했다. 다른 팀들보다 복장이 전통스럽다.

주부 되는 분이 아기를 안고 춤추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

 

이렇게 행진하며 추는 춤은 옆에서 바라볼 때와 직접 참가할 때의 느낌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예전 아오모리의 축제 때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는데, 이렇게 대열 맞춰 동료들과 함께 조금씩 조금씩 전진하다 보면

의외로 뭔가 뿌듯하고 내가 지금 앞으로 나아가고 있구나 하는 긍정적인 마인드가 생기는 듯 하다.

 

 

 

축제의 끝이 다가올수록, 날이 어두워 질수록 사람들은 더욱 힘이 날거라 예상한 것이 틀리지 않았다.

원래는 이 팀도 최소한 줄은 맞춰서 춤을 추고 있었는데, 떨어지는 체력을 마치 외부 인자의 공격이라 느끼는 듯이

그것을 떨쳐내 버리려고 더욱 더 큰 소리를 지르며 방방 뛰기 시작한다. 것도 줄 같은거 맞출 필요도 없이 서로서로 뭉쳐서.

 

이게 바로 축제지 하는 느낌. 사실상 미쳤다고 해도 틀리지 않은 한국의 광폭한 축제에 비하면

이제까지 좀 차분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것도 아니었는데, 슬슬 이사람들도 감정에 몸을 맡기기 시작하는가 보다.

물론 다음 음악이 흐르면 빨리 앞 팀을 후다닥 따라가야 뒤쪽 팀에게 폐가 되지 않으니 서두르긴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 나처럼 구경하는 사람들도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니, 축제는 역시 좋은 스트레스 해소거리.

 

약 30분간의 도돌이 노래가 끝나면 비로소 사람들이 부채를 든 손을 내리고 휴식에 들어간다.

축제라는 게 노동이 아닌 이상 휴식이라고 정의하기엔 조금 낯설은 분위기.

그리 힘들지 않은 동작을 멈췄다 뿐이지, 노래가 멈추자 다들 참았던 말을 쏟아내듯이 동료, 가족들과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진다.

 

뒤에서 따라오는 서포터들에게서 음료수 받아 마시고, 쓰레기 역시 뒤에 달린 비닐 봉투에 잘 담는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오히려 이 휴식시간이 마츠모토 시내가 더욱 활기넘치는 시간이라 할 수 있는데

춤이 진행되는 동안엔 도로를 건너갈 수가 없어서 인도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반쯤 고립되어 버리기 때문.

 

춤이 끝나면 신호 대기하던 사람들이 앞으로 나오듯 물밀듯이 도로로 쏟아져 나온다.

나 역시 4시간 동안 이 쪽에서만 서 있기는 지루하니 어디로든 가 보려고 길을 건넌다.

 

 

 

그냥 서있기만 해도 더운 8월 첫 번째 토요일이라 동작이 과격하지 않은 춤임에도 불구하고 힘든 건 힘든 거다.

아이들은 과연 축제가 끝나는 4시간 후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쉴 때는 최대한 쉬어줘야 다음 춤을 준비할 수 있다.

 

유치원생 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인데, 이런 아이들이 벌써 마을의 축제에 참가하며 땀을 흘리고

어른들은 휴식 시간이 되면 음료수을 갖다 주며 부채로 땀을 식혀 준다.

 

학교 다니는 도중에도 백년지대계라는 교육과정계획이 몇 차례나 바뀌는 줏대없는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마을의 축제에 참가한다는 이미지는 상상하기도 힘들다. 그저 친구하고 놀 시간 있으면 학원이나 가야겠지.

 

 

 

사범이 한국 사람인 듯 하다. Lee's 태권도라고 적혀있는걸 보니.

한국인들에게만 가르치는 것은 아닐텐데 태권도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있는 모습도 참 특이하다. 기본 뼈대는 카라테에서 나왔으니.

 

도복 입고 춤추는 것도 신선할 듯 하다. 혹시 마지막 점프 동작에서 날아차기 같은거 시연하고 그러지 않나?

휴식 시간에는 당연히 일반인도 도로 쪽을 걸어다녀도 되는데, 왠지 춤추는 사람들의 공간 같은 느낌이라서

괜히 중앙으로 나가기가 겁이 나기도 한다. 좀 더 붙임성이 좋다면 쉬는 팀들 아무한테나 가서 수고했다고 해 주고 사진 찍고 하면 될 텐데.

 

 

 

두 번째 타임이 시작된다. 어지간히 장소를 이동했으니 좀 더 다양한 각도에서 사진을 한번 담아볼까 했는데

막상 중요한 사실을 까먹고 있었다. 이 춤의 행렬이 일본의 자동차 진행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건너편이든 이쪽이든 무조건 인도에서는 동일한 각도만 사진에 나온다는 점.

 

이걸 타파하려면 프레스 기자들처럼 과감히 도로 안으로 들어가는 수 밖에 없다.

아니면 건너편에서 반대쪽 행렬을 담는 신기에 가까운 촬영기술을 습득하는 수 밖에.

 

 

 

어디서 어떻게 모인 팀들인지는 모르겠지만, 회사나 기업체 팀이 아닌 동호회 분위기의 팀도 분명 존재한다.

하반신은 자유에 맡겨도 일단 어느 팀이든 통일된 복장 하나쯤은 갖추고 있는데

본인들은 뭔가 어필을 위해 만들었겠지만 도통 알 수가 없다. 기어 같이 생긴걸 봐서는 무슨 공대에서 나온 건가.

 

대체로 나이 좀 드신 팀은 조금 더 통일감이 느껴지고 일부러 힘을 넣으려 하지 않는 자연스러움이 느껴지는데

젊은 팀은 좀 더 과격하고 열정을 방출하고픈 의지가 느껴진다.

축제를 계승해야할 문화적 전통으로 여기느냐, 소속감과 해방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의 방출 장소로 여기느냐의 차이일런지.

 

 

 

춤추는 사람들 만큼이나 많이 인상깊었던 것이 뒤에서 따라오는 서포터들의 모습이다.

어떤 팀이든 반드시 서포터들은 동행하는 것이 규칙인 듯 한데

이온 음료에서부터 맥주까지 없는게 없다. 더운날 축제의 든든한 버팀목.

 

사진에 담긴 서포터는 독특한 컨셉으로 눈길을 끈다. 아무래도 욕조 비스무리한 걸 통째로 떼어온 듯 한데

공돌이 기질이 있는 건지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고 있다. 리어카 하단부에 모터라도 달린 걸까.

 

 

 

초등학교 학생 학부모 팀인 듯 한데, 아이들이 정말 신나게 노래부르며 춤추는 모습은 참 보기 좋다.

묘하게 촌티나는 듯한 마츠모토 봉봉 노래도, 1시간 넘게 계속 반복되니 의외로 흥이 나고 리듬감이 느껴진다.

실제로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은 더욱 신명이 날 듯.

 

처음에 어색해 하던 사람도 익숙해 질 수록 더 크게 소리도 질러보고 동작도 크게 휘둘러 보고 하면서

그렇게 축제에 점점 물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녀노소 구분이 없다는 개념도 상당히 중요한 점이고.

할머니 할아버지들만 가득한 곳에 젊은이들이 가서 춤추기도 어색하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본도 기본적으로 야구가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이긴 한데, 요즘엔 축구가 무섭게 차고 올라오는 중이라고.

한국은 월드컵 열풍 후 국내 리그는 그만큼 빛을 보지 못했지만 일본은 매년 팬층이 두터워지고 있다고 한다.

 

저 유니폼 입은 그룹 역시 어느어느 축구 팀을 응원하는 사람들인 듯 한데, 응원에 익숙해서 그런지 목소리가 우렁차다.

춤 추는데 목소리가 왜 필요한가 싶을수도 있지만, 마츠모토 봉봉이라는 노래의 후렴구에 '봉봉~' 이라는 후렴구가 들어가기 때문에

그 때는 도시 전체가 따라부르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참고로 '봉봉'이란 마츠모토에서 옛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어린 여자아이의 행사.

실제로는 죽은 사람들의 영령을 달래는 애상깊은 행사였는데, 40여년 전부터 나가노현이 마을 부흥을 목적으로 관광객 유치를 위해

이런 식의 축제를 기획할 당시 마츠모토에서 잘 알려진 '봉봉'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더더욱 참고로 '봉봉'이라는 여자아이의 행사에 대응하는 남자아이의 행사는 아오야마사마(青山様) 라고 하는데

현재 마츠모토 봉봉 축제의 주제곡은 여성 가수 한소절 남성 가수 한소절로 돌아가며 부른다. 이 역시 유래된 행사에서 파생된 것.

 

 

 

축제 참가자들이야 각자의 유니폼이 있으니 딱히 튈 일은 없지만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은 또 그네들 나름대로 화려한 의상쇼를 즐길 수 있다.

 

아이들이야 뭐, 부모들이 정성들여 입혀놓은 유카타로 공주님이 되는 날이기도 하고

5살 정도 되어보이는 금발 외국인 여자아이가 유카타 입은 모습은 이쪽에서 대단한 화제라서

많은 사람들이 보물 쳐다보듯이 '귀여워~'를 연발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아청법이라는 개똥때문에 겁날만한 일이겠지만.

 

젊은 처차들도 이런 날 아니면 언제 한번 뽐내보겠느냐고 청초한 유카타에서부터 미니스커트 퓨전 유카타까지 한껏 멋부리고 왔다.

사람들 사진 찍는 행위 자체가 영 익숙하질 않은데다가, 이 정도 활발한 축제에서라면 사진 좀 찍자고 말 걸어도 크게 문제 없을듯 한데도

본인은 성격도 그렇고 실제로 흥미도 별로 생기지 않고 해서 그다지 담아온 게 없다.

 

 

 

춤을 추는 사람들과 때로는 순방향으로, 때로는 역방향으로 이리저리 움직이고는 있는데

앞서 언급했다시피 길을 건널 수 있는 시간은 춤이 끝나고 잠깐의 휴식시간 뿐이기 때문에

실제로 춤이 진행되는 30여분간의 시간동안은 자신이 속한 블럭 밖을 벗어나기가 힘들다.

 

하지만 축제라는 게 어디 그렇게 스스럼없이 진행되는 것일까. 축제가 가지는 본질적 야성은 일본이 한국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다.

쉬는 시간이 될때마다 본부석의 마이크에서는 쉴새없이 사람들에게 당부의 말을 읊어대고 있다.

춤 추고 있는 사람들 중간을 가로질러서 길을 건너는 일은 부디 삼가해 달라고. 자칫하면 사고의 위험성이 있단다.

 

하지만 본인도 이제껏 한 시간 반 가까이 정말 수도 없이 보아온 광경이라 좀처럼 통제가 되지 않는 모양.

것도 당연한 게, 축제를 즐기러 왔지 가만히 서서 춤만 바라보라고 온 게 아니니

30분 가까이나 자리를 움직일 수 없다는 게 좀처럼 참기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지나가는 사람들도 양심은 있어서, 노래와 노래 사이의 간주 부분 잠깐을 이용해 후다닥 달려가곤 한다.

한두 사람이라면 이 정도 배려로도 큰 문제가 없겠지만 마츠모토 시내에 마츠모토 인구보다 더 많은 관광객이 모이는 이 축제에서는

어떤 작은 행동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크기로 진화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래서 어떻게든 무단횡단을 막아보려고 노력하는 중.

 

 

 

인파에 휩쓸리다가 우연찮게 메인 루트와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피난을 오게 되었다.

다리를 건너서 좀 더 가면 마츠모토 성이 있는 거리인데, 오늘 축제의 메인 이벤트장이 역 앞과 성 앞이라

잘못 갔다가는 피눈물이 흐를 수 있어서 조심하고 있다.

 

마츠모토는 많은 미술관과 예술 공연 등 문화의 도시로 유명한 곳인데

그 중에서도 내가 인상깊었던 곳은 저기 노란색 건물이다. 시계 박물관이었는데 이곳 부유한 지주가 자비로 모은 콜렉션을 전시한 곳.

입장료도 싸고, 사진 좀 찍어도 되냐고 물어보니 상업적인 용도가 아니라면 괜찮다고 말씀까지 해 주시는 친절함 때문에 기억에 남아있다.

 

개인이 모았다고 하기엔 신빙성이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콜렉션이 소장되어 있는데

예전의 잘나가는 일본의 부자는 취미활동에서도 상상을 초월하는 편이었나 보다.

 

시끌벅적한 축제와는 별개로, 시냇가에 앉아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가족들, 혹은 끈적끈적한 연인들이 보인다.

시끄럽고 복잡한 축제일수록 이런 순간의 한적함이 더욱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하지만 아직 한참 남았으니 좀 더 힘을 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저 멀리 다리에 보이는 노점상가 쪽으로 이동해 본다.

가게들이 꽤나 길게 줄지어 서 있으니 뭐라도 맛있는 군것질거리 하나 입에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런데 너무 멀리서 보는 바람에 실수했다. 마츠모토 성과 너무 가까운 곳까지 와 버렸던 것.

이곳은 야외공연장도 설치되어 있고, 여하튼 인도와 도로의 구분까지 불가능할 정도로 인파가 몰려 있다.

 

휴식시간이긴 한데 이미 이동 자체가 힘들 정도로 사람이 가득가득하다.

이런 인파 속에서도 길 가다가 이웃 주민 만나서 친근하게 이야기 나누는 사람이 있는 걸 보면

관광객 유치를 위해 창설된 축제가 이제는 마을 사람들끼리의 친목 도모로도 훌륭히 작용하고 있는 듯.

 

대략 정신이 멍해지는 도로에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일단 증거사진이라도 남기자고 생각하며

손을 최대한 높이 들어서 한 장 찍어본다. 운이 좋아서 광각렌즈가 마운트 되어 있었기 때문에 쉽게 찍을 수 있었다.

 

 

 

어차피 4시간 동안 질리도록 춤추는 축제인데, 저 멀리 이벤트장에서는 또 댄스대회가 열리고 있다.

물론 창작무용이라고 할까, 남녀 둘이서 시시각각 변하는 기묘한 비트에 맞추어 예술적인 춤을 피로하고 있는 모습은

봉봉 댄스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니 공통 분모로 묶을 필요는 없겠지만.

 

프로급의 댄스 실력을 가지고 있는 팀들이라,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으면 재밌게 구경해 보겠는데

이미 마야 문명의 벽돌만큼이나 단단한 결속력을 가지는 인파의 벽 때문에 그런 생각은 일찌감치 포기한다.

 

 

 

이렇게까지 혼잡한 곳이라도 다시 댄스 타임이 돌아오면

어찌됐든 구경꾼들이 인도로 밀려나가고, 스무스하게 춤으로 돌아가는 묘한 풍경이 연출된다.

 

휴식시간 도중엔 중앙 안내소가 정말 눈코 뜰 새 없을것 같은 것이, 쉴새없이 미아가 된 아이들 부모를 찾고

쓰레기 버리지 말아달라고, 춤 추는 도중에 길 건너가지 말아달라고 호소를 쏟아내고 있으니 말이다.

쓰레기는 확실히 거의 버리지 않고, 버리더라도 회수율이 높아서 도로가 더러워지지 않는데

춤 추는 도중에 길 건너가는 행위는 사실상 막을 방법이 없는 듯 하다.

 

자동차 사이를 지나가는 일이 아니다 보니 사람들이 별로 위험하다고 느끼지 않는지, 스스럼없이 지나간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30~40분동안 기다리고 횡단보도를 건너라고 하면 지킬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같긴 하다.

 

이제 점점 어둑어둑해지고, 분위기가 점점 달아오르는 시기가 다가오는데

별다른 사고 없이 무난히 끝나길 바라며 행렬을 따라 슬금슬금 이동해 간다.

 

마츠모토는 나가노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지만 여행객들에게는 참 아담한 도시로 기억되기 쉬운데

숙박, 식사, 관광 등 모든 즐길거리를 역 주변에서 도보로 모두 해결할 수 있기 때문.

 

국보 마츠모토 성도, 빈지티 시계를 모아놓은 박물관도 모두 도보로 15분 이상 걸리지 않는다.

경기가 그렇게 좋진 않아도 여전히 넉넉한 숙박시설과 온갖 패스트푸드에서 고급 음식점까지 충분히 갖춰져 있고.

나가노현은 고원 목장에서 말을 많이 기르는 곳이기도 해서, 바사시(馬刺し)라고 하는 말의 육회도 유명하다.

 

거의 모든 호텔이 역 근처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걸어서 10분인 토요코 인은 오히려 다른 호텔보다 먼 편.

그렇지만 4시를 넘어가니 벌써부터 주위가 왁자지껄해 지는게 느껴진다.

그러고보니 마츠모토 시내 도로 전체를 보행자 천국으로 만든다고 했는데, 사람이 과연 어느 정도 모일런지 궁금했다.

 

축제 시작 30분 전에 장비 챙기고 밖으로 나와 보니, 이 축제는 본인이 상상했던 것과 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봉오도리라 불리는 일본의 축제는 죽은 사람이 돌아온다는 오봉(お盆)에 추는 춤이 축제로 발전된 것인데

회장 중앙에서 마을 남녀노소가 강강수월래처럼 빙글빙글 돌며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게 일반적인 방식이다.

축제에 먹을게 빠질 순 없으니 주위에 여러 장터가 생성되고

보통은 춤추는 사람이 30% 정도, 나머지는 구경하고 군것질하고 연애하고, 가끔씩 행렬에 들어가서 춤추고 나오는 식.

 

봉오도리는 축제의 분위기에 따라 댄서(?)들의 의상도 바뀌는데

팔의 스냅을 이용한 소박한 춤은 가랑이가 크게 벌어지지 않는 유카타를 입고 사박사박 움직이는게 일반적이지만

남자들이 많이 참가하는 박력있는 춤의 경우엔, 적당히 전통과 현실을 타협해서 반바지 비슷한 녀석을 입고 펄쩍펄쩍 뛴다.

위의 의상이 좀 과격한 봉오도리 축제에 사용되는 녀석.

 

 

 

결코 작은 도시는 아닌 이곳 마츠모토 시내 도로를 전부 통제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본인 머릿속에는 '구역별로 팀이 몇개씩 있어서, 각각의 덩어리를 이루어 돌아다니는 형식'을 생각하고 있었다.

 

축제 시작 전 처음으로 보게 된 대기자들의 모습은 상상과 크게 다르다.

팀이 나누어 진건 사실이다. 적게는 10명 정도, 많게는 100명이 넘는 팀들 대부분이 회사 직원이나 상점연합의 직원들.

물론 초등학교나 중학교 학생들도 와 있고, 대학교 동아리 팀들도 특색있는 복장을 하고 대기중이다.

 

내가 저지른 제일 큰 착각은 이 대열의 길이였는데, 덩어리 덩어리져서 끊어진다기 보다는

이 모든 팀들이 마츠모토 시내 도로 전체를 꽉 매우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쉽게 말해 축제 코스 전체가 사람으로 꽉 차 있고, 시작점과 끝이 없이 원형으로 계속 이동하며 돈다는 것.

 

1년에 한번 있는 축제라고 해서 규모가 클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자전거 여행중 즐겼던 아오모리의 네부타(ねぶた) 축제가 규모면에선 단연 큰 축제지만

거기는 사람보다 거대한 네부타 모형이 주가 되는 축제고, 오직 사람 몸만으로 즐기는 축제 중에서 이렇게 규모가 큰 녀석은 처음.

 

의외로 젊은 층의 참가도 굉장히 두드러지는데, 그 일본의 젊은 층들이 당당하게 춤판에 나온다는게 참 신기하다.

특히 뒷머리에 하츠네 미쿠 달고 다니는 저 사람은 더더욱.

 

 

 

이 사람들에게 축제는 공동체 유지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에

조금만 삐끗해도 광란의 아포칼립스가 펼쳐질 이런 축제에도 굉장한 결속력을 보인다.

참가 팀이 수십 개가 넘는데도 불구하고 같은 의상이 단 하나도 없다.

이건 분명히 참가신청 할때 의상 디자인까지 전부 공개에서 겹칠 염려는 없앴기 때문일 것이다.

 

축제 전부터 사람들은 이미 축제 분위기. 도로가 통로가 되고 원래 인도였던 곳은 군것질거리 가게가 차지하고 있다.

나처럼 축제 자체만 구경하러 온 사람들도 결코 적다고 할 수는 없어서, 거진 1:10 정도의 비율로 구경과 참가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앞에서 즐겁게 기념사진 찍고 있는 사람들은 '맥스 밸류'라는 체인점 직원들.

 

맥스 밸류는 한국의 그마트와 비슷한 대형 슈퍼로, 여행하면서 이런 대형 몰에 접근성이 보장된다면 그건 땡잡은거다.

비싸고 맛난 가게만 찾아다니는 여행이라면 별 의미 없지만 나처럼 하루에 한두 끼는 꼭 편의점 도시락으로 때우는

헝그리 여행자들에게는 신의 은총이나 다름없는 곳으로, 음료수, 간식, 도시락 등등 모든 먹거리가 편의점보다 압도적으로 싸다.

 

맥스 밸류 정도만 되어도, 콜라 1.5L 한 병에 98엔, 한국 돈으로 1천원이면 살 수 있고

한국에서 5천원은 족히 받을만한 빵빵학 도시락도 180엔이면 충분하다. 저녁 떨이시간이라면 100엔에도.

 

 

 

축제란 게 전통의 한 부분이긴 하지만, 특성상 전통에 대해 많이 관대하기도 하다.

잘 차려입은 전통 의상도 있는 반면 그냥 평상복 차림으로 아이들과 함께 준비중인 팀 역시 보인다.

도무지 정체를 알 수가 없지만 일단 검은 셔츠에 핫팬츠 비스무리한 옷으로 통일한 여자사람들은

나보다 늙어보이진 않아도 대부분 애 딸린 유부녀인듯 하다. 그냥 동네 미시 동호회 같은 것인가.

 

 

 

힘이 넘치는 젊은 사람들이야 판만 벌여주면 알아서 뛰어 노는 법이겠지만

울 엄니보다도 확연히 연세를 더 드신 분들이 같은 의상 입고 가지런히 정렬해서 출발을 기다리는 모습에서는

축제의 순기능 중 가장 멋진 것중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39년 전 마츠모토 봉봉 축제가 처음 시작되던 때 부터 춤을 추던 아가씨가 여전히 이 안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

자발적으로 참가할 수 있는 정신적, 물질적인 여건이 마련되어야 가능한 이런 대규모 축제는

그렇기 때문에 이미 이웃간 네트워크가 완전히 무너지고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일에만 붙잡혀 있어야 하는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강변에서 술판 벌이고 흥겹게 춤추는 아줌씨들의 모습이 이거보다 더 가치 낮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문제는 대규모 축제에서 필연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이웃, 동민, 구민, 시민들간의 연계감을 전혀 발전시킬 수 없다는 것.

이런 축제를 한국쪽에서 보며 툭하면 나오는 소리가 '단체의식 쩐다'느니 '쌓인게 많으니 저렇게 놀지'라느니 하는 말인데

한국처럼 철저하게 고립화 된 사회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 거 참 신기하긴 하다.

 

 

 

하기 싫은데 억지로 나왔다기보다는,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춤 연습에 몰두하는 사람들 보니

이 축제가 정말 재미있긴 재미있나보다. 확실히 옆에서 구경하는것보다는 직접 뛰어드는게 축제의 참맛이긴 하다.

 

도로엔 축제 참가자들, 인도엔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바글바글해서

방향 감각도 잃어버리고 촬영 스팟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듯 하다.

프레스 자격증을 가진 기자들은 개인용 사다리까지 들고다니며 사진 찍을 준비에 한창이다.

 

확실히 건물에 올라갈 수가 없으니 이 정도 인파를 제대로 담으려면 사다리가 필요할 듯.

물론 본인은 프레스가 아니니 그런 거 써가며 통행을 방해할 수는 없다.

DSLR 모양을 하고 있지만 LCD 라이브뷰 촬영이 가능한 모델이니 그냥 손을 위로 쭉 쳐들고 찍어보는 수 밖에.

 

 

 

이런 곳에서는 워낙 사진찍는 사람이 많으니 부담을 좀 덜 가져도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이런 축제 속에서도 한두 사람만 클로즈 업으로 잡아내는 건 좀 부담스럽다.

사진에 사전허가가 필요하다면 매체가 가지는 속성의 태반이 무의미해 지긴 하겠지만.

 

이런 대규모 축제를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담아야 할지 조금 난감하다.

지금이야 해가 지지 않았으니 망원으로도 어지간히 버티고 있지만

밤이 되고나면 어두운 조리개값을 가진 망원으로 활발히 춤추는 사람을 잡아내는건 꽤나 어려운 일이다.

필연적으로 광각이나 50mm 렌즈를 사용하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 지금이라도 망원으로 좀 잡아보려 한다.

 

 

 

마츠모토 역 앞에는 본부가 마련되어 있나보다.

도로 옆 스피커에서 들뜬 듯한 여성 사회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인파때문에 이동이 힘들어, 거의 숙박하는 호텔 앞 도로에 박혀있는데

마츠모토 역 앞이나 마츠모토 성터 앞에는 따로 이벤트장을 마련해 두고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고 한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 축제는 어마어마한 인파의 홍수를 구경하는 맛이니, 딱히 이벤트장에 신경을 쓸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높으신 분의 이야기가 대충 끝나고 슬슬 축제의 시작이 다가오는데, 첫 환호성을 생각만큼 열정이 묻어나오지 않는다.

축제라는 건 시간에 흐르면서 점점 달아오르는 불판 같은 녀석이니

아직 달아오르기 전의 시작 환호성은 역시 약간의 어색함과 우물거림이 뭍어나올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사하라 사막 마라톤 같은 경우엔, 세상물정 모르는 참가자들이 첫 스타트때 아주 미친듯한 아드레날린 분비를 경험하지만

몇 시간만 뛰다 보면 에라이 F 같은 세상 하면서 고통에 찬 레이스를 이어갈 수 밖에 없는 것과 상당히 대조적인 장면.

 

 

 

바글바글한 마츠모토 시내 전체에 울려퍼지는 음악에 맞춰 사람들이 뭔가 동작을 취한다.

익숙한 건지 연습을 한 건지 전혀 스스럼없이 동작을 이어가는데

여느 봉오도리 음악과 달리 뭔가 마징가Z 오프닝을 듣는 듯한, 묘하게 촌티나는 음악이 반복 재생된다.

 

시작한지 39년 째라고 하니 역사적 의미가 있는 축제는 아니겠고

그 당시 만든 음악을 아직까지 쓰고 있는거 아닌가 싶다.

음악 나오면 실실 쪼개는 현지 사람들이 있는걸 보면 쫌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것도 아닌 듯.

 

마츠모토 봉봉의 음악은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으니 흥미가 동하는 사람은 한번 들어보는 것도.

 

 

 

아이들은 반응이 명확해서 좋다. 어른들은 대부분이 회사나 상가연합 소속의 참가자들이라

한국보다 훨씬 고착화된 사회적 입장이라는 게 자연스럽게 발휘되다 보니

어른들의 얼굴은 미우나 고우나 웃고 즐겨야 하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는 듯 한데

아이들은 반쯤 그냥 따라나와서 시간이나 때우는 무료한 얼굴, 나머지 반은 상당히 재미있어 하면 손동작을 크게 휘두르고 있다.

 

참가 인원만 약 3만명, 관광객까지 모두 합하면 20만명이 넘는 대규모 축제라

음악이 흐르고 사람들이 꿈틀꿈틀 움찔움찔하며 슬금슬금 이동하는 모습은 뭔가 살아있는 생물체같은 느낌을 준다.

폄하의 의도는 없고, 왠지 문득 유명 SF 소설 '듄'의 샌드웜이 생각났다. 왜 그랬을까.

 

 

 

나가노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규모가 큰 축제라고 하니

외국인 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사실 나 역시 외국인이고.

 

원래 예정대로라면 이 날 키소로 향해야 했기 때문에, 나에게 있어서 이런 축제는 있는줄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

규모를 보니 '놓치면 아까웠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키소 여정을 연기한 소심쟁이가 용납되는 건 아니라 본다.

 

 

 

춤도 대낮 광장에서 혼자 발광하는 것 보다

어두운 나이트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부비부비 하는 것이 훨씬 마음 가볍고 흥겨운 것 처럼(본인은 경험이 없어서 그냥 그렇다고 말만 들었지만)

아직 주위가 많이 밝아서 사람들의 리미터가 해제되지 않았다는 기분이 든다. 살짝 어색한 느낌이 동작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곳 단체들 상당수는 지금도 '참가자 모집중'이라고 푯말을 들고 다니는데

이런 축제는 참가자 제한을 둘 필요가 없기 때문에, 구경하다가 재미있겠다 싶으면 그냥 뛰어들어가 인사 하고 같이 춤추면 된다.

그리고 각 팀마다 반드시 후미에 커다란 박스를 끌고 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절반은 팀원들이 중간중간 마시는 음료수들이고, 절반은 쓰레기 담기 위한 통이다.

 

 

 

준비성이라고 할까, 시민의식이라고 할까.

동작이 그렇게 화려한 춤은 아니지만 어쨌든 4시간 동안 계속되는 축제인데다

자정이 넘어도 좀처럼 30도 이하로 내려갈 생각을 않는 8월의 살인적인 더위에

조금이라도 팀원들에게 활력을 주기 위해 아이스박스나 얼음 가득 채운 박스 등을 준비한 모습은 감격스럽다.

 

사실 축제 시작하기 전에 사회자가 가장 먼저 언급한 것도 쓰레기 나오지 않는 멋진 축제를 만들어 보자는 문구였으니.

관광객들 중에는 근처 마을에서 놀러온 사람이나 외국인 관광객도 있지만

아웃사이더 티를 내고싶어서 견딜수가 없는 중2병 양아치들이나, 여자나 좀 꼬셔보려고 두리번거리는 녀석들도 많이 있어서

인도에 가끔 보이는 쓰레기는 아마도 그들이 아무렇게나 버린 것들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점 하나는, 축제에 참가해 춤을 추는 팀원들은 절대로 쓰레기를 바닥에 버리지 않는다는 점.

 

 

 

팀들이 대열을 따라 끊임없이 이동하는 형식이라서

이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어쨌든 참가 팀은 다 둘러볼 수 있긴 하다.

하지만 춤을 추는 건 꿈도 꾸지않는 소심한 본인이라도, 그렇게까지 지루한 축제를 보낼 수는 없다.

 

막 시작했기 때문에 아직 좀 어리둥절하지만, 봉봉 댄스에는 전혀 관심없이 맛있게 군것질중인 사람도 있는 걸 보면

뭘 하든 자기가 즐기기만 하면 만사 OK 라는게 축제의 본질이라는 느낌이 세삼스럽게 든다.

이미 이 사람들에게는 봉봉 댄스가 그렇게 희귀한 볼거리도 아닐테고 하니

축제를 핑계로 꼬치구이와 맥주를 즐기는 한량틱한 모습 역시 축제의 일부분이라 할 만 하다.

 

원래 봉오도리에서는 여성의 춤이 주를 이루기도 하고

많은 사람이 대열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춤을 이어나가려면 자연스럽게 이동폭이 좁게 설정되는 편.

 

특히 마츠모토를 가득 채운 이 행렬은 마치 군대 행군과 같아서

실수로 대열간 간격이 조금 흐트러지면 다음 노래에서 100m 스퍼트 하듯이 튀어나가야 하는 부분이 반드시 생기게 된다.

 

이건 노래와 춤의 특징이기도 한데, 마츠모토 봉봉에 쓰이는 안무는

2분 남짓한 노래의 특정 부분 몇 초 구간에서만 앞으로 서너 걸음 전진하도록 되어 있고

나머지는 거의 흔들흔들하면서 한두 걸음 갈까말까 하는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앞 팀과 거리가 벌어지게 되면 그 몇 초 구간에서 아주 튀어나가야 하는 재미있는 모습이 펼쳐진다.

 

 

 

노래의 마지막 부분은 점프로 마무리가 되는데, 2분 남짓한 짧은 노래가 약 30분간 계속 반복되기 때문에

그리 체력을 요하는 동작이 아니라고 해도 전혀 힘들지 않은 수준은 아니다.

 

특히, 30분 춤춘 후 5분에서 10분 정도 휴식을 취하고 다시 춤을 추는데, 이걸 4시간동안 반복하다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런지.

축제란 몸이 힘들고 목이 마르고 끝이 다가올수록 점점 그 야성적인 본능이 살아나는 것이다.

분명 뒤로 갈수록 카메라를 잡은 나의 손은 떨리겠지만, 부채를 흔드는 팀원들의 얼굴에는 주체할 수 없는 활기가 보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