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까지 2주 정도밖에 남지 않은 날.

1년간의 자전거여행 도중 3번씩이나 같은 길을 다닌 것은 이 코스 밖에 없었다.

하지만 후지산이 보일 정도로 날씨가 좋았던 날은 적은 딱 한번 뿐.

 

덤덤하게 자전거를 세우고,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고, 망원렌즈의 구도를 잡기 위해 10미터 정도 뒤로 걸어간다.

여행의 마지막 즈음에 간신히 보게 된 풍경이지만 사실 마음속엔 감격이나 황홀함이나 그런 느낌은 없었다.

그냥 단지 이게 마지막이구나 하는 묘한 아쉬움이 카메라를 무겁게 만드는 느낌.

 

주섬주섬 카메라를 집어넣고 나서 달리는데, 맞은편에서 비슷한 행색의 자전거 여행자가 달려온다.

같은 자전거는 아니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전륜 후륜에 가방을 4개 달아놓은, 땀에 절은 모습의 여성 여행자.

여행중 남녀 함께 다니는 자전거 여행자는 몇번 봤지만, 혼자서 달리는 여성은 처음이다.

해외로 나갈게 아니라면, 일본인이 일본 국내에서 자전거여행 하는데 가방을 4개 달고 달리는 경우는

거의 100%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장거리 여행 초보.

아님 나처럼 카메라에 큰 비중을 둬서, 거대 DSLR과 렌즈 서너개를 넣고 달리는 묘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라거나.

 

슬쩍 보니 옷은 동네 슈퍼 나갈때나 입을 법한, 한적한 반팔 투톤 티셔츠. 면 소재라서 땀으로 진득할 터.

본인 나이도 기억 못하는 성격이라서 남들 나이대 추정에 매우 어려움을 겪는 터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많아봤자 20대 초반인 듯 하다. 치장없는 단발머리에 가벼운 옷차림으로는 고등학생처럼 보이기도 하고.

 

마주달리고 있으니 체감 속도는 약 20km/h 정도?

서로의 얼굴을 인식할 정도의 거리에 들어서자 거의 동시에 서로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나나 그쪽이나 얼굴에 미소 하나 없는 표정으로

동족 여행자에 대한 반가움이나, 여지껏 달려왔던 무용담에 대해 털어놓고 싶어하는 근질거림 따위는 한 치도 보이지 않는

그런 무표정한 얼굴로 가볍게 목례 한 번.

 

10억초를 넘는 인생중 단 1초동안 나눈 그 인사는, 아마 평생 두번다시 겪을 일이 없겠지.

혹여 만날 일이 있다고 해도, 이미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은 그 사람이 어디 쯤에서 하룻밤을 묵게 될지 대충 예상이 가고

또한 돌아올 때, 반대 방향에서는 보이지 않던 저 후지산을 보고 다시 한번 신선한 느낌을 받을 거라는 예상이 간다.

 

여행의 인연이란 이렇게 일방적이면서도, 그 1초의 만남조차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화석과도 같은 것.

어지간하면 생일같은거 기억 못하는 성격임에도 꽤나 쉽게 기억되는 본인 생일날

이런 추억이 문득 떠오른다는 것, 스스로에게 주는 멋진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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