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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0.20  동해안 자전거여행 2편 14
  2. 2011.10.18  동해안 자전거여행 1편 23

망상(望祥) 이라는 지명은 처음 들었을 때 부터 마음에 든다. 정확한 뜻은 몰랐지만 아마도 '좋은 일이 있길 바라다' 정도일까.
은근슬쩍 해가 저물무렵 간단히 씻고 편의점에서 물과 빵으로 배를 채우고 텅빈 주차장 근처에 텐트치고 들어갔다.

정동진도 그랬듯 동해안 일출이 참 좋다고 해서 기대하며 잤는데, 왠걸 일어나보니 7시 반이고 해안가엔 안개가 끼어있었다.
그래도 꽤나 유명한 해수욕장이라는 곳인데 그 넓은 주차장에 단 한대도 차가 없어서 임금님 기분으로 편한하게 자긴 했다.

쭈욱 동해안만 달릴테니 언젠간 보겠지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나섰는데, 사실상 단 한번도 일출을 보지 못했다. ㅡㅡ;



12시쯤 밥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는데 스티브 잡스가 떠났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시대의 풍운아가 사라지는구나.
꾸역꾸역 갈비탕을 먹으며 지금쯤 인터넷에선 잡스 추모와 함께 잡스 그게 뭐 대수냐 인간 말종 등등의 대립이 재미있게 벌어지고 있으리라 예측해 본다.
다른건 둘째치고 난 그저 다시는 볼 수 없는 잡스의 다음 아이팟과 아이맥, 아이패드와 아이폰이 아쉬울 따름.

삼성에서는 어느 누가 사라져도 그 다음 제품에 대한 아쉬움 같은 건 없는걸 보면 잡스라는 인물이 가지는 상징성은 대단한가 보다.


편하다고 할 정도는 아닌 업다운 코스가 주욱 이어지지만 난이도로 치면 중하 정도의 수준이다.
다른 블로거들이 치를 떨었다던 두 개의 긴 터널도 통과하지 않고 옆길로 세어 나왔으니.
애초에 신 7번국도는 어쩔 수 없는 코스가 아닌 이상 달릴 생각이 없었고
쭈글쭈글하고 봉긋봉긋한 코스가 대부분인 해안가 도로, 즉 구 7번국도를 계속 달려서 그런지
자동차도 별로 없고 사람도 별로 없는 한적한 코스가 대부분이더군.

망상해변을 지나고 나서는 어촌마을 어귀도 간간히 나타난다.
해수욕장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큰 모래사장은 아니지만 갈매기들에겐 좋은 휴식처인가 보다.


차를 세워놓고 내려서 구경하는 사람들도 몇 있지만 
누구 하나 모래사장으로 내려가려는 사람은 없어서 갈매기들도 느긋하다.
여름엔 아마도 북적대는 인파에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새우깡 한 조각에 위안을 삼곤 했겠지.


날씨가 더 추워지면 어디론가 이동하는 것일까.
망원렌즈를 망원경 대신으로 쓰면서 한참 동안이나 얘네들의 느긋한 모습을 즐겼다.


해안가뿐만 아니라 바위섬에도 갈매기는 수두룩했다.
어느 쪽이 더 먹이 잡기가 쉬울까.


해안가의 구멍가게 앞에 강아지가 있었다.
한 걸음마다 눈동자에 들어오는 모든 새로운 것이 신기하기만 한지
움직임과 눈빛에서 녀석이 가진 호기심이 마구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겁은 많은지 차만 지나가도 깜짝 놀라며 도망가더군.


별로 안 닮은 것 같지만 일단은 어미인 듯 하다.
좀전까지의 호기심과 두려움이 섞인 모습과는 달리 그야말로 편안한 움직임으로 바뀐다.
털끝에서는 긴장감이 사라지고, 어미 냄새를 맡은 콧잔등은 기분좋게 풀어지겠지.

주인장으로 보이는 할아버지도 계시길래 말 걸고 만져볼까도 싶었지만
이런 흉폭한 귀여움으로 무장한 녀석을 만기지 시작했다간 오늘 여행은 종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피사체는 피사체로 남겨두자고 스스로 위로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까막바위 버스정류장 앞엔 오징어가 진득하게 말라가고 있다.
맞은편엔 회 백화점이라고 개인적으로 명명한 거대한 수산시장이 서 있었다.
주차장도 넓직하고, 좀처럼 관광객이 걸음을 멈출만한 장소는 아닌 듯 한데 왜 그럴까 싶더라.

아마도 정류장의 이름인 까막바위가 일등 공신이겠지.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지 않고서는 그저 조금 크고 기묘한 모양의 바위일 뿐이지만
이곳 묵호항 주변 토박이들에게는 그들의 인생에 오독하니 자리잡은 역사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겠지.

해녀들도 원래 이곳 근처에는 가지 않는단다.
그리고 서울 남대문에서 정동방향에 위치한 곳이라고도 한다.
정동진이 워낙 인기가 있어서 그런 것도 잘만 어필하면 관광상품이 되나 보다.


까막바위는 그 이름과 전해지는 이야기가 그다지 연관성이 없는걸로 보아
바위 차제는 예전부터 신성시 되던 녀석인 듯 하다.

까마귀가 새끼를 치는 바위라는 이름인데
왜구의 침입을 물리친 어느 마을 지주의 혼이 문어화되어 밑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로 더 유명하단다.
그럼 맞은편 횟집에서는 문어를 팔지 않는가 궁금했는데, 먹으러 들어가지는 않았다.


나한테는 까막바위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래도 노릇하게 말라가는 오징어와
방을 잘못 잡은듯한 생선 한마리가 더 운치있게 느껴졌다.

어릴 적부터 포항의 친척집에 자주 놀러간 터라 말린 오징어는 그리 신기한 것도 아니지만
지역에 따른 차이점인지, 오징어 말릴 때 저렇게 세로로 작대기 꽂아놓은 건 조금 신선했다.

삼척 근처로 자전거를 모는데, 자전거도로란 건 거의 이름뿐인 허울인 듯 하다.
도로 상태도 형편없어서 그냥 자동차도로 쪽으로 나가는게 훨씬 편할 뿐더러
그 자동차 도로조차도 갓길 쪽엔 모래와 자갈, 쓰레기, 부서진 자동차 부품 등의 지뢰밭이다.
결국 갓길도 아닌 자동차 도로 자체를 달릴 수 밖에 없는 곳이 대부분.

그나마 비수기인데다 신 7번국도가 만들어진 덕에 이곳 도로엔 차량이 거의 없어서 망정이지
제대로 차가 다니는 곳이었다면 상당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음이 틀림없다.

이건 자전거 도로라고 이름만 붙여놓고 대충 만들어 구색만 갖췄다고밖에 하지 못하겠네.


이러나저러나 산 넘긴 싫고 자동차랑 섞이기도 싫어 최대한 바닷가 쪽으로만 자전거를 몰다 보니
뭔가 익숙한 지형지물이 눈에 들어오는게, 중간부터 묘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조금 지나보니 머리를 탁 치게 되더군. 태어나서 유일하게 삼척에 온 기억은 예전 23사단 훈련소 뿐이니.
사격장으로 이동할 때 접한 조용하고 깔끔한 농촌 마을의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인생의 황혼기쯤엔 이런 곳에서 사는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
23사단 바로 앞엔 삼척 해수욕장도 있다. 모래사장 끝에서 끝까지 단 한사람도 없이 오직 나 혼자더군.


건너편 산자락에서는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나도 저쪽에서 화생방과 각개전투 훈련을 했었지.
훈련소 자체는 아늑한 숙소나 다름없었는데, 어디든 그렇듯이 개똥같은 조교 한두 마리가 귀찮게 했던 기억이 난다.

보충역 훈련인데다 원체 늦게 들어간 터라 조교들이 전부 꼬꼬마들이었는데
대구 출신의 그 네가지없는 색히는 참... 대구에서 만났다면 정말 공단 뒤로 끌고가서 숨만 붙어있을 정도로 아작을 냈을 텐데.

이러나저러나 훈련소 생활은 별로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그저 여행중 슬쩍 들렀다 가는 휴게소 같은 느낌이어서 아무런 감흥도 없긴 했지만
그래도 그때 느낀 삼척의 차분한 풍경은 상당히 인상깊었다.
이렇게 혼자 와 보니 그 차분함도 조금 쓸쓸해 보이는데
계절에 맞춰 깨어나는 식물들처럼 이곳도 그렇게 피다가 지다가 하는 것이겠지.



해수욕장을 지나 조금 귀찮은 언덕을 주욱 오르다 보니 넓직한 광장이 나온다.
이게 뭔가 했는데 비치조각공원이라는 곳이더군.

맞은편에 편의점도 있어서 숨이나 좀 돌릴 겸 해서 구경에 들어갔다.
가볍게 차 타고와서 염장질을 시전해 주시는 젊은 커플들의 모습이 참 아름답더군.


예술에 조예따윈 거의 없어서 그냥 촬영연습이나 하는 기분으로 셔터를 누른다.
마침 해가 막 저물기 시작할 때쯤이라 사진 찍기에 그다지 좋은 환경은 아니었네.


대부분의 조각들이 뭘 말하고 싶은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현대미술은 더더욱 일반인들에게 멀어지는 중이니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

제목을 하나하나 적어놓으면 아 이런 것이구나 할 수도 있지만
설명이 필요한 예술은 이미 그 시점에서 글러먹은거 아닌가.
그 전에, 애초에 한두 시간씩 감상해가며 뭔가 찾아내려는 마음가짐이 아닌 이상엔
이런 건방진 말을 꺼낼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저 관심 가는 조각이 없어서 마음이 휑했다고만 하지.


이런건 좋다.
히치콕이 생각나서.
아마 작가의 의도와는 한참 어긋난 감상 포인트겠지만.

비둘기가 아이 얼굴을 반쯤 파먹었다는 생각이 드니, 호러 매니아였던 본성은 숨기기 힘든가.


조각공원 근처에도 초소와 철조망은 여전히 선을 긋고 있다.
해외서 보면 한국은 정말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 놓인 국가일텐데
일본사람들이 지진에 익숙하듯 한국도 이미 익숙해져 버린 걸까.
아마도 이 상황을 악랄하게 이용해 먹는 추잡한 인간들 때문에 더더욱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일지도.


이 공원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조각.
왜냐하면 제목을 보기 전에 이미 짐작했던게 정확히 들어맞았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를 파악해 낼 때의 그 동질감이 참 마음에 들고 뿌듯하다.

제목을 말하진 않을테니 슬금 상상해 보길.


이쯤 되면 이건 조각 감상이 아니라 촬영 포인트 연습이다.


금속을 이렇게 주물주물한다는게 이 나이 먹고서도 참 신기하긴 하다.
조형적 특징까지는 그렇다치고, 저 군데군데 바랜 색상마저도 작가의 의도인 걸까.


삼척 해수욕장엔 한 명도 없는데 이곳엔 그럭저럭 차들이 왔다갔다 하더군.
편의점 건물 2층엔 멋져보이는 레스토랑도 있었는데 내부수리중이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대강 절반을 훨씬 넘는 수준으로, 내부수리중이란 팻말 붙은 음식점은 다들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어차피 먹지도 않을 거 괜히 부정적 추측으로 몰아갈 건 없지.

하루를 식당에서 식사 한끼, 컵라면 한개, 빵과 음료수 조금으로 때우는 여행임을 생각하면
이런 곳에서 맛나게 식사 해보는것도 괜찮을거라 기대헀는데, 수리중이라니 좀 아쉬운 기분이었다.

게다가 달려보고 알았지만 이곳은 동해라서 일몰이 그닥 멋있지가 않다.
자전거 여행은 하루의 시작보다 끝이 훨씬 감정적으로 흥분되기 때문에
멋들어진 일몰이 보이지 않는다는게 조금 의욕을 꺾고 있었다.


하늘에 돛을 열고 떠다니면 좀 더 부드럽게 스스륵 흘러갈것 같았다.


반대쪽 해안이었다면 얼마나 다른 풍경이었을까.
부드러운 그라데이션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에 맞춰
그 빛에 반사되어, 따뜻한 이불 속으로 들어갈 때의 나른하지만 기분좋은 색감으로 조용히 옷을 갈아입는 산과 바다의 모습은
아무리 찍고 찍어도 그 황홀함은 없어지지 않아서 매번 매번 감탄하곤 했었는데.

일출은 본인의 부지런함을 증명해 주고, 일몰은 본인의 하루를 위로해주는 느낌이라서 나는 일몰이 더 마음에 든다.


조각공원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소망의 탑이라는 스타게이트가 눈에 들어온다.
역시 동해안답게 일출시 해가 저 원안에 들어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밑도끝도없는 설명이 적혀있던데
인공 조형물에 그렇게까지 원념을 불어넣는것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의미를 가지고 만들어진 조형물이라면 몰라도, 의미를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조형물엔 관심 없다.


소망의 탑이라는 이름답게 손이 닿는 곳에선 전부 소원이 적혀있었다.
그닥 재미있는 소원은 없었는데, 그래도 이게 제일 마음에 들었다. 이 정도가 딱 좋지.

지난 번 해돋이도 실패했고, 엉덩이도 영 따갑고, 마침 언덕 위라 오늘은 좀 즐겨볼까 싶어서
소망의 탑 바로 옆에 있는 모텔로 보이는 곳에 스윽 들어갔는데... 사실 모텔이 아니라 호텔이었다.
들어왔는데 쫄아서 나가기도 뭣하고 갈팡질팡하다가, 친절한 여직원이 비수기에 혼자라 깎아주신대서
절반도 안되는 가격으로 투숙을 해 버렸다. 고맙긴 한데 방 안에 들어가보니 이렇게 으리으리한 곳인줄 몰랐다.

일본서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비즈니스 호텔에 묵었지만, 여긴 관광호텔이라 넓기는 무지하게 넓다.
룸 안에서 텐트쳐도 되겠더군.

기왕 이렇게 됐으니 빠듯빠듯한 휴대폰 베터리도 충전하고 욕조에서 신나게 목욕도 즐기고
메모장에 밀린 일기도 쓰고 최대한 나태와 사치를 즐기며 보냈다. 스마트폰 베터리 정말 빨리 닮더군.
예전 피쳐폰은 일본서 베터리 한개로 1주일도 거뜬했는데 이건 뭐 하루 꼬박 가면 많이 버틴거라니.

그렇게 호화스러운 호텔에서 방금 전 편의점에서 산 빵과 컵라면을 먹는 자신의 모습은 여전히 좀 소박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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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늦어지기 전에 자전거 끌고 대구로 내려가려고 나섰다.
강릉 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 주섬주섬 짐을 정리하고 출발.

출발 전엔 뭔가 상반되는 생각들이 자꾸 머릿속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1년이나 휘적휘적 떠돌아다니다 돌아와서 반년도 되지 않아 또 나간다는 건 역시 몹쓸 짓인것 같고.
그래서 여행이 아니라 자전거 회수라는 목적을 덮어 쓴 소박한 나들이라는 자기 합리화.
그리고 의외로 동해안 해안선이 자전거로 굉장히 힘들다는 수많은 블로그 포스팅이

상당히 이곳저곳 망가진 몸 상태와 맞물려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 낸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1년간 자전거를 굴려온 내가 동해안 도로를 못 갈 일은 없겠지만
여행 전의 정보 탐색은 뭐랄까, 적당히 겁 먹기엔 딱 좋을 정도라는 느낌?
워낙 고생했다, 업다운이 장난 아니다. 죽을 뻔 했다는 등등 수사가 많이 들어간 블로그가 많아서
대체 어느 정도의 난코스인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지.

장담하는데 나보다 짐 많이 얹고, 나보다 더 뚱뚱한 라이더는 없었을 거다.
짐과 내 몸무게를 합하면 100kg 가 넘으니.


1년간 자전거여행 해본 경험에 비추어 보면
10월은 축복받은 최고의 시기임에 틀림없다.
비는 적고 노숙하기에도 그리 힘들지 않은 날씨.

한적한 강릉 시내를 빠져나오니 예전 생각이 들어서 살짝 기분이 풀린다.
이젠 첫 페달을 밟던 그 때의 카타르시스가 느껴지진 않지만, 출발은 언제나 머리를 상쾌하게 하니까.

단지 살짝 오기를 부려서 카메라 장비를 좀 많이 가져온 터라
사진 찍다보면 '이번엔 좀 귀찮겠구만' 하는 생각이 자주 드는 건 사실.

모든 여행 하나하나가 다음 여행에서 덜 후회하기 위한 여러가지 실험의 일편이다.
그리고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런 여행만 하겠지.
그래도 하지 않는 것보단 덜 후회할거라고 언제나 생각하겠지.



해안도로를 살짝 달리다 보니 나타나는 강릉 통일공원.
이번 여행은 거의 완벽한 백지 상태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이런 공원이 있는줄은 전혀 몰랐다.
아마 라이딩 코스에서 보이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갔겠지.

15년전 한국을 경악시켰던 무장공비들이 침투시 사용했던 잠수정이 실물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다.
생각보다는 훨씬 컸다. 이게 전혀 들키지 않고 강릉 앞바다까지 잠행해 왔다니 허탈하다.


맞은편엔 퇴역함인 전북함이 전시되어 있다. 실물로 보는 함정이란 역시 대단하구나.
하지만 이곳 들어가려면 입장료가 필요해서 그냥 밖에서 감상하는 걸로 끝냈다.

미국에서 제작되어 한국으로 인도되고 1999년 퇴역한 함이라는데
최신함과 비교하면 뭔가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살아있는 느낌이다.
만재배수량이 3500t 이란다. 세계 최대의 항공모함인 니미츠급 조지 워싱턴호가 10만 4천t 이란것만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이걸 보니 그럼 니미츠급 크기는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군.

수치화된 데이터는 현실감이 없다는 걸 이 함정을 보니 세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서로 마주보고 전시되어 있기 때문에 재미있는 사진이 연출 가능하다.
아마 일부러 그랬겠지.

잠수정은 무기따윈 없기 때문에 실제 발견만 했다면 그 엄청난 사상사를 내지 않고 격퇴가 가능했을텐데...


잠수정 구경은 공짜라 내부로 들어가 봤다.
내 덩치로는 혼자 들어가도 거의 움직이지 못할 만큼 빡빡하다.
허리를 푹 숙여도 조금만 방심하면 머리를 박아버릴 듯.

하긴 2000톤급 잠수함도 내부는 한두 사람 겨우 줄지어 걸어갈 수 있을 정도였으니.
아, 이 녀석은 300톤급이다. 악에 받친 헝그리 특공대는 정말 무섭다.


이 녀석은 뭔가 싶었는데, 탈북한 북한 주민들이 사용헀던 배라더군.
이 정도라면 역시 들키지 않게 도망나올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서는 지구상의 어떤 피조물도 초라하기 그지없게 보이니.


통일공원내에는 편의점도 있어서 컵라면 하나 끓여먹고 푹 쉰다음 다시 출발했다.
출발하기 직전 일본 관광객을 태운 버스가 도착하더라. 가이드가 관광객들 앞에서 잠수정과 전함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굉장히 술술 쏟아져 내리는 일본어에 어울리지 않게 억양이 완벽한 한국식이다.

머리를 비우고 멍하게 들어보면 한국말 듣는 느낌이었는데, 물흐르는 일본어 설명과 함께 굉장한 괴리감을 느끼게 했었다.

다시 달리기 시작한 해안가 도로는 사방에 철책과 감시 초소가 서 있어서 과연 이곳이 한국이구나 싶었다.
바다 색깔도 조금은 다르다는 느낌이었지만, 어찌 보면 철책 자체가 관광 상품이 될 정도로 한국의 현 상황을 잘 나타내 준다.

느긋하게 달리다 보니 그 유명한 정동진이 등장.
관심이 없어서 그냥 지나치려는데, 해안가 쪽에서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계속 들려와 호기심을 자극한다.
심상치 않을 정도로 내지르는 괴성이라 뭔가 유명인이라도 온 걸까 싶어서 좀 망설이다가 방향을 틀어 정동진으로.

가 보니 보트 타고 있는 사람들이 내지르는 괴성이더군. 맥이 빠졌다.


무슨 드라마 촬영으로 유명해진 곳이라는데, 태어나서 처음 와보는 정동진은 그냥 적당히 넓은 해수욕장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미 명백한 비수기에 들어간 동해 해수욕장임에도 강릉 시내보다 사람이 더 많았다는 점이 나름 재미있었다.

끝나고 나서 이야기지만, 포항을 제외하고 어떤 곳에서도 이보다 더 많은 인파를 본 적은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산 위에 배가 놓여있길래 저게 뭔가 하고 유심이 쳐다보던 기억이 나는군.
스마트폰의 힘을 빌어 저 사공많은 배의 정체를 검색해 봤다. 꽤나 아이디어 잘 쓴 리조트라고 한다.
얼핏 다들 그렇게들 생각하겠지만 사실 배를 옮긴게 아니고 산 위에서 제작한 녀석이란다.

스마트폰 데이터량이 500m 인데다, 몇년간 동고동락한 나침반이 맛이 가버리는 바람에
지도 데이터를 자주 활용해야 하는 지금 상황에서 그런 데이터 검색은 좀 사치스럽긴 했지만.

이왕 자전거 안장에서 엉덩이를 뗐으니 슬쩍 한바퀴 둘러보기로 한다.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던 비명의 주인공.
한 번에 태울 수 있는 사람이 적어서 꽤 많은 인원이 대기중이었다.
중고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굉장히 많았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다. 휴일도 아닌데.


정동진에서 발걸음을 멈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게 해 준 것은
기쁨의 괴성도, 한량한 가을바다도 아닌, 빨래판같은 구름과 멋들어진 하늘색이었지.
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니 사실 저 곳이 진짜 바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변 중간중간에 놓여있는 흔들의자가 재미있었다.
이런 의자에서 흔들흔들 해 보는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난다.


흔들의자뿐 아니라 의자란 의자엔 전부 낙서가 빼곡하다.
이런 곳의 낙서야 뭐 애교로 봐줄 수 있으니 넘어간다고 쳐도
문화재나 자연 경관에까지 낙서해대는 행위는 참 꼴불견이지.

뭔가 동방신기를 좋아하는 중국 팬이 여기까지 온 모양인데, 정동진과 동방신기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고민 좀 해 봤다.
그리고 동방신기는 해체했나? 너무 보고 싶다니.

더더욱 의아했던 건 말끝마다 '우리' 동방신기.
동방신기 애들 할머니도 아니고 뭔 아기달래듯한 저 수식어는 뭘까.


재미있는 낙서 찾아다니는 것도 나름 신나는 일이다.
아빠를 장렬히 배신하는 자식의 낙서도 재미있고 (너네 엄마는 아빠거란다)
눈앞에서 운석이 떨어지는 지구 멸망 직전도 아니고, 평화로운 정동진에 와서
세삼스럽게 뭔 자아성찰인지 궁금했던 낙서도 재미있다.

혼자 여행해서 마음이 다잡아 진다면 난 이미 붓다와 술잔 기울이고 있을거다.
여행은 남는 거 없이 그냥 현재를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고,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건 못되먹은 버릇이라 생각.
아니 의미를 부여함으로 인해 여행의 순수성이 오히려 사라진다고 본다.

여행은 여행이고, 현대 사회에서 어떤 것보다 중요한 돈과 시간을 실컷 낭비하면서 얻는건 없는 비생산적인 행위지.
그러니까 거지처럼 움직이는 여행이라도 누구보다 사치스럽고 우쭐하고 배부를 수 있는 거다.


땀으로 범벅된 머리와 지끈지끈한 엉덩이를 식히며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정도가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만족감이 아닐까.

그리고 지랄맞은 병영체험 따위가 아니면 이런 사치는 돈으로 살 수 있는게 아니겠지.



바다쪽보다 한적한 반대쪽이 좀 더 보기 좋다.
사람이 없어서 더 그런 건지도 모르겠네.
정동진은 이 비수기에도 사람이 너무 많다. 만약 성수기였다면 돈 준다고 해도 오지 않을거다.


적당히 의미는 없어도 찍어놓으면 좀 있어보이려나 싶은 사진도 한번 찍어보고 해변가를 거닌다.


바다보다 상쾌했던 하늘을 다시 한번 올려다봐 주고 발걸음을 옮긴다.
오랜만에 탄 자전거라 그런지 역시 초반엔 엉덩이가 따끔하군.

내 몸상태에 뒤치지 않게 자전거도 사실 이곳저곳 성한 곳이 없다.
간단한 체크만 하고 튀어나온 터라, 타이어는 마모되어 민둥머리가 되어 있고
체인은 늘어나서 덜그럭거리며 100kg 가까운 무게를 지탱하는 터라 기어는 쉽게 변환되지도 않는다.

타이어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계속 덜컹거리며 위로 튀어 오르는 느낌이라, 이것만은 중간에 점검해 봐야겠다는 생각.
그러나저러나 15000km 를 달린 녀석이 타이어 펑크 한 번도 나지 않고 스포크 하나 부러지지 않은 걸 보면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정동진 바로 눈앞의 언덕은, 거리는 짧지만 엄청난 급경사다.
24단 기어를 최저로 돌려도 이 짐을 싣고서는 앞으로 나가지 못할 정도.
어쩔 수 없이 내려서 밀고 올라가는데, 그래도 좀 전에 봤던 사공이 많은 배는 가까이서 한번 보고 싶은 터라
쓸데없는 오르막을 또 15분 가까이 올라 헉헉거리며 접근한다.

적당한 위치에서 사진 찍고 다시 살짝 내려와 또 언덕을 넘는다. 어떻게든 자전거 위에 앉아서 넘을 수 있는 경사라면
30분이 되던 1시간이 되던 느긋하게 오를 수 있는데, 그 이상의 경사는 정말 고역이다. 15분만에 내려와서 다행이지.

망상해변이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곳까지는 언덕의 피곤함을 잊게 해 주는 편안한 도로다.
거의 개점휴업 상태인 길가 식당에 들어가서, 텃밭에서 일하고 계시는 주인장 부부를 직접 불러낸 끝에 육개장 한 그릇을 해치운다.
사실 들어가서 10분 가까이 혼자 서 있던 시간동안 이래가지고 도둑같은거 안 들어오려나 하는 걱정도 해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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