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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에 해당하는 글들

  1. 2012.05.27  킨키 방황 - 성불의 의미 18
  2. 2012.05.26  킨키 방황 - 코야산 오쿠노인 19
  3. 2009.10.06  히로시마 여행기 8편 - 미야지마, 사망금지 4
  4. 2009.10.05  히로시마 여행기 7편 - 미야지마, 신들의 섬 6

 

 

다리의 통증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나로서는 오디오 가이드를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이곳까지 오는 사람이라면 7천원쯤 지불하고서라도 꼭 오디오 가이드를 사용할 것을 권한다.

설명이 극히 제한적이고, 그나마 일본어와 어색한 영어 안내문밖에 없는 곳이 많아서

역사적 향기를 간직한 수많은 묘석들에 대한 설명은 전적으로 오디오 가이드에 의지할 수 밖에 없으니까.

 

한국어 버전도 있다고 하니, 몸만 정상이었다면 훨씬 알차게 즐겼을 터였는데

그 당시엔 오디오 가이드에 대한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발목 통증이 심했다.

 

저런 조그만 표지판을 보고 그 존재를 알아차렸지만, 지금와서 다시 안내소까지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가이드가 없어도 알아차릴 수 있는 점이 있긴 있다.

고지대 숲속 깊은 곳에 위치한 오쿠노인은, 목재나 금속재로 만든 것들이 오래 버틸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꽤나 대단한 모습을 한 묘석조차도 전부 석재로 되어 있다는 점.

 

중요문화재로 선정되어 있을 만큼, 꽤나 오랜 시간 지난 묘석인데

원형을 유지하면서도 주위 환경과 절묘하게 조합되어가는 모습이 실로 인상적이다.

 

 

 

군데군데 보강을 거친 모습이 조금 어색한 것도 사실이지만 훌륭한 볼거리임에는 틀림없다.

이 정도 규모와 화려함을 자랑한다면, 세워질 당시에도 상당한 권력가였을 듯.

코야산에 묘석이 들어서기 시작한 건 약 1000년 전인데, 실제로는 500~600년 전의 묘석이 주를 이룬다.

 

물론 셀 수도 없이 부서지고, 그 위에 다시 세우고 하는 일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연도는 거의 알 수 없지만

현대 일본 전통건축 양식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차이점을 보이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흥미롭게 관찰할 수 있다.

 

저런 기와와 처마의 모습은, 당시 중국과 한국의 양식의 틀이 여전이 남아있었다고 해도 되겠지.

 

 

 

불교 건축물로는 유명한 오륜탑.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빠릿빠릿한 녀석보다 이렇게 세월의 흔적을 가진 녀석이 훨씬 보기 좋다.

이런 식으로 보존되기에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곳이기도 하고.

 

이곳은 예전에 세워진 몇몇 특정 묘석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이 아니고

참배길 자체가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러한 환경 자체가 이 곳의 신비성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에.

 

 

 

역사의 흔적을 느끼게 해 주는 모습.

날려나간 거목 위에 다시 새로운 삼나무가 자라고 있다.

 

수백 년이 지나면 이 녀석도 주변의 거목들처럼 높디 높게 솟아있겠지.

아마 마야나 잉카 문명처럼, 일본이라는 나라가 역사속으로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이 오쿠노인의 참배길은 여전히 남아서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어당길 거라고 생각한다.

 

 

 

일본인들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소원 종이. 설마 이런 곳에까지 매달려 있을줄은 몰랐다.

사실 근본적으로는 낙서와 다를 바 없는 행위이긴 한데, 주변을 훼손하진 않으니까 괜찮으려나.

 

저건 보통 소원을 적어서 나뭇가지에 매다는 것인데, 이런 묘지 가운데서 무슨 소원을 비는지는 모르겠다.

 

 

 

오쿠노인 참배길은 V 자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앙에 홍법대사의 영령을 기리는 고뵤가 위치한다.

그래서 고뵤 부근을 제외하면 입구와 출구의 위치가 다르다. 거리상으로는 약 2km 정도.

 

고뵤에 다가가면 확 트인 공간과 함께 기념품을 파는 곳이나 휴게소, 영령전, 사찰 등의 건물들이 나타난다.

평상시라면 산책 축에도 들지 않는 가벼운 길이지만 나로서는 거의 극기훈련 하는 기분.

잠깐 생각해보니, 이곳은 눈이 쌓인 겨울에 와도 그 경관이 놀라울 거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비가 와서 안개가 자욱히 낀 모습도 이 곳의 경건한 분위기에 어울릴 것 같고.

 

푸르름을 마음껏 발산하는 5월 중순의 맑은 하늘 아래에서 감상하는 오쿠노인도 좋긴 한데

뭐랄까 이렇게 맑고 화창하면 분위기가 조금 안 사는것도 사실인 듯. 그래도 사진 담기엔 좋다.

 

 

 

조금만 더 가면 고뵤에 도달하는데, 그 전에 눈에 들어온 이 탑은, 고뵤 자체보다 더 인상깊게 다가왔다.

'무연불' 이라는 제목의 탑으로, 이름 그대로 연고가 없이 방치된 석불들을 한 곳에 모아서 세워 놓은 것.

오쿠노인에 산재해 있던 수만개의 석불들을 이곳으로 모은 이유까지는 모르겠다. 묘석을 세우는데 방해가 되어서 그런가?

 

 

 

일반적으로 이런 조그만 석불들은 어린 아이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남녀노소 구별할 것 없이 이렇게라도 명복을 빌곤 했다.

이제는 알아보는 사람도 없는 수십, 수백년 전의 석불들이 한데 모여있는 모습은 뭔가 형이상학적인 느낌.

 

 

 

상당히 오래된 것들인데다가, 원래부터 그렇게 정교하게 조각되지 않은 석불이기 때문에

지금와서는 얼굴의 형체조차 사라져 버리고, 그저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 졌다는 흔적만이 남아있다.

 

오쿠노인은 아직도 사람의 손이 잘 닿지 않는 깊숙한 곳에 방치된 석불들이 꽤나 많은데

가난한 자들의 노력이라고는 하지만 석불은 당시 꽤나 비싼 축에 들어갔고, 오쿠노인 안에서도 도난 사건이 셀 수 없었다고 한다.

이제는 이렇게 한 곳에 모여 도난당하는 일 없이 사이좋게 늘어서 있으니, 좋은 시절인 듯 하다.

 

 

 

중요 문화제로 지정되어 있는 수많은 묘석들과, 홍법대사의 고뵤 등이 아무리 중요하고 위대하더라도

결국 코야산과 오쿠노인이라는 이미지를 현세에까지 이어가는 원동력은

 

힘 없는 서민들이 한개 한개씩 공양했던 이런 조그만 석불들이 아닐까 싶다.

역사는 권력자들에 의해 쓰여지지만 문화는 항상 가장 낮고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샘과 같으니까.

단순한 돌맹이에 불과한 물체에 정성스럽게 헝겊을 둘러주고, 타인을 위해 합장하는 그 마음가짐이야말로

홍법대사가 의도했던 불교의 정신이며, 세계 각국에서 이 곳을 찾아오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라고 생각.

 

 

 

이것도 아마 공양물이겠지.

성불이란 표면적으로는 죽은 사람을 기리는 행위이지만

결국 죽은 사람에게 산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남겨진 사람은 나름의 방법으로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 죽은 사람에 대한 연민을 선택한다.

그렇게 본다면, 성불이란 결국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거라고 생각.

이 인형을 놓고 간 사람의 마음은 조금이나마 평온해 졌을 것이다.

 

 

 

무연불 주변에는 확실히 아이들을 위한 공양물이 많이 보이는 듯 하다.

실을 뭉쳐서 만든 저것도 옛날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

오쿠노인에 가서 동전 한닢이라도 봉납하고픈 기분이 든다면, 무연불 앞에서 하는게 제일 적절하지 않나 싶다.

 

 

 

관광객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정말로 자기 가족들의 묘에 참배하러 온 사람들도 있다.

꽃과 간단한 음식 따위를 올려두고 가만히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는 것은 예의가 아닐것 같아서 패스.

좀 전의 흰개미 묘석도 충격적이었지만, 왠만큼 알려진 대기업들이 세운 묘석도 상당히 많다.

아니, 대기업이 아니라 일본 내에서만 조금 알려진 기업들의 묘석도 상당수.

 

대부분 자사 공장에서 사고로 사망한 사람들의 명목을 비는 묘석인 듯 한데, 기업이라 자금이 빵방해서 그런지

일반적인 묘석보다 크기도 크고, 조각상까지 설치해 놓는 곳도 있다.

 

개인 묘석보다 너무나도 크고 웅장해서, 이쯤되면 죽은 사람을 기리는 것인지 기업 자랑하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사진에 담지 않았다.

 

 

 

끝없이 줄지어 선 묘석들을 감상하는 것도 좋지만

한국과 그다지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어쩌면 이렇게도 생장이 다른 삼나무가 자라고 있는지 신기하다.

중국의 메타쉐콰이아 나무도 삼나무의 일종이지만, 한국에는 이런 삼나무가 없다는 것이 특이한 점.

 

기원을 따지자면 야쿠시마(屋久島)나 시레토코(知床) 등,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몇몇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수백년 전 인공적으로 조성된 삼나무 숲이긴 하지만, 세월이 지나가면서 인공미는 사라지고 어엿한 터줏대감으로 자리잡은 듯.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이 여기저기서 묘석 주위를 깨끗하게 청소중이다.

참배하러 온 사람들이 꽃이나 캔 음료수, 비닐에 쌓인 먹을거리 등을 놔두고 가기 때문에

제대로 된 관리 없이는 온통 썩어나는 것들로 뒤덮힐 것 같다.

 

묘석 앞에는 1엔짜리에서부터 100엔짜리 동전도 많이 올려져 있는데, 이곳엔 그런 거 가져가는 사람은 없는가 보다.

마음먹고 털어가면 아무리 동전이라도 기십만원어치는 우습게 모을 수 있을 정도의 양인데.

 

 

 

이곳에 묘석을 세우는게 결코 저렴한 가격은 아닌데, 이런 애완견의 묘석까지 놓여있는걸 보면 여러가지 상념이 떠오른다.

 

엄니처럼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나, 나처럼 매사에 부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사람도 맘대로 못 눕는곳에 돈X랄 해가며 동물 비석까지 세우는구나. 이놈의 세상~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겠고.

 

아, 내세의 명목을 비는 건 굳이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에게 동일한 것이구나. 이게 불교의 원리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묘석을 세우는거야 어쨌든 좋은 의도지만, 코야산이라는 의미깊은 위치 자체가 빈부 측정의 척도로 쓰이는 것 같아서 약간 마음에 걸린다.

 

이곳에 이 정도 묘석 세우는데는 싸게 잡아도 기본 3~4억은 든다는 사실을 알아두자.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지만, 묘지에서 가장 씁쓸한 광경은 이런 동자상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한 아이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니, 춥지 말라고 옷을 입혀주는 것이나

앞에 놓인 먹을거리도 아이들 입맛에 맞는 과자같은 것들이 많아서 더더욱 애잔하다.

 

나같은 독신도 사무치게 이해가 되는데 자식 가진 부모들이라면, 7살이 되기 전에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그 심정을 설명할 필요나 있을까.

엄니는 예순이 넘으신 지금도, 내가 어릴적 사고나 병으로 죽어버렸다면 당신도 지금까지 살아있을 리가 없다고 단언하신다.

 

그 찢어지는 마음을 억누르고 억누르며, 단지 그 아이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한 세상에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일념 하나로

이렇게 세워 둔 조그만 동자상들의 모습은, 그 의미를 안다면 이 곳을 찾는 전 세계의 누구라도 아련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참배길 초반에는 대부분 반짝반짝한 새 묘석들이 줄지어 있지만

가끔씩 이렇게 사람이 손을 놓아버린 듯한 녀석들도 눈에 들어온다.

자리를 꾸준히 차지하고 있고, 새것으로 보이는 양초가 남아있는 걸로 봐서

아직 이곳에서 명복을 비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벗겨진 페인트와 녹슨 철판도 왠지 이곳에서는 그리 흉물스럽지 않다.

 

 

아직까지는 정돈도 잘 되어있는 산책길 같은 분위기다.

 

그 빼곡하던 묘석들 사이에 공터가 있길래 뭔가 싶었는데

이번 동일본 대지진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를 세우기 위한 예정지였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대참사의 흔적이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모습에 잠깐 발걸음을 멈춘다.

 

 

 

온통 하늘을 찌를듯한 푸른색 천지에 이런 단풍이 서 있는 모습은 극히 인상적.

인공적으로 걔량되어, 사시사철 저런 색을 하고 있다는 말은 들은적이 있는데

절경 속의 절경이랄까, 실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인상적인걸로 치면 이 묘석을 빼놓을 수가 없다.

어느 유쾌한 사람이 만든 '낙서총'이라는 이름의 이 묘석은, 낙서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 온 행위이니

하지 말라는데 하지 말고 이곳에서 신나게 낙서라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듯 하다.

 

묘석 자체도 여기저기 낙서처럼 만들어져 있는데, 그 옆에 정말 낙서할 수 있는 판이 놓여져 있다.

이렇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인생을 잘 산 사람이 아닐까 싶다.

 

 

 

딱히 표시된 건 없지만 이 안쪽부터는 분위기가 급변한다.

지금까지는 제대로 포장된 현대인들의 묘석들이었지만, 여기서부터는 수십 년에서 수백 년 전의 묘석들이

참배길 주변 뿐만 아니라 길이라고 할 수 없는 산속 구석구석에까지 빼곡이 들어서 있기 때문에

문화유산으로서의 진면목은 이곳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급변하는 분위기만큼 왼쪽 다리도 아주 심각한데

어떻게든 버티겠지 싶던 다리는 계속 무리를 줘서 그런지 보통 심각한 상태가 아니다.

목발이 간절히 필요하다고 느낄 정도로, 힘을 거의 줄 수가 없다.

 

절뚝거리며 어떻게 전진은 하고 있지만 게속 그러다 보니 오른쪽 다리는 근육이 아주 터질듯 하다.

코야산 탐방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인데, 이미 일반인 걷는 속도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있으니.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 갈 수도 없으니 그냥 어쨌든 참으면서 계속 걷는 수 밖에.

 

 

 

걷다보면 이곳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사실이 쉽게 납득이 간다.

이 정도 규모와 역사를 가진 묘지는 확실히 세계적으로도 드물거라 생각.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거대한 삼나무와 셀 수도 없는 묘석들 뿐이다.

 

길이 나 있지 않은, 시야가 보이는 끝까지 묘석이 빼곡하다. 현실감각이 없어질 정도의 풍경.

코야산이 성지로 추앙받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느껴진다.

 

 

 

입술과 볼에 연지까지 칠한 동자상이 어째 되려 애처로운 모습이다.

동자상에는 대부분 이름도 적혀있지 않은데, 아마 가족뿐만 아니라 참배객 모두가 명복을 빌 수 있도록 하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유독 동자상들 앞에는 동전이 많이 놓여있는 것이 인상적.

 

 

 

오쿠노인 참배길은 홍법대사의 영령을 기리는 고뵤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오래된 묘석들로 채워진다.

고뵤에서 시작한 곳이니 당연한 결과지만, 그 덕에 참배객들은 시간의 흐름을 역행하는 듯한 묘한 체험을 하게 된다.

인공미 느껴지는 묘석들도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색이 바래고 이끼가 끼면서 오쿠노인의 한 부분이 되어가는 듯 하다.

 

수백 년의 시간이 압축되어 있는 듯한 느낌은 굉장히 신선하다. 점점 현실세계와 멀어져 가는 듯한 느낌도 들고.

 

 

 

추정 20만개 이상의 묘석이 안치된 곳인데다가

사람 이름 한자는 일본인들도 제대로 읽기 힘든 터라, 나로서는 누가 누구인지 전혀 알 길이 없다.

물론 일본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들 알고 있을 유명 인물들의 묘도 전부 이곳에 있다.

 

실제로 시신이 안치된 건 아니고, 극락왕생 기원과 현세에서 저지른 무수한 악행, 살상을 정화하기 위한 의미에서

표면적으로나마 이곳에는 꼭 묘비를 세우곤 했으니까.

왠지 나쁜 짓 실컷 벌여놓고 회개하면 만사 오케이라는 이 사상, 어딘가와 많이 닮았다.

 

 

 

화창한 햇살이 내리쬐던 입구와는 달리 이곳부터는 삼나무 그늘에 뒤덮혀서 그 분위기가 이루 말할수가 없다.

절룩거리는 발을 이끌고도 카메라를 손에서 놓기가 힘들어 몇 걸음 가지 않아 셔터를 누르고 누르게 된다.

 

이곳 사진을 전부 블로그에 올려서는 언제 마무리될지 알 수가 없어서 적당히 추려내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오쿠노인 사진은 포스팅은 몇 번을 더 해야 간신히 마무리가 될 듯 하다.

이런 곳에 흥미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꼭 찾아가 볼 가치가 있는 곳이라서,

실제 풍경의 10% 정도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사진이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면 나로서도 뿌듯할 듯.

 

 

 

해발 1000m 가량 되는 코야산이고, 안개가 굉장히 짙게 드리우는 곳이라서

묘석이 자연과 동화되는데 적합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런 모든 원인과 결과가 묘하게 얽혀있는 것도 이곳의 가치라고 할 수 있을 듯.

 

왼쪽의 묘비에 살짝 보이는 문양은 일본 특유의 전통이기도 한데,

완전한 천민 계급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서민들 역시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문양을 가지고 있다.

자전거 여행때 신세를 졌던 나가노현의 산골마을 가족도 물론 그 문양을 걸어놓고 있었지.

여자는 보통 시집갈 때 문양을 가지고 가기도 하지만, 남편 가문의 문양을 쓰는게 일반적.

 

유명한 군주들의 문양이야 알려질대로 알려져 있고, 역사학자들의 주요한 연구원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한국에 족보가 있다면 일본에는 가문의 문양이 있다고 할 정도로, 현대까지 내려오는 표식이다.

 

이곳 오쿠노인의 묘석에도 그건 예외가 아니라서, 연구를 해도 끝이 없을 정도이긴 하지만

여전히 일본 역사학자들의 마르지 않는 지식의 샘으로 유용하게 활용중.


사슴은 애어른을 가리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아이들에게서는 멀어지지만, 적당한 호기심과 두려움을 가진 아이는 삥뜯기 좋은 표적.
그래도 다행히 아이들 역시 먹을거 주지는 않더라.


이츠쿠시마 신사가 가까워지자 길게 늘어선 행렬이 보인다.
그들의 시선이 앞서있는 곳엔 이 조각배가 놓여있는걸로 봐서 아마 관광객을 태우는 유람선인가 보다.
공짜로 태워줄리가 절대로 없으니 무리.
사실 미야지마는 로프웨이 말고는 돈 내고 움직일 이유가 별로 없는 곳이다. 섬 전체가 볼거리 많은 곳이니까.
내 자금에 좀 더 여유가 있었다면 이런 유람선보다 굴 구이나 몇조각 더 먹겠다.


좀 더 큰 배도 있다. 아마 미야지마에서 가장 유명한 오오토리이(大鳥居)는 썰물 때가 아니면 다가갈 수가 없기 때문에 배로 주변을 둘러보는 듯?
물위에 둥둥 떠서 오오토리이를 구경하는것도 재미있는 일이겠지만 나는 썰물의 힘을 믿는다.


아마 이츠쿠신사의 진짜 입구는 이곳에서부터 시작인가보다.
여기 오기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츠쿠신사 경내는 입장료도 300엔으로 꽤 비싸고, 엄청난 인파때문에 쓸려다니는게 고작이고, 중요부분은 보존을 위해 공개하지 않으므로
거기 들어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는 신사 구경하러 온게 아니라서. 진짜 구경하고 싶은 것은 로프웨이를 타고 산꼭대기로 가야 있다.


어느 신사나 마찬가지지만 일단 정문의 이 토리이가 사람들의 시선을 잡는 첫 번째 관문인 만큼, 지역별로 나름 특색이 있다.
돌덩이로 만들어진 토리이 치고는 꽤 큰편으로, 명물인 수중 오오토리이때문에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했지만
그게 또 돌맹이의 거친 감촉과 어울려서 나름 듬직하고 우직한 느낌을 주는게 마음에 든다.


여기라고 사슴이 없을리가.
훔친건지 받은건지 모르겠지만 그런 종이는 몸에 별로 좋지 않을텐데...
굶고 살진 않을거라 생각하지만 하는 행동은 굶어죽기 일보 직전처럼 먹을걸 갈구한다.
늘어진 모습이 어울리긴 하네.


이곳에 왜 그리 사슴이 많은가 하면, 원래 일본에서 사슴은 가장 신에 가까운 동물이자 인간과 신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로 신성시 되어왔기 때문.
일본에서도 신성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미야지마라서 사슴이 많은가 보다.

이곳 미야지마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신비한 이츠쿠시마 신사의 박력과 고립된 섬이 가지는 독립성으로 인해
수백 년 전부터 나무의 벌목이 금지되어 있고, 섬 안에서의 출산, 장례도 금지되어왔다.
그래서 이 곳엔 묘지가 없다.

덤으로 강아지 등의 동물도 살 수 없었다지만 그건 주민들의 경우일 뿐, 아주 많은 관광객이 이제는 개들을 끌거나 안고 들어온다.


신성함과 출산, 사망을 반대급부로 묶은 사상이 어떻게 보면 참 어리석다.
사실은 출산, 사망만큼 신성한 일이 있을까.
신성이라는 개념이 사람만의 전유물이라면 아마도 이곳은 생물학적 행위를 비신성함으로 여겨왔을 터.

신성함을 드러내는 방법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인간다움, 혹은 생물학적으로 당연한 자연의 순환고리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는 방법과
철저한 군림자로서의 신의 위상을 드러내기 위한 비인간적인 엄숙함을 고취시키는 방법.

미야지마가 선택한 방법은 아마 두번째겠지. 지금은 그걸로 돈 벌어먹고 있으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발견한 쓰레기.
저녁에 이곳으로 다시 오게되는데 쓰레기보다 더 재미있는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하늘에 구름이 좀 많고 흐린 편이라 아쉬웠는데, 쨍한 날씨의 미야지마는 정말 멋진 풍경을 자랑할 것이라 상상했다.
특히 산 위에 올라가면 세토 내해(瀬戸内海)의 절경이 펼쳐지기 때문에 더더욱.


이츠쿠시마 신사 앞에는 입장을 기다리는 수백명의 인파가 몰려있었다.
공짜로도 저런 곳에서 줄 따라가며 구경하고 싶지 않은데, 입장료까지 받으니 나하고는 인연이 없는 곳이다.
쿄토에서도 그랬고, 한국에서도 그랬지만 저런데 돈 내고 들어가서 얻는건 아쉬움밖에 없었으니 깔끔하게 포기.

굳이 안보여줄곳은 어차피 안보여주는 신사 안에 들어가지 않아도 그 주변의 풍경은 감탄할 만 하니 문제될 것 없다.
지금은 밀물때라 신사 전체가 바다위에 떠 있는 듯한 풍경을 연출한다. 이것이 바로 신성함의 근원 중 하나겠지.


이츠쿠시마 신사는 593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현재 신사는 1200년 경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바로 옆의 히로시마가 원폭으로 개발살이 났음에도 무사했던 미야지마라서 일본인들에게는 더더욱 소중한 장소일 거다.
그 신사와 함께 저기 보이는 오중탑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귀찮아서 올라가지도 않았는데, 저 오중탑은 사실 미완공된 채로 남아있다고 한다.
당나라 건축양식이 혼합되어 자세히 보면 꽤나 묘한 느낌을 주는데, 1407년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이츠쿠시마 신사는 절경은 절경이다.
사람이 없이 조용했다면 정말 신비로운 느낌을 받았을 텐데 이제는 그런 낭만을 즐기기엔 너무 유명해져 버린 것 같다.

유명 관광지에 서 있을 때 항상 아쉬운 점.
관광객으로 바글거리는 문화 유산은 뭔가가 빠져나간 듯 힘이 꺾인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많다.
아마 내가 사람 북적이는걸 싫어해서 그렇겠지.


신사 주변에도 노닐거리는 많다. 수많은 가게들과 사슴들.
오모테산도를 비롯한 상가들은 관광객들 때문에 생겨났다기 보다는, 수백 년 전부터 이어오는 전통있는 가게들.
일본인과 상업정신을 따로 떼어낸다는 것은 일본 역사의 중요한 고리를 빼먹는거나 마찬가지.

그나마 관광 천국 일본에서 그 장사꾼 정신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줄 수 있는 이유다. 그네들은 이미 천 년전부터 장사꾼이었으니.


정오가 지나고 태양이 달아오르자 살짝 지쳤다. 아침도 안 먹었으니.
드디어 즉석해서 미야지마의 명물 과자인 단풍잎 만쥬를 만들고 있는 곳을 발견했다.
주머니에 돈은 간당간당하지만, 그리고 별로 감흥을 불러일으킬만한 맛이 아니라는 예상도 충분히 가능했지만

관광객 흉내나 한 번 내볼까 싶어서 예전부터 계획해 왔으니 이번엔 큰맘먹고 먹어보기로 했다.
속에 넣는 앙금은 한국에서도 익히 먹을 수 있는 갈아만든 앙금과, 통짜 팥이 든 앙금이 있었는데
주문이 밀리다 보니 바로 먹을 수 있는건 갈아만든 앙금 밖에 없었다.


갓 만들어서 따끈따끈한건 참 마음에 들었다.
단품으로 3개 사서 가게 옆 마루에 걸터앉았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선물용으로 15개, 20개씩 포장된 만쥬를 여러 개 사고 있었다.
이게 아마 한개 70엔 정도 했을거다. 3개 210엔. 비행기타고 일본까지 간 녀석이 쪼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애초에 난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이걸 많이 먹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차라리 돈 좀 모아서 굴 요리를 먹지. 굴 요리는 이거보다는 훨씬 비싸다.
그리고 원서 사려고 생각했던 게 좀 있어서 어쨌든 책값을 위해 돈을 아껴야 했다.

관광지 기분 한 번 내보려고 샀는데, 방금 만든 녀석이라 그런지 달콤한게 휴식을 취하며 먹기엔 딱 좋은 느낌.
왜 이런 단풍잎 만쥬가 유명하냐. 이곳 미야지마의 단풍은 정말 눈돌아갈 정도로 멋지기 그지없기 때문에.
불행히도 이곳은 단풍이 좀 늦게 들어서 11월이나 되야 붉게 물든 이츠쿠시마 신사와 미센 산(彌山)의 절경을 구경할 수 있다.
이번 여행에서 유일하게 아쉬웠던 점.

그런데 단풍이 들 때의 미야지마는 정말 발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꽉꽉 차버리기 때문에, 보고는 싶어도 용기가 안난다.


신사 뒷쪽까지 빙 둘러서 걸어갔다. 출구쪽에는 들어오지 마시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는데
얼굴에 철판 깔면 들어갈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쏟아져 나오는 인파들의 따가운 시선을 물리칠 정도의 얼굴 두께가 아니라서 포기했다.

신사 뒷쪽의 무료지역에도 볼거리는 많이 있는데, 바다위 오오토리이를 만들 때 사용했다는 원목이 전시되어 있었다.
1875년에 세워진 오오토리이는 워낙 거대해서 바다 속에 파묻은게 아니라 그냥 세워놓기만 했다. 토리이 자체의 무게로 서 있는 것.


상당히 거대한 원목이었는데, 오오토리이의 기둥 둘레가 10m 라고 하니 납득갈만한 크기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나무가 참 마음에 든다. 수백, 수천년 있다보면 이건 돌처럼 변하겠지.


사진으로 이 나무의 크기를 가늠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서 무단으로 관광객을 비교대상으로 삼았다.
한국에서 온 사람들도 꽤 많았지만, 그 이상으로 현지인들이 많이 와 있어서 (골든위크라 다들 여행가느라 정신없다) 내가 눈에 뜨이지 않는다는게 다행일까.

머리에 버프를 둘러쓰고 고글을 끼고 있어도, 이런 유명 여행지에서는 눈길을 끌지 않아서 좋다.
가끔 눈길을 끌게 되면 대부분 일본인으로 착각하고 말을 걸어온다는게 항상 의아스럽긴 하지만. ㅡㅡ;

무리를 해서있지 아침 8시가 될때까지 눈 한번 안뜨고 잘 잤다.
잘 잤다고 하기보단, 일어나니 몸이 피곤하고 머리가 좀 어지러운게, 피로의 조각들이 몸 여기저기에 널려있긴 했다.
덕분에 심야 프로그램들을 못봐서 좀 아쉽긴 하다. 여행와서 보는 TV는 또 각별한 맛이 있는데.

싸구려 호텔이라 공짜 조식도 없으니 9시 반이 될때까지 뒹굴뒹굴하다가 짐 챙겨서 호텔을 나왔다.
오늘은 한국에서 예약해놓은 호텔이 있으니 미리 짐 맡겨놓고 나올 수 있어서 마음이 편하다.

오늘은 히로시마 여행의 백미인 미야지마(宮島)로 갈 예정.
미야지마는 아마노 하시타테(天橋立), 마츠시마(松島)와 더불어 일본 3대 절경이라고 불리는 작은 섬.
이 곳에 있는 이츠쿠시마 신사(嚴島神社)와 오중탑(五重塔)는 1996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사실 그것들 보러 가는게 아니지만.

어제는 JR 전철을 탈 일이 많아서 프리패스 끊는게 오히려 손해였지만 오늘부터는 모든 교통수단을 히로덴 프리패스에 의존한다.

2일짜리 프리패스는 이틀간 히로덴과 미야지마행 마츠마에 기선(松前汽船), 그리고 미야지마 로프웨이를 무제한으로 탈 수 있고 가격은 2000엔.
히로덴은 한번 타는데 150엔, 마츠마에 기선은 편도 170엔, 로프웨이는 왕복 1800엔이니 이것들을 이용할 생각이면 무조건 프리패스를 추천.


그러한 프리패스에도 단점은 있으니, 이 미야지마라는 곳은 히로시마역에서 JR 전철로는 25분밖에 걸리지 않지만 히로덴으로는 50분에서 1시간 가까이 걸린다.
가격을 생각하면 프리패스를 끊은 시점에서 무조건 히로덴을 타야 하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조금 아쉽긴 하다.
JR 프리패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다르지만. 이러나 저러나 미야지마에서 로프웨이를 타려면 프리패스가 유리한것이 사실.
다른 자동차와 똑같이 신호를 기다리며 정차했다가, 느긋하게 내리는 손님에게 돈을 받고 천천히 출발하는 히로덴을 타고 미야지마구치(宮島口)역에 내린다.
대부분의 승객들이 이 곳에서 내리고, 사실 이곳은 히로덴 종점이라서 요금도 전철 내리면서가 아닌 개찰구 앞에서 정산한다.

내리자마자 미야지마행 배를 타러 간다.
이곳에서 미야지마까지는 배로 10분밖에 안떨어져 있지만 이권탓인지 JR에서 운영하는 JR 페리와  마츠마에 기선이 바로 옆에서 따로 운행되고 있다.
프리패스를 가진 사람은 마츠마에 기선 역시 맘대로 탈 수 있으므로 생각할 것도 없이 그쪽으로.


관광객이 워낙 많아서인지 미야지마행 기선은 10분에 한번씩 쉴새없이 왔다갔다하고, 걸리는 시간도 10분밖에 안되기 때문에 여기까지 오면 사실 게임 셋.
일부러 일요일을 피해서 온 미야지마였지만 지금이 일본의 골든위크라서 의미없는 몸부림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현기증이 생길 정도.


선착장 옆에서는 무슨 수상 경기장 같은게 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뭔가가 트랙을 돌고 있다.


출발하자마자, 사실은 출발하기전에도 잘 보이는 미야지마.
특이하게도 좌석 앞에 미야지마 소개 영상을 틀어주는 TV도 있다. 그거 볼 시간이나 있을까.


기선들은 정말 쉴새없이 왔다갔다한다. 확대해보고 알았지만 기선들끼리 스쳐지나갈때는 서로서로 사진 찍는 장면이 많이 잡혔다.


드디어 일반 관광객다운 관광이 기다리고 있는 미야지마에 도착.
평범한 여행도 이쯤 되니 제법 마음이 들뜬다. 그런데 날씨가 꽤나 더워서 시작부터 조금 사기 저하.
선착장 앞에는 관광객을 마중나온 여관 차량도 있고, 지도와 가이드북을 뒤적이는 외국인들도 많다.


내가 미야지마에 온 이유 첫번째.
길거리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이 사슴들을 보기 위해.

미야지마에 오면 가장 먼저 반겨주고, 가장 먼저 익숙해지는 장면이다.
교토 근처의 나라(奈良)와 이곳의 사슴은 아무런 제약없이 돌아다니고 손님들을 갈취해 뜯어먹는 유명한 터줏대감들이다.
나라에서 먹이를 돈으로 주고 사도록 하는 바람에 관광객들에게 이골이 난 사슴들이 사람들을 덥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지만
이곳은 먹이 주는것을 완전히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나라 사슴들보다는 조금 순한 편이다.

먹이주는걸 금지해서인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안내서까지 뺏어먹긴 하지만.


나라의 사슴들을 겪어봤다면 충분히 공감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사슴들은 꽤 무섭다. 순해보여도 힘도 세고 떼거지로 얼굴 들이밀면 힘약한 노약자나 여자는 나자빠질 정도.
이곳에서도 가끔씩 방심하고있는 사람들에게 서든 어택을 가하는 녀석들이 있어서 사진찍을 맛이 난다.
하지만 손안에 먹을게 없다는걸 알아차리는 순간 바로 무심하게 떠나버리므로 크게 걱정하진 말자.

손안에 먹을걸 들고 이런 벤치에 앉아있다면 당신 머리위에는 사조성이 빛나고 있으리라.


미야지마는 그리 큰 섬이 아니라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거의 없다.
세계문화유산인 이츠쿠시마 신사까지는 거의 일직선으로 길이 나 있어서 그냥 길따라 가기만 하면 만사 OK.


물론 중간엔 관광객을 쉽게 보내지 않으려는듯 오모테산도(表參道) 상점가가 포진하고 있다.
오모테산도라는 이름은 도쿄 하라쥬쿠(原宿)에도 있는데, 특정 지명은 아닌듯? 둘다 유명 상점가를 지칭하고 있다.


온갖 공예품과 특산품이 진열되어 있다.
하지만 일본도 여행지의 법칙을 피해갈 수는 없는게
유명하고 발길이 많고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의 상점가일수록 공예품의 질이 떨어지고 얄팍한 상술이 드러나 보인다는 점.

차라리 홋카이도 후라노의 라벤더 특산품이 더 나았다는 느낌이다.
경주에서 토산품 살게 제일 없듯이 쿄토나 미야지마에서는 선물 살 생각 않는게 좋을 듯.

이러나 저러나 이곳 미야지마에서 가장 유명한 먹거리는 굴과 단풍잎 만쥬(もみじまんじゅう). 특산품은 못사도 먹을건 먹어야지 작정중이다.
여기서 한끼 먹으면 어지간히 하루치 식비를 다 써버리는 결과라서 조금 겁을 먹고 있긴 하다.
진을 뺄 정도로 둘러보고 피로와 허기짐에 쓰러질 듯 선착장으로 향할 그 순간에 굴을 먹어볼까 싶다.


말을 안 해서 그런데, 선착장에서 800m 정도 떨어진 이츠쿠시마 신사까지 가는데 1시간은 족히 걸렸다.
세상 천지에 사슴이 너무 많아서 이리저리 찍느라 시간을 많이 소비했기 때문.
쿄토에서도 느낀 거지만 난 일본에 대한 전체적인 관심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일본의 전통 문화엔 딱히 흥미가 없는 듯 하다.
절이나 신사같은거 봐도 별로 느껴지는 것 없고, 과대포장된 문화재나 2중 3중으로 입장료를 받아챙기려는 장삿속에도 실망했기 때문일까.

애초에 한국에서도 절이나 문화유산엔 거의 관심이 없었으니.
내 관심은 내가 모르는 사람들의 생활과 사상, 나와의 심리적 차이에 쏠려있고 그것은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다.
무생물적인 관점에서라면, 사람이 만든 유산보다는 지역별로 시시각각 달라지는 자연의 미묘한 차이를 구경하는게 더 좋고.


슬금슬금 이츠쿠시마 신사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 유명한 바닷속 토리이(鳥居)도 어렴풋이 보인다.
물론 바다와 바로 맞닿은 거리에서 파도를 넘나보며 걷는 분위기도 꽤나 마음에 든다.

이렇게 관광객이 많은데도 정말로 사슴한테 먹이를 주는 사람도 없고 (나뭇잎을 주려는 애들은 몇 있었다) 길거리에 쓰레기 하나 보기 힘든 것이 나를 즐겁게 한다.
쓰레기에 관련된 일본인들의 소심함과 결벽주의에 대해 냉소하는 이들도 많지만,
난 아무래도 더러운것보다는 깨끗한게 낫다. 특히 사람이 더럽힌 것에 대해서라면.


묘하게도 바다를 따라 늘어선 담 사이사이에 이렇게 출구가 있다.
자칫하면 아이들이 빠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보안이 허술한데...
바닷물은 금방이라도 밀고 들어올 것 처럼 바로 앞에서 출렁인다.


물론 중간중간에 사슴들의 애교를 찍는것도 잊지 않았다. 내 앞에서 친히 털까지 골라주시는 사슴님.
소심한 나는 카메라에 때 묻을까 싶어 만지진 않았지만.
변명 좀 더하자면 가이드에는 먹이주는것 외에 만지지도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사슴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는게 좋으니까. 그리고 혹시 병원균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써놓긴 했는데 이미 이 사슴들은 자연 그대로고 뭐시고도 없다. ㅡㅡ;
그리고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희한하게도 먹이는 안주면서 만지기는 잘 만지고 있었다.


접사로 마구 들이대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 뿐 별로 겁먹는 기색도 없다.
단지 손에 먹을것이 안 들려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관심이 없어져 버리는 것만 빼면.
사진 잘 보면 눈동자에 내 모습도 비춰지고 있지만 명암을 높여서 잘 안보일듯.


원래같으면 이곳 명물인 굴 튀김이나 굴 구이, 오징어 구이, 닭꼬치, 구운 옥수수와 생맥주 한잔 들고 이런 벤치에 누워서 휴식을 취하며
극락 기분을 만끽해야 정상이지만 이번 여행은 좀 과도하게 헝그리한지라 그럴 여유가 없다.
사실은 이곳에서 먹기로 계획했던 단풍잎 만쥬도 2~3개 정도만 사서 맛만 볼 정도의 자금적 여유밖에... T_T

자전거여행 할때는 가난과 배고픔이 친근한 친구처럼 다가오는터라 딱히 감정상할것도 없는데
정상적인 관광객 행새를 하며 유명 관광지에 서 있으니, 왠지 무일푼이라는 사실이 괜스래 서글퍼지는 느낌이네.
나도 먹으려면 카드 긁어가면서 먹을 수 있지만 그러려고 온게 아니라서.
그리고 이 은근히 만성적인듯한 피로감과, 나를 적당히 소심하게 만들어주는 초라함이 오히려 솔직한 나다워서 그게 낫다.

수백만원짜리 DSLR 매쳐들고 다니며 배곯는 헝그리 여행자라. 나름 매력있지 않나.


애고 귀여워라.
고양이가 제일 좋긴 하지만 이녀석들의 태평스러움을 보고 있어도 기분이 맑아진다.

잡아먹을 순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