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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마을에 있었던 조그만 신사인데, 약간 어설픈 갓쇼즈쿠리 양식이긴 하지만

거주용 저택처럼 큰 녀석은 아니니 이 정도로도 충분히 눈을 막을 수 있는가 보다.

 

이렇게 느슨한 양식은 얼핏보니 한국의 초가집과 별로 다르지도 않다는 느낌.

이곳이 그렇게 눈이 많이 내리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지붕의 각도도 낮고 펑퍼짐하게 만들어져

보기엔 좀 편안한 대신, 이렇게까지 관광객이 찾아드는 유명지가 되진 않았을 거라 생각하니

고생끝에 낙이 온다는 속담이 어울리는 건가 싶기도 하다. 사실 고생한 사람과 낙을 받은 사람이 몇 세대는 차이나지만.

 

 

 

정확히는 '민가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박물관인데

각지의 건물을 이곳으로 옮기는 것은 여러 단체의 힘을 모은 큰 공사였지만

현재 이곳은 유지 보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마을 주민들이다.

 

전통 방식으로 건물을 유지 보수하는건 정말로 쉽지 않은 일.

갓쇼즈쿠리 양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지붕을 이루는 억새인데

제대로 만든 지붕의 수명은 약 30여년이지만, 마을에 건물이 한두 개 있는게 아니다보니

거의 매년 한두 번씩은 새 지붕으로 교환하는 일이 생긴다. 마을의 모든 장정들이 동원되는 일년 중 가장 바쁜 대목.

 

지금은 지붕 교체를 마을 축제로 결부시켜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제때 지붕을 갈지 못하면 그해 겨울을 나기가 힘들어지는, 목숨과 직결된 일이었기에

마을의 공동체 생활의 힘을 가장 여실히 보여줄 수 있는 협동의 장이기도 하다.

 

 

 

원래 담이란 게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쟀든 지붕과 비슷하게 정감넘치는 담장도 만들어져 있다.

집의 유지 보수가 중요한 일과인 마을이라서 창고엔 항상 목재가 쌓여있는게 보인다.

 

그리고 옆에 조용히 서 있는 외발수레의 모습이 뒤의 정원에서 화려하게 자태를 뽐내는 꽃과 어우러지니

살짝 전원일기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런 곳에서라면 이웃과도 웃으며 인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면 죽어버릴지도 모르니, 사회성을 길러야 하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살아보는것도 좋을 듯.

 

 

 

건물들 돌아보고 있을땐 손가락 끝으로 셔터를 느끼며, 코끝으로 풀내음을 맡으며, 눈끝으로 녹색 향연을 즐기는데

좀 쉬자고 생각하며 주면의 꽃을 이리저리 쳐다보고 있으면 감각들이 정말로 쉬어버리는지

그제서야 지금이 얼마나 무더운 날인가를 실감하게 되고, 참고 있던듯한 땀이 또르르 흘러내리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래도 담기는 사진들이 전부 소중하니 힘들다는 느낌은 들지 않아서 다행.

누가 하라고 하면 이렇게 돌아다니지는 못할것 같다. 사진도 의뢰받아 찍는건 그닥 땡기지 않고.

 

 

 

이곳을 거닐면 머릿속에 생각이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보고 찍고 느끼고 하는 단순하면서도 즐거운 행동의 반복일 뿐.

 

작가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작품 한 장을 위해 수많은 발걸음을 옮겨 최적의 스팟을 찾아내어야 할 텐데

본인은 아직 여행에 미쳐있어서 그런지, 사진보다는 일단 보고 즐거워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덕분에 사진은 그저 그렇다.

 

 

 

온통 푸른색으로 뒤덮힌 곳이라 이런 꽃의 강렬함이 더욱 빛을 발하는 듯 하다.

시라카와고는 겨울이 진국이라 하던데, 여름의 모습 역시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수준이다.

이렇게 생각하다가 겨울에 가 보면 다시 한번 놀라게 되는게 제대로 된 순서라고.

 

적어도 이 꽃만큼은 겨울의 어떤 풍경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니 귀하게 담아준다.

 

 

 

광합성을 통해서 땅에서 솟아난 건지, 구름이 점점 걷히고 하늘이 맑아지자

슬금슬금 혼자였던 민가원 안이 관광객들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이탈리아어로 추정되는 말을 피로하는 외국인들도 많다.

 

아직 풍경 감상에 전혀 지루해지지 않고 있지만, 이곳 안에서 가장 이상하게 생긴 건물앞에서 발걸음이 멈추고 만다.

구석기 시대에 출토된 갓쇼즈쿠리의 초기양식... 이라는 말도 안되는 설정은 아닌듯 하고.

 

다행이랄까, 연못 중앙에 떡하게 놓인 이 건물은 아무런 방해물 없이 편하게 들어가 감상할 수 있었다.

원래는 손이 닿지 않을 억새지붕도 손쉽게 만질 수 있는 위치인데, 아무래도 사고칠까봐 마구 만지지는 못했다.

 

 

 

처음엔 농담삼아 생각해 본 구석기 이야기였는데

실제로 갓쇼즈쿠리의 초기 형태는 죠몬시대의 이러한 거주지 모양을 본뜬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고 한다.

현재의 다층식 갓쇼즈쿠리 양식은 약 300년 전에 확립된 기술.

 

약 1만년 전 즈음의 죠몬시대 일본에서는, 땅을 파서 동굴처럼 만든 후 기둥을 새우고 건초로 지붕을 만들어 생활하는 방식을 이용했는데

원형적으로 지금 보이는 갓쇼즈쿠리의 초기 형태와 비슷한 면이 있다. 물론 실제로는 거의 원시인에 가까운 생활방식이었지만.

 

그건 그렇고, 이런 지붕만 달랑 남은 건물은 뭐하는데 쓰는 것인지 궁금했는데,

안내판을 보니 '화재 등으로 집을 잃었을 때, 집이 재건되기 전까지 살았던 임시 거주지'였다고 한다.

 

내용을 알고 나서 생각해 보니 과연 그럴 법도 하다.

집이 없이는 절대로 겨울을 날 수 없는 곳이고, 그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갓쇼즈쿠리 양식의 지붕이 필요하다.

집이 완성되기 전까지 생활이 가능한 모양이라고 하면 이것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

 

 

 

내부로도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어서 놀랐다. 지붕과 가까워질수록 뭔가 다가가기 어려운 느낌이 든달까.

내부는 간이 바닥이 반쯤 깔려있고, 나머지는 그냥 흙바닥이다. 적어도 오래 살수 있을만한 공간은 아니라는 느낌이 강하다.

 

목재마저 풍족하지 못했다면, 이 지역은 결코 사람이 살지 못하는 불모지가 되지 않았으려나.

하지만 사람의 적응력이란 상상을 초월하니, 그 경우에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지도 모르겠다. 그 모습은 어떨런지 상상해 보는것도 재미있을 듯.

 

 

 

갓쇼즈쿠리 지붕의 맺음 형태를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는 모습.

가장 강하고 굵은 기둥을 합장하듯이 세우고, 그 기둥을 지지하는 보조 기둥을 양쪽에서 겹쳐 세운다.

메인 기둥에 평행한 방향으로 억새를 지지할 기둥을 세운 후, 마치 젠거 막대를 겹쳐쌓듯이 꼼꼼하게 추가 기둥을 덧붙인다.

 

중간중간 지지대 기둥의 각도를 엇갈려 배치해 놓음으로서 최대한 눈의 하중을 분산시려고 노력해 놓았다.

전에도 말했듯이 이런 식의, 하중이 여러 기둥들에 의해 세세히 분산되는 구조에서는 강도와 함께 탄성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금속 지지대보다는 이런 목재 지지대가 재료 구하기도 쉽고 수십년간 오래 버틸 수 있다.

 

 

 

여름에 별로 시원하지 않고, 겨울에 별로 따뜻하지 않은 갓쇼즈쿠리 구조의 힘겨움이 느껴진다.

이곳 시라카와고는 바닷바람이 계곡을 통해서 직선으로 통과하는 지리적 특징 때문에

여름에는 남쪽에서 북쪽 바다로, 겨울에는 바다쪽에서 남쪽으로 바람이 통과한다.

 

갓쇼즈쿠리 양식은 눈의 하중을 버티기 위해 지어진 방식이라서

그 가파른 지붕 측면에서 매서운 바람을 받으면 한쪽 부분에만 스트레스가 심해지고, 수명의 단축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곳 마을의 건물들은 모두 출입구 부분, 건물 정면의 삼각형 부분을 남북으로 향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래야 지붕의 측면으로 바람이 부딪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완성된 갓쇼즈쿠리 건물은 출입문이 측면에 위치하지만, 이런 가건물은 구조상 지붕과 출입문이 같은 방향으로 나 있다.

그래서 바람이 잘 통하는 여름에는 어떻게 버틸만 하지만, 겨울은 추위와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하는 구조.

살아가기 위해서는, 생존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 하나를 위해 다른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빨리 새로운 집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면서.

 

 

 

가건물을 한참 구경하고 밖으로 나오니 강렬한 햇빛에 잠깐 시야가 몽롱해진다.

추정 이탈리아 처자 세 명이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탱크탑 차림으로 뭐라뭐라 이야기하며 주변을 거닐고 있다.

 

건너왔던 다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건너가보고 싶었는데, 이쪽 다리는 게걸음이라도 해야 할 정도로 좁다.

물론 빠져도 발목 조금 위까지만 잠길만한 연못이라 생명엔 지장이 없겠지만

이런곳에서 푹 빠져버리면 그 쪽팔림 만으로 절벽에서 뛰어내릴 수 있을테니 신중하게 한걸음 한걸음 이동하며 다리를 건넌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집이 있어서 다가가 본다. 크기가 다른 집에 비해서 좀 크긴 한데, 그것만은 아닌 듯한 느낌.

좀 더 현실성이 있다고 해야 할까, 묘하게 다른 건물들보다 눈에 띄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약간은 이해가 된다. 현재 시라카와고에서 가장 오래된 갓쇼즈쿠리 건물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크기도 상당히 크고, 높이보다는 길이가 길쭉한 것이 평범한 일반 민가와 약간은 닮은 점이 남아있는 점이 특징.

 

 

 

창고쪽에는 주민들이 거주 당시 사용하던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지금도 이곳에 사람이 사는 것처럼 느껴지는 현실감이 느껴진다.

말 썰매라는 뜻의 바소리(馬橇)라는 이 기구는, 말 그대로 말이 끄는 썰매다. 지형이 험하고 날씨가 추운 이곳에서는 소보다 말이 더 효율이 높았다.

 

예전에는 산간 지방에서 자주 사용되던 녀석인데 지금은 거의 사라져 버리고

실제로 사용하던 녀석을 보존한 것은 아마도 이 녀석이 최후의 1개일 거라고 설명에 적혀 있다.

 

 

 

오래된 민가일수록 목재에 끊임없이 옻칠을 하고, 목재 자체의 수명이 더해져서 흉내내기 힘든 색상이 덧입혀져 있다.

내부에 들어와보니 정말로 오래되긴 오래된 녀석이구나 싶다. 좀 전의 가옥 내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마을의 역사에 비하면 전기같은거 들어온 건 아주 최근 들어서이기 때문에

형태를 갖춘 등불과 촛대들이 현실감을 간직한 채 전시되어 있다.

 

적당히 모양 갖춘 목재를 살짝 다듬어서 자연미를 살린 녀석도 있는 반면

대자연 속에서 폭발하는 예술 감각을 주체하지 못했던지, 멋들어지게 깎아낸 촛대도 보인다.

실용적이고 간소함이 느껴지는 물건들이지만, 금속 촛대나 옥 촛대 등은 그래도 좀 사는 편이라고 자부하던 사람들의 유산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전통 가옥의 내부 형태가 제대로 갖춰진 곳이다. 지금도 시라카와고의 여관이나 민박집에서는 이런 구조를 쉽게 볼 수 있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넓은 거실은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시간을 보내는 곳이었고

지금도 민박집에서는 다양한 국가의 젊은이들이 옹기종이 모여서 자신들이 가진 각각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의 날개를 펼치고 있다.

 

온통 목조로 만들어진 데다가 주변엔 산과 나무로 불러싸인 지형, 그리고 갓쇼즈쿠리의 생명인 거대한 억새 지붕은

모두 불에 극단적으로 취약하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마르고 말라 굉장한 밀도로 제작된 억새 지붕에 불이 붙으면

아무리 물을 퍼부어도,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에도 절대로 꺼지지 않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화재는 마을 전체의 운명이 걸린 최악의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그래서 수백년동안 어떤 괴로움을 감내하면서도 화재만큼은 막으려고 노력해 온 마을이고

이런 식으로 집안에 불씨를 피울 수 있는 곳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고, 반드시 모래더미 안에서만 재와 숯을 다룰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 민가원에 조성된 건물 중 절반 이상은, 예전 마을에서 화재로 소실된 녀석들을 100여년 전 재건한 녀석들이다.

억새 지붕의 수명이 30~40년인 것을 감안하면, 100여년 된 건물들은 새로 지은거나 마찬가지.

 

시라카와고에서 가장 오래된 이 건물은 175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척박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라도 마음의 여유가 있으면 인생은 즐거운 것이라 생각.

고양이 구멍이라고 이름지어진 조그만 구멍은, 말 그대로 고양이가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전용 출입구다.

당연히 곡식을 훔쳐가고 가옥을 갉아먹는 쥐를 잡기 위해 설치된 문.

 

물론 실용적인 고심의 결과 만들어진 결과물이겠지만

이렇게 머리를 문에 들이대고 조용히 쥐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냥이를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충분히 즐거웠으리라 생각.

실제로 갓쇼즈쿠리 가옥에 사는 산간 지역 주민들은 동물을 좋아하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아무리 대자연의 포옹 속에서 살아가도, 그만큼 쉽게 쓸쓸해 지는 곳이기도 하니까.

 

 

 

센스있게 냥이 인형을 딱 설치해 놓은 것도 인상적이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고양이가 없는 집이 없었다고 하는데, 재미있게도 요즘의 시라카와고에서는 고양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갓쇼즈쿠리 촌락 지역에서 좀 떨어진 일반 민가에는 평범하게 키우는 사람도 많겠지만

적어도 이곳에서 떠돌이 냥이를 만난 적은 없다. 사람의 도움 없이 이곳의 험한 자연을 극복하며 살기엔 냥이도 너무 물러져 버렸나.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게 냥이는 사람에게 잘 길들여지지 않고 적응력이 뛰어나니

자연으로 돌아가도 잘 살거라 생각하는데, 기본적으로 고양이는 따듯한 지역에서 살던 동물이다.

사시사철 추운 곳이라면 몰라도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큰 곳에서는 자연적으로 살아남기 힘들다.

특히, 쥐나 사육된 닭 따위를 잡아먹는 현재의 고양이가 자연계로 돌아가면 사냥가능한 동물은 거의 없기도 하고.

어떤 시뮬레이션에서도 현재의 고양이는 자연 상태에서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한다.

 

 

 

고양이가 가방의 의무를 다하던 주방 겸 창고.

목재가 풍부한 지역답게, 불과 직접 접촉하는 기구들을 빼면 대부분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지지대로 세워놓은 기둥 두 개가 이 곳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듯 하다.

 

 

 

아쉽게도 2층으로 올라갈 수는 없다. 일단 중요문화재이기 때문에.

갓쇼즈쿠리 건축물의 특징 중 하나로, 지붕이 높기 때문에 다락방이라는 개념이라기 보다는 그냥 복층 주택이라고 하는 편이 낫지만

실제로 층별로 사람이 살거나 하는 형식은 아니었다. 보통 창고로 쓰기도 하고, 에도시대 중기 이후부터는 양잠 등의 사내수공업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2층에 올라가 볼 수 있는 가옥은 마을 여기저기 산재해 있으니 체험하기 쉬운데

2~4층에 보이는 창문 크기가 성인 한 명의 신장만큼 크다. 보통 떠올리는 창문과 달리 지면에서부터 시작하는 창문이라 앞에 서 보면 약간 섬뜩하다.

 

 

 

일본이라면 어느 집에서나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불단.

화장이 주를 이룬지가 꽤나 오래 되었기 때문에, 보통 부모나 조부모의 유골함을 집 안에 두고 생활하는 편이다.

이 풍경을 보니 정말 이 집은 실제로 사람이 살던 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집을 구경하고 나가려는데 사진이 한 장 눈에 들어온다. 1930년대 이 집에 거주하던 가족사진이다.

요즘엔 시라카와고에서도 보기 힘든 조랑말을 사진으로나마 접할 수 잇어서 기분이 묘하다.

 

도착하고나서부터 사진을 계속 찍으면서도, 실제로는 참 살기 힘든 곳이라는 생각이 드는 곳이었는데

동물들과 함께 찍은 이 사진을 보니 이곳에서도 재밌게 한번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진의 꼬마는 아직까지 살아있다면 80세를 훌쩍 넘겼을 터, 어떻게 되었을려나.

 

이런 거미집은 아무래도 흔히 보이는 녀석보다 훨씬 더 긴 세월동안 만들어 진 녀석일 듯.

전통을 느끼러 방문하는 시라카와고의 갓쇼즈쿠리 양식과 왠지 어울릴 법한 집이다.

 

 

 

산책이랄 것도 없지만, 조금 걸어가자 본격적인 박물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입장료를 받는 곳인데도 '그냥 거기 있었던 것'처럼 조성된 자연스러움은

지금 여기가 박물관인지 사람 사는 마을 안인지 헷갈리가 만들 정도.

 

첫인상은 '자기가 지향해야 할 곳을 잘 알고 있는 박물관'이라고 표현할 수 있으려나.

 

 

 

하늘엔 여전히 구름이 잔뜩 끼어 있지만 날씨는 오전임에도 30도를 훌쩍 넘겼고

구름 너머에서 후광으로 멋을 부리고 있는 햇빛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이런 날씨는 지금 뿐인듯 하다. 저 구름이 걷히는 때부터 이곳은 최고의 한여름 날씨를 보여줄 기세.

구름과 안개에 감싸인 산의 모습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전통 가옥을 보러 오는 시라카와고지만, 이 주변 환경만 둘러봐도 시간 가는줄 모른다.

 

 

 

많은 관광객이 마을 쪽을 먼저 찾는지, 이곳엔 아직 사람이 거의 없다.

아마도 무료 관람이 가능한 곳을 먼저 돌아보고, 마음에 들면 유료 관람쪽으로 올 거라 나름 추측을 해 보는데

본인은 어차피 오늘 하루 시라카와고의 여름 풍경을 속속들이 빨아먹을 생각으로 왔기 때문에

최대한 사람과 섞이지 않도록 루트를 생각하는 중이었고, 다행히도 첫 번째 예상은 틀리지 않은 듯 하다.

 

혼자서 길 어디서나 멈춰서서 느긋하게 풍경을 즐긴 후, 슬금슬금 카메라를 치켜들고 셔터를 누를 때까지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누군가를 방해하거나 누군가가 방해하는 일이 없으니, 신선 놀음이라도 하는 기분이다.

 

 

 

겨울엔 끝없는 눈이 내리고, 연간 강수량도 상당한 곳이라 자칫하면 빗속의 관광이 될 가능성도 높았지만

이번 여행은 뭔가 날씨에 있어서는 축복을 받은건지, 가는 곳마다 화창하기 그지없는 날씨 뿐이다.

 

시라카와고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눈속에서 드러남에 틀림없지만, 그런 아쉬움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여름의 시라카와고 역시 눈과 귀와 마음이 편안해지는 장소라고 생각.

 

본래 자연의 매서움을 사람의 힘으로 극복해 살아가는 의지와 노력이 깃들어 있는 갓쇼즈쿠리 양식이라도

이렇게 풍요로움이 넘치는 한여름 풍경과의 묘하게 어색한 언밸런스 역시 대조를 이루어 관광객의 시야를 자극시킨다.

 

 

 

자전거로 오기가 보통 힘든곳이 아니지만, 그래도 세상에 괴수는 많으니

정말로 도보나 자전거로 이곳까지 여행오는 사람들이 있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탓에 현대식 호텔이 들어설 자리가 없고

노숙도 금지되어 있어서, 당일치기로 떠나지 않는 한엔 민숙이나 여관에 묵을 수 밖에 없는데

자전거 여행자들이 그런 사치를 누리기는 쉽지 않은지, 가끔 이런 공터에 텐트치고 자 버리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덕분에 마을 주민들도 골머리를 썩히곤 한다고, 돈이 없다는데 여관으로 가라고 할 수도 없고.

 

여행은 지역 주민들이나 외부 관광객들이나 상호 협조없이는 결코 만족스럽게 이루어지지 못한다.

돈 내고 왔으니 내가 갑이라고 큰소리 치는 천한 것들은 제발 여행따위 좀 때려치워 줬으면 한다.

뭐, 자전거 여행자들은 돈도 없으면서 은근히 자존심과 서바이벌 정신으로 불타는 애들이 좀 있기도 하고.

일본같은 풍요로운 곳에서 서바이벌 같은거 해 봤자 그냥 어린애 장난일 뿐이다.

 

 

 

이곳 민속 박물관은 원형으로 된 부지 위에 건물들이 아기자기하게 배열되어 있고

루트는 일직선으로 정해져 있지 않아서, 가옥들 뒤쪽 언덕으로 한바퀴 돌아보거나

조성된 개울가 주위를 산책하거나 하면서 마음대로 걸어볼 수 있다.

 

일단 입구와 출구도 같은 곳에 있기 때문에, 사실은 순로라는 방향지시가 별 의미가 없기는 하지만

사람이 많이 붐빌때나 단체 관광같은 경우에 필요한 하나의 가이드 역할 정도는 해 낼듯 하다.

 

길을 따라갈 일이 없으니 여기저기 뒤척이며 정신없이 동공 안에 이 풍경을 마구 각인시키며

거의 본능에 가깝게 카메라를 들었다 내렸다 하면서, 수능이라도 준비하는 학생처럼 맹렬한 기세로 관광을 즐기고 있다.

 

 

 

실제로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시라카와고 하면 생각나는게 갓쇼즈쿠리 양식 밖에 없었는데

직접 와서 감상해보니 갓쇼즈쿠리는 이를테면, 이곳의 본질이 만들어내는 부산물의 일종으로 인식되는 듯 하다.

눈과 비에 강한 갓쇼즈쿠리 양식이 태동하게 된 이유가, 시라카와고를 유명한 관광지로 만들어 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은 눈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생명력으로 넘쳐흐르는 듯한 압력을 느끼게 한다.

일본에서 이 정도로 생명력 넘치는 곳은 홋카이도의 비경 시레토코(知床) 정도밖에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중앙알프스 쪽이 원래 이런 곳이라서 완전히 생소한 것은 아니지만

험한 산맥 골짜기 사이의 조그만 평지에 형성된 마을의 외부와 단절된듯한 고립감과,

동시에 산맥의 풍요로운 품 속에 안긴 듯한 안정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곳은 그리 흔하지 않다고 본다.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지만, 과거에 사람이 살아온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갓쇼즈쿠리 건물과 함께

이곳의 폭발적이며 잔인한 생명력이 어우러진 결과, 눈에 보이는 풍경에는 고즈넉함과 함께 거칠고 율동적인 힘의 파동이 느껴지는 듯 하다.

 

가옥 역시 이곳 자연에서 난 소재만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위화감이라곤 느껴지지 않고,

여름의 은혜로 인해 억새지붕 위쪽도 푸른 생명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는 모습은

이곳이 겨울에 그렇게도 혹독한 곳인가 싶을 정도로 대조적인 인상을 남긴다.

 

계절의 흐름은 이렇게 사람에게 축복이 되는 동시에 시련이 되고, 그 반복에서 사람은 더욱 강인해 지는 것일까.

 

 

 

억새로만 지붕을 만들면, 눈은 둘째치고 비를 막을 수 있나 싶었는데

처마 밑에서 위를 올려다보니 그런 걱정은 별 의미가 없을 법도 하다. 두께도 밀도도 굉장해서 비가 샐 염려는 없을 듯.

실제로 이곳은 비도 아주 많이 오는 곳이지만, 태풍으로 지붕이 날아가지 않는 이상 비가 샌 적은 없다고 한다.

 

 

 

박물관에 위치한 가옥들은 전부 들어가 볼 수 있다.

마을쪽에 남겨져 있는 몇몇 중요문화재 건물들은 따로 요금을 받고 입장이 가능한데

이곳에서 이렇게 구경을 하다보니, 마을쪽 건물에는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될 듯 하다. 그쪽엔 사람도 많을것 같고.

 

갓쇼즈쿠리 건물도 시대 차이가 많이 나고, 지역에 따라 내부 양식은 차이가 큰 편이라

모든 집이 이런 구조는 아니다. 이 쪽은 특히나 기본적인 구조에서 많이 벗어난 듯한 모습.

날씨에 크게 곤혹스럽지 않은 지역에서 지어진 집인지, 꽤나 여유있는 공간 배치가 인상적이다.

 

 

 

유지 보수의 흔적은 확실하게 남아있어, 실거주 시기의 흔적은 조금 줄어든 느낌인데

그래도 몇몇 나무 기둥들은 한 눈에 봐도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모습을 하고 있다.

 

목재가 매우 풍부한 지역이었던 지리적 이점 외에도, 갓쇼즈쿠리 가옥의 지붕 이음새는

방향과 각도를 달리한 나무 기둥들이 엇갈려 배치됨으로서 하중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이런 구조에서는 탄성이 강한 목재가 금속성 재료보다 오히려 더 효율적이다.

눈이 쌓였을 때와 쌓이지 않았을 때의 하중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금속 기둥으로 지붕을 지탱하면 스트레스로 부러지거나 휠 가능성이 높다.

 

아마 이곳에서 금속을 쉽게 가공, 제련할 수 있었다고 해도 목재를 사용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결국엔 어떻게 돌고 돌아도 이 모습이 이 자연속에서 가장 적합한 모습이라는 것.

 

 

 

이 가옥은 이탈리아 한 도시와 자매결약을 맺은 기념 전시를 하는 중이라고 한다.

이탈리아도 참 가보고 싶은 곳인데, 비행기값이 워낙 비싸서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시라카와고가 산골 깊숙한 마을이긴 한데, 제대로 된 자치회도 있고 홈페이지도 열성적으로 만들며

많지 않은 인원으로도 축제 꾸준히 여는 부지런한 곳이라서 이렇게 이탈리아와 자매결연도 맺고 하는가 보다.

 

 

 

요즘 일반적인 주택 기준으로는 이것도 꽤나 큰 편에 속하지만

갓쇼즈쿠리 가옥치고는 평균적인 크기인 듯 하다. 물론 일가 전체가 한 집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은 방식이니까 클 수밖에 없다.

 

오른쪽의 살짝 튀어나온 부분은, 의외로 깨끗한 화장실이었다.

시골에서 제일 난감할때가 푸세식 화장실에서 풍기는, 형언하기 어려운 악취를 참으며 일을 보는 것이었는데

이곳은 다행히도 최신식 시설에다가 냄새도 전혀 나지 않는 깨끗함을 유지하고 있다.

 

 

 

건물 맞은편에 옛날 화장실이 놓여있었는데, 여기는 외관 분위기만으로도 그런 냄새의 악몽을 떠올리게 만들 법 하다.

지금은 폐쇄되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지만, 들어가고 싶지도 않다.

 

용도폐기된 간이건물이라 그런지 억새의 밀도도 떨어져있고, 주변 건물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어렴풋이긴 하지만 나이를 먹은 갓쇼즈쿠리 건물이란 이런 식으로 바래져 가는건가 싶다. 100년이 넘어 사그라지기 시작하는 봉분처럼.

 

 

 

시라카와고는 갓쇼즈쿠리 양식을 보존하고 있는 마을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곳이라

개발도 그만큼 많이 진척된 편이다. 교통도 나름 편리해졌고 관광객들을 위한 편의시설과 상점도 많이 생겼다.

 

반대로 다른 마을에 비해 전통성이라던가 고즈넉함은 오히려 떨어지는 편인데,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렇게 완벽에 가까운 상태로 옛 건물들을 보전하고 있는 박물관은 수려한 자연환경과 가옥을 하나의 틀에서 감상할 수 있어

마을 산책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곳보다 아이노쿠라(相倉) 같은 마을이 더욱 더 옛 모습을 잘 보존한 마을의 삶을 보여주는데

일본인이라면 몰라도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편리하게 이동 관광이 가능한 이곳을 배제하기가 쉽지는 않다.

여행에 있어서 시간관념에 대한 느긋함이란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될 요소인데

이것저것 다 즐기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 그런 돈을 벌고싶고, 그런 마음을 길렀으면 좋겠다.

 

 

 

이곳 박물관은 좁은 부지에 건물들을 마구 이전해 놓은게 아니라 충분히 산책이 가능한 지형에 넉넉한 공간을 두고 만들어 놓은 덕에

어떤 곳은 '왜 이렇게 넓은 마당이 비어있나' 싶은 곳도 있다.

 

사실 성수기때는 100명이 넘는 단체관광도 흔하게 일어나는 곳이라

현재 본인이 즐기고 있는 1인 관람과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생각해야할 공간적 구조가 느껴진다.

슬슬 하늘도 맑아져 오고 햇살은 따가워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의 공기 덕분에 아직까지 기분은 최고조에 달해있다.

나고야의 매연에서 탈출해 히다 타카야마의 깨긋한 공기를 이틀동안 즐겨서 나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깨끗한 타카야마와도 차원을 달리할 정도의 상쾌한 풀내음이 기분좋게 코를 자극한다.

 

이곳은 지형상 소가 없어서, 한국의 깊은 농촌에서 풀내음과 함께 섞여흐르는 구수한 소똥 냄새가 없다는게

오히려 약간 심심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곳의 자연이 뿜어내는 향기란 평범한 녀석이 아니다.

 

 

 

그리스 절벽아래 펼쳐지는 푸른 바다나, 스위스 초원의 가슴벅찬 풍경등과는 달라도

일본의 산간마을이라는 주제를 나타내는데 가장 알맞은 장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같은 동아시아 지역이라도 한국과 중국과는 확연히 다른 이미지를 가진다.

사찰이나 궁전 등 상당수의 옛 것들에서 나름 공통점을 보이는 국가들이지만

각각의 자연에 순응하는 인내와 적응력을 가진 오지의 주민들이 가지는 독특함은 다른 곳에서 흉내낼 수 없다.

삶이 고스란이 녹아들어가 있는 이 곳의 풍경은 동양인이 봐도 충분히 이국적이며 아름답다.

 

아침에 일어나서 조식먹으러 가며 '오늘 원래 체크아웃인데 1박 더 가능한가' 물어본다.

예정했던 시라카와고 근처의 온천여관이 연락을 받지 않아서, 그냥 당일치기로 이곳에 돌아오는게 좋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

실제로 그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려면 어차피 이곳 타카야마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지나치게 교통비를 많이 쓰는 루트이긴 했다.

 

오늘부터 일본은 진짜 휴가철 시작이라 직원에게 물어볼 때도 좀 걱정은 되었다.

타카야마에 숙소가 워낙 많아서, 이곳에 빈방이 없어도 그냥 아침 일찍 역앞에 가면 빈방 있는 호텔 찾는게 어렵지는 않지만

또 짐 챙겨서 나가고 하는거 굉장히 귀찮은 일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곳 슈퍼호텔은 여러가지로 마음에 든다.

 

일본서 가장 애용하는 비지니스 호텔은 토요코인이지만, 그건 서비스가 좋아서가 아니라 지점이 워낙 많아서이다.

슈퍼호텔이 위치한 도시에서는 가급적 슈퍼호텔을 이용하려 한다. 서비스의 질은 확실히 이쪽이 낫기 때문.

 

슈퍼호텔은 모든 지점의 객실에 열쇠가 필요없는 암호식 도어락을 설치했으며

카드키조차 필요없이, 숙박료를 지불하고 받는 영수증에 비밀번호가 적혀있어서 그 후로 카운터에서 기다릴 필요가 없다.

체크아웃 시간이 되면 자동으로 암호가 초기화되기 때문에 퇴실시에도 그냥 짐싸서 나가기만 하면 된다.

 

조식의 수준은 토요코 인의 두 배 정도 뛰어나다. 구색맞추기인 토요코 인의 조식에 비해

제대로 된 반찬이 최소 서너가지는 나오는데다, 낫토 등의 건강반찬도 항시 구비되어 있고, 음료수 자판기도 조식시간에는 무료 이용이다.

 

거기다 이번에 새롭게 도입된 시스템이 또 마음에 든다. 치약과 칫솔을 한국서 가지고 왔으니 이곳의 비치품을 사용할 일이 없는데

지나칠 뻔하고 넘어가려던 일회용 치솔세트 표지에 '사용하지 않은 칫솔을 프론트에 가져다 주시면, 소소하지만 과자를 선물해 드립니다'라고 적혀있다.

 

 

 

혹시나싶어 가져다주니 정말로 과자를 하나 준다. 과자 자체는 일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한 녀석이지만

크기는 매우 매우 작아서, 사실 한국 돈으로 300원쯤 할 만한 녀석이지만 그래도 칫솔 반납하고 받는 이 기분은 뿌듯하다.

환경보호도 되고 호텔측에서도 예산 절감에 도움이 되니 나쁠 거 없다.

 

슈퍼 호텔은 이런 식으로, 고객이 불편을 느끼지 않을 아슬아슬한 선까지 최대한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하고

그 여유자금으로 조식의 질이나 다양한 높이의 배게 등등 서비스의 수준을 높이는 방식을 사용중이다.

토요코 인에 비해 인간미는 조금 떨어지지만, 그 인간미도 접객능력이 좀 부족한데서 오는 어설픔의 미학에 들어가는 범주니까

숙소로서의 편의성만을 이야기하자면 슈퍼호텔이 더 앞선다고 볼 수 있다. 단 2013년 현재의 시점에서.

 

2008년 즈음의 슈퍼호텔은 아직 이런 시스템적인 우월성이 거의 느껴지지 않은 초보 수준이었고

불결해 보이는 실내 구조나, 과하게 절약하려고 하는 인건비 때문에 불편함도 느껴지곤 했었기 때문에

당시엔 토요코 인보다 더 추천한다거나 하고 싶진 않았다. 

 

그랬던 것이 5년 지난 지금에는 확실히 성과를 보고 있는듯 해서, 경영이라는게 참 피말리는 것이구나 싶기도 하다.

토요코 인은 한때 서비스를 너무 강화하다가 수지가 안맞았는지, 신용카드사처럼 슬슬 혜택을 줄여가고 있는 실정이라

현재로서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동급에서는 유일무이한 라이벌 체인이라 어떻게 승부가 진행되는지 구경하는것도 재미있다.

 

매번 말하지만, 요금 조금만 올리면 이 두 체인보다 훨씬 뛰어난 루트인 호텔이 있다.

비지니스 호텔은 필요하지만 너무 싸구려는 싫다 싶은 사람, 무조건 루트인이다. 불만스러운 점이 거의 없는 최고의 1인용 비지니스 호텔.

 

알아보던 직원이 조금 머뭇거리며 '방은 있습니다만'이라고 말끝을 흐리는게 묘하게 걱정된다.

원래 어제는 5600엔 정도에 투숙했지만 오늘부터는 성수기 시즌이라 요금이 7500엔으로 확 오른다고.

비지니스호텔이 8만원 가까이 하는건 확실히 뼈아픈 가격이긴 하지만 달리 방법도 없고, 이곳 시설수준이 꽤 마음에 들어서

흔쾌히 1박 추가를 요청했다. 사실 오늘 예정되었던 온천여관 요금은 그거보다 훨씬 비쌌으니 별 손해도 아니긴 하다.

 

진위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이곳 슈퍼호텔의 1층 온천도 진짜 천연온천이라고 크게 광고를 하고 있으니, 거기도 한번 이용해 볼까 싶다.

 

 

 

조식 든든히 먹고 타카야마역 버스 터미널로 나왔는데, 출발 20분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라카와고 방면의 버스 정류장 앞은 관광객들로 가득하다. 줄을 다 서지 못할 정도로 많은 인파라서

버스 한 대로는 다 타지도 못할 것 같은 걱정이 들 정도. 하지만 익숙한 일인 듯 버스가 꽉 차면 바로 후속버스가 사람을 실어간다고 한다.

 

시라카와고의 명성이 과연 허언만은 아니구나 싶다. 워낙 교통이 불편한 곳이라 이곳에서 버스 타는게 그나마 제일 편하고

타카야마 하나만 해도 외국인이 잔뜩 찾아오는 곳인데, 이곳보다 더 외진 곳인 시라카와고로 가는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미어 터진다.

 

아슬아슬하게 첫 번째 버스를 탔지만, 빈 자리 한 군데도 없이 빡빡하게 앉아있으니

차라리 뒤에 오는 버스를 좀 기다렸다 타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탑승객의 절반쯤은 외국인 관광객.

 

날씨가 생각만큼 화창하진 않았지만, 자주 언급했듯 일본의 전통 가옥들은 흐린 날씨에서도 충분히 매력을 발산하기 때문에 별 문제 없다.

좁고 험한 터널을 몇 개씩이나 지나가며 점점 현실 세계와 멀어지는 듯한 산속을 통과한 끝에, 마침내 탁 트인 공간이 보이며 안도감을 느낀다.

아침이라 주차장은 여유가 있는 편인데, 돌아가는 버스를 타려고 대기중인 외국인들이 꽤 많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하루 숙박을 한 듯.

타카야마 역시 자연 풍부한 곳이니까 괴리감이 덜한 편이지, 도시에서 바로 이곳 시라카와고로 이동하면 주위를 둘러싼 풍경에 현실감이 줄어들지도 모른다.

 

내리자마자 바로 다리가 보이는데, 저 다리를 건너면 마을이 나타난다. 하지만 예전부터 오고 싶었던 곳이라

바로 저곳으로 달려가 버리는건 왠지 좀 아까운 기분이 들어서, 반대쪽으로 돌아 걸어가 본다.

 

 

 

다리를 건너지 않아도 정류장쪽에도 옛 가옥들이 몇채 서 있다. 물론 대부분 장사하는 가게이긴 하지만.

구름은 잔뜩 끼었지만 비가 올 만한 구름은 아니고, 사이사이로 푸른 하늘이 비치는 걸로 봐서는, 조만간 구름이 걷혀질지도 모르겠다.

가게 간판이 약간 미스매치인 기분도 들지만, 여기서도 이곳 시라카와고 건물의 특징은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이곳에서 건축물 구경좀 하고 돌아가버려도 문제는 없을듯 한데

생각보다 훨씬 관광지화 된 느낌이 들어서 첫 인상은 기대보다 살짝 낮아지는 기분이 든다.

이곳 시라카와고를 포함한 주변의 몇몇 마을들은 특이한 건물 구조로 예전부터 이름이 높았지만

자전거로 이곳을 온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좁고 험한 길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지난 자전거 여행때는 보고 싶었음에도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았던 몇 안되는 장소중 하다였다.

 

문득 여름에 어디 가볼까 싶다가, 본가 차실의 벽에 걸려있는 달력 사진에 이 시라카와고의 전경이 나와있어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곳에 대한 흥미가 발동해 이렇게 찾아오게 된 것.

사실은 눈이 한창 내릴 무렵의 시라카와고가 진정한 모습이긴 하지만, 그건 언젠가 또 가볼 기회가 있으리라 본다.

 

 

 

상업 활동을 위해 오리지날에 비하면 여러가지로 개,증축이 이루어진 건물이긴 해도,

원래 어디서나 보기 쉬웠지만 이제는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건축양식을 유감없이 발산중인 건물은 갓쇼즈쿠리(合掌造り)라고 불리는 녀석.

뜻 그대로 합장하는 듯한 지붕 모양을 가졌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원래는 지역 여기저기에 많이 지어져 있었지만, 대부분 깊은 산골에 위치한 마을이었기에 점차 사라지고

이곳 시라카와고 근처와 고카야마(五箇山)에 어느 정도 원래의 모습을 보존중이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명칭도 '시라카와고와 고카야마의 갓쇼즈쿠리 마을' 이라고 되어 있어

버스에서 발을 내리는 순간부터 눈에 보이는 모든 부분이 전부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인구 1800명 정도의 아담한 산골마을인데,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만큼 개발에 제한을 받기 때문에 생활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관광객 입장에서는 버스 정류장 앞의 기념품점 혹은 매점이라는, 제일 상업성에 물들고 품질이 떨어질 듯한 위치에 놓인 가게들마저

놀라울 정도의 전통성을 유지하고 있다. 건물은 전통적인 갓쇼즈쿠리를 그대로 본받았고 군데군데 스며들어 있는 현대식 구조들도

스스로 모습을 감추는 듯 주위 분위기와 이질없이 통일감을 형성한다.

 

실제로 시라카와고 전체가, 건축물과 주변 환경의 조화에 있어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아예 없다고 할 정도로

이곳이 가지는 천혜의 자연환경과 전통 건축물의 조합은, 일본 안에서도 최고 수준으로 부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라 이번엔 아주 찬찬히 씹어먹어줄 요령으로, 다들 향하는 마을쪽으로 가지 않고 반대쪽으로 걸어가 본다.

뭔가 있을까 싶었는데, 입장료는 받고 들어갈 수 있는 '야외박물관 갓쇼즈쿠리 민가원' 이라는 곳의 입구아 눈에 들어온다.

 

설명을 보니 시라카와고에서 사용하지 않게 된 주택이나, 인근 마을에서 사람들이 떠날 때 두고 간 건물들을 모아서

옛 생활상을 표현해 놓은 민속박물관 같은 곳이라는 듯. 아직 마을쪽에 비해서 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가볍게 생각하면, 시라카와고에서 최대의 볼거리이자 유일한 볼거리인 이 갓쇼즈쿠리 주택은 마을로 들어가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데

굳이 입장료까지 내고 들어가야 할 이유가 있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장료를 받는다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다른 곳이었으면 아마 들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목표중 하나가 이곳 시라카와고였으니

오늘 이곳에서 보고 즐길 수 있는건 전부 다 휩쓸어 가겠다는 생각으로 망설임없이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간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본 갓쇼즈쿠리 건물이었지만, 한동안은 아무리 많이 봐도 심심하지 않을 듯 하다.

이곳 박물관에 진짜 사람이 사는 건 아니지만, 건물들은 실제 사람이 거주하던 것들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라

그 현실성과 함께,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묘한 모양새의 건물들이 내뿜는 비현실적인 감각은

앞으로 반나절 넘게 주욱 바라볼 예정임에도 불구하고 눈을 떼기가 힘들다.

 

 

 

꾸민다는 단어의 의미는 매무 미묘해서, 아주 사소한 표현방식의 차이만으로도 부정과 긍정의 경계를 넘어간다.

이곳 시라카와고에 도착해서 지금까지 주욱 느끼고 있는 점인데, 이곳은 분명 관광객을 위해 '꾸민' 곳이지만

결코 치장이나 가식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순수한 꾸밈이라는 기분이 든다.

 

마을에는 실제로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사람들은 장사를 위해 모여든 게 아니라 원래부터 이 험한 산속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사람들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생활은 나아졌지만 그래도 이들의 생활은 변하지 않는다.

따뜻할 때는 농사 짓고, 겨울이 오기전에 지붕을 수리하고, 끝없는 눈이 오면 그저 묵묵히 눈을 치울 뿐.

 

집은 예쁘고 튼튼하게 꾸며져 있지만, 사람이 꾸밈없기 때문에 마을에서는 순수함이 느껴진다.

 

 

 

당시 일기를 쓰면서도, 블로그에서 갓쇼즈쿠리에 대해서 설명을 늘어놔야 할까 말까 고민을 했었다.

일단은 단지 그 때의 시선만을 따라가기로 하며, 언젠가는 포스팅에서 설명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알고 가면 더 재미가 있는 곳이긴 하지만

모르고 간다고 해서 이 건축물이 가지는, 자연에 대해 순응적이면서도 저항적인 사람의 힘을 느끼기가 어렵지는 않다.

박물관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만나볼 수 있는 이 건물은, 갓쇼즈쿠리 마을의 전체적인 역사를 소개하는 안내소 역할을 한다.

 

 

 

그 앞에 놓인 갓쇼즈쿠리 지붕의 골격 샘플이다. 이제껏 나온 사진 몇장에서 어느 정도 감을 잡을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갓쇼즈쿠리 지붕은 어마어마하게 크고 무거우며, 경사 또한 따가울 정도로 매섭게 설계되어 있다. 지지대가 하중을 얼마나 견디느냐가 큰 관건.

혹독한 환경에서도 어떻게든 거기에 맞는 생활 패턴을 찾아가는 인간의 적응력은 언제 봐도 신비롭다.

 

이런 숲속이 뭐 그리 혹독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혹독하지 않은 곳이었다면 이런 가옥을 만들 이유가 있었을까?

해발 3000m 의 산맥에 둘러싸인 해발 500m 부근의 이 마을은 세계적으로도 눈이 많이 오기로 유명한 곳이다.

모스크바보다도 더 많이 내리며, 한국 최고의 강설량을 자랑하는 울릉도가 1.5m 정도인 반면 이곳의 평균 강설량은 10.5m 정도.

 

아주 오래전부터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긴 했으나, 워낙 산세가 험하고 눈이 많이 내려서 주위 마을들이 점차 사라져 가고 있었으니

전후 일본이 이렇게까지 부흥하지 못했다면 아마 갓쇼즈쿠리 마을 전체가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를 정도로 살기 힘든 곳이었다.

 

 

 

안내소 안에는 비디오 상영이나 예전 신문기사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에 직힌 60년대 도로 사정을 보면, 그나마 저게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시절의 모습이라는 게 다행스럽다고 해야 할까.

자동차도 전기도 없는 시절에 이곳 사람들이 어떤 생활을 했을지는 그리 어렵지 않게 상상이 가능하다.

 

당시 시카라와고 근처의 카즈라(加須良)라는 지역은,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서 마을 전체가 집단 이촌을 실행했는데

그때 남겨진 갓쇼즈쿠리 건물들을 옮겨와 보존한 것이 이곳 야외박물관이라고 한다.

 

 

 

2층에는 갓쇼즈쿠리 건물의 미니어처가 전시되어 있는데, 크기만 작을 뿐이지 거의 그대로 옮겨왔다고 보면 된다.

지붕이 워낙 두껍고 가파르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집의 다락방과는 달리 4~5층에 달하는 공간을 조성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집이 커지고, 이곳 사람들은 친족 전체가 모이는 공동체 생활형식을 따르게 되었다.

겨울 약 4개월 가까이 밖에 나가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폭설이 내리는 곳이라, 집단생활은 생존에 중요한 요소였다.

현재는 주위에 댐도 많이 건설되고 전기도 들어오기 때문에 살만 하지만, 예전엔 겨울을 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이었다.

 

이런 식의 건축물은, 눈의 무게를 분산시키는데 특화되어 있지만 난방 등에는 매우 취약하다.

그저 눈에 파묻히지 않기 위해 나머지를 포기하고 인내의 시간을 보냈던 것이 이 갓쇼즈쿠리 가옥.

실제로는 더욱 공고히 연결되어 있는 현대사회임에도, 너무 광범위한 네트워크로 인해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진부한 말의 의미는, 이곳 시라카와고에서는 단어의 의미가 살갗을 파고들 만큼 절실하리라 생각한다.

이곳은 함께 살아가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곳이었으니. 협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밖으로 나오니 길이 군데군데 갈린다. 꼭 순번대로 돌아다닐 필요도 없는듯 하다.

이런 작은 건물은 보통 거주용이 아니라 창고 역할을 한다.

 

마을의 95%가 산지라서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지만, 갓쇼즈쿠리 건물의 지붕을 유지 보수하기 위해서

적지 않은 양의 억새와 땔깜용 나무를 저장하는 공간이 필요했다. 

마찬가지 이유로 소보다는 말이 유용했고, 곡식 역시 동물의 힘보다는 넉넉한 물의 힘으로 물레방아를 돌리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고.

 

 

 

그런 물레방앗간의 모습도 참 고즈넉하게 전시해 놓았다.

야외 박물관이고, 실제 사용하던 건물들을 이전해 놓은 것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풍요롭고 보존 상태가 훌륭한 모습은 아마 실제 주민들의 생활상과는 좀 다를수 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현재 사람들이 생활중인 시라카와고 내부의 갓쇼즈쿠리 60채조차 유지 보수하는데 큰 노력이 따르는데

그 험한 산골에 방치된 폐가들을 하나하나 분해해서 이곳까지 가져와 다시 재건하는 일은 어땠을지.

 

본인의 성격이 좀 뒤틀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사람 살지않는 이런 박물관에서는

좀 더 당시의 생활상을 과격하게 표현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곳에서야 물론 아름다운 세계문화유산을 최대한 소개하고 싶겠지만, 시라카와고는 고요함 속에서 자연에 대한 거친 투쟁으로 완성된 마을이니까.

 

 

 

물레방아는 한중일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거의 비슷하게 분포되어 있으니 그리 신기할 건 없다.

단순한 움직임이지만 왠지 어릴적엔 요녀석이 언제 방아를 쿵하고 찧을까 기대하며 한참을 바라봐도 질리지 않았다.

 

일본의 중앙알프스쪽은 의외로 물이 풍부해서, 아직도 물레방아를 쓰는 곳이 조금 남아있는데

아직 기계로 찧은 밀가루와 물레방아로 찧은 밀가루를 이용한 빵이나 과자, 국수의 맛 차이를 체험해보지 못해서

과연 맛이 다르긴 할까 하고 가끔 상상을 해 보곤 한다.

 

 

 

빙글 돌며 올라가는 언덕 위에는 본격적으로 여러 건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듯 하다.

이곳 박물관은 입구부터 처음 물레방앗간 까지는 그냥 자연 풍부한 산책로 느낌이라

돈 내고 들어와서 조금 실망할 수도 있을법 하지만, 좀 더 들어가기 시작하면 그 입장료가 아깝지 않은 건축물들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다.

 

마을쪽의 갓쇼즈쿠리 건물은 상당수가 민박집이나 가게를 열고 있고, 평범한 가정집이라고 해도 사람이 살고있으니 마음대로 들어갈 수가 없는데

이곳은 박물관이라 그런 염려가 없이, 계획적으로 디자인된 길을 따라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장점이라고 했지만 사실 단점으로 생각될 수도 있긴 하다. 사람 사는 냄새는 외국 여행에서 중요한 요소니까.

 

 


설마 여기까지 와서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있을것 같진 않지만

입구 만들어놓고 박물관이라고 해 놓았어도, 사실상 박물관 주변에 담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다.

 

이곳에 태어나서 처음 온 본인으로서도, 그냥 뒤쪽에 수풀 좀 헤치며 들어가면 얼마든지 숨어들어갈 수 있을듯 하다.

역시 이곳까지의 교통비만 수만원이 넘는 곳이다보니, 겨우 500엔의 입장료를 아끼려고 이 고요한 마을을 더렵히진 않겠지.

도쿄의 시부야 같은 곳이라면 왠지 사악해 질 수도 있을것 같지만, 이곳의 가득한 녹색은 사람 마음을 씻어주는 기분이다.

 

 

 

약 7시간동안 돌아다니기에 그리 다급하지 않은 조그만 마을이지만

카메라 들고 다니며 사진 담는데는 생각만큼 널널한 시간도 아니다.

 

보통은 렌즈를 바꾸지 않고 한바퀴 돌며, 그 다음 렌즈를 바꿔서 또 한바퀴 도는게 보통인데

이번엔 그럴 만한 시간적 체력적 여유가 없을 듯 하다. 여전히 온도는 꾸준히 올라가고 있다.

 

번거롭긴 하지만 그때그때 상황 봐 가며 렌즈를 갈아끼우며 전진한다.

혼자 서서 렌즈 꾸물꾸물 교환하는게 좀 민망하긴 해도, 이곳만큼 사진 찍는데 부담가질 필요 없는 곳도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분위기를 보아 하니, 오늘 진짜 마음먹고 배터지게 사진 찍을 수 있을법한 기분이 든다. 마음에 들지 않는 풍경이 없다.

 

근본대탑의 동쪽에는 몇 채의 불당과 동탑이 서 있는데

이 위치에서 더 이상 동쪽으로 걸어가는건 무리라고 판단.

이제 슬슬 버스 정류장쪽으로 방향을 틀지 않으면, 가능성은 희박해도 버스를 놓칠 가능성도 있어서.

 

결국 단상가람에서 내가 본 가장 동쪽 건물은 이 녀석, 대회당(大会堂)이 되었다.

대회당 오른쪽에 빼꼼 보이는 건물은 삼미당(三昧堂), 그리고 그 옆에 보이는 탑이 동탑(東塔)이다.

전 포스팅에서 언급했듯이, 서탑과 달리 동탑은 너무 현대식 느낌이 나서 패스해도 그닥 아쉽진 않다.

 

이 대회당은 1848년 재건되었고, 원래는 아미타여래를 모시는 불당이지만

현재는 진언종 승려들의 법회소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사진 찍을만한 포인트 앞에 청소용구를 담은 수레가 서 있어서, 좋게 생각하면 체험! 삶의 현장이 느껴진다고 할까.

 

이 대회당에서 정남쪽으로 쭈욱 걸어가면 출구가 나오고, 거기서 30m 정도만 더 가면 버스 정류장.

나름 끈기와 오기로 아침부터 오만 곳을 다 돌아다녔지만, 이제는 의욕 자체가 사라질 정도로 지쳤다.

사실 8시에 전철 타기 시작해서 지금 오후 3시쯤이니 그렇게 많이 돌아다닌 것도 아닌데

기분상으로는 북한산 두 번은 탄 듯한 느낌. 등산 스틱이라도 있었다면 어떻게 더 버텨보겠는데 그런건 없다.

 

 

 

정면으로 뻗는 출구를 향해 삐그덕거리며 걸어가는데, 단상가람에서 구경할 마지막 불당이 나타난다.

생크림 케이크 윗부분의 딸기는 맨 마지막에 음미하는 성격이라서, 일부러 이 녀석을 가장 마지막에 둘러본 셈이다.

1197년에 세워져 현재 코야산의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인 부동당(不動堂)의 모습.

 

부동명왕을 안치한 곳이라는 의미의 부동당은 800여년의 세월동안 숱한 화재와 방화에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역사의 산물.

당연하게도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런 것치고는 굉장히 가까이서 마음껏 구경할 수 있다.

 

 

 

카마쿠라(鎌倉)시대의 건축양식이 고스런히 녹아있는 귀중한 녀석인데

사실 1800년대 재건된 가람내 대부분의 불당들도 이 카마쿠라 건축양식을 기본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이 녀석만 특출나 보인다거나 하는 건 없다. 단지 이 부동당의 지붕과 처마, 단청의 모습을 살펴보면

다른 불당보다 간결하고 단순하게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소실된 녀석을 재건하다보면 아무래도 좀 더 치장을 하게 되는 것일런지.

 

카마쿠라 시대는 1180년대부터 1330년대를 어우르는 시기로  

카마쿠라 막부 자체는 도쿄 바로 아래쪽 카나가와(神奈川)현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중기까지는 여전히 쿄토 조정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년수도라는 쿄토를 중심으로 한 시가(滋賀), 효고(兵庫), 미에(三重), 나라(奈良), 와카야마(和歌山)까지 5개 현을

수도의 근방이라는 의미의 킨키(近畿)지방이라고 불렀고, 거기에 속한 코야산에도 여전히 그 당시의 문화재가 많이 남아있다.

 

보통 오사카 하면 전부 관(関)의 서쪽이라는 의미의 칸사이(関西) 지방이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많은데

엄밀히 칸사이라고 하면 교토 서쪽의 모든 지방 (현재로서는 심지어 오키나와까지)을 뜻하기 때문에

킨키지방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재를 킨키 문화라고 하지 칸사이 문화라고 하지는 않는다. 물론 나이 지긋하게 든 사람들이.

 

 

 

막상 현재의 카마쿠라 지역에 가 보면 남아있는 몇몇 중요문화재 외엔, 한때 일본 문화의 중심지였던 흔적이 거의 사라진 상태인데

한국의 경주와 딱 맞아떨어진다는 느낌, 그땐 그랬지라는 그리움만 남은 채 추억을 회상하는 정도의 흔적밖에 남아있지 않다.

 

일본의 쿄토에 뒤쳐지지 않고, 천 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수도로서 명성을 떨쳤던 경주가, 쿄토와의 비교는 어림도 없이

카마쿠라 정도에 비교된다는 사실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야후 어디에 서식하는 정신나간 일빠같은 소리를 한다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카마쿠라와 쿄토를 한번씩 가 보면 그 안타까움이 어떤 것인지 어렵지 않게 느끼리라 생각.

 

 

 

부동당의 보존 상태야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이 놀라울 따름이지만

한국에서는 그것보다, 숭례문 소실 당시 비교대상으로 이 녀석을 신나게 칭송했던 기록이 있어서 그쪽으로 더 유명한 편이다.

 

어디에 그런 장치가 되어있는지, 사실 보고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절묘하게 감춰놓긴 했지만

이 부동당 주변과 지붕 곳곳에는 첨단 스프링쿨러 시스템이 장착되어 있어서

화재 감지시 자동으로 무수한 물길이 불당 전체를 휩싸도록 되어있다.

 

부동당 뿐만 아니라 단상가람내 중요 불당들, 그리고 코야산 전체의 중요문화재에는

이러한 스프링쿨러 시스템이 거진 장착되어 있으며, 이 시스템의 파이프라인 길이는 8km에 달한다고 한다.

더더욱 감탄할 만한 점으로, 이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물탱크는 이곳보다 200m 쯤 높은 산봉우리 정상에 위치해 있어서

펌프 등이 작동하지 못하는 비상시에도 문제없이 물을 뿜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900리터에 달하는 물탱크는 코야산 전체 시스템을 일시에 가동시킨다고 해도 5분동안 물을 배출할 수 있으며

5분이면 소방대가 코야산 어디든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점,

물길은 불당의 손상을 최소화 하기 위해 매우 세밀하게 퍼져나가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점 등등...

한국 사람으로서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솔직히 좀 비참한 느낌마저 든다.

왜냐하면, 이 시스템은 이미 1960년대부터 설치되어서 꾸준히 업그레이드 되고 있기 때문에.

 

숭례문 소실 당시 한국 취재팀이 방문했을 때, 이 곳의 방재시설을 한번 가동한 적이 있어서

관광객들도 놀라고, 기자들이 사진을 많이 담아왔기 때문에 지금도 인터넷 기사를 찾아보면 그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일본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 찬란한 문화를 가진 한국이라도, 이 폭력에 가까운 안전불감증 만큼은 뼈저리게 부끄러워 해야 한다고 생각.

 

 

 

부동당 관람을 마지막으로 단상가람을 뒤로 한다.

출구까지는 원만한 내리막길로 되어 있어, 내려가다가 살짝 아쉬운 마음으로 부동당의 모습을 한 장 더 담아본다.

 

지금까지 돌아본 것들은 단상가람의 약 70% 정도로, 제대로 관람하지 못한 곳도 몇몇 있지만

전부 다 관람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서는 편안한 마음으로 둘러볼 수도 없고

지금 다리 상태로 이 정도라면 후회 남기지 않을 만큼 있는 힘을 다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머지 녀석들은 다음 기회의 즐거움으로 남겨 놓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다 둘러볼 여력이 없었다고는 해도

돌아가는 길 도중에 눈에 들어오는 이런 꽃들은 부담없이 찍어줘야지.

참 신기하게도, 살아있다는 확신이 들게 만들어 줄 정도로 리드미컬하게 욱씬거리는 발목의 통증도

뷰파인더를 들여다 보면서 왼손으로 촛점을 슥슥 맞추는 이 순간만큼은 완전히 잊혀지는 듯 하다.

물론 찰나의 순간이긴 하지만, 사람의 정신이란 참 편리하고 고성능이구나 하는 생각이 자주 드는 하루였다.

 

 

 

출구에 거의 다다라서 고개를 돌려 봤다.

오쿠노인을 거닐면서 - 이런 표현은 내가 펼쳤던 묘기에 가까운 휘적거림에 비하면 좀 고상하지만 -

느꼈던 고요한 충격만큼은 아니었지만, 이곳 단상가람의 푸근한 모습도 더할 나위 없이 내 심란한 마음을 다독여 준다.

 

아침에 절룩거리며 전철을 탈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해서 과연 만족할만한 곳일까 걱정했던 마음은

이제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오지 않았다면 두고두고 후회했을 거라는 마음으로 바뀌어 버렸다.

 

 

 

단상가람을 빠져나와도 주변 풍경은 여전히 꿈길을 걷고 있는 듯.

어찌보면 보통 마을보다 사찰이 더 많은 것 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오쿠노인을 빠져나왔을 때는 설국의 도입부를 읽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눈 앞에 버스 정류장이 보이니 어쨌든 저기까지만 가면 오늘 하루는 끝이라고 되내인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 이제 일단 코야산 여행은 끝이 난 느낌이다.

눈 앞에는 코야산의 각종 국보와 문화재들을 모아놓은 영보관 표지판이 보여서 조금 낙심.

정상적인 발걸음이었다면 아마 저기까지 돌아보는데 아무 문제도 없었겠지.

 

중요문화제가 워낙 많아서 한꺼번에 전시하지 못하고 기간별 로테이션 방식으로 전시한다고 한다.

 

단상가람 내내 끼고 다녔던 35mm 렌즈 내려놓고 가방 안에서 굴러다닌 70-300 렌즈 손질 좀 하고 있으니

나이 지긋한 노부부 한쌍이 슬그머니 옆자리에 앉는다.

남한테 말 먼저 거는 성격이 아니라서 시치미 뚝 떼고 있는데

어느 나라나 노인층이 손아래 사람에게 말거는게 더 편한 듯, 카메라 좋은거 쓰네~ 라고 운을 떼주신다.

 

일단 말 한마디 통하고 나면 이쪽에서도 별로 부담없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다.

70-300 렌즈라고 하니 그럼 실제 화각이 105-450이 되는거냐고 물어보시는걸 보면 카메라를 좀 아시는 분.

135 판형과 똑같은 센서 쓴다고 말씀드리니까 좋은 사진 많이 남겼겠네라고 웃으신다.

사실 그런 말 들으면 괜히 더 쪽팔려서 보여드리질 못하는데...

실력별로 카메라 크기가 커진다고 하면 난 미러리스 써야 한다.

 

두분 모두 67세이고, 오늘 새벽 카마쿠라에서 여기까지 기차타고 여행중이라고 하신다.

카마쿠라에서 이곳까지는 서울에서 부산보다 조금 더 먼 거리인데, 내 부모님보다 더 연세 드신 분들이

새벽 6시에 신칸센 타고 여기까지 놀러왔다는게 굉장히 보기 좋고, 한편으로 부럽기도 하다.

일본 나이로 67세라면 한국 나이로 68~69세인데, 온통 도보이동 뿐인 코야산을 누비고 다니시다니.

더구나 이대로 쿄토로 가서 쉬고, 내일은 나라(奈良)를 구경하신다고.

결혼이라는걸 긍정적으로 바라볼수 있는 극히 희귀한 경우를 이 부부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이곳 사찰들 상당수가 카마쿠라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카마쿠라에서 이곳에 구경왔다는 사실이 뭔가 재미있다고 말씀드리니

살짝 손사래를 치시며, 그곳도 쪼~금은 볼만한게 있지만 여기하고는 비교가 안된다고 하신다.

일본인들이 봐도 이곳은 보통 훌륭한 곳이 아니니까. 사찰도 훌륭했지만 마을 전체의 느낌이 매우 고즈넉한 점이 좋단다.

본인도 나름 일본 여기저기 돌아다녀 봤는데, 이런 곳은 정말 흔치 않다고 맞장구를 치니까

살짝 이해가 안되는 표정을 지으시더니 할머니깨서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신다.

 

그 다음부터는 뭐, 자전거 여행동안 시도때도 없이 들어본 레파토리의 반복.

한국서 왔다고 하면 일단 놀라고, 일본어는 어디서 배웠느냐고 하고, 구별이 안간다고 하는 등등...

한국에는 코야산같은 문화재가 있냐던가, 한국에 세계유산에 등재된 곳이 있냐던가 하는 질문도 받았는데

한류 아이돌이나 김치 등을 통한 식문화 등으로 익숙한 요즘 세대들과 달리

이 나이대 분들은 한국에 대해 그다지 아는게 없는 듯 하다. 애초에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가 이제껏 아시아에 관심이 없었으니.

 

 

 

버스를 탈때 뒤로 물러나서 '먼저 타세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역시 한국사람들이 예의바르다고 기뻐하신다. 음, 예의 이전에 일본에는 이런 격식 자체가 없다고 알고 있는데...

지키고 안지키고의 문제라기보다,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행위 자체는 대체로 어디서나 좋게 평가받을 듯.

 

물론 한국에서도, 자리 비켜주다가 '내가 그렇게 늙어뵈냐!'라고 욕지거리를 들어먹은 지인의 케이스가 있어서, 그냥 사람 나름인갑다.

노부부는 분명 국제 정세 등에 관심이 많은 인텔리전트 부류라고 개인적으로 판단했는데,

요즘 일본 뉴스의 주요 화제가 중국의 오만하기 짝이없는 꼴불견들이라서 그런 면도 있지만

이 부부는 대부분 두리뭉실한 관념을 갖고 있는 일본 사람들과 달리 3국 관계에 대해 꽤나 예리한 시각을 갖고 있었다.

 

식민지 시절의 한국에게 정말 못할 짓을 한 것이 엄연한 사실이고, 거기 대한 사죄와 보상이 미흡한 것도 사실인데

잘못을 넘긴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현재 대책없이 날뛰고 있는 중국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한국과 일본의 우호 협력이 아닐까라고 자신들은 생각한다고 꽤나 논리정연하게 말씀을 하신다.

노인들이나 젊은이들이나 과거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교육조차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정황을 잘 모른다면서

이제 바톤은 나같은 젊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대화를 해서 풀어나가야 한다는 의견도 주셨다.

 

딴건 몰라도 현 중국의 실태에 대해서는 나와 전적으로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서 대화가 스무스하게 이어진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정치인 쪽에서의 문제는 심각해서, 국가 교류에 큰 걸림돌이 되는 것 아니냐고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눠봤지만

정작 내가 일본 정세에 대해서는 그렇게 빠삭한 편이 아니라서 좀 더 깊게 들어가지는 못했다.

덤으로, 중국같은 독재 상태에서야 개선하려는 노력조차 소용이 없으니, 그 인간들 진짜 문제라는 면에서는 모두들 의기투합.

 

북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한국 사람 상대라서 조금 조심하는 어투로 말씀을 하시던데

나야 북한이라는 곳을 제대로 된 국가 취급하지도 않고, 세뇌당한 그쪽 국민들한테 동정심 같은것도 없는 사람이라서.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다가 코야산역에 도착. 노부부는 여기서 시간 좀 보낸다고 하셔서 작별인사를 나누고 서둘러 케이블 열차를 탄다.

내려갈때도 맨 앞쪽으로 가고 싶었는데 발목때문에 어기적거리다 보니 사람들이 꽉 들어차 버렸다.

어쩔 수 없이 급한대로 망원렌즈로 틈을 잡아가며 간신히 한장 건진 정도. 사실 꼭 찍어야 한다는 생각도 없긴 했다.

 

코쿠라쿠바시역에서 전철을 타고 하시모토역까지 돌아가 다시 전철을 갈아타는, 이곳에 올 때와 역순으로 행동중.

앉아 있어도 도무지 발목의 통증이 가라앉질 않아서 전혀 편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전철 안은 아침과 달리 그럭저럭 붐비는 편이었는데, 하시모토역에서는 관광객뿐 아니라 교복 입은 학생들도 많이 보인다.

미리 앉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좀 전의 그 노부부가 전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눈이 마주쳐서 인사를 하니까 반갑게 놀라면서, 3명이 앉을 수 있는 빈 자리로 손짓을 하신다. 아프지만 흔쾌히 자리 이동.

자기들은 역 앞 까페에서 커피 한잔 마시고 오는 길이라고 하신다.

 

좀 전엔 서로 이름도 안 물어봤는데, 마에다(前田)라고 자신을 소개한 노부부는 두 번째의 만남에 굉장히 즐거워하는 분위기.

인생 일기일회(一期一會)라는 격언이 있다면서, 한 번만 만나도 인연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두 번씩이나 만나게 되는건

아주 소중한 인연이라고 하며, 피로회복용 초콜릿을 꺼내서 한 조각 건내주신다.

중간까지는 같은 전철을 타고, 도중에 쿄토행 전철로 갈아타신다고.

 

그 일기일회라는 격언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내게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단어.

2008년과 2010년 두 번의 일본 자전거 여행 중,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사해 준 사람이 나에게 해 준 말이기 때문이다.

 

 

 

잠시 시간을 되돌려서 2008년의 이야기를 해 본다.

 

자전거 여행 당시, 후쿠시마에 도착한 것은 오후 7시. 더 이상 자전거를 타기엔 힘들 정도의 어둠이 깔리던 시간이고

도쿄에서 여기까지 달려오며 떨어진 체력과 밀린 빨래 등으로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적당한 숙소라도 잡을까 싶어 근처 파출소에 가서 물어보니, 한참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리던 순경이 '여기가 괜찮고 싸다'며 추천해 준 호텔.

 

쿠니미(国見)라는 조그만 마을로, 여기서 얼마 안 걸린다고 해서 가뿐한 마음으로 출발했는데

거리는 거리대로 꽤나 멀었고 설상가상으로 그곳까지 가는 도로가 공사중이라서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길에, 자갈과 바위가 드러나 있는 비포장 공사길을 장님처럼 덜컹거리며 달려

30분만에 간신히 그 호텔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친절한 순경아저씨한테 마음 속으로 불평 한마디 하고 카운터로 향했었지.

 

막상 카운터에 들어오자 커다란 스크린에 각 객실의 사진이 화려하게 전시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이거 혹시 러브호텔 아닌가 해서 당황하고 있는데, 카운터에서 후덕한 아주머니가 매우 친절하게 인사를 해 주셨다.

숙박도 가능하냐고 하니 물론이라고 하는 걸 봐서, 러브호텔과 일반호텔을 겸하는 듯 했다.

평생 러브호텔에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 어쨌든 반쯤 경계심을 품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는데

자전거에 짐이 많아서 천천히 옮기겠다고 하자, 걱정말라고 하시며 안쪽에 있던 가족들을 전부 불러서 함께 짐을 들어주셨다.

 

한국서 와서 자전거 여행중이라고 하니 놀라워 하시면서, 자기 딸이 지금 한국에 수학여행 가 있다고 하신다.

자기도 한국 배우들 너무 좋아한다고. 욘사마 어떻냐고 하시길래 가감없이 솔직하게 '지금와서는 좀 낡은 느낌이죠'라고 했더니

짐 옮겨주던 가족들이 '그거 보라고!'라고 하면서 맞장구를 치는 모습에, 아주머니가 욘사마 꽤나 좋아하는가 싶었다.

 

당시 한국선 누가 인기있냐고 하길래 잠시 생각후 이병헌이 좋죠 라고 하니, 그사람도 좋아한다고 아주 기뻐하시더군.

달콤한 인생을 추천해 드리고 (놈놈놈은 개봉하지 않았다) 좀 잔인하니까 조심하라고 미리 경고도 해 드렸다.

 

모두 함께 짐을 옮기고 나서, 빨래할 게 많을테니 느긋하게 목욕 후 옷가지들을 전부 달라고 하신다.

원래 그런 서비스가 있을 리가 없어서, 괜한 폐 끼치기 싫어 스스로 하겠다고 말씀을 드리자

아주머니가 꺼내신 말이 '일기일회' 였다.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분명 인연이니까, 호의를 배풀 수 있는 자기 쪽이 오히려 기쁜 편이니 부담없이 받아들이라고.

혼자 노숙해가며 밥 만들어 먹는 장거리 자전거 여행 중, 이런 말을 들을 때는 정말 가슴이 꽉 막혀오는 느낌이 든다.

자칫하면 정말 울컥할 수도 있었지만

바로 전날 결국 눈물 글썽이게 만들어 준 농촌 노부부와의 사연이 있었기 때문에 간신히 감정을 추스리고 호의를 받기로 했다.

이 노부부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생략. 계속 써내려가다가는 여행기 전체를 쓰게 될 지도 모르니까.

 

더군다나 세탁물을 받으러 올 때, 간단하게나마 식사까지 준비해 주셔서

호텔 로비에 들어갔을 때의 막연한 의구심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미안했다. 이렇게 고맙고 미안한 적이 평생 있었나 싶을 정도로.

 

편안한 밤을 보내고, 정성스럽게 갠 뽀송뽀송한 세탁물을 받고, 나갈 때 자판기에서 음료수까지 서너개씩 뽑아주시던

그 호텔 사람들의 호의는 정말 뼈에 사무치는 것으로, 그 전까지는 단순한 격언에 불과했던 '일기일회'가

그때부터는 마음의 가장 깊숙한 곳에 뿌리를 내려 그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인생의 지표가 되어 주었다.

 

 

 

그 고마움을 잊을수가 없어서 2010년 자전거 여행때 또 다시 그곳을 찾게 되었다.

이번에는 감사의 표시를 위해 일부러 밝은 오후 4시쯤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소소한 선물을 가져오긴 했지만

숙박료라도 두둑하게 드리는 것이 그나마 할 수 있는 보답이라고 생각해서.

 

러브호텔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일찍 투숙하면 요금이 좀 더 오르게 되는 점을 생각한 행동이었는데

나를 본 아주머니는 그야말로 잔치 분위기가 되어서 가족들 다 부르고, 아침에 교대하는 시아버지에게 전화까지 하는 등

더할나위 없이 반가워 하시며 맞이해 주셨다.

 

감사의 표시를 해야겠다는 당초 목표에도 불구하고, 아주머니는 오후 8시에 투숙했을때나 가능한 최저 숙박요금만 내면 된다고

한사코 거절을 하셔서 무리하게 돈을 쥐어줄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러브호텔 방식이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호텔은 체크아웃 할때 입구쪽의 기계에 표시된 숙박료를 집어넣으면 방문이 열리는 구조라서

내가 더 내고 싶다고 해서 더 낼수도 없는 형식이고, 직접 드린다고 해도 받을 분위기가 아니라서 더욱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세탁물을 다 받아가시고, 간단한 라멘이나 주먹밥 정도가 전부인 석식 메뉴 (그것도 원래는 유료)가 아니라

차를 타고 밖에 나가서 초밥과 맥주, 술안주까지 준비해 주시는 통에, 감사 인사 하러 왔다가 더더욱 몸둘 바를 모르는 형태가 되어 버렸다.

아주머니는 평생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게 되니까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다고 기뻐해 주셨다.

 

30년을 살아온 한국에서도 겪어본 적 없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환대라는 것을 평생 처음으로 방문한,

그것도 스쳐 지나가는 여행길 시골마을의 조그만 호텔에서 받았다는 사실은

타국에서의 자전거 여행이라는 찰나같은 순간에서, 수많은 우연과 우연이 겹치고 겹쳐 만들어 낸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술을 안마시는 내가 그렇게 즐거운 기분으로 맥주를 들이킬 수 있었던 게 신기할 정도. 그 날의 만찬은 인생 최고였다.

게다가 아침에는 식당을 열지 않는 러브호텔인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근처 편의점까지 가서 도시락을 사다 주시기까지 했으니.

 

 

 

한참동안 눈을 뗄 수 없게 만들던 약봉지.

아침식사와 함께 건내주셨는데, 비상시 꼭 필요한 위장약과 감기약, 두통약, 반창고를 넣어주셨다.

약품별로 쪽지까지 붙여 놓았을 뿐더러, 한자를 읽기 어려워 할까봐 위에 독음까지 적어주시는 꼼꼼함까지.

 

정말 당시에는 내가 이렇게까지 행복해도 될까 하고 생각할 정도였지.

격언이라는 건 외워놓으면 누구나 말할 수 있는 녀석이지만, 그 격언을 정말로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옆에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꾸준히 손님이 줄어드는 시골 국도변의 러보호텔 사람들이 내게 보여준 마음은

어떠한 위대한 지혜나 삶의 업적, 사회적 지위 등이 없이도 타인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을 체험시켜 주었다.

이러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 사진들을 볼 때마다 떠올리게 된다.

 

 

코야산에서 오사카로 돌아오는 도중 만난 마에다 씨 노부부가 가볍게 한마디 던진 '일기일회'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위의 추억이 단 몇초만에 슬라이드 필름처럼 머릿속에서 지나간다.

딱히 이걸 그분들에게 설명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고, '그 말 저도 참 좋아합니다'라고 말하며 한번 웃어주는 것으로 만족.

 

마에다씨 부인은 할아버지가 독일인으로, 소위 말하는 '쿼터'시란다. 어렸을 적에 독일서 산 적도 있었다고.

아들내미가 나보다 나이 좀 많은데, 미국 유학가서 공부하다가 지금은 외교관이 되었다고 기쁜 표정으로 말씀하신다.

아~ 어디나 자식자랑하는 부모 얼굴이 제일 행복해 보인다. 난 그런 표정 짓게 만들수가 없어서 들을 때마다 그냥 쓴웃음만 짓지만.

 

일단은 나도 내일 나라에 가볼까 생각중이라고 말씀드리니, 이렇게 두 번씩이나 만났으니 내일도 아마 만나지 않을까 라고 하신다.

사실 원래대로라면 새벽에 출발해서 나라를 좀 둘러보고 오후에 출판사와의 미팅을 할 예정이었는데

지금 다리상태를 보니 아무래도 하룻밤만에 나을것 같지는 않아서 가능성이 희박하다.

느낌상 만약 내일 나라에 간다면 이 분들과 한번 더 만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인간에겐 한계라는게 있는 법.

 

마에다 씨는 삼성과 LG의 어마어마한 약진에 대해서도 관심을 많이 가지고 계신다.

해외에서 단편적으로 들리는 정보이긴 하지만, 결코 1인자의 위치를 넘겨주지 않을 듯이 보였던 기술대국 일본 기업들이

한국의 대기업 앞에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가는 현 상황이 놀랍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물론 난 여기서 끝낼 생각 없이, 한국엔 요즘 그런 친 대기업 정책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하게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해 준다.

간단하게 빅맥지수 정도만 언급하며, 현재 한국의 최저임금이 엔화로 시간당 300엔밖에 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려주니

상당히 놀라는 눈치다. 일본의 최저임금은 지방별로 다르지만 (편의점 동일상품도 지역소득에 따라 가격이 1/3이상 차이난다)

전국 평균치는 740엔 정도니까, 삼성의 어마어마한 약진에 난생 처음으로 한국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고 있는 시점에서

이런 사실을 들은 마에다 씨 부부는,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을 알게 되어 약간 혼란스러워하는 느낌이다.

 

일본은 물가가 비싸니까 단순비교는 어렵다는 주장도 있겠지만, 앞서 말했듯 빅맥지수로 아주 대강이나마 그 차이는 실감할 수 있고

무엇보다 일본은 2000년 이후로 10년동안 물가상승률이 마이너스거나 1%이내로 넘어가고 있다. 한마디로 물가 상승이 없다는 것.

한국은 상승률이 매년 4%를 넘어가고, 일본과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면 그보다 훨씬 높다. 눈가리고 야옹인 셈.

특히 모 설치류가 나라 말아먹기 시작한 이후 물가상승률은 14% 가깝다던데?

 

 

 

시간가는줄 모르고 마에다 씨 부부와 대화를 하다가 헤어졌다.

근처에 있던 학생들이 일본 경제에 대해 토론하는 노숙자 차림의 한국 여행객을 힐끔힐끔 쳐다보긴 했지만

그냥 무시하고 , 마에다 씨와 헤어지고 난 후에는 눈 딱 감고 난바 역까지 고통을 참으며 앉아 있었다.

 

이제 난카이(南海) 라인에서 요츠바시(四つ橋) 라인까지 30분간 걸어가야 하는 최후의 시련만이 남았다.

아침 조식외에는 아무것도 먹은게 없는데, 배는 고프지 않지만 일단 뭐라도 입에 넣고 들어가야 편할것 같아서

난바 워크(난바역의 거대 상가 지하도)를 걸어가다가 그냥 눈에 보이는 파스타&카레 전문점에 들어가서 해물카레를 주문.

 

한국서 직접 만들어 먹던 해물카레는 일단 해물 맛이 우러나도록 카레와 함께 밤새도록 끓여먹곤 했는데

이곳 해물카레는 그냥 카레 소스에다가 삶은 해물을 얹어서 나오는 방식. 이런걸 해물 카레라고 불러도 되는건가 싶다.

하지만 카레 소스는 대충 만든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나는 것이

맵다기 보다는 혓속을 짜릿하게 자극하는 향기가 콧구멍까지 역류하는 진한 풍미를 느끼게 해 준다.

확실히 이 정도 진한 카레 소스라면 해물을 넣고 우려내봤자 향기로 인한 이득보다, 퍼석퍼석해지는 해물이 더 아까울 듯 하다.

 

해물의 상태는 꽤나 앙호한 편으로, 가리비나 문어나 새우나 식감과 향기가 쉽게 느껴질 정도로 깔끔하다.

밥까지 같이 먹을 필요도 없이 그냥 소스 조금에다가 해물만 먹는게 더 맛있게 느껴진다.

유명한 카레 체인점인 코코 이치방야(CoCo 壱番屋)보다 가격은 높지만, 가격차이만큼의 맛은 느껴져서 만족.

 

잠깐 휴식후 요츠바시 라인으로 걸어가다가 약국에서 소염 파스를 구입. 일단 이걸로 하룻밤 잘 휴식하면 내일은 걸어다닐 정도는 되려나 싶다.

발목 염좌에는 특히 인도메타신이 포함된 파스가 효과가 좋은 듯 해서 일부러 고르고 골라서 구입했다.

사하라 마라톤을 준비하면서 국내 일반 마라톤도 몇번 뛰어봤는데, 그때 몸으로 기억했던 지식이라 실제로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간신히 호텔에 도착해서 신발을 벗으니 마치 댐이 붕괴되는 듯이 쌓여있던 통증이 일순간에 퍼져가는데

저절로 입에서 신음소리가 나올 정도로 굉장하다.

끙끙거리며 침대에 다이빙하듯 쓰러져 발을 높이 들어올리니까 놀라울 정도로 쏴악~ 하며 통증이 격감하는 느낌이 참 오묘.

파스로 발목을 감싸니 타오르던 발목이 시원해져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화장실에 가려고 몸을 일으키면, 마치 구내염에 알보칠 원액을 쏟아붓는듯한 신나는 율동과 함께 몸이 꼬여온다.

아주 작은 비즈니스 호텔이라 침대에서 화장실까지는 70~80c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도

화장실 한번 가려면 일단 몸을 일으키고 한동안 끅끅거린 후에

미션 임파서블 1편의 랭리 잠입신을 연상시키는 절제된 움직임으로 약 3분에 걸쳐 이동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땀범벅이라 느긋하게 욕조에 들어가고 싶은데도, 염좌엔 뜨거운 목욕이 좋지 않기 때문에

왼쪽 발목은 욕탕 밖으로 내밀어 샤워기로 찬물을 뿌려주는, 뭔가 상쾌하지 않은 목욕을 간신히 끝마쳤다.

 

최대한 왼발을 높이 올리고 누워서 TV를 보는데, 뉴스에서 소니와 파나소닉의 디지털 TV 부분의 전략적 제휴 소식이 들려온다.

당연히 원인은 삼성 때문. 사실 소니와 파나소닉 점유율을 전부 합쳐도 삼성의 점유율 근처에도 못가고 있으니까.

한국인으로서는 그게 뭔 대수인가 싶겠지만, 소니와 파나소닉은 70년전 창사 이후로 한 번도 사이좋았던 적이 없는 라이벌 중의 라이벌.

소니 본사가 도쿄에 있고 파나소닉은 오사카에 있기 때문에 동쪽과 서쪽의 자존심 싸움이기도 했었다.

 

한때 세계 전자시장을 잠식하다시피 한 거물급 라이벌 회사가

외국 회사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기술 협력을 한다는 것은, 일본인들로서는 경천동지할만한 큰 사건이다. 근데 이미 늦어도 너무 늦었다는게 문제.

 

마에다 씨, 이 뉴스 보면 아마 내 생각이 나겠지 라고 추측해 보며, TV OFF 타이머를 맞춰놓고 누웠는데

아무리 파스를 감았다고 해도 하루종일 너무 무리했는지 통증이 쉽게 가라앉질 않는다. 화장실 한번 가려면 대소동을 펼쳐야 하고.

자세를 조금만 바꿔도 바로 격통이 엄습해 오기 때문에 잠을 자는건지 마는건지 알 수가 없다.

2시간 30분으로 설정해놓은 TV가 꺼지고도 잠을 자지 못해서, 결국 TV 틀어놓고 보다가 졸다가 하는 수 밖에. 체력회복은 물건너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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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왔던 쪽보다 좁고 오래된 길이라서 운치는 느껴지는데, 그만큼 길이 험하다는 뜻도 되니

어느 정도 걸어야 끝이 보일런지 걱정부터 앞선다. 누가 보면 여기가 험한 산골짜기인줄 알겠군.

다행히도 사람이 별로 없어서 통행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니, 무리하지말고 천천히 한걸음씩 걸어가면

어쨌든 출구에 도착은 할 테니까 거기서 좀 쉬기로 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그래도 카메라를 손에서 놓을 일이 없어, 아픈건 둘째치고 연신 셔터를 누르게 되는 건 행복하다.

아마 제정신이었다면 좀 더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인상에 남는 걸 더 담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자전거 여행동안 가장 아쉬웠던 점이라면, 기대했던 히메지(姫路)성이 보수공사를 들어가서 볼 수 없었던 것과

모노노케 히메로 유명한 야쿠시마(屋久島)에 가지 못했다는 것 정도를 들 수 있는데

야쿠시마와는 생태 습성이 전혀 다른 곳이지만 그래도 중간중간 모노노케 히메의 장면들을 연상시키는 곳들이 눈에 들어온다.

 

참배객의 인파에 떠밀려서 움직이는 사태를 피할 수 있었던 점이 플러스 효과를 가져오는 것 같기도 하고.

드문드문 새소리 정도밖에 들리지 않는 외딴 길을 거의 혼자서 걸어가며 이런 모습을 감상하는 것은 행운이랄 수 있다.

 

 

 

이쪽 길은 좀 더 산속 깊은 곳이라서 조금 전의 빡빡하고 정갈한 묘석들의 모습보다는

불규칙적이고 산만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당연히 이쪽 길이 더 마음에 든다.

 

세월의 흔적 때문인지 곳곳에 보수공사 표지판이 놓여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런 모습이 과연 어디까지 유지될지 궁금하기도 하다.

공식적으로는 약 천년간, 실제로는 수백년 정도의 나이를 먹은 곳임에도 이 정도 보존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니

내가 죽고 몇백년 더 지나면 또 어떻게 변해있을지 상상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

 

 

 

입혀놓은 옷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본래는 새빨간 색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알 방법은 없다.

저 석불의 나이가 대강 백살 쯤 된다면, 내가 이 석불과 인연을 맺은 시간은 고작해야 수 초밖에 되지 않는 찰나의 순간.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몇 번이나 옷을 갈아입었을지.

 

그런 것들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문화유산이 가진 가치가 아닐까 싶다.

 

 

 

모종의 사고로 잘린 건지, 참배길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잘린건지 알 수 없는 삼나무 옆에

일본에서 역사가 긴 회사인 쿠보다사의 묘석이 보인다.

이제까지 봐 왔던 삐까번쩍한 기업들, 산요, 닛산, 토요타, 샤프, 파나소닉 등의 묘석에 비해 꽤나 오래전에 만들어진 묘석인 듯 하다.

 

원래 농기계, 엔진 중장비 등을 제작하는 회사로 유명한데, 요즘엔 친환경 발전, 리사이클 제품, 수자원 건설 등에도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아마 중장비나 농기계 만져 보신 분들은 쿠보타라는 이름이 그리 어색하진 않을 듯.

연륜이 있는 회사라서 좀 딱딱한 경향이 없지는 않지만, 일본 국내에서도 사원 복지가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저 멀리서 아주머니들이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걸 보고 뭘까 싶어 슬금슬금 다가가 봤는데

내 몸굵기의 네 배는 되어보이는 거목 밑의 풍경이 묘한 형태로 되어 있어서, 나도 카메라를 손에 잡았다.

 

이런 모습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 잠깐 생각해 봤는데

아마도 참배길에 워낙 가까이 있는데다, 길을 만드느라 깎아낸 산 때문에 점점 앞으로 구부러 지는걸 방지하기 위해

밑에 돌맹이를 고아놓은 것이 원인이 되어 이런 모습의 둥치가 만들어진게 아닌가 한다.

 

자전거 여행때도 비슷한 것을 본 기억이 몇번 있는데, 나무라는건 올려다 볼때 만큼이나 둥치 부분도 신기한 볼거리가 많더군.

 

 

 

둥치가 조금은 불안정한 모습의 삼나무지만, 다른 것들 못지않게 훌륭하게 자라나 있다.

원래 이런건지 모르겠지만 스크류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성장한 모습이 보인다.

나무가 워낙 굵은 탓에 되려 윗부분의 줄기가 가늘어 보이는 착시현상이 나타날 정도.

 

조금 과장하면 살짝 바오밥나무 같은 모습이랄까.

 

 

 

아주머니들이 찍은 모습은 이것이었을까.

반대편으로 가 보니 저런 공간 사이에도 석불이 단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돌 위에 놓여진 동전들을 보니 역시 인기가 꽤나 많은 듯 하다.

 

수십억을 들여서 호화스럽게 세운 거대한 묘석보다

이렇게 눈에 띄지도 않는 곳에 자리잡은 석불 쪽에 동전이 훨씬 많이 놓여있는 모습을 보니

다들 생각하는건 비슷한 건지.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자꾸 야쿠시마와 비교를 해서 왠지 미안한 느낌이 들지만

조금이나마 사진에서 본 야쿠시마와 닮았다는 느낌이 드는 이런 모습들이 워낙 반가워서라고 이해해 주길.

 

사실 일본에서 제일 가고 싶었던 곳이 야쿠시마였는데

지난 자전거 여행 당시 야쿠시마 근처에 도달했을 때는 한겨울이었고

자전거째로 배를 타고 가기에는 교통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포기했던 쓰라린 기억이 있다.

 

좋게 생각하면, 야쿠시마는 자전거 여행 도중이 아니라도 제대로 날 잡고 본격적으로 돌아보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훗날 더욱 완벽하게 즐기기 위한 일시적인 유보라고 해도 되긴 된다.

야쿠시마에서 추정 연령 5천년의 죠몬 스기라는 삼나무를 보기 위해서는 왕복 약 15시간 가까운 산행을 해야 하는데

그곳만큼은 혼자가 아니라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께 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일부러 속을 파낸 것이 아니라면, 정말 절묘한 장소에 놓여있는 석불이다.

제대로 된 묘석이 아닌, 이렇게 군데군데 놓여져 있는 석불 중에서는 가장 명당이라는 느낌.

그래서 그런지 뭔가 놓여있는 것도 많다. 제대로 모습을 갖춘 세전함까지.

 

마치 서민 흉내를 내면서 영업하는 강남의 포장마차 같은 느낌이랄까?

 

 

 

좁은 산길을 빠져나오자 점점 길이 넓어지고 깔끔하게 정비된 것이

조금씩 출구가 가까워져 가는 느낌이다.

 

좀 전에 나무 둥치에서 사진 찍던 아주머니들이 멀리 사진에 보인다.

망원으로 당겨 찍은 녀석이라서 사실 훨씬 멀리 있지만, 지금 걸음걸이로는 저분들 속도가 훨씬 빠르다.

땀을 주륵주륵 흘리면서 찢어지는 발목의 통증을 참고 걸어가고 있지만

왠지 조금 더 가면 끝이라는 생각에 배가 부르게도 아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참배길은 인생 처음 경험하는 것이니, 아픈 몸이 원망스럽지만 그렇다고 감상을 소홀히 한 건 아니니 뭐.

 

 

 

여기서 본 석불 중 가장 단순하고 특징적인 녀석.

이쯤되면 정말로 죽은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건지 의심이 갈 정도다.

 

혹시 인류가 멸망한 후 수천 수만년이 지나고 나서 다른 생명체가 이곳을 찾았을 때

조잡한 상태로 봐서 '이 녀석들이 이곳에서 제일 오래전에 만들어진 게 아닐까' 하고 착각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너무 앞서나간 걱정인가?

 

 

 

꽤나 오래되어 보이는 묘석과, 분명 세운지 얼마 되지 않은 묘석이 혼재해 있는 모습을 보니

이곳의 묘터 지정은 어떻게 하는 건지 궁금해진다. 그냥 낡거나 부서졌다고 그걸 치워버리고 새 묘석을 세우진 않을텐데.

 

가족들의 성묘는 좀 전에 봤던 입구쪽에서만 이루어지는 줄 알았는데

이 근처에도 조금 젊어보이는 어머니와 딸이 간략한 음식을 들고 묘석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여전히 살아서 이어져 가는 문화 유산이라는 점도 이 곳의 장점이라고 생각.

이미 수백년전 현실과의 맥이 끊겨버려서, 지금은 단지 관광객의 볼거리로만 여겨지는 문화재가 수없이 많은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걸어가면서 눈에 들어온 오륜탑 중에서는 가장 오래되어 보이는 녀석.

안개낀 날이나, 저녁무렵에 이런 산길을 걷고 있으면 지금과는 달리 꽤나 음산한 기분이 들 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문화재라고 해도 공동묘지는 공동묘지라서, 이곳을 무서워하는 사람도 꽤나 있다고 들었으니.

 

 

 

현실세계와는 정반대로, 이곳에서는 묘석과 삼나무보다 이런 꽃을 보기가 더 힘들다.

꽃 이름은 모르지만 잎사귀가 밑으로 늘어진 모습이 독특하다. 저런 모습이 꽃을 더욱 부각시키는 듯 하다.

 

이 정도 깊숙한 산골이라면 야생동물에 대한 경고문 같은거라도 있을까 싶었는데

아직까지는 이 곳에 와서 그런 표지판을 본 적도 없고, 개나 고양이는 물론 어떤 숲짐승도 본 적이 없다.

너무 오랫동안 참배객이 이어지다보니 이 곳은 사람들의 영역이라는 것을 인식한 것일까.

 

코야산 주변은 여전히 개발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이 대부분이고, 일본의 산은 한국과는 달리

등산에 적합한 지형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의 발길도 굉장히 드물어서

아마도 굳이 이곳까지 오지 않아도 야생동물은 얼마든지 생활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추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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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휴게소가 있는 곳까지는 도착. 화장실 한번 들어가고 나서 주위를 슬쩍 감상한다.

휴게소라는게 필요없어 보이는 길이의 참배길이지만, 나이 많이 든 사람들이 많이 찾으니까 있으면 좋을 듯.

문이 닫혀 있어서 들어가 볼 수 없는 사찰이, 옆의 나무와 참 단아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카메라에 담아 본다.

 

 

 

사계절 내내 단풍나무인 듯 하다.

인위적으로 만든 것일까. 주위 풍경과 굉장히 대비되는 모습이 멋지긴 하다.

 

아무튼 주변 풍경 하나하나에 감탄하지 않을 곳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곳이라서

떨어지는 사진 실력을 갖고 있어도 그럭저럭 찍으면 꽤나 보기좋게 나오는 듯.

지역이 지역이라 그런지 확실히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평일 낮에 여기 찾을 수 있는 젊은이란 나같은 관광객밖에 없긴 하겠지.

 

 

 

휴게소가 이렇게 멋들어지니, 이곳 오쿠노인 참배길은 어색함 없이, 어디 하나 조화롭지 않은 구석이 없다.

2015년이 고야산 개창(開創) 1200년이 되는 해라서, 그해 5월달은 아마도 상상할 수 없는 참배객과 관광객이 몰려들 것 같다.

 

1년간 일본을 돌아다니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곳은 홋카이도의 시레토코(知床), 오카야마의 쿠라시키(倉敷) 였는데,

이곳 오쿠노인도 그 중에 당당히 들어갈 정도로 굉장히 마음에 든다.

 

1200년 기념으로 이곳을 처음으로 찾을 수 많은 관광객들은, 아마도 인파에 휩쓸려 고생 좀 하겠지만

그럼에도 분명 깊은 인상을 받고 오랫동안 여운을 즐길 수 있는 추억이 될 거라고 확신한다.

 

워낙 성지로 추앙받는 곳이다 보니 그 흔한 자판기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이 더욱 놀랍다.

일본에서 자판기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관광지라는 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극히 희귀한 편.

휴게소도 얼핏 보니 먹을 걸 파는 곳은 없는 듯 하고, 노인들이 앉아서 TV의 고야산 소개를 보고 있다.

 

 

 

휴게소 역시 근간에 지은 듯한 느낌은 나지 않는다.

정교하게 지어서 내가 알아차리지 못할 뿐인지, 정말로 오래된 건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양 건축물에서는 항상 처마 밑과 지붕의 흐름, 단청의 모양 등을 가장 유심히 살펴보는데

이곳 오쿠노인의 건축물들은 오사카 안의 왠만한 전통 건축물보다 훨씬 미려한 모습을 자랑한다.

이곳이 속한 와카야마(和歌山)현은 발전도 더디고 인구도 킨키 지역에서 가장 적은 산골인데

정말 코야산 하나만큼은 기가 막힌다. 수백년 전 지팡이 하나에 몸을 의지해 이곳을 찾은 참배객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지금도 예전 참배객과 같은 의상을 하고 순례하는 사람들은 꽤 많다.

그런 사람들과 일반 관광객을 위해 예전부터 이곳의 백여 개 사찰들에서는 템플 스테이가 가능하다.

여유가 있다면 경험해 보고 싶기도 하지만, 금액이 왠만한 일급 호텔 수준이라서 나한테는 무리.

 

불교 문화의 정수를 맛볼 수 있기도 하고, 모든 숙박실에 열쇠가 없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

나 같은 사람은 카메라 장비를 그런 데 내려놓고 돌아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역시 속세인의 번뇌.

 

 

 

자판기 같은 전자기기가 이곳에 어울릴 리가 없으니, 없는편이 훨씬 낫긴 한데

그래도 기념품이나, 불교식으로 소원 비는 각종 도구들은 팔고 있다.

 

종교란 개인적인 소망 들어주는데 이용하는 녀석이 아니라는 지론을 같고 있기에 관심은 없지만

참배객인지 홍법대사인지 모를 마스코트 캐릭터 스트랩이라던가 하는건 그럭저럭 볼만해서 잠깐 구경해 본다.

본인이 쓸 생각은 없고, 이런 거라면 여행 선물로 남한테 주기에는 적당할 것 같은데

뭐랄까, 내 지인들에게는 그런 선물 주는것보다 그냥 여기 한번 가보라고 추천하고 싶어서 구매는 하지 않기로 결정.

 

지면에 내딛는 힘의 80%를 오른발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이젠 왼발만큼이나 오른발도 피곤하다.

휴게소에서 앉아버리면 다시 일어나는데 상당히 고생할 것 같아서 잠시 숨만 고르고 다시 출발.

사하라 사막 마라톤 당시 체크포인트에서 주저앉아 잠시 쉬고나면, 일어나서 출발할 때 훨씬 아프고 힘들었다는 경험상.

 

 

 

기념품점이라고 말하긴 좀 그렇고, 고뵤 참배할때 봉납하는 도구들을 판매하는 곳이라고 할까.

오쿠노인에서 가장 세속적인 건물이긴 한데, 건축 양식은 후기 카마쿠라(鎌倉)의 흔적이 보여서

어지간하면 다른 역사적 건축물들에 비해 좀 현대적이고 이질적인 경향이 있는 이런 건물도 거의 위화감이 없다.

 

이런 곳에서는 왠지 마음도 경건해 지는 듯 한데, 화장실 근처에서는 공사 인부들이 담배를 피고 있는걸 봐서 꼭 그런것만은 아닌 듯.

오쿠노인 참배길은 전부 금연인 걸로 알고 있는데, 노동자들의 휴식 시간에는 역시 빠트리기 힘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담배가 천박한 것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겨난지 40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까 뭐.

 

 

 

난 지금 무슨 고행중인가 싶을 정도로 왼발 통증이 심하다.

몸을 생각해서 오늘 푹 쉬었다면 붓기가 어느정도 가라앉았을 테지만

여기서 이런 풍경을 감상하는걸 포기하는 것도 통증만큼이나 아쉽고 괴로운 일이다.

 

걷다가 가끔씩 발을 잘못 디디면, 매운 걸 먹었을 때처럼 본능적으로 쓰읍~ 하고 숨을 들이키게 된다.

산길치고는 굉장히 평탄한 길이지만 어쨌든 산길은 산길이라서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기곤 한다.

고뵤가 코앞이니 이제 절반 정도 걸어온 셈인데, 문제는 코야산의 볼거리가 오쿠노인만 있는게 아니라는 사실.

 

원래대로라면 오쿠노인을 빠져나와 반대쪽 끝인 다이몬(大門)까지 느긋하게 경치 구경하며 걸어간 후

단상가람과 영보관(霊宝館)을 감상할 생각이었는데, 2km 정도 되는 그 거리를 걸어서 가는건 지금으로서는 무리다.

오쿠노인이 약 3km 정도, 이곳만은 도보 이외에 어떤 이동수단도 없으니까 죽기살기로 걸어가고 있지만

다이몬까지는 결국 짧은 거리라도 버스를 이용해서 이동할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다행히도 스루패스덕에 버스비는 공짜.

 

 

 

이 다리 앞에서부터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일본 문화재들의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한데, 뭘 이런 것까지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사진 금지 구역이 많다.

중요 문화재들을 모아놓은 박물관이라면야 얼떨결에 플래시 사용하는 경우도 있을테니 이해가 되지만

사방천지 뻥 뚫려있고, 다리 하나 지나는 것 외엔 바뀔 것도 없는 이런 곳에서도 촬영 금지라는건 조금 의아하다.

 

뭔가 엄숙함과 경건함을 위한 조치라고 개인적으로 예상해 보지만, 멋들어지게 수식했을때나 그런 거고

간단히 말하자면 사진 따위로 귀중한 볼거리를 공개하고 싶지 않다는 쓸데없는 자부심이란 것이겠지.

사진이란게 마이너리티 리포트 세대처럼 현실감 100%인 입체영상도 아니고,

사진으로 담을 수 있는 것과 실제 눈으로 보는 것은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재에 피해를 줄 수 있는 납득할만한 이유가 없는 상황에서도 촬영 금지라는 푯말이 일본 전역에 너무 많다.

 

그러라고 하니 일부러 규칙 어겨가면서 찍지는 않지만, 다리 넘어서 사진 찍는다고 오쿠노인의 경건함이 사라지진 않는다고 본다.

루브르 박물관도 플래시와 삼각대 사용하지 않으면 사진 촬영이 허용되는데 말이지.

 

아무튼 망원렌즈도 가지고 왔으니 저 멀리 보이는 고뵤도 한장 남기고 다리를 건넌다.

앞의 관광객 단체를 이끄는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세심하게 설명을 하고 있던데

조금조금씩 듣는건 몰라도 아픈 발목을 핑계로 느리게 걸으면서 설명 내용을 전부 다 들어버리는건

약간 도둑질 같은 느낌도 들어서 그냥 들리는 말만 듣고 지나가 버린다.

 

다리 건너서 고뵤까지는 이십 미터정도 될 법 한데, 이 안의 묘석들은 대체로 일본인이라면 알고있을만한 유명 인물들의 것.

예전 총리대신 했던 사람 이름도 얼핏 들리는 걸로 봐서

홍법대사와 가장 가까이 있지만 그의 뜻과는 가장 동떨어진 묘석들이 모여있는 곳인 것 같다.

홍법대사의 사당에 가까이 가서 누울수록 더 큰 복을 얻을 거라는 허망하고 탐욕스러운 중생들의 작태.

 

 

 

고뵤 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굉장히 엄숙한 분위기.

일본 전국에서 가장 신성한 곳이니 분위기가 사뭇 남다르다.

 

그룹을 이끄는 가이드 아저씨가 들어가기 전의 예절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난 그냥 신발 안 벗는 곳까지 가서 내부 모습만 감상하고 가볍게 목례한 후 다시 빠져나왔다.

다리를 건너서 카메라의 전원을 다시 켜고 이제부터 돌아갈 길을 한장 담아본다.

이 길로 주욱 돌아가다 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좀 전과 다른 방향을 선택하면 된다.

 

나만 그런건 아닌지, 몇몇 사람들이 나처럼 다리 바로 앞에 서서 고뵤의 모습을 담고 있더군.

 

 

 

 

잘려나간 나무 둥치도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어서 보기 좋은데

제대로 터를 잡지 못하고 이런 곳 사이사이에 놓여진 석불도, 과거나 현재나 고단한 서민들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떡하니 묘터 잡아서 늠름하게 서 있는 묘석보다 이런 녀석들에게 합장 한번이라도 더 하겠다.

 

 

 

죽은 사람도 언젠가는 마음속에서 떠나보내야 한다는 지론으로 보자면

아무리 반듯한 묘석이라도 결국 시간에 침식되어 이렇게 점점 형태를 잃어가는 게 본모습이라고 생각.

한국의 묘소도 관리하지 않고 방치하다 보면 슬금슬금 깎여나가서 결국은 주위와 동화되어 버리는게, 그게 좋다.

 

아버지가 묘석을 별로 안좋아하는 이유도, 천년만년 지나도 계속 그대로라서 뭔가 이상하기 때문이었으니.

그런데 이곳에서는 묘석도 점점 사그라져 가는게, 훗날엔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사라져 있겠지.

순환의 필연성과 그 아름다움은 사람이나 비생물이나 마찬가지다.

 

 

 

왔던 길과 다른 쪽으로 나 있는 참배길로 들어선다.

30분이면 쉽게 돌아볼 거리를 한 시간 반씩 잡아먹고 있으니, 통증만 아니라면 느긋한 구경에 적합한 속도인데.

어제 겨우 그거 무리한 것 가지고 발목이 이 모양이라는게 이쯤되니 뭔가 억울하게까지 느껴진다.

한두 번 해본 일도 아닌데 왜 이번엔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지.

 

왼쪽 발을 들어올리는 것도 부담되서 이제는 아예 왼다리를 쭉 편 상태에서 지면에 원을 그리듯이 휘적휘적 돌려가며 걷는다.

영 꼴불견이지만 그나마 이게 제일 덜 아프니까. 그런데 가끔 어디 툭 걸리고 할 때면 지옥이 엄습해 온다.

 

 

 

이 정도 한자는 다들 읽을 수 있으리라 본다.

계단을 올라가면 뭔가 볼만한 묘석 혹은 사당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다리가 멀쩡했다고 해도 저기 올라가는 수고따위는 하고싶지 않네.

 

일본에서는 당연하게도 전국시대의 영웅으로 명성이 높지만, 한국인이라면 유전자에 거부감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을 듯.

전국시대를 막 끝낸 당시의 일본은 거의 들개같은 야만과 혼란의 집합체였고, 장수들에게 하사할 토지가 턱없이 부족하던 때

하필이면 얼토당토 않는 방향으로 머리 굴린다는게 조선 침략이었으니... 지네들 밥그릇 싸움에 옆집 끌어들인다는 발상이 참 기가 찬다.

 

한국인 입장에서라면 그냥 올라가서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저 녀석을 위해 계단 올라가는 수고도 아깝다.

 

일본 역사를 공부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자기가 아는 일본 인물 90% 이상은 이곳 오쿠노인에서 그 이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유명한 유랑 시인인 마츠오 바쇼(松雄芭蕉)의 묘석이라면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지금 이 다리로는 그저 참배길을 온전히 빠져나가는데만 전력을 쏟아부어야 하기 때문에 포기.

 

 

 

오륜탑에 생명을 틔운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다.

풍륜과 화륜 사이에 식물이 자라고 있는 모습이라, 문학적인 감상이 떠오르는 듯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냥 각자 알아서 감상하는 편이 좋을 듯.

 

자신의 사진은, 본인이 브레송 정도의 대가가 아니라면 가능한 한 찍사 자신의 의도와 느낌을 설명해 주는게 좋긴 하지만

가능하면 보는 사람들이 스스로 느끼고 각자의 생각을 간직하는게 낫다고 생각한다. 사진은 한 장이지만, 누구에게나 같은 사진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