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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에 해당하는 글들

  1. 2014.10.06  2월 13일 시레토코 - 홋카이도의 겨울 6
  2. 2014.02.05  엄니와 함께 - 코야산 오쿠노인 (1/2) 6
  3. 2013.10.08  과거로의 여행 - 시라카와고 9편 13
  4. 2013.10.03  과거로의 여행 - 시라카와고 8편 8
  5. 2013.10.02  과거로의 여행 - 시라카와고 7편 8
  6. 2013.09.27  과거로의 여행 - 시라카와고 6편 6

 

슈퍼 호텔의 조식은 저렴한 비지니스 호텔 중에서는 단연 훌륭하다.

토요코인의 별 것 아닌 주먹밥 정도라면 수면욕을 충족시키는게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지만

이곳에서 조식을 먹지 않는다면 한나절 정도는 아쉬워 할 것이 틀림없다.

 

이곳의 커튼은 딱딱한 플라스틱이라 일반적인 커튼과 달리 아침이 오는 모습을 판단할 수 없다.

알람을 끄며 커튼을 걷어올리니 세상은 이미 새햐얗게 빛나고 있다.

광도높은 햇살이 아니라 소리없이 쏟아져 내리는 눈줄기로.

 

삿포로에서 아사히카와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기 때문에 동물원에라도 다녀 올 시간이 있었지만

아사히카와에서 시레토코까지는 열차 한번 버스 한번 갈아타며 6시간이 넘는 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딱히 할 일이 없다.

 

장거리 이동이 많은 이번 여행의 특성상 평소 별로 사용하지 않는 스마트폰에 애니메이션도 몇개 넣어올 정도로 준비는 철저하다.

원체 멀미가 심한 편이라 열차에서라도 장시간 시청은 불가능하지만, 하루종일 음악만 듣는 것도 좀 지겨울테니까.

 

 

 

쏟아지는 눈도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별다른 감흥 없이 역으로 향한다.

시레토코는 눈이 많이 오면 이동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부디 내일부터는 날씨가 맑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아사히카와에서 아바시리(網走)까지 기차를 탄 다음 조그마한 원맨열차로 갈아탄 후 다시 한시간쯤 달리고

철도가 부설되어 있는 마지막 마을인 시레토코 샤리에 도착해 다시 우토로(ウトロ)까지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자전거 여행 당시엔 한여름이었기 때문에 기차 시간표 따위 신경쓰지 않고 그저 곰이나 사슴이나 두려워하며 대자연에 휘감긴 시골도로를 달릴 뿐이었는데

겨울의 홋카이도는 그런 짓 하기에 본인의 생존 능력이 심히 떨어지니 얌전히 일반적인 여행을 즐겨야 한다.

 

한번 타면 꽤나 오래 달리는 것이 홋카이도 철도다 보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도시락을 미리 싸들고 승차했다.

조식을 든든하게 먹고 왔기 때문에 딱히 더 이상 먹을것에 신경 쓸 필요는 없었지만, 대설원의 풍경을 바라보며 먹는 도시락도 나름 분위기 있어 보인다.

이런 곳에 열차가 달린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가득 쌓인 눈더미 속을 질주하는 모습은 한국에서 경험하기 힘들기 때문에 더욱 각별한다.

 

 

 

일단 손에 카메라를 쥐고 전원을 켠 상태로 바깥 풍경을 감상한다.

진짜 괜찮은데 싶은 풍경이 단 몇 초만에 시야에서 사라지는 경험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 걸까.

사진 촬영에는 과감함과 결단력이 필요하다는 말이 이런 상황에서는 절실히 동감된다.

 

아직까지는 사람 사는 마을이 많이 보이긴 하는데, 대체 겨울엔 뭐 하고 사는지 궁금할 정도로 온통 눈에 파묻힌 모습들.

사실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은 홋카이도에서는 겨울이 추수철 만큼이나 바쁜 계절이라고 한다.

겨울에 무슨 농사냐 싶겠지만, 일본 최대의 낙농지역인 이곳은 겨울에 강한 젖소종들이 바쁘게 젖 짜고 새끼 치느라 정신이 없다.

감자 등의 작물은 겨울에 눈 속에 파묻어 두어 천연 저장고 역할을 하기도 하고, 거대한 농경지는 지금부터 트랙터로 손질해 줘야 봄부터 씨를 뿌릴 수 있다.

 

 

 

창문이라는 필터를 통해 들어오는 빛임에도 불구하고 고속으로 이동하는 와중이라 그런지

때마침 맑아진 하늘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눈밭이 굉장히 자극적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다이아몬드를 좋아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방에서 반짝이는 모습이 아름답긴 하지만

눈에는 심히 과한 자극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뷰파인더를 들여다보지 않는 동안에는 실눈을 뜨고 쳐다봐야 할 정도.

두시간 정도 바라보고 있어도 지겹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이러다가 눈에 무리가 갈 것 같아서

중간중간 음악도 듣고 애니메이션도 보고 하면서 느긋한 시간을 즐긴다.

 

자전거 여행 당시엔 시간적인 제한이 없었지만 체력적인 문제와 함께, 해질 무렵에 최소한 마을 모습이라도 보이지 않으면

어디서 곰이 튀어나오는거 아닌가 심히 걱정이 되어서 생각만큼 여유롭게 달리지 못했었다.

 

따뜻한 열차 안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므라즈과 함께 하는 여행도 나름 나쁘진 않다는 생각을 참 오랜만에 해 본다.

 

 

 

 

 

아바시리에 도착해 밖으로 나온니 기차 안 여행이란 게 어느 정도 현실감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세삼 깨닫는다.

하늘은 여지없이 맑지만 대낮에 영하 5도 밑으로 내려가는 차가운 공기는, 창 밖의 풍경이 온도를 가지지 않은 그림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시레토코에 들어가기 전 철도가 부설되어 있는 마지막 마을인 만큼 적당히 사람 사는 느낌이 드는 곳.

4년 전 자전거 여행때와 똑같이 '열차와 호텔을 세트'로 판매하는 광고가 그대로 붙어 있다.

워낙 이동과 숙박이 힘든 곳이니 내국인이라면 저런 걸 이용해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만

예전엔 어차피 자전거 여행이라서 필요가 없었고, 이번엔 외국인 전용 할인카드인 JR 패스가 있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곳은 규모면에선 작은 마을이긴 해도 나름 관광지로서의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다.

뛰어난 사냥꾼이었던 홋카이도의 원주민 아이누족의 동상이 역 앞의 마스코트 역할을 한다.

이 앞에서 기념사진찍는 중국인 관광객이 매우 많다.

 

아바시리는 100년전의 감옥이라던가, 겨울에 쇄빙선이라던가 하는 볼거리가 있긴 하지만

2010년 자전거 여행 때는 중국인 관광객을 본 적이 거의 없었던 지역이라 생소하긴 하다. 시대가 변하긴 했나 보다.

 

 

 

바로 북쪽 바다가 오호츠크해다 보니 겨울엔 유빙이 생성되어 쇄빙선 관광도 꽤나 유명하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유빙 구경은 거의 할 수 없다 보니 이런 곳에 오는 것도 이해는 된다.

자전거 여행 당시엔 당연히 유빙이란 건 생각도 하지 않았고, 나름 유명한 아바시리 감옥도 입장료가 아까워 들어가지 않았다.

 

지금은 자금적인 여유가 있어도 시간적으로 여기서 하루 더 보내기가 쉽지 않아서 또다시 패스.

홋카이도는 마음먹고 구석구석 돌아도려면 적당히 잡아도 한 달은 필요하니, 모든 것 하나하나에 아쉬워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다음에 다시 한 번 더 찾아올 구실이 생겼다고 생각하면 가뿐한 기분이기도 하니까.

 

 

 

역 앞에는 아바시리 감옥을 본따 만든 붉은 벽돌모양 패널이 설치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해맑은 미소와 함께 쇠창살 안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참 초현실적인 풍경이다.

 

실제로 아바시리 감옥은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고 사회가 극도로 불안하던 100여년 전

땅끝 지옥이라 불리는 일본 최북단의 감옥으로서 그 악명을 떨쳤다.

수감된 죄수의 30% 이상이 무기징역형이었을 정도로 중범죄자 중심의 수용소이기도 했고

겨울 기온이 영하 20도 이하로 내려가는 이 곳의 환경상 죄수도 직원도 많은 스트레스로 인해 상해사고도 잦았다고.

 

당시의 혼란했던 일본의 사회상을 생각해 본다면, 이 곳에 수용된 사람들이 단순한 범죄자만은 아니었으리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방금 전 그림같은 겨울 풍경을 뒤로 하고 달려온 아사히카와에서 이곳 아바시리까지 230km의 도로를 닦는데 이 감옥의 죄수들이 동원되었다.

사망자만 200명이 넘고, 몸이 결박당한채로 공사판 인근에 버려진 시체도 자주 발견되는 등, 이 감옥의 악명은 대단했다.

 

일본의 전설적인 탈주범인 '5치 못의 토라키치'(五寸釘 寅吉)가 마지막으로 수감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발바닥에 5치, 약 15cm 가량의 못이 박힌 채로 12km 나 달려 도망쳤다는 전설적인 일화로 인해 그렇게 별명이 붙은 토라키치는

훔친 재물을 가난한 개척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홋카이도 감옥에서 탈주해 오사카에서 다시 잡히기도 하는 등

6번이 넘는 탈옥 경력을 가진 소설같은 삶을 산 인물. 이곳 아바시리 감옥으로 이송되었을 당시엔 나이도 많이 들고 해서 더 이상의 탈옥은 없이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다.

 

 

 

편의점에 들어가 따끈따끈한 호빵을 하나 사들고 씹어먹으며 여름 아바시리의 풍경을 되살려본다.

겨울과 여름이 완전히 다른 세계로 변하는 홋카이도라, 이 길을 달렸던 당시의 추억이 지금의 풍경과 매치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부터는 그럴듯한 열차가 아니라 승무원이 한 명밖에 없는 원맨 열차로 갈아타고 샤리 마을까지 이동.

장거리 이동이 많은 홋카이도 철도는 나름대로 본인 같은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있어서

열차 시간에 늦는다거나 하는 일 없이 대도시에서 출발한 열차의 도착시간과 10~15분 정도의 여유를 가지고 바로바로 연결되도록 해 놓았다.

 

물론 홋카이도의 겨울이란 게 그렇게 예정대로 흘러가는 상냥한 녀석이 아니다보니 별의 별 연착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본인은 홋카이도에서 사슴이 달리던 열차에 뛰어들어와 박히는 바람에 그거 처리하느라 1시간동안 기차 안에서 머물렀던 경험도 있다.

 

 

 

어디서나 자연의 풍취를 느끼기 쉬운 홋카이도지만, 시레토코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마냥 달렸던 자전거 여행 당시엔

압도적이라 할 만한 야생적 강인함에 적지 않게 놀랐던 기억이 난다.

 

사람의 출입이 차단된 시레토코 자연공원은 한국인으로서 접하기 어려운 자연림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매력적인 곳.

지금 한국에서 보는 99%의 산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조경 계획을 세운 것이라 자연림과는 확연하게 모습이 다르다.

가공되지 않은 자연의 모습은 훨씬 더 생명력이 넘치는 거칠고 무섭고 아름다운 느낌이 든다.

 

물론 그 때의 추억에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는 지금이지만, 앞서 언급했듯 홋카이도의 겨울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서.

 

중간에 삿포로에서 함께 여행했던 Y양이 서식하고 있는 키타미라는 마을에도 정차를 했는데

만나러 가고 싶은 마음은 적지 않았지만, 얼굴 보게 되면 어차피 키타미에서 하루 머물 수밖에 없는 시간대에다가

일 때문에 바쁜 분을 헐렁헐렁 찾아가는 것도 좀 미안한 느낌이라 그냥 통과하기로 한다.

 

 

홋카이도 북동부의 마지막 철도 역인 시레토코 샤리 역에 도착한다. 이제 여기서부터 자연공원이 있는 우토로까지는 버스로 이동해야 한다.

여기서도 한 규모 하는 중국인 관광객 일행들과, 노년층이 사박사박 모인 일본쪽 관광 단체들이 우르르 몰려가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는 관광 버스에 갈아타고 먼저 출발하는 모습이 연출된다.

 

본인은 점점 무거워지는 베낭과 사이드백을 짊어진 채로 감회에 젖어 예전의 그 모습을 떠올리며 연신 셔터만 눌러댄다.

아침의 그 폭설은 아직도 아사히카와 쪽에서 어른거리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의 날씨는 그냥 고개만 들면 자동적으로 입가에 미소가 돋아날 정도로 청명하고 순수하기 그지없다.

 

시레토코쪽 마지막 역이다 보니 깔끔하게 마무리 된 직사각형 모습이 매우 단아한 느낌이다.

날씨가 워낙 추운 곳이다 보니 내부에 편안하게 앉아 TV와 각종 지역자료를 살펴볼 수 있는 휴게실도 완비되어 있지만

본인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보게 된 그리운 시레토코의 정경이 아른거려서 주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주위를 서성이고 있다.

 

상호 연계가 미끄럽게 잘 이루어지는 철도와 달리 이곳의 우토로행 버스는 JR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40분 정도 기다려야 하지만

이런 화창한 날씨 아래서, 그것도 일본에서 자연환경이 가장 좋기로 유명한 시레토코 부근에서라면 결코 지루한 시간이 아니다.

 

 

 

자전거 여행때는 그냥 역 쪽으로 내려와 건물 사진과 함께 이 녀석만 담았던 기억이 난다.

불곰과 함께 시레토코를 상징하는 흰꼬리수리의 모습. 멸종위기 1급 동물로 일본에서는 시레토코에서만 가끔 관찰할 수 있는 희귀종이다.

한국에서는 드문 겨울철새로 러시아에서 강원도로 이동해 오기도 한다. 생긴 것과는 달리 꽤나 세심하고 여린 성격이라고.

 

 

 

아늑했던 하룻밤을 책임졌던 루트인 호텔의 모습도 여전하다.

몬베츠(紋別)라는 곳에서 출발한 후 삼일 꼬박 비를 맞아가며 노숙했던 탓에 심신이 매우 지쳐있었던 때

시골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깔끔한 루트인이 떡 하고 나타나서 그 유혹을 이기기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관광이라고 해도 대부분 우토로 쪽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시설은 깔끔하고 사람은 그리 많지 않고 직원들도 친절하고 가격마저 다른 곳에 비해 저렴해서

코인 세탁기에 빨래 넣으러 가는 것조차 귀찮아 질 정도로 푹신한 침대가 천국처럼 몸을 감싸던 감각을 떠올린다.

 

사실 그 당시만 해도 시레토코에 대한 정보 따위는 거의 알지 못한채로 그냥 달리고 있었던 터라

여기서 신나게 쉬었으니 이제 또 시레토코를 확 통과해서 한동안 달려봐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도착한 시레토코의 풍경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대단한 것이라서 눈물을 머금고 또 하루 숙박했던 기억이 난다.

국립공원화 되어 있는 우토로 주변엔 텐트도 마음대로 치기가 어려웠으니.

 

거긴 또 고급 관광호텔 아니면 젊은 사람들 중심의 게스트 하우스로 레벨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곳인데다가

어찌된 일인지 게스트 하우스가 전부 문을 닫아서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관광호텔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내 표정이 심히 안스러웠는지 지배인으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혼자 왔으니 좀 싸게 해 줄게요' 하면서 숙박비를 3만원 정도 깎아줬다.

 

기본적으로 트윈 침대에 본가 큰방보다 더 큰 실내 베란다까지 구비된 진짜 관광호텔이라 살떨려서 잠도 못잘 것 같았던 추억도 있다.

 

시레토코가 그런 곳인 줄 알았다면 당연히 이곳 샤리에서는 머물지 않았을텐데. 여기서 우토로까지는 자전거로 가도 3~4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다.

하지만 이제와서는 그것도 좋은 추억이라고 씁쓸하게 웃을 수 있으니 어쨌든 후회할 일은 아니다. 여행이라는 건 후회하기가 더 힘들다.

 

 

 

키카드로 작동하는 호텔이었는데 체크아웃 당시 키는 기념으로 가지고 가도 된다고 말해줘서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새끼 바다표범이 프린트된 귀여운 흰색 키카드였는데, 그 때의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이번에도 거기서 묵을 예정이다.

 

놀랍게도 이곳 근처 역시 공항이 있다. 버스가 공항에서 출발해 이곳을 경유한다고 한다.

날씨가 기가 막히게 좋아서 아직까지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뿌듯해하며 고고히 앉아있는 흰꼬리수리의 모습을 이리저리 담아본다.

 

 

 

방향상 시레코토에 위치한 가장 높은 산인 라우스산은 아니지만 구름에 가린 모습이 살짝 불안감을 조성하기도 한다.

 

여름에는 전기 펜스로 둘러싸인 고가 다리을 걸어다니며 곰 서식지인 오호(五湖) 주변을 산책할 수 있지만

겨울에는 시레토코 고개를 포함해 대부분의 자연공원이 출입금지가 되기 때문에 적적함을 느낄 수 있다.

 

본인은 그 오호의 풍경을 잊지 못해서, 자격을 가진 가이드와 함께 하는 겨울 오호 투어를 신청할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지만

내가 아는 그 오호가 맞다면 어지간히 체력에 자신있는 사람이 아닌 한 겨울에 들어가는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걷는 스키를 타고 산을 올라가야 하는데다가, 오호 주변 역시 기본적으로 눈이 50~60cm 는 쌓여있기 때문에

겨울 중에도 한달 정도만 허가를 얻어 입산할 수 있는 겨울 시레토코의 특별 코스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날씨가 좋으면 돌연 취소되는 일도 비일비재해서, 내일 하루밖에 기회가 없는 나로서는 날씨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삿포로에서 이곳까지 직통버스가 있지만 10일간의 여행을 전부 그 두군데서 보낼수는 없으니 의미가 없다.

시레토코가 메인이긴 해도 다른 곳 역시 둘러볼 거리가 수북히 쌓인 곳이 홋카이도니까.

 

한동안 기다리자 버스가 슬금슬금 다가와서 버스에 탄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서 좌석의 절반 정도가 차 버린다.

겨울 시레토코라고 해도 역시 올 사람은 다 오는구나 하는 생각.

 

 

 

약 40분간 천천히 눈길을 달려 그 그립던 우토로에 도착한다. 버스에서 내리니 한동안 발걸음을 잊고 주위를 멍하니 둘러보며 서 있는다.

아직까지도 자전거 일본여행 중 가장 인상깊었던 곳을 물어보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 시레토코.

4년 즈음만에 다시 찾아온, 하지만 그 때와는 전혀 다른 고요한 풍경에 기차 여행으로 살짝 느슨해졌던 여행세포가 다시 끓어오르는 느낌이다.

 

 

 

안내소를 겸하는 미치노에키 우토로 시리에토크의 모습 역시 반갑기 그지없다.

온통 녹색 삼림과 푸른 바다로 뒤덮였던 여름과 달리, 생명력이라는 흔적은 온데간데 없이 모든것이 눈으로 쌓인 지금의 모습은

사계절이 뚜렷한 편인 한국사람이 봐도 그 갭을 실감하기가 쉽지 않다.

 

 

 

굳이 들어갈 필요는 없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가 본다. 관광으로 먹고 사는 곳이다 보니 어디서든 특산품을 팔고 있다.

일본에서는 유명 소설가가 검은 칼날의 끝이라 묘사하기도 한 시레토코는 아이누어로 '대지의 끝' 이라는 이미.

 

당연히 워낙 험한 자연환경 덕에 개발의 필요성도 없어서 방치되다시피 한 곳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목과 오염으로 지역이 더럽혀지자 이곳 마을 사람들은 자치단체를 형성해

이 지역을 보존하기로 마음먹었고, 그 결과 2005년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의 칭호를 획득하는데 이른다.

 

주민들이 이제껏 낸 기부금만 약 50억원에 달할 정도로 이곳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가서 보면 저절로 납득이 간다.

 

관광안내소에서 내일 신청할 오호 가이드 투어에 대해서 물어보니 원래는 1주일 전에 신청해야 한다는 무서운 답변이 날아온다.

하지만 신청자에 여유가 있으면 바로 전화해봐도 될 거라며 팜플렛을 한 장 준다. 자기네들이 전화해 줄 정도의 섬세함은 없는 듯.

 

 

 

해가 빨리 지니 이제는 예전 신세를 졌던 그 호텔로 향해야 한다.

예약 없이 온 것이 좀 걸리긴 하지만 겨울 시레토코에 그렇게 관광객이 많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서 크게 걱정은 되지 않는다.

성수기라는 여름에도 그냥 들어가서 방을 구했으니 지금이야 문제가 있겠냐는, 일본인 관광객이라면 하기 어려운 발상을 해 버린다.

 

오늘은 더 이상 할 일이 없으니 조금씩 저무는 태양이나 기념으로 한 장 담아주고 반갑기만 한 시레토코의 풍경을 한 걸음씩 음미하며 호텔로 향한다.

 

작년 여름에 코야산의 모습을 보고 감동을 많이 받아 겨울의 코야산은 어떤가 엄니와 함께 가 보기로 했습니다.

왕복 3시간 반을 넘어가는 장거리 이동입니다만, 어제 코베와는 달리 전철과 버스에 앉아갈 수 있어서 체력적인 부담은 덜 하죠.

 

엄니는 여행 좋아한다고 하셔도 역시 연세도 있고, 여행사 패키지에 익숙하셔서 그런지 좀 피곤해 하셔서

오늘은 코야산만 살짝 둘러보고 저녁 늦기전에 돌아와 쉬기로 했습니다.

 

겨울 코야산이 그런 건지, 그냥 시즌이 아닌건지 모르겠지만 전철 안에 저하고 엄니하고 옆에서 조는 사람 세 명밖에 없습니다.

엄니께서는 이쯤 되니 코야산이란 데 오늘 문 닫는거 아니냐고 걱정까지 하십니다.

저도 이렇게 한산할줄은 정말 몰랐는데, 다행히도 환승역인 하시모토(橋本)역에서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많이 서 있더군요.

 

 

 

극락다리라는 이름의 역을 통과하자 눈이 바람에 휘날리는게, 개인적으로는 기대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저야 여름의 코야산을 다녀왔으니 눈이 내린 코야산의 모습 역시 크게 기대되지만

엄니는 그러지 않아도 피곤해 하시는데 눈까지 내리고 쌀쌀하면 몸에 부담이 되실 것 같아서 말이죠.

 

오랜만에 보는 코야산 행 케이블 전철의 모습입니다.

눈이 많이 오진 않지만 이미 군데군데 쌓여있는걸 보니 이전에도 내렸던 것 같더군요.

 

 

 

눈이 오던말던 이 열차는 강력한 케이블로 끌어당기듯 올라가는 방식이라 별 문제 없을 듯.

굉장한 경사의 오르막을 천천히 오릅니다. 지난번 여름과 달라진 점 한가지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해발 600m 즈음에 '여기가 도쿄 스카이 트리와 같은 높이'라는 팻말이 새로 생겼습니다.

코야산은 해발 1000m 에 가까운 곳이니, 스카이 트리보다 높은 곳을 이렇게 전철로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저 앞에 도넛 모양의 교차로가 보입니다. 저 곳이 상행 열차와 하행 열차가 마주치는 곳이죠.

자연 보호를 위해 선로를 두 개 만들지 않고 저런 교차로만 만들어서 선로의 부피를 줄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많던 적던 이 열차는 반드시 두 대만이 동시에 운행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2015년 4월은 코야산 개창 1200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시기라서, 그 때는 이 열차도 타기가 무서울 정도로 빡빡해 지겠죠.

 

 

 

사람이 많던 적던 정해진 시간에 항상 운행하는 두 대의 열차가 이곳에서 교차합니다.

경사가 장난이 아니기 때문에 조그만 사고라도 굉장히 위험할 수 있어

두 번째 탑승임에도 꽤나 조마조마했지만, 코야산은 일본에서도 관리 철저하기로 유명한 곳이니 괜찮겠죠.

 

 

 

오사카는 대구보다 더 따뜻한 날씨라서 입고 온 옷이 더울 정도였는데

코야산은 역시 산 속이라 그런지 도착하자마자 추위가 온 몸으로 느껴집니다.

내린다기보다는 옆으로 흩날리는 눈발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여름의 코야산과 전혀 다른 광경을 선사해 주더군요.

 

여름의 코야산 포스팅도 이 블로그에 남아있으니 비교해 가며 보시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합니다.

오사카에서 이곳까지는 전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고 와서 다시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강행군입니다만

외국인을 위한 아이템인 칸사이 스루 패스 덕분에 오늘은 아무리 버스와 전철을 많이 타도 추가 요금이 없습니다.

 

 

 

이 곳은 제가 받았던 감동에 비하면 여름이나 겨울이나 사람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더군요.

보고 즐길거리가 많다기 보다는, 이런 곳에서 차분히 경치를 감상하는 것 외에는 별로 할 일이 없는 곳이니까 말이죠.

 

엄니는 일단 쭉쭉 뻗은 삼나무들의 모습에 흥미를 보이셨습니다.

날씨가 추워서 여름때 혼자 온 것처럼 천천히 느긋하게 둘러볼 수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눈은 때때로 흩뿌리는 정도라 우산은 필요없었습니다만

이전에도 몇 번 내린 듯 하고, 이 곳의 기온 탓에 거의 녹지 않고 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삼나무를 비롯해 이곳 오쿠노인의 많은 나무들이 침엽수라서 녹색을 간진하고 있었는데

녹색 이끼 사이로 다소곳히 쌓인 눈이 여름과 너무나 다른 이미지를 풍겨서 신선한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여름에 다녀왔으니 비교하는 재미가 있어서 신났지만 엄니께서는 추운데 걸어다니시느라 고생하시는 것 같아서 좀 뜨끔하더군요.

 

 

 

코야산 오쿠노인에 대한 이야기는 예전 여행 포스팅에서 나름 상세하게 적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번 포스팅에서는 생략합니다. 좀 더 느긋한 여행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한 번 읽어보시는 것도?

 

실제로 이번 여행에서는 엄니와 리듬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제 마음도 별로 느긋하지는 않았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더욱 적막해 진 오쿠노인의 진중한 매력도 차분하게 느끼며 즐기기는 힘들더군요.

 

 

 

엄니도 입구에 안치된 기기묘묘한 묘석들을 보고 굉장히 신기해 하시더군요.

한국의 묘와는 달라서 처음엔 여기 서 있는 것들이 뭔가 하셨는데 자세히 보니 전부 묘석입니다.

 

이곳에 20만개가 넘는 비석이 500여년 전부 들어서 있었다고 설명해 드리니

놀라시는게 아니라 오히려 얼굴을 잔뜩 찡그리시더군요. 무덤 보면 무섭다고.

 

 

 

일본 흰개미 구제협회에서 세운 흰개미 추모비도 여전합니다.

엄니는 한자로 적힌 묘비는 곧잘 읽으시지만 이 녀석은 무슨 뜻인지 모르셔서 제가 해석해 드렸죠.

엄니의 반응 역시 별 걸 다 세우는구나 였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모습을 보고 윤회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의 원념이 자연의 한 부분을 차지할 정도라는 사실에 꽤나 놀랐습니다만

엄니는 그냥 이렇게 묘비가 우르르 몰려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무섭고 쓸쓸하고 그렇다고 하시는군요.

역시 살아오시면서 죽음을 많이 겪었고, 본인도 퇴직 후 남은 삶에 대한 걱정이 더해가고 있는 시기라

그렇게 생각하실 줄 알았으면 굳이 제 욕심으로 코야산에 오지 않았어도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와 버린 이상 구경이라도 재밌게 하고 가시면 좋을텐데, 저도 마음이 무거워지더군요.

 

 

 

 

그래도 일본어보다 한자가 많이 적혀있는 곳이라 엄니가 중간중간 걸어가며 한자를 읽어보십니다.

특정 기업체에서 새운 묘석은 대강 어떤 곳에서 세운 것인지 이해하실 수 있어서 흥미를 가지시는 듯.

 

일본도 불교를 믿냐고 물어보시길래, 믿긴 하는데 여기서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한다고 대답하니

그럼 종교인으로서는 별로라고 하시네요. 종교에 개인적 욕심이 묻어날 여지가 남아있을 때 펼쳐지는 지옥도는 한국에서 곧잘 볼 수 있으니 말이죠.

 

 

 

흰개미 묘비와 함께 꼭 눈길을 빼앗기게 되는 강아지 묘석입니다.

엄니 역시 피식 웃으시더군요. 그래도 이 강아지 가족들은 얼마나 이 녀석들을 사랑했으면 비석까지 만들겠냐고 이해를 해 봅니다.

 

 

 

불상들의 머리와 어깨를 따뜻하게 해 주는 모습을 굉장히 신기해 하셨습니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돌맹이에게 연민을 느끼는 하등 쓸데없는 행위이겠습니다만

역시 자신과 닮은 조각상에 마음을 열어주는 이런 행동이야말로 인간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저도 오쿠노인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기도 하고

따뜻한 봄남이었다면, 오디오 가이드 하나 대여해서 하나하나 들어가며 이곳의 역사를 되새겨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엄니는 추워서 그런지 묘석이 너무 많아 그런지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후다닥 걸어가십니다.

 

전 구경은 커녕 사진 한 장 찍을 여유도 없이 따라가느라 바빴죠.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잘 생각해보니 이 상황도 꽤나 유쾌하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1년 반 전 여름의 코야산 여행은, 기구하게도 불의의 염좌에 의한 급성 통풍 증세 탓에

이 넓은 코야산을 바늘로 찔리는 듯한 격통에 시달리며 절뚝절뚝 간신히 돌아본 매우 특이한 체험이었습니다.

이동 자체를 빨리 할 수 없으니 역으로 풍경과 사진을 담는 시간을 좀 더 차분히 가질 수 있었죠.

 

지금은 몸이 멀쩡한데도 불구하고 그 때보다 더 여유없이 엄니 뒤만 따라가고 있으니

이것 또한 같은 장소를 다른 상황에서 여행할 때 생기는 어처구니없는 아이러니가 아닌가 생각하니 왠지 웃음이 나오더군요.

 

 

 

참 다양한 묘석들이 많습니다. 이 녀석은 동물들이 혼을 달래는 묘석이라 부처님 주위에 동물들의 석상이 둘러서 있네요.

 

 

 

물론 침엽수라 하더라도 여름과 겨울의 색은 너무나도 달라서 같은 사진이 나올 리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엔 절대로 볼 수 없는 눈이 곳곳에 쌓여있었던 탓에

지난 번에 와 봤다는 생각보다, 마치 처음 찾는 듯한 신선함을 여전히 느낄 수 있어서 이득 본 느낌입니다.

 

 

 

UCC 커피 맛있습니다.

 

 

 

이곳 역시 중국인과 한국인 관광객이 가끔 보입니다만

총 관광객 수가 워낙 적고, 사람의 발소리를 제외하면 참으로 적막한 겨울 풍경이라서 그런지

아무리 중국인 관광객이라도 다른 곳 처럼 왁자지껄한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여름보다 더욱 고요해 진 오쿠노인의 분위기에 매우 흡족했습니다만, 엄니는 가끔 서서 한자를 읽는 걸 빼고는 그냥 슥슥 전진만 하실 뿐.

 

 

역시 제가 아직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죽음이 자신의 것이라는 자각이 부족한 탓이라 그런 것일까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같은 나이대 사람들에 비하면 죽음에 대해 좀 더 자주 생각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제가 단순히 젊어서 엄니처럼 이런 곳을 싫어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단지 죽음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엄니와는 조금 다른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어느 쪽이라고 한다면 저는 이 비석 세운 사람 쪽으로 아주 약간 기울어 있다고 할까요.

자기 무덤의 비석 앞에 마음껏 낙서를 하라는 낙천가의 묘비입니다.

 

엄니는 이곳을 돌아보면서 '묘가 이렇게 많으니 여기 귀신들은 지루하진 않겠다' 라고 하시던데

이 낙서총의 주인은 그 중에서도 꽤나 인기인으로 자리잡고 있지 않을까 싶더군요.

 

 

 

묘비 안에 증명사진이 주르륵 늘어서 있길래 뭔가 싶었는데

읽어보니 일본 사진협회 회원들의 공동 묘석인 듯 합니다.

아마도 근대화 이후 카메라맨 1세대들 부터 이 곳에 등록되어 있을 듯.

 

 

 

오쿠노인은 진언종의 창시자인 홍법 대사의 사당 쪽으로 들어갈수록 더더욱 문화재급의 예전 묘석들이 줄지더 나타나기 때문에

이제부터 진짜 볼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엄니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만 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 곳과는 상성이 맞지 않은 것 같네요.

 

 

 

전 아픈 다리를 질질 끌던 여름과 달리 잘 움직이는 몸과 머리를 최대한 이용해서

엄니를 따라가면서도 후다닥 고개를 돌려 사진으로 담을 만한 것이 있으면

촛점이 맞았는지도 보지 않고 셔터만 눌러재낀 후 남은 건 한국에 돌아가서 손 좀 봐야겠다는 생각만 합니다.

 

코야산은 원래 이렇게 둘러보는 게 아니긴 합니다만, 이번 여행은 엄니에게 맞춰드려야 하는 것이니 별로 불만은 없었습니다.

 

 

 

이런 불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시길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이들을 위한 석상이라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역시 동정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는지, 다른 불상에 비해 이런 옷가지가 걸려 있는 비율이 훨씬 높더군요.

 

 

코야산에 이러한 사찰과 묘터가 만들어졌던 500여년 전의 일본이라는 나라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사람의 목숨이 파리만도 못했던 곳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자연 재해가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영주들의 땅따먹기로 인해 자기가 무엇을 위해 죽창을 드는지도 모르는 농민들은

그냥 하루하루가 죽음과 맞닿아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죠.

 

그런 덧없는 현세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내세에 찾아올 평온함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더 많은 시기였습니다.

이곳 오쿠노인은 그 바램이 물질화 되어 이루어진 유적과 같은 곳이죠.

 

 

 

여기서도 빈부의 차는 드러난다는 게 참 쓴웃음 나오게 합니다만.

그냥 산 사람이 들어가 살아도 될 만큼 담까지 둘러가며 지은 묘석은

신기함을 넘어서 괴이하기까지 합니다. 내세를 원한다면 이 곳의 화려한 돌덩이는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지.

 

 

 

묘석의 행렬에 눈이 지치면 고개를 조금 들어 하늘을 찌르는 삼나무들을 구경하는 것도 좋더군요.

엄니께서도 묘석은 둘째치고 코야산의 맑은 공기와 삼나무 숲은 마음에 들어 하시는 눈치입니다.

 

날씨가 예상보다 추워서 그걸 즐길 만한 여유가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지만 말이죠.

 

 

 

여름에 벗겨주고 겨울에 씌워주는 것은 아니라서 사시사철 같은 복장을 하고 있지만

역시 원래는 추운 겨울에 서 있는 모습이 안스러워 입혀준 것이라는 예상을 해 봅니다.

눈 덮힌 모습이 아무래도 가장 어울리니 말이죠.

 

 

 

휴게소가 있는 곳에 도착했습니다만, 엄니는 화장실만 한번 가시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시네요.

이곳에서 휴식하는 것 보다는 빨리 구경을 마치고 도로쪽으로 돌아가는 게 덜 피곤하리라 생각하시는 듯 합니다.

 

저는 추위를 별로 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후드나 목도리 등이 없었기 때문에

코야산의 추위는 제 예상보다도 훨씬 매섭게 느껴지고 있었습니다. 엄니가 서두르시는 것도 이해가 되더군요.

 

 

 

그래도 계속 뒷모습만 찍을 순 없으니 거대한 삼나무 앞에서 한 장 찍어드리겠다고 합니다.

찍는 건 좋은데, 역시 삼나무의 덩치를 담아내려니 사람이 주역인지 나무가 주역인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이렇게 담은 건 엄니의 목도리가 이곳과 워낙에 강렬하게 대조되어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 두죠.

 

 

 

다른 불상과는 달리 칠복신의 모습을 한 불상이 서 있습니다.

한국의 금복주 마스코트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묘석 앞에는 따지도 않은 술병이 꽤나 많이 놓여있네요.

 

귤도 아직 생생한 것으로 봐서 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녀석인 듯 합니다.

술 좋아한다면 하나 따 마셔도 괜찮을 것 같은데, 역시 신성한 곳이니 공양물을 훔쳐가는 건 안좋은 일이겠죠.

 

 

 

확실히 춥긴 추운가 봅니다.

 

한낮온도가 10도를 상회하는 오사카와는 달리 이곳은 가장 따뜻한 시기에도 2~3도에 그치는 듯.

그래도 관리하는 분들이 힘을 써서 그런지 순례길 자체는 얼음도 눈도 거의 없이 깔끔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눈이 딱 요렇게 쌓였을 때가 왠지 포근해 보이더군요.

아마 여름이라면 이런 묘석은 동글동글하지만 별 감흥을 받지 못하고 지나쳤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람은 별로 불지 않았던지, 왠지 저 위에 손가락을 갖다 대면 자연의 섭리를 망가트리는 듯한 흉폭함이 표출될 것 같네요.

 

확연히 시선을 잡아끄는 몇몇 묘석들을 제외하면 확실히 여름과 겨울의 사진 결과물이 꽤나 다르게 분포하고 있는 듯 합니다.

눈발 때문에 살짝 흐린 하늘이 오히려 여름과의 대비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듯 해서, 타이밍은 잘 잡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이 앞에 홍법 대사의 사당이 있습니다만 엄니는 이만큼 봤으면 됐으니 돌아가자고 하십니다.

아쉬워도 억지로 보여드릴 필요는 없으니 발걸음을 돌립니다. 단지 왔던 길이 아니고 다른 한 쪽 길로 가면서 조금이라도 더 구경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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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외곽에 위치한 사찰 역시 형태는 조금 달라도 갓쇼즈쿠리 양식을 갖추고 있다.

왠지 바삭하고 폭신하게 느껴지는 지붕 모양인데, 느낌과는 별개로 역시 크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건물의 형태가 여느 일본식 마을과는 달라서 묘하게 크기에 대한 감각이 다르게 느껴진다.

 

참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인지 여기서도 세전함에 동전 넣는 사람들이 많은데

형이상학적 존재한테 돈으로 뭘 좀 빌어보겠다는 행동에서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

5엔짜리 하나 던지면서 여행 안전하게 끝나도록 해 달라고 빌어본 적은 있어도

사실 그건 저 위의 어떤 분한테 빌었다기 보다는, 관광 체험과 비슷한 감정으로 해 본 놀이의 일종이었을 뿐이고.

 

 

 

겨울 풍경이 훨씬 유명한 시라카와고임에도, 시원하게 쭉쭉 자라나는 벼들을 배경으로 하는 모습 역시 마음에 들지 않을리가 없다.

혹시 겨울에 먼저 이곳을 찾아와서 '겨울이 진국이라니 여름엔 안가도 되겠지' 라고 생각해 버렸다면

오히려 훨씬 더 손해가 아니었을까 싶다. 케이크 위의 딸기는 마지막에 먹는 성격인데, 이런 경우엔 그게 이득이라고 생각해도 될 듯.

 

나고야의 더위는 좀 더 매마르고 강렬한 느낌이었는데 이곳의 더위는 뭐라고 할까, 같은 온도임에도 '이 정도는 있을수 있을 법한' 그런 날씨라는 기분이 든다.

사람이 느끼는 날씨라는게 단순히 온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의 빛을 반사하는 지상의 여러 대상들이 무엇인가에 따라서도 바뀐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

 

 

 

그림같은 풍경임에 틀림없는데, 그림같기 때문에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다.

순수함이란 의미를 어디에 두느냐는 사람마다 틀리니, 어느 쪽이 틀렸다고 할 수 있는건 아니지만.

 

말 그대로 너무 그림같은 풍경이라서 농촌 생활의 흔적이 퇴색된다고 할까.

시라카와고는 갓쇼즈쿠리 촌락 중 가장 유명하고 교통 시설이 그나마 잘 갖춰져 있어서

관광객도 많이 오고, 그들을 맞이할 여유수준도 가장 높다.

너무나 정비가 잘 되어있다 보니 마치 공원 산책하듯 느껴지기도 하고

그 점에 있어서는,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강인하게 역사를 이어온 마을의 거친 손길이 많이 바랜 느낌인 것도 사실이다.

 

좀 더 깊숙한 곳에 위치한 스가누마(菅沼)등의 마을은 이곳보다 규모도 작고 관광객을 위한 시설도 부족하지만

고립된 만큼 옛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경치 자체의 아름다움보다 촌락의 진짜 숨결을 더 느끼고 싶어하는 매니아들에게는

시라카와고보다 더 인기있는 곳이기도 하다. 본인도 흥미가 동하긴 하지만 이곳과 비교해보고 싶을 정도는 아니라서.

 

 

 

좀 사는 주택은 담 속의 마당에 고운 잔디를 깔고 산다는 소문을 듣기는 하는데

이곳은 잔디가 필요없는 듯 하다. 집 앞에 깔린 논밭이 훌륭한 잔디 역할을 해 주고 있으니.

 

겨울엔 이런 곳에 물 좀 채워놓으면 자동으로 스케이트장이 만들어 지니까 놀기 편할것 같은데

이곳은 눈이 워낙 많이와서 스케이트장이 깨끗하게 유지되기가 힘들거라는 예상을 해 본다.

한국도 그러리라 생각하는데, 척박한 산골 소년소녀들은 일년내내 밖에서 뛰어노는게 일이라

이런 산간지방 출신 사람들은 체력이 평범하게 괴물같은 경우가 많았다.

 

잠깐 산책나가는게 500m쯤 되는, 길도 안나있는 야산에 훌쩍 올라가는 것이고

겨울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나무숲 사이를 급조 썰매에 타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려가기도 하더라.

나무에 정면으로 박으면 정말 영화의 엑스트라들처럼 되어버릴 것이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 잘만 노는데

도시 아이들의 건강함과 산골 아이들의 건강함은 그 기준부터가 다르다는 생각을 많이 받는다.

 

 

 

일본은 마당 역시 정원처럼 하나의 작품으로 두고 축소화된 자연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예술로서의 마당은 역시나 돈과 권력이 충분한 계층에서나 통하는 이야기였고

특히나 이런 외진 산골마을은 실용과 효율로 똘똘 뭉친 생활만이 생존의 열쇠였기 때문에

그런 정원은 거리가 먼 곳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들도 자투리 공간을 이용한 삶의 질 향상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풍부하기 그지없는 물을 이용해, 옆집에 놀러갈 정도의 작은 공간에 나름 멋들어진 정원이라 할 만한 모습을 갖춰 놓았다.

더울 때 뒷문 열어놓고 이곳을 감상하는 것도 산골 생활의 여유라고 할까.

 

중앙의 두꺼비 녀석은 마치 자기가 신선인 것 처럼 구름 위에 앉아있다.

 

 

 

가난하다보니 여행중엔 적당히 돈 좀 아끼는 성격이라서

숙소에서 교통비만 4만원이 넘게 들어가며 관광하러 가는 경우는 참 드물다.

 

자칫하면 괜히 큰돈 들여 이런 거 보러왔나 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기 때문인데

다행이랄까, 이곳 시라카와고만은 출발 전에도 그런 걱정은 하지 않은 곳이다.

실제로 와 보지만 않았을 뿐 워낙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접할 기회가 많았고

사진속에 담긴 마을의 모습은, 작가의 능력을 감안하더라도 분명 아름다울 것임에 틀림없었기 때문.

 

웅장한 스케일이 아니라서 부담없이 즐겨도 시간에 쫓기지 않는 곳인데

막상 마을 입구로 다시 돌아오니, 뭔가 놓친 풍경은 없나 한번쯤 되돌아보게 된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으로 담은 마을 사진은,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와 같은 장소에서 바라본 그 모습이 된다.

갓쇼즈쿠리 가옥은 하나도 담겨있지 않지만, 아무리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 풍경이다.

사람이 사는 곳이 갖춰야 할 요소가 이 풍경 속에는 모자라지 않게 담겨있기 때문일까.

 

 

 

다리 위는 어쨌든 시야가 확 트이기 때문에 사진 찍기 좋다.

장소가 같아도 들어올 때와 나갈 때의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사진이 찍힐리는 없다.

하지만 두명이 스쳐가기에도 좁은 다리 위에서 언제까지나 사진을 담는건 좀 부담스럽다.

그나마 워낙 유명한 곳이다 보니 다들 사진찍는데 정신이 없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그 정도는 이해해 주는 듯 하다.

 

마을 내부의 풍족해보이는 수량에 비하면 뭔가 좀 부족한 기분이 들긴 해도

이건 홍수방지를 위해 일부러 도랑 폭을 넓게 잡은것에서 비롯되는 착시현상이라 이해하기로 한다.

 

 

 

강가에서 낚시하는 분이 있길래 이럴 때를 위한 망원렌즈다 싶어서 도촬을 시도한다.

복합매체의 힘이란 이런 것인지, 이런 광경만 보면 조건반사적으로 '흐르는 강물처럼'이 생각난다.

 

유속이 상당히 빨라서 어떤 고기가 잡힐려나 궁금한데

내가 저기까지 성큼성큼 내려가서 친근하게 말 걸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저기 멀리 시로야마 천수각 전망대의 모습이 보인다.

천수각 쪽에서 본다면, 마을 쪽까지는 시야에 잘 담겨도 이곳 다리 위까지는 시선이 잘 머물지 않는다.

 

망원렌즈로 찍어보고 확대해 보니 좀 전보다 사람이 훨씬 많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시라카와고에 왔다 하면 최우선 목표가 저기서 전망 감상하는 일인 듯 하다.

 

 

 

마을을 벗어나니 버스 도착시간까지 40분쯤 남아있다.

한번 놓치면 1시간 30분 이상을 더 기다려야 하고, 그나마도 오후 5시 전에 모든 버스가 다 끊겨버리는 곳이라

시간만큼은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좀 일찍 나왔는데 그래도 볼것 많고 산책할 곳 많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오늘 식사를 호텔 조식외엔 아무것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좀 전 민가원에서 메밀 아이스 하나 빼고.

시라카와고의 풍경이 찍사로서의 본인에게 포만감을 준 것인지 여지껏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가기 전에 시간도 좀 남았고, 수분 보충하는 겸 음료수 사면서 뭐라도 하나 먹어봐야겠다고 생각.

 

가게 안에 앉아서 제대로 식사하기는 시간이 좀 애매해서 간단한 요기거기를 찾아본다.

이곳 시라카와고와는 왠지 어울리지 않을 듣한 히다규(牛)를 이용한 먹거리가 많다.

이곳도 물론 히다 지역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원래 소를 많이 기르는 곳은 아닌데.

 

원래 수량 풍부한 산골 마을에서 먹는 간식으로 유명한 건 '이와나'라고 하는 곤들매기 구이다.

내장 제거하고 꼬치에 끼워서 숯불에 구운 후 굵은소금 쳐서 뜯어먹는게 진짜 맛인데

일단 이와나 꼬치구이는 시간과 손길이 굉장히 많이 가는 간식이라 아무래도 손님 많은 이곳에서는 팔기 힘들것도 같다.

 

히다규가 들어간 고로케라도 먹어볼까 싶어 사진에 보이는 가게로 다가갔는데, 왠걸 품절이라고 한다.

관광온 사람들이 간식도 많이 사먹는구나 하는 생각을 세삼스럽게 하게 된다.

본인은 관광지에서 실컷 돌아다니고 난 뒤에, 돈 한푼이라도 보태주자는 의미로 겨우 한가지 정도 먹을까 말까인데.

그러고보니 본인같은 관광객은 돈이 안되니 별로 좋아하지 않을듯 해서 좀 소심해진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옆집 가게에는 아직 코로케가 남아있는지 사람들이 들고가는게 보인다.

그게 수량을 넉넉하게 준비해서 남아있는건지, 옆집보다 인기가 없어서 남아있는건지 알 수가 없으니.

 

지금은 배가 고파서 먹는다기보다, 왕복 버스비만 소비하고 가 버리기엔 이 마을에 좀 미안한 듯 해서 먹는 것.

그렇다고 배고 안고픈데 제대로 된 정식을 먹어치우는 것도 아깝다.

 

 

 

의외로 하나 남은 고로케집은 아이들 데리고 온 가족들에게 대인기라서

하나 먹으려면 3분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고. 냉동된 완성품을 가져와서 튀겨내는건줄 알았는데

재료를 전부 직접 반죽해서 만들어내는 수제품이라고 한다. 이런 북적이는 관광지에서 그게 가능하다는 것은 심히 놀랍다.

 

물론 그런 경우엔 재료가 떨어지면 눈에 보이는 손님을 포기하고 문을 닫아야 하는 등의 손해가 있지만

그 손해가 아까워서 저급의 냉동재료를 잔뜩 들여와 팔아재낀다면

관광객들의 실망이 키워내는 실망감은 우물에 풀어버린 독처럼 천천히 뿌리까지 파고들어 갈 것이다.

 

물론 시라카와고가 남아있는 한에는 욕하면서도 먹을건 먹는게 관광객이란 부류겠지만

만약 그런 식으로 영업을 한다면 지금 나처럼 이곳에 대한 좋은 감정을 글로 쓸 수 있을까?

한국의 상당수 관광지를 다녀와서 입도 뻥긋하기 싫은 이유가 그런 것이니까.

 

관광지는 손님들에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프라이드를 가져야 한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니, 자기 살아있을 동안 돈이나 좀 빨아먹고 끝내자고 생각한다면

애초에 이런 마을이 관광지로 남아있지도 않을 것이다.

 

 

 

햇살에 피부가 따끔거리긴 해도 느긋하게 앉아 일기 좀 쓴 다음 막 튀겨낸 불같은 고로케를 손에 쥔다.

크림 고로케도 좋고 해산물 고로케도 좋고 고기 고로케도 좋아하는 박애주의자라서

딱히 그 유명한 히다규를 사용했다고 해도 그닥 특출나게 맛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여러번 말하지만 그 드높은 위상을 가진 히다규는 제대로 된 고기집에서 비싼 녀석을 먹어야 체험할 수 있지

한개 2천원짜리 고로케에서 일본 최상급 소고기의 맛을 판단하는건 좀 무서운 일이다.

 

그래도 히다규 고로케를 선택하는 것은, 사실 고로케가 이거밖에 없어서.

그리고 아무리 가난한 여행자라 핸들 그 지방에서만 '제목이나마' 한정으로 붙어있는 녀석에 손을 대고싶지 않겠는가.

미각이 둔감하다고 생각하진 않아도 대강 아무거나 맛있게 먹는 성격이라서

히다규 같은 고급육이 아니라도 고기는 맛있게 먹는다. 질이 떨어지는건 뱉어버려도 적당히만 맛있으면.

 

그러니 히다규를 썼던 안썼던, 재료를 직접 섞어서 바로 튀겨낸 이 고로케가 맛이 없을리는 없다.

 

 

 

좀 전에 뭔가 우두두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이커들이 떼마실을 나온 듯 하다.

다행히도 구경간 듯 주인들이 보이지 않아서 슬쩍 한장 담아본다.

 

바이크에 대해 아는게 없어도 이 녀석들 한대값이 왠만한 중형차 정도 한다는 것 쯤은 알 법 하다.

나름 험한 길이라고 해도 원래 바이크가 커브를 즐기는게 재미있다고 하니, 이 사람들에게 이곳 투어는 스릴 만끽하는데도 좋은 곳일 듯.

본인은 이 정도로 큰 바이크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넓직한 사이드백을 떡하니 달아도 전혀 미관 밸런스를 해치지 않는 자태는, 자전거 여행경험을 가진 자로서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두시간쯤 버스를 타고 산길을 꼬불꼬불 통과해서 히다 타카야마로 돌아오니 시간은 늦은 6시를 넘어간다.

어제 그 마을 제가 오늘도 이어진다고 하는데,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오늘 여행은 이걸로 끝이라는 기분이 마음속에 드는 이상

무리하게 어딜 더 둘러본다던가 하는 일은 꺼진 불씨에 허무하게 바람을 불어넣는 일인 뿐이다.

 

어째 그 맑고 깨끗했던 타카야마가 블레이드 러너에 등장하는 네오 LA처럼 느껴지고

나고야에서 버스 한번 타고 온것만으로도 녹초가 되어 쓰러지듯 잠들었던 어제에 비해

아침부터 하루종일 걸어다니기만 했음에도 아직 정신은 말짱하다. 취향에 맞는 곳을 다녀온 덕일지 피톤치드의 효능일런지.

 

야행성인 한국민족에게는 아직 초저녁과 같은 시간이지만, 오늘은 시라카와고만으로 충분한 느낌이다.

가볍게 먹거리 좀 사고, 내일 버스 시간표 안내서를 뒤적이며 TV를 본다.

문득 사진 좀 잘 찍혔나 싶어서 카메라의 재생버튼을 눌러보기도 한다. 낮에는 시안성이 낮아서 그냥 윤곽과 컬러채널만 확인해서

어떻게 찍혔는지 유심히 보지 못했는데, 어두운 숙소 안에서 보니 아주 광채가 번쩍번쩍 하는게, PC로 옮겨서 보면 실망할 듯한 불안감이 엄습한다.

 

나고야에서 구입한 책도 좀 읽고 TV도 보고 일기도 쓰고 하면서 하루의 마무리까지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보낸다.

강렬하고 역동적인 흥분을 가져다 주는 곳은 아니지만, 시라카와고에서의 하루는 내가 열받을 요소가 하나도 없어서

여행중에도 온갖 사념이 머리속을 휘젓는 본인치고는 꽤나 안락한 밤을 보낼 수 있을듯 하다.

 

 

딱히 관광지역과 민간지역이 구분되는 곳은 아니지만 외곽으로 걸어갈수록 평범한 일본 민가의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

얼마 후엔 이런 곳에서 묵게 되겠지만 아직 실감나지는 않는다. 이 사진을 담으며 괜스레 조금 마음이 답답해진다.

 

특이하다는 점만 빼면 이곳 시라카와고에 서 있는 건물들은 다들 정겹고 아담하다. 주위 환경의 덕을 톡톡히 보는 듯.

 

 

 

정비를 하긴 했겠지만, 이곳에서 상수도 하수도의 개념이 있는건가 약간 궁금하긴 하다.

가끔 이곳에 손을 찰싹찰싹 담궈보는 관광객도 보인다.

 

물의 외견만으로 충분히 깨끗하다는 느낌을 받긴 해도

이런 개울 근처에 피어있는 식물들을 구경하는 것으로도 물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냄새나는 물에는 뭔가 진득진득한 식물들이, 사흘째 야근하며 담배 피워댄 샐러리맨의 눈가에 드리워진 다크서클처럼 우중충한 색깔로 포진하고 있다.

어쩌면 그 식물들은 몸소 환경정화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것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사람의 좁은 아량으로는 그걸 보기좋게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다른 갓쇼즈쿠리 가옥과는 뭔가 분위기가 좀 다르다 싶었더나, 까페로 사용중인 녀석인 듯 하다.

담벼락을 대신하듯 여유있게 늘어서 있는 화분도 나름 자기주장을 하고 있지만

레이스의 끝자락같은 덩쿨 목걸이가 과하지 않게 까페 뒤쪽을 장식하고 있는 모습이 매력적이다.

 

역시 분위기로 먹고 사는 까페라 그런지 남다른 센스를 어필하기 위해 노력하는게 느껴진다.

 

 

 

글쎄, 확실히 매력적인 디자인에 사람 발길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는 모습을 유감없이 어필하고 있는데

돌아가는 버스가 2시간도 남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 저기 들어가는건 괜히 아쉬움만 더할 듯한 기분이 든다.

 

좋은 까페라 생각되는 곳에서는 커피 여러잔과 함께 책 반권 정도는 읽을 정도의 시간이 담보되어야 한다는 본인의 철학으로는

지금처럼 멋진 간판을 뽐내고 있는 시라카와고의 까페를 즐기기에 가장 부족한 것이 시간이라는 녀석이다.

여행중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시간에 쫓기는 일은 없도록 하고 있어서, 들어가면 쫓길 것이 분명한 까페는 살짝 기피 대상.

 

하지만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서 아쉬운 기분이 드는것도 아니다. 여행은 갈망하는 것이며 미련을 남기는 것이 아니다.

겨울엔 좀 더 일찍 와서 따뜻한 커피로 손을 녹여보는게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건 또 뭐하는 녀석들인지 모르겠다. 시라카와고가 이렇게 깨끗하다는 데몬스트레이션의 일종인가.

잘들 크고 있으니 확실히 깨끗하긴 하겠는데, 관광객들에게 어필하는 의미 이외의 뭔가가 더 있는 것일까.

 

혹시 이렇게 잘 키우고 있다가 식당에서 관광객 상차림에 올라오거나 하는 것인지.

이 수로 양쪽 끝에는 철망이 설치되어 있어서 녀석들이 도망갈 수는 없다. 장식용이 아니라면 뭔가 이유는 있을듯 하다.

다음에 까페 들어가면 이런 거나 한번 물어볼까 싶다.

 

  

 

같은 곳을 여러번 찍지는 않는 성격인데, 저 까페에 역시 조금이나마 아쉬움이 남아 있는 것일까.

괜스레 자리를 떠나기 전 한번 더 둘러보게 된다. 커피가 그리운게 아니라 정말 참 잘 꾸며놨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언뜻 대문 바로앞에 논자락이 펼쳐진 전형적인 농촌 가옥처럼 보여도, 확실히 까페라는 공간의 자기주장력이 스믈스믈 세어나오는 느낌.

 

2층 창가쪽이 꽤나 인기가 있지 않을까 싶다.

갓쇼즈쿠리 가옥은 이곳만의 전매특허니 침해하고픈 생각까지는 들지 않지만

밖에서 봤을때 기분좋은 까페 분위기는 다른 형태로라도 구성해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멋진 까페 탐방같은 잡지에 한번쯤은 실려도 좋은 곳 아닐까.

 

 

 

아무 생각없이 길을 걷다보니 가끔 관광객들이 가는 길과는 전혀 관계없는 곳으로 빠지기도 한다.

설렁설렁 걷다 보니 어느새 좁던 길은 그냥 끊겨버리고, 그 앞에는 어떤 민가의 앞마당과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다.

아직까지는 길 위에 있다고 하지만, 왠지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빠져나온다.

 

빠져나오기 전에 건너편 가옥의 뒷마당 모습을 한장 담아본다.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어 있지는 않은 이곳 사람들의 좁은 공간.

뒷마당이든 앞마당이든 이렇게 집 주위에 일정 공간이 있으면 그것만으로 사람은 여유를 느낄 수 있는듯 하다.

 

뒷마당에 나오자 마자 잘 여물어가는 벼이삭 풍경이 펼쳐지는 농촌생활이라면 꽤나 즐거울 것 같은데.

 

 

 

개인적인 영역이라면 앞마당 가꾸기, 주변 길가 청소하기 정도.

마을 공동체라는 영역에서는 가로수 정비, 도로 청소, 하천가 청소 등등

자본의 핏줄이 땅 속까지 흐르는 도시가 아닌 이상, 시골 마을은 알아서 부지런해져야 하는 일이 많다.

아직도 회람판 돌려가며 팀과 구역을 정해 종종 청소, 수리, 유지 등의 업무를 협동하는 시골 마을은 많이 있다.

 

아마 도시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굉장한 프라이버시 침해라고 느껴질 수도 있을법한 일들도 없잖아 있다.

자연 속에서 산다는 건 디지털 TV 화면에서 물흐르듯 굴러가는 귀족적인 게으름과 전혀 다르다.

풍성하고 맑은 공기를 주는 대신 그만큼의 땀을 흘려야 굴러가는게 진짜 자연이라는 녀석.

 

이곳의 청결도나 정비 수준을 보면, 자연이 그들에게 배풀어주는 것 만큼 노력하지 않으면 결코 이 정도로 유지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자기가 해야 할 것을 남에게 맡기면서까지 바빠야만 굴러가는 도시라는 생태계에 비하면 좀 더 인간적이라 이렇게 정감이 가는 것이겠지.

 

 

 

좀 전에 얼핏 보였던 '시라카와고에서 가장 큰' 갓쇼즈쿠리 가옥인 와다 씨의 저택이 보인다.

앞서 말했든 입장료가 300엔이나 해서 굳이 들어가고픈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저기서 바라보는 풍경이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공짜로 볼 수 있는 전망대 풍경도 원없이 안구신경속에 집어넣어놨으니까.

 

저기서 경치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들어와 볼 만해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으로 미소를 머금고 있다면

나 역시 저 사람들이 창가에 선 모습을 이렇게 담으며 '밖에서 보는 걸로도 괜찮네'라고 생각할 수 있다.

 

갓쇼즈쿠리 가옥이 얼마나 큰지 알아서 대비되어 주니 고마운 느낌도 든다. 창문이란게 그냥 창문이 아니다.

보통 거주용으로는 1층만 사용하고, 위층들은 창고로 사용하거나 방직 등 가내수공업에 사용되었고 하는데

그걸 감안해도 정말 보통 큰 건물이 아니다. 300여년 전에 한 가문의 가족 전체가 모여살던, 작은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큰 건물이라는 느낌.

 

 

 

서두르지도 않았고 아쉬움에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지도 않은 산책은

점점 얼핏 시야에 들어왔던 듯한 풍경들이 다시 한번 눈앞에 어른거리기 시작하며 그 끝을 느끼게 한다.

 

충분히 이곳저곳 둘러보았고, 정감이 가는 풍경에는 5분이고 10분이고 멈춰서서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는 등

관광을 즐긴다는 의미에서 부족함이 없는 시간을 보내왔지만, 아쉽다거나 부족하다거나 하는 생각이 아닌 이 감정은

아마도 '2013년 8월의 시라카와고' 라는 시간의 단면만을 보아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공백이 아닌가 한다.

 

수백 년간 이곳에 순응해 오고 저항해 온 마을 사람들이 남긴 실체적 흔적들은 관광객의 시선을 멈추게 하지만

그 이어짐과 별개로, 태양과 달의 움직임에 따른, 1년이라는 주기의 흔적들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로서 되풀이 중이다.

이번 방문에서는 그 이어짐을 경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돌아가는 발걸음을 살짝 무겁게 만드는 것일까.

 

그런 단면의 인식이 나의 여행에 대한 머릿속 정의에, 어느 의미에서 부합되지 않는 면이 있었기 때문에

자전거 끌고 1년동안 일본을 돌아다니거나 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렇게 현실 세계로 돌아와서 틈나는대로 이 단편만이라도 즐기려 애를 쓰는 일반인이 되어 있다.

 

시라카와고는 자연의 권능이 남아있는 곳임에 틀림없고, 그 곳의 흐름을 끊김없이 느끼려면

지금의 나로서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다못해 다른 시간대의 단편이라도 더 느껴보려고 겨울 방문을 또 한번 생각해 본다.

 

물론 서두를 건 없어서 그게 올해가 될지 내년이 될지 몇년 후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마음속에 메모를 해 두면 어쨌든 겨울의 시라카와고를 잊고 흘려보내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다.

 

 

 

시라카와고의 풍경은 바닷바람의 강인함을 품고 있는 자연이 사람의 마을을 살짝 아플 정도로 감싸안고 있는 모습이라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은 건조 시기에 비해 거대하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갓쇼즈쿠리 가옥과 함께

마을을 둘러싼 거대한 삼나무와 깎아지르는 산맥, 끊임없이 자라나는 생명력에 번갈아 눈을 빼앗기곤 한다.

 

사진을 담을때도 무의식적으로 조리개를 최대한 조이고, 눈에 들어오는 풍경 중 한 장면을 프레임 크기로 잘라내어

그 장면안에 들어간 모든 모습, 의식, 의지를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기분으로 충만해 있었다고 생각한다.

풍경만큼이나 욕심을 내었다고 할까, 이곳은 이곳 그대로를 담아내는 것만으로도 나의 감성이 초라해 질 정도의 큰 그릇을 가진 곳이니까.

 

하지만 논 가장자리에 살짝 피어있는 수국의 모습을 보고 처음으로 단렌즈의 조리개를 최대로 개방하여 한 장을 담는다.

담아내고 싶은 것과 담아내야 할 것, 그리고 그 만큼의 공간을 똑같이 비워내는 것이 사진이라는 사실을

이곳 시라카와고에 압도되어 한참 황홀해 하던 마지막 찰나에 다시 한번 되새겨 낸다.

  

 

이런 더운날 올라가기에는 심히 편안하다고 할 수가 없는 길이다.

멀리서 본 전망대 높이를 생각하면, 그리 오래 걸리진 않겠지만

은근히 이 오솔길 경사가 급한 편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가빠온다.

몸무게 탓도 있고 카메라 탓도 있고. 건장한 사람이라 해도 5kg 짜리 숄더백 매고 오르는게 쉽지는 않을 듯.

 

 

 

그래도 친절하게 계단을 만들어 줘서 못 올라갈 정도는 아니지만

왠지 올라가도 올라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듯한 기분에, 후세에 내가 여기 올랐다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 사진도 찍고 한다.

이렇게 찍어놓지 않으면 또 엄살이라고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이 어디선가 출몰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사실 날씨 탓이 가장 컸고, 여기는 그냥 동네 마실 나가는 수준밖에 안 되는 높이긴 하다.

 

 

 

근데 진짜로 좀 힘들긴 하다. 경사가 그리 만만한 편이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몰아치는 형태라서

이렇게 사진 한장 담아내는게 오히려 휴식시간이라 느껴진다.

 

훅훅거리는 숨소리와 후두둑 떨어지는 땀방울이 산의 정적을 깨트리고 있다.

다행히도 앞뒤로 나 말고 이곳을 오르는 사람이 없어서, 좁은 길목에서 사진 찍으며 좀 쉬어도 문제될 게 없었다.

노련하게 올라가는 사람들이 뒤에서 땀덩어리 본인을 지나쳐 갈 때, 가끔 계곡 너머로 몸을 던지고픈 기분이 들기도 하니까.

 

저 곳을 돌면 확 트인 정상이 나오겠지 하는 기대를 몇 번이고 배신당해가며 어쨌든 한걸음씩 발을 뗀다.

사하라 사막 마라톤에서도 느꼈지만, 어쨌든 발을 떼면 언젠가는 끝나는 일.

 

 

 

막상 정말로 평지가 나오고 나니 좀 맥이 풀린다. 사실 땀 좀 흘렸다 뿐이지 조그만 언덕 같은 곳일 뿐.

원래 성터였다고 하는데, 이런 외진 마을 어귀에도 성이 있었나 싶다. 이곳 성터에 대해서는 그리 알아본 적이 없었다.

 

산 위의 공터치고는 확실히 인위적으로 닦아놓은 흔적이 남아있는걸 보면 성이 있긴 있었나보다.

손수건이 흠뻑 젖을 정도로 시원하게 땀 한바가지 흘리고, 그늘에서 잠깐 휴식을 취한 후 앞에 펼쳐진 전망대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본다.

 

 

 

시라카와고의 마을 전경을 한 눈에 둘러볼 수 있는 전망대는 2~3군데쯤 유명한 스팟이 있는데

이곳은 오솔길을 따라 왔을 때 만날 수 있는, 제대로 된 펜스조차 없는 등산길 도중의 조그만 창문같은 느낌의 스팟이다.

 

가장 유명한 곳도 아니고, 여름의 생명력 덕분에 나무들이 워낙 울창하게 자라서 시야각이 제한되는 불편한 곳이지만

일부러 험한 길 올라왔다는 달성감도 있고 해서 한동안 머무르며 마을의 모습을 구경하는데 여념이 없다.

 

가치가 있는 곳이니 그렇겠지만, 왠만한 농촌 역시 한국의 농촌보다 훨씬 정비가 잘 되어있는 이곳에서도

정말 예술적으로 가꾸어 놓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절경이다. 사실상 평범한 농촌이 아니긴 하지만.

 

 

 

좀 전에 화사한 커플 둘이서 열심히 사진찍던 그 건물을 이렇게 바라보니 느낌이 좀 새롭다.

논마지기 공간을 살짝 비집고 들어간 녀석인데 어쩌면 저렇게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는지.

 

거기다 같은 높이에서 걸어다닐때는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던, 돌길로 만들어놓은 농로의 깔끔함 역시 인상적이다.

겉으로는 농촌 마을같아 보이지만, 속을 천천히 들여다보면 돈 많은 귀족들이 산책 즐기는 곳처럼 어느 한군데 세심히 손을 쓰지 않은곳이 없다.

 

 

 

한 국가와 그곳의 자연환경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에 틀림없다.

일본 가옥의 평기와와 저 곧게 뻗은 삼나무가 어울린다면

한옥의 굽이친 기와 형태는 허리를 늘어뜨린 소나무를 담고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도시에서는 이미 어디가 한국이고 어디가 일본인지 모를 정도로 비슷해져 버렸지만

이런 시골모습만큼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나라별 특색이 사라지지 않는 듯 하다.

 

좋긴 좋은데, 이곳 아이들도 어릴때 나무위에 올라가 놀고 그러는 것일까.

내가 어릴적엔 올라가기 쉬운 소나무를 참 수백번도 더 오르내리고 했는데

여기 삼나무 잘못 올라갔다가는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조그맣지만 꽤나 오래된 듯한 사당이 위치한 이곳 전망대에는

사람도 별로 오지 않고, 그늘 아래에 벤치가 하나 있어서 땀 식히기엔 좋다.

카메라를 내던지듯이 아무렇게나 퍼질려 놓고 벤치에 앉아서 땀을 닦는다. 손수건을 짤면 땀이 떨어질 정도로 허용량이 오버되고 있다.

 

한동안 아무 생각도 없이 멍하니 앉아만 있는데, 영어를 할 줄 아는 서양인 관광객 부부가 이곳에 와서 연신 사진을 찍는다.

그사람들 눈에도 이런 풍경은 꽤나 신선하게 느껴질까. 한국과 일본에 비교하면 미국이나 유럽이나 산이 많은편은 아니라서

이 정도 산지에 둘러싸인 마을이 그리 흔하진 않을 법 하다.

 

그 부부는 실컷 사진찍고 난 후, 왠지 조금 망설이는 듯하더니 나에게 와서 사진 좀 찍어줄 수 있겠냐고 부탁한다.

찍어주는거야 어렵지 않지만 본인이 사용하지 않는 캐논 DSLR 이라서 조작이 항상 어색하다.

본인들이 오토모드로 해 두고 나한테 건네줬으니 그걸 바꿀필요는 없을 듯. 그냥 구도만 맞춰서 두어 장 찍어줬다.

받아들고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라고 웃으며 인사를 하는데, 이걸 또 붙잡고 '난 위대한 한국인이여~'라고 설명해주기도 귀찮다.

 

내가 그들을 미국사람인지 영국사람인지 프랑스사람인지 나미비아사람인지(?) 모르는 것과 같이

그들도 내가 일본사람인지 중국사람인지 한국사람인지 나미비아사람인지(?) 모르는 것이니, 그걸 그들에게 수정해 줘야 할 의무감 같은거 느끼지 않는다.

 

 

 

이곳부터는 제대로 닦여있는 아스팔트 도로로 연결되는데, 가장 유명한 천수각 전망대에는 거대 식당과 가게가 포진해 있어서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마을 아래서도 보이는 곳이고, 전망 해치지 않으려고 작업을 다 해놓은 곳이기 때문에 시야가 매우 시원하다.

 

마을 안에서 이 정도 규모의 가게를 만들수도 없기 때문에, 이곳 전망대 가게는 압도적으로 규모가 큰 편이다.

단체 관광이라면 이 곳을 놓칠수 없으니, 식당쪽에는 벌써 '2층은 예약, 단체손님 전용입니다'라고 써 놓을 정도.

 

전망대에는 쉴 수 있는 의자도 몇 겹이나 층층히 배치되어 있고, 펜스 바로 앞에서는 아무것도 시야에 걸리는 것 없이

그림같은 시라카와고의 사진을 마음껏 담을 수 있다. 앞에서 대신 사진 찍어주는 사람도 항시 대기중이며

물론 관광객 자신들이 가져온 똑딱이가 만족스럽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제대로 된 DSLR로 사람들 찍어주고 출력하며 돈 받는 일도 한다.

 

사진 찍어주면서 '치즈~' 대신에 '시라카와 고~' 하면서 주먹을 하늘로 올리라는 주문만큼은 좀 촌스럽다는 기분이 들지 않을수가 없었긴 했지만.

 

 

 

임팩트라고 할까. 어쨌든 마을 전체 모습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이곳 천수각 전망대에서 사진을 담지 않는 관광객이란게 과연 현실에 존재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본인 역시 귀찮아 죽을것 같은 렌즈를 화각별로 담아온 이유의 절반이 이곳 전망대를 위해서였으니까.

광각으로도 담고 망원으로도 담고, 관광객이 많이 오긴 해도 전망대 공간이 상당히 넓고

단체 관광객은 잠깐 구경하고 단체사진 찍고 훌쩍 가버리기 때문에

시간이 남아도는 홀로여행자는, 무제한 회전초밥집에 앉아있는 기분으로 원없이 사진을 담을 수 있다.

 

참 뭐랄까, 이런 폭발적인 자연 속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인공미의 깔끔함을 유지하는 이쪽 사람들의 특성은 신기하다.

깨끗하고 깔끔한 건 좋은데, 한국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사람 사는 냄새'라는게 좀 적다고 해야 하나.

사실 그거 조금만 나쁘게 말하면 게으르고 지저분함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어서 쉽게 적용하기는 어려워도

확실히 한국에 이런 자연의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면, 지금 이 모습과는 그 느낌이 많이 다를거라 생각한다.

 

 

 

전망대에서 사진을 수십장도 넘게 담았지만, 블로그에 올릴 생각은 들지 않는다.

2D 화면에서 사진 구경하는 건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더 많이 올린다고 이곳을 더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마을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면 역시 직접 가서 느끼는게 제일 좋은 방법.

본인은 이 모습을 보면서 겨울의 시라카와고를 상상하고 있다. 눈으로 덮인 전망대까지 걸어서 갈 수 있을까 싶고.

사실 적지 않은 관광객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마을에서 여기까지 태워주는 버스 있대!'

물론 본인 역시 알고 있었지만, 이 마을을 돌아보는데 내연기관의 힘을 빌리고 싶지 않아서 걸어 올라왔다.

 

겨울엔 방금 그 길 오르다가 인생이 좀 꼬일수도 있을 것 같아서, 버스를 이용해야 하나 고민중이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긴 했는데, 점심시간을 훨씬 넘긴 지금도 배가 눈꼽만큼도 고프지 않다.

여행중에는 그리 많이 먹는편이 아니긴 해도, 이만큼 더운날 돌아다니고 있어도 허기지지 않는다는건 좀 신기하다.

그래서 전망좋은 전망대 앞의 식당에도 들어가고픈 생각은 전혀 없었고, 시원한 음료수나 하나 뽑아 마신다.

 

타카야마로 돌아가는 버스가 오기까지 2시간 30분쯤 남았는데, 시간은 충분해도 뭔가 가게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스스로의 감정을 이해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결국 돌아오는 결론은 대충 납득이 간다.

시라카와고에서는, 더운 여름날 에어콘 켜진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추운 겨울날 살짝 따뜻한 가게로 들어가는게 더 어울리기 때문에.

 

여름이 본인에게는 참 버티기 힘든 날이라는게, 건물 안의 인공적 에어콘 바람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겨울엔 난로나 보일러 강하게 돌리지 않아도 집이라는 건물 자체가 어느정도 단열효과를 내기 때문에

들어가 앉아도 살짝 추워서 손바닥을 한두 번 비벼주는 정도가 딱 좋다. 거기서 식사 한끼 하면 몸이 포근해 지니까.

그런 면에서, 겨울이라도 난로나 히터 팍팍 틀어버리는 가게는 들어가기 싫다.

 

느긋하게 풍경 바라보며 휴식 취하고 나서 반대쪽 길로 내려간다. 반대쪽은 자동차로 통과할 수 있을만큼 반듯하게 닦인 아스팔트 도로.

마을 어귀까지 완만한 경사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난이도는 훨씬 낮다. 올라올 때 이쪽으로 왔으면 몸은 편했을 듯.

하지만 그만큼 재미있는 길은 아니라서, 내려올 때 느긋하게 내려오는 쪽으로 사용해도 불만은 없다.

 

진짜로 물이 풍부한 곳인지, 내려가는 도중에 산골짜기에서 나오는 물을 가지고 뭔가 만들어 놓은게 보인다.

 

 

 

마을 어귀를 빙글 돌며 내려오는 길이라서, 마을 속에서 헤엄치며 담던 사진의 시각과는 또 다른 맛의 결과물이 나온다.

슬슬 관광객이 많아지고 있는 시점이라 그런지, 이런 길에서 숨듯이 걸어가며 저 너머의 모습을 담는 것은, 일종의 휴식과도 같은 시간.

 

 

 

이제 왔던 길과는 다른 길로 다시 한번 마을의 모습을 눈으로 담아내면

그리 넓지 않은 시라카와고 여행은 끝이 난다. 그림같은 풍경과는 별개로 식사를 이곳에서 해결하고픈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서

관광객들의 씀씀이를 기대하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생각이 들지 않는것도 아니다. 하지만 식욕이 안생기는데 어쩔 수 없다.

 

 

 

도시에서는 설사 농사터가 있다고 해도 땅이 아까워 이렇게 꽃밭을 만들기는 힘들 텐데.

판매용으로 키우는 것도 아니고, 그냥 뒤뜰을 장식하기 위한 용도로만 자연스럽게 자라는, 약간 무질서한 꽃들의 모습이 더욱 반갑다.

의도된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그 꽃밭을 키우는 갓쇼즈쿠리 가옥 역시 살짝 힘이 풀린듯한 모습이 더욱 잘 어울린다.

 

 

 

좋은 마을은 물이 맑은 마을이라는 말은 세계 어느곳에서도 통하는 진리.

좋은 물을 마시고 자라는 식물과 나쁜 물을 마시고 자라는 식물은 생각보다 차이가 많이 난다.

애초에 나쁜 물을 마셔도 자라는 녀석들은, 그만큼 터프하게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한 녀석들이니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사람 입장에서는 역시 진드기나 벌레 잔뜩 꼬이는 녀석들보다는 좀 순해보이는 녀석들이 더 마음에 드는것도 사실.

 

이곳은 자연 환경에 비하면 기분나빠질 만한 벌레가 별로 눈에 안 띄는 편인데, 개인적으로는 물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공원처럼 인위적으로 디자인해서 만들어낸 아름다움과는 전혀 별개로

자연의 생명력뿐 아니라 사람의 생명력까지 느껴지는 이곳 풍경은, 조화라는 면에서 굉장히 높은 점수를 줄 만 하다.

 

여행에서 가장 큰 볼거리라면 역시 자연 풍경과 사람 사는 모습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이곳 시라카와고는 그 두가지가 배합되는데 있어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 점이 훌륭하다.

관광객들이 오고가며 감탄해 하는, 마을 사람들이 남겨놓은 인간의 모든 흔적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더 예쁘게 보이거나 하는 인위적인 색이 아닌, 순수하게 생활하기 위한 노력과 조화의 흔적이라는 점이 말이다.

 

사람들이 풍경에서 느끼는 평온함과 아름다움이란, 결국 원래 그렇게 있던 것들이 가지는 자연스러움의 산물이 아닌가 싶다.

 

마을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긴 한데

일본 내부적으로는 그 중의 몇몇 사찰이나 가옥들이 또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그런 곳은 관람하는데 대부분 입장료가 필요하다. 유지 보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

 

하지만 민가원에서 500엔 내고 구경하고 나니, 개별 건물에 각각 요금내고 들어가서 구경하는게 왠지 시들해진다.

내부도 실컷 구경했고, 마을쪽 문화재들은 사람들 밀도가 높아서 흥미가 동하지 않는 이유도 있고.

 

 

 

문화재를 구경한다는 감각은 민가원에서 충분히 만끽했고

이곳에서 느끼는 것은, 이런 문화재같은 가옥 안에서도 지극히 평범한 생활을 보내고 있는 주민들의 삶의 흔적이다.

 

갓쇼즈쿠리 방식에다가 물받이를 포함한 현대식 처마가 퓨전된 하이브리드 가옥의 모습도

보수용, 땔감용으로 쌓아놓은 장작 무더기도

관광객들 지나다니는 길을 피한 구석에 살그머니 걸려있는 빨랫감도

전통성을 지닌 문화재와는 다른, 현실감을 느끼게 해 주는 좋은 소재들이다.

 

 

 

도시 입장에서 보면 이런 자연에 둘러싸인 마을이라는 점 자체가 현실성이 떨어지기는 해도

중간중간 뒷마당에 주차중인 자동차들이 이런 곳에서는 오히려 괜찮은 데코레이션이 된다고 할까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해 줘서 나쁘지 않다.

 

문화유산이니 뭐니 해도 주민들의 편의성을 아예 무시해서는 오히려 지나치게 딱딱한 인상을 줄 테니까.

 

도로를 주욱 걸어가다가 옆으로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길래 뭔가 하고 봤더니

뭔가 굉장히 큰 갓쇼즈쿠리 가옥의 옆모습이 살짝 보인다. 푯말이 세워진 것으로 봐서 중요문화재에 들어가는 보존용 건물인 듯.

루트가 단순한 곳이어서 저쪽 길은 돌아오는 길에 둘러볼 예정이라, 가기 귀찮아 망원으로 찍어본다.

 

뭔가 유명한 건물인 듯. 아직까지 별로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은 없다.

가장 오래된 건물은 민가원에 있었는데 가장 큰 건물은 마을에 위치해 있다. 가다 보면 보일텐데, 혹시 밸런스를 의식한 것일까.

 

 

 

좀 특이하긴 하지만 어쨌든 시골집, 자그마한 논밭과 짜투리 비닐하우스, 낡은 전신주와 구식 전등, 아담한 자동차.

단어의 나열만으로는 지극히 평범한 시골 마을임에도 눈으로 바라보는 모습은 왜 이렇게 셔터를 누르고 싶어지게 만드는지.

 

이상과 현실은 엄연히 다르지만, 이상의 세계에서 떠오르는 농촌 풍경과 상당히 가까운 이미지를 현실에서 감상하고 있다.

 

 

 

일반적인 거주 문화에서 본다면 한국은 목조 뼈대에 점토, 석회를 이용한 복합건물이 발달했고 일본은 목조 주택이 발달했다.

과학적, 기술적인 측면에서 객관성을 두고 파악한다면 한옥 쪽이 더 우수한 면이 많은데

집이라는게 지리적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는 개념이다 보니, 사실은 다들 자기 지역에서 가장 편리한 방법으로 집을 만들어낸 게 정답일 듯.

 

일본의 전통 가옥은 기둥부터 벽면까지 거의 모두 목재를 사용하는데

온돌과 흙벽으로 무장한 한옥에 비해서 거주의 안락함 면에서는 확연히 떨어지지만

반대로 내구성과 공간 확보에는 강점을 보인다. 계절변화가 심한 지역에서도 목재가 유리하고.

 

한옥이 목재로만 지은 집보다 더 튼튼하리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은 반대다.

한옥은 담이나 벽, 지붕 사이에 현대의 시멘트 대용으로 복합 점토나 회반죽을 사용하는데

이런 재료들은 습기를 매우 잘 머금고, 계절에 따라 부피의 변화가 심하다.

연결 부위가 목재인 이상 그것과 오래 접해있으면 과도한 스트레스로 집 전체가 휘어진다거나 하는 일도 잦았다.

 

그외 반대로 일본은 목재를 사용해 중량이 가벼웠으므로 일반 가정집에서도 2층 3층 주택을 짓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한옥은 온돌의 무게가 워낙 무거워서 복층 주택을 짓기가 거의 불가능한 구조였다.

하지만 추운 겨울을 나는데는 온돌 없는 복층주택보다 온돌 있는 단층주택이 월등히 안락하고 편안하다. 복층이 필요가 없는 것.

 

이렇게 한국과 일본은 멀지 않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미묘하게 다른 지형, 기후, 자재, 문화 등의 요인으로

모양만 비슷하다 뿐이지 판이하게 성격이 다른 거주 환경을 형성하게 되었다.

도쿄 정도 가면 한국하고 별 다른것도 없네 싶겠지만, 일반 거주지역 골목으로 한걸음 가 보기만 해도 한국과는 전혀 다르다.

 

갓쇼즈쿠리 가옥과 현대식 주택이 공존하는 시라카와고의 모습은, 특히나 한국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특색이 묻어있어서 관광온 기분이 난다.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꽃망울부터 준비하는 성격급한 녀석이 있다.

덕분에 묘하게 정갈한 사진을 남길 수 있어서 고맙긴 하다.

 

 

 

그냥 지나가길래 과연 이 카메라로 담을 수 있을까 하며 셔터 눌러봤다.

원본 크기에서 반쯤 잘라낸 사진인데, 그래도 대강 디테일은 남아있어서 다행.

 

이 여행을 떠나기 전, 건물 안으로 들어와 기진맥진한 참새 한마리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잡아서 놔주려고 해도 도망가느라 바쁘고, 혼자서는 어디가 창문인지도 찾지 못하고 있는 패닉 상태였다.

꽤나 지친듯 해서 조금만 다가가면 잡을 수 있을것 같아 조심스럽게 다가갔는데

마지막 순간에 후다닥 날아올라서 도망가더니, 그대로 닫혀있는 아크릴 창문에 들이받고 떨어져 버렸다.

내 두 손 안에서 생명이 마지막 두어 번의 가쁜 숨을 내쉬던 경험은 처음 해본듯 하다.

 

참새는 아니지만, 이 녀석은 적어도 창문에 머리를 들이받아 뇌진탕으로 생을 마감할 일은 별로 없을테니

그것만으로도 이 마을이 좀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정말 무덥다. 각오는 했지만 이런 여름날에 야외를 하루종일 걸어다닌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몸만 왔으면 별것 아니었겠지만, 어깨에 맨 카메라 장비만 5kg는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 시라카와고의 공기가 도시와는 전혀 다른 상쾌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입에서 육두문자가 쏟아지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여행을 즐길 수 있었음에 틀림없다.

 

한국은 지금 농촌이라 불리는 지역의 상당수가 10km 이내에 금속공장이나 화학공장 등

오염 폐기물 처리가 극히 어려운 산업체와 인접하고 있다. 도시에서 가까우면 허가와 동의받기가 정말 힘들어서.

시골이 깨끗하다는 건 이제 한국에서는 옛말이 되어가는 듯 하다.

 

공장이고 뭐고, 이런 전통 한가지만으로 마을을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주민들은 배운게 없고 지원해야 할 공무원들은 자기 호주머니에 들어올 게 없으면 극도의 게으르니스트가 되어 버리니.

이런 곳에 올때마다 한국에서 이런 곳 찾기가 왜 그리 어려운지 아쉬움이 들지 않을때가 없다.

 

하다못해 관광객들이 고로케 사먹는다고 도로에 삐져나와있어도

경적 한번 울리지 않고 슬금슬금 돌아가는 자동차만큼이라도 배워보면 안될까 싶다.

 

 

 

다리를 건너 마을 입구에서 전망대 쪽으로 걸어가면 거의 왠만한 중요문화재는 다 구경할 수 있는데

이 와다(和田)가문의 집은 시라카와고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유명한 녀석이다.

오래되기도 약 300년 정도로 오래되었고, 크기가 현존 갓쇼즈쿠리 건물 중에서 가장 크기 때문에.

 

당연히 그냥은 못들어가고 입장료가 300엔이다.

그 아름다운 민가원을 전부 다 둘러보는데 500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건물 한 채 관람에 300엔이 든다는 건 좀.

사실 이곳에서 기대한 것은 건물 내부의 모습이 아니라 이 갓쇼즈쿠리 건물이 마을과 조화되어 있는 풍경이었으니

굳이 들어가고픈 생각은 들지 않는다. 밖에서 봐도 참 크다는 생각이 들긴 하니까.

 

 

 

하이브리드 갓쇼즈쿠리 가옥도 생각외로 밸런스가 좋은듯 하다.

관광객이 워낙 많아 와서 프라이버시가 좀 위태위태하겠지만

대인관계에 부담 가지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런 곳에서 살아도 좋을듯 하다.

 

이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데, 순백의 세계 안에서의 모습은 과연 어떨지 궁금하고 기대가 된다.

 

 

 

저 멀리 논마지기 안쪽에는 창고로 보이는 건물이 처연하게 서 있다.

시라카와고가 다른 마을과는 충분히 고립된 곳이지만, 건물들이 상당히 조밀하게 밀집해 있어서

마을 내부는 꽤나 북적북적한 느낌이다. 이렇게 홀로 서 있는 건물 모습이 오히려 새로워 보인다고 할까.

 

그림같은 풍경이라고 생각하는건 나 뿐만이 아닌지, 좁은 농로 사이를 산책하는 커플 한쌍이 시야안으로 들어온다.

양복입은 단정한 남성과, 폭이 넓은 모자를 쓰고 하늘하늘한 흰색 스커트를 가끔 휘날리는 여성이 나란히 걸어가는데

옷차림으로 봐서는 젊다기 보다는 30대 중후반 즈음의 적당한 나이인 듯.

 

한동안 계속 저 창고 사이에서 알짱거리며 사진 찍고 있길래, 자연스럽게 본인 카메라에도 담겨 버렸지만

둘만의 즐거운 시간을 세간에 널리 알리고 싶지는 않으니 사진은 컴터 하드안에만 보관하기로 한다.

 

 

 

시골 생활의 좋은 점중 하나는, 마음껏 손가는대로 식물을 키워볼 수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파트는 좁아터진 베란다와 항상 일정 각도로만 들어오는 햇빛으로 인해 식물들이 답답해 하는것 처럼 보이기 일수고

요즘엔 아예 베란다를 터 버리는 일도 많으니, 동물원에 갖힌 코끼리를 보는 기분마저 들기도 한다.

 

저렇게 떡하니 화분 늘어놓고 알아서 잘 자라는 꽃들 모습을 보니, 사람 자라는 데도 좋은 환경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그것과는 별개로, 시라카와고는 그닥 맛있는 요리가 없다고 소문을 들었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물좋고 공기좋은 것과는 별개로, 이런 외진 관광지는 밖으로 새는 손님이 없기도 하고

장인 소리를 들을 정도의 실력을 가진 요리사가 이곳에 머물며 어중이 관광객 상대할 일도 없으니.

 

그와 별개로 여관 요리는 상당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여관의 요리는 자신들의 프라이드나 마찬가지라서.

이번에 원래 묵을 예정이었던 여관은, 주인장이 사냥꾼의 후예라서 지금도 산과 강에 나가 직접 잡고 기른 재료로 식사를 만들어 준다는데

예약이 되지 않아서 조금 아쉽긴 하다. 물론 그만큼 여관에 머문다는건 지출도 생각해야 하는 일이긴 해도.

 

 

 

주민들의 소일거리라고 할까, 마데인 차이나의 걱정을 무릅쓸 필요 없이

이곳의 선물가게에 전시된, 대나무나 싸리를 엮어서 만든 제품들은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든 것들이다.

굳이 중국 것을 수입해 만들 필요도 없이 예전부터 만들어 오던 것들이고, 순간의 차익을 위해 마데인 제품을 들여오는 순간

이곳의 선물시장 구조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맞을지도 모르니까.

 

시골 마을 사람들의 단합심이랄까, 나쁘게 말하면 왕따정신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집단에서 빠져나가서는 살기 힘든 생활공간 덕에

여전히 이런 수제생산품은 원산지를 잘 지켜나가고 있는듯 하다. 그것과 별개로 아동용 모자 참 인상깊다. 핑크펭귄인가?

 

 

 

자연에 둘러싸인 시라카와고라지만, 이런 최첨단스러운 기술도 가지고 있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건지는 몰라도 길가 골목에 물이 나오는 구멍이 일렬로 배치되어 그곳에서 물이 졸졸 흐르고 있다.

 

보통 이곳 사람들이라면 히다 타카야마와 마찬가지로, 바가지를 이용해 물을 퍼서 뿌릴듯 한데

이렇게 자동으로 물이 나오는 것은 더위 해소 외의 다른 이유가 있는듯한 기분이 든다.

 

 

 

대구시 전체를 동서로 관통하는 달구벌 대로의 몇몇 구역에도 이렇게 중앙성 내부에 물이 나오는 장비를 설치해 놓았다.

예전 국제육상대회를 위한 도시정비계획에 들어있었던 녀석인 듯 한데, 이번 여름이 워낙에 더워서 그런지

환경 미화와는 관계없이 대낮에 한번씩 물이 나와서 도로를 식혀주곤 했다.

 

기술 발전이 대단한건지, 거의 눈에 뜨이지 않을 정도로 지면에 얌전히 박혀있는 모습이 시라카와고의 모습에 위화감을 더하지 않는다.

 

 

 

8월 초순에 방문한 시라카와고의 모습은 온통 푸르름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지금쯤이면 슬슬 들판이 황금 비스무리하게 변해가기 시작할 만한 시기가 아닌가 싶다.

위도도 좀 높고 산 속의 마을이라 추수시기는 좀 늦어지겠지만, 10월 중순이면 이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런지.

 

그것과는 별개로, 겨울의 시라카와고는 언제쯤 가볼까 하고 한여름 여행중에 벌써 고민중이다.

 

 

 

본인같은 초보도 이런 사진 담아내는 것을 보면

실력 좀 있는 사람들이 이곳에 가서 얼마나 굉장한 사진을 뽑아오는지 상상이 갈 듯.

 

아무리 시간이 느긋하다고 해도, 사진을 잘 담기 위한 시간은 항상 부족하다.

이런 곳에서 눈과 손이 이끄는 대로의 감성을 사진에 담아내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일부러 여관까지 잡아가며 하루정도 머무려고 했던 곳인데.

 

사진에 대한 아쉬움이야 뒤로 넘기고, 여기저기 둘러보며 걸어도 눈에 거슬리는게 없어서 묘한 기분이 든다.

 

 

 

어느 정도 계속 걸으면 갓쇼즈쿠리의 향기가 남아있는 마을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평범한 시골마을이 모습이 나타난다.

물론 그쪽에도 관광객을 위한 여관이나 민박, 가게등은 늘어서 있지만, 마을 중심부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관광지라는 건 결국, 봐 주는 사람이 있어야 생명력이 넘치는 곳이니까.

 

조금만 더 가면 전망대로 가는 길이 나오리라 생각하고 열기 넘치는 도로가를 걸어가는데

몇몇 건물에서는 '외부자본으로 들어오는 호텔 결사반대!' 라는 플랫카드를 걸어놓은 모습이 보인다.

 

이곳에 오기 전 히다 타카야마에서도 수많은 체인 호텔을 보며 느낀 점이었지만

숙박업이란 게 관광지 주민들의 생계수단이자 파이가 큰 장사거리다 보니, 힘있는 세력들이 눈독들이지 않을 리가 없다.

타카야마와는 달리 세계문화유산으로까지 지정된, 고립된 시골마을인 이곳이라서 아직까지는 숙박업의 규모가 제한되고 있는 듯 한데

사실 돈이 얽히기 시작하면 어떤 방법으로든 숙박업을 확장하는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문화유산지역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고 해도, 외부 자본의 입장에서는 숙소와 시라카와고를 잇는 셔틀 몇대만 있으면 별 문제 아니다.

 

아무리 풍요로운 환경속에 생활하고 있어도, 자본주의 세상에서마저 고립될 수는 없나보다.

실제로 교통이 워낙 불편하고 숙소도 비싸고 제한된 시라카와고라서 불만을 가지는 관광객도 없지 않으니

외부 자본이 들어오면 관광의 편의성 면에서는 환영할 사람이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어느 게 좋은 방법일지. 앞으로 시라카와고의 모습은 어떻게 변할런지.

 

무서운 플랫카드를 보며 조금 복잡한 심정으로 걸어다가 보니, 조그만 샛길이 나타난다.

아마도 이 녀석이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인 듯. 생각보다는 좁고 험하다.

마을에서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은 두 군데가 있다고 하는데, 하나는 제대로 정비된 길이고 하나는 아마 이 산길일 것이다.

조금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긴 해도, 올라갈 때나 내려갈 때나 같은 길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아서

어깨에 맨 카메라를 좀 더 단단히 둘러매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