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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자/中部'에 해당하는 글들

  1. 2013.12.10  과거로의 여행 - 산책 한 걸음 14
  2. 2013.12.03  과거로의 여행 - 키소의 비와 밤 16
  3. 2013.11.25  과거로의 여행 - 키소 마을 주민들 9
  4. 2013.11.22  과거로의 여행 - 작은 마을 키소 20
  5. 2013.11.04  과거로의 여행 - 마츠모토 봉봉 4편 18
  6. 2013.10.30  과거로의 여행 - 마츠모토 봉봉 3편 18

 

 

서둘러 지인들에게 인사를 나누고, 내일 돌아가야 한다고 못을 박아놓은 지금은

이삼 일 정도 머무르며 느긋하게 추억을 회상하지 않고 왜 이렇게 도망치듯 서두르는 것일까 스스로도 의아하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본능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것도 나름 이유는 다 가지고 있는 법이다.

 

자전거 여행 도중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을 갖고 이곳에 도착했을 땐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종일 누워 자기만 해도 그 잠이 달콤하게 느껴졌을 만큼 한계에 달해있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나보다 먼저 자전거 여행을 재개하는 쇼야 군을 따라갈 수도 없이

계약한 기간만큼 묵묵히 시간을 보내며 자금을 모으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지금은 그렇게 가끔 고개를 하늘로 올려들고 눈을 감은 채로 자전거를 타며 자유에 탐닉하던 내가 아니라

여름 휴가철을 맞아 없는 시간 쪼개서 간신히 날아와, 원래는 자전거에 실어 놓던 백팩을 등에 메고

버스와 전철을 이용해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사람이다. 자전거 여행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지금의 나는 이곳에서 자전거 여행 당시와 달리 돌아갈 길만 남아 있고 앞으로 나아갈 길은 없는 여행자의 신분일 뿐.

인사하러 온 사람이라면 딱 그만큼만 하는 게 좋다. 추억은 새록새록하지만 지금의 나는 자전거 여행자가 아니다.

 

 

 

저녁에 소야노 아버지가 직장에서 돌아오셨다.

술을 많이 마시면 살짝 흥이 올라오는 분이지만, 평소엔 조용조용하고 나긋나긋한 분.

살짝 어리숙해 보이는 말투와 쑥쓰러운 듯 벗겨진 앞머리를 쓸어올리는 손짓이, 되려 그 사람의 순수함을 드러내는 타입의 사람이다.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금방 달려 내려오고 싶었지만, 오늘은 천문대쪽에 학생 관람이 있어서 빠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소야노 아버지는 이곳 산자락 천문대에 근무하고 계셔서, 밤에 별 보는 일의 특성상 출퇴근 시간이 상당히 불규칙한 편이다.

한창 바쁠 때 소야노 어머니를 위시한 천문대 근무 남편을 둔 아내들은 '과부 클럽'이라는 가명으로 모임을 만들어 친목을 도모했다고도.

 

나가노 현은 인적이 드문 산골을 찾기가 쉽고, 해발이 높아 공기도 깨끗한 편이라 천체 관측에 좋은 지역.

기온이 낮은 겨울에 가장 잘 보이지만 한때는 주변 스키장 때문에 관측이 어려웠던 적도 있다고 한다.

요즘엔 스키 열풍도 어느 정도 잠잠해 진 편이라 조용한 산속 생활을 즐기고 있는 중.

 

오늘은 예정이 잡혀있어서 어쩔 수 없었지만, 소나기가 워낙 쏟아지던 때라 사실 헛수고이긴 했다고 하신다.

 

 

 

2010년 당시, 이 곳을 떠날 시간이 다가오자 소야노 아버지가 내게 천문대를 소개시켜 주셨다.

원래 인적이 드문 곳이긴 해도, 천문대 부지는 정말로 잡광에 민감한 곳이기 때문에

산을 중턱쯤 오르자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로도 구분이 어려울 만큼 암흑으로 뒤덮힌 모습이 인상깊었다.

 

중간에 놀란 맷돼지가 소리 지르며 산길을 뛰쳐나가는 모습에 자칫하면 큰 사고가 날 뻔 했지만.

 

천문학에 관심은 많지만, 단순히 교양 서적 정도의 개념으로 브라이언 그린과 미치오 카쿠 정도만 즐겨 읽는 본인이라

우주를 직접적으로 쳐다보는 소야노 아버지의 현장감 살아있는 설명은 책과는 다른 흥분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처음 관측을 시작할 때엔 이런 디지털 센서는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요즘엔 천체 촬영도 디지털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소야노 아버지는 멋적게 웃으면서 그것 때문에 예전처럼 별 바라보는 시간이 줄어서 아쉽다고 하신다.

 

흔히들 쓰는 필름 판형의 1.5배쯤 되는 센서를 8개 병렬로 연결한 천체 망원경의 심장.

내 손바닥 보다 조금 큰 센서의 집합체는 진공에서 영하 수십 도 이하로 내려간 상태로

밤하늘의 빛을 증폭시키고 또 증폭시켜 별의 모습을 담아내 준다. 저 장비 하나만 10억은 쉽게 넘는다.

 

 

 

천문학에 있어서 천체 관측은 이제 낭만 넘치던 주류에서 살짝 자리를 물러선 느낌이다.

키소의 천문대는 일본에서 가장 크고,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슈미트 망원경으로 유명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런 디지털 망원경의 발달로 인해 대구경 아날로그 망원경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대량 생산이 불가능한 특수용도 기계를 사용하는 현장에서는 언제나 그렇지만

필요한 장비와 기계는 알아서 디자인 해 알아서 작동시켜야 한다.

그러다 보니 외관 같은건 아예 고려 대상에도 들지 않고, 단지 작동만 잘 하면 된다는 공돌이 특유의 난잡함이 연구소 전체에 만연해 있다.

 

주변 정리 따윈 내팽개치고 필요한 장비에만 열중하는 모습이 금새 보이는데

이런 모습을 보면 왠지 동지애를 느끼게 되는 것을 보면, 나도 어지간히 정리 싫어하는 성격인가 보다.

 

 

 

우주에 대한 상상은, 나에게 있어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가장 저렴한 방법 중 하나였다.

단지 머릿속의 지식과 새로 들어온 정보, 허블과 몇몇 관측선이 보내오는 보물같은 사진 몇장만 있으면

몇 시간이든 그 거대하고도 극도로 미세한 조화의 절정을 탐닉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천문대에서 소야노 아버지가 나를 위해 일반인들에게 공개하지 않는 여러 장비와 자료를 소개해 주던 당시엔

상상이 현실로 내려오는 듯한 묘한 탈력감과 함께, 현실에 존재하는 우주의 모습을 이렇게 지켜본다는 흥분감이 공존했었다.

 

이곳의 망원경과 좀 전의 센서를 이용해 수십 시간 촬영한 결과가 바로 이 사진.

먼지처럼 보이는 점들이 별이다. 어쩌면 성운일 수도 있고.

천체 촬영용 센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노이즈 감소이다.

별과 노이즈를 구분할 수 없다면 그건 이미 센서로서 의미가 없으니까.

그래서 진공 상태의 박스 안에서 영하 수십도 이하로 냉각되어 작동하는 이런 센서들은

노이즈 비율이 일반 디지털 카메라의 수천분의 1도 되지 않는다.

당연히 이런 센서는 특수 제작하는 녀석들이라, 카메라 매니아들이 본다면 군침 흘릴만 하다.

 

우주의 기원까지 밝혀내려고 힘을 쓰는 요즘 분위기를 생각하면, 보통 천문학도 어마어마하게 발달했을거라 생각하겠지만

사실 아무리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고 또 발전해도 우주는 너무나 넓다.

수십년간 키소에서 돌아가는 중인 망원경을 통해서도, 여전히 가끔 새로운 별을 찾아내기도 한다고.

 

흑백 사진에 찍힌 별과 성운의 모습은, 형이상학적 위상에서 나에게 지적 즐거움을 안겨주던 우주가

지금 같은 공간에 나와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현실을 일깨워 주는 듯한 경외심을 들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물론 제대로 말하자면 지금 사진에 찍힌 저 빛의 원류는 나와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는 녀석이 아니긴 하다.

저 별들은 이미 지금 시점에서는 수억년 전에 사라지고 없는 잔상일 수도 있으니.

 

소야노 아버지가 콩알 지식을 소개해 주셨는데, 우리가 보는 별의 사진이 십자가 모양으로 빛나는 것은

원래 그런게 아니라 카메라 셔터막이 십자형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카메라의 작동 원리를 아는 사람은 사실 어렵지 않게 추측 가능하지만, 우주라는 개념이 워낙 사람과 멀어진 환상같은 존재라

십자 형태로 빛나는 우주 사진만으로 '별은 십자 모양으로 빛난다'고 믿어버리는 사람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소야노 아버지는 내가 우주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신이 나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준다.

원래 학생들이 견학 오면 이곳에서 간단한 실습과 함께 설명이 이루어지는데

나에게는 세세한 설명 필요없으니 적색 편이에서부터 감마선 버스트 등을 이용해 가며

연구소에서 관측하고 있는 천체의 상황에 대해 한 차례 강연을 펼쳐주셨다.

 

본인은 일본어로 의사 소통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편이지만 막상 이런 천문학 용어는 일본어로 뭐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어째어째 한국어로 알고 있던 용어들을 한자 훈음으로 발음해 보며 단어를 교정해 나가는 초보 단계에서 어물쩡 거리고 있어야 했다.

 

소야노 아버지는 매번 쑥쓰러운 표정으로, 자기는 공부는 커녕 글도 잘 못 읽는 바보였다고 말을 하시곤 하는데

실제로 학생 때는 집에서 농사 거들고 하루종일 산을 뛰어다니며 생활했을 뿐이었다고.

 

전후 일본, 그것도 이 산골짜기 키소에서 공부라는 개념은 애초에 너무나 희박한 존재였긴 했지만

그래도 산에서 별 바라보는 일이 너무 낭만적으로 느껴졌던 소야노 아버지는

별 보는걸로 먹고 살수 있으면 좋겠다는 일념으로 이렇게 천문대에 일하게 되었다고 하신다.

 

순박한 시골 아저씨로 보이는 분이지만, 어릴적 부터 키소의 험한 산맥들을 놀이터처럼 뛰어놀던 분이라

젊은 당시엔 거의 프로 선수에 근접하는 스프린터, 자전거 라이더였으며

현재도 50세 이상 100m, 200m 육상 일본 신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매년마다 참가해서 한 번도 기록을 넘겨준 적이 없는 분이다.

목표는 70세 이상 실버 대회까지 꾸준히 일본 신기록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몸 관리만 잘하시면 낙승이라 생각한다.

아닌게 아니라 지금도 자기 집에서 이곳 키소 천문대까지 자전거로 출퇴근이 가능한 체력이니.

내가 두번다시 자전거로 갈쏘냐고 이를 가는 하코네 고개쯤 되는 지형을 이 사람은 그냥 출퇴근길로 생각한다는 뜻.

 

문제는 몸 관리를 별로 안 하는 분이라...

하루 하루의 에너지를 완전히 소진해 버리고 눕자마자 잠에 빠지는 그런 부지런함이 인생의 전부였던 사람이다.

생활에 있어서 여분의 에너지, 혹은 여유라는 것을 태생적으로 가질 수 없는 성격이고

그래서 시간이 남을 때 오히려 안절부절하는 그런 분이다. 여행은 안좋아하는데 드라이브는 좋아하는 타입.

 

 

 

근래엔 잠만 자고 있어서 아련한 느낌이라는 키소의 천체망원경.

슈미트형 망원경은 일종의 반사망원경으로, 촛점식 망원경에 비해 넓은 우주를 좀 더 밝게 담을 수 있다.

렌즈 제조가 굉장히 까다로운 편이라 대구경의 슈미트 망원경은 우주 프론티어 시절에 그 나라의 광학기술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이기도 했다.

 

니콘에서 만든 105cm 슈미트 망원경은 당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컸기 때문에 굉장히 유명한 녀석이었다.

지금은 가끔 오는 학생들 학습용으로 사용되고, 좀처럼 지붕이 열리지 않는 아련한 녀석이 되어 있다.

천문학의 발전은 별의 낭만에 이끌려 이 길을 선택한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하는데

이제는 많은 천체과학자들이 직접 별 쳐다보는 일도 없이 수많은 디지털 데이터와 전파 분석에 매달리는게 현실이다.

 

소야노 아버지는 여기서 별을 자주 못 보니, 연말 보너스를 털어서 집에서 볼 수 있는 망원경을 구입하셨다.

그래서 나는 아이같은 어른을 좋아하고 동경한다. 소야노 아버지는 진짜로 우주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소야노 아버지가 슈미트 망원경 하단부를 열고 한번 들어가 보라고 하셨다.

평생 살다보니 천체망원경 내부로 들어가는 경험도 할 수 있다니.

 

카메라 렌즈 경험이 많은 사람은 이 구조가 그렇게 어색하지 않다고 느낄 듯 하다.

보통 일반적인 카메라 렌즈중 500mm 반사, 속칭 오반사 라고 불리는 렌즈의 내부구조와 비슷하다.

 

중앙의 원통 뒤쪽에 센서를 장착하고 별의 궤적을 따라가며 장시간 촬영을 한다.

엄청 어두웠지만 차마 이 내부 사진을 안 남길 수가 없어서 어떻게든 찍어 봤다.

2010년 당시 내 카메라는 고감도 노이즈가 매우 취약했던 녀석이라

아마 내 사진생활 중 가장 감도가 높은 한 장이 아닌가 한다.

 

  

 

본인은 남들이 마음 편하게 말 걸수 있는 스타일이 아니지만

소야노 가족들은 내력이 있기도 하고, 나와 꽤 오랫동안 살다 보니 나름 허물없게 지낼 수 있었다.

 

쇼야 군은 놀랍게도 일주일 뒤에 성인식이라고 한다.

물론 놀랍지 않게도 술은 벌써부터 잘 마시고 있지만, 사실 3년 전 자전거 여행때도 질펀하게 마시긴 했다.

 

일본에서 성인식은 한국과 달리 상당히 규모가 크고 중요한 행사인데

특히 쇼야 군의 성인식은 가족에게나 나에게나 큰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타이밍이 어긋나 버린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직장만 아니면 비행기 값을 물고라도 1주일 더 머물겠지만.

 

쇼야 군과 자전거 여행으로 만난 인연인데도 소야노 가족 이야기만 하고 쇼야 군 본인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고, 아직은 이런 곳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쇼야 군이 다니는 도쿄의 자전거 학원은, 세계 유수의 테크니컬과 유명 선수들을 강사로 초청해

진짜 전문적인 자전거 장인을 배출하겠다는 목표로 세워진 일본 최초의 자전거 전문 학원이라고 한다.

희망자들에게 1년에 한 번씩 이탈리아 연수도 보내서, 그곳 장인들의 실력을 눈으로 경험할 수도 있다고.

아버지의 체력을 물려받은 쇼야 군은, 자전거에 제트 엔진이라도 단 것처럼 종횡무진하는 실력이었지만

자전거 하드웨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고, 내가 좀 도와준 덕분에 어렵지 않게 친해지는 계기도 되었다.

 

학원에서 한 학기 수강한 쇼야 군은 벌써 상당한 전문가가 되어 있었고

매일 작업대에서 프레임의 구성 요소와 무게와 강도사이의 밸런스를 연구하는 수준이 되어 있다.

제대로 배워서 자기 가게를 갖고 싶다는 쇼야 군은, 약간씩이지만 어둡고 흐릿하기만 하던 자기 앞길의 방향을 잡아가고 있는 듯 하다.

 

이야기꽃을 피우다 밤 12시쯤 되자 소야노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슬슬 자리에서 일어난다.

비가 오긴 하지만, 홈 스테이 당시 꼭 자기 전엔 휴게소까지 밤 산책을 즐기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 일과였다.

물론 당시엔 자전거로 시원한 라이딩을 즐기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었지만

자전거가 없는 지금은 곰이라도 나올 법한 어두운 시골길을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걷는다.

농담이 아니고, 손전등 없이는 휴게소까지 내려가기 힘들다.

 

밤의 키소 휴게소는 꿀잠을 자기 위해 정차된 트럭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가끔 밖에 음료수 사러 나오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한국보다 훨씬 더 장거리를 운행하는 트럭 기사들은 어쩐지 이야기가 잘 통하는 느낌.

그것과 별개로 쓰레기 투기를 일본에서 제일 많이 하는 부류가 트럭 운전사라고 하니 그건 좀 아쉽다.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3개월간 보았던 풍경을 아무 말 없이 1시간 가량 바라본다.

 

사하라 사막 마라톤은 아직 한 번밖에 가지 않았는데, 두 번 간다면 아마 이런 기분이 들 것인가.

하지만 추억은 굉장히 섬세해서, 조금만 비틀리거나 색이 바래도 당사자가 느끼는 괴리감은 크게 느껴진다.

다음엔 역시 자전거를 들고 와야 하나 싶은 생각을 하며 음료수 한 캔과 담배 한개피를 꺼낸다.

  

 

 

키소 후쿠시마는 요즘 원전문제로 소란스러운 그 후쿠시마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나가노현 나카센도 역참마을로 유명한 곳이다.

 

이런 산골마을이 나름 유명했던 이유는 예전 에도 막부시대 쇼군이 지방권력 견제를 위한 '산킨 코타이'(參勤交代) 제도 때문.

쇼군의 영향력이 미치기 어려운 변경지 영주들을 불러들여 수도 에도에서 1년, 자신의 영지에서 1년 근무하게 하는 근무지 이동 제도였다.

영주의 가족들 역시 에도로 불러들여 사실상 인질 역할을 했기 때문에 영주들에게는 경비 부담도 크고 힘들었던 제도.

비인간적인 제도이긴 하지만 권력 유지에의 열망은 이런 것쯤 눈에 밟히지도 않을 듯 하다.

 

아무튼 그 산킨 코타이 제도로 인해 지방과 에도를 오가는 사람은 줄어들 줄 몰랐고

에도로 향하는 주요 행로였던 이곳 키소 후쿠시마는 덕분에 끊이지 않는 여행자들을 위한 숙박업으로 번성할 수 있었다.

 

 

 

이곳 키소 후쿠시마에서는 당시 행렬을 재현하는 축제를 1년에 한 번씩 열고 있는데

본인이 이곳에 머물렀던 2009 년도엔 비가 심하게 와서 축제가 중지될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단순한 축제라면 비가 와도 큰 문제 없겠지만

이 가장행렬에 사용되는 의상이나 소도구들은 실제로 오래 되기도 한, 상당히 가치있는 소품들이라

비를 맞아도 될런지 하는 주최측의 고민이 있었다고. 다행히 비닐 비옷을 덮긴 했지만 축제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예전에 비해 상당히 규모가 축소되고, 관광객이 오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어른들이 많았는데

비 때문인지 그런 걱정 때문인지 조랑말 위에 탄 영주의 얼굴이 조금 더 엄숙해 보이는 듯 했다.

 

실제로도 사실상 인질로 불려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기분 좋게 출발할 수 있을리가 없었을 듯.

에도까지는 결코 순탄치 않은 길이라, 쇼군에게 바치는 진상품과 여행 도구들, 시종들과 호회무사까지 합해서 100여명이 넘는 무리를 이루었다고 한다.

의도는 못마땅하지만 그 여파로 인해 산속 역참마을들이 번성하게 된 아이러니함이 돋보이는 역사의 흔적.

 

 

 

키소의 영주가 키소 후쿠시마에서 에도까지 향하던 길을 마을 안에서 압축해서 재현하는 것이 축제의 본편.

원래 키소에서 에도까지는 7개소의 관문을 지나가야 했는데, 축제에서 실제로 에도까지 갈 수가 없으니

마을 각각의 지점에 가상의 관문 7개를 새워놓고 그곳을 천천히 지나가는 것으로 해결해 놓았다.

 

천천히 행렬 뒤를 따라갈 수도 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만 당시엔 비가 많이 와서 사람들의 참을성도 옅어진 상태였고,

본인은 원래 아르바이트 중에 사장님이 한번 가보라고 시간을 내주셔서 잠깐 들렀던 터라 그렇게 느긋하게 돌아다닐 순 없었다.

 

그래서 자전거 타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거기서 쿠루마야의 진짜 사장님(?)을 만나게 되었다.

사실 쿠루마야의 주방을 담당하는 치프를 사장님이라고 불러서 그냥 입에 붙어 버린 셈이데

서류상 쿠루마야의 진짜 사장님은 치프의 와이프의 오라버니 되는 분이다.

몸이 안좋아서 간간히 보조 업무만 할 뿐이라 실질적으로 가게를 이끌어 가는 분은 당연히 주방의 치프인데

앞서 말했듯 다들 친인척 관계에다가, 어릴 적부터 이 마을에서 같이 살아온 사람들이라 그런 거 별로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

 

여담으로, 치프와 와이프분의 젊은 시절 열애 행각은 마을 안에서도 유명했다는 듯.

 

아무튼 거의 모든 축제 준비를 마을 사람들이 직접 해 온 탓에, 진짜 사장님도 며칠 전부터 열심히 일 돕고 있다고.

굽고있던 곤들매기(

 

 

 

 

 

 

 

 

 

 

 

 

 

 

 

 

 

 

 

 

 

 

 

 

 

 

 

 

 

 

 

 

 

 

 

 

 

 

 

 

 

 

 

 

 

 

 

 

 

 

휴게소에서 멍하니 한참을 시간 보내고 다시 언덕을 올라간다.

완만한 경사가 산자락까지 이어진 이 길에는 느긋한 밀집도의 주택가가 길을 따라 이어져 있다.

 

좀 더 깊숙히 들어가면 단순한 주거용 주택이라기 보다는, 도심의 좀 잘나가는 사람들이 여유를 즐기는 별장 단지가 나오기도 한다.

일본의 시골이 한국보다 정비가 잘 되어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곳은 확실히 경치가 좋은 편이다.

별장이 늘어서 있는 산자락의 수려한 환경이 아닌 순수하게 사람들 살아가는 논밭 사이의 주택가임에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뽐내는 장소가 한 두곳이 아니다.

 

일본에서 홋카이도의 해안가 말고는 '여기서 살고싶다'는 생각이 든 곳이 별로 없었지만

바다 근처가 아닌 산속 깊은 곳에서 그런 느낌이 드는 곳은 아마 이곳이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땅값이라던가 그런건 잘 모르겠지만

10년 전만 해도 거의 텅텅 빈 곳에 지금은 새로 집 짓고 들어온 사람들이 많다고.

가게 하나 차려도 될 만한 이런 예쁜 디자인의 집 역시

돈 좀 만지는 사람들이 놀러오는 별장이 아니라, 그냥 이곳에서 사는 주민들이 일반적인 주택이다.

 

예전에 소야노 가족과 이야기 할 때, 적당히 땅값만 싼 곳 고르면 주택 짓는것까지 합해서

한국돈으로 2억 조금 넘으면 무난할거라 하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나는데

가끔은 진지하게 이곳에 눌러앉아버릴까 하는 생각도 한다.

 

좋긴 하지만 역시 현실과는 달리 포기할 수 없는 꿈은, 홋카이도처럼 바다와 함께할 수 있는 그런 곳이라

이곳의 많은 인연에도 불구하고 말뚝을 막아버릴까 생각하면 꼭 마음속에서 막아서는 요소들이 있는게 아쉬운 점.

 

 

 

소야노네 집까지는 휴게소에서 도보로 5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임에도

오랜만에 즐기는 키소 마을의 정경에 도저히 발걸음이 쉽게 떼어지지 않는다.

번호판을 떼어버린 걸로 봐서 폐차 수순을 밟는 녀석인 것 같은데

저런 녀석마저 거부감없이 프레임속에 녹아들게 만드는 이곳의 풍경이 가지는 힘은 실로 강력하다.

 

한두 걸음 걸으면 또 이런 풍경들이 날 유혹하고

동네 할머니가 지나가면, 마치 반가운 사람이라도 만난 듯 수줍게 인사를 건넨다.

물론 그 할머니가 나를 알 리는 없지만 역시 시골이라 그런지 전혀 거리낌없이 웃으며 인사를 받아준다.

 

의외로 소야노네 가족과 몇 블럭 떨어진 곳에 살고있는 쇼야 군의 할머니만큼은

절대 사교적이지 않은, 꽤나 무뚝뚝한 표현력을 가진 분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무뚝뚝함은 상대에 대한 경계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평생 마을 이웃들 외엔 말 한번 걸어보기 힘들었던 사람들의 본능적인 수줍음인 것을 느낄 수 있어서 기분 나쁘지 않았다.

 

 

 

3년 전 마을 사람들이 나에게 꼭 한번 보여주려고 데리고 가던 온타케 산의 풍경은 이번엔 시간이 부족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산과 함께 살아가는 나가노 중부의 키소 마을과,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많은 마을들과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는 산이 이 온타케 산(御嶽山이다.

 

한국처럼 등산가기 좋은 친숙한 산이라는 느낌보다는, 마을의 조상님쯤 되는 신성한 산으로 추대받고 있어서

그만큼 이 산에 대한 사람들의 호감도라고 할까, 자부심은 굉장한 수준이다.

 

해발이 높은 산인데다가, 나가노 산맥의 특성상 기후 변화가 심해서 깔끔한 봉우리를 보기가 쉽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리서 보는 온타케 산의 위엄은 굉장한 것이었다.

 

 

 

점이 아니라 선의 형태로 아름다움을 간직한 한국의 산맥과는 달리

온타케 산은 화산의 분화로 생성된 독립봉으로, 일본 최대의 산맥지역인 나가노 중앙알프스 산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위엄을 자랑한다.

 

해발 3000 미터를 넘는 산 중에서는 일본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산으로

지진대 중앙에 위치한 산인데다가, 아직까지 가끔 연기도 나는 활화산이기 때문에 마냥 인자한 녀석만은 아니다.

예로부터 후지산과 더불어 일본에서 가장 신성한 산으로 유명한 녀석이라, 한국 등산객들도 상당히 많이 찾는 산.

 

자동차로 갈 수 있는 지역에서 밤 9시쯤 출발하면 정상에서 새벽 일출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키소 주민들이라면 평생 가장 기억에 남는 광경이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물론 쇼야 군은 나보고도 많이 꼬셨지만, 자전거 여행의 여파로 지친 데다가 주 6일 아르바이트로 바쁜 본인이라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자전거 여행이 끝난 지금은 날 잡아서 소야노 가족들에게 연락해 놓고 일출 보러 가 볼 생각을 하고 있다.

등산은 특히나 나이와 별 관계없이 즐길 수 있는 레져인지라 급할 거 없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소야노네 집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언덕을 내려오는 소야 군과 딱 마주쳤다.

원래 연락도 하지 않고 놀래켜 주려고 슬금슬금 이동중이었고, 소야 군은 올해부터 도쿄로 자취하러 갔다고 들었던 터라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보다 쇼야 군이 더 의아했을 듯. 뭔가 낯익은 사람이 올라오긴 하는데 설마 그게 나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테니까.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인사를 하자 몇 초간 얼굴을 유심히 살펴본 후 드디어 나라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란다.

서프라이즈를 기대했는데 이렇게 집앞 길위에서 만나버리니 오히려 긴장이 풀려서 안면 근육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낀다.

 

쇼야 군은 마침 도쿄에서 다니던 자전거 전문학교가 방학이라 본가로 돌아온 참이라고.

사실 본인이 소야노 집에 찾아간다고 전화를 하지 않은 것에는 쇼야 군의 사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괜히 내가 간다고 말했다가 쇼야 군의 귀에 들어가서, 무리하게 키소까지 돌아오는게 아닌가 싶어서.

하지만 인간의 인연은 항상 우연이 필연처럼 얽히는 묘한 타래와 같은 것이라, 결국 이렇게 다시 만나고 만다.

 

쇼야 군이 집에 들어가며 깜짝 손님이 왔다고 어머니한테 소리를 친다.

쇼야 군의 어머니는 하반신 마비라 전용 침대에 누워계시는데, 이때만큼은 너무 예의없는것 아닐까 걱정이 된다.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 얼굴을 보여드려도 처음엔 누군지 잘 모르는 표정이었는데

이쪽에서 먼저 인사를 하자 목소리로 구분을 했는지, '리 상~' 하면서 깜짝 놀라주신다.

 

대낮 시간대에 침대에 누워있다는 점이 마음에 좀 걸렸는데, 어제까지 열이 약간 있어서 쭉 쉬고 있었다고.

소야노 어머니의 상처는 자동차 사고로 생긴 척추 골절이라, 단순히 하반신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 외에도 여러가지로 몸이 아플 때가 있다.

몸 아픈데 괜히 신경쓰이게 하는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소야노 어머니는 오늘 거의 다 나았으며, 오랜만에 내 얼굴 보니 굉장히 기뻐서 기운이 난나고 웃으며 대답해 준다.

 

젊을 때 간호보조사, 노인복지사 등등 봉사활동과 관련된 일이라면 안해 본 것이 없는 분이라

자동차 사고가 난 뒤 허리 아랫부분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병상 위에서 깨달았을 때에도

'어차피 나이 더 들면 휠체어 생활하는데, 조금 더 앞서서 체험하는 것일 뿐' 이라고 생각할 만큼

누구한테나 웃음을 잃지 않고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해 주는 편이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힘든 내면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내 쪽에서 항상 순진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든 것도 사실이지만, 그 미소만큼은 정직한 것임에 틀림없어서

이 분와 이야기 할 때마다 나는 많은것을 배우고 얻어간다. 나에게는 인생의 스승 중 한명이나 다름없는 분.

 

 

 

일본인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넓은 소야노네 이층집은 여전히 별로 변한 게 없다.

차이점이라면 어머니 몸이 불편해 쇼야 할머니 집에 맡겨놨던 '리쿠'라는 푸들 강아지가 다시 집에 돌아와 있다는 점 정도.

 

리쿠는 쇼야 할머니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는지 그곳에서는 되게 우울해 했고, 할머니 쪽도 힘들다고 해서

어느 정도 불편함을 감수하고 다시 이쪽으로 불러왔다고 한다. 물론 리쿠는 엄청 기뻐하며 쇼야네 어머니한테서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사진은 내가 생활하던 현관 옆 빈방이었는데, 여행중 묵었던 어떤 비즈니스 호텔보다 더 넓은 방이었다.

물론 사람이 살던 방이 아니라 에어콘이고 뭐고 없어서 여름에 상당히 덥긴 했지만

자전거 여행중의 본인은 이미 불편함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서, 선풍기 한 대만으로도 천국일 뿐.

 

소야노 집안의 특징 중 하나로, 소야노 어머니 한분 빼고는 도무지 '정리'와 '청소'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점을 들 수 있다.

대를 잇고 이어 수백년간 시골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라 그런지, 한정된 공간에서 무언가를 정리한다는 생각 자체에 관심이 없는 듯 하다.

그냥 예전처럼 창고 하나 뚝딱 만들어서 거기다 뭐든 집어넣어 버리면 해결된다는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

애초에 시골 토박이일수록 쓰레기를 버린다는 개념도 없기 때문에, 안 쓰는 것이다 싶으면 그냥 창고행이다.

 

몇년 전 화재로 창고가 없어졌다지만, 당시 그 창고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 시절의 거울이나 갑옷, 검도 있었고

개화시대 초기 물건으로 추정되는 나무 벽걸이 시계 등등... 온전한 상태였다면 진품명품에서 고가에 팔릴만한 녀석들도 있었다고.

그러니까 이쪽 사람들은 500년 전의 물건도 자신들한테 쓸모없다고 그냥 창고에 처박아 놓는 그런 부류란 것.

 

현대식 주택에 살아도 그 마음가짐만은 훌륭히도 변한게 없어서

소야노 어머니가 몸이 멀쩡할 때는, 천성적인 깔끔함으로 그래도 집안이 깨끗했지만

몸을 다친 이후로 2층에 올라갈 수가 없게 되고나서는 그냥 포기해 버렸다고.

지금은 리쿠까지 가세하는 바람에 3년 전보다 좀 더 지저분해 진 듯 하다.

 

본인도 방이 돼지우리라고 엄니한테 지탄받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엄니를 소야노네 집으로 한번 초대하고픈 생각이 소떼처럼 밀려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아마 엄니가 이쪽 집안 모습을 본다면 기절하실것 같지만.

 

 

 

소야노 어머니는 들뜬 목소리로 여기저기 전화하기 바쁘다.

나한테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해 준 친구 카미무라 씨한테 연락해서 누가 우리집에 왔는지 맞춰보라고...

사실 이렇게 조용히 온 것도, 그냥 혼자 돌아다니면서 한분 한분 인사하기 위해서였는데

그렇다고 좋아서 여기저기 전화 걸고 있는 소야노 어머니를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카미무라 씨 따님은 내가 여기서 지낼 때 결혼식을 올리고 지금은 키소후쿠시마의 작은 선술집에서 남편과 함께 가게를 열고 있다.

거기서 저녁 한 끼 하면 어떻겠냐고 이야기가 나와서 전화해 보니, 불행히도 저녁에 가게 전체를 빌리는 모임이 있다고.

 

본인은 일단 한국에서 가져온 선물 전해주고 인사하는 것만 목표로 삼았지만

그 가게 술의 수준도 그렇고 안주나 음식 수준이 상당한 편이라 살짝 아쉽긴 했다.

 

카미무라 따님의 시어머님, 그러니까 남편의 어머니 되는 분은, 내가 가니까 놀랍게도 김치를 작은 접시에 담아 주셨다.

발효과정을 거치지 않은 기무치와는 달리 진짜 삭아있는 한국식 김치여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예전에 부산에서 생활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배워온 것이라고. 외국인이 그 정도 경험으로 김치를 담글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아주머니 요리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술과 요리가 참으로 맛있었던 곳.

 

카미무라 씨 일행과는 저녁 함께 먹기로 했고, 소야노 아버지는 오늘 일때문에 늦게 오신다고 하니 밤에 집에서 맥주나 한잔 하기로 한다.

그럼 시간 있을때 아르바이트로 신세를 졌던 소바집에가 가보려고 하니

소야노 어머니가 차로 태워주겠다고 자꾸 호의를 배풀어 주셔서 살짝 난감하기도 했다.

사실 자전거로 15분 가까이 걸리는 거리라 걸어가려면 왕복 1시간은 넘게 잡아야 하는 곳이긴 하지만

가는 길의 풍경이 워낙 좋아서, 사진이나 좀 찍으며 느긋하게 즐길까 싶었던 나의 계획은

그러고보니 이쪽 가족들이 내가 그렇게 발품 팔도록 놔두지 않으리라는 기본적인 추측을 하지 못함으로서 멋지게 빗나가 버렸다.

 

3년 전 내가 신세를 지던 당시 소야노 어머니는 상반신만으로 운전 가능한 특수차량을 주문해 받았고

타고 내리는 것까지 남의 도움 필요없이 혼자서 모두 해낼 수 있는 차량이라서

장거리를 제외한 많은 곳을 혼자 운전해 돌아다니며 집안에 틀어박히는 스트레스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역시 시간이 지나서인지 아주 능숙하게 휠체어에서 운전석으로 이동하고, 후크에 휠체어를 걸어 자동차 위쪽의 보관대에 집어넣고

두 손으로 엑셀과 브레이크도 자연스럽게 밟아가며 순식간에 나를 소바집 앞에 내려놓아 주셨다.

 

유턴해서 다시 올라가는 소야노 어머니 차량을 지켜본 다음에 주섬주섬 카메라를 꺼내서 소바집 쿠루마야(くるまや)의 전경을 담아본다.

원래 쿠루마야는 창업 300년이 넘은 전통있는 소바집인데, 오리지날은 마을 안쪽 거리에 아직 영업중이고

이곳은 예전 가족들이 분가하면서 도로가에 새로 만든 쿠루마야이다.

드라마처럼 사이가 틀어져서 분가한 건 아니고, 추구하는 맛이 달라서 하나 더 차린 것이라고. 이름도 두 가게 모두 '쿠루마야'를 쓴다.

 

이곳 사장님은 서글서글한 거구로, 음식에 대해서는 엄청난 열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장인이다.

마을 소방대 단장을 맡을정도로 활동적이면서도 매우 세심한 성격을 가진 분으로,

가게 바로 옆 키소 경찰청 사람들이 회식왔을 때 모두들 앞에서 '한국서 자전거 여행하며 알바하는 리 군'이라고 아주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정도라

쑥쓰럽기도 했지만, 그것 역시 이곳에서 생활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잘 봐달라고 부탁하는 의미였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만큼 고마운 사람도 없다.

 

그 사장님 눈썰미가 아주 좋은 편이라, 길 건너에서 사진찍고 있는 나를 주방 창문에서 단박에 알아보시고 '리 군~' 이라고 소리를 친다.

요리를 하면서도 항상 창가에서 손님이나 가게 관계자가 오는 것을 파악하고 있는 분이라, 3년만의 재회도 순식간에 파악해 버린다.

 

 

 

가게 입장에서야 좋은 일이겠지만, 점심시간을 넘겨 왔는데도 손님이 상당히 많아서 바쁜 편이다.

사장님과 인사를 한 후 주방쪽으로 들어가자 모든 직원들이 몰려들어 반가움을 표시한다.

직원 대부분이 친인척이고, 그렇지 않은 직원 아저씨도 10년 넘게 함께 해 온 분이라 모두들 가족이나 마찬가지.

 

본인 역시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한 몸이라, 일부러라도 돈 내고 음식을 먹고 싶었지만

그걸 허락해 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척하고 내어주는 소바를 감사 인사와 함께 후르룩 빨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여전히 내가 평생 먹어본 소바 중에서 최상의 맛을 자랑하는 녀석.

 

소바는 전문가 수준의 매니아가 되어야 알 수 있는 미묘한 맛도 있지만

나같은 일반인 레벨에서는 면의 목넘김과 소스의 깔끔한 맛 정도로 판단하는 수준.

이곳 소바가 너무 맛있어서 소야노 어머니한테 물어보기까지 했는데

소야노 어머니도 이곳에서 한번 먹어보고 이 주변 소바집 중에서도 상당히 맛있는 편이라고 감탄하시는걸 보면

절대 맛 없는 소바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도 이상하진 않을 것이다.

 

참고로 이 주변은 일본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소바 가게가 진을 치고 있다. 이곳에서 망하지 않고 장사한다는 것만으로도 레벨 보장은 된다는 뜻.

 

 

 

할아버지 한 분을 제외하면 건장한 남성 두 명이 모두 주방 요리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힘쓰는 일은 할머니들이나 아주머니들이 힘들어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때 운 좋게도 내가 바이트를 시작하면서 2층에 음식 나르기나 설거지 등의 업무를 맡았기 때문에

초보 알바생 치고는 나름 도움이 되어서 사람들이 좋아하던 기억이 난다.

 

일하는 내가 미안할 정도로, 틈만 있으면 앉아서 쉬라고 자리 내 주고 커피 타 주고 과자 주고 했는데

바이트 하면서 마음이 이렇게 편했던 적이 과연 한국에 있었던가 지금도 생각해 본다.

 

오랜만에 주방에 앉아있으니 다시 몸이 근질근질해서, 자기가 먹은 소바 그릇이라도 좀 씻으려고 싱크대 쪽으로 걸어가니

사모님이 웃으면서 일 안해도 된다고 말리신다. 하지만 기분은 이해하시는지 심하게 말리진 않는다.

괜히 안절부절하게 앉아있는 것 보다는 슬쩍슬쩍이라도 일 도와주는게 역시 맘 편하다.

 

강력한 성능으로 인해 한동안 나의 손가락 끝을 화끈하게 해 줬던 스팀세척기도 여전히 잘 작동중이다.

여름엔 쪄 죽을듯 했는데 겨울이 다가오자 세척기의 스팀마저도 따뜻하게 느껴지는 변화무쌍함이 음식점의 주방이라는 곳.

 

 

 

이곳에서의 수많은 추억은 간단히 끄집어내는 것만으로도 좀처럼 끝이 나지 않을듯 하다.

내가 바이트 하던 당시의 미친듯한 혼잡함과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시간대에 비해 생각보다 손님이 많았던 터라 약간의 미안함을 가지고 자리에 앉아서 그 때의 충실한 하루하루를 되짚어 본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아들은 이제 대학교 가서 집에는 없다고 하고

소바집 딸내미이면서 메밀 알레르기가 있는 따님은 내년에 결혼한다고 한다. 역시 변하지 않는 모습 속에서 사람만은 같은 시간을 걷는다.

 

2층 단체손님 지나간 자리를 정리하면서 '아들내미의 우유부단함에 대해' 걱정하던 사모님의 고민거리도 들어줬고

메밀 알레르기로 소바를 먹지 못하는 딸을 위해 볶음밥이나 카레 덮밥 같은 굉장한 요리들을 척척 만들어 던져주던 사장님의 모습도 새록새록하다.

 

젊은 시절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며 음식 수련을 한 사장님이라, 이런 주방과 조리도구만 있으면 못만드는게 없다.

지금 생각하면 참 황당하지만, 소야노네 가족이 사정상 1박 2일로 멀리 떠나가면서 나한테 집을 맡겨놓은 상황도 종종 발생했는데

그럴 때 편의점 도시락을 사 가려고 하니 사장님이 아무 말 없이 즉석해서 눈물나게 맛있는 도시락을 훌쩍 만들어 건네주시곤 했다.

당연히 다음 날 도시락을 씻어서 돌려드리며 500엔을 함께 드렸다. 일반인이라면 몰라도 프로 요리사들에게는 그만한 값어치를 지불하는 것이 예의니까.

 

 

 

소바를 끓이는 거대한 가마솥은 항상 열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 뒤쪽에 이렇게 소바를 놓는 대나무 판을 씻어서 올려놓는게 내 소소한 일과중 하나였다.

워낙 뜨거워서 아주 바싹하게 잘 마르는 곳이었으니. 의외로 겹치지 않게 착착 늘어놓는 이 일도 꽤나 재미있었다.

 

사모님은 굉장한 여장부이면서도 접객에 일가견이 있는 만능인으로

거대한 체구의 사장님이 요리 장인이라 그런지 젊으면서도 우직한 면을 가진 반면

여러가지로 도심지의 아이덴티티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분이라, 주방 외의 가게 주인이라 할 만하다.

 

체력적으로는 역시 건장한 사장님을 따라가기 힘들어서, 바쁜 하루가 끝나는 날엔 꽤나 힘들어 하시기도 하는데

이 정도 가게를 열면서도 평생 여행한번 제대로 갈 시간이 없다는 점에서 아쉬움과 함께, 자신의 일에 대한 책임감이란 것을 세삼스럽게 느끼기도 했다.

 

 

 

격일로 출근하시는 할머니께서 쉬는 날이라 전 멤버가 다 모이진 않았지만

내가 해 왔던 어떤 일보다 더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었던 이곳 소바집 멤버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다.

 

손님이 적은 편도 아니었는데 이곳 역시 소야노 쪽과 마찬가지로 휴게소까지 차로 태워주겠다고 한다.

사진도 좀 찍고 싶었기에 걸어서 올라갈 거라고 하니 꽤나 힘들고 시간 많이 걸린다면서 자동차 시동을 건다.

하긴, 나라는 사람은 이곳에서 애초에 혼자 걸어다닐만큼 홀로 서 있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세삼 깨닫는다.

 

1년간의 자전거 여행동안 질리지도 않고 고독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달려왔던 본인도

이 마을에서만큼은 그 고독을 즐길 여지가 별로 남아있지 않다.

한국에서라면 솔직히 기분 좋지만은 않은 일이겠지만 이곳은 고독하지 않아도 괜찮은 극소수 장소 중 한 곳이다.

뭔 배짱인지 지역 신문기자가 기사를 쓰고 싶다고 하는데 승락을 해 버리는 바람에 신문에도 나와버렸으니...

 

다음엔 좀 더 많은 지인을 데리고 와서 소바 맛을 좀 보여주고 싶다고 인사를 하며 추억의 쿠루마야를 뒤로 한다.

휴게소에 내려서 매번 하던 것처럼 자판기에서 음료수 한 캔을 뽑아 마신다. 이 날은 담배가 없어서 그건 패스하고.

소야노 집으로 돌아갈 필요없이, 도로 건너편의 카미무라 씨네 가게에 소야노 일행이 도착해 있다고 한다.

소바도 얻어먹고 해서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이런 날은 배가 터지더라도 이 사람들의 환대에 대답하는 것이 도리일 터.

쿠루마야의 추억을 다시 한번 곱씹으며 정갈한 모양새를 자랑하고 있는 카미무라 가게로 들어간다.

 

다음날 여전히 화창날 날씨와 함께 짐을 챙겨 마츠모토 역으로 향한다.

한 시간에 한 대씩 오는 원맨 열차 시각이 아직 남아서 역사 바깥의 모스버거에서 모닝 세트를 주문해 놓고 시간을 때운다.

시간이 널널하리라 생각했는데 체감상 그 작디 작은 모닝세트를 허겁지겁 먹어치운다고 느낄 정도로 여유가 없다.

아마도 여전히 긴장이 풀리지 않아서일 듯.

 

원맨 열차는 차량에 승무원이 한 명밖에 없는 열차로, 승객이 그렇게 많지 않은 구간이나 무인역이 많은 구간에서 운용한다.

한국과 달리 거리별 운임이 상당히 차이가 나는 일본 전철이기 때문에

무인역에서 정산할 수단이 마땅히 않은 바, 원맨 열차의 전철 끝 기관사쪽 문을 통해서만 내리게 되어 있다.

그 앞의 요금함 안에 본인이 내야 할 요금을 내는 방식.

 

그래서 무인역에서는 다른 출입문이 열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열리는 경우는 타는 사람이 바깥에서 버튼을 눌렀을 경우 뿐.

은근히 요금 안내고 타는 사람과 타이밍 맞춰서 나갈 수도 있겠다 싶지만

철도원들의 승객 체크는 의외로 철저한 편이고, 한적한 곳인 만큼 한번 찍히면 자칫 벌금 크게 물 수도 있으니

그냥 이런 허술함 역시 시골의 여유와 낭만의 일부분이라 생각하고 넘어가는게 좋을 듯 하다.

 

1시간 반 가까이 전철을 타고 창밖 풍경을 바라본다.

은근히 기억이 날 듯한 모습이 차창을 스치고 지나가면 문득문득 가슴이 지려오는 기분이다.

중간에 나라이(奈良井)역에서는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내리고 타고 한다. 대부분이 등산복 차림을 한 노인 관광객들.

 

과거 쿄토와 도쿄를 잇는 내륙도로 나카센도(中仙道)의 유명한 숙박지였던 나라이는

아직까지 그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중요 관광지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곳을 구경하러 온다.

 

나라이에 도착했다는 건 목적지와 가까워 졌다는 의미. 괜히 카메라를 꺼내 추억속의 풍경을 찍어본다.

 

 

 

하라노 역에 내리니 잠에서 깨어난 듯 신경이 예민해지는 기분이 든다.

처음 이곳에서 마츠모토나 나가노로 놀러 갔을 때는

전철역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고요하고 자연 풍만한 이곳 모습이 놀라고

한 시간에 한 대라는 차를 놓치면 어떻하나, 무인역이라는데 표는 어디서 뽑는건가 하면서 쓸데없이 긴장타던 기억이 난다.

 

그런 안절부절마저도 결국엔 아련한 아쉬움과 즐거움의 흔적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추억이란 녀석인 듯.

 

 

 

원래는 직원이 상주하던 유인역이었다.

매표소였음에 분명한 곳은 아크릴 시간표로 단절의 의사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3년만에 이 모습을 다시 접하니 지브리 애니메이션 바다가 들린다(海か聞こえる) 마지막 장면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일본의 무인역이라 하면 이곳과 함께 일본에서 가장 북쪽 무인역인 홋카이도의 밧카이(抜海)역이 나에게는 추억의 장소.

밧카이 역에서는 먹을것에 낚여서 NHK 에 출연하기도 하고, 하룻밤 자고 가기도 했는데

이곳 하라노 역은 바로 옆에 쇼야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굳이 이 안에서 텐트 칠 일은 없었다.

 

 

 

역을 나오고 나서부터는 한 장면 한 장면이 모두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추억의 집합체일 뿐이다.

첫 여행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새롭지 않은 평범한 풍경이지만

나의 이번 여행에는 이미 만들어진 이야기가 있다. 그 위에 다시 색을 덧칠하는 마음은 각별한 것이다.

그래서 여행에 대한 나의 지론은 확고하다. '간 곳에 또 가도 전혀 아깝지 않은 것이 여행'이라고.

 

당시 자전거 여행중이다 보니, 동네 슈퍼를 가도 항상 자전거로 이동했었고

당연히 마츠모토나 나고야, 나가노에 놀러 가려고 이곳 역으로 올 때도 자전거를 타고 와서 이곳에 세워놓았다.

2~3일 동안 무인역 앞에 고가의 자전거를 세워 놔도 전혀 걱정이 되지 않는 곳이었고

히로시마 근처에서 짐을 도둑맞은 적이 있는 나로서는, 일본에서 안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여행이란 건 남한테 자랑하려고 떠나는 것이 아님이 확실하지만

남들이 쉽게 가지 못하는 곳에서 자신의 존재를 은근히 드러낼 때의 뿌듯함은 분명 인간의 본능이리라고 이해는 한다.

단지 그것이 소요되는 시간과 금전의 양에 좌우되어

그곳에 쉽사리 가지 못하는 부류와의 비교가치로서 이용될 때 구린 냄새를 풍긴다는 것이 문제일 뿐.

 

그런 면에서 이곳 하라노는, 나에게 있어서는 은근히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그런 비밀스러운 가치를 지닌 곳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관광객도 이곳을 일부러 찾아오거나 부러워 할 일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도리어 마음이 편한 곳이기도 하다.

 

하라노 역 바로 옆에는 이 부근에서 가장 활성화된 키소후쿠시마(木曽福島)가 있어 그곳에 온천, 여관 등이 밀집해 있기 때문에

관광객이 이곳에 올 일은 없다. 단지 자동차나 바이크 여행을 즐긴다면 큰 휴게소가 있어서 자주 들르긴 하지만.

 

아무런 특징 없는 이곳 풍경이 나에게는 죽은 세포를 되살리는 짜릿함을 느끼게 한다.

 

 

 

걸음을 뗄 때마다 3년 전의 일상과 겹쳐지기 때문에 좀처럼 쇼야 가족네 집까지 도달하기가 힘들다.

하라노 역과 쇼야네 집 사이에는 나가노의 허리를 관통하는 주 도로가 나고야까지 주욱 이어지고 있는데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 무서운 트럭들 사이를 조심하며 건너거나

조금 돌아가긴 하지만 도로 밑으로 난 터널을 살짝 통과해 건너거나 한다.

 

횡단보도쪽으로 건너가도 괜찮긴 하지만, 횡단보도 바로 앞 가게가 본인과 큰 인연이 있는 집이라서

가능하면 쇼야네 집 사람들과 인사하는걸 첫 번째로 하고 싶었기 때문에 일부러 그곳을 피해 밑으로 건너갔다.

추억이란게 이렇게도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는 큰 원료가 되는 녀석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뭐하고 있는건가 싶기도 하다. 겨우 3년만에 만나는 사람들인데 말이지.

 

 

 

건널목을 건너면 휴게소가 보이는 저곳으로 올라오게 되고

터널을 지나 샛길로 올라오면 여기에서 합류한다. 쇼야네 집은 여기서 고개를 돌려 반대쪽 언덕으로 간다.

 

하지만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휴게소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지인과 만나는 것은 쇼야네를 처음으로 하고 싶지만, 나는 이곳에서도 혼자임을 즐기는 시간이 많았다.

나름 체력을 요하는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상당한 경사를 자전거로 올라 이곳 휴게소에 도착하는 저녁 무렵엔

항상 벤치에 앉아서 음료수 한 캔과 담배 한모금으로 노을에 취하는 게 일과였다.

 

 

 

3년 전은, 본인 뿐만 아니라 쇼야 군에게도 여러가지 변화와 고통을 감내해야 할 시기였다.

친구가 적었던 쇼야 군의 소울 메이트가 자위대에 지원하기로 결정했던 시기였고

여전히 일본 일주 도중이긴 했지만 쇼야 군 역시 스스로 변화해야 함을 인식해야만 했다.

 

섬세하고 예민한 쇼야 군의 심리에 나라는 정체불명의 외국인이 끼어들어 몇 달간을 함께 한 시간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 나에게도 그의 고민과 고통은 무시할 수 있는 남의 감정이 아니었다.

키소의 풍요로운 풍경은 전혀 변함없이 나를 차분히 들뜨게 하지만

사람들끼리의 인연이란 시간과 공간이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항상 변화하며 서로 맞물리고 때로는 흩어지며 이어진다.

 

 

 

일반적으로 일본의 시골은 정비가 워낙 잘 되어있어서

한국과 가장 이질감이 많이 느껴지는 지역 중 하나이긴 하지만

특히나 이곳 키소 마을은, 시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에 어색함마저 느껴질 정도로 아담한 주택이 많다.

 

당연히 빈촌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굉장한 부촌도 아닌듯 하고

그럼에도 2층 주택과 그 앞의 텃밭, 마당의 조합은 키소의 대자연에 위배되지 않는 제한선이라도 갖고 있는듯

과시라는 인간의 욕망을 거세해버린 느낌의 조화로움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휴게소로 내려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자판기에서 싸고 양 많은 탄산 오렌지 쥬스를 하나 뽑아들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 짐을 내려놓은 후 한숨을 한번 내쉰다.

 

인생에서 단 3개월간의 순간이었지만, 이곳은 나에게 있어서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아무리 더워도 그늘에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그냥 주위 모든 풍경을 다시 한번 시야에 담아낼 뿐.

이렇게 한숨이 자꾸 나오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버스나 자동차로 관광하는 사람들은 한번쯤은 이곳 휴게소에 내리는데

그것은 앞서 말한 내륙도로 나카센도의 거리상 정중앙이 바로 이 지점이기 때문.

 

이 지점이 쿄토와 도쿄간 거리를 정확히 반으로 나누는 곳이기도 하고

마침 이곳에 서면 저 멀리 키소 8경중 하나로 유명한 키소 코마가타케(駒ヶ岳)의 석양을 즐길 수 있다.

 

코마가타케는 당시 한국인 등산객이 사망한 그 산과 인접해 있어서

저 아름다운 풍경이 그리 우습게만은 보이지 않게 되기도 했다. 해발 3천미터 산을 그렇게 쉽게 오르려 하다니.

 

관광객들에게는 그냥 중앙에 가족 세워놓고 한장 찍는 정도의 장소이겠지만

본인은 매일 저녁 이곳에서 눈으로 보면서도 신기하게만 느껴지는 풍경의 변화를 즐기고 또 즐겼다.

 

 

 

주차 공간은 매우 넓지만 크게 특색있는 휴게소는 아닌 이곳은

시골 휴게소들이 그렇듯 반쯤은 마을 주민들의 시장같은 모습으로 운영되고 있다.

 

휴게소는 보통 지역의 유명한 먹을거리를 주무기로 삼는데

키소는 철마다 다양한 채소가 유명하긴 해도, 장사가 되는 요리를 꼽을만한 게 별로 없는 듯.

키소엔 일본에서 소바 맛있기로 유명한 곳이라 휴게소가 소바 팔아봤자 느낌이 오지 않는다.

 

무더운 여름날부터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까지 이곳에 머물렀는데

해발 2천미터 산맥 양쪽의 계곡을 따라 형성된 이곳 마을과 도로는

일반적인 산보다 훨씬 대기의 흐름이 변화무쌍해서, 갑작스러운 비는 이미 갑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바다를 훨씬 좋아하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이곳 계곡사이 마을인 키소라는 곳의 끝없이 다양한 모습은 정말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곤 했다.

 

3년 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힘겹게 휴게소까지 돌아와 벤치에서 쉬고 있는데

폭우와 동시에 찬란한 햇살이 옆에서 치고 들어오듯 반짝이는 그 풍경은

대체 여기가 어디인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초현실적이었다.

다행히도 아르바이트 하러 가면서도 항상 카메라를 들고 다녔기에 담을 수 있었던 사진.

 

 

 

스펙트럼이 원래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무지개가 떠도, 무지개 위쪽과 아래쪽의 하늘색이 전혀 다른 이런 풍경도 신기했다.

이건 키소만의 특징은 아니겠지만, 사실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떡하니 나타나는 무지개를 그만큼 본 적이 드물었다는 이유도 있고.

 

그 외에도 밤에 산책 좀 하려고 손전등 하나 들고 휴게소로 내려오면

음료수 자판이 위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청개구리떼가 너무 귀여워 흥분하던 기억도 난다.

20여년 전만 해도 비만 오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청개구리가 이렇게 반가워지는 시대다 보니

세삼스럽게 이곳 키소가 정겨워지는 이벤트였다.

 

 

 

나가노의 산들은 옷을 빡빡하게 입고 있는 편이다.

이곳 지역의 삼나무들은 매우 곳도 굴고 단단한 상품으로 유명해서

황제의 궁전이나 각지의 주요 신사의 기둥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되는 국가 소유의 재산이었다.

 

당시엔 워낙 귀한 삼나무였고, 아무리 산골 깊숙히 위치한 이런 마을이라고 해도

땔감이나 가옥의 유지 보수 등 나무가 풍족하다고 할 만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에

몰래 삼나무를 베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던 탓에, 일본 정부에서는 당시 삼나무 숲을 관리 감독하는 직책을 만들고

그 감독관에게는 살인면허의 일종인 키리스테고멘(切り捨て御免)이라는 무사들의 권리가 주어졌다.

 

'키리스테고멘'이란 무례를 범한 상인, 농민계급을 무사가 칼로 죽여도 면책받을 수 있다는 법으로

상상과는 달리 매우 엄격한 규칙에 의거해 있고, 죽인 후에도 강도높은 조사를 받는데다가

설사 정당방위로 죽였다고 해도 칼을 압수당하고 무조건 20일간 구류를 당하는 등, 무식할 정도로 야만적인 법은 아니었다.

 

하지만 삼나무의 관리직은 생계가 힘들어 나무를 훔치는 서민들을 상대로 하는 무자비한 감독관이었기 때문에

지역 농민들에게 적대감을 많이 살 수 밖에 없는 관직이었다.

 

지금 만나러 가는 쇼야네 가족이 그 감독관의 후손. 물론 지금은 마을 사람들끼리 악감정 같은 거 없지만

가끔씩은 쇼야네 가족들 입에서 스스로 그런 말이 나오기도 한다. 그때 불쌍한 사람을 죽이는 바람에 가문에 안좋은 화가 낀 건 아닌가 하고.

 

 

 

위쪽 사진 오른쪽을 보면 바위같은게 보이는데, 그걸 확대해서 찍어보았다.

뭐, 관광 상품으로 유명한 것은 아니고 사실은 이름도 없는 바위인데

쇼야 군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 정말 큰 비가 와서 산사태가 일어나고, 그 바람에 정상 부근에서 굴러 떨어져 박혀 버린 바위라고.

 

당시엔 마을 전체가 피난가야 하는게 아닌가 할 정도로 큰 산사태였다고 하니

저렇게 어마어마한 바위도 굴러내려오고 그러는 거 아닌가 싶다. 주위 나무를 보면 알겠지만 집채만한 바위다.

 

쇼야 군은 집에 있을때 심심하면 저곳에 올라가 바위 위에서 풍경 바라보는게 일상이었다고.

나보고도 몇번 가보자고 꼬시긴 했는데, 사실 저 산은 등산을 위한 산이 아니라 제대로 나 있는 길이 없다.

특히 저 바위로 향하는 루트는 정상까지 올라가서 다시 내려가야 하는데, 거기는 이곳 토박이들이 아니면 지나갈 수도 없는 길이라서.

 

자전거 여행으로 많이 지쳐있을 때라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는데, 혹시나 다시 산사태로 바위가 이사가기 전에 한번 올라가 봐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약 30분간 휴게소를 거닐며 떠오르는 상념을 즐기느라 머릿속이 바쁘다.

소야네를 만나기 껄끄러워해서 일부러 시간을 끄는 건 아니고

그냥 생각했던 그대로의 풍경이 여전히 눈 앞에 펼쳐지는 걸 보고 굉장히 가슴이 벅차오른 탓.

 

다시 이곳을 찾아온 게 역시 틀린 판단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곳의 자연은 시시각각 나를 만족시켜 주고, 지루할 틈 없게 만들어 준다.

 

자전거 여행중 만난 인연이 이렇게 확대되고 확대되어

지금은 새로운 가족과 고향이 생긴 것 같은 큰 마음 속 덩어리가 되었으니

훗날 너덜너덜한 인생을 뒤돌아보는 일이 생긴다고 해도

그때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래도 그런 일이 있었지' 라고 웃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제 1년에 하루 열리는 마츠모토 축제도 슬슬 끝을 향해 달려간다. 슬슬 도로에 주저앉아서 쉬는 사람들도 눈에 띄기 시작한다.

일본의 8월 첫째 주 토요일이라는 시공간이 가지는 공포스러움은, 사계의 변화가 뚜렷한 나라의 사람들에게는 신기루같은 항변일지도 모르겠다.

다들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를 수도 없이 겪으면서도 오히려 북극 사람이나 적도 사람들보다 날씨에 덜 민감한 듯 하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본인 역시 11월의 싸늘한 날씨에 익숙해져, 그 때의 섬뜩한 더위가 벌써 사진 속의 추억처럼 바래지고 있으니까.

 

한바탕 날뛰고 나서 들이키는 음료수의 짜릿함이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쾌락일 듯.

4시간이나 계속되는 축제다 보니 지쳐 나가떨어질 참가자나 관광객들이 좀 생기리라 예상했는데

어째 가면 갈수록 거리에 사람이 더 많아지는 기분이 든다.

 

물론 춤 자체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조금씩 줄어들고

삼삼오오 무리들이나 달달한 커플들이 자기네들만의 시간을 가지는 뒷풀이 공간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밤까지 계속되는 축제라면 역시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축제가 끝나가면서 한가지 궁금한 점이 생긴다.

지금 이곳 축제 거리에 모인 사람들은 마츠모토 시 인구보다 더 많은 20만명이 넘는데

이 사람들 다 어디로, 어떻게 돌아가는 것일까. 여기가 서울처럼 큰 도시도 아니고.

 

특히 축제 끝날때 까지 주요도로가 전부 보행자 천국이라서, 대충 다들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싶다.

이런 축제 후라면 뒷풀이 거하게 하고 새벽에 한시간쯤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전혀 힘든 일은 아니겠지만.

 

본인은 축제 장소 한가운데 서 있는 호텔에 투숙중이니 돌아가는거 하나는 신경쓸 게 없어서 홀가분하다.

 

 

 

짧지 않은 축제가 끝을 향해 달려가자 일본인 특유의 질서가 조금씽 무너지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것도 아니다.

아무리 마이크에서 떠들어대도 이미 힘이 다한건지, 춤 추는 도중에도 길을 건너려 사이사이를 뛰어다니는 사람들 통제가 되지 않는다.

진행요원이 대열 사이사이에서 '건너가지 마세요'라고 소리를 질러도 스스럼없이 건너가 버린다.

강제력을 가지고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진행요원들은 그냥 속이 탈 뿐.

 

사실 춤추는 사람과 부딪친다거나 하는 사고는 사소한 것일 뿐이지만

운영위원회 입장에서는 어쨌든 제일 신경쓰이는게 물리적인 부상이니까.

 

무단횡단하는 사람들은 이미 통제가 거의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다행히도 본인이 보는 한 사고가 생긴 일은 없었다.

 

 

 

뭐 하는 팀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들이 앞쪽에, 여자들이 뒤쪽에 서서 춤을 추는데

복장도 강렬하지만 안무 역시 일반적인 동작과는 달리 무릎과 허리를 지면에 엎드리듯이 굽혀가며 몸을 크게 휘젓는 과격한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다른 팀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의 체력이 소모되는 안무인데, 다들 의무감에라도 휩싸인 듯 악과 깡으로 춤을 이어가고 있다.

 

복장을 봐서는 무슨 빠칭코 회사 직원들이거나, 아니면 폭주족 팀원들 같은 분위기.

사회적으로 눈총받는 그룹들이긴 해도 사실 축제 때 분위기 제일 잘 띄우는 사람들 역시 좀 놀아본 사람들이다.

상세한 사정까지는 알 수 없지만 일반적인 참가 팀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는 건 확실히 기억한다.

 

 

 

축제의 규모에 비해서는 부담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게 이 마츠모토 봉봉인 듯.

큰 축제는 원래 준비할 것도 많아서 아예 축제 준비를 전업으로 삼는 사람들도 없잖아 있다.

아오모리의 네부타 축제는 네부타라는 거대한 구조물 만드는 데 1년이 걸린다. 축제 역시 1년에 한 번씩 열리고.

축제 후엔 그 인형들 바다에 띄워 불태워버리니, 사실상 평생 축제 인형 만든다는 의미.

 

하지만 이 축제는 뭐, 의상 맞추고 안무 연습만 하면 되니 크게 부담은 없을 것 같다.

네부타 축제처럼 일본 3대 축제에 들어가는 유명한 녀석들은 인건비와 규모를 감당하기 힘들어

점점 찾아오는 사람도 줄고 축제 규모도 축소되어가는 분위기인데, 마츠모토 봉봉은 매년 관광객이 꾸준히 늘어가고 있다.

 

사람들이 발걸음을 옮기게 하는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한 해석이 필요하다. 특히 관 주도로 열리는 축제 관계자들은.

세계대회 열리는 기간엔 문화, 예술을 즐긴답시고 재즈축제 열고 잰척 하더니

대회 끝나니 재즈축제 없애버리고 치맥축제 따위나 열어서 거지들 줄세우기나 하는 꼬라지 보니 참 한숨밖에 안나오더라.

 

 

단지 지역 사람들 모여서 춤추며 돌아다니는 이 축제가

어째서 이 도시 인구보다 더 많은 20여만명의 관광객들을 매년 불러모으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돈 내고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다, 온 김에 좀 더 둘러보고 갈 만 하다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야 한다.

축제가 돈을 밝히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은 결코 수면위로 스스로 올라와서는 안되는 양면성을 가진다.

 

사람들은 축제를 즐기러 온 거지 가게들 선전 보러 온게 아니다.

축제는 축제대로 관광객을 만족시켜줘야 그 뒤에 지갑이 열리게 되어 있는 것.

축제 참가에서 장사나 좀 하고 가겠다는 마인드 가지고 있는 회사들

그것보다는 아예 축제 자체를 회사들 선전하는 장소로 만들어 버리는 조직위가 더 문제이긴 하지만.

 

 

 

습한 더위 속에서 4시간 가까운 강행군을 하면서도 이렇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이 축제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가장 단순한 증거일 듯 하다.

 

쉬는 시간마다 스피커에서 미아가 된 아이 보호하고 있다는 메세지가 흘러나오고 있지만

묘하게도 그리 걱정되지 않는 것은, 충분히 통제되고 있는 상황에서의 사고는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안도감 때문일까.

 

 

 

거의 마지막 휴식시간이 아닌가 싶다. 어째 사람들은 점점 힘이 나는 듯 하다.

스피커에서는 여느 때의 안내방송이 아니라 뭔가 시상식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방송하고 있다.

 

몇몇 눈에 띄는 팀이 있긴 했는데, 아무래도 시상식장까지 가서 구경하는건 너무 힘들것 같아서 패스.

애초에 여기 참가한 사람들 중에 반드시 시상해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은 없을거라 본다.

 

축제를 성공적으로 마쳐가며 뿌듯한 기분으로 맥주 한캔씩 따는 참가자들 사이에서

혼자 조용히 이곳저곳 누비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나 같은 홀로 관광객은 기분이 묘하다.

쓸쓸하다거나 초라하다거나 하는 기분은 아니고, 축제를 즐기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구나 싶은 생각.

 

실제로 춤은 안 췄지만 또 하나 예정에 없던 귀중한 체험을 할 수 있어서 만족스럽다.

비록 이 축제를 보게 된 이유가 쓸데없는 자괴감에서 비롯되긴 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 또한 여행의 한 부분으로 각인되었으니까.

 

 

 

굉장히 화려한 총천연색 의상을 자랑하는 팀. 간판이 있긴 한데 이쪽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쉬는 시간 외에는 이동하기가 힘들어서, 내가 참가 팀의 몇% 정도를 본 건지 알 수가 없다.

한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면 아마도 모든 팀들을 한 번쯤은 볼 수 있었겠지만 그러면 너무 심심할 테니까.

 

보통 축제 끝나면 뒤풀이로 또 한번 시끌벅적해 지는데

이렇게나 사람들이 많으면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궁금하다. 가게는 거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없을텐데.

젊은 사람들은 벌써부터 인도 아무데나 퍼질러 앉아서 술 마시며 여자 꼬셔대고 있다.

나도 슬슬 편의점에서 먹을 거 좀 챙겨 나와야 하는데, 사람이 너무 바글바글해서 타이밍 잡기가 힘들다.

 

 

 

마지막 춤이 시작된다. 으레 그렇듯이 참가자들의 목소리나 동작은 더욱 커진다.

4시간 동안이나 마징가 Z 같은 노래를 듣고 있으니 그것도 이미 익숙해져서 흥이 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남녀노소 참가할 수 있는 축제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세삼스럽게 느낀다.

 

도로가에 위치한 전망 좋은(?) 가게 안은 벌써 사람들이 가득 앉아서 아련한 눈길로 행렬을 바라보고 있다.

기분같아서는 어디 가게나 패스트푸드점 같은데 들어가 마지막 마무리를 지켜보고 싶기도 한데

빈 자리가 있을리 없기 때문에 깔끔하게 포기하고 편의점에 들어간다.

 

화장실 가려는 사람들의 줄과 물건 사려는 사람들의 줄이 섞여있어서 혼잡하지만

의외로 편의점에서 먹을거리 사는 사람은 적은지 도시락 같은 건 충분히 남아있는 상태였다.

하긴 축제날 편의점 도시락 사먹는다는 건 뭐랄까, 이곳 사람으로서는 이미 최후의 수단 같은 행동일 테니까.

나는 인파 헤치고 줄 서서 간신히 타코야끼 하나 집어물고 하는 짓은 하기 힘들다.

 

 

 

생각해보니 이번 여행은 이상할 정도로 예정외의 이벤트가 많다는 느낌이 든다.

히다 타카야마에 갔을 때도 운 좋게 그날 저녁 마을축제가 있었고.

 

축제 시작때까지만 해도 키소 마을에 가지 않고 하루 더 눌러앉아 있으려는 본인의 소심함에

매우 우울한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활기찬 사람들의 축제를 구경하며 좀처럼 담기 어려운 사진을 찍어대고 있으니

그 죄책감이 조금은 사그라드는 듯 하다. 내일은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으니 당연히 키소로 향하겠지만, 그 전에 얼굴이 좀 풀려서 다행이다.

 

마지막 음악이 흐르고 춤은 모두 끝났지만, 한참 동안 동료들끼리 인사, 지나가던 지인들끼리 인사, 수고한 팀들간 인사 등으로

끝났다는 생각이 거의 들지 않는 시간이 흘러간다. 운영팀에서는 우수팀 시상하느라 정신이 없고 슬슬 사람들은 한잔 하러 가거나

집으로 돌아가는 등 소금이 물이 녹아내리듯 서서히 흐트러지는 집단의 모습이 보인다.

 

편의점에서 어렵지 않게 맥주 한 캔과 도시락 하나를 싸들고 숙소로 돌아온다. 9층의 객실에서도 여전히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여운을 남긴다.

결국 축제가 끝난 지 한 시간이 넘어서야 드디어 모든 만남이 끝나고 고리는 해체되어 서서히 흩어진다. 본인은 이미 목욕을 마친 상태.

맥주 한잔 들이키며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축제 현장에 건배 한 번.

 

애들 나이가 몇 살인지는 모르겠지만, 훗날 이 축제의 기억이 남아있을지 모르겠다.

본인의 경우 어릴 적의 기억이란 건 대부분 사회생활 시작부터 구체적으로 그림이 잡혀가는 듯 한데

유치원 가기 전의 기억은 매우 단편적이고 흐릿한 기억밖에 없지만

유치원 때부터의 기억은 입학식때부터 꽤나 상세히 기억이 난다. 유치원 구조까지도.

 

이런 큰 축제에서 어마어마한 인파와 시끄러운 음악소리를 직접 뛰어들어가 경험해 봤으니

이 애들이 내 나이즈음이 되어도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을까 싶다.

 

 

 

문득 축제 생각하니, 내가 어릴 당시의 한국이란 지금과 달라도 많이 다르다는 기억이 난다.

유치원 때부터 국민학교 저학년까지 내가 겪을 수 있었던 최대의, 그리고 유일한 축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추수감사절 부근에 펼쳐지는 미군부대 내의 축제와 불꽃놀이였다.

 

설날에 용돈이나 받고 추석에 친척들하고 놀이터나 나가보는 그런 시시껄렁한 놀이밖에 없었던 당시엔

1년에 단 한번 미지의 철창 문이 열리는 미군부대 축제는 마치 외국 여행을 온 듯한 신비의 세계였다.

 

그림 그려진 나무판의 구멍 안에 공을 넣으면 인형을 주는 놀이에서, 나이가 어린 애들 전용 구멍이 상당히 컸기 때문에

무리없이 확확 집어넣고 인형을 서너 개씩 막 건져오던 기억이 난다. 그 인형들 정말정말 좋아해서 4년 이상 가지고 놀았었는데.

 

어릴적 가장 기억에 남는 축제가 미군부대의 추수감사절 축제였다는 사실을 마츠모토 봉봉을 보며 떠올리니

요즘이나 수십년 전이나 한국의 어린이가 겪어야 할 정체성 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기분이 든다.

사실 요즘 애들이야 이런 축제 연습한다고 학원못가고 LOL 못하고 그러면 얼마나 서글프겠는가. 벌써부터 인생은 바쁜 것이다.

 

 

 

여기는 무슨 가장 행렬 팀인지, 중간중간에 이상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다.

유카타 차림의 여자사람들이 춤추는 모습은 참 보기 좋다.

일본의 전통 의상을 좋아한다기 보다는, 어떤 축제라도 자국의 전통의상 입고 참가하는게 가장 보기좋은 것이 당연하니까.

 

한국에서는 유카타와 키모노의 구분을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한복과 유카타를 비교하기도 하는데

실상 한복은 예절을 갖춘 행사에 입는 키모노의 일종인 후리소데(振袖)와 비교할 대상이지 유카타와 비교할 대상이 아니다.

유카타는 목욕 후에 파자마 대용으로 입는 간단하고 편리한 옷이라서.

 

개량한복이 적절한 가격과 뛰어난 편의성으로 발전된다면 한국 축제에서도 이런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겨울이라면 괜찮겠지만 8월 첫째 주 토요일 저녁의 기온은 30도 가까이에, 습도가 50%를 넘는 지옥의 언저리였다.

개구리 아저씨,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사진처럼 축 늘어져 버리는게 아닌가 심히 걱정되었지만

휴식시간에 수분 섭취를 잘 하고 있는지 아직까지는 생생하다.

 

그 옆에는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분도 열심히 부채 휘두르고 있다. 여기가 남반구인가?

 

본인 역시 소박한 소망으로, 사하라 사막 마라톤 대회에 다스 베이더 복장으로 완주해 보는 꿈을 꾸곤 하는데

막상 실제로 비슷한 짓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나마 현실 감각이 돌아오곤 한다.

 

 

 

'나가노 고전'이라는 학교에서 출전한 팀이다. 매우 활발하고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

내가 카메라 가져다 대니 긴장하는게 아니라 앞으로 쑥 다가와서 웃으며 부채춤을 춰 준다.

 

고전이라는 학교는 고등학교와 직업전문대를 합친 일종의 특수학원으로

취업쪽에 굉장히 강한 학교라 요즘 일본에서는 나름대로 입지를 다지고 있는 편이다.

물론 이러나저러나 인문계보다 날라리들이 많고 출석률이 떨어진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지만

학교 잘 안다닌다고 잘 다니는 학생보다 인간이 덜 됐다던지 하는 캐캐묵은 상식따위가 통하지 않는 시대니까 별 문제 없다.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환하게 웃어주는 모습을 일본이나 한국에서 보는 건

집앞을 걸어가는데 UFO와 충돌할 뻔 해서 외계인이 뚜껑 열고 나와 '죄송합니다 다치셨으면 보험으로 하죠'  하고 떠나는 경험만큼 진귀한 편이다.

 

 

 

마츠모토에서 가장 큰 축제다 보니 어지간한 대기업들 역시 필수 참가나 마찬가지.

NTT 도코모 사원분들도 열심히 춤추고 계신다.

절도있게 잘 추긴 하는데 역시 이쯤 되면 좀 전의 학생들과는 달리, 축제 역시 사회활동의 일종이라고 몸에 베어버리는 느낌이 든다.

하기 싫으면 안 하는게 축제일 터인데, 축제란 것도 사람이 만든 것이라

규모가 커지면 자연스럽게 권력의 집중이 이루어지고, 그렇게 되면 개인의 의사와는 조금 거리가 멀어지는 것일 듯.

 

NTT 정도 되니 팀원 수도 100명을 넘어가는 듯 하고, 대규모 인원이 펼치는 대규모 춤사위는 꽤나 박력이 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데, 생후 1년 이내로 보이는 아기들도 많다.

유모차는 움직이기가 워낙 불편해서 안고 나온 사람도 많고.

 

그런데 결코 조용하다고는 할 수 없는 축제라, 아기들 귀는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한다.

물론 F1 그랑프리처럼 귀를 파괴해 버리는 소음은 아니지만 아기의 청각에 대해 잘 모르니 괜히 신경쓰인다.

나 역시 한국사람이라 그런지, 아기에 있어서는 쓸데없이 애지중지, 과보호하는 민족성이 깊게 스며들어 있는 걸까.

머리로는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는 거 알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만큼의 과보호로 빠지는 경향이 있다.

 

아기 분유타는데 개량 숟가락 위로 분유가 솟아나왔다고 날 아기 살해자처럼 노려보던 그 날의 일은 죽을 때까지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아기 크면 나중에 말해줘야지. '내가 니 분유를 5g 정도 더 타서 배불려 죽이려고 했는데 니 아비가 막아내는 덕에 아직 살아있는 거란다'

 

 

 

점점 해가 지고 있어서, 사람들은 어둠이 가져다주는 흥분의 마약에 점점 취해갈 준비를 하는 듯 하다.

본인 역시 인생 절반을 야행성으로 살아왔지만 요즘엔 사진 찍는다고 밤이 점점 힘들어지는 느낌.

삼각대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런 북적이는 곳에서 삼각대 척 펼쳐놓는 야만스러운 짓은 할 수 없으니까.

 

통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듯, 막 해가 지려는 이 때가 참가자들의 피로도가 올라가는 시기일 듯.

 

 

 

체력적으로 힘든 축제이긴 하지만 자발적 참여라는 플러스 요소 덕인지 다들 싱글벙글하다.

축제 시작된지 2시간이 넘어가고 있지만 도로는 여전히 쓰레기 한점 없다.

마츠모토가 원래 물 좋고 공기 맑은 곳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이름값을 지키려 하는 것인지 원래 깨끗하긴 한데

이런 대규모 축제에서도 바닥이 이렇게 깨끗하다는 건 정말 본받아야 할 점이다.

 

세상에 전부 나 같은 사람만 있다면 쓰레기 무단투기는 없어질 텐데.

이건 자만이 아니고, 본인은 평생 살면서 쓰레기 무단투기를 해 본적이 없다.

대신 나 같은 사람만 있다면 이런 축제는 존재하지도 않겠지만.

 

날이 어두워지니 미리 준비해놓은 대형 라이트가 도로 곳곳에서 불을 밝힌다.

도심이라 밤이 되어도 어지간히 불빛이 남아있긴 해도, 축제 특성상 최대한 밝은 게 안전할 테니까.

 

 

 

나처럼 평생 처음 축제를 체험하는 외국인들에게야 1년에 단 하루 4시간의 축제라

놓치기 힘든 순간의 연속임에 틀림없겠지만, 대부분의 참가자들에게는 그냥 일년에 한번 주기적으로 열리는 놀기좋은 날일 뿐.

 

축제 기간엔 노점상들이 장사 휘어잡는게 보통인데, 이 축제는 도시 인구만큼이나 관광객이 찾아오는 초대형이라서

도시 곳곳의 가게들 역시 미어터지는 사람들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우렁찬 함성소리를 반찬 삼아서 스테이크를 썰어먹는 기분은 어떨런지. 사진 왼쪽의 가게는 '가스트'라는 패밀리 레스토랑이다.

 

미리 먹어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게, 음식점은 물론이고 편의점란 편의점도 줄이 장난이 아니다.

사실 반 정도는 화장실 사용하려고 대기하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날씨가 좀처럼 시원해지지 않는 것은 이 사람들이 발산하는 열정 때문인가 싶기도 하다.

 

 

 

1년에 단 하루의 여름밤 축제가 슬슬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다.

이미 3시간 넘게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춤추며 행진한 사람들의 얼굴엔 땀이 흥건하다.

하지만 노래가 끝나고 휴식시간을 알리는 안내가 흐르면 점점 더 활기찬 얼굴로 아이스박스에서 맥주와 음료수를 꺼내 든다.

 

춤 출때 보다 휴식을 즐기며 삼삼오오 모여있는 모습이 더욱 동질감 느껴지는 듯 하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내 주위엔 이런 데 뛰어들어 화기애애할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시원하게 한건 했다고 만족스러워 하는 저 모습은 순수하게 부럽고 동경하는 장면이다.

 

대구 치맥축제라는 괴이한 이벤트가 잠깐 생각났는데

먹이 받아먹는 동물처럼, 불볕더위에 한참 줄서가며 공짜 맥주와 치킨 몇조각 얻었다고

그렇게나 환한 미소를 띄우며 의기양양해 하던 젊은이들 모습은 별로 동경스럽지 않았다는 기억이 난다.

 

 

 

안내방송에서 시상식 이야기도 나오는 걸 보니 이 축제에도 팀별 시상을 하고 있는 듯 하다.

대부분의 팀들이야 상 받으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만.

 

대규모 축제 때야 사람들 많이 모이는 건 익숙한 모습이지만

딱히 다른 이벤트가 없이, 마을 사람들이 춤 추는 것 하나만 이루어지는 이 축제가

이렇게까지 바글바글한 것은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통과의 단절을 쿨하고 시크한 것으로 여기는 한국에서는 뿌리내리기 힘든 형태의 축제인데

사실 한국도 일본만큼이나 자기가 사는 마을에 대한 소속감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쿨하고 시크해봤자 그딴 허세는 조금만 흔들리면 날아가버리는 연기같은 녀석이니까.

 

 

 

처음 축제가 시작될 때는, 춤이 그렇게까지 과격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약간 김이 빠졌는데

언뜻 짧아보이는 4시간의 축제동안 이렇게 계속 춤을 추는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닌 듯 하다.

 

물론 축제 자체의 난이도는 여느 다른 축제에 비해 낮은게 사실. 대부분의 축제는 특정 행사를 중심으로 하며

그 행사는 무거운 물건을 들고 으쌰으쌰하는 경우가 많아서 마을 장정들이 특훈을 거친 후에야 겨우 완료할 수 있을 정도니까.

그에 비해서 이 축제는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겠지만, 그 덕에 남녀노소 모두 참가할 수 있고

몇몇 젊은 팀들은 안무 동작 자체를 거창하고 과격하게 바꿔서 상당한 체력을 필요로 하는 식으로 바꿔 놓기도 한다.

 

축제를 즐기면서 체력이 떨어지고 피로해 진다고 해도, 아마 기분이 다운되는 일은 없을거라 생각한다.

학생 때 하드락이나 핌프 등의 막나가는 언더 공연에서 신나게 흔들어 본 적이 몇번 있는데

셔츠를 짜면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어깨동무하며 뛰어다녀도 피곤해서 괴롭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었다.

그렇게 운동을 하라고 하면 입에서 육두문자부터 튀어나올텐데.

 

 

 

일본의 거대 체인 '이온'에서도 당연히 참가했다. 다른 팀들보다 복장이 전통스럽다.

주부 되는 분이 아기를 안고 춤추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

 

이렇게 행진하며 추는 춤은 옆에서 바라볼 때와 직접 참가할 때의 느낌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예전 아오모리의 축제 때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는데, 이렇게 대열 맞춰 동료들과 함께 조금씩 조금씩 전진하다 보면

의외로 뭔가 뿌듯하고 내가 지금 앞으로 나아가고 있구나 하는 긍정적인 마인드가 생기는 듯 하다.

 

 

 

축제의 끝이 다가올수록, 날이 어두워 질수록 사람들은 더욱 힘이 날거라 예상한 것이 틀리지 않았다.

원래는 이 팀도 최소한 줄은 맞춰서 춤을 추고 있었는데, 떨어지는 체력을 마치 외부 인자의 공격이라 느끼는 듯이

그것을 떨쳐내 버리려고 더욱 더 큰 소리를 지르며 방방 뛰기 시작한다. 것도 줄 같은거 맞출 필요도 없이 서로서로 뭉쳐서.

 

이게 바로 축제지 하는 느낌. 사실상 미쳤다고 해도 틀리지 않은 한국의 광폭한 축제에 비하면

이제까지 좀 차분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것도 아니었는데, 슬슬 이사람들도 감정에 몸을 맡기기 시작하는가 보다.

물론 다음 음악이 흐르면 빨리 앞 팀을 후다닥 따라가야 뒤쪽 팀에게 폐가 되지 않으니 서두르긴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 나처럼 구경하는 사람들도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니, 축제는 역시 좋은 스트레스 해소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