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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99'에 해당하는 글들

  1. 2013.01.11  도쿄 산책 - 요코하마의 비밀 아지트 18
  2. 2013.01.07  도쿄 산책 - 관광, 식사, 그리고 쇼핑 18
  3. 2013.01.06  도쿄 산책 - 스카이트리 좀더 20
  4. 2013.01.04  도쿄 산책 - 스카이트리 14
  5. 2013.01.02  도쿄 산책 - 흔들흔들 아사쿠사 14
  6. 2012.12.29  귀향 후 귀가 20

 

 

아침 8시에 일어나 로비에서 조식을 든든하게 챙겨먹는다.

아무리 인색하고 궁핍한 여행을 즐기는 타입이라고 해도, 맛있는 것 먹으러 다니는 행동 역시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보니, 별로 맛없는 무료 조식은 간단히 배만 채우는 용도로 사용하곤 하는데

오늘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비엔나 소세지 한무더기와 주먹밥 6개씩이나 집어들고 테이블에 앉는다.

 

일본인들이라면 보통 많이먹어봤자 주먹밥 2개 정도, 나는 평균 3개, 많이먹으면 4개쯤 먹지만

이번엔 배가 빵빵해질만큼 입으로 집어넣는다. 그래도 싸구려 주먹밥이니 눈치보일일은 없다.

 

식사 끝내고 적당히 휴식을 취한 후 9시 30분쯤 로비로 나간다.

30분 간역으로 이곳에서 우에노(上野)역까지 무료 셔틀버스가 운행하기 때문.

자동차로 가면 10분 남짓한 거리일 뿐이지만 걸어가기엔 상당히 먼 거리고, 전철타면 어쨌든 돈이 나가니까.

교통비가 만만치 않은 일본에서는 이런 셔틀버스를 최대한 이용하는게 이득이다.

 

승차중에 설문조사 응해달라고 하는데, 무료 이용이고 하니 흔쾌히 작성해줬다.

설문 항목중에 '운전 신호를 잘 지키고 정속으로 운행하던가요?' 라는 질문이 있는게 조금 특이했다.

셔틀버스 운행에 대한 적성검사라도 하는 듯한 내용이라서, 아무래도 이쪽 운전수일은 호텔 정규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얼굴은 되게 무뚝뚝하지만 지킬건 다 지키는 기사분이니 어쩄든 좋게 평가해줬다.

 

공짜로 우에노에 도착하니 기분도 상쾌하다. 일본의 교통비는 정말 무서워서.

하지만 오늘은 이제부터 상당한 금액의 교통비를 지출해야 하니 각오를 단단히 한다.

 

도쿄 여행의 기준점이라고 할 만한 우에노역. 주요 철도 노선 대부분이 이곳으로 모이고

근처에서 저렴한 숙박장소 찾기도 쉽기 때문에 중요도가 매우 높다.

물론 좀 더 편안하고 향락적인 여행을 하고 싶다면 도쿄역 중심으로 180도 빙글 돌려서 반대방향에 위치하는

시부야나 신쥬쿠 같은 곳에 숙소를 정하는게 낫기도 하다. 좀 비싸긴 해도 그곳 역시 교통의 요지중 요지이고,

그쪽에 자리잡으면 밤새도록 쇼핑이나 먹거리 즐기는데 교통비 들 필요가 없다. 온통 그런 곳 천지니까.

 

 

 

12월 초순이었지만, 벌써부터 크리스마스의 향기는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한국의 크리스마스는 고출산 장려 기념일이라고 부르는게 더 알맞을듯 하지만

일본은 어쨌든 지진과 원전사고로 큰 피해를 입은터라, 크리스마스가 다가올수록 기부의 의미가 강조되는듯 하다.

 

요 2년 가까운 기간동안 일본의 시민기부액수는 놀라울 정도로 폭증했는데

피해지역의 참상이 상상을 초월하니, 이해가 되지 않는건 아니다.

하지만 국회 감사에서 재해지역에 사용되어야 할 기금중 상당수가 어이없게도

어제 그 스카이트리 홍보비용으로 쓰여졌다는 내용이 나오는걸 보니, 이쪽 시민들은 열받지 않으려나.

 

정부가 그 꼬라지를 하고 있으면 정말 기부하려는 마음이 싹 사라질법도 한데

후쿠시마 대지진의 피해가 너무나도 커서 그런 정치불신마저도 하찮게 보일만큼 급박하기 때문에

여전히 개인 기부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중이라고 한다.

 

좀 낡긴 했지만 우에노역은 여전히 크고 다양한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역 앞에 유명한 재래시장 '아메요코'가 서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전후 초기부터 재건사업이 시작된 곳이라 개발이 중구난방으로 이루어지다보니

이곳 우에노 역도 여기저기 추가 출입구 새로 뚫고, 내부를 조금조금 야금야금 증축하고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서 상가를 유치하고 해서, 뭐라 표현하기 힘든 묘한 역이 되어버렸다.

 

세련된 부티크 샵과 훌륭한 베이커리, 꽤나 맛이 괜찮은 커피전문점, 60~70년대 블루스바까지 공존하면서

공간이 워낙 구불구불하게 증축되다보니 위쪽 지붕이 2m가 채 되지않는 낮은 지역도 있어서 그거 높히려고 또 공사중이다.

 

오히려 한국 사람들에게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고 호평받는 우에노 지역이니

이 난잡함도 그리 기분 나쁘진 않을듯 하다.

 

 

 

우에노가 출발역이기 때문에 느긋하게 앉아서 40분정도 달려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요코하마 역은 아니고, 몇 정거장 옆에 있는 칸나이(関内)역.

왕복 전철비가 2만원 가까이 깨지니, 평소같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짓이다.

 

예전 킨키지방의 코야산같은 곳이라면 기꺼이 2시간 버스타고 다녀오겠지만

요코하마는 도쿄와 그닥 다를바 없는 큰 도시라서, 내 취향이 아니다.

해변가 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고, 그곳 야경도 괜찮은 편이라고 하지만

어쨌거나 노력과 수고를 들여서 '도시'를 구경하는건 취향이 아니다.

 

나름 도쿄 부근에서는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지만 예전 자전거 여행때는 그냥 후다닥 지나쳐 버리고

그 앞의 에노시마에 들어가서 고양이들과 뜨거운 하룻밤을 보낸 기억밖에 없다.

 

 

 

하지만 이번엔 교통비를 감수해가며 도쿄에서 찾아올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사실 세세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아사쿠사 근처에 숙소를 잡은것부터 시작해서

이번 도쿄여행 전체가 이날 요코하마에 오기 위해서 계획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에노까지 무료 셔틀버스도 확인했고, 우에노에서 이곳 칸나이 역까지 직통으로 올수 있기 때문에.

 

이런 류의 도시에는 그닥 흥미가 동하지 않는 성격덕분에

화창한 날씨 아래서 도쿄보다 좀 더 시원하게 뚫린 다차선 도로를 마주해도

그냥 산은 산이요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조금 더 이동해서 미 해군기지 근처까지 가면 분위기가 좀 바뀐다고 하던데,

그리고 항구로 유명했던 지역이니만큼 일본에서 가장 큰 차이나타운도 있어서

맛있는거 먹으러 가기에는 좋은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것 때문에 온 게 아니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애초에 이만한 시간과 교통비 들여서 여기까지 오지도 않는다.

차라리 교통비 더 들여서 옛 사찰과 유적이 가득한 닛코(日光)에나 갔겠지.

 

 

 

세계 어디든 마찬가지지만, 일기예보를 너무 믿어서는 안되는 것 같다.

어제가 내 여행기간중 가장 맑은 날이라고 몇번이고 일기예보를 확인했고

그래서 일부러 어제 스카이트리를 찾아간 것인데, 오늘은 어제보다 더 화창하다.

 

물론 오늘은 예정이 잡혀있으니 어차피 스카이트리 가진 않았겠지만

예보가 이렇다는 건 내일이나 모래 역시 어제보다 더 맑을수도 있다는 반증이 되니까.

아무튼 요코하마에 대해서는 당일치기 관광객보다도 아는게 없는 일자무식이니

그냥 역에서 나와서 아무곳이나 걸어다닌다. 아직 약속시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날은 일요일이라서, 좀 번화한 상가골목으로 들어가자 인파가 밀물처럼 채워지기 시작한다.

요코하마가 이렇게 번잡했나 싶을 정도로, 하긴 이곳에 대해 하는건 하나도 없지만.

 

이제와서는 좀 촌티나는거 아닌가 싶을, 검은 가죽잠바와 타이트한 가죽바지, 번쩍번쩍하는 가죽구두를 신고

머리에 한껏 힘을 세운 젊은애들이 웃으며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의외로 아무 생각없이 찾아온 거리는 꽤나 번화가인 모양이다.

자동차는 원래부터 통행금지였고, 자전거도 타고 가는건 금지라서 나이먹은 경찰관이 길복판에 떡하니 서서

자전거 타고다니는 사람 없나 두리번거리고 있다. 그만큼 인파가 심한 곳이라는 반증.

 

운좋게도 중고책 전문점 북오프가 바로 앞에 있어서 40분동안 책이나 읽었다.

북오프는, 따끈따끈한 신간은 별로 없지만 모든 책에 커버가 씌여있지 않기 때문에 얼마든지 서서 읽어도 뭐라하지 않는게 장점이다.

여름에 여행중엔 에어콘 바람 실컷 만끽한게 좀 미안해서, 가끔 저렴한 중고책을 일부러 사들고 나간 적도 있고.

 

 

 

약속시간까지 30분쯤 남았지만 장소를 도저히 찾을수가 없어서 결국 점장분한테 전화까지 때려야 했다.

애초에 요코하마에 한 번도 온적이 없는 내가 이곳을 찾을수 있을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점장분도 처음 찾아오는 분들에게는 설명하기가 참 난감하다면서 힘들어하신다.

특히 왠만하면 스마트폰의 기능으로 찾아오는 일본 사람들과 달리, 난 로밍폰이라서 데이터를 쓰지 않는다.

그래도 열심히 하나하나 설명해준 덕에 어째 설명 한번만으로 잘 찾아왔다.

 

찾고보니 방금 전 책읽었던 북 오프점에서 딱 두 골목만 안으로 들어가면 위치했던 곳이지만

설명없이 이 좁은 골목을 찾아다닌다는건 불가능에 가깝다. 이 골목은 성인 두 사람만 나란히 서면 꽉 찰정도로 좁으니까.

 

'BAR de 남극요리인 MIRAI' 이라는 이름의 음식점인데

펭귄마크의 아이콘이 묘한 인상을 남긴다. 남극요리인이라는 타이틀과 펭귄이라니.

슬쩍 '쥔장이 남극에서 요리하다 왔나보군' 이라고 가볍게 생각해 볼 수도 있겠는데

사실은 그 말이 맞다.

 

관광 가이드북에 실려있는지는 모르겠는데, 2010년도에 개장해서 역사가 깊은 곳도 아니고

디지털 지도나 가이드북이 없다면 (이 곳이 실려있는 가이드북이 있는지 조차도 모르지만)

정말로 찾아가기 힘든 외진 구석에 조그맣게 위치한 지하 음식점이다.

아마도 한국인이 이곳을 찾는건 처음이 아닐까 싶은데.

 

 

 

객석이 내 방만한 작디작은 이곳을 찾은 이유는

한국에서도 꽤나 인기를 끈 '가보기전엔 죽지마라' 의 저자 이시다 유스케(石田ゆうすけ)씨의 토크 라이브가 이곳에서 열리기 때문.

 

사실 이번 도쿄 무료 항공권은 출발 2달 전에 미리 받아놓은 것이라서

도쿄서 뭘 할까 이리저리 생각하는 도중에 우연히 이시다씨의 토크 라이브가 열린다는 사실을 접하고

서둘러 이시다씨한테 연락해서 자리 하나 예약한 상황이었다.

 

여행 좋아하는, 특히 자전거 여행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꽤나 유명한 이시다 씨는

7년 반동안 자전거로 세계일주를 하며 95000km 를 달렸다.

원서 제목은 '行かずに死ねるか!' 이고, 직역하면 '안가보고 죽을쏘냐!' 라는 좀 강한 어조가 되는데

그래도 '가보기전엔 죽지마라' 라는 의역 역시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단지 책을 읽은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이 책은 독자에게 말하는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책이라

남에게 명령형으로 들리는 제목으로 의역한 것만은 조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다.

 

10평도 안되보이는 좁디좁은 바에 예약된 청중은 30명이 넘어서

서로서로 무릎의 온기를 느낄 정도로 바싹 붙어서 간신히 앉아있는다.

워낙 소규모 토크 라이브에, 이시다씨나 바 주인장분이나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참가비 따로, 마실거 한잔 의무적으로 주문해야 하는 빡빡한 요금제이지만

그 정도야 부담하고서라도 이시다씨와는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이 토크 라이브는 일본 각지를 도는 순회 강연이고

공교롭게도 오늘이 세계일주 토크의 마지막인 아시아편이었다.

가보기전엔~ 책에는 의외로 아시아쪽 루트에 대한 에피소드가 좀 적은편인데

토크를 시작하면서 이시다씨가 해명을 했다. 에피소드가 적어서 안쓴게 아니고 너무 많아서 쓸수가 없었다고.

 

장거리 자전거 여행을 해 본 사람이라면야 별로 신기할 것도 없을 터.

하루하루가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자 저뭄의 연속이고

인간이라는 공통점 외에는 피부색, 머리색, 눈동자색, 체중, 키, 언어, 문화 등등 모든 것에서 다를수밖에 없는

타인들과의 접점과 접점이 끊임없이 겹쳐지며 만들어 지는게 여행이란 녀석이니까.

 

노트북에 프로젝터를 연결하고, 끝까지 나타나지 않은 예약손님 몇명을 좀 더 기다려보다가

결국 토크를 시작한다. 기분같아서는 취재기자처럼 토크 도중도중에 사진을 마구 날리고 싶었지만

당연히 해서는 안될 일이고, 책에 실리지 않은 귀중한 사진들도 맘대로 유출할 수는 없으니까.

 

맥주 한잔 마시며 위트 넘치는 이시다씨의 토크를 감상한다.

사실 아무리 말하고 말해도 그 7년 반의 여행을 제대로 표현할 수는 없다.

단지 몇천 분의 일이라도 그때 그가 느꼈던 기분을, 토크를 듣는 이곳의 사람들이 살짝 느낄 수 있다면

그게 이 토크가 가지는 가장 큰 의미가 아닌가 싶다.

 

이시다씨와 비교하는건 택도 없지만, 어쨌든 1년동안 자전거로 일본일주 한 경험이 있다보니

이야기 중간중간에 감회에 젖은 묘사로 살짝 눈을 감는듯 마는듯 하며 빛의 속도로 그 때의 추억을 되살리는

이시다씨의 미묘한 표정 하나하나에 나 역시 스스로의 추억에 휩싸이는, 이상동몽적인 공감대를 형성한다.

 

2시간 토크후 10분 휴식후, 또 2시간 토크라는 장거리 마라톤이었고

책에서 빠트릴 수 밖에 없었던 수많은 에피소드와 여행에 대한 사람들의 궁금증 등

풀어나가자면 이런 포스팅 몇 개는 채울 수 있는 이야기를 듣고 왔지만

이곳은 이시다씨의 정보 소개하는 사이트가 아니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한다.

 

몇가지만 남겨보자면, 이시다씨가 가장 감격에 겨웠던 아프리카 사막의 풍경사진 이벤트.

휴식시간동안 이시다씨는 사막 사진을 슬라이드로 보여주면서 파헬벨의 캐논 변주곡을 BGM 으로 틀어주었다.

나도 워낙 많이 듣는 곡이라서, 착각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헤르베르트 카라얀이 지휘한 버전일 것이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연주한 버전으로, 아마 아다지오 & 파헬벨 앨범에 있던 녀석일 듯.

 

파헬벨의 캐논은 대중적으로 300년동안 너무나도 사랑받아왔기 때문에

요즘 흔히 들리는 기타나 가야금,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 등등의 베리에이션 외에도

시대의 흐름과 나라별 오케스트라, 그리고 지휘자별로도 그 음색이 굉장히 다르다.

나같은 클래식 생초보라도 너무나 쉽게 구별이 될 정도로 다양한 버전이 있으니 한번 들어보시길.

 

 

 

카라얀이 쫌생이중의 쫌생이에다 비겁자이긴 해도 진짜 천재는 천재다.

 

이시다씨는 자전거 타면서 그 지역의 분위기에 맞춰 음악을 듣는데

사막의 풍경만큼은 그 어떤 음악보다 클래식이 어울렸다고 회상했다.

 

음악의 취향이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사막에는 음악이 어울린다는 점 하나만은 극히 동감한다.

사하라 마라톤 때도, 야간 레이스 당시 사람은 커녕 빛 한줄기도 없는 광야 속에서 홀로 걷고 있으니

저절로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던 추억이 있으니까. 이시다씨의 사막은 나의 사막과 맞닿아 있다.

 

  

 

 

내가 참가한다고 미리 연락을 해서 그런지, 상식적으로 봤을때는 원래 일정에 들어가 있지 않을

한국에서의 이벤트를 마지막에 첨가해 주셨다. 시기적으로는 한국이 그의 7년반 여행의 마지막 경유지이긴 했지만

본인 스스로도 한국은 살짝 거쳐가는 정도였기 때문에, 내가 아니었으면 일부러 이번 토크 라이브에 집어넣었을 리가 없다.

 

숯불갈비 사진을 보여주면서 참 맛있었다고 회상했다. 사실 이시다씨는 그 마른 몸과는 달리 먹는것에 인생을 거는 사람으로

지금도 일본에서 전국 각지의 먹거리 이야기를 컬럼으로 연재중이다. 책도 냈다. 먹는건 여행만큼이나 중요하다.

사진에 찍힌 반찬들을 언급하면서 '이게 다 공짜에다가 리필도 된답니다' 라고 하니 주위 사람들이 놀라는 소리가 들린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는데, 다음으로 나온 사진이 홍어 삼합 사진이었다...

그걸 보는순간 난 머릿속으로 '어느 인정많고 장난끼넘치는 사람이 이시다씨를 골려먹었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뭔가 짜고치는 고스톱처럼, 이시다씨와 내 눈이 슬쩍 마주치며 서로 씨익 미소를 짓는다.

 

이시다씨는 '오늘 한국분도 오셨으니까 그분한테 설명을 들어보죠' 라고 하고 발언대를 나한테 넘긴다.

사실 홍어를 일본어로 뭐라 하는지 몰랐다. 자주 먹는 생선은 둘째치고 난 한국에서도 홍어를 거의 안먹으니까.

한국사람들도 잘 안먹는다는 설명 곁들여서, 돼지고기와 김치를 함께 먹는 삼합에 대해서도 잠깐 설명했다.

이시다씨는 그때의 암모니아 입자가 아직도 콧속에 박혀있는듯, 이미 홍어에 대해서는 어지간히 조사를 했고

세계에서 악취강한 음식 2위에 랭크되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1위는 먹어본적 없단다. 다행이로세.

 

홍어라는 음식은 평생 이시다씨의 머릿속에 남아있을테니 그것도 추억이라면 추억이지만.

이시다씨는 이제까지 '이걸 자신한테 내준건 순수한 호의에서였을까, 장난치려는 의도가 있었던 걸까' 고민해 왔다고 한다.

텍사스 주 사람한테 날계란 먹으라고 건내주는것도 이렇게 홍어 주는것만한 장난이라고 하는데

한국의 문화에 대해 모르는 이시다씨라면 아마 머리 좀 아팠을 듯 하다. 진짜 맛있어서 권해준 거라면 의심하는 것 자체가 미안한 일이니까.

하지만 내가 장난이라고 확실히 못박아주니 시원한 표정으로 웃는다. 여기까지 온 보람은 있구나 싶다.

 

쉬는시간이 되자 많은 사람들이 사인을 받으려고 책을 갖고 온다.

사인회 자체는 뭐 어디서든 하는 것이니 별 감흥이 없지만

인기는 있어도 메이저는 아닌 이런 이시다씨의 조그만 토크 라이브에 찾아와

가까이서 생생한 체험을 들어볼 수 있다는 것 자체는 상당히 부러운 점이다.

이 좁은 음식점에 들어와서 여행 좋아하는 작가와 토크 라이브를 스스럼없이 즐길 수 있다는 것.

이시다씨는 휴식시간에 벌써 맥주 한병 까서 마시고 있고... 사실 청중들도 다들 맥주정도는 마시면서 듣고 있다.

작가 사인회라는 딱딱하고 형식적인 이벤트도 이곳에서 일어나니 친근해서 좋다.

 

이번 여행에는 사하라 멤버 나침반님이 소장중인 '가보기전에~' 책을 들고왔다.

사인 허락을 받지 않아서 조금 걱정은 되었지만, 혹시 싫어하시면 새책 구입해 드리는걸로 하고.

일본어로는 닉네임인 '나침반씨에게' 라고 적고, 이시다씨가 한글로도 적어준다고 해서 성함을 적어드렸다.

이시다씨는 '나침반 한자는 어려워요' 라고 난색을 표했다. 진짜 어려운 단어긴 하다.

 

물론 라이트룸으로 팍팍 찍어버렸기 때문에 실제 성함이 영영영 은 아니다.

밑의 저 '일일 일생' 이라는 단어는, 이제와서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다.

이미 위에 적어놨다.

 

4시간에 걸친 아시아편 토크는, 나에게는 물론이고, 이시다씨처럼 자전거로 세계일주를 준비중인 나침반님에게도

흥미가 동할만한 정보나 감상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이건 나침반님에게 필요한 정보니 여행후 나침반님 만나서 말씀드렸다.

 

토크가 끝나고 뒷풀이가 있다고 주인장분이 안내를 해 주신다.

물론 여기서부터는 제대로 식사를 하면서 놀아보는 시간이라 지불해야 할 금액이 꽤 되지만

여기까지 와서 이시다씨와 이야기하는데 돈이 아까워서 포기할수는 없다.

30명의 독자들중 6명이 남고, 이시다씨와 와이프분까지 해서 총 8명이 뒷풀이를 위해 바에 남는다. 물론 나도 포함해서.

 

10시가 되니 소라마치의 문이 열린다. 가면 갈수록 사람이 많아질테니 여기도 재빨리 치고빠져야 할 듯.

'하늘마을'이라는 뜻의 소라마치는, 사실 마을이라기보다는 거대 쇼핑몰이지만

적어도 지상층 몇군데만큼은 마을 주변의 가게처럼 살짝 소박하게 장식해놓았다.

 

이게 몇층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층은 살짝 맛만 보는 느낌이고

위로 올라가면 한국의 백화점따윈 쌈싸먹을 정도로 거대한 쇼핑몰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층은 작은 가게들이 모여서 간단한 기념품, 먹을거리를 팔고 있어서

사실상 내가 볼일있는건 이곳 뿐.

 

 

 

사실 호텔 조식을 뱃속에 집어넣고 왔기 때문에 오전 10시에 뭘 먹을 필요는 없었지만

점심시간 맞춰서 가면 대기열이 어떻게 될런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곳이라서 겁난다.

 

거기다가 슬쩍 둘러보려고만 했던 상점가에, 내 시선을 사로잡은 라멘사진이 떡하니 놓여있어서

이건 어쩔수 없다고 생각하며 막 개점한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아침부터 라멘이라니 가게 주인장도 이상하게 생각하는거 아닌가 싶었는데

옆의 중국인 관광객도 잘 먹고 있는데다, 그 후에 찾아온 백발의 일본인 관광객 두명은

군만두와 생맥주까지 시켜서 잘 먹고 있는걸 보니 괜한 걱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배가 전혀 고프지 않아서 왠만하면 그냥 넘어가려 했지만

여지것 일본서 먹어본적 없는 새우라멘의 모습을 보고는 패배를 선언할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는 기본적으로 해물을 베이스로 한 면음식은 라멘보다 짬뽕과 우동이다.

물론 해물라멘도 없진 않고, 새우로 맛을 낸 라멘은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꽤 유명하기도 한데

여기서 본 이 라멘은 구성이 꽤나 독특해서 눈길을 끌었다.

 

새우 베이스의 라멘은 보통 바다내음을 강조하게 위해 소금으로 간을 하는 시오라멘이 주를 이루는데

이쪽은 일본식 된장인 미소라멘을 베이스로 하고, 국물맛을 내기 위한 우려내기용 작은 홍새우에다가

짭쪼름한 튀김옷을 얇게 입힌 큼지막한 새우를 건더기로 올려놓은 푸짐한 녀석.

 

사실 양은 가격에 비해 작은 편이라서, 한끼 식사라고 생각하면 분명 이것만으로 모자라겠던데

배가 고프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는 오히려 무리하지 않고 먹을만한 분량이라서 나름 다행이라면 다행.

 

죽순 절임인 멘마도 오돌오돌하게 맛있고, 계란도 적당히 간이 들어가서 합격점이다.

일본 라멘의 짠맛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질색하는것도, 당연히 지역간 식감의 차이이니 이해하는데

일단 기본적인 레시피를 볼때, 멘바나 계란이 제대로 절여지지 않고 밋밋하게 나오는건 레벨이 떨어진다는 의미.

그런데 겉치레로 붙어있다는 생각이 드는 챠슈는 별로 훌륭하지 않다. 새우가 메인이니 어쩔 수 없는건가.

 

1100엔이나 하는 고가라멘인데다가 양은 적어서 추천하기에는 좀 꺼려지는 녀석이지만

일반적인 미소라멘과는 달리 새우의 미묘한 단맛이 우러나 있는 국물은 괜찮은 경험이다.

짠 건더기들이 우르르 들어가는 편인데도, 그걸 계산해서 미소국물의 간을 살짝 싱겁게 조절해 놓은게 마음에 든다.

물론 이건 평균적인 일본인들의 시점에서 하는 이야기고, 한국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짠 편이다.

애초에 한국사람들이 이정도면 되겠지 싶은 맛의 라멘은 일본에서 인기가 없을 걸.

1년간 자전거 여행하며 일본 각지에서 120그릇이 넘은 라멘을 먹어치운 나로서도

어쨌든 첫경험인 새우미소라멘이었다. 새로운 경험에 투자한 금액이 좀 비싸긴 헀지만.

 

 

 

빵빵해진 배를 잡고 촛점없는 눈으로 소라마치를 서성인다.

하다못해 부모님이라도 함께였다면 이것저것 구경하는 부모님을 뒤에서 바라보는 재미라도 있을텐데

쇼핑에 조금도 관심이 없는 본인 혼자서 이런곳에 와 봤자 뭘 하겠는가 싶다.

단지 스카이트리와 함께 조성된 유명한 관광 스팟이니 한번 둘러나 보자 하는 기분.

 

어쨌든 도쿄까지 왔으니 뭐좀 사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또 하나의 거대 쇼핑몰이 생겨서 기분좋을듯 하다.

기본적으로 사진촬영 금지인데다가, 메인 통로쪽에 사람이 워낙 많아서 사진을 못담았을 뿐이지

한국의 백화점과 비교하면 실례일 정도로 규모가 상당히 크다.

조카 기저귀사러 청량리 롯데백화점에 가본적이 있는데, 그것의 2.5배 정도는 크지 않을까 싶다.

 

시부야나 신쥬쿠의 쇼핑타운은 워낙 대규모 물량공세라서 이곳과 비교하기 힘들지만

단일 매장으로는 오다이바의 비너스 포트를 능가하는 규모라고 느껴진다.

 

거기다 개장한지 6개월밖에 되지 않아서 모든 것이 반짝반짝 새 건물에

가벼운 기념품에서부터 캐쥬얼한 의류, 꽤나 고급 브랜드까지 없는게 없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로, 쇼핑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아침부터 저녁 폐점시간까지 얼마든지 돌아다녀도 모자람없는 곳이라고 생각.

 

이번 여행은, 허구헌날 시골구석이나 찾아다니다가 오랜만의 도쿄여행이라 그런지

지인들로부터 뭐 사달라는 요구를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이 받은 여행이었고

그 중 헬로키티 브랜드의 조그마한 핸드백도 들어있었는데, 여기는 헬로키티 매장만 서너개가 넘는다.

 

묘하게도 대부분의 헬로키티점은 정말 아이들 수준에 맞춘 그런 물품들을 파는 곳이고

나머지 한군데는, 패션에 관심있는 여성들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고급 브랜드와의 콜라보레이션 매장.

그곳의 헬로키티 핸드백은 패션의 패도 모르는 내가 봐도 '이거 괜찮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녀석이었다.

 

크게 화려하지도 않으면서도 헬로키티 특유의 원색 강조가 잘 나타나 있고

재질은 가벼우면서도 방수기능이 기본적으로 첨가된 고가 원단이라고 점원이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일본어를 알아들어도 패션 관련 단어를 알아들을수가 없는 나는 오랜만에 일본에서 이국맛을 실컷 느꼈는데

어쨌든 굉장한 인기품이고, 2012년 겨울 한정품목이라서 재고 수급도 간신히 맞추고 있다는 듯.

 

물론 브랜드 사치품에 비하면 공짜나 다름없는 8700엔의 가격이지만, 내가 부탁받은 헬로키티 핸드백은 3000엔 짜리였다.

아무리 좋아보여도 이 가격차는 좀 아니다 싶어, 훗날 바이어(?)와 연락이 가능할 때 한번 물어보기로 하고

이번엔 그냥 구경만 하고 나왔다. 조금 쫄았지만 다행히도 친절한 점원은 인상 변하지 않고 웃으며 배웅해주셨다.

 

 

 

콩글리쉬로 윈도우 쇼핑이라는건 신나게 즐겼지만, 사실 소화좀 시키려고 돌아다닌 것 뿐이라

뭘 봤는지 기억은 거의 나지 않는다. 글쎄, 내가 좀 부자라서 현금뭉치를 수십만엔쯤 들고온 사람이라면

지나다니다가 괜찮다 싶은 옷 몇벌 사서 이미지 체인지를 해 보는것도 나름 행복을 누리는 방법일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굉장하다는 인상을 받으며 출구를 찾아 헤매고 있던 도중, 재미있는 상품을 발견하고

점원에게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는 척하며 슬쩍 사진을 담아본다.

사실은 대놓고 찍어도 별로 뭐라 할사람 없겠지만, 쇼핑몰 안에서의 촬영은 언제나 긴장된다.

 

부피에 비하면 꽤나 비싼 녀석인데, 정말 잘도 이런 상품을 만들어내는구나 싶다.

스카이트리형 초콜릿이다. 밑의 마을모형 역시 초콜릿. 스카이트리는 화이트초콜릿으로 임팩트를 줬다.

조금 엉성하긴 해도 스카이트리 옆의 스미다가와 강까지 표현해 놓은걸 보니, 진짜 신경좀 썼구나 싶다.

 

스카이트리 모양이 모양이다 보니, 제품의 포장은 비효율의 극치를 달릴수밖에 없지만

그 효율을 높여보자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처럼 스카이트리 모양의 초콜릿만 덜렁 팔고있었다면

이렇게 내가 사진을 담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 자연스럽게 고급 기념품이라는 이미지도 생기고.

 

사소하지만 이런 발상의 전환이 기념품 장사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기념품의 덕목은 가격대 성능비가 아니라 임팩트다.

누워있는 스카이트리 초콜릿과, 이 녀석을 나란히 전시한다고 생각해 보라. 어디에 눈길이 갈지.

 

물론 사들고 가서 혼자 까먹어 버린다면야 가격 싼녀석이 제일 좋겠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일본의 기념품은 주위 사람들한테 선물 주기위해 사 가는 것이다.

어떤걸 선물로 줬을때 상대방이 더 좋아할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을 듯.

 

 

 

흡족한 기분으로 소라마치 관광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다.

이곳으로 올때 전철을 타 봤기 때문에, 아사쿠사까지는 그냥 걸어서 가기로 한다.

 

어디서든 스카이트리를 카메라에 담느라고 관광객들이 정신없는데

영락없는 노숙자 할아버지가 관광객들에게 촬영 스팟을 조언해주고 있다.

 

여기 이 지점에서 찍으면 전부 다 담을수 있다느니, 시간대별로 멋지게 보이는 촬영장소 등을 읊어대는데

반쯤은 관광객들에게 하는 말이지만 얼핏 들으면 그냥 혼잣말같기도 하다.

관광지라서 사람들이 좀 온화해 진건지, 그 설명 들으며 고맙다고 인사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 그 땟국물 줄줄 흐르는 노숙자 할아버지한테 카메라 맡기도 자기들 좀 찍어달라고 부탁도 한다.

 

굉장히 보기좋은 광경인데, 유럽에서나 볼만한 모습을 여기서 보니 내가 좀 어리둥절했다.

 

소라마치와 스카이트리를 한 화면에 담아보려고 했는데 이 거리에서는 35mm 렌즈로도 무리였다.

소라마치는 긴 직사각형의 건물이라서, 둘을 한꺼번에 담으려면 이거보다 더 광각렌즈를 사용하던가

파노라마 형식으로 이어붙어야 가능할 듯 하다. 하지만 파노라마는 귀찮아서 그냥 패스.

그거 못담았다고 내가 아쉬워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자연경관 풍성한 곳이 아니라 도쿄같은 도시에서 35mm 보다 더 광각이 필요할줄은 몰랐다.

 

소라마치는 쇼핑몰뿐만 아니라 수족관까지 포함된 복합센터라서, 인파에 휩쓸릴 각오만 있다면

하루 꼬박 소비해도 전혀 아쉬울 것 없는, 도쿄 관광의 새로운 중심지로 명실공히 입지를 다지고 있다.

수족관은 물론 본인도 참 좋아하지만, 전망대 입장료와 미지의 라멘탐험으로 이미 출혈이 상당하고

몰려드는 인파만큼은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어서 그냥 도망치기로 결정.

 

만일 친구나 지인들과 함께 무리를 이루어서 왔다면 이런 불평없이 얼마든지 인파에 치여가며

평범한 관광을 즐기겠지만, 홀로 떠도는 여행에서는 스스로의 기분에 반하는 행동은 절대로 하고싶지 않다.

 

 

 

날씨는 화창하기 그지없어서 걷다보면 땀도 슬쩍 흐를 정도다.

영하의 한파속을 헤매는 서울에서 왔으니 체감적으로 더욱 덥게 느껴지기도 하고.

느긋하게 25분쯤 걸으니 다시 스미다가와 강을 넘어서, 어제 신나게 셔터누른 장소로 돌아온다.

 

역시 제일 간편하게 담을 수 있는 위치는 이곳이라는 생각. 옆에 똥덩어리와 아사히 빌딩도 볼만한 녀석들이고.

도착을 늦게 하는 바람에 첫날 사진이 전부 해질무렵이었는데, 역시 대낮에 사진 찍으니 거리낄게 없어서 좋다.

 

 

 

이곳 촬영포인트 주변에서는 노인 두명이 작은 음악회를 열고 있다.

한 사람은 구슬픈 하모니카를, 한 사람은 점잖게 한 곡조 뽑아내고 있는데

옛날 노래들이라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건 사카모토 큐의 '위를 보며 걷자' (上を向いて歩こう) 정도밖에 없었다.

 

이 곡은 일본인들에게는 국민가요로 모르는 사람이 없고

아시아 노래중에서는 최초로 1963년 빌보드차트 1위를 한 기록으로 유명하다.

재미있게도 해외에서는 제목 발음이 어려워서 '스키야키'로 알려진 그 곡.

 

'눈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위를 보며 걷자'는, 심금을 울리는 가사의 내용덕분에

안그래도 유명한 이 곡이 후쿠시마 대지진 이후로 어마어마한 반향과 함께 다시 대인기를 얻었다.

대지진 이후 TV CM에서 이 곡이 부드럽게 흘러나올때, 일본 국민들의 기분은 과연 어땠을까.

절망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곡의 분위기가 그토록 잘 어울릴수는 없었겠지만

조금 삐딱하게 본다면, 그렇게 생각하는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현재의 상황이 더욱 적나라게 느껴진다고 할까.

 

 

 

아사쿠사에서 아키하바라로 바로 가는 전철은 없기때문에

버스나 타고 가자고 정류장에서 기다리는데, 15분이나 기다리고나서야 깨달았다.

적혀있는 노선표를 자세히 보니 일요일엔 아키하바라 행 버스가 3~4시간에 한대씩 온다.

 

도쿄 한복판에서도 이런일이 벌어지는구나 싶어서 허탈한 마음과 함께 그냥 전철을 탄다.

갈아타면 요금도 비싸지만 버스 정류장에서 한대 얻어맞고 조금 체력이 빠진 상태라서 어쩔 수 없다.

오타쿠와 전자제품의 성지 아키하바라(秋葉原), 원래 이곳은 한국의 용산처럼 조그만 영세가게들이

수도없이 밀집해서 이루어낸 개미집과 같은 장소였는데, 지금은 거대 체인 요도바시 카메라가

어마어마한 크기의 매장을 역앞에 떡하니 건설하는 바람에 그 독특한 매력이 많이 퇴색되어 버렸다.

 

진짜 매니아들의 아키하바라는, 골목골목 구멍가게를 누비며 이 세상 어떤 전자부품이라도 구할 수 있었던

그런 시절의 모습을 가리키지만, 이제와서는 대기업의 천편일률적인 제품과

귀여운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뿌리는 페로몬에 이끌려 하악거리는 오타쿠들의 천국으로 그 모습을 바꾸었다.

 

하긴 나도 20년전 처음 도쿄에 갔을때는 무조건 아키바부터 달려가서 게임팩 사는데 열중했으니까.

지금도 그때 뭐 구입했는지 기억난다. 슈퍼패미콤이라는 가정용 게임기의 'FEDA' 라는 녀석.

난 왜 이런걸 이렇게 오랫동안 잘 기억하는지 모르겠네...

 

게임팩 구입후엔 친구 강군과 함께 버추어 파이터 하려고 종횡무진하던 추억이 서린 곳이다.

그때 버추어 파이터 2가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라 게임센터에서도 요금이 2배 비싼 200엔이었지만

태어나서 경험해본적 없는 폴리곤 덩어리들의 환상과도 같은 향연에 돈을 마구 쏟아부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보니 그 게임센터 아직도 영업중이긴 하다. 내부 구조는 많이 바뀐것 같더라만.

 

여담으로, 원래 이 지역의 한자명을 읽으면 '아키바하라'가 되는데

공무원이 한자를 잘못 읽어서 '아키하바라' 라는 전철명이 붙어버린 황당한 역사가 서린 곳이다.

이게 또 재미있는게, 요즘엔 다들 이름을 생략시켜서 '아키바' 라고 읽는데 이게 사실은 제대로 된 이름이었다는 것.

 

 

 

스카이트리에서 이곳으로 온 이유는 이것저것 많은데, 주된 목표는 역시 부탁받은 선물 구입이다.

요도바시 아키바는 단순히 전자제품이나 카메라만 파는게 아니라

백화점이라도 해도 될만큼 없는게 없는 가게라서, 의류같은 패션 상품이 아닌 이상 어지간한건 다 구할 수 있다.

 

여기서 구입할건 쿄세라의 세라믹 부엌칼. 가볍고 오래가고 잡내가 없다는 장점이 있다고 한다.

한국에도 팔긴 하지만, 최상급 프리미엄 브랜드는 팔지 않고 한단계 낮은 등급의 제품만 있어서

도쿄 가는김에 좋은거 사가기로 했다. 훗날 돌아와서 한번 써보니 확실히 좋긴 하더라.

 

칼 하나에 10만원이나 하는걸 보고 덜덜 떨었지만, 막상 돌아와보니 독일제 부엌칼은 하나에 몇십만원씩 한다.

정식 교육을 받은 셰프들의 칼이야 수백만원짜리도 전혀 비싸지 않은 레벨이긴 한데

가정집 주방에서 대체 뭘 만드시길래 수십만원제 칼이 필요한지까지는 내가 알수있는 범위가 아니다.

쿄세라의 세라믹 칼은 어찌됐든 무지하게 가볍고 절삭력이 좋아서 어느정도 돈값을 하겠지.

 

요도바시 안에는 서점도 있어서 부탁받은 유아용 동화책 몇권과 내가 읽을책 몇권을 산다.

계산은 같이 했다. 지인의 부탁이 아니고 엄니를 통한 2중 부탁이었던 터라 이 정도 수고비는 챙겨도 되겠지.

읽고싶은 책은 산더미같은데, 중고책방이라도 가야지 신품서점에서 구매하기에는 너무 비싸다.

물론 새 책을 산 이유는 내가 돈내는거 아니니까. 그래도 항상 정도는 지킨다.

 

이러저러해서 참 인연이 깊은 아키바인데, 역을 나서는 순간 굉장한 상실감이 밀려온다.

아키하바라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던 라디오회관(ラジオ会館)이 건물채로 사라지고 없었던 것.

지금은 새 건물을 짓기 위해 각종 장비들이 가동되고 있다.

 

라디오회관은 아키하바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층 건물중 하나로, 그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초기엔 라디오 트랜지스터 등을 파는 작은 가게들의 집합체였다. 아키하바라라는 장소와 동시에 태어난 역사의 산 증인.

 

 

 

2010년 자전거 여행때 담은 라디오회관의 모습.

노란색 네온싸인이 걸려있는 건물이다. '세계의 라디오회관 아키하바라' 라는 촌티나는 제목의 전광판.

 

2000년 이후로야 아키바 대부분이 그렇듯 전자부품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가전제품, 애니메이션, 만화, 피규어 등으로 채워졌지만

이게 1953년에 지어진 건물이라, 아무리 개축을 거듭해도 결국은 노화를 피할 수 없어서

전면 해체후 재시공이라는 처방을 받고야 말았다. 물론 해체 한참 전부터 이곳에 입주해있던 회사들은

슬금슬금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고 있었지만, 새 건물이 들어서는 즉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거라고.

 

아키바의 터줏대감 같은 건물이라서, 이 건물이 해체되던 때엔 아쉬워하며 사진을 찍는 오덕들이 많았다.

본인도 만화책 살때는 반드시 이곳 라디오회관의 'K-BOOKS'를 이용했던만큼 감회가 새롭기도 했고.

왜 거기서 만화책을 샀느냐 하면, 특이하게도 저 서점이 부스 두개로 나뉘어

한쪽은 비닐 안벗긴 새책을 팔고 다른 부스에서는 중고책을 판매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중고책은 보존상태가 상당히 좋아서, 일단 신품부스에서 신나게 구경하고 구입할 책을 정한 후

중고부스에서 그 책을 찾아 구입하면 금액을 상당히 절약할 수 있었다.

물론 중고품이 없는 책은 어쩔 수 없이 신품을 구매할 수밖에 없었지만.

 

여담이지만 K-BOOKS 는 그것 외에 어른용(!) 만화책도 샘플본을 많이 비치해서, 구입하지 않고도 읽어볼 수 있다는 크나큰 장점이 있었다.

세계 어디든 어른용일수록 구입전까지 내용물 못보도록 철저하게 막는게 일반적인데, 그걸 과감히 깨트린 영업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어른용 만화책은 그림 수준이 좀 떨어져서 본인은 별 관심이 없다?

 

 

 

친구가 닌텐도 게임소프트를 부탁해서 그것도 찾아봐야 하는데

일단 그걸 오늘 구입할 생각은 없다. 게임소프트는 중고유무와 가격대 등을 넓게 조사해 봐야

쓸데없이 돈 더주고 구입하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조사하는데 하루, 구입하는데 하루 정도는 투자해야 한다.

 

얼핏 둘러본 바로는 그게 굉장히 인기있는 신작게임이라서 어지간한 곳에 중고물품이 없다.

이렇게 되면 다음에 구입할때 이야기가 좀 편해지긴 한다. 신품가격 제일 저렴한 곳만 골라가면 되니까.

 

20년전의 전자상가 천국은 이미 사라졌지만, 여전히 외국인들에게는 너무나 신기한 곳이라서 지루하지 않다.

세상 어디에 이렇게 길거리 전체가 게임, 애니메이션, 만화가게등으로 가득찬 곳이 있겠는가.

굳이 이런 분야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이 길거리는 충분한 문화충격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저기 SEGA의 빨간 건물은 20년전 친구 강군과 내가 버추어 파이터 하려고 뻔질나게 들락날락한 곳.

그거 말고, 자기 사진을 찍어서 모니터에 그걸 띄워놓고 펀치머신으로 두들기면 얼굴이 찌그러지는 게임도 있었다.

내가 강군하고 원수지간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서로의 얼굴을 묵사발로 만들며 배를 잡고 뒹굴었던 기억이 난다.

 

 

 

아키하바라라는 매니아 지향 상점가가 이렇게 유지된다는건 사실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화면 하단부의 사람이 보인다면, 저 소프맙 건물이 어느정도 규모인지 알 수 있을 터.

 

아키바에는 이런 건물이 수십채씩 거리 전체에 줄지어 늘어서 있다.

건물에 걸린 거대한 그림들은, 얼핏보면 그냥 애니메이션이겠지 싶어도

사실은 아이들이 만져서는 안되는 어른들(!!)의 게임 광고다.

 

어른용 게임이다보니 수요는 적고 제작은 힘들어서, 게임 하나당 10만원이 넘는 고가를 자랑해도

열심히 구입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보니 이렇게 오늘도 아키바는 돌아가고 있는 것.

 

실제로 인파를 뚫고 성인코너로 들어가보면 그건 그거대로 훌륭한 타국문화체험의 현장이다.

한국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풍경이 펼쳐지니, 성인물에 관심이 없어도 그 분위기를 즐기는것 자체는 충분히 관광이라고 할 만하다.

사실 항상 이런곳 안에 들어가서 어슬렁거릴때는, 이정도 극단적인 문화적 괴리를 생산하는 배경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할 때가 대부분.

물론 혈기왕성한 중고딩때 이런거 체험해보라는 뜻은 아니고. 어른이라면 이 오묘한 분위기 자체가 재미있는 경험이 될것이다.

 

여성분들은 또 여성분을 위한 그렇고 그런 코너가 있으니 그런데 가보는것도 좋고.

 

 

 

부탁받은 책 몇권 사고, 그냥 선물도 책으로 사고, 내가 읽을 책도 사고 하니 가방이 미어터진다.

이미 카메라는 들어갈 공간이 없어서 어깨에 매고 있는데, 이곳 가게들은 공간이 매우 협소해서

어깨에 카메라 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통행에 방해가 될 정도. 굉장히 조심해가며 이동하다보니 진이 빠진다.

 

오늘 책 구입비용만 거의 10만원쯤 나왔는데, 그중에 내가 산건 5만원쯤 된다.

어쨌든 도쿄까지 왔으니 내가 만족하게 싸들고 돌아갈만한 녀석은 책밖에 없고.

 

아키바는 정말 올때마다 느끼지만, 한산할 때가 없는 곳이다.

이쯤 되면 이미 매니아들만의 전유물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실제로 일본 최대의 아마추어 동인작가전인 코믹마켓에는 3일간 70만명이라는 믿을 수 없는 인파가 모인다.

이 3일간 도쿄 시내의 모든 숙소가 마비될 정도니까, 직접 보지않으면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는 곳.

 

자전거 여행때 이것도 경험이다 싶어서 여름 코믹마켓에 잠깐 들른적이 있는데

인간이 이럴수도 있구나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이 사진 퍼와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이런 느낌이다.

 

 

 

아키바에서 이것저것 부탁받은 물건 구입하고 가방이 빵빵해지니 어깨와 발이 뻐근해진다.

아침에 먹은 라멘덕분에 배는 고프지 않고, 이럴때 유용한 녀석은 조금 먹고 시간 오래 때울수 있는 녀석.

쥐꼬리만한 용량을 자랑하는 모스버거에서 한숨 돌린다. 하지만 여기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10분쯤 기다렸다.

 

좋은 재료를 쓰고, 주문받은 후에 만들어서 바로 내놓기 때문에 맛이 괜찮은 모스버거지만

가격대비 크기가 정말 눈물날 정도로 작은 녀석이라, 이걸로 배 채울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다.

모스버거 특유의 양파향 나는 토마토소스는, 그래도 햄버거 소스중에서는 인스턴트 냄새가 덜 나는 편이어서

깔끔한 치즈와 함께 베어물면 나쁘지 않은 맛이다. 어디까지나 일반 패스트푸드점과의 비교우위일 뿐이지만.

 

모스버거에 들어가서 제일 마음에 드는 녀석은 언제나 음료수 컵에 그려져있는 그림.

사진은 있지만 이곳에 올리지 않는다. 혹시 갈일 있으면 음료수 컵 그림을 잘 살펴보시길.

모스버거의 정체성이랄까, 가장 모스버거 답다는 느낌이 들어서 참 친근감을 느끼는 녀석이다.

 

버거는 그냥 자릿세 대신이라고 생각하고, 피로를 풀며 메모장을 꺼내서 펜을 깨작거린다.

 

 

오늘 루트는 생각하면 참 단순하고 대강대강인듯 하다. 스카이트리와 아키하바라 두 군데밖에 둘러보지 않았다.

시간이 아까운 관광객들에게는 너무 낭비가 심한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사실 8시 반에 숙소를 나와서 라멘 먹을때 20분간 앉은것 빼고는 8시간 넘게 계속 걸어다닌 셈이라서

모스버거에 앉았을 때 몸이 밑으로 쑤욱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지금부터 힘내서 야경보기 좋은곳을 찾아다니면 너댓시간은 더 관광을 즐길 수 있겠는데

그런 식의 강행군은 오직 함께 가는 일행이 있을때만 시도하는 성격이다.

 

자기 물품보다 남한테 부탁받은 물품을 구입하는게 더 피곤한듯 하다.

논리적인 이유가 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되게 피곤하다. 이 안에 든게 전부 내가 갖고싶은 것들이었다면 아직 팔팔할텐데.

 

밖으로 나오니 해가 슬슬 지고있다. 어느센가 아키바의 명물로 자리잡은 돈키호테 빌딩의 AKB48 극장이 앞에 보인다.

AKB48 은, 아마 나보다 더 잘 아는 한국인들도 많을거라 생각하는데... 요즘 일본 연예계의 최강 아이돌 그룹이라고 보면 될듯.

한국의 최강 아이돌은 소녀시대인가? 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애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처음엔 무명이었던 그 그룹이 꾸준히 공연하던 곳이 이 아키바의 극장. 지금은 국민아이돌로 상승했기 때문에

AKB 전용 극장마저 생겼고, 조그마한 이벤트라도 있는 날엔 저 앞에 팬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물론 내가 그 아이돌들 이름이나 얼굴을 구별할 수 있는건 아니지만, 오랜 일본여행끝에 하나 몸에 익힌건 있다.

'에이케이비 사십팔'이 아니라 '에이케이비 포티에잇'이라고 읽는단다.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에 도착해서 가방을 어깨에서 내려놓으니 비로소 해방감이 느껴진다.

저녁 6시쯤의 이른 귀가라서, 오늘은 느긋하게 피로를 풀 수 있을듯 하다.

할일이 없어서 소중한 여행중에 이렇게 빨리 돌아왔냐고 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별로 할일이 없기도 하고.

사실 내일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번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가 있기 때문에

조금의 문제도 생기게 하지 않기 위해서 휴식을 취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뜨끈하게 목욕 끝내고 편의점에서 사온 간식거리를 씹으면서 TV 보다가 11시쯤 잠자리에 든다.

TV가 예전에 비해 좀 심심하다는 생각이 드는건 왜일까.

 

 

도시의 진짜 얼굴은 야경이라는 세간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특히 자연공원을 감상할 때처럼 멀리 떨어져서 그 대략적인 모습을 바라볼 경우에.

낮의 콘크리트 도시는 생명의 흔적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무덤이지만

저녁이후부터 슬쩍슬쩍 들어오기 시작하는 불빛을 보면 그래도 사람사는 곳이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인파를 피해 아침일찍 찾아오는 나같은 관광객을 위해 전망대 위에는 꽤나 큼지막한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어

이곳의 야경을 대충 맛이라도 보여주려고 노력중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아마 저녁에 한번 더 올라오고 싶겠지.

 

이번 여행에서는 더 이상 이곳을 찾지 않을 생각이지만, 다음에 도쿄에 오게 된다면 미리 예약하고 저녁에 올라가볼 예정이다.

스카이트리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야경 정도 되어야만 돈값을 할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같은날 한국은 굉장한 한파에 폭설에 난리가 난듯 한데 도쿄는 위도가 좀 낮아서 화창하고 따뜻한 날이 계속된다.

여기서는 이것도 춥다고 기상예보에서 찡찡거리기는 하던데, 당시 서울은 영하 9도, 도쿄는 영상 13도였다.

 

물론 서울쪽을 급습한 한랭전선이 일본 중북부까지는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홋카이도 등에서는 폭설로 항공시설이 마비되기도 했다.

도쿄는 어쨌든 따뜻해서, 도시의 미세먼지가 강한 햇빛에 산란되어 아지랑이같은 현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

사진을 유심히 보면 빌딩들의 선이 꾸물거리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데, 처음엔 카메라 불량인가 싶었지만 알고보니 아지랑이.

 

사막의 그것과 달리 덥다고는 할수없었지만, 시계가 넓고 유난히 맑았던 하늘에 도시의 미세먼지가 만들어내는 자연과 인류의 합작품.

 

 

 

시간이 지날수록 전망대에 사람이 많아진다.

이미 상당수의 인원은 1천엔 추가지불하면 올라갈 수 있는 100m 위의 전망대에 줄을 서 있다.

350m 에서 바라보는 풍경과 450m 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어느정도의 차이가 있을런지.

 

만약 640m 최정상에 올라갈 수 있다면야 기꺼이 추가요금을 지불할 의향이 있지만, 1m 올라가는데 10엔이라는 등식에는 따르기 힘들다.

전망대가 '그들 나름대로는' 미어터지지 않도록 내부 인원을 꾸준히 체크해서 지상 엘리베이터를 가동시키고 있지만

개장 직후 방문했을때보다는 확실히 밀도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 위층으로 올라가지 않는 이상 슬슬 발을 뺄 때가 된듯 하다.

 

겨울이라 늦은 아침햇살의 역광이 만들어내는 빛의 향연은

먼지에 뒤덮힌 회색빛의 도시마저도 잠깐동안이지만 친근감을 느끼게 만드는 힘이 있다.

 

 

 

산으로 치면 정말 별것아닌 언덕이나 다름없는 높이인데

산행으로 거치는 모든 요소들을 싹 빼먹어 버리고, 홀로 우뚝 서있는 타워에서 바라보는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다.

인공물이 가지는 특징이란, 풍경의 우열을 제외하면 전 세계에서도 특정 몇 군데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모습을

쉽게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스카이트리 전망대의 의미를 좀 더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도쿄라는 도시에 화장을 좀 더 시켜야 할것 같긴 하지만.

 

 

 

여전히 스카이트리의 그림자가 멋진 임팩트를 만들어준다.

유심히 내려다보니 학교로 보이는 건물에도 그림자가 드리우는 듯 한데

학생들에게는 재미있는 시간이 될 수도 있겠고, 전력회사에게는 그닥 유쾌한 광경이 아닐 듯.

 

전기를 가동하면 전력회사가 돈을 버는거 아니냐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도쿄는 지금 돈주고도 전기를 추가 생산할 수 없다. 무조건 아껴야만 하는 상태.

 

 

 

렌즈별로 한 바퀴씩, 두 바퀴를 돌아보고 내려간다.

바로 하강 엘리베이터를 타는게 아니라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층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있다.

관광객 분산을 위한 목적도 있고, 추가적인 수입을 기대하는 목적도 있다.

 

한층 밑에는 창문가에서 경치 구경할 수 있는 공간이 없고, 기념품점과 까페 정도가 영업중.

카톨릭과는 전혀 관계없는 나라지만 어쨌든 12월이 되면 대대적인 홍보가 일어나는데

스카이트리에도 벌써 마스코트가 생긴건지, 산타옷 입고있는 캐릭터가 보인다.

 

이 타워의 이름이 스카이트리다 보니, 트리에 제대로 조명만 설치하면 세계에서 가장 큰 크리스마스 트리가 되겠는데

전력부족으로 절전중이라서, 은은한 빛깔 이상으로 화려해지기는 어려운 듯 하다.

 

 

 

처음엔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쯤되니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무리를 이루어 돌아다니고 있다.

기념품점에도 학생들의 행렬이 늘어서 있는데, 이곳 기념품점은 아사쿠사의 그것과 달리 물건의 퀄리티가 예사롭지 않다.

 

상당한 요금과 긴 대기행렬을 뚫고 올라온 전망대이다 보니

이곳에서만 살 수 있다는 한정상품이 줄지어 서 있고, 그 한정상품은 고가일수록 가치가 있어보일 터.

아동용 볼펜이나 수첩, 손수건 같은 그럭저럭 저렴한 녀석들도 있지만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스카이트리 모형같은 수십만원짜리 기념품도 여기저기 보인다.

 

이곳에는 까페도 있는데, 형태상 전망대 층보다 더 작은 규모의 이곳에 이런 까페를 집어넣으니

아무래도 좀 복잡해 보인다는 인상이 든다. 묘하게 펜스를 쳐 놔서, 커피를 구입한 사람만

저 앞으로 지나가서 경치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해 놓은듯한 분위기가 미세하게 신경을 긁는다.

 

뭐, 그냥 스윽 지나가서 창가에 들어가도 괜찮을것 같지만, 제품 주문장소와

음료 받는 장소의 위치를 보면, 아무래도 흑심이 없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이러나저러나, 야경도 아닌 도쿄 시내를 쳐다보면서 커피 마실만큼 매마르진 않았다.

 

 

 

고층 타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씨 스루 바닥.

토쿄타워에서도 볼 수 있었고, 별 감흥은 없었다.

 

이곳 스카이트리는 더더욱 감흥이 없을 수 밖에 없는것이

이 정도 높이라면 이미 사람의 높이감각은 그 의미를 상실하는게 당연하기 때문.

외부와 완전히 격리되어 바람조차 느낄 수 없는 이 공간에서

밑의 개미같은 광경 조금 보인다고 겁나서 쉬야라도 해 버리는 사람이 있을것 같지는 않다.

 

학생들 중에는 '꺄~ 무서워' 하면서 우물쭈물거리는 부류도 있던데

지능이 높은 인간이라는 종족이 가질 수 있는 풍부한 상상력이 무의식중에 작용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혹시나 싶어서 윈도우 위에서 바라보며 찍은 사진을 올려보는데

아무리 사진을 확대해도, 설사 저 자리에 서 있다고 해도 별로 무섭진 않을 것이다.

 

측면에 스카이트리의 기둥 일부가 보이는데, 이것만이 유일하게 현실감을 느끼게 해주는 정도랄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현실세계로 내려온다.

별 생각없이 일찍 나선 스카이트리 방문길이었는데, 지금와서 보니 정말 일찍오길 잘했다는 생각.

다시 올라가려면 최소 40~50분은 기다려야 할 법한 인파가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스카이트리의 마스코트인듯 한데, 세계적인 인지도를 목표로 하는건지 의외로 일본색이 별로 들어가지 않은 느낌이다.

12월 초순인 지금부터도 TV 광고나 버라이어티 쇼 등에서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끊임이 없는데

한국도 그렇긴 하지만 참 재미있는 현상이다. 뭘 그리 즐거워하는걸까.

 

기업들에게는 이유야 어쨌든 매상이 폭등하는 시기니, 거대 체인점들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방송내 광고가 허용되는 수준이 아니라, 1시간 혹은 2시간짜리 방송 전체를 한 기업이 스폰서 할수 있는 일본이라서

황금시간대 방송을 보면 내가 지금 버라이어티 쇼를 보고 있는건지 1시간짜리 광고방송 보고 있는건지 햇갈릴 정도.

 

물론 그런 방송도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굉장히 준수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주로 음식관련 방송이 많아서 보고있으면 즐겁다)

그냥 보고 즐기기엔 나쁘지 않다. 거기 속아넘어가서 별것아닌 대량생산품을 굉장히 맛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문제지.

뭐, 실제로 대량생산품이라도 일본의 먹거리들은 일정 이상의 품질은 통과하니 아예 맛없는건 아니다.

일본 편의점의 도시락은 그 돈주고 충분히 먹을만 하다는 느낌이니까.

한국 편의점의 도시락은... 자전거 여행 하는중이 아니라면 공짜로 줘도 안먹는다.

 

 

 

전망대에서 한층 내려오면 조그만 기념품점.

그리고 지상으로 내려오면 다시 나타나는 커다란 기념품점.

학생들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액면가로는 나하고 나이를 구분하기 힘든 학생들도 있긴 한데.

 

일본은 여행 다녀올때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여행 선물을 돌리는게 예의의 일종으로 인식되어있기 때문에

학생들 수학여행때는 부모들이 선물용 용돈을 따로 챙겨주는게 일반적이다.

한국처럼 그냥 생각나면 사가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관계 서먹해지기 싫은 레벨이라면 무조건 줘야 하는 느낌.

 

덕분에 기념품점이 활성화되고, 좋은 품질의 아이디어 상품들이 계속 빛을 발하게 되는 좋은점도 있긴 하다.

일본, 특히 도쿄정도의 비정상적인 거대도시들은 활발한 소비활동이 없이는 절대로 유지될 수 없다.

아무리 불경기라도 워낙 저축량이 빵빵한 일본의 서민경제라서 아직까지는 눈에 띄지 않고

재미있게도 2012년부터 내수경제가 확연히 살아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어서, 이곳 역시 활기가 넘치고 있는데

이는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상태. 마지막 안간힘인지 정말 다시 살아나는 전조인지.

 

후쿠시마 대지진과 원전사고, 한국 기업의 군림과 자국 전자회사의 몰락 등 최악의 위기감이

이런 활발한 소비활동의 단초가 된 것만은 확실한 사실인데, 이게 장기적으로 어떤 효과를 보여줄지에 대해서는

예견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런 현상이 일어난 개별적 원인 모두가 세계 역사상 일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

 

적어도 지금보다는 가난한 나라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살아있을 동안에 한국이 일본의 GDP 를 뛰어넘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부정적, 정도라는 레벨이랄까.

 

 

 

스카이트리를 나서자 다시 한번 깨닫는다.

전망대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보다, 밑에서 스카이트리 쳐다보는게 더 재미있다는 사실을.

 

위에서 바라보는 도시 풍경은 먼지로 자욱하지만

밑에서 바라보는 스카이트리는 화창한 하늘을 배경으로 매끄러운 인공물의 매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기술이 워낙 발전하다보니, 에펠탑이나 도쿄타워처럼 다리 4개로 지탱되는게 아니라

카메라의 삼각대처럼 3개의 기둥으로 634m 나 되는 녀석이 지탱되고 있다.

기술적으로 진도 8.0 의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예전같으면 한번 믿어보겠지만, 후쿠시마 대지진 이후 인간의 기술력이란건 아직 멀었구나 싶다.

 

매장 한달도 되지 않아서 강풍때문에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사고가 두 번이나 일어났으니.

 

 

 

어찌됐든 인류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상급의 기술력으로 제작된 녀석이란 건 분명한 사실.

옆 빌딩에 비치는 스카이트리의 모습에서, SF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무언가를 느껴보기도 한다.

 

난시청 해소라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송출용 타워이긴 한데

완공 후의 행보는 보면, 이미 주객은 전도된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관광객이 모인다.

이런 랜드마크의 조그만 장점이라면 역시, 돈내고 올라가지 않아도 주변에서 얼마든지 감상하며 사진 찍을수 있다는 점이겠지.

 

 

 

본인은 어디까지나 카메라들고 재미있는 모습이나 찾아다니는 평범한 관광객이니

이렇게 담은 사진은 사실 큰 감흥도 없고 별로 잘 찍은 녀석들도 아니지만

이 근처에서는 스카이트리가 완공되기 몇년 전부터 계속 이녀석의 모습을 꾸준히 촬영해오는 사진작가도 있다.

 

언젠가 뉴스에도 등장했는데, 어디서 찍으면 어떤 모습이 나온다는걸 속속들이 알고 있는 스카이트리의 프로.

그 사람의 촬영모습을 보고 있으니 역시 제대로 사진 담으려면 준비도 철저해야 한다는 사실을 세삼 깨달았다.

 

이 스카이트리는 어쨌든 워낙 크고 도심 복판에 세워진 녀석이라, 모습 전체를 방해없이 담을 수 있는 장소가 의외로 많지 않다.

장소가 특정되어야 한다면 렌즈의 화각만으로 자신이 원하는 결과물을 담아내는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고.

전망대에서 내려와 하염없이 주위를 멤돌며 셔터를 누르고 있는 나로서도

원하는 그 느낌을 살리려면 삼각대와 TS 렌즈정도는 있어야 할것 같다. 원하는걸 얻기 위해서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겠지.

 

 

 

전망대에서 나와서 바로 찍은 사진에는 위치상 450m 전망대가 보이지 않았다.

소라마치로 가려고 걸어가는 사이에 사람들이 자꾸 뒤를 돌아보며 휴대폰을 꺼내길래

뭔가 싶어서 돌아봤더니, 거리가 멀어질수록 450m 전망대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1천엔과 기다림이 아까워서 올라가진 않았지만, 그 형태가 독특하다는 것은 밖에서도 잘 보인다.

복층구조로 되어있는 450m 전망대는 타원형으로 유리 튜브같은 길을 따라 걸으며 360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350m 쪽 윈도우가 생각보다 좀 더러워서, 야경 찍을때는 450m 쪽이 좋으려나 싶은 생각도 든다.

하긴, 밖에서 창문청소할 수 있는 높이도 아니고 기대가 너무 큰 쪽이 잘못일지도.

 

 

 

스카이트리 옆의 거대 쇼핑몰 소라마치(空町)를 둘러보려고 이동하는데

문이 닫혀있는걸보고 잠시 당황했다. 알아보니 지상 7층까지는 오전 10시에 개장하고

30, 31층의 스카이트리 플로어는 오전 11시에 개장한다는 것. 8시 반쯤 전망대를 올라가서 맘껏 구경했는데

아직 10시까지는 15분쯤 남아있다. 아무것도 모르고 찾아온 것 치고는 굉장히 효율적으로 구경한 셈.

 

지금부터 스카이트리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전망대 올라가는데도 많이 기다려야 하고

내려와도 소라마치의 인파에 휩쓸려 다녀야 할것이다. 새삼 생각하지만 참 다행.

야경 촬영할때는 미리 예약하는것 외엔 도저히 방법이 없으니, 다음엔 주의해야겠지만.

 

소라마치 내부는 아니고, 버스 승강장으로 가는 길 옆에 지브리 기념품점인 '도토리 공화국'이 있길래

저기나 들어가볼까 했지만, 이곳 역시 10시부터 개장이라서 실패.

눈에 반짝반짝 독기를 품은 아이들이 부모의 손을 단단히 잡고 이 성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서

설사 개장하더라도 내가 들어가 구경할만한 공간은 없을것 같다. 지브리는 아이들에게 맡기자.

 

 

 

현재 도쿄 시내에서 사진찍는 사람이 제일 많이 보이는 장소라면 단연 이곳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것 같다.

제대로 된 카메라를 들고다니는 사람도 많거니와, 정말 이곳에 오면 누구나 휴대폰 꺼내들고 셔터 누르기 바쁘다.

 

안으로 뜯어보면 나름 볼만하지만, 어쨌든 덩치에 비해서 좀 심심한 도시인 도쿄에

이렇게 세계적으로도 특징적인 녀석이 턱하니 들어섰으니 그 호기심이야 두말할 것 없겠지.

아침부터 쫓기는 마음으로 후다닥 둘러보고 빠져나왔지만, 그만큼 이곳 관광객이 너무나도 많아서

나같은 사람한테는 정말 고역이다. 그래도 호기심으로 한번 보려고 찾아왔는데 성공적이라서 나름 뿌듯한 기분.

 

 

 

 

잠을 일찍 잔 덕인지, 알람 맞춰놓은 7시 반에 일어나 조식 챙겨먹고 방으로 돌아왔다.

어제 저녁 뉴스에서도 체크했지만, 다시 한번 아침뉴스에서 날씨를 체크.

아주아주 맑고 올 겨울들어 가장 화창한 날씨가 될거란다.

 

이렇게 된 이상 목적없던 도쿄 둘째날은 일단 스카이트리쪽으로 결정.

물론 올라갈거라는 생각은 숙소를 나설때까지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침 일찍 출발이라 대기열이 적을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 날은 토요일이었으니까.

 

어젯밤 잠깐 스카이트리 다녀온 사람들 포스팅을 찾아보니, 예약하지 않으면 대충 1시간보다 더 걸린다고 하더군.

순번표를 받아놓고 밖에서 한참 돌아다니다가 겨우 티켓을 받고, 또 거기서 몇십분 기다려야 승강기를 탈 수 있다고 한다.

그럴 것 같으면 올라갈 생각은 꿈도 꾸지 않지만, 일단 날씨가 좋으니 근처에서 사진이라도 찍어볼까 싶어서 출발.

 

전망대 못가더라도 지상의 쇼핑몰인 소라마치(空町)역시 볼거리가 많으니 가보라고 하는 블로거들의 정보도 있으니

가까이서 스카이트리 사진이나 실컷 찍고, 소라마치에서 먹을거나 좀 먹으며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한다.

어제의 아사쿠사까지 터벅터벅 걸어서 스카이트리행 전철을 탔는데, 막상 타보니 거리가 너무 짧다.

 

블로거들은 대부분 생각보다 거리가 머니 걸어가지말고 전철 타라고 포스팅을 했던데

아무래도 기준을 잘못 잡은듯 하다. 이 정도 거리면 내 기준으로 식사후 잠깐 산책나가는 거리일 뿐.

서울서 사하라 멤버 나침반님 만나면 보통 지하철 너댓코스 정도의 거리는 걸어다는게 일상이라

이 정도 거리라면 38도쯤 되는 한여름 아래서도 음료수 한병으로 충분하다. 전철비가 좀 아까웠다.

 

물론 전철안에서 서서히 그 위용을 드러내는 스카이트리의 모습은, 어제 스미다가와 강을 사이에 두고 보던 것과

상상도 못할 정도의 차이가 있어서, 전철 승객들이 우르르 창가로 몰려가서 사진 찍어대는 풍경이 연출된다.

 

원래 스카이트리가 있던 지역은 토부 철도의 화물창고로 사용되던 공터였는데

사실상 도쿄 부근에서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던 부지나 다름없었으니, 스카이트리는 자연스레 이쪽으로 오게 되었다.

이제는 역 이름도 스카이트리 역으로 바꾸고, 근심과 두려움이 가득한 도쿄를 살려보려는 최후의 노력을 쏟고 있는 중.

 

역에서 내리니 육중한 모습의 스카이트리가 뿌리부터 그 모습을 드러낸다.

수백미터 떨어진 곳과는 역시 느낌히 달랐다. 사람이 이런걸 만들 수 있구나 싶은 생각.

겨울이라 해가 낮게 뜨니, 꼭대기쪽엔 햇빛이 걸려서 그림자가 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인공적인 볼거리로서는 참 여러가지 생각을 들게 만드는 풍경.

 

 

 

매표소쪽으로 가 보니, 운이 좋다고 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손님이 모여들기 전이라서

15분만 기다리면 전망대로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이런 기회를 놔두고 흥미없다고 돌아오는건 아무리 나라도 좀.

 

하지만 입장료가 2천엔이나 하기 때문에 가슴이 아픈건 어쩔 수 없다. 전망대 올라가는데 몇만원이나 내게 될줄은 몰랐다.

한시간이나 기다려서 바글바글한 전망대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는 현실에서

돈이 아깝다고 15분이라는 시간의 혜택을 놓치는건 아무래도 결단력이 필요하고, 난 좀 우유부단하기도 하다.

 

스카이트리 전망대에 올라가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놀라워하는 것은 엘리베이터의 속도.

무슨 기술을 적용한건진 모르겠지만, 350m 높이를 50초만에 올라간다. 일본에서 가장 빠른 엘리베이터라고 한다.

바깥풍경이 보이지는 않아도 LCD 화면에 올라가는 높이를 표시해 주는데, 숫자가 주르륵 올라가는걸 보면 놀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속도에 비해 귀가 멍해진다거나 하는 현상도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 엘리베이터와 전망대가 완전히 밀폐되어 있기 때문일까.

 

이 엘리베이터는 개장 한달만에 두 번이나 바람때문에 멈춰서는 바람에 언론에서 많이 까이기도 했다고.

 

어쨌든 순식간에 전망대에 도착하니, 무리하지 않아도 창문쪽에 붙어 사진찍을 수 있을만한 공간이 남아있다.

사람 많을때는 유리창쪽에 달라붙는것도 순서 기다려야 할 정도라는데 왠지 이득본것 같아서 기분은 좋다.

하지만 화창하기 그지없는 날씨라고 했는데, 350m 위에서 바라보는 도쿄의 모습은 뿌옇기 그지없다.

방금전 지표면에서 위를 올려다 봤을때는 꽤나 푸른 하늘이었는데, 역시 이 정도 규모의 도시가 가지는 숙명과 같은 것일런지.

 

 

 

여러 정황증거들을 봤을때, 오늘 이 시간에 스카이트리를 찾은건 매우 적절한 판단이었던 듯.

현재 도쿄 관광지중에서 가장 붐빈다는 스카이트리 전망대 안을, 인파 걱정없이 돌아다닐 수 있다는 건 큰 수확이다.

젊은층들은 휴대폰으로 사진찍는것에 비해,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SLR 이나 RF 를 들고 다니는 모습이 조금 독특하다.

 

그리고 그런만큼 장년층 관광객수가 절대수치로 따져도 젊은사람보다 더 많은듯 보이는것 역시 놀랍긴 하다.

여전히 소비활동의 주축을 담당하고 있고, 그럴만한 소득을 누렸던 세대이긴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몸을 움직여야 하는 여행이라는 관점에서 이렇게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것은 좀 부럽다.

 

 

 

이렇게 보니 정말 도시의 숲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넓긴 넓다.

그런데 웃기는 건, 도쿄도는 서울보다는 좀 넓어도 대구 면적보다 좁다는 것.

서울이나 대구처럼 주변에 산지가 없이 완전한 도시숲인데다가, 인구밀도가 워낙 높아서 체감적으로 서울이나 대구보다 더 넓어보인다.

 

이것은 도쿄도라는 행정구역과 실제로 사람들이 느끼는 도쿄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한국사람으로서는 도쿄와 별개의 이름이 붙은 주변도시들은 그냥 서울과 인천 정도의 차이겠지 싶겠지만

사실 거리상으로 인천의 관계와 그리 다르지 않은 요코하마의 경우 어디서부터가 도쿄이고 어디서부터가 요코하마인지 구별이 불가능하다.

이 스카이트리에서는 날씨가 좋으면 후지산까지 보이기 때문에, 사실상 이렇게 보아서는 어디까지가 도쿄인지 알 수 없는 것.

 

위 사진에서는 숨은그림찾기가 가능하다. 도쿄타워가 너무나도 초라하게 보인다.

전에도 언급했듯이 이곳 스미다구와 타이토구는 개발이 더딘 곳으로, 가까운쪽과 저 멀리 도쿄 중심부의 건물 모양만 봐도 금방 구분이 된다.

 

 

 

예전에 대구 우방타워에 올라서 찍은 사진을 포스팅한 적이 있는데

그것과 비교하면 스카이트리의 높이를 조금 실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제저녁 아사쿠사에서 바라본 아사히 똥덩어리와 스카이트리의 크기가 기억난다면

사진 중앙 하단부의 똥덩어리를 잘 찾아보는게 재미있을 듯. 이 정도나 차이가 나는 녀석이었다니.

 

우측의 수목이 우거진 부분이 아사쿠사 센소지.

 

 

 

도쿄 주민들이라면 내가 대구 우방타워에서 그랬던 것처럼

알고있는 건물이나 자기 집 찾아보는데 재미있는 시간을 즐길 수 있을듯 하다.

그런 면에서 고층 타워란 외부 관광객보다는 지역 주민들에게 더 재미있는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 아닌가?

 

확실히 350m 씩이나 되는 높이에서 도시를 바라보는 경험을 쉽게 할 수 있는건 아니지만

도쿄처럼 어디를 둘러봐도 인간의 흔적밖에 보이지 않는 이런 풍경은, 의미를 가지지 않은 외국인들에게는 좀 가벼운 느낌이다.

그리고 확실히 이 정도 높이에서 바라보면 고소공포증도 작용하지 않을 듯 하다.

너무 높다보니까 어딜 둘러봐도 무섭다는 감각이 생기지 않는다.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바라보는 느낌.

바람이라도 통하고 있다면 무섭겠지만, 그랬다가는 이 전망대에서 스펙타클 호러영화 한편 찍게 되겠지.

 

 

 

 

전망대에 오르기 전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진 생각이었지만

실제로 보게되니 이 녀석의 민폐를 어느정도 실감할 수 있다.

 

워낙 높은 녀석이고, 스미다구와 타이토구는 고층 빌딩이 그렇게 많지 않은고로

이 근처 주민들은 아무래도 하루의 일정 부분이 인공 그늘에 가려지는 현상을 감내해야 할 듯 하다.

 

시간에 따라 위치가 바뀔테니 피해가구를 특정하는것도 쉬운 일은 아닌데

일본인들의 성격상, 스카이트리가 이 지역에 가져다주는 이익을 고려해서 그냥 참고있는게 아닐까 상상해 본다.

다행이라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타워형태가 길쭉해서 그늘이 금방 지나가니 그렇게까지 불편하진 않을지도.

사실 한국의 대단지 아파트들은 높이가 이렇게 높진 않아도 워낙 장막처럼 뻗어있어서

뒤편 주택이나 저층단지 세대들은 하루에 한두 시간밖에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 거기보단 낫다고 봐도 되겠지.

 

 

 

다양한 패턴을 보여주긴 하지만 역시 인공 구조물로 가득한 풍경은 금새 흥미가 떨어진다.

특히나, 자신과 연고가 없는 지역이다보니 뭘 유심히 찾아봐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래서 전망대에 별로 흥미가 없었던 것인데, 어쨌든 큰돈주고 올라왔으니 본전은 뽑아야지.

그나마 바로 밑을 흐르는 스미다가와 강이 만들어내는 곡선이, 이 흐릿한 도시의 허리선을 매력적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소위 말하는 보정용 코르셋같은 느낌이랄까. 스미다가와 강이 없으면 이곳 주변은 드럼통이나 마찬가지.

 

 

 

전망대 주위를 한바퀴 돌면서 주변을 뜯어살펴보니 예전 자전거 여행이 생각난다.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순 없지만, 지금 내 눈으로 관측 가능한 곳까지는 대충 하룻만에 주파가 가능한 지역.

 

그 당시는 하루하루 달리면서 이 굼벵이같은 속도로 어디까지 갈런지 지루해 한적도 많았는데

조금 떨어져서 보니, 무동력으로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거리는 그렇게까지 하찮은 건 아닌것 같다.

 

일반인은 올라갈 수 없는 타워의 최상층 634m 꼭대기에서, 관측사상 가장 가시거리가 넓은 날에 둘러본다고 해도

자전거로 삼일이면 주파할 수 있는 거리다.

 

스카이트리는 인류가 만든 두 번째로 높은 탑이지만, 사실은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지 않겠나 싶다.

 

 

 

도시란게 원래 야경이라도 빛나지 않으면 원채 심심한 색채와 모양으로 점철된 녀석이라

스카이트리 전망대에서 제일 그림이 잘나온다 싶은 건 스카이트리의 그림자라는 묘한 결과가 나와버린다.

 

도쿄 역시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어지럽게 개발된 도시라서

평소같으면 10분쯤 둘러보고 후다닥 내려와 버렸을 이런 전망대에서

그래도 30분 넘게 계속 돌아보며 이 끝없는 풍경이 가지는 매력을 찾아보려고 노력중이지만

난해한 수학공식과 같이 쉽게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어서 좀 골치가 아프다.

 

역시 해가 지고나서 전망대에 올라오면 그 풍경은 정말 은은한 아름다움을 발산할 것 같은데

저녁의 스카이트리가 훨씬 붐빈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기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는다.

 

티켓의 현장구매가 아니라, 인터넷에서 예약하면 좀 더 수월하게 입장이 가능하다는데

인터넷 예약은 최소 2주전에 신청해야 하기 때문에 이번 여행에서는 불가능.

스카이트리에서 보는 도쿄 야경이라고 하니, 그건 한번 구경할 가치가 있을듯 해서

다음에 도쿄 오게된다면 미리 저녁시간에 예약하고 올라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사쿠사 앞의 선착장에서 배를 타면 스미다가와 강을 타고 오다이바까지 갈 수 있다.

친구일행 데리고 딱 한번 타본적이 있는데, 외관이 아무리 멋져도 배는 역시 배일 뿐이라

크게 감흥은 없었던 기억이 난다. 볼것없는 전철보다는 풍경이 좋았지만, 오다비아로 갈때는

풍경 좋기로 유명한 무인열차 유리카모메를 타기 때문에 그것도 별 의미가 없다.

 

도쿄엔 한강만큼 폭이 넓고 유량이 풍부한 강은 없지만, 바다와 근접한 곳이다 보니

도시 사이사이를 파고드는 지류의 수는 훨씬 많은 편이다.

도쿄가 그나마 숨쉴 만한 여유가 있는것도 이런 강들이 허파 역할을 해 주고 있기 때문이었고.

하지만 원전 사고 이후, 바다를 타고 들어온 방사능 물질들이 이제는 강으로 역류에 들어오고 있어서

도쿄의 허파가 오히려 종양전이의 전초기지가 되고 있는 실정.

 

사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는거나 마찬가지니, 아무일도 없었던 듯이 살고있는 도쿄 주민들도

그렇게 스스로에게 최면이나 걸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일런지...

 

내 개인적인 입장이라면, 아마 도쿄전력 임원들을 시장바닥에서 돌맹이로 공개처형이나 하고 싶겠지만.

 

 

 

광각역할을 담당하는 35mm 렌즈로는 넓은 영역을 담을 수 있지만

지상에서 350m 나 떨어진 스카이트리 전망대에서 그렇게 담으니 이거나 저거나 너무 콩알처럼 보여서 재미가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사람들 밀도가 높아지는 듯 해서 약간 신경쓰이지만, 아직 렌즈를 교환할만한 여유는 있다.

망원렌즈로 담으니 저기 하늘아래 세상이 좀 더 사람냄세를 풍기는 듯 하다.

 

솔직히 작정하고 찾아보면 일본에서 관광지로 유명한 스팟들을 사진에 담을 수 있긴 한데

현지인도 아닌 내가 한국 블로그에서 관광 가이드 할것도 아니고, 그런거 골라담아서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처음 올라왔을때는 그래도 좀 마음이 두근두근하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30분쯤 지나자 그 기대감의 절반 정도는 '지불한 2천엔이 가지는 의미'로 채워지는 느낌이다.

내려가면 두번다시 올라오지 못하니, 최대한 구경할거 많이 지긋하게 구경하자는 의미로 빙글빙글 돌아본다.

 

 

센소지 앞에서 스카이트리를 촬영하는데 렌즈를 교환했기 때문에, 돌아갈때는 70-300mm 렌즈로 담아본다.

사실 조리개값이 어두워서 감도를 상당히 올리지 않으면 촬영이 힘들지만

이제는 어지간히 감도 올려도 관계없는 카메라를 들고 있기 때문에 신경쓰지않고 담는다.

물론 괜한 문제 일으키기는 싫어서 촛점은 사람이 아닌 쪽에 맞추고 있지만.

 

문득 본인한테는 닳아빠진 아사쿠사에 와서 이렇게 카메라 들고 돌아다니는건

아무래도 새 카메라 성능 테스트라는 이유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도쿄 관광하는게 아니라, 그냥 새 카메라를 사용해보고 싶었던 게 아닌가.

한국서는 낮에 카메라 들고 나가서 촬영한 시간이 없었다.

 

여행이라는 빌미로 카메라를 들고 나온게 제일 즐거운 듯 하다. 아사쿠사 구경이 아니라.

이렇게 되니 아사쿠사에게 좀 미안한 느낌도 들고.

 

 

 

관광 기념품으로서의 의미가 있나 싶을 정도의 잡동사니 천국 아사쿠사의 상점가는

아메바나 바이러스등이 가지는 강한 적응력과 같이, 장사거리가 될 만한 소재에 달라붙는 속도가 빠르다.

 

개장한지 반년밖에 되지 않은 스카이트리의 모형을 팔고 있다.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라 다양한 버전으로, 이걸 과연 사가는 사람이 있을까 할 정도의 거대한 녀석부터

야경을 흉내낸 반투명 야광모델, 액자, 심지어 스카이트리까지 운행하는 전철 모형까지.

사진엔 나오지 않았지만 헬로키티가 스카이트리를 안고 있는 인형모델까지 팔고 있다.

 

아마 스카이트리가 개장하기 전부터 발주를 넣어서 생산했던 모델이겠지.

기념품이란 건 사실 굉장히 좁은 수요층을 노리고 현존하지 않던 모델을 독자적으로 개발해야 하는 리스크가 큰 상품인데

스카이트리를 방문하는 관광객이 수십만을 넘는다고 해도, 그곳 기념품점이 아니라 이곳 아사쿠사에서

이 정도 규모의 스카이트리 기념품을 구입해갈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감이 잡히지 않는다.

 

과연 이런 모델들은 최소한의 수익성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일까.

수백년간 아사쿠사 앞에서 장사판을 벌여온 이 가게들이 생각없이 이런걸 만들었을리는 없다.

일반론으로 생각하는 기념품의 성공여부는 아무래도 실제와는 차이가 있는 듯 하다.

 

 

 

센소지 정문에서 직선으로 쭈욱 뻗은 상점가는 그 통일성 높은 디자인으로 유명하지만

실상 팔고있는 것들은 생초보 외국인들에게나 먹힐만한 그렇고 그런 기념품들이 대부분.

 

아사쿠사 부근에서 좀 제대로 된 쇼핑이나 눈요기를 하고 싶다면, 직선 상점가를 벗어나 옆으로 뻗은 곳을 가기를 추천한다.

센소지쪽에서 꺾어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관광객의 관심도는 떨어지겠지만

이곳 상점가는 단순 기념품뿐 아니라 제대로 된 고가품이나, 이쪽 주민들의 실용품들도 팔고 있다.

자리잡고 들어가 즐길 수 있는 식당가도 몇몇 있고. 카미나리몬으로 뻗은 상점가엔 '여유'를 만끽할 가게가 없기 때문에.

 

 

 

키비단고(きびだんご)라고, 눈깔만한 동그란 찹쌀경단 몇개를 꼬치로 찔러꿰어 설탕이나 꿀 발라 먹는 간식을 파는 곳인데

점원으로 보이는 아가씨중 한명은 아무래도 일본인처럼 생기지 않은 듯 하다.

외국인이 아르바이트 하는 중일까. 아니면 어디선가 피가 섞인 일본인일까, 아니면 그냥 착각일 뿐 순수 일본인일까.

 

기분탓이라고 하기에는 나 말고도 이쪽에 시선을 돌리고 있는 관광객이 많이 보인다.

마침 망원렌즈를 끼우고 있으니 멀리서 평범한 관광객 행세를 하며 슬쩍 담아본다.

그런데 평범한 관광객 맞잖아.

 

이곳 아사쿠사의 상점가 상당수는, 자신들이 팔고 있는 물건에 지대한 긍지를 갖고 있던가 혹은 완성도가 부끄러워서인가 몰라도

사진 촬영 금지라는 펫말이 많이 붙어있다. 한국에서는 그냥 동네 문방구에서나 팔릴만한 제품들인데 뭘 그리 신경쓰는지.

그래서인지 멀리 떨어지긴 했지만 허락없이 점원 사진 찍는건 뭔가 범죄를 저지르는 듯한 기분.

차라리 저 경단 하나 사먹으면서 촬영해도 되겠냐고 물어보는게 나았으려나. 하지만 사먹으면서 거절당하면 그건 더블플레이다.

 

 

 

아사쿠사의 시타마치(下町) 상점가와 센소지(浅草寺)는 어쨌든 독특한 구조와 볼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에

자국에서 보기힘든 신선함을 추구하는 관광객들은 한번쯤 가볼만한 재미있는 장소다.

 

하지만 닳고 닳도록 도쿄를 들락날락한 본인 입장에서는 이미 전원꺼진 크리스마스 트리나 마찬가지.

레벨의 차이를 언급하는건 아니지만, 관광지라는 제목이 붙은 곳에 익숙해질 즈음이 되면

관광지보다 일상적인 거리 풍경에 점점 눈이 가는 경향이 있다.

 

얼핏 보면 한국과 별로 다를바 없어서 흥미가 동하지 않지만, 알면 알수록 미묘한 차이가 슬금슬금 눈에 들어오는게

한바퀴 돌아서 '아, 역시 외국은 외국이구나' 하는 생각에 조금 뿌듯해지는 기분이니까.

 

도로가로 나오자 날렵하게 생긴 청년이 인력거 한번 안타보겠냐고 호객행위중이다.

돈이 아까워서 한 번도 인력거를 타본적은 없지만, 대부분 커플끼리 앉아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인력거에

혼자 다니는 나보고 타보라고 권유하는건 조금 배려심이 부족한거 아닐까 싶다.

물론 내가 무겁긴 해도 두사람을 태워서 달리는것보다는 편하겠지.

 

아닌게아니라 요금이 상당히 비싸서 이제껏 탈생각이 없었긴 한데

완전히 의미없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언젠가는 결심하고 한번 타볼까 싶다.

인력거 끄는 젊은이들은 상당수가 지역 토박이라서 근처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기에

단지 사람이 끄는 마차에 앉아서 돌아다닌다는 체험뿐만 아니라

관광 가이드에 나와있지 않은 재미있는 요소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것 같으니까.

 

대화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남에게 말을 걸기 힘든 성격이라서 그것부터 극복하고 타야겠지.

인력거꾼은 일이 일이다보니 정말 사교성도 좋고 대화하기 편한 레벨이라서 어렵진 않을듯 하다.

그들의 육체노동에 대한 존중의 표시로, 인력거 타지않고 그냥 사진만 찍으려는 행동 자체를 하지 않고있는데

훗날 인력거를 이용하고 나면 그때야말로 제대로 그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을것 같다.

 

 

 

이쪽에 가본사람들은 다들 알겠지만, 카미나리몬을 나와서 스미다가와(隅田川) 강쪽으로 걸어가면

항상 아사히 똥떵어리 찍는 스팟에 익숙할 것이다.

 

원래부터 똥덩어리 찍느라 사람이 많은 곳인데, 이제 스카이트리까지 합세하니 굉장한 풍경이 펼쳐진다.

삼각대 놓고 촬영중인 사람들은 낫지만, 다리 난간을 삼각대 삼아야 하는 사람들은 순서를 기다려야 할 정도.

 

다행히도 그냥 휴대폰 촬영하는 사람이 많아서 어렵지않게 난간에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촬영을 시작한다.

감도를 높이긴 했지만 확실히 지지대가 있으니 결과물의 해상도도 살아나는 느낌.

망원렌즈로는 주변 풍경까지 담기지 않기 때문에 35mm 렌즈로 다시 갈아끼운다.

 

 

 

항상 똥덩어리 하나만 담기엔 살짝 아쉬운 기분이었는데

스카이트리에서 발하는 은은한 조명이 뷰파인더를 풍성하게 해 주는게 뿌듯하다.

도쿄 도착 당일이긴 하지만, 지금 나에게 관광기분을 만들어 주는건 저 스카이트리밖에 없으니까.

 

얼핏 아사히빌딩 옆에 세워진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똥덩어리에서 스카이트리까지는 30분 가까이 걸어야 한다.

동일선상에 있었다면 지금 위치에서 전신을 담을수도 없을 정도로 높은 타워.

 

사진을 찍는데 땅이 심하게 흔들린다. 다리쪽이 흔들리는건가 싶었는데 주변 일대가 다 흔들리는 듯

지나가던 사람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카메라 셔터를 누를수 없을 정도로 흔들려서 잠시 촬영을 중단했을 정도.

진도 4.5 이상은 되는 지진. 미세하게 느껴지는게 아니라 움직이는 버스에 타고있는 듯한 기분이다.

 

아무리 지진에 익숙한 일본인들이라도 이 정도면 일단 그렇게까지 흔한 녀석은 아니다.

촬영하던 사람들도 다들 서로를 쳐다보면서 한마디씩 입을 연다.

쓰라린 기억보다 행복한 기억이 더 오래가는게 인간의 뇌인데

아무래도 도쿄 사람들이다보니 이 정도 지진으로는 예전 후쿠시마의 그 악몽까지 떠오르진 않는 듯.

그냥 진동이 끝나자 조금 안심한 말투로 '이번건 좀 셌군' 하고 피식 웃는다.

하긴 후쿠시마 지진 당시 도쿄도 진도 7을 상회하는 지진을 겪었으니, 이번건 그렇게까지 무섭지 않겠지.

 

20년전쯤 도쿄에 저음 갔을때, 생애 첫 지진은 숙소에서 친구 강군과 주말의 영화 로보캅을 보고 있을 때였다.

한창 재미있는 장면이었는데, 지진에 놀라서 그 이후엔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던 기억이 난다.

 

 

 

일단 늦은 오후, 야경의 스카이트리 풍경을 담았으니 오늘 할일은 다 했다는 기분.

지금 시간에 전철타고 어디 딴데 구경가기도 그렇고, 수면부족으로 더 강행하고 싶은 기분도 아니다.

대충 뱃속에 뭐좀 집어넣고 천천히 걸어서 숙소로 복귀하면 끝.

 

일기장용 수첩은 갖고 왔는데 펜을 가져오지 않아서 편의점에서 하나 구입한다.

사실은 전문적인 문구코너를 갖춘 대형 서점에서나 구입할까 했는데, 아사쿠사 주변엔 그런게 없다.

애용하는 수첩은 보통 사용되는 희고 깔끔한 녀석이 아니라

재생지로 만든 듯한 까칠까칠한 황토색 종이라서 펜촉을 많이 가린다.

부디 편의점에서 구입한 펜이 수첩에 잘 맞기를 기원하면서, 일기를 쓸수 있는 맥도날드를 향해 이동.

 

 

 

일반 음식점에서도 진득하게 앉아 일기쓰면 안된다는 법은 없지만

시간제한이 없는 패스트푸드점과는 달리, 언제 어느순간 손님이 몰려서 자리가 부족해질지 모르는 일반음식점에서는

마음놓고 글을 쓰기가 쉽지 않다. 괜히 미안해질 것 같아서 조급해지니까.

 

한창 자전거여행중일 때는 그런 심리가 밖으로까지 보인건지, 덮밥집 요시노야(吉野家)에서 일기 후다닥 쓰고 짐 챙기니까

아주머니가 '편하게 쓰셔도 되요' 라고 웃으면서 말을 건네기도 했다. 그렇게 겉으로 드러나보였나.

 

아사쿠사는 도쿄의 주요 관광지이다 보니 이곳을 통과하는 전철역도 굉장히 많다.

사철들간에는 역을 공유하지 않기 때문에, 단순히 '아사쿠사역'이라고 해서는 어딜 지칭하는지 알수 없다.

노선을 착각하면 20분 가까이 걸어가야 할 때도 있고.

 

사진의 토에이 아사쿠사역은 나름 역사깊은 곳이지만

예전의 영광을 뒤로하고, 같은 건물에 위치한 백화점은 불경기로 폐업까지 당하기도 했다.

그랬던 녀석이, 스카이트리로 연결되는 전철노선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재도약을 꿈꾸게 되었다.

건물도 깔끔하게 재단장하고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과연 얼어붙은 소비심리를 녹일 수 있을지.

 

 

 

맥도날드에 들어가 뭐 신메뉴가 없나 둘러본다.

한국과는 달리 일본 맥도날드는 쉴새없이 기간한정 메뉴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가끔 한번씩 찾아가보면 예상하지 못한 녀석을 먹을 수 있어서 나름 재미가 있다.

 

이번에 판매중인 신메뉴는 '데미치즈 그라코로 버거'라는 듣도보도 못한 녀석.

맥도날드의 오만가지 신메뉴에 익숙한 나에게도 이건 정말 뭔지 짐작하기 어렵다.

 

일단 제품을 받아서 외관을 탐색해보고 몇가지 알아낸 바에 의하면

데미치즈라는 건 '데미그라스 소스 + 치즈'의 준말. 패티는 코로케 형식이라는 점 정도.

데미그라스 소스는 쉽게 말해 돈까스 소스로, 한국의 불고기버거에도 처바르는 그 시커먼 소스다.

치즈야 뭐 위에 한장 올라가 있는걸 말하는 것이겠고.

 

엄밀히 말하자면 코로케 버거라는건 한국의 새우버거, 피쉬버거처럼 코로케 형식으로 튀겨낸 것을 지칭하니

여기까지는 별다른 것이 없어보이는데, 기간한정 제품이 가지는 특징은 무엇인가 궁금해질 뿐이었다.

 

 

 

한입 먹어보고나서야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라코로라는 말은 '그라탕 + 코로케' 였던 것.

바삭바삭 튀김이라고 생각했던 코로케의 속에는 진득한 우유처럼 흘러내리는 그라탕이 들어 있었다.

정확히는 새우 그라탕으로, 조그맣고 반투명한 그 새우가 몇개 들어있어서 식감을 살려주고 있다.

 

일단 그라탕이다 보니 흔히들 생각하는 햄버거의 진하고 강한 맛은 온데간데없고

부드러운 치즈맛이 주를 이루는 터라, 자칫 미적지근하고 느끼한 맛이 되기 쉬울것 같은데

그걸 중화하기 위해서 위에 데미그라스 소스를 바른듯 하다.

 

햄버거 패티안에 그라탕이 들어있다는 발상은, 어쨌든 이런 시도를 하는게 일본 맥도날드 답다는 느낌.

한국의 김치라이스버거 같은 독창성도, 결과적으로는 실패였지만 굉장한 도전이었는데

일본 맥도날드는 끊임없이 기간한정 메뉴를 만들어내니 일부러라도 사먹어주고 싶어지는 기분이다.

 

쇠고기패티에 데미그라스 소스를 너무 처바르면 고기맛이 사라져 버리니 싸구려맛이 되는데

그라탕 패티는 자극적이라는 단어와 도치되는 맛이기 때문에 데미그라스 소스의 자극도 괜찮은 양념이 된다.

단지, 햄버거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점에 따라 굉장히 이질적인 느낌이 들 수도 있기 때문에

맛있다고 단언하며 남에게 추천하기는 쉽지 않은 버거인 듯.

 

참신한 시도라면 일단 맛이 없어도 점수를 좀 더 주는 성격인 본인으로서는 맛있게 먹었지만

햄버거집에서 굳이 그라탕의 부드러움을 느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역시 들지 않는것도 아니고

결정적으로 가격에 비해 크기가 너무 작다. 코로케 안에 그라탕이라는 모델 자체가 아무리 생각해도 단가가 비싸긴 하다.

안그래도 작기로 유명한 일본 햄버거집인데, 이녀석은 크기가 정말 작아서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다.

 

이녀석을 씹으면서 일기를 쓰는데, 역시 우려대로 수첩과 볼펜의 상성이 맞지 않다.

글씨가 잘 적히지 않아서 이리저리 볼을 굴려가며 겨우 적는데, 이러면 쓰는 내내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혹시나 싶어서 맥도날드 영수증에 적어보니 물흐르듯이 잘 적힌다. 역시 이런 까칠한 수첩에는 맞지 않는듯.

돈이 아깝긴 하지만, 앞으로의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서 상성이 맞는 펜을 하나 더 구입해야겠다.

 

 

 

일본의 도로에는 갓길주차 같은게 극히 적어서, 한국의 도로와 그 느낌이 사뭇 다르지만

이거 하나만은 정말 동질감 느낀다. 자전거 주륜금지구역을 비웃듯이 늘어서있는 자전거들.

 

일본도 아직 자전거 주륜만큼은 제대로 정착되지 못했는데, 그럴만한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애초에 자동차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난 편리함을 추구하는 자전거에서, 자동차처럼 지정장소에만 주륜이 가능하다고 해 봤자

그걸 지킬 사람이 얼마나 될런지. 그리고 지정 주륜장은 요금을 지불해야 하는 곳도 많다. 돈내고 자전거를 주륜한다면

자전거의 가장 큰 장점에 대한 모욕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법도 하다.

 

뭐,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딱지를 붙이고, 철거하고, 찾으러 가면 벌금물리고 하기도 하지만

벌금이 많으면 그냥 자전거를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더 저렴할수도 있는만큼 별로 실용성이 없다.

애초에 자전거의 주륜이 보행자들에게 끼치는 불편은, 자동차의 불법주차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미미하기도 하고.

 

역 앞같은 혼잡한 곳에서는 철저하게 단속하지만, 그외 상당수 지역에서는 그냥 날잡아서 가끔 딱지붙이는 정도다.

이것만큼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비슷한 상황이라서 조금 반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사진을 자주 담기도 하고.

 

간식거리 좀 사서 숙소에 도착해 TV를 켜니, 좀 전 지진이 아무래도 평범한 녀석은 아니었던 듯 하다.

중심부 진도가 7.5 가까운 녀석이고 츠나미 경보가 발령되어 있었다.

전례가 있었던 만큼 모든 TV 방송이 비상으로 바뀌고 속보를 보내고 있다.

도쿄쪽은 츠나미 예상지역도 아니라 걱정할건 없었지만, 혹여 한국에서도 난리치고 있을까 싶어서

미리 가족에게 문자 보내놓았다. 연락없으면 괜히 걱정할까봐.

 

진도를 봐서는 쓰나미라고 해 봤자 1m 를 넘지않는 녀석이겠지만, 어쨌든 일본에서 이것만은 경시할 수 없는 사태니까.

하지만 30분정도 경보를 날리던 방송은, 결국 쓰나미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말을 끝으로 모두 해제되었다.

 

평범하게 방송되는 버라이어티쇼를 즐기며, 목욕으로 지친몸을 풀고 슬금슬금 침대로 기어들어간다.

침대로 기어들어가니, 냉탕에 한참 담그고 있다가 온탕으로 들어갈 때의 느낌처럼 쏴악 하고 몸이 이완되는 느낌이 든다.

오늘 하루도 어지간히 피곤했나보다. 멀쩡할때는 2시간쯤 TV 보다가 자는데, 결국 30분 조금 넘기고 알아서 눈꺼풀이 감긴다.

 

 

조카 돌보기를 끝내고 대구로 내려왔습니다.

스트레스 푸는데는 독서가 최고라서, 서점으로 향하는데

뭔가 이상한 조형물이 서 있어서 다가가 봤더니, 페트병으로 만든 천사 모양이네요.

 

자연보호 블라블라 하는 그런 의미겠죠.

 

일본서도 12월 초부터 줄기차게 크리스마스를 엮어서 장사하고 있던데

특정 종교 기념일이 모텔 방을 꽉 차게 만드는 이런 현상은 참 재미있습니다.

그냥 일탈의 변명거리를 하나 만들고 싶을 뿐이겠죠.

 

 

 

산 김에 바로 옆 까페에서 책좀 읽고, 국채보상공원쪽 도로가에 뭔가 반짝이길래

그냥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좀 춥긴 한데 30~40분만 걸으면 되니까요.

 

사진 찍을 생각은 원래 별로 없었고, 혹시나 싶어서 24mm 렌즈 하나만 덜렁 들고 나왔던 터라

맘에 드는 구도는 잘 잡히지 않지만 그래도 뭐 스냅으로는 충분합니다.

 

 

 

크리스마스라고 기분이 좋아지는건... 제가 솔로라서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말이죠.

 

평소 보기 힘든 모습, 이런 발광중인 길거리를 볼 수 있으니 저야 뭐 아쉬울 건 없습니다만.

카메라 꺼내들고 마구 찍어도 신경쓰는 사람이 없는건 확실히 크리스마스의 특징일까요.

 

 

 

커플들이나 아이 데리고 온 부모들이나 여기저기서 셔터 누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걸어서 돌아갈 좋은 이유가 생겨서 저도 신나게 사진 찍었죠.

원래는 책이나 실컷 읽다가 버스타고 돌아갈 예정이었고, 카메라는 항상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갖고다니는 정도였으니.

 

 

 

나무들한테는 별로 좋은 환경이 아닙니다만 연말연시 이 정도야 뭐...

 

어릴적엔 집안에 크리스마스 트리 같은것도 만들어놓고 그랬는데

이제는 아무런 감흥이 없으니 할 필요도 없겠죠.

 

조카 태어난 형님집엔 초소형 사이즈의 트리가 있긴 하더군요.

 

 

 

그냥 가로수만 빛나고 있으면 좀 재미가 없을것 같아서인지

크리스마스와의 연관성을 찾기는 어려운 동물 모형들이 여기저기서 빛나고 있습니다.

 

독수리나 코끼리나 백조 같은건데... 제 지식으로는 그게 크리스마스와 뭔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다들 모형 앞에서 사진 찍으려고 난리였습니다.

사진 찍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혼자서 찍을 수 있더군요.

 

정말 밋밋하고 형편없는 플라스틱 조형이지만

빛이 가미되니 멋진 피사체로 순식간에 돌변합니다. 낮에 보면 그냥 흉물스러울 뿐인데 말이죠.

요즘 읽고 있는 책이 브라이언 그린과 미치오 카쿠 등, 양자역학과 우주론같은 내용이라서

왠지 평소보다 빛이라는 개념이 좀 더 놀랍게 다가오는 듯한 기분입니다.

 

빛이라는 단어 하나가, 사실은 137억년 전 우리 우주가 탄생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속도로 공간을 가로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크리스마스라는 개념 따윈 이 한줌의 빛보다도 의미가 없을 뿐이네요.

 

 

 

선거가 끝나도 아직 전광판은 바꾸지 못했군요. 공무원이 하는 일이 그렇죠 뭐.

 

연말이 되면 여기서 종 치는 모습을 보려고 이 광장이 인파로 가득 찰것 같습니다.

예전엔 그런 심리패턴을 이해해 보려고 서울 종로에서 종치는걸 직접 구경하고

밤새도록 음식점이나 까페 빈자리 찾아다니는 짓도 해 봤습니다만... 모르겠더군요.

 

 

10시가 되니 일제히 가로수 불빛이 꺼져버렸습니다.

아쉬워하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리더군요. 어디에 그런 고지가 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 불친절함이야, 한국에서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다들 이해하고 넘어가겠죠.

 

그 불빛이 없어져도 원래 있었던 가로등들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이녀석만으로도 얼마든지 마음에 드는 사진은 남길 수 있네요.

 

 

 

매번 경대병원 장례식장 뒷쪽 골목을 걸어서 돌아옵니다만

2달 전 대구를 떠날때만 해도 이런거 보이지 않았는데... 갑자기 들어서 있는 모습에 심히 당황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빨리 올라가나 싶더군요.

장례식장 골목의 구 가옥들을 철거하고 공사터를 만드는 모습까지는 봤는데

순식간에 이만큼 올라가 있으니, 1년간 자전거여행하고 돌아왔을때보다 더 큰 괴리감이 느껴집니다.

 

 

 

거의 빛이 없는 깜깜한 골목이지만, 예전처럼 어두워지면 카메라를 가방에 집어넣을 필요가 없네요.

그러고보니 요즘 해가 지고나서 찍는 사진이 부쩍 늘어난 것 같습니다.

 

카메라의 성능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고 스스로 생각해도, 결국 야간에 찍을만한 성능이라면

알게 모르게 카메라를 꺼내드는 빈도가 늘어가게 되는군요.

기술의 발전에 괜히 고지식하게 귀를 막고 있을 필요는 없나봅니다.

 

 

 

집까지 거의 다 왔습니다.

보통 서울이 더 춥고, 대구는 춥다 춥다 해봤자 별로 춥지 않다는게 정설인데

내려와보니 며칠간은 확실히 서울보다 대구가 더 춥더군요.

 

눈이 언제 내린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며칠동안 영하의 기온이 계속되어서

이런 골목길의 눈은 거의 얼음바닥이 된 채로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제가 신고있는 구두는 기형적인 제 발바닥을 편안하게 할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밑창의 내구성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닳아버리더군요.

그래서 눈에 발자국을 찍어보면 완전히 매끈한 평판 모양이 나올 정도로 밋밋합니다.

 

그런 녀석으로 이런 얼음바닥을 걸으니 이건 뭐...

넘어지면 수백만원짜리 카메라도 박살난다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조심조심 이동합니다.

 

 

 

수성교를 건너는데 그냥 지나치긴 또 뭣해서, 다리 위의 난간을 삼각대삼아 장노출을 해봅니다.

셔터야 타이머 설정해놓으면 되지만 자동차의 진동때문에 제대로 찍힐까 걱정이 되긴 하더군요.

 

다행히도 15초 정도의 노출은 별 무리없이 찍혀나왔습니다.

그닥 볼품없는 풍경이긴 하지만, 외국인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참 신기한 풍경일 것 같네요.

 

 

 

이 건널목만 건너면 집인데, 기다라기 심심해서 장노출이 아니라 손으로 들고 야경 찍어봅니다.

사실 이렇게 고감도 야간사진을 많이 찍으려는 건 나름 보상심리를 기대하고 있다고 보는게 맞겠더군요.

 

지난번 카메라도 별 불만없이 쓰다가, 신제품에 대한 호기심으로 큰 출혈을 감수하고 바꾼 탓에

예전에 찍기 힘들었던 환경에서도 무리없이 결과물이 나온다는걸 스스로 확인해서

출혈구매를 합리화시키고 싶었던 마음이 저변에 깔려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아파트 앞에도, 이미 눈이라고 부를 수 없는 번쩍번쩍한 얼음판이 형성되어 있군요.

얼핏 보기에 눈이라고 파악할 수 있는 형태만 간직했을 뿐, 밟아도 전혀 움푹 파이지 않는 완벽한 얼음입니다.

 

제가 없는 사이에 대구도 눈 오고 춥고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살짝 들다가 파동함수처럼 붕괴되어 버리네요.

 

사진 정리하다가 문득 생각이 났는데

지금까지 사진의 긴축 길이를 1100px 로 고정하고 있는 이 블로그를 좀 더 확장해야 하지 않나 합니다.

사진 원본이 6000px 가까이 되는데 이렇게 줄여버러니 왠지 눈에 안들어오는 부분이 많은것 같네요.

이 블로그 처음 시작할때야, 24인치 모니터 쓰는 사람 자체가 별로 없었으니

1100px 정도가 다른 사람들이 구경왔을때 한 화면에 보이는 한계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요즘엔 기본적으로 다들 가로해상도 1920 이상의 모니터를 쓰고 있겠죠?

제 모니터는 가로 2560 픽셀이라서 1100px 사진은 그냥 조그맣게 보일 뿐이지만

다들 1920 정도의 모니터를 쓰신다면 사진의 가로길이를 좀 더 늘려도 문제없을 듯한데 말입니다.

 

조금 더 생각해 봐야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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