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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멘'에 해당하는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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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4.12.02  2월 16일 오비히로 - 토카치무라 2
  3. 2014.09.24  2월 12일 아사히카와 - 한겨울의 반라사내와 고양이 6
  4. 2014.07.06  2월 9일 삿포로 - 시계탑 주변 8
  5. 2013.12.03  과거로의 여행 - 키소의 비와 밤 16
  6. 2013.08.29  과거로의 여행 - 타카야마의 아기원숭이 6

 

더운 날씨에 땀 뻘뻘 흘리며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와 히타카츠행 버스를 탄다.

다시 한 시간 반 정도 되는 한적한 거리를 달리는데, 이렇게 달리면서 보는 대마도의 거리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오히려 크게 부각되는 점이 없는 관광지 근처를 걸어다니는 것보다 바다와 가깝다가 멀어지며 올라갔다 내려가는 곡선 도로들이 훨씬 멋지다.

 

이 버스의 노선이 대마도에서 가장 큰 두 도시를 잇는 길이란 걸 생각하면, 그 외의 도로는 이것보다 훨씬 매력적일 듯 하다.

자전거로는 워낙 업다운이 심해 체력적으로 조금 힘들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도 라이딩의 매력은 충분하다.

특히 바이크로 달린다면 숨을 몰아쉴 필요 없이 산과 바다를 동시에 즐기는 커브길을 마음껏 즐길 수 있음에 틀림없다.

 

어쩌면 이렇게 여행하는 것보다 바이크 끌고 2~3일 정도 섬을 돌아보는게 더욱 재미있을 법 하다.

 

히타카츠에 내리자 생각보다 주위 풍경이 한산하다. 너무 황량해서 아무래도 정류장을 좀 일찍 내린 듯 싶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단 마을 자체가 그리 크지 않으니 조용히 걸어다니며 산책하기엔 무리 없다.

나와 함께 내린 사람은 한국인 젊은 여성 관광객 둘 뿐. 아마 예약한 숙소가 이 근처에 있는지 잡담을 나누며 앞으로 걸어간다.

 

본인은 예약도 없이 그냥 왔기 때문에 걸어다니다가 숙소가 보이면 그냥 들어가 물어보는 수 밖에.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표지판은 사망사고 0명 기록이 725일째라는 기분좋은 내용.

하긴 이제껏 돌아다닌 대마도의 도로 사정을 생각하면 이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한국이라면 이렇게까지 장기간 기록을 갱신하기는 어렵겠지만, 가뜩이나 얌전하게 운전하는 일본에서 이렇게 한산한 마을에서야.

 

 

 

15분쯤 걷자 마을다운 마을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 사이에 숙소가 몇개 보이긴 했지만 바로 들어가진 않기로 한다.

어제 묵었던 호텔의 심각한 악취 덕분에 조심성이 생겼다고 할까.

일단은 내일 돌아갈 항구까지는 길을 파악하는 의미에서 걸어가 보고 그 후에 숙소를 결정하기로 한다.

 

대마도에서 가장 큰 두 도시라지만 별로 크지 않던 이즈하라에 비해서도 훨씬 작은, 그냥 바닷가 마을같은 분위기라

숙소 면에서는 훨씬 여유가 있을 법도 하다. 한국 관광객은 둘 말고는 본 적도 없고.

 

사실 대마도는 보통 당일치기, 길어야 1박 2일 정도 머무는 게 대다수라서 나처럼 2박 3일 머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어제 이즈하라에 도착한 사람들은 상당수가 오늘 여기서 부산가는 배를 탈 거라고 예측해 본다.

 

 

 

특징적인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 극히 평범한 마을이지만 도로는 깨끗하고 공기도 맑다.

이즈하라는 그래도 일단 도시라는 보편적 개념에 부합하듯 현대적인 쇼핑센터와 패스트푸드 체인점 정도는 존재하지만

히타카츠는 관광 가이드에 한국의 동네 중국집만한 가게와 매우 평범한 슈퍼마켓마저도 전부 실어놓을 정도로

관광을 위한 곳이라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 곳이라 되려 마음이 편한 느낌도 든다.

 

걸어다니는 사람도 없어서 부담없이 걸어다니며 눈에 들어오는 모습에 아무 생각없이 셔터만 누르고 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땀 좀 흘리며 걸어다니고 있어서 조금 피곤하긴 하다.

위에 뭔가 있어보이는 토리이가 늘어서 있지만 아침 점심 모두 신사를 보러 돌아다닌 터라 더 이상 흥미가 동하지 않는다.

저 위에 올라가면 풍경은 좋겠지만 어차피 이곳에서 풍경으로 유명한 곳은 따로 있고, 그 곳은 내일 둘러볼 생각이라서.

 

길을 걸어가는데 초등학교 1~2학년쯤으로 보이는 학생 둘이 마주 걸어오다가 밝고 큰 목소리로 내게 인사를 건넨다.

나도 웃으며 인사를 받아줬는데, 둘이 킬킬 웃으면서 지나간다. 내가 뭔가 실수한 것이라도 있나?

 

 

 

이즈하라 항은 그래도 현대식 느낌이 났지만 여기는 정말 깡촌마을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낡아도 이렇게 낡았나 싶은 분위기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즈하라와는 다른 느낌이라서 오히려 볼거리는 늘었다고 생각한다.

 

바로 조금 전에 부산으로 배가 떠나서 그런지 주위는 모두 한산하다. 마을 사람들도 거의 보이지 않아서 살짝 오싹할 정도로 조용한 분위기.

아마도 다시 관광객이 들어오기 전까지의 시간은 바랬던 대로 조용한 여행을 즐길 수 있을 법 하다.

 

항구 바로 앞에는 허름하지만 나름 제대로 된 식당도 1층에 갖춘 호텔이 버티고 있었지만

여기보다 깨끗해 보이는 호텔을 좀 전에 거쳐왔기 때문에 바로 들어갈 기분이 들지는 않는다.

다시 좀 전의 호텔로 돌아가서 빈 방이 있는지를 물어보고 결정하는 것이 좋을 듯.

 

 

 

한국 관광객이 몰려가고 나면 마을 전체가 조용해지는 듯 하다.

문을 닫은 음식점도 많고, 관광안내센터라고 소개되어 있는 조그만 가게는 5시도 되기 전에 이미 문을 닫았다.

사실 안내센터가 필요할 정도의 마을도 아니지만.

 

그래도 관광객 맞이를 위한 노력은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저 스티커는 마음에 든다.

히타카츠 마을 안에서는 무료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처럼 빼곡한 환경을 기대할 수는 없어서 길을 걷는 도중에도 연결이 되다가 말다가 하는 현상이 잦긴 하다.

물론 이런 깡촌에서 이 정도 준비를 해 준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은 흡족해 진다.

 

 

 

건물 외형이 상당히 깔끔해 보이는 호텔 앞으로 왔던길을 돌아 도착한다.

바로 옆에는 어째 이즈하라에 있던 것보다 더 깔끔해 보이는 파칭코 가게가 위치하고 있다.

주위엔 제대로 된 식당처럼 보이는 음식점도 몇 있는데, 가게 영업시간이 좀 이상해서 아직 문을 닫은 상태.

 

호텔에 들어가보니 로비도 넓고 제대로 된 숙박업소라는 느낌이 확 들어서 기분이 좋아진다.

할머니가 안쪽에서 조용히 나와 빈 방이 있다고 말씀해 주시는데, 불행히도 시마토쿠 쿠폰은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러 아끼지 않는 한 남은 쿠폰을 소진할 방법은 충분하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다.

 

어차피 여기서 쿠폰을 다 사용하면 저녁식사와 내일 관광을 전부 현금으로 해야 하니까.

조식은 금액이 추가된다고 해서 신청하지 않았다. 이 호텔 바로 옆에 대마도 명물 햄버거인 츠시마버거 가게가 있으니까.

관광객이 빠져나간 후라 그런지는 몰라도 영업시간이 벌써 끝나있다. 이 가게는 이걸로만 먹고살 수 있는건가 싶은 생각마저 든다.

 

 

 

짐을 풀어놓고 휴식을 좀 취한후 밖으로 나온다.

호텔에는 여전히 냉장도고 없고 얼음물이 가득 담긴 보온병 하나가 달랑 놓여있는 곳이지만 냄새도 없고 깔끔해서 좋다.

이즈하라의 호텔과 가격이 거의 비슷하지만 이 정도만 된다면 하루 머물기에 부족함이 없다.

대체 이즈하라의 그 냄새나는 호텔은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다시 항구쪽으로 걸어가서 근처의 라멘집에 무작정 들어간다.

카운터석까지 모두 합해서 총 수용인원이 15명 정도밖에 되지 않아보이는 조그만 가게인데

이런 가게조차도 빠짐없이 히타카츠 관광 팜플렛에 수록되어 있다. 맛있다고 호평이 자자한 곳이라고 설명해 놓았다.

 

아마도 팜플렛에는 이즈하라에 위치한 모든 음식점을 다 적어놓은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할머니 한 분이 반갑게 맞이해 주신다. 라멘과 교자를 시키고 사진 좀 찍어도 되겠냐니까 흔쾌히 승락해 주신다.

흔쾌히 까지는 아닌가, '다들 여기 오면 사진찍고 가네요. 뭘 볼게 있다고'라고 웃으면서 대답하는 모습을 보니.

 

할머니 한 분으로 그 거치디 거친 한국인 관광객들을 다 받아들일 수 있을지 조금 걱정도 된다.

자칫 술주정이라도 하는 사람 있으면 마음고생을 많이 할 텐데.

 

 

 

시원한 얼음물 한 잔을 다 비우자 밖이 덮지요 하면서 한 잔 더 따라 주신다.

붙임성이 아주 좋은 분은 아니라 대화가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는데

일본 전역을 자전거로 다 돌아다니고 여기는 섬이라서 와 보질 못해 이번에 찾아와 봤다고 말씀을 드려도

'여기 오는 젊은 사람들이 그런 경우가 꽤 있어요'라고 쿨하게 대답해 주신다. 정말일까.

 

 

 

풍경은 여지없는 시골이지만 시골만의 정겨운 분위기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 마을이다.

아무래도 원래는 정말로 평범한 시골마을이었겠지만 워낙 관광객이 찾다 보니 나름 이골이 난 듯한 모습이라 할까.

 

이즈하라와 달리 히타카츠는 마을 규모만 봐도 거의 모든 음식점에서 한국인 관광객 안 받아본 곳이 없어 보인다.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그 사람들의 장단에 맞춰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 듯 하다.

 

조금 기다리다 나온 라멘은 위에 올라간 야체 정도만 신선할 뿐 면은 그냥 인스턴트고 국물도 매우 평범한 수준이다.

일본 여행이라면 어디서든 라멘 한 그릇은 먹어본다는 본인의 지론 때문에 일부러 찾아온 곳이긴 한데

역시 이런 곳에서 먹는 라멘 수준이 그렇게 훌륭할 수준이 될 수는 없다는 건 사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사실 절대 다수가 한국인 관광객인 이 곳에서 라멘 수준을 높여야 할 이유도 없을 뿐더러

그만한 수요도 만족할 수 없는 곳이라, 이 정도가 최선의 수준임에는 틀림없다. 대마도는 라멘 맛을 추구하러 오는 곳이 아니다.

 

 

 

교자도 나름 금방 구워와서 따끈한 게 좋긴 하지만

일본식 교자 만드는 법을 완전히 무시한, 어찌보면 일본에서는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레어한 녀석이긴 하다.

 

일본식 교자는 교자의 한쪽 면만 바싹하게 굽고 반대편 부분은 뚜겅을 덮어 수증기로만 쪄 내는 방식을 사용하는데

이 곳의 교자는 그냥 냉동교자를 후라이팬에 마구잡이로 구워낸, 한국의 가정집에서 주로 사용하는 방법과 똑같은 녀석이다..

 

내가 지금 일본에서 교자를 먹고 있는건지 집에서 고향만두를 구워먹고 있는 건지 구분이 안 갈 정도의 가시감이 느껴진다.

그래도 일단 다 먹고 난 후 할머니한테 참 맛있었습니다 라고 인사를 했는데, 이 할머니는 '뭐 그냥 평범한 교자인데' 라고 웃는다.

일본인과의 대화는 어쨌든 말 그대로 의미를 이해하기가 힘들어서, 일본어에 능통하더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번화가 도시의 가게였거나 좀 이름있는 가게였다면 '이 사람들이 지금 나 놀리는 건가'싶은 느낌이 드는 레벨이긴 했다.

대마도라는 지역의 특성상 이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리없이 먹고 나온 것.

 

팜플렛에 나왔던 대로 '맛있다고 소문난 집'이라는 광고는 아무래도 너무 과장되었다고 할까.

그게 과장이 아니라면 한국인 관광객들에게는 대충 이 정도로 내어주고 지역 주민들에게는 제대로 만들어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위험한 상상마저 해 본다.

 

슬슬 해가 지고 있어서 다시 호텔쪽으로 돌아간다.

호텔을 지나 주택이 늘어선 거주지역으로 들어가 조금 더 걸으면 지역민들이 이용하는 슈퍼가 보인다.

대마도에서는 뭐든 문닫는게 빠르다 보니 초저녁인데도 도시락이나 닭튀김같은 안주거리가 거의 동이 나 있다.

대충 적당한 도시락과 음료수, 닭튀김 같은 걸 주워들고 계산을 한다. 시마토쿠 가맹점임을 확인하고 들어갔기 때문에 무난하게 쿠폰을 사용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호텔에서 발 뻗고 TV나 보면서 물이 들어있던 보온병에 음료수를 채워넣는다.

얼음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내일 아침까지 시원한 음료수를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일본 여행치고는 심적으로 너무나 고요한 상태로 보내고 있어서 정말 여행 온 건가 싶은 생각도 든다.

기대치가 없어서 그런지 딱 생각했던 만큼이라는 느낌인가.

 

냄새가 나지 않는 것만 해도 어제와는 차원이 다른 편안함을 느낀다.

간식과 함께 TV를 보고 굴거리면서 여행 마지막 밤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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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마장 입구가 열리지 않았으니 시간을 보내기 위해 옆의 산지직송 마켓을 둘러보러 들어간다.

사람이 많지 않아서 다행. 사진 찍어도 되냐고 하니까 가볍게 승락해 준다.

 

농산물 신선하기로 유명한 홋카이도에서도 가장 품질좋기로 유명한 토카치 평야 지역이고

식량 자급자족률이 500%를 넘는 곳이니 이곳에서 타 지역 농산물을 먹는다는게 오히려 신기할 정도.

 

 

 

사고 싶게 만들어지는 포장 기술만큼은 백 년이 지나도 한국이 따라잡기 힘들 듯.

좋게 말하면 합리적이라고 할까, 한국은 포장지에 들어가는 돈이 있으면 그걸로 양이 더 많은 걸 사먹는다는 관념이 강하니까.

 

하지만 나같은 여행자들에게는 이런 디자인을 한 과자가 눈에 훨씬 잘 들어오는것도 사실이다.

선물을 사 갈만한 환경이 안되는 본인을 제외하고, 평범하게 타 지역에서 관광 온 사람들이라면

왠지 못해도 한두 개 씩은 구입해 가지 않을까 싶은 물건들이 빼곡하게 쌓여있다.

 

 

 

한랭지에서 더욱 부드럽고 고소한 감자다 보니 홋카이도 하면 떠오르는게 이 녀석이다.

품종이 좋아서가 아니라 이 지역의 기후가 감자를 맛있게 만드는 원동력이라

홋카이도산 감자를 사용했다고 해도 실제 이 지역 출하품이 아닌 이상 이 맛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

 

얼핏 봐서는 과연 이런 것까지 사 갈까 싶은 상품들까지 많이 진열되어 있는데

만들지 않아서 못 사는 것 보다는 수요를 만들어내는 도전정신과 그것을 소화해 낼 수 있는 시장 규모가 부러울 따름이다.

 

 

 

오비히로에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온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한국어로도 광고를 하고 있다.

글자를 보니 일단 한국어를 잘 하는 사람이 쓴 글귀는 아닌 듯 하지만, 이런 지역에서 한국어를 보게 되면 왠지 배려심에 마음이 따듯해진다.

 

지난 번 포스팅에서 언급했던 만화 '은수저'에서 등장하는 장면을 이용한 광고인데

그 옆에 판매중인 '오야코동과 TKG에 어울리는 간장'이 심히 구매욕구를 자극한다.

 

오야코동은 반숙 계란에 닭고기를 더해 밥 위에 올린 덥밥을 의미한다. 의미는 말 그대로 부모와 자식 덮밥.

일본에 있을 때 최고의 아침식사로 손꼽는 것이 TKG 였는데, 타마고(계란)카게(덮)고항(밥)의 약자로 많이 사용된다.

싱싱한 날계란을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흰 쌀밥 위에 얹고 간장을 뿌려 비벼먹으면 그 고소함과 짭짤함은 보물과도 같다.

일본에서는 그 TKG에 알맞게 짠 맛을 줄이고 단 맛을 첨가한 전용 간장도 대인기.

 

문제는 저 간장을 사들고 가도 한국에서 생으로 먹을만한 계란 찾기가 어렵다는 것. 저 상품을 볼 때마다 매번 아쉬운 마음 뿐이다.

특히 이곳 홋카이도에서는 그날 아침 낳은 싱싱하기 그지없는 날게란을 먹을 수 있으니, 상상하면 입에 저절로 침이 고인다.

 

 

 

최고의 신선도를 자랑하는 산지 직송 야채들이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진열된 것을 보니

아침에 이곳에 들러 경마 몇 판 땡기고 야채 몇 종류를 사들고 돌아가는 중년 가장의 모습이 어렴풋이 연상된다.

외국 관광객인 나로서는 구입할 가치가 없지만, 돈을 줘도 먹거리에 대한 불신을 지우기 어려운 한국 사정을 생각하면 부러움을 지울 수 없다.

 

경마장 한 켠에 마련된 조그마한 시장에서도 못 구하는 것이 없는 풍족함은 세상에서 가장 디지털화 된 한국과는 다른 만족감을 준다.

나이 탓인지 모르겠는데, 자기가 먹을 것을 실제 손으로 만져보지도 않고 웹에서 구매해 배달시킨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알이 꽉 찬 시샤모가 뜯기 아쉬울 정도로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다.

시샤모는 열빙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민물고기인 빙어와는 다른 청어과의 바다물고기라서 헷갈릴 때가 많다.

 

알이 꽉 찬 암컷이 인기가 있지만 가격을 낮추는 것인지 수컷 시샤모도 구분해서 판매중이다.

이걸 숯불 같은데 올려놓고 구워서 아작아작 씹어먹으면 술안주로 예술인데 이곳에서는 아쉽게도 그림의 떡.

 

 

 

산지 직산이라고는 하지만 주방이 없는 조그만 비지니스 호텔에 틀어박힌 여행자로서는 구매할 필요가 없는게 대부분이라

예전부터 신기하게 생각했던 젤리빈 과자나 한 봉지 사들고 밖으로 나온다.

어릴적부터 그 귀여운 모양과 영롱한 색깔이 신기했지만 엄니가 불량식품이라며 먹지 못하게 했고

그 이후로 관심 자체가 시들해져서 아직까지 평생을 손꼽아 한두 번밖에 먹은 기억이 없는 녀석이라 눈에 들어온 김에 사 본다.

 

아직도 경마장을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아서 시간 남을 때 미리 배를 채울 생각으로 건너편 푸드코드에 들어간다.

조금 위화감이 들긴 해도 이곳 한정상품이라는 토카치 우유라멘을 먹어보지 않고는 그 호기심을 잠재울 수 없으니까.

 

 

 

자리가 10개도 되지 않는 조그만 라멘가게에 들어가니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이해 준다.

우유라멘 하나를 주문하고 나서 버스 티켓을 구입할 때 받았던 200엔 할인권을 건네며 사용할 수 있는지 물어보자 가능하다고 하신다.

 

한정상품이라는 미명 하에서는 뭐든 비싸지기 때문에 할인권이 꽤나 도움이 된다.

전분에서부터 야채 차슈, 우유까지 100% 토카치 산이라고 자랑하고 있으니 가격만큼의 만족감은 있지만.

 

영하 8도 정도의 바깥에서 돌아다니다 들어와 먹는 라멘은 그야말로 천국이다.

살짝 긴장하면서 한 모금 떠넘긴 우유 국물은 거부감이 전혀 없는 부드러운 곰탕 맛이라 오히려 너무 무난한 편.

하긴 벌칙게임에서 먹는 것도 아니고 맛없는 라멘을 일부러 만들었을리는 없으니 내 기대가 너무 과했던 것도 사실이다.

 

한국 사람들이 일본 라멘에서 가장 부담스러워 하는 과도한 짠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담백한 맛이다.

강렬한 자극보다는 곰탕에 부드러움을 한껏 첨가한 듯한 맛이 부담없이 느껴진다. 특히 이런 겨울날에는 날씨가 곧 반찬이니까.

 

차슈가 매우 빈약했던 게 가격대비 아쉬웠지만 어쨌든 국물에 특징을 둬서 광고하는 녀석이니 체험할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라멘 명인이 만든 메뉴는 아니라 눈이 동그레 질 맛을 느끼진 못했지만 이곳에서 한 번쯤 먹어볼 녀석으로는 안성마춤.

 

 

 

먹거리는 라멘 외에도 많고, 경마장 안에도 충분하지만 일단 몸이 따뜻해 졌으니 대만족.

밖으로 나오려는데 아주머니가 경마장 할인권 필요없냐고 물어보신다.

토카치무라에서 뭐든 구입을 하면 경마장 할인권을 받을 수 있다고.

 

버스 티켓을 끊으며 이득봤다고 의기양양하던 기분이 조금 사그라드는 정보였지만 어쨌든 이러나 저러나 손해본 것은 없다.

마침내 문을 연 경마장 입구를 통과했지만 바로 건물 내로 들어가기전에 주위 풍경을 다시 한번 담아본다.

겨울이라 앙상한 나무도 이 정도 눈이 내리면 여름만큼이나 풍부하게 잎사귀를 늘어트린 모습이 되어 그것 또한 일품이다.

 

 

 

무용지물이 된 벤치도 쌓일 부분만 쌓인 눈더미가 풍미를 더해줘 셔터를 누르게 할 정도의 쓸모는 있다.

기껏 반에이 경마 보러 왔는데 눈이 부족해서 땅바닥이 어스름하게 비쳐 보인다던가 했다면 매우 아쉬웠을텐데

이렇게 봉긋봉긋 솟아있는 벤치를 보니 참 여행운이 좋은 편이구나 싶어서 미소가 떠오른다.

 

벤치 찍으며 실실 웃고있는 사람을 옆에서 보면 어떤 모습일려나.

 

 

 

경마장 반대편 광장은 원래 아이들의 놀이공원이었던 듯.

예전에 말이 끌던 마차 등이 전시되어 있다. 여름이라면 경마에 관심없는 아이들이 한껏 뛰어놀기에 충분한 공간이다.

 

마차쪽으로 걸어간 것임에 틀림없어 보이는 흔적이 눈 위에 새겨져 있는 것으로 봐서

몇몇 아이들이 저곳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음에 틀림이 없지만, 역시 날씨가 날씨다 보니 오래 버티진 못했나 보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와 보는 경마장인데, 첫 인상은 이게 경마장인가 의아한 기분이다.

경마 관련 상품들을 판매한다는 것 외에는 그닥 특징적일 게 없는 아케이드 같은 분위기.

막상 들어와보니 조금 긴장되기도 하는게, 경마를 어디서 어떻게 관람해야 하는지조차 아는 게 없다.

 

마권을 살 생각은 애초에 없었지만 주변을 둘러봐도 어디에서 말이 보이는지 모르겠다.

오래된 상식 상 심각한 표정으로 마권뭉치를 노려보며 줄담배를 피워대는 도박 중독자들이 보이지 않을까도 싶었지만

그냥 놀러온 듯한 가벼운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들밖에 보이지 않아서 약간은 맥이 풀린 기분이기도 하다.

 

 

 

나같은 초심자를 위한 서비스정신은 철저해서 기분은 좋다.

서로우브래드 같은 일반 경주마들의 편자와 반에이 경주마들의 편자를 비교해 놓은 코너가 인상적.

편자 크기만 봐도 반에이 경주마들의 덩치를 짐작할 수 있다. 겨울용 편자의 스파이크에 가까운 위압감이 특히 눈길을 끈다.

 

정말 한국 사람들도 많이 오는건지 한국어 안내서도 있고, 터치 모니터에는 반에이 경마에 대한 전반적 상식과

표를 구입하고 당첨금 수령하는 방법까지 세심한 설명이 초심자들을 반겨주고 있다.

 

어려움을 느끼지 않게 선 굵은 애니메이션을 사용해 경마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주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데

자칫하면 인생 포기할지도 모르는 것이 도박이란 품종이라 뭔가 순순한 호의로밖에 받아들이기엔 조금 거북하다.

뭐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그냥 재미삼아 즐기는 수준으로 유지할 정신을 갖고 있을테니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니 비로소 경마장처럼 보이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반에이 경마는 트랙 길이가 200m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중계용 TV는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로또처럼 된 OMR 카드에 자신이 정한 말을 찍은 후 이곳에 넣으면 자동으로 배팅이 되는 시스템인 듯.

창구 너머에도 공간이 넓은데 저 안에서는 사람들이 바쁘게 뭔가를 계산하고 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경마는 단순히 현재 어떤 말의 상태가 좋은가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몇 대까지 경주마의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 말의 습성과 특징을 파악하고 있어야만 승률을 올릴 수 있는 머릿싸움.

트랙이 잔디인가 진흙인가, 맑은 날씨인가 비가 오는가에 따라 선천적으로 잘 달리는 말이 있기도 한데다가

기수 성격과 경주마의 상성관계 등 고려할 점이 너무 많아서 거의 학문적인 수준에 다다라 있다. 그런 고로 배당율도 로또 등의 고이윤 도박에 비해 형편없는 수준.

 

반에이 경마는 다른 경마와 달리 혈통이 단순화 되어 있어서 조금 쉬울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재미로 즐기는 것 이상의 운을 바래서는 안 된다.

 

 

 

날씨가 워낙 춥다보니 사방에서 거대한 소음을 내며 난로가 가동중이다. 바로 앞에서는 얼굴이 후끈거릴 정도로 강렬한 열풍을 내뿜고 있다.

이글거리는 난로 앞에 잠시 서 있으면 몸이 따뜻해 지지만 아무래도 경마 자체보다 경주마가 달리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은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혹한 속에서 감상해야 하니 부담감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아예 밖으로 나갈 생각도 않는 사람들도 꽤 있다.

 

 

 

2층으로 올라가 보니 이 쪽은 텅 비었다. 사람이 바글바글하지 않은 것은 좋은데 너무 황량하다.

이런 폭설 속에서는 굳이 잘 안보이는 2층에서 경기를 감상할 일이 없으니 당연한 상황이겠지만, 그래도 난로는 군데군데 켜 놓았다.

 

일단 생전 처음 와 보는 경마장이니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연신 셔터를 누른다.

낡은 시설이지만 청소 정리는 매우 깨끗해게 해 놓아서 보기가 좋다. 하지만 2층 바깥으로 나가는 출입구 중 몇 곳은 사용금지 표지판이 서 있다.

아무래도 눈을 다 치우긴 어려우니 덜 미끄러운 출입구만 개방해 놓은 듯 하다.

 

 

 

밖으로 나오니 이제 좀 경마장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눈이 오는 지금은 이곳 2층 바깥쪽 관객석이 가장 위험한 곳으로, 지붕이 눈을 전부 커버해 주지 못하기 때문.

매끈한 콘크리트 바닥에 가득 쌓이지 않은 적당한 눈더미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미끄럽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촬영은 무리일 듯.

 

다른 곳에 비하면 작은 규모지만, 일단 이 정도 경마장이라도 본인 눈에는 꽤나 거대해 보인다.

성수기때는 여기에 사람들이 가득 앉아서 말들이 말리는 모습을 보며 소리를 지르거나 하는 걸까.

 

 

 

경마장에 비해 트랙이 작은 경마장이란 참 묘하게 느껴진다.

경마장과 트랙 사이에 상당한 공간이 비어있는데 원래 뭘 하는 곳일까 궁금하다.

혹시 저 안쪽까지 걸어가 사진을 찍어도 된다면 참 역동적인 모습을 담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까지는 아무도 저곳으로 나가는 사람이 없어서 확인이 어렵다.

나중에 안내소에 한번 물어볼까 싶기도 한데 그런 거 물어보면 생초보인걸 자랑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경기가 시작되려는지 트랙 옆의 조그마한 패독에 말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가슴 속에서도 시동이 걸리는 듯 조금씩 두근거리지만 서두를 것은 없다.

눈 속에서 렌즈를 바꿔 끼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니 일단 2층 멀리서 몸을 푸는 말들의 모습을 담아본다.

 

원래 패독에서 말을 보여주는 시간은 경마에서 말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이지만

이곳에서는 어쩐지 그닥 관심 가지는 사람이 없다. 마권을 살 사람이면 대강 알고 있는 것일까.

 

 

 

조금 시간이 지나니 사람들이 패독 앞으로 몰려나온다. 저기까지는 들어가도 되는가 보다.

지붕 아래서 망원렌즈로 바꾸고 위엄넘치는 말의 모습을 좀 더 자세하게 담아본다.

과연 듣던대로 육중한 덩치를 자랑하는 말들. 기수의 허리와 지면과의 높이를 생각하니 역시 상당히 무서울거라는 생각이 든다.

 

경주마들은 기본적으로 성격이 워낙 예민해 조그만 반응에도 기수를 떨어트리는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야 한다.

고대 장군들이 보병들 옆에서 말 위에 앉아있으면 그 높이차로 인해 위압감이 절로 생겨났음에 틀림없다.

 

 

 

긴장한 말들도 많은지 몇몇 기수들은 아예 내려서 말을 끌고 걷기도 한다.

정해진 코스를 돌지도 않고 가끔 가기 싫어하며 멈춰서는 말들도 있는 걸 보면 보는 사람도 불안해진다.

 

일반 경마에서는 워낙 유전적 교배가 잦고 훈련이 충분해서 그 수가 적은 편이지만

반에이 경주마는 일단 주체못할 정도로 힘이 넘치는 녀석들이라 사고 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기본적으로 파워게임이라 성격 더럽다고 해서 배팅율이 낮아질 필요가 없기도 하고.

 

 

 

또박또박 걷지 않고 가끔 훌쩍훌쩍 앞다리를 들며 이상한 걸음을 하는 녀석도 있다.

거칠고 우락부락하게 보여도 결국 농경용으로 사람 말을 잘 듣는 말이라 기본적으로 겁쟁이임엔 틀림없다.

눈이 와서 흥분한 것인지, 관객들이 가까이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어서인지 전통적인 패독에 비하면 좀 난장판 느낌이다.

 

방한장비가 그리 만족스럽지 않은 현재의 본인 수준으로 얼마동안이나 저 밖에서 견딜 수 있을지 모르지만

좀처럼 보기 힘든 최적의 조건에서 경마를 즐길 수 있는 기회가 각오를 단단히 하고 1층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1층 경마장쪽 출입구로 다가가니 안내원들이 '눈더미 떨어질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라고 연신 외치고 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주먹만한 눈더미가 지붕에서 툭툭 떨어져 내린다. 맞으면 심히 기분이 좋지 않을테니 주의해야 한다.

위험하다 싶으면 안내원들이 손을 들어 나가려는 사람을 제지하며 눈이 떨어진 후 드나들도록 하고 있다.

 

지붕 밖으로 나오니 도심에서 보기 힘든 탁 트인 광경에 끝없이 내리는 눈이 예술 작품을 연상케 한다.

첫 번째 레이스를 시작하기 위해 말들이 패독에서 출발점으로 이동중이다. 200m 정도의 트랙이지만 가까이서 한 눈에 보기엔 역시 먼 거리다.

어디쯤 자리를 잡으면 괜찮은 모습이 나올까 고민한다. 이 경주의 클라이막스는 당연히 두 개의 언덕 부근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몰려오긴 하지만 역시 경마보다 볼거리에 관심이 더 많은 사람들 뿐이라 그리 많지는 않다.

기본적으로 지금 상황이 쉽사리 밖으로 나올 만한 분위기가 아니긴 하다. 체감온도가 영하 15도를 넘나드는 폭설 속이니까.

생애 첫 경마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흥분감에 추위도 잊고 카메라를 든 손에 힘을 주며 언덕 장애물 비스듬한 곳에 자리를 잡고 선다.

 

 

 

가까운 시각의 버스 한대를 일부러 그냥 보낸다. 어차피 동물원은 빨리 폐장하는 것이고

줄 서서 간신히 빠른 버스를 타 봤자 40분간 카메라 가방과 씨름하며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이 귀찮기도 해서.

 

30분만 기다리면 또 한대가 오는데, 매일 아침 3~4분의 전철 간격에도 늦을세라 허둥지둥대는 삶 속에서

여행중에 그 정도 여유를 부리는 것은 충분한 사치가 아닌가 생각한다.

 

관광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은 여유롭게 자신의 버스에 돌아가지만, 어제까지와는 달리 화창하기 그지없는 하늘 아래서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고운 눈더미 속의 조용한 풍경을 찍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뒷모습이긴 하지만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찍는 것이라 많이 고민했다.

하지만 머리 위에 떠 있는 펭귄 마크가 어떻게 해도 머릿속에 남아서 어쩔 수 없이 슬그머니 셔터를 누른다.

 

딱 사람이 앉을만한 자리를 고려해서 찍어놓은 마크는, 마치 동물원에 다녀온 사람들의 마음 속 생각을 떠올려 놓는 듯한 인상을 준다.

본인은 펭귄의 귀여움과 함께 이상행동을 보이던 대형 동물들에 대한 애처로움이 뒤섞여 있어서

저기 앉으면 어떤 마크가 떠오를까 씁쓸한 기분이 살짝 들지 않는것도 아니다.

 

 

 

기다려서 탄 버스다 보니 어렵지 않게 자리에 앉아 편안하게 이동했다.

창문이 뿌옇게 물들어 정겨웠던 시골길 풍경을 카메라에 담진 못했지만,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은 눈으로만 만끽하는 즐거움이 있다.

 

아사히카와 시내에 도착해도 시간은 그리 늦지 않다. 겨울이라 해가 빨리 진다는 점을 감안해도 지금 숙소로 돌아가기는 아쉽다.

오늘은 여행 중간에 휴식을 취하는 느낌으로 일정을 잡아놨기 때문에 더 이상 할 일은 없다.

그냥 시내를 어슬렁거리다가 맛있는 거나 먹고 돌아가는 일 뿐.

 

은근히 본인 서식지인 대구 동성로와 닮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아사히카와 시내의 모습.

아사히카와 역에서 일직선으로 주욱 나 있는 길은 소박하긴 해도 겨울 축제의 흔적이 조금은 남아있다.

삿포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니 아직까지는 도시라는 느낌이 남아있지만

내일 목적지인 시레토코와는 너무나 분위기가 달라서 묘한 기분이 든다.

 

 

당연하게도 시레토코엔 패스트푸드점 같은 곳이 없으니 일기도 좀 쓸겸 해서 눈에 보이는 맥으로 들어간다.

하교시간인지 교복 입은 학생들이 수다를 떨고 있다. 얼핏 들어보면 역시 일본의 국민게임 몬스터 헌터 이야기.

 

일본의 맥도날드는 기간제 메뉴가 많아서 항상 색다른 녀석을 주문하곤 하는데

동계올림픽 기간이라 올림픽에서 유명한 각국 나라들을 이미지해서 만든 버거가 있어 그걸로 선택.

 

버거가 아니라 감자튀김에 바리에이션을 준 메뉴였다. 치즈를 주욱 뿌려서 먹는데, 따듯한 감자튀김과 함께 하니 참 고소하고 맛있다.

치즈도 듬뿍듬뿍 주는 덕에 조금 느끼하긴 해도 한 끼 식사로 문제가 없을 정도.

 

 

 

버거는 예전에 먹었던 매우 특징적인 몇몇 메뉴들과 비교해 큰 차이는 없다.

한국과 비교해 워낙 기간한정 메뉴가 많아서 자꾸 먹다보면 뭐가 다른지 헷갈리는 일도 생긴다.

 

추운 바깥에서 거닐다 들어와 먹는 음식치고는 조금 따스함이 부족하지 않나 싶지만

느긋하게 찍은 사진 정리하고 일기 쓰는데는 패스트푸드점 만한 곳이 없다.

 

 

 

조식 챙겨먹고 길을 나서서 처음 뱃속에 집어넣은 음식이라 조금 행복해진다.

 

하지만 아사히카와는 홋카이도에서 간장 라멘이 가장 유명한 곳이라 그걸 먹지 않고 보낼수는 없다.

점심을 먹지 않았으니 햄버거 하나 먹고 라멘 정도는 가벼울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한동안 뱃속에 뭘 집어넣지 않다가 갑자기 먹으니 생각보다 배가 불러온다.

 

산책 좀 하고 배를 진정시킨 다음 어떻게든 라멘만은 먹어야겠다고 다짐.

 

광장에는 색소폰을 부는 반라의 아저씨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고양이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 추운 겨울에 반라라는 설정이 좀 안타까웠는지, 아저씨와 고양이 목에 목도리가 둘러져 있는 모습이 또 정겹기 그지없다.

 

한국에는 그다지 알려지 않지 않지만, 이 작품은 쿠로카와 아키히코(黒川晃彦)라는 작가의 작품으로

이곳뿐만 아니라 일본 각 지역에 상당히 많이 세워져 있다. 물론 포즈나 들고 있는 악기가 다르다던다 하는 차이점은 있지만.

 

쿠로카와씨는 '조각은 사람이 참가함으로서 완성된다' 라는 철학을 가지고 대부분의 동상을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다녀가는 벤치에 설치해 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항상 윗통을 벗은 아저씨와 그 옆에 앉아있는 고양이, 혹은 비둘기가 세트로 전시되어 있어 푸근한 인상을 풍긴다. 어쩐지 미야자와 켄지의 향기가 느껴지는 듯.

일본의 왠만한 도시에는 어딘가 비슷한 포즈를 한 동상이 세워져 있어서 일본 여행을 많이 즐기는 사람이라면 이 동상 찾는것도 재미 중 하나.

 

 

 

여름이라면 아직 대낮이지만 홋카이도의 겨울밤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온다.

막무가내로 여행을 즐기는 본인같은 입장에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해 몸에 무리가 가기 전에 자연스레 휴식처로 인도하는 효과가 있다.

 

배가 그리 꺼지지 않았지만 어찌됐든 아사히카와의 간장 라멘만큼은 먹어보고 가야한다는 결심에

적당히 음식점이 많아보이는 거리를 이리저리 걸어본다. 원래 간장 라멘을 좋아하기도 해서 뭘 먹어도 그닥 후회는 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5시 쯤이라 저녁먹기엔 이른 시간인지, 아늑해 보이는 가게 안은 한 사람도 없다.

너무 일찍 와서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라멘 매니아인 본인이 아직 섭렵하지 못한 아사히카와 간장 라멘에 대한 갈망 탓에 어쩔 수가 없다.

 

라멘만 먹기엔 또 뭔가 아쉬우니 라멘집의 정식이나 마찬가지인 볶음밥과 세트로 주문해 본다.

좀 전에 햄버거 세트를 먹고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싶지만, 10시간 가까이 공복으로 돌아다녔으니 이 정도 사치는 즐겨도 되리라 생각.

 

볶음밥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일반적인 레벨이다.

찰기가 부족한 쌀과 강한 화력이 만나야만 만들어 낼 수 있는 고슬고슬한 식감은 라멘을 먹기 전 준비운동으로 딱 맞는 느낌.

볶음밥에 양념이 충분히 스며들어가 있어서 밥과 라멘을 번갈아 먹기에 약간 번잡한 느낌이 들어 항상 볶음밥을 다 먹은 후에 라멘을 잡는다.

 

추운 겨울날 하루종일 돌아다니다 비로소 접하는 진하고 뜨거운 국물의 맛은 말로 표현할 필요도 없다.

간장 라멘은 겉보기에 돈코츠 라멘 등등보다 소박해 보이긴 해도 이 목 깊숙한 곳까지 자극하는 얼큰하고 칼칼한 느낌은 중독성이 있다.

배가 부른것도 잊고 연신 국물을 퍼넘기는데, 겨울의 라멘 국물은 10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흡입시간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황홀하다.

 

 

 

과연 삿포로와 쌍벽을 이루는 라멘 명소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맛이다.

연달아 햄버거와 볶음밥, 라멘을 흡입해서 배는 그야말로 터질 듯 비명을 지르지만 이 맛을 즐겼다는 점만으로도 대만족할 뿐.

 

여행중에는 편의점에서 소소한 야식을 구입해 즐기는 것이 일상이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더 이상 먹을 필요가 느껴지지 않는다.

산책하는 겸 슬슬 걸어다니다 숙소로 돌아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기만 하면 오늘의 일정은 끝이다.

 

뭔가 무지막지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삿포로의 눈축제 기간과 달리 적당히 생색만 내는 듯한 분위기의 아사히카와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터질듯한 배를 붙잡고 가볍게 산책하기에 적당할 정도의 고요함이 매력이다.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녹색 물결은 산과 들을 표현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완전히 대도시화된 삿포로와 달리 아사히카와는 아직 도시이면서도 대자연의 품 안에 안겨있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라

슬슬 적응하기 어려워져 가는 대도시 사람들의 스타일과 달리 적당히 느긋함을 유지하고 있는 기분이 도시 곳곳에서 풍겨온다.

 

 

 

한 바퀴 돌아 다시 시내쪽으로 나오니 이제서야 겨울밤 분위기가 살아나는 중.

아사히카와 역도 굉장히 반듯한 느낌이었는데, 이쪽은 전체적으로 뭔가 단정한 분위기를 풍긴다.

양쪽 보도에는 눈이 싹 치워져 있어도 중앙 부분은 아직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그냥 내버려 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정돈한 눈길로 보인다.

 

동물원에만 신경이 팔려서 막상 아사히카와라는 도시는 정말 겉만 한번 핥아보고 떠나는 식이 되어버렸지만

배만 꺼져있다면 당장 달려가서 한 그릇 더 해치우고 싶은 쇼유 라멘의 맛은 꽤나 오랫동안 침샘을 자극할 듯 싶다.

 

 

 

숙소에 들어가보니 친절하게스리 휴대폰 충전 잭을 상시 비치해 놓았다.

매번 짐을 풀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카메라와 휴대폰 충전 케이블을 꺼내는 것이라, 이런 소소한 편의도 기분을 좋게 만든다.

 

미니 USB 뿐만 아니라 아이폰과 구형 휴대폰의 단자까지 전부 구비해 놓아서 그 꼼꼼함에 만족.

자전거 여행 때 베낭을 도둑맞아서 그 안에 있던 충전 케이블까지 없어지는 비극이 일어난 적이 있다.

나가사키 한국 대사관에까지 가서 알아봤지만 워낙 구형 휴대폰이라 충전 단자를 구할 길이 없었다.

결국 두 달 가까이 극도로 전력을 아껴가며 달린 끝에, 오키나와에서 상봉 겸 관광하러 오신 엄니에게서 여분의 충전기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당시엔 단자 통일도 전혀 되어있지 않았던 시대라 참 애를 많이 먹었다. 기술의 발전과 규격의 통일은 체감적인 편의성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목욕을 하고 나서 창밖을 보니 조금 전까지 청명했던 하늘이 거짓말인 듯 폭설이 쏟아지고 있다.

눈은 내리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지만 바깥 쪽 도로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야를 가리는 모습은 박력이 있다.

이제 슬슬 다이내믹한 홋카이도의 겨울 날씨에도 익숙해 지고 있어서 별 걱정없이 침대로 들어간다.

어차피 내일은 시레토코에 도착하는 것만이 유일한 일정이다. 따로 뭔가 즐길 시간이 없으니 그냥 열차 밖의 풍경만이 나를 기다릴 뿐.

 

처음 삿포로 역을 봤을 때가 2008년 즈음이었는데, 그때의 충격은 상당했다.

자전거로 도쿄에서 토마코마이(苫小牧)까지 달려왔기 때문에 중간에 한참동안 시골 마을만 보다가

이 거대한 역사를 보게 되니 삿포로가 생각보다 정말 큰곳이구나 하는 임펙트가 있었던 듯.

 

옆으로 길쭉한 것이 아니라 이 뒤쪽으로 건물이 길에 늘어선 형태니까 실제 크기는 정말 크다.

물론 옆에 백화점, 호텔, 요도바시 카메라 등의 입점업체가 건물과 이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커 보이는 것이긴 하지만.

 

지금은 그냥 크고 멋진 역 중에 하나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지만

여전히 그때의 추억이 지금의 나에게 있어 삿포로의 인상을 긍정적으로 만들어 준 영향은 이어지고 있다.

 

 

 

예전보다 많이 더워지는 바람에 삿포로 눈축제도 괜찮을려나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았지만

원래 눈축제 조각용 눈은 모자라면 밖에서 사오기까지 한다니까 별로 문제가 되진 않는 듯 하다.

겨울엔 여전히 눈이 많이 내리고 기온도 그럭저럭 추워서 눈이 녹지는 않는다고 하니.

 

겨울 홋카이도는 처음 와 보는데, 곳곳에 비치된 미끄럼 방지 모래주머니 박스가 눈길을 끈다.

눈 보기 힘든 지방에 살아서 이런 것도 신기하다. 물론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적혀 있다.

 

 

 

6개월 전에 예약해서 저렴하게 숙박 가능한 호텔은 역에서 10분만 걸으면 되는 가까운 곳이지만

전망이 좋은것도 아니고 빌딩 골목 사이에 조심스럽게 웅크리고 있어서 관광을 즐기려는 기분과는 좀 동떨어진 느낌.

 

짐을 풀고 잠깐 한숨을 돌렸는데, 전날 서울에서 나침반님과 실컷 놀고, 수면시간이 2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그런지

생각보다 많이 피곤하다. 침대에 누으면 다시 일어나기가 힘들 것 같아서

이 날을 위해 준비한 비니와 손목 방한대 등을 착용한 후 밖으로 나온다.

 

원래라면 손가락까지 덮은 장갑을 이용하겠지만, 사진 찍기가 영 불편해서 위험을 감수하고 손목 밑에서 손가락 밑까지만 올라오는 방한대를 사용한다.

많이 추울때를 대비해 장갑도 가지고는 왔지만 쓰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추위에 강한 편이기도 하고 삿포로는 의외로 그렇게까지 춥지 않다고 하니.

 

확실히 겁낼만큼 추운 편은 아니지만 쌓여있는 눈을 보면 확실히 많이 오는구나 싶다.

서울에 눈 내리는 것만 봐도 재미있는 대구의 환경을 생각해 보면, 이미 이곳은 별천지나 마찬가지.

겨울의 눈은 자비가 없어서 여름에 당당히 서 있던 자전거들은 비참한 모습으로 널부러져 있다.

 

 

 

눈이 그냥 폭폭 쌓인게 아니라 도보에 있던 눈을 위에 쌓고 쌓아서 얼음층처럼 변해버린 녀석들이라

저 밑에 깔려있는 자전거들의 안위가 걱정된다. 어차피 대부분 무단 방치된 녀석들일테니 봐 주는 사람도 없겠지만.

눈축제 보려고 왔지만 눈 자체가 신기한 나로서는 이런 모습도 매우 즐거운 관광 볼거리다.

 

 

 

사방에 눈길 천지라서 무거운 카메라 세트 들고 미끄러지지나 않을까 걱정했지만

의외로 서울처럼 빙판길 때문에 쭐떡쭐떡 미끄러지는 느낌은 아니다.

 

도보쪽은 상당히 공을 들여 치워놓았고, 쌓여서 얼어버린 길은 모래를 충분히 깔아두었기 때문에

체감되는 미끄러움은 전날 서울에서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덜하다. 거의 평지 걷는 느낌으로 움직일 수 있다.

 

 

 

삿포로가 홋카이도 안에서 별로 추운 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시내를 흐르는 조그만 하천은 거의 다 얼어있다.

눈축제를 보고 나면 삿포로 유일의 비경인 시레토코로 향하게 될 텐데, 그 쪽은 살짝 걱정이 된다.

 

 

 

이제는 친숙하기까지 한 TV탑의 모습이 보인다.

 

처음 오는 사람들은 저게 시계탑인줄 알지만 사실 시계탑은 따로 있다. 워낙 작고 아담해서 처음엔 놀라지만.

저 시계탑을 기점으로 현 장소에서 오른쪽 대로가 전부 눈축제 개설장인데, 지금은 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

눈축제는 조명이 밝혀지는 밤이 훨씬 더 다채로운 구경이 가능하다고도 하고

낮에 보는 눈축제는 어차피 내일 Y 양과 만나서 하루종일 돌아다닐 예정이니까. 미리 예습해서 즐거움을 덜어내고 싶진 않다.

 

그래서 가능하면 TV탑 앞까지는 가지 않기로 생각하며 천천히 눈 덮힌 풍경을 즐긴다.

 

 

 

일본인들에게 있어 홋카이도는 메이지 이후의 개척정신 넘치는 강인한 이미지로 인식된다.

선진 문물의 시험장이자 계획도시의 표본이기도 한 삿포로와 그 주변 도시들은 서양식 건축의 흔적도 많이 남아있다.

 

사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몰아내며 확장하던 경우와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좋게만 볼 수는 없는 현실이지만.

 

조그만 성당이지만 주변 모습과 이질적인 매력이 셔터 한번 누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여기서부터 언뜻언뜻 눈축제 전시장 모습이 아른거리지만 지금은 꾹 참는다.

일단 삿포로에서 빠뜨릴 수 없는 라멘이라 한 그릇 먹고 돌아가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생각에.

 

맛있는 부분은 나중에 먹는 성격이라, 지금 눈축제 구경 시작했다간 아무래도 저녁에 기진맥진해 질 것 같으니까.

눈은 내리지 않지만 역시 천천히 걸어다니고 있으니 살갗이 노출되어 있는 부분은 꽤나 매섭게 느껴진다.

 

 

 

지금까지는 딱히 눈축제가 아니라도 눈 보는 재미에 흠뻑 빠져서 아쉬운 기분이 들지 않는다.

설령 눈 보기 힘든 대구 지방 출신이 아니라 하더라도, 대도시 안에 이만큼 눈이 쌓여 있는 모습을 보는 기회란 흔하지 않으리라 본다.

 

일주일간 열리는 눈축제의 2/3 기간쯤에 도착했기 때문에 비교적 사람이 적은 편인지

몇몇 중국인 관광객 외에는 나름대로 한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흐트러지지 않게 쌓인 눈을 보는 건 언제나 즐겁다.

 

 

 

삿포로가 대자연의 축복을 듬뿍 받은 곳이긴 한데, 개척민의 피가 남아있는 탓인지 의외로 도시에서 쓰레기 보기가 어렵지 않은 곳이다.

특히 반달리즘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겠지만 스트리트 페인팅의 흔적은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도 특징.

사방이 눈이라서 쓰레기 꽂아놓고 가기도 쉽긴 하다.

 

쓰레기라는 점을 배제한다면 흰 눈속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표현중인 금속 캔의 모습이 나름 인상적이기도 하다.

 

 

 

삿포로는 삿포로 역에서부터 메인 공원인 오오도리(大通り) 공원까지가 한 블럭,

오오도리 공원에서 유흥가인 스스키노(すすきの) 거리까지가 또 한 블럭으로 묶어 생각하는게 편하다.

두 구역을 한꺼번에 가로지르는 일은 도보로는 30분쯤 걸리기 때문에 조금 거리가 있지만, 블럭 안에서 돌아다니려면 어디든 도보로 쉽게 갈 수 있다.

 

삿포로 역과 스스키노엔 엄청난 수의 숙박지가 밀집해 있기 때문에, 여행자들은 어디를 선택해도 오오도리 공원까지 손쉽게 이동 가능하다.

물론 본인 경우엔 삿포로 이외에도 여러 지역을 돌아다닐 생각이라 역 쪽에서 가까운 곳에 숙소를 선택하는게 조금이라도 수고를 덜 수 있지만.

 

오오도리 공원 근처에 위치한 시계탑은 규모는 작아도 역사있는 관광 명소이기 때문에 사람들 모습이 꽤 보인다.

시계탑 정문쪽으로 향하기 전에 귀엽게 만들어놓은 눈사람이 있어서 먼저 담아본다. 입 모양이 만화적 데포르메에 충실한 모습.

 

 

 

몸은 상당히 피곤하지만 지금까지는 겨울 삿포로라는 첫 경험과, 익숙한 지형지물의 묘한 콜라보로 인해

어디를 보며 돌아다녀도 재미있다는 느낌 뿐이다. 오히려 이런 경우엔 메인 이벤트에 속하는 눈축제의 감흥이 크지 않게 되는 역효과가 조금 걱정되는 편.

 

웅장함과 거대함은 사람의 힘으로 만든 것보다 자연이 만들어낸 쪽에 훨씬 매력을 느끼는 성격이라서

사실 이번 삿포로 눈축제는 그냥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 이외엔 별로 기대하는 게 없다.

 

몸이나 풀고 나서 진짜 목표인 시레토코까지 가는 전초기지 역할을 할 뿐이라서, 삿포로는 그냥 마음 비우고 즐기기만 하면 된다.

 

 

 

삿포로 시계탑은 그 역사성 때문에 이곳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로 알려져 있지만

좀 전에 걸어오면서 찍은 이름모를 성당과 비교해도 결코 특이한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 평범하고 작은 건물일 뿐이다.

외국에서 기대감을 갖고 들어오는 관광객들에게는 그냥 기념 사진이나 남기는 정도의 과정밖에 남지 않는 소박한 곳.

 

더구나 안에 들어가는 데는 요금까지 들기 때문에, 어지간히 시계탑의 역사에 대해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추천하지는 않는다.

본인 역시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고.

 

 

 

그래도 시계탑 주변에는 여러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손바닥만한 눈사람이 늘어서 있어 관광객들의 아쉬움을 달래준다.

커플들이 좋아할 만한 하트모양 연결 고리의 선명함이 매력적인데, 수컷으로 보이는 쪽이 의도와는 다르게 좀 우울해 보이는 것이 포인트.

 

 

 

여담이지만, 눈 사진을 마음먹은대로 찍어내는 건 초보인 본인에게 여전히 힘든 일이다.

계조와 DR이 만족할만큼 뛰어나다면 걱정없지만 아직 카메라라는 기계에서는 구현하기 어렵다.

 

특히나 눈 찍을 일이 거의 없는 지역에서 살다 보니, 눈만 내리면 항상 평소보다 더 초보가 되는 기분이 든다.

이번엔 삿포로에서 열심히 연습해서 앞으로 조금씩이나마 만족할만한 결과물을 담을 수 있도록 노력중.

 

 

 

특정 지역이나 가게에서 마스코트를 만들어 홍보하는 데에 어떤 제한이나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계탑 옆의 라멘 가게에서 내 놓은 듯한 프란체스카라는 마스코트 캐릭터는 좀 의외다.

 

라멘과 무슨 접점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서양식 건물이라고 고딕풍의 의상을 선택한 것인지. 거기다 안대는 왜 달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국민적인 인지도를 자랑하는 하츠네 미쿠가 탄생한 곳이다 보니 이런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

 

점심은 라멘으로 정했기 때문에 흥미가 동하긴 했지만, 캐릭터에 끌리기 보다는 조금이라도 맛있어 보이는 곳을 찾아가려 하니 일단 패스한다.

 

 

 

올해로 건설 135주년이 되는 시계탑은, 거대화 된 삿포로에 비해 아담하게 위축된 듯한 분위기밖에 느껴지지 않지만

길지 않은 역사라도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싶은 사람들의 노력은 외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10분만 구경하면 더 볼것이 없는 곳이긴 해도, 역시 현대적 건물만 잔뜩 늘어서 있는 것 보다는 보기가 좋지 않은가.

 

 

 

고드름도 평소엔 그저 길어봤자 팔목 정도밖에 되지 않는 녀석들만 봐 왔는데

여기서는 상반신 정도 고드름은 그냥 지천에 널려있다는 점이 또 신선하게 다가온다.

 

아무래도 저 녀석이 떨어져서 사람과 접촉하면 단순한 사고로 끝나지 않을 듯 하니

고드름 주위에서는 조금이라도 조심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눈 촌놈의 괜한 걱정일수도 있지만, 실제로 예전 삿포로 눈축제 때 전시용 눈 조각상이 무너져 관람객을 덥치는 사고도 발생했다고 하니

스스로 몸 추스려야 하는 겨울 여행엔 무조건 조심하는게 상책이다.

 

 

 

한적한 평원 언덕즈음에 서 있으면 딱 분위기 좋을만한 시계탑이지만

위치가 현 삿포로의 최중심 주변이기 때문에 근처엔 빌딩들로 가득해서 매력이 살지 않는 느낌.

 

실제로 이 시계탑은 옛날 삿포로 농대에 속한 건물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엔 정말 분위기 살아있는 모습을 보여줬었다.

 

 

 

반쯤 얼어버린 손으로 렌즈를 교채하는 것도 쉽지 않아서, 일단 망원렌즈로 교체 후에는 일부러라도 망원으로 건질 만한 피사체를 찾게 된다.

시계탑 건너편에 위치한 이 묘한 정체성의 음식점은 그 좋은 대상으로 손색이 없다.

 

현 홋카이도 대학의 초대 총장이었던 W.S 클라크의 흉상이 가리키는 손끝에 늘어서 있는 맛있는 식재료들의 모습은 매우 초현실적이다.

라멘 목표가 아니었다면 한번 들어가보고 싶었던 센스있는 식당.

 

 

 

한국 사람들에게도 유명한 'Boys, be ambitious' 라는 격언의 주인공인 클라크의 모습은

묘하게 쌓여있는 눈과 더불어 굉장한 인상을 남겨준다.

 

야심을 가지고 맛있게 밥을 먹으라는 의미인지, 팝아트적인 조합이 사진 찍기에 더할나위 없이 좋은 분위기를 풍긴다.

 

 

 

좋게 말하면 예의바르고 나쁘게 말하면 소심한 본토 사람들의 성격과 달리

풍요로운 자연과 거친 환경을 자랑하는 홋카이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뭔가 자유분방하고 낙천적인 성향이 있다.

물론 혹독한 겨울을 생각하면 의외로 사색적인 느낌을 풍기기도 하지만, 적어도 삿포로라는 도시는 젊은 혈기가 넘치는 곳임에 틀림없다.

 

자전거 주륜 금지구역에 당당하게 세워놓는 대담함은 말할것도 없이, 그림 그릴만한 공간엔 빠지지 않고 재미있는 그래피티들이 난립해 있다.

주인 입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미지수지만 개인적으로 삿포로에서는 이 정도 관용은 용납되어도 크게 문제가 없을거라는 기분이 든다.

 

 

 

남한 면적의 80%나 되는 대지에 인구는 겨우 600만도 되지 않고, 그것도 인구의 70% 이상이 삿포로 주변에 밀집해 있는 곳이라

자연스럽게 삿포로 이외 지역을 연결하는 대중교통이 매우 미비한 탓에, 이곳에서는 자동차가 매우 중요한 이동 수단으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겨울의 눈보라에도 거침없이 운전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홋카이도에서 출고되는 자동차들은 본토와는 다른 타이어를 장비한 채로 나온다.

 

걷다가 우연히 만난 볼보 대리점에는, 요즘들어 디자인에도 신경쓰기 시작한 회사의 기조를 반영이라도 하듯 멋들어진 녀석이 전시중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눈이 아니라 얼음을 깎아 만든 조그마한 조각상이 진열되어 있다.

삿포로 눈 축제가 워낙 유명한 녀석이다 보니, 축제 기간중엔 도시 곳곳에 볼만한 조각상들이 널려 있다.

 

 

 

회사 입장에서 본다면 매출과 별 상관없는 지출일 수도 있겠지만

도시를 대표하는 축제에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관광객들을 즐겁게 해 준다는 취지를 생각한다면

구성원 모두가 합심해서 축제를 지탱한다는 근본적인 부분에서 좋은 평가를 줄 수 있다.

 

한국에서 축제란 조직위원회에서 차려놓은 밥상을 시민들이 퍼먹기만 하는 남의 집 불구경 같은 인상을 지울수가 없는데

이런 시민 참여적 축제가 제대로 열리려면 앞으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야 할까 아쉬워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겨울 날씨란 처음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다가도, 시나브로 추위가 뼛속까지 사무치는 느낌이기 때문에

슬슬 손끝의 감각은 무뎌지고 볼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니 뜨근뜨끈한 라멘의 유혹을 물리칠 수가 없다.

 

홀로 여행자라면 선뜻 들어가기도 꺼려질 정도로 고풍스러운 느낌의 한 오래된 라멘집 간판이 보여서 결심하고 문을 연다.

창업 40년은 넘어보이는 반 목조 건물의 내부는 옻칠한 검은 인테리어가 라멘집이라는 이미지와는 다른 중후함을 풍긴다.

 

축제 기간이라 라멘과 주먹밥 세트가 나름 저렴하게 판매중이라 고민없이 주문해 본다. 라멘은 삿포로의 주류인 미소라멘으로 선택.

 

풍부한 토핑과 완벽한 완성도의 반숙 계란, 짜릿함이 느껴지는 진한 미소 국물의 조합이 추위와의 완벽한 대칭점으로 느껴진다.

처음 몇 숫갈은 얼어붙어서 콧물까지 나올 정도의 얼굴 탓에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지만

몸이 풀리니 전신을 자극하는 강렬한 맛이 모세혈관에까지 스며드는 듯 하다.

 

 

 

위에는 연어알, 속에는 연어살로 무장한 주먹밥이 세트 메뉴로 따라나온다.

사계절의 변화가 극단적인 곳에서 나는 쌀은 찰기와 꼬들꼬들함이 절묘히 조화된 우수한 품질을 자랑한다.

 

추운 날씨탓에 라멘의 국물이 조금이라도 식기 전 열심히 흡입하다 보니, 주먹밥을 먹을 타이밍이 조금 애매하다는 게 살짝 아쉽긴 했다.

일본 라멘이 원래 짠 편이지만, 삿포로의 특제 미소라멘은 그 농후함 만큼이나 짜기도 정말 짠 편이라

이걸 맛있게 후룩후룩 먹는 한국인은 나름 일본 문화에 익숙해 진 사람이라 봐도 될 듯.

 

아마 적지 않은 사람들은 국물이 짜다고 원성을 낼 법 하다. 이거 한그릇 먹고 나면 몸이 퉁퉁 부는게 느껴질 정도로.

실제로 일본에서도 라멘은 그냥 별식으로 가끔 먹을 정도지, 이걸 매 끼마다 먹다간 몸이 남아나질 않으리라 생각한다.

 

나야 라멘을 워낙 좋아해서 몸 생각 하지 않고 여행중엔 1일 1라멘 원칙을 철저하게 고수하는 편이긴 하지만.

 

후끈거리는 뺨과 함께 다시 숙소로 돌아와 옷을 벗고 침대에 몸을 누였다.

TV를 틀고 방송에 집중하려 해 보지만 눈꺼풀이 감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조금이라도 방송을 즐겨보고 싶지만, 아무래도 한두 시간이라도 눈을 붙였다가 떼어야지만 야간 눈축제를 볼 수 있을 듯 하다.

 

생각과는 달리 야간 눈축제는 9~10시 즈음에 라이트를 전부 꺼버리기 때문에 심야에 즐기기엔 힘들다.

삿포로엔 3일간 체류할 예정이라 아직 기회는 있다고 생각하며, 일단 8시 쯤 다시 나가기로 하고 체력 보충을 위해 TV 를 전등삼아 눈을 감는다.

 

  

 

 

키소 후쿠시마는 요즘 원전문제로 소란스러운 그 후쿠시마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나가노현 나카센도 역참마을로 유명한 곳이다.

 

이런 산골마을이 나름 유명했던 이유는 예전 에도 막부시대 쇼군이 지방권력 견제를 위한 '산킨 코타이'(參勤交代) 제도 때문.

쇼군의 영향력이 미치기 어려운 변경지 영주들을 불러들여 수도 에도에서 1년, 자신의 영지에서 1년 근무하게 하는 근무지 이동 제도였다.

영주의 가족들 역시 에도로 불러들여 사실상 인질 역할을 했기 때문에 영주들에게는 경비 부담도 크고 힘들었던 제도.

비인간적인 제도이긴 하지만 권력 유지에의 열망은 이런 것쯤 눈에 밟히지도 않을 듯 하다.

 

아무튼 그 산킨 코타이 제도로 인해 지방과 에도를 오가는 사람은 줄어들 줄 몰랐고

에도로 향하는 주요 행로였던 이곳 키소 후쿠시마는 덕분에 끊이지 않는 여행자들을 위한 숙박업으로 번성할 수 있었다.

 

 

 

이곳 키소 후쿠시마에서는 당시 행렬을 재현하는 축제를 1년에 한 번씩 열고 있는데

본인이 이곳에 머물렀던 2009 년도엔 비가 심하게 와서 축제가 중지될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단순한 축제라면 비가 와도 큰 문제 없겠지만

이 가장행렬에 사용되는 의상이나 소도구들은 실제로 오래 되기도 한, 상당히 가치있는 소품들이라

비를 맞아도 될런지 하는 주최측의 고민이 있었다고. 다행히 비닐 비옷을 덮긴 했지만 축제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예전에 비해 상당히 규모가 축소되고, 관광객이 오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어른들이 많았는데

비 때문인지 그런 걱정 때문인지 조랑말 위에 탄 영주의 얼굴이 조금 더 엄숙해 보이는 듯 했다.

 

실제로도 사실상 인질로 불려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기분 좋게 출발할 수 있을리가 없었을 듯.

에도까지는 결코 순탄치 않은 길이라, 쇼군에게 바치는 진상품과 여행 도구들, 시종들과 호회무사까지 합해서 100여명이 넘는 무리를 이루었다고 한다.

의도는 못마땅하지만 그 여파로 인해 산속 역참마을들이 번성하게 된 아이러니함이 돋보이는 역사의 흔적.

 

 

 

키소의 영주가 키소 후쿠시마에서 에도까지 향하던 길을 마을 안에서 압축해서 재현하는 것이 축제의 본편.

원래 키소에서 에도까지는 7개소의 관문을 지나가야 했는데, 축제에서 실제로 에도까지 갈 수가 없으니

마을 각각의 지점에 가상의 관문 7개를 새워놓고 그곳을 천천히 지나가는 것으로 해결해 놓았다.

 

천천히 행렬 뒤를 따라갈 수도 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만 당시엔 비가 많이 와서 사람들의 참을성도 옅어진 상태였고,

본인은 원래 아르바이트 중에 사장님이 한번 가보라고 시간을 내주셔서 잠깐 들렀던 터라 그렇게 느긋하게 돌아다닐 순 없었다.

 

그래서 자전거 타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거기서 쿠루마야의 진짜 사장님(?)을 만나게 되었다.

사실 쿠루마야의 주방을 담당하는 치프를 사장님이라고 불러서 그냥 입에 붙어 버린 셈이데

서류상 쿠루마야의 진짜 사장님은 치프의 와이프의 오라버니 되는 분이다.

몸이 안좋아서 간간히 보조 업무만 할 뿐이라 실질적으로 가게를 이끌어 가는 분은 당연히 주방의 치프인데

앞서 말했듯 다들 친인척 관계에다가, 어릴 적부터 이 마을에서 같이 살아온 사람들이라 그런 거 별로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

 

여담으로, 치프와 와이프분의 젊은 시절 열애 행각은 마을 안에서도 유명했다는 듯.

 

아무튼 거의 모든 축제 준비를 마을 사람들이 직접 해 온 탓에, 진짜 사장님도 며칠 전부터 열심히 일 돕고 있다고.

굽고있던 곤들매기(

 

 

 

 

 

 

 

 

 

 

 

 

 

 

 

 

 

 

 

 

 

 

 

 

 

 

 

 

 

 

 

 

 

 

 

 

 

 

 

 

 

 

 

 

 

 

 

 

 

 

쨍쨍한 날이라서 그림자도 더욱 선명해지는 시간인데

멍하니 이 거리를 쳐다보고 있으니 각잡힌 그림자가 테트리스의 블럭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8시에 조식으로 주먹밥 두 개 먹은것 외에는 3시가 될때까지 아무것도 입에 넣은게 없어서일까

산바람과 청명한 공기덕에 기분좋은 더위를 만끽하고는 있지만 살짝 멍한 기분이 든다.

한창 운동할 때 가끔 느꼈던 가벼운 공복감인데, 그럼에도 왠지 이곳 거리에서 뭔가 먹고싶지는 않다.

 

아무래도 관광객이 많아서, 사람 많은 곳에서는 어찌됐든 별로 식사하고픈 생각이 없다.

나이먹을수록 이건 거의 강박관념에 가까워지고 있는데, 평소엔 별 신경 안쓰지만 여행때는 항상 원점이다.

사실 어쩔 수 없는게, 여행중 일기를 쓸 만한 장소와 시간이란 게 밥 먹을때 밖에 없기 때문에

사람 붐비는 식당에서 혼자 테이블 하나 차지하고 시간마저 길게 앉아있기가 부담스럽다.

 

 

 

물이 맑은 산간지방에서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메밀요리가 맛있기로 되어 있다. 메밀이란게 건강한 환경과 깨끗한 물만 있으면 잘 자라는 녀석이라.

이쪽 거리에서도 어렵지 않게 히다 생메밀이라고 광고하는 가게가 많은걸 보니 나름 실력있는 가게가 많을 듯 하다.

 

본인은 며칠 뒤에 추억의 소바를 먹으러 갈 예정이라, 그 외의 장소에서 소바를 먹을 생각은 전혀 없지만

사실 일본의 소바가 더운 여름에 먹어야 제맛이라는 사람은, 메밀의 특성을 잘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메밀수확이 시작되어 가게에 햇 메밀이 들어오는건 빨라도 9월 중순은 넘어야 한다. 평균적으로 10월 말에 나온다.

생메밀을 수타로 만드는 가게는, 이 시기가 되면 가게 앞에 '햇 메밀 입고'라는 간판을 걸어놓을 정도로

그해 첫 메밀은 신선하고 향기가 진해서, 1년중 메밀이 가장 맛있는 시기는 10월 하순부터 11월 정도다.

 

유명한 메밀가게가 대부분 추위가 빨리 찾아오는 산간지방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 메밀은 더운 여름의 별미가 아니다.

물론 이건 소바에 대해 정통한 사람이나 하는 생각이고, 사실 쯔유라고 불리는 찍어먹는 간장소스 맛이 소바에서 제일 중요한 탓에

소스 찍지않고 소바의 맛과 목넘김 만으로 품질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상당수가 업계 종사자일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일본의 유명한 소바집은, 기온의 변화에 따라 쯔유의 배합과 농도를 조절할 정도로 장인정신이 충만한 사람들이라서

이렇게 말하는 본인도 여름소바와 겨울소바의 맛을 구별할 수는 없다. 그냥 전통있는 소바집에서 일하며 주워들은 지식.

 

 

 

기념품점에 들어가진 않지만, 몇몇 가게 앞에는 조상들이 사용했던 물건들을 전시해 놓기도 해서 좋은 구경거리가 된다.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시골 사람들은 정말로 물건을 잘 버리지 않다 보니, 옛 창고같은거 뒤져보면 50~100여년 전의 물건은 우습고

가끔 150~200년 전의 가구나 장식같은게 튀어나오기도 한다. 일본사람의 특성상 좀 더 그런 면도 있고.

 

이 갑옷은 대체 언제적에 쓰이던 녀석일지. 형태를 봐서는 메이지 유신 전의 갑옷이라 적게 잡아도 150년 이상은 된 듯 보인다.

 

 

 

역사의 숨결을 느낄수 있다는 모토를 중심으로 하는 타카야마이다 보니

기념품 가게에서도 그 점을 중시한 부류가 있다. 저렴함을 포기한 대신에 좀 더 고풍스러운 물건으로 승부를 보는 곳.

 

가벼운 관광객 상대를 하는 이곳 옛 마을 거리에는 그나마 보기 힘든 편이지만

시내 곳곳에 위치한 제대로 된 가게에서는, 5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목재가구점이나 도자기점 등이 위치해 있다.

고급 목재에 결무늬가 보일 정도로 투명한 코팅을 한 히다 슌케이(飛騨春慶)의 나무쟁반이나 젓가락 등은 상당히 고급 기념품.

 

사진의 문 위에 주렁주렁 매달린 녀석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설명할 기회가 있을테니 넘어가기로 한다.

 

 

 

전통 방식으로 염색된 옷과 스카프 등을 판매하는 가게였는데 옷보다는 입구에 위치한 석상에 더 눈갈이 간다.

이 녀석 이름은 모르겠지만 장사할 때 종업원들이 주로 사용하는 두건이 귀엽다.

 

예전 자전거 여행중 소바집에서 바이트를 할 때, 공교롭게도 가게에 남는 두건이 없어서 여행용으로 사용했던 버프를 두르고 일을 했었는데

가게 사람들에게는 그게 오히려 인상에 남았는지, 버프 벗은 모습을 보고는 동일인물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까지 들었던 추억이 생각난다.

 

 

 

풍요로움이 느껴지는 풍경이라 즐겁게 셔터를 누른다.

이렇게 흘러넘치는 물에서는 현대 사회의 '낭비'라는 개념이 떠오르지 않는다는게 풍요로움을 느끼게 한달까.

 

아직 색이 바래지 않은 단풍과 수국이 투명한 물 아래서 반짝이는 모습은, 주먹밥을 더 맛있게 느껴지게 하는 데코레이션인 듯.

한국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망개잎으로 싼 망개떡이란 게 있는데, 의외로 잎으로 감싼 떡이나 주먹밥의 향기는 대단하다.

그냥 장식인줄만 알고 있었지만, 떡이나 밥 안으로 그렇게까지 향기가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감탄했던 적도 있다.

 

 

 

빗물받이도 그렇고, 옛 마을 거리는 조화의 미를 깨트리지 않기 위해 정성을 다한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현대식 건물에 비해 정말로 불편한 점이 많다는 것은 이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역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국가 중요건축물로 지정되어 있는 이곳 거리는, 허가없는 개조, 증축을 하지 않는 대신 정부로부터 유지 보수에 보조금을 받는다.

얼핏 보면, 사람들은 편안함을 포기하고 정부는 자금을 제공해야 하는 쌍방 불편한 방식이지만

이 선례가 잘 지켜졌기 때문에 옛 거리는 그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고 관광객을 끌어모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대단한 것 처럼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1960년대부터 시작된 '옛 거리 보존 프로젝트'는 상상만큼 쉬운게 아니었다.

이게 어떤 식으로 비춰졌나 하면, 유명한 고저택과 달리 이런 집은 사실 당시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흔해빠진 가정집에 불과했고

한창 현대식 가옥이 맹위를 떨치고 있던 때라서 불편하기 짝이 없는 평범한 주택을 뭐하러 유지하느냐가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정부쪽에서도 자금을 투자할 만큼의 가치가 있을지 의심스러워 했고, 가옥 주민들도 낡아빠진 목조건물을 유지하는데 힘들어하고 있었다.

나카센도의 역참마을 중 하나였던 나라이주쿠(奈良井宿)가 총대를 매고, 지원금을 주면 마을이 합심해서 가옥을 보전하겠다고 선언함으로서

시범적으로 옛 가옥의 보존이 이루어졌고, 수십년이 흐른 지금 그 감내의 결과가 이렇게 관광객들의 수치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한국은 종가집의 으리으리한 한옥마을에나 투자하고, 달동네같은 서민의 향기가 남아있는 곳은 그냥 자생적으로 방치하는 수준이었지.

국가 프로젝트로 서민들의 가옥을 보전하려는 시도따위 있지도 않았다. 그 결과는 뭐, 보다시피 일본에서 이런 모습이나 담고 있는 한국인의 모습이고.

 

일본인 특유의 장삿속이라고 생각해 버린다면 그것도 편한 방법이겠지만

이곳에서 실제 생활을 해 본다면, 그들이 희생해야 할 생활의 단편이 결코 작은게 아니라는걸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관광객을 위한 배려가 기본이 되지 않으면 이런 고생하면서 장사를 하고 싶을까.

 

타카야마는 그 점에 있어서는 귀감이 되기에 충분한 도시로, 평범한 관광객뿐만 아니라 장애인들에게도 배려심 높기로 유명한 관광지다.

여지껏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이제껏 올렸던 타카야마의 사진 중에서 지면이 나와있는 녀석들을 유심히 보시길.

관광지구의 거의 모든 인도는 단차가 매우 낮고 완만하게 설계되어 있어서 휠체어로도 어디든 이동할 수 있다.

무료 전동휠체어 대여소도 있고, 마을버스는 모두 휠체어로 올라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휠체어에서 내리지 않고 바로 탑승가능한 대형택시도 상시 대기중이다. 휠체어로 이용할 수 있는 공중화장실도 80개소에 비치중.

사찰 밀집지역을 산책할 수 있는 코스 중에도, 휠체어로 일주가 가능한 길을 따로 만들어서 가이드와 함께 운용한다.

 

타카야마시에서는 '누구에게나 풍요롭고 편안한 사회가 근본적인 사회'라는 모토로, 이런 기획을 '노멀라이제이션'이라고 부르며 실행중이다.

조금 사정이 있어서 장애인들의 관광 난이도에 본능적으로 신경을 쓰고 있는데, 이 타카야마시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장애인 편의도시임에 틀림없다.

 

일본의 지인을 한국으로 초청하는데 항상 진심을 다할수가 없는 이유가 이것이기도 하다. 휠체어를 타는 분이라서.

 

 

 

다리를 넘어가는데 뭔가 이상한 동상이 세워져 있다. 다리가 이만큼 길었다면 요즘 여성들에게 인기 좀 끌었을텐데.

사실 반대쪽 다리에는 팔 대신 다리가 이렇게 긴 쌍동이같은 녀석의 동상도 있었다.

요즘엔 다리길이뿐만 아니라 얼굴도 많이 보니, 둘 다 인기는 별로 없을지도.

 

예전에 이런 느낌의 일본 요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나는데, 이름까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뭔가 지역 특성과 결부된 듯한 요괴였는데 워낙 오래전에 들었던 터라서.

동상 밑에 설명문이 적혀있었다는 건, 훗날 돌아와서 사진작업을 할 때가 되어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제 슬슬 한끼 먹어야 되겠다 싶어서 주변에 보이는 고풍스러운 가게로 들어간다.

히다 소고기 메뉴도 팔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 쪼그만 양에 그만한 돈을 투자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그냥 어디서든 맛있게 먹는 라멘을 먹기로 한다. 항상 그렇지만 볶음밥 세트는 가격이 조금 싸니까 그걸로 주문.

 

히다 라멘도 뭐, 이쪽 지방에서는 맛있다고 광고를 하고 있지만 사실 이름을 떨치는 유명 라멘에 비할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식사시간이 지나서인지 관광지에서 살짝 떨어져 있어서인지, 날씨가 더워서 이런거 먹는 사람이 별로 없는건지

아니면 최악의 경우 맛이 없는 가게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비교적 넓은 가게 안에는 나를 포함 서너 명의 손님밖에 없었다.

본인이야 널널하게 식사하니 좋긴 하지만, 음식점이란 건 손님이 너무 없으면 괜스레 불안해지는 곳이기는 하다.

 

 

 

운이 좋았다고 할까, 좀 전에 다리에서 봤던 요괴들의 설명이 이곳에 붙어있었다.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서 알 수 있었다. 테나가(手長)와 아시나가(足長) 라는, 지극히 말 그대로의 이름이었으니까.

 

지방에 따라 전승이 조금씩 달라서, 보통은 손과 발의 길이가 산봉우리 사이를 걸칠 정도라고 거대한 거인 일족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쪽 이야기에서 이 두녀석은 사람들이나 상선을 습격해 먹어치우는 나쁜 거인으로 나오는데

이곳 타카야마의 테나가 아시나가는 그 거인 이야기와는 관계없이 신선의 일종으로 알려져 있다고.

 

긴 다리로는 기린처럼 높은 곷의 열매를 따고, 긴 팔로는 강속의 물고기를 잡는다고 해서 산과 바다의 신으로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아마도 다른 지방의 흉폭한 거인 이야기를 듣고 자란 사람들은 타카야마의 신선이 어색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조금 기다리니 라멘 세트가 나온다.

 

타카야마 라멘은 간장을 베이스로 하는 쇼유라멘이 주가 되는데, 인상적인 특징은 별로 없지만

면이 조금 꼬들꼬들하고 살짝 가는게 특징이라고 한다. 라멘을 워낙 좋아해서 뭐든 맛있게 먹는 본인이지만

뭐랄까, 특산품으로 자랑할만한 맛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지극히 평범한 라멘.

올려져 나오는 돼지고기는 상급이라 할 수 없고, 나머지 재료도 그냥 라멘집이라면 어디서든 나올만한 레벨.

 

히다규가 유명한 곳이다 보니 돼지고기 챠슈 대신 히다규을 올린, 조금 비싼 라멘도 있었지만

그건 맛의 조합을 중시했다기 보단, 그냥 유명 토산품의 명성에 살짝 발을 얹어보려는 시도 이상의 의미를 주기 힘들다.

기대보다 훨씬 맛있어서 눈이 확 뜨이는 그런 행복한 경험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맛없다고 할 정도는 아니어서 그럭저럭 배를 채웠다.

 

 

 

세트로 나오는 볶음밥 역시 맛 없는 수준은 아니어서 다행이다.

경험상으로, 일본의 라멘가게에서 주의해야 할 곳은 라멘이 아니라 세트로 딸려나오는 볶음밥이라고 생각한다.

 

라멘이야 워낙 상향평준화 되어서 적당히들 먹을 만 하지만 이 세트 볶음밥은 의외로 레벨차이가 크다.

한국의 중국요리점에서 나오는, 낡은 기름냄새 팍팍 풍기는 저질 볶음밥은 제외하고

오리지날 중국식 볶음밥인 챠오판(炒飯)은, 요리사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첫 번째 척도로 알려져 있다.

불을 다루는 능력이 곧바로 볶음밥의 맛으로 직결되기 때문에, 어떤 요리보다 우선적으로 실력이 드러나는 요리.

 

일본에서 볶음밥을 의미하는 챠항(チャーハン)은 챠오판을 그대로 일본식으로 읽은 것이니

요리방법도 거의 동일하다. 대량으로 만들기는 쉬워서 라멘과 세트메뉴로 자주 등장하긴 하지만

대량으로 만들기가 쉽다고 해서 맛있게 만들기도 쉽다는 말은 아니라, 사실 라멘보다 엉성한 볶음밥이 나올때가 종종 있다.

 

가끔씩 정말 최악인 경우엔, 미리 만들어놓아 거의 미지근에 가깝게 식어버린 볶음밥이 나와버릴 때도 있어서

일본의 음식점에서 좀처럼 불만을 갖지 않는 나로서도 그런 경우엔 정말 기분이 팍 상해버리곤 한다.

 

이곳의 볶음밥은 그냥 평균점. 이 정도면 욕 먹을정도는 아니다. 라멘 국물에 어울릴만큼 따끈따끈하게 갓 만들어 나온것만 해도 합격.

 

 

 

식사를 마치고 나도 뭔가 개운하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푸른 하늘에게 위로를 받고는 있지만 워낙에 덥다보니

그냥 숙소에서 에어콘이나 틀고 싶다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어차피 많이 둘러볼 생각은 없었고 호텔로 향하는 길에 목표인 코쿠분지가 있기 때문에 조금만 더 힘내볼 요량으로 골목 골목을 누빈다.

 

이곳 타카야마에서는 그럭저럭 이름이 알려진 곳인데, 의외로 잘 보이지가 않아 난감해 하는 도중

전혀 이름난 사찰같지 않은 형태로 박혀있는 모습을 보고 살짝 놀란다. 사찰의 고즈넉함이라던가 주위 공간의 넉넉함이라던가가 결여되어 있는 모습이라서.

일단 담벼락에 철썩 붙어있다고 표현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밀집된 주택가 사이에 자그마니 자리잡고 있는 코쿠분지의 대문은

오히려 이제까지의 일본 사찰이 가졌던 자연 친화적이고 탈세속적인 분우기와 완전히 동떨어진 느낌이라서 오히려 신선하기까지 하다.

 

부족한 공간에 원래부터 작게 지어진 절인지, 중생과 함께 어울리는것이 참된 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분파인지 모르겠다.

 

 

 

절에 들어가기 전에도 눈길을 끄는 것들이 있다. 점점 이곳이 절인지 신사인지 헷갈리기 시작하고는 있지만.

처음엔 살짝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던 새빨간 물체가 줄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모습은

무언가를 연상시키기엔 너무 데포르메 되어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내 상상력이 무뎌진 걸까.

 

묘하게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구분하기 힘든 녀석들이 몇몇 있는데

이건 머리로 추정되는 흰 부분이, 좀 더 새끼줄 쪽으로 확 들어가 있는지, 반대쪽으로 튀어나와 있는지에 따라서 연상점이 바뀌는 느낌이다.

머리가 줄 쪽으로 들어가 있다면, 이것은 줄에 매달려 있는 아기 원숭이같은 느낌이지만

머리가 웅크린 몸 밖으로 튀어나와 있다면 이건 무슨 고문이나 받으며 등뒤로 손발이 묶여 매달린 사람의 모습처럼 보이니.

 

 

 

물론 이 녀석은 타카야마의 마스코트인 사루보보(サルぼぼ)라고 한다.

이 지역 방언으로 '보보'란 아기를 뜻하는데, 그러니 뜻은 새끼원숭이라는 뜻.

일본어의 어순을 그대로 표현해버리는 바람에 가끔씩 원숭이 새끼라고 부를때도 있지만, 어감이 좀 이상해서 자제하려고 한다.

 

일본원숭이가 번식기때 엉덩이 빨갛게 부풀어 오르는 특징이 있어, 이곳 사루보보 인형도 이렇게 새빨간게 아닌가 싶다.

굉장히 단순화 되어있어 예술적인 면에서는 별로 가치가 없지만, 독특함으로는 확실히 인상을 남길만한 녀석이니

혹시라도 귀엽게 보이는 사람은 하나쯤 구매해 가도 좋지 않을까 싶다.

 

그와 별개로, 여기 매달려 있는 녀석들은 전부 에마처럼 절에 공양된 녀석으로, 지키는 사람도 없어 그냥 떼어가도 제지받지 않을듯 하다.

몇천원 하지 않는 기념품을 훔치는 것 보다야 그냥 구입해 주는게 낫겠지만, 한국의 좀비근성을 여지없이 드러내 준 G2 사건을 생각하니

나쁜 방향으로의 결과가 괜시리 머릿속에 떠오른다. 사실 이런 기념품 급의 인형들이 무방비하게 널려있는데, 도난당하지 않는 것도 신기한 점이긴 하다.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녀석들도, 유심히 살펴보면 조금 귀엽게 느껴지지 아니할 정도라고도 말할 수 없지는 않을 듯한 기분이 들지 않는것도 아니다.

이곳에 와서야 이 녀석들 이름이 사루보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본인이 서브컬쳐나 염세적인 분야에 좀 정통하다보니

사루보보라는 이름을 들으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게 미국의 애니메이터 트레이 파커가 제작한 '사우스 파크'의 노래 한 곡이다.

 

선행학습의 단점이라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는데, 'Let's Fighting Love' 라는 인상적인 그 노래는

사우스 파크라는 애니메이션이 어떤 것인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입에 담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사실에 어렵지 않게 공감이 갈 것이다.

그 노래의 가사중에 사루보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지극히도 '사우스 파크'적인 느낌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차마 여기에 그 노래의 가사를 소개할 수는 없다. 본인은 이런 트래쉬 컬쳐에 매우 관대한 편이라 즐겁게 청취하긴 하는데

이걸 부담스러워 하는 일본인이 있다면 굳이 그에게 들어보라고 권유하지는 않을테니까.

 

개인적 감상이야 둘째치고, 고지식하기 그지없는 일본의 잘나신 분들 덕분인지, 사우스 파크의 그 노래가 들어간 에피소드는 일본서 방송되지 않았다.

 

 

 

사루보보에 관한 천박한 농담은 그만하고, 이곳 코쿠분지의 정체성이란게 묘하긴 하다.

신사에나 걸려있을 법한 지역 마스코트가 불상과 함께 진열되어 있는 모습이란, 가볍게 생각하면 무거운 종교 색채가 빠진듯 해서 나쁘진 않다.

아마 매일 꽃다발을 꽂아두는 사람이 있는 듯, 아직 시들지 않은 조그만 꽃다발이 차분하게 걸려 있다.

북적이는 관광지 한가운데 불편해 보일 정도로 근접해 있는 절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게 아닌가 싶다.

 

 

 

불상 옆에 놓인 조그만 인형이 매우 단아하다. 사루보보다 이 녀석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건 나뿐일까.

동자상이 갖는 슬픈 과거까지 재현하려고 한 것 같진 않고, 그냥 불상 옆에서 포근히 휴식중인 이미지가 강하다.

가지런히 모은 손바닥과, 자애로움을 간직한 실눈과 수줍은 입술까지. 참 잘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나저러나 주위 분위기를 봐선, 코쿠분지 라는 절이 이름만큼 뭔가 거창하고 엄중한 곳은 아닌듯 해서 어깨에 힘이 빠진다.

호텔로 돌아가기 전에 잠깐 숨 돌리는 의미로 찾아온 것이라, 친근해 보이는 첫인상이 그리 나쁘지 않다.

공간이 거의 없어보이는 저 너머에는 뭐가 있을지 살짝 기대하며 소박한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