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를 다 먹고 짐을 챙긴 후 나오는데 문득 이 아이스크림 생각이 난다.
삿포로 시내의 호텔이나 역 등에서 제공하는 정보지에는 여러가지 음식점 할인 쿠폰이 들어있는데
대부분 소소한 할인이나 단체 몇 인분 이상 주문시 서비스로 딸려나오는 음식 등이라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반드시 들르는 이곳 비어가든의 후식 무료제공 티켓은 꽤나 흥미를 동하게 만드는 녀석이었다.
티켓을 제시하면 홋카이도산 우유를 사용한 아이스크림을 하나 준다고 해서 입가심으로 그만.
홋카이도의 이름있는 소프트크림은 매우 농후하고 부드러운 우유향기가 입안 가득히 퍼져서 황홀한데
비어가든은 일단 맥주 전문이라 그런지 상급 소프트크림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해서 살짝 아쉽긴 했다.
이번엔 겨울이라 그런지 이걸 먹을 수 있는 무료 티켓을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아무리 겨울이라도 징기스칸으로 텁텁해진 입을 헹구는데 참 유용할 텐데 아쉬울 따름.
물론 돈 주고 사먹을 수는 있다. 이곳은 징기스칸과 맥주가 무제한이지만 따로 주문할 수 있는 해산물, 소시지 디저트 등이 마련되어 있으니까.
한 번 무료로 먹고 나면 좀처럼 지갑을 열기가 힘든 게 나같은 가난뱅이의 습성일까.
밖으로 나오니 눈 내리는 모습이 더욱 심상치 않다.
배가 너무 불러서 버스 타고 돌아가는 건 소화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숙소까지 걸어갈까 싶은데
여름이라면 몰라도 지금 이 눈을 뚫고 갈 수 있을지 살짝 겁이 난다.
그래도 여기서 징기스칸을 먹고 나면 걸어거 돌아가는게 연례행사처럼 몸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눈 때문에 그 익숙함을 깨트리고 싶지는 않아 각오를 단단히 하고 밖으로 나선다.
비어가든을 찾은 사람 외에는 밖에 돌아다니는 모습 보기가 힘들 정도로 다들 꽁꽁 틀어박혀 있는 모양.
나보다 조금 먼저 비어가든에서 나온 관광객들 역시 비슷한 기분인지 꺅꺅거리며 눈 속을 걸어가는 중이다.
눈 내리면 발광하는 강아지들 모습이 이런 광경속에서는 나름 이해가 가는 기분도 든다.
눈 때문에 시야가 10m 될까말까 한 풍경은 원래 서식지에서는 결코 구경할 수 없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눈 속에 파묻힌 공중전화 박스를 보니 무심코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엄습하기도 한다.
저러다가 눈 무게때문에 유리창 깨지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홋카이도 도착부터 오늘까지 눈이 내리지 않은 날은 하루도 없었지만 이 정도의 폭설은 처음이다.
눈이 많이 올수록 좋다는 눈축제 역시 이런 눈이라면 관람이 어려웠으리라 생각할 정도로 쏟아붓는다.
양고기와 맥주를 너무 많이 집어넣은 탓인지 슬슬 아랫배에 위험신호가 감지되고 있지만
눈을 못 뜰 정도로 눈이 쏟아질수록 기분은 점점 흥분 상태에 돌입하고 있다. 장관은 장관이다.
물론 여행 중이니 이런 사치스러운 기분을 부릴 수 있는 것이겠지만. 출근길 시민이나 강원도 부대 장병들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풍경일 듯.
평소엔 그닥 볼 것 없는 주거지역이지만 눈이 내리면 뭐든 신기한 모습으로 변한다.
자동차도 거의 다니지 않아 주변이 모두 생크림으로 덮힌 듯한 분위기.
혼자 서 있으니 왠지 발광을 한 번 해보고 싶은 기분이지만 카메라의 안위도 걱정될 뿐더러 속에서 힘찬 고동을 준비중인 찌꺼기들이 위험하다.
다행히도 아무리 눈이 많이 와서 시야가 흐려져도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그냥 계속 직진만 하다보면 역에 도착한다.
자전거 여행으로는 결코 찾을 일이 없는 겨울 홋카이도의 모습을 10일동안 뇌리 깊숙히 새겨놓고 갈 기회를 마련해 주니
마음 속으로는 얼마든지 더 내려보라고 응원을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바람까지 불어대서 추위가 뼛속까지 사무친다는 점은 좀 힘들었지만.
맥주와 양고기가 열을 만들어주고 있어서 그나마 서럽다는 생각까지 들지는 않았다.
슬슬 서두르지 않으면 억압에 항거하겠다고 뱃속이 단호하게 주장중인데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가지 못한다고 가던 길에 놓인 북오프가 또 발걸음을 잡는다.
그러고보니 잊고 있었지만, 사실 비어 가든에 갈 때마다 돌아오는 길에 이곳을 들른 추억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삿포로 중심가쪽에도 북오프가 있긴 한데 사람이 항상 빡빡해서 책 구경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꼭 이 지점을 찾곤 했다.
나만 그런 건 아닌지 좀 전까지 코뺴기도 보이지 않던 차들이 이 앞에 포진중이다. 눈 내리고 밖에서 돌아다닐 수 없으니 책이나 읽으러 오는 듯.
어차피 괄약근도 간당간당하니 저기 들어가서 볼일이나 보고 책을 좀 읽으면 금상첨화겠다 싶어 발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곳은 화장실이 수리중이니 사용할 수 없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가는 날이 장날인 듯.
이마에 땀까지 송글송글 맺히고 있어서 이건 책 구경 따위의 여유를 부릴 수 없을 것 같다.
일단 밖으로 나가 살짝 옆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는 편의점에 들어간다.
밖에서 쏟아지는 눈과 비교해도 결코 밀리지 않는 기개로 배출을 마친 후 미안한 마음에 간식거리라도 하나 사 들고 나온다.
다시 북오프로 들어가 편안해진 배를 어루만지며 가지런지 늘어선 수많은 책을 황홀하게 구경하다가 적당히 몇 권 구입한다.
배가 홀가분해지니 마음의 여유도 생겨서 좀 더 느긋한 기분으로 걸어가니, 역에 도착할 때쯤엔 다시 눈이 그쳐가고 있다.
이 눈이 내일 아침까지 계속 내린다면 귀국행 비행기도 걱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는데 그나마 다행.
사실 이렇게 눈이 쏟아져도 치토세 공항은 항상 비행기 이착륙으로 정신없이 바쁘기 때문에 별로 걱정스럽지도 않다.
여행의 마지막 밤이라는 아쉬움에 TV만 바라보며 좀처럼 잠을 청하지 못한다.
돌아가면 또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리겠지만
이번 여행은 모든 코스에서 원하는 것 이상의 만족감을 달성할 수 있었기에 그런 사치스러움은 조금 경감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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